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촉에서 의식까지, 순환을 매듭짓다

접촉과 정신·물질과 의식이 서로를 조건 짓는 순환 구조를 증명하여 앞부분을 마무리합니다.

‘접촉이 느낌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눈의 접촉이나 귀의 접촉이나 코의 접촉이나 혀의 접촉이나 몸의 접촉이나 마음의 접촉이나, 어떤 접촉도 전혀 없다고 하자. 이렇게 접촉이 전혀 없어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느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접촉이니라.’

‘Phassapaccayā vedanā’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Phass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ṁ sabbathā sabbaṁ kassaci kimhici, seyyathidaṁ— cakkhusamphasso sotasamphasso ghānasamphasso jivhāsamphasso kāyasamphasso manosamphasso, sabbaso phasse asati phassanirodhā api nu kho vedanā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vedanāya, yadidaṁ phass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18장에서 갈애로 수렴한 두 사슬이 다시 하나로 합쳐진 지점에서, 이제 경은 4~8장에서 다루었던 원래 사슬로 돌아가 계속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절은 그 재개의 첫 증명으로, 느낌보다 먼저 접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8장의 느낌 증명과 똑같이 여섯 감각 문으로 나누어 보입니다. 여기서부터 22장까지는 접촉·정신과 물질· 의식이라는, 2장 문답의 마지막 세 단계를 증명합니다. 20~22장의 증명은 지금까지와 달리 '전혀 없다고 하자'는 단순한 가정을 넘어서는 더 정교한 논증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몸의 어느 한 감각이라도 완전히 닫혀 있다면 그 문으로는 어떤 느낌도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의 감각 하나를 예로 들어 떠올려 볼 수 있나요? 지금 잘 안 떠올라도 괜찮아요.

‘정신과 물질이 접촉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아난다여, 그것이 어떻게 그러한지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정신이라 불리는 무리를 알아보게 하는 모습과 특징과 표상과 가리킴, 그것이 전혀 없다면, 물질이라 불리는 무리에서 이름을 통한 접촉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Nāmarūpapaccayā phasso’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tadānanda, imināpetaṁ pariyāyena veditabbaṁ, yathā nāmarūpapaccayā phasso.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nām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tesu liṅgesu tesu nimittesu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rūpakāye adhivacanasam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접촉의 조건이 정신과 물질임을 증명하는 대목으로, 앞선 증명들과 논증 방식이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그것이 전혀 없다면'이라고 단순히 존재 자체를 가정했다면, 여기서는 정신을 정신이라고 '알아볼 수 있게 하는' 모습·특징·표상·가리킴 네 가지가 없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묻습니다. 곧 인식되고 지칭될 수 없는 정신은 물질 쪽에서도 '이름을 통한 접촉'(생각이나 개념을 매개로 한 접촉)을 성립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접촉이 성립하려면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더 근본적인 조건을 짚는 논증입니다.

묵상

어떤 대상을 '이것'이라고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과 진짜로 마주쳤다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이름을 몰라 스쳐 지나간 것이 있다면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물질이라 불리는 무리를 알아보게 하는 모습과 특징과 표상과 가리킴, 그것이 전혀 없다면, 정신이라 불리는 무리에서 부딪힘을 통한 접촉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정신이라 불리는 무리와 물질이라 불리는 무리를 알아보게 하는 모습과 특징과 표상과 가리킴, 그것이 전혀 없다면, 이름을 통한 접촉이든 부딪힘을 통한 접촉이든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rūp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pe…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nāmakāye paṭighasam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Yehi, ānanda, ākārehi …pe… yehi uddesehi nāmakāyassa ca rūpakāyassa c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pe…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adhivacanasamphasso vā paṭighasamphasso vā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앞 절과 반대 방향, 그리고 둘을 합친 경우까지 잇달아 확인하는 대목입니다. 물질을 알아볼 수 없다면 정신 쪽에서도 '부딪힘을 통한 접촉'(감각 기관과 대상이 실제로 부딪히는 접촉)이 성립하지 않고, 정신과 물질 둘 다 알아볼 수 없다면 두 접촉 어느 쪽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원문은 이 되풀이되는 목록(모습·특징· 표상·가리킴)을 '…pe…'라는 표시로 줄여 적었는데, 이는 후대 편집자가 아니라 경 자체에 새겨진 되풀이 표시입니다. 여기서는 그 표시가 가리키는 내용을 그대로 풀어 옮겼습니다.

