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디가 니까야 DN 15

인용된 가르침 69구절

이 경을 9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연기는 뻔하지 않다 2구절

아난다가 연기를 뻔하다고 말하자 세존께서 그 깊음을 짚어 주십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꾸루 사람들이 사는 곳, 깜마사담마라는 꾸루의 마을에 계셨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가 절하고 한쪽에 앉아 세존께 이렇게 말하였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연기는 이토록 깊고 깊어 보이는데도, 저에게는 이토록 뻔하게만 보입니다.’

1. Paṭiccasamuppāda Evaṁ me sutaṁ— ekaṁ samayaṁ bhagavā kurūsu viharati kammāsadhammaṁ nāma kurūnaṁ nigamo. Atha kho āyasmā ānand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ṁ abhivādetvā ekamantaṁ nisīdi. Ekamantaṁ nisinno kho āyasmā ānando bhagavantaṁ etadavoca: “acchariyaṁ, bhante, abbhutaṁ, bhante. Yāva gambhīro cāyaṁ, bhante, paṭiccasamuppādo gambhīrāvabhāso ca, atha ca pana me uttānakuttānako viya khāyatī”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경 전체의 문을 여는 장면이자, 경의 제목이 '대인연경(큰 원인에 대한 경)'인 이유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아난다는 부처님의 사촌이자 가장 오래 곁을 지킨 시자로, 가르침을 누구보다 많이 들어 잘 안다고 자부할 만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연기(緣起,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조건 관계의 법칙)를 두고 '깊어 보이지만 실은 뻔하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진심 어린 감상입니다. 이 발언이 이어지는 긴 가르침 전체를 이끌어 내는 도화선이 됩니다.

묵상

오래 들어서 익숙해진 이야기일수록 다 안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나에게도 '이건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고 여겨 온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정말 끝까지 따라가 본 적이 있는지 가만히 돌아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아난다여, 이 연기는 깊고 깊어 보이느니라. 아난다여, 이 현상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에 이 사람들은 실타래처럼 엉키고 뭉친 실뭉치처럼 매듭지어지고 골풀과 억새풀처럼 헝클어져, 나쁜 곳과 궂은 길과 파멸처, 그리고 나고 죽음을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Mā hevaṁ, ānanda, avaca, mā hevaṁ, ānanda, avaca. Gambhīro cāyaṁ, ānanda, paṭiccasamuppādo gambhīrāvabhāso ca. Etassa, ānanda, dhammassa ananubodhā appaṭivedhā evamayaṁ pajā tantākulakajātā kulagaṇṭhikajātā muñjapabbajabhūtā apāyaṁ duggatiṁ vinipātaṁ saṁsāraṁ nātivatta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아난다의 말을 부처님이 즉시, 그것도 두 번 되풀이해 바로잡는 대목입니다. 이례적으로 강한 부정(그렇게 말하지 말라'를 두 번)은 아난다의 착각이 사소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부처님은 연기를 몰라서 사람들이 겪는 곤경을 세 가지 비유로 그립니다. 엉킨 실타래, 매듭진 실뭉치, 헝클어진 풀더미인데, 모두 한 가닥을 당기면 다른 가닥이 따라와 풀기 어려워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조건들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을 미리 예고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얽힘 때문에 사람들은 나고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묵상

뭔가 하나를 풀려고 했는데 오히려 다른 문제와 더 얽혀 버린 경험이 있나요? 그런 얽힘을 마주했을 때, 단번에 풀려 하기보다 어디서부터 살펴볼지 가늠해 본 적이 있다면 떠올려 볼까요?

2 조건을 하나씩 되짚다 6구절

늙음과 죽음에서 의식까지, 아홉 단계의 조건 관계를 문답으로 세웁니다.

‘늙음과 죽음에 특정한 조건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아난다여, ‘있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늙음과 죽음의 조건인가?’라고 물으면, ‘태어남이 늙음과 죽음의 조건이다’라고 답해야 하느니라. ‘태어남에 특정한 조건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태어남의 조건인가?’라고 물으면, ‘존재가 태어남의 조건이다’라고 답해야 하느니라.

‘Atthi idappaccayā jarāmaraṇan’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ṁ. ‘Kiṁpaccayā jarāmaraṇan’ti iti ce vadeyya,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iccassa vacanīyaṁ. ‘Atthi idappaccayā jātī’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ṁ. ‘Kiṁpaccayā jātī’ti iti ce vadeyya, ‘bhavapaccayā jātī’ti iccassa vacanīy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아난다가 연기를 뻔하다고 여긴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님은 문답 형식을 빌려 연기의 사슬을 하나씩 되짚어 가십니다. '조건이 있는가?' '있다', '무엇이 조건인가?' '이것이다'라는 두 물음이 짝을 이루어 되풀이되는데, 이는 뒤에서 각 항목을 하나씩 증명해 나가기 위한 목록을 먼저 세우는 절차입니다. 늙음과 죽음에서 시작해 태어남과 존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순서는 결과에서 원인으로 거꾸로 짚어 가는 방식이며, 이 방향이 경 전체에 걸쳐 유지됩니다.

