웃빨라완나 장로니의 게송

아름다움과 기적을 앞세운 마라의 위협에 두려움 없는 해방으로 답합니다.

“우리 두 사람은 어머니와 딸이면서도 한 남편을 함께 섬기는 아내들이었습니다. 그 사실에 놀랍고 소름 끼치는 절박감이 내게 일어났습니다.”

“Ubho mātā ca dhītā ca, mayaṁ āsuṁ sapattiyo; Tassā me ahu saṁvego, abbhuto lomahaṁsano.

쿳다까 니까야 Thig 11.1 웃빨라완나 장로니의 게송 (Uppalavaṇṇātherīgāthā)

배경

웃빨라완나는 어머니와 딸이면서 한 남편의 두 아내였던 관계 충돌에서 놀람과 소름 끼치는 절박감이 일었다고 노래를 열고, 다음 게송은 그 원인을 가시 많은 감각적 욕망으로 지목합니다. 두 사람이 어머니와 딸인 동시에 공동 아내였다는 관계의 충돌이, 놀랍고 털이 곤두서는 절박감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감각적 욕망이 가족의 경계까지 뒤엉키게 한 현실을 보며 그 삶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를 깊이 느낍니다.

묵상

“어머니와 딸이면서도” 한 남편을 섬겼다는 관계의 충돌을 읽으며, 개인을 탓하기보다 사람들을 그런 자리에 묶는 욕망의 구조를 볼 수 있나요? 가족 이야기가 불편하면 판단 없이 지나가거나 이 대목을 덮어도 될까요?

더럽고 악취 나며 가시가 수없이 많은 감각적 욕망은 가증스럽습니다! 그 욕망 때문에 어머니와 딸인 우리가 한 남편의 아내들이 되었습니다.

Dhiratthu kāmā asucī, duggandhā bahukaṇṭakā; Yattha mātā ca dhītā ca, sabhariyā mayaṁ ahu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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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게송의 소름 끼치는 관계를 더러움·악취·수많은 가시라는 욕망의 성질로 설명하고 같은 결과를 되짚은 뒤, 다음에는 그 위험과 출리의 안전을 대조해 출가합니다. 욕망을 더러움·악취·많은 가시로 꾸짖고, 그 안에서 어머니와 딸이 공동 아내가 된 결과를 다시 밝힙니다. 즐거움처럼 보이던 욕망이 관계를 찌르고 혼란스럽게 만든 해로운 성질을 분명히 봅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가시가 수없이 많은 감각적 욕망”입니다.

묵상

“가시가 수없이 많은 감각적 욕망”이라는 비유에서, 매력과 상처가 동시에 있는 대상은 어떻게 보이나요? 가시를 알면서도 끌리는 자신을 비난하지 말고 거리를 조절하거나, 아직 놓을 수 없다면 보호 장치를 마련해도 될까요?

감각적 욕망의 위험을 보고 출리를 안전한 곳으로 보았습니다. 라자가하에서 집을 떠나 집 없는 삶으로 출가했습니다.

Kāmesvādīnavaṁ disvā, nekkhammaṁ daṭṭhu khemato; Sā pabbajjiṁ rājagahe, agārasmānagāriy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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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위험과 출리의 안전을 서로 마주 놓은 판단이 라자가하에서 집을 떠나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다음부터 출가 뒤 얻은 여섯 가지 높은 앎을 둘로 나누어 열거합니다. 욕망에서는 위험을, 출리에서는 안전을 보았다는 대조가 라자가하에서의 출가로 이어집니다. 욕망을 더 잘 충족하려 하지 않고 그것의 지배에서 나오는 길을 참된 피난처로 선택합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출리를 안전한 곳으로”입니다.

묵상

“출리를 안전한 곳으로” 보았다는 말에서 떠남이 도피인지 보호인지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지금 해로운 자리와 거리를 두는 선택을 살피거나, 떠나기 안전하지 않다면 도움을 받을 계획만 세워도 될까요?

나는 전생의 삶을 알고 천상의 눈은 맑아졌습니다. 남의 마음을 아는 앎을 얻었고 천상의 귀도 맑아졌습니다.

Pubbenivāsaṁ jānāmi, dibbacakkhu visodhitaṁ; Cetopariccañāṇañca, sotadhātu visodhi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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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가하에서 출가한 뒤 전생의 기억·천상의 눈·남의 마음을 아는 앎·천상의 귀라는 네 능력을 열거하고, 다음 게송은 신통과 번뇌 소멸을 더해 여섯을 완성합니다. 전생을 아는 앎·천상의 눈·남의 마음을 아는 앎·천상의 귀라는 네 높은 앎을 차례로 열거합니다. 자기 욕망에 갇힌 좁은 시야를 벗어나 존재의 흐름과 다른 마음을 아는 폭넓은 통찰이 열립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남의 마음을 아는 앎”입니다.