묵상

마음과 몸 가운데 어느 한쪽만으로는 세상과 온전히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어떤가요? 둘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아난다여, 정신과 물질을 알아보게 하는 모습과 특징과 표상과 가리킴, 그것이 전혀 없다면, 접촉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접촉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정신과 물질이니라.’

“Yehi, ānanda, ākārehi …pe… yehi uddesehi nāmarūp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pe…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phassassa, yadidaṁ nāmarūp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세 단계로 나누어 확인한 논증을 마무리하는 결론입니다. 이름을 통한 접촉이든 부딪힘을 통한 접촉이든, 결국 정신과 물질을 함께 알아볼 수 있어야 접촉 자체가 성립한다는 것이 최종 결론입니다. 이로써 접촉의 조건이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이 확정되고, 경은 다음 21장에서 정신과 물질의 조건인 의식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증명이 유난히 정교했던 것은, 다음 두 장에서 다룰 의식과 정신·물질의 순환 관계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묵상

무언가와 만났다고 느끼려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까요? 서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스쳐 간 만남이 있었다면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의식이 정신과 물질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아난다여, 그것이 어떻게 그러한지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다여, 의식이 어머니의 태에 내려오지 않는다면, 정신과 물질이 어머니의 태에서 엉기어 이루어지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tadānanda, imināpetaṁ pariyāyena veditabbaṁ, yathā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ṁ.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ṁ na 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ṁ mātukucchismiṁ samuccissathā”ti? “No hetaṁ, bhante”.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의식이 정신과 물질의 조건임을 보이는 이 증명은 세 가지 태내 발달의 장면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절은 그 첫 장면으로, 의식이 애초에 어머니의 태에 내려오지(자리 잡지) 않는다면 정신과 물질이 엉기어 몸을 이루는 일 자체가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을 보입니다. 이는 앞선 증명들의 추상적인 '전혀 없다고 하자'는 가정과 달리, 실제 생명이 잉태되는 구체적인 장면을 빌려 조건 관계를 보여 주는 방식입니다.

묵상

몸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가장 첫 순간에 이미 무언가(의식)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금 나의 몸에 대해 떠올려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답을 정하지 않고 그저 떠올려 보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의식이 어머니의 태에 내려온 뒤 벗어나 버린다면, 정신과 물질이 이 상태로 태어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어린아이인 사내아이나 여자아이의 의식이 끊어져 버린다면, 정신과 물질이 자라나고 커지고 성숙해지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ṁ okkamitvā v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ṁ itthattāya abhinibbattissathā”ti? “No hetaṁ, bhante”. “Viññāṇañca hi, ānanda, daharasseva sato vocchijjissatha kumārakassa vā kumārikāya vā, api nu kho nāmarūpaṁ vuddhiṁ virūḷhiṁ vepullaṁ āpajjissathā”ti? “No hetaṁ, bhante”.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두 번째와 세 번째 장면입니다. 의식이 태에 내려온 뒤 도중에 벗어나 버리면(유산되면) 몸이 태어나는 데 이르지 못하고, 태어난 뒤에도 어린아이의 의식이 끊어지면 몸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합니다. 잉태·출생·성장이라는 생명의 세 고비마다 의식이 계속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정신과 물질이 의식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세 번에 걸쳐 확인합니다. 앞 절의 잉태 장면과 합쳐, 이 세 장면 전체가 다음 절의 결론을 뒷받침합니다.

묵상

몸이 자라고 나이 들어 가는 그 모든 순간에 의식이 한결같이 함께해 왔다는 것을, 지금 새삼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당연하게 여겨 온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경험이 될 수도 있어요. 서두르지 않아도 좋아요.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정신과 물질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의식이니라.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nāmarūpassa—yadidaṁ viññāṇ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세 장면에 걸친 태내 발달 논증의 결론입니다. 잉태와 유지와 성장, 이 세 고비 모두에서 의식이 함께해야 했다는 것으로부터, 의식이 정신과 물질의 원인이라는 것이 확정됩니다. 이로써 2장에서 세운 마지막 문답, 곧 '의식의 조건은 정신과 물질이다'라는 고리 하나만 남았습니다. 다음 22장에서 이 마지막 고리가 증명되면, 경의 앞부분 전체를 이루는 연기의 사슬이 완전히 매듭지어집니다.

묵상

생명이 이어지는 과정을 몇 개의 결정적인 고비로 나누어 보면, 그 고비마다 무엇이 함께해야 했는지 헤아려 본 적이 있나요? 지금 잘 그려지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그런 고비가 있었다는 것만 떠올려도 돼요.

‘정신과 물질이 의식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아난다여, 그것이 어떻게 그러한지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다여, 의식이 정신과 물질 안에 자리 잡지 못한다면, 장차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나 생겨남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의식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정신과 물질이니라.’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tadānanda, imināpetaṁ pariyāyena veditabbaṁ, yathā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ṁ. Viññāṇañca hi, ānanda, nāmarūpe patiṭṭhaṁ na labhissatha, api nu kho āyatiṁ jātijarāmaraṇaṁ dukkhasamudayasambhav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viññāṇassa yadidaṁ nāmarūp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드디어 순환의 마지막 고리가 증명됩니다. 21장에서는 의식이 정신과 물질의 조건임을 보였는데, 이 절은 거꾸로 정신과 물질 또한 의식의 조건임을 보입니다. 의식이 몸과 마음(정신과 물질) 안에 자리 잡을 수 없다면 장차 태어나고 늙고 죽는 괴로움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2장에서 예고했던 순환, 곧 의식과 정신·물질이 서로를 조건 짓는 관계가 이제 양쪽 방향 모두 증명을 마쳤습니다. 이 순환은 더 앞선 원인을 찾아 나서는 대신, 둘이 서로 기대어 성립한다는 것 자체를 연기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묵상

서로가 서로를 딛고 서 있어서 어느 쪽이 먼저인지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관계를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관계를 마주했을 때 마음이 어땠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아난다여, 이만큼이 태어나고 늙고 죽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범위이니라. 이만큼이 이름의 길이고, 이만큼이 언어의 길이고, 이만큼이 설명의 길이고, 이만큼이 지혜가 다니는 범위이니, 이만큼 윤회가 굴러가서 이러한 상태로 나타나느니라. 곧 정신과 물질이 의식과 함께 서로를 조건으로 굴러가는 것이니라.

Ettāvatā kho, ānanda, jāyetha vā jīyetha vā mīyetha vā cavetha vā upapajjetha vā. Ettāvatā adhivacanapatho, ettāvatā niruttipatho, ettāvatā paññattipatho, ettāvatā paññāvacaraṁ, ettāvatā vaṭṭaṁ vattati itthattaṁ paññāpanāya yadidaṁ nāmarūpaṁ saha viññāṇena aññamaññapaccayatā pavatta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1~22장 전체, 곧 연기의 앞부분을 마무리하는 총괄 선언입니다. '이만큼'이라는 말이 다섯 번 되풀이되며, 나고 늙고 죽는 범위, 이름 붙일 수 있는 범위, 말할 수 있는 범위, 설명할 수 있는 범위, 지혜가 미치는 범위가 모두 정확히 여기, 곧 정신과 물질이 의식과 서로 조건 지으며 굴러가는 이 자리까지임을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경험하고 말하고 알 수 있는 모든 것의 테두리가 바로 이 상호 조건 관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순환보다 '더 앞선' 원인을 찾는 것이 애초에 언어와 지혜의 범위를 벗어난 물음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음 23장부터는 화제가 자아에 대한 견해로 넘어갑니다.

묵상

내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설명할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가 있다는 것을, 지금 떠오르는 한 가지 경험에 비추어 느껴 볼 수 있나요? 말로 다 담기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일 필요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