묵상

네 앎 가운데 “남의 마음을 아는 앎”이 눈에 띈다면, 실제 일상에서는 추측과 경청을 어떻게 구별할까요? 상대 마음을 안다고 단정하기보다 물어 보거나, 묻기 어렵다면 모른다는 여백을 남겨 둘 수 있을까요?

신통을 직접 실현했고 번뇌의 소멸에 이르렀습니다. 여섯 가지 높은 앎을 모두 실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루었습니다.

Iddhīpi me sacchikatā, patto me āsavakkhayo; Chaḷabhiññā sacchikatā, kataṁ buddhassa sāsan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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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의 네 높은 앎에 신통과 번뇌의 소멸을 보태 정확히 여섯을 이루고 가르침의 완수를 선언하며, 다음에는 그 신통을 네 마리 말의 수레로 눈앞에 보입니다. 신통과 번뇌의 소멸을 앞의 네 앎에 더해 정확히 여섯 높은 앎을 이루고, 가르침을 완수했다고 합니다. 특별한 능력의 획득보다 번뇌를 끝내는 앎이 완결점이며, 그때 스승이 가르친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여섯 가지 높은 앎”입니다.

묵상

“여섯 가지 높은 앎”을 모두 갖췄다는 결말을 자신과 비교하지 않고 한 수행자의 증언으로 들을 수 있나요? 여섯을 이루려 하기보다 지금 필요한 이해 하나만 고르거나, 성취 목록에서 시선을 떼어도 될까요?

“나는 신통으로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만들어 냈습니다. 한결같으며 세상을 지켜 주시는 부처님의 두 발에 절했습니다.”

Iddhiyā abhinimmitvā, caturassaṁ rathaṁ ahaṁ; Buddhassa pāde vanditvā, lokanāthassa tād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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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앎 가운데 신통을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만들어 내는 장면으로 구체화하고, 그 능력을 과시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부처님의 두 발에 절한 뒤 마라와의 문답으로 넘어갑니다. 신통으로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만든 뒤, 한결같고 세상의 보호자인 부처님의 발에 절했다고 합니다. 성취한 능력을 자신을 과시하는 데 두지 않고 해방의 길을 열어 준 스승께 존경을 표하는 데 씁니다.

묵상

신통으로 만든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가지고도 끝은 절하는 장면이에요. 능력이 커질수록 무엇 앞에 겸손해야 할까요? 내 재능 하나를 누군가에게 유익하게 쓰거나, 오늘은 쓰지 않고 쉬게 두어도 될까요?

“꽃이 활짝 핀 사라나무에 다가가 그대 혼자 나무 아래 서 있습니다. 곁에는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리석은 여자야, 불량한 자들이 두렵지 않습니까?”

“Supupphitaggaṁ upagamma pādapaṁ, Ekā tuvaṁ tiṭṭhasi sālamūle; Na cāpi te dutiyo atthi koci, Bāle na tvaṁ bhāyasi dhuttakān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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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신통 장면 뒤 마라는 활짝 핀 사라나무 아래 홀로 선 웃빨라완나를 지목해 동행 부재와 불량한 이들의 위협으로 겁주고, 다음 게송에서 그녀는 십만 명도 두렵지 않다고 답합니다. 꽃 핀 나무 아래 혼자 있고 동행이 없다는 두 사실을 강조해, 어리석다고 부르며 불량한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마라는 홀로 있는 여성의 취약함을 들추어 공포를 일으키고 수행의 평정을 흔들려 합니다.

묵상

꽃 핀 사라나무의 아름다움과 “불량한 자들이 두렵지 않습니까?”라는 위협이 한 장면에 겹쳐요. 혼자 있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말을 경계할 수 있나요? 실제 위험이 있다면 담대함을 시험하지 말고 안전한 곳과 도움을 먼저 택할까요?

“이와 같은 불량한 자들이 십만 명이나 떼 지어 온다 해도, 내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나는 떨지도 않습니다. 마라여, 그대 혼자서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Sataṁ sahassānipi dhuttakānaṁ, Samāgatā edisakā bhaveyyuṁ; Lomaṁ na iñje napi sampavedhe, Kiṁ me tuvaṁ māra karissase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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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서 두렵지 않느냐는 위협에 웃빨라완나는 불량한 자 십만 명이 와도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떨지 않는다고 답하며, 뒤에서는 사라짐과 몸 안·눈썹 사이 이동으로 마라의 시야를 압도합니다. 불량한 자가 정확히 십만 명 모인다는 극단적 조건에도 털끝이 움직이거나 몸이 떨리지 않는다고 두 가지를 부정합니다. 마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다스린 이는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마라를 되묻습니다.

묵상

“십만 명”이 와도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과장된 조건은 내적 두려움 없음의 크기를 보여 줘요. 현실에서는 두렵지 않음을 증명하지 않고 피하거나 도움을 청해도 된다는 선택을 지킬 수 있을까요? 지금 안전부터 확인할까요?

나는 여기서 사라질 수도 있고 그대의 배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대의 두 눈썹 사이에 서 있어도 그대는 서 있는 나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Esā antaradhāyāmi, kucchiṁ vā pavisāmi te; Bhamukantare tiṭṭhāmi, tiṭṭhantiṁ maṁ na dakkha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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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만 명의 위협도 두렵지 않다고 한 데 이어 사라지기·마라의 배 속 들어가기·두 눈썹 사이에 서기를 열거해 보이지 않는 신통을 드러내고, 다음에는 그 바탕이 마음의 숙달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라짐·배 속에 들어감·눈썹 사이에 섬이라는 세 능력을 들고, 바로 앞에 서도 마라가 보지 못한다고 부정합니다. 신통의 예를 들어 마라가 자신을 통제하거나 위협할 힘이 없음을 단호하게 보여 줍니다.

묵상

“그대의 두 눈썹 사이”에 서도 보지 못한다는 이미지는 보는 자의 한계를 뒤집어요. 눈앞에 있어도 놓치는 사람이나 사실이 있나요? 억지로 통찰하려 하지 말고 한 번 더 살피거나, 보이지 않는 것은 모른다고 두어도 될까요?

나는 내 마음을 완전히 다스리고 신통의 바탕들을 훌륭히 닦았습니다. 여섯 가지 높은 앎을 모두 실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루었습니다.

Cittamhi vasībhūtāhaṁ, iddhipādā subhāvitā; Chaḷabhiññā sacchikatā, kataṁ buddhassa sāsanaṁ.

쿳다까 니까야 Thig 11.1 웃빨라완나 장로니의 게송 (Uppalavaṇṇātherīgāth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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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가 볼 수 없는 신통의 장면을 마음의 완전한 숙달과 신통의 바탕 계발로 설명하고 다시 여섯 높은 앎을 확인한 뒤, 다음 게송은 마라가 쾌락이라 부른 것을 칼과 형틀로 뒤집습니다. 마음의 숙달과 신통의 바탕 계발을 밝힌 뒤, 정확히 여섯 높은 앎과 가르침의 완수를 선언합니다. 바깥의 위협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힘이 해방의 토대이며, 닦인 능력은 번뇌 없는 앎으로 완성됩니다.

묵상

“내 마음을 완전히 다스리고”라는 말을 감정을 억누르는 일보다 신통의 바탕을 오래 닦은 결과로 읽어 볼까요? 지금 마음을 통제하려 하기보다 안전한 방향으로 부드럽게 안내하거나, 그대로 두고 기다려도 될까요?

감각적 욕망은 칼이나 창과 같고 다섯 무더기는 욕망이 내리치는 형틀입니다. 그대가 ‘감각적 욕망’이라 일컫는 그것은 이제 나에게 아무 즐거움도 아닙니다.

Sattisūlūpamā kāmā, khandhāsaṁ adhikuṭṭanā; Yaṁ tvaṁ ‘kāmaratiṁ’ brūsi, ‘āratī’ dāni sā mama.

쿳다까 니까야 Thig 11.1 웃빨라완나 장로니의 게송 (Uppalavaṇṇātherīgāthā)

배경

신통과 여섯 앎을 밝힌 웃빨라완나는 욕망을 칼·창에, 다섯 무더기를 형틀에 비유해 마라의 “쾌락”을 아무 즐거움도 아니라고 뒤집습니다. 뒤의 패배 선언은 앞서 셀라가 온전히 한 같은 후렴이므로 이 단호한 거절에 그 결말을 이어 읽습니다. 욕망을 칼과 창에, 무더기들을 그 칼이 내리치는 형틀에 비유하고, 상대가 즐거움이라 부른 것을 즐겁지 않다고 뒤집습니다. 욕망의 달콤한 겉모습보다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결과를 보아 유혹의 이름에 속지 않습니다. 뒤의 한 게송은 이 문헌에서 앞서 온전히 실은 같은 게송을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문장을 거듭 적지 않았으므로, 앞의 온전한 게송과 이어 읽으십시오.

묵상

상대가 즐거움이라 부른 것을 “아무 즐거움도 아닙니다”라고 자기 경험으로 거절하는 힘이 보여요. 남이 좋다고 정한 것에 내 감각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나요? 말하기 위험하면 속으로 선을 긋거나 자리를 벗어나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