묵상

지금 마음이 힘든 일이 있다면, '이것 때문이다'로 끝내지 않고 '그럼 그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하고 한 걸음 더 물어본 적이 있나요? 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아요. 그렇게 한 걸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 문답이 보여 주는 태도예요.

‘존재에 특정한 조건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존재의 조건인가?’라고 물으면, ‘집착이 존재의 조건이다’라고 답해야 하느니라. ‘집착에 특정한 조건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집착의 조건인가?’라고 물으면, ‘갈애가 집착의 조건이다’라고 답해야 하느니라.

‘Atthi idappaccayā bhavo’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ṁ. ‘Kiṁpaccayā bhavo’ti iti ce vadeyya, ‘upādānapaccayā bhavo’ti iccassa vacanīyaṁ. ‘Atthi idappaccayā upādānan’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ṁ. ‘Kiṁpaccayā upādānan’ti iti ce vadeyya, ‘taṇhāpaccayā upādānan’ti iccassa vacanīy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문답이 계속 거슬러 올라갑니다. 존재의 조건은 취착이고, 취착의 조건은 갈애라는 두 단계가 이 절의 내용입니다. 취착(取着)은 무언가를 붙들어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고, 갈애(渴愛)는 그보다 앞서 있는, 목마른 듯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붙들기 전에 먼저 원함이 있어야 한다는 순서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이 두 단계 역시 뒤의 6장과 7장에서 각각 증명됩니다.

묵상

무언가를 손에 넣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놓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경험이 있나요? 그것을 원하기 시작한 맨 처음 순간까지 거슬러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갈애에 특정한 조건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갈애의 조건인가?’라고 물으면, ‘느낌이 갈애의 조건이다’라고 답해야 하느니라. ‘느낌에 특정한 조건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느낌의 조건인가?’라고 물으면, ‘접촉이 느낌의 조건이다’라고 답해야 하느니라.

‘Atthi idappaccayā taṇhā’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ṁ. ‘Kiṁpaccayā taṇhā’ti iti ce vadeyya, ‘vedanāpaccayā taṇhā’ti iccassa vacanīyaṁ. ‘Atthi idappaccayā vedanā’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ṁ. ‘Kiṁpaccayā vedanā’ti iti ce vadeyya, ‘phassapaccayā vedanā’ti iccassa vacanīy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갈애의 조건은 느낌이고, 느낌의 조건은 접촉이라는 두 단계가 이어집니다. 좋고 싫은 느낌이 갈애의 뿌리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느낌조차 대상과의 접촉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갈애가 느닷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느낌을 거쳐야 한다는 이 순서는, 뒤에서 몸과 마음의 접촉 자체를 살피는 수행으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됩니다. 이 두 단계는 8장과 19장에서 각각 증명됩니다.

묵상

어떤 것을 강하게 원하게 되기 직전, 그보다 먼저 어떤 느낌이 있었는지 떠올려 볼 수 있나요? 좋은 느낌이었는지 싫은 느낌이었는지, 지금 잘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잠깐 멈추어 짚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접촉에 특정한 조건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접촉의 조건인가?’라고 물으면, ‘정신과 물질이 접촉의 조건이다’라고 답해야 하느니라. ‘정신과 물질에 특정한 조건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정신과 물질의 조건인가?’라고 물으면, ‘의식이 정신과 물질의 조건이다’라고 답해야 하느니라.

‘Atthi idappaccayā phasso’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ṁ. ‘Kiṁpaccayā phasso’ti iti ce vadeyya, ‘nāmarūpapaccayā phasso’ti iccassa vacanīyaṁ. ‘Atthi idappaccayā nāmarūpan’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ṁ. ‘Kiṁpaccayā nāmarūpan’ti iti ce vadeyya,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iccassa vacanīy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접촉의 조건은 정신과 물질(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 전체)이고, 정신과 물질의 조건은 의식이라는 두 단계가 이어집니다. 무엇인가에 닿으려면 먼저 닿을 몸과 마음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그 몸과 마음이 갖추어지려면 먼저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운 인과의 흐름처럼 보이지만, 다음 절에서 이 흐름이 예상 밖의 방향으로 한 번 더 꺾입니다.

묵상

몸과 마음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세상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적용해 보면 어떤가요? 지금 무엇과 닿아 있는지 잠시 알아차려 보아도 좋아요. 소리든 감촉이든 떠오르는 생각이든 상관없어요.

‘의식에 특정한 조건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의식의 조건인가?’라고 물으면, ‘정신과 물질이 의식의 조건이다’라고 답해야 하느니라.

‘Atthi idappaccayā viññāṇan’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ṁ. ‘Kiṁpaccayā viññāṇan’ti iti ce vadeyya,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iccassa vacanīy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는 문답의 마지막 단계로, 여기서 이 경만의 독특한 특징이 드러납니다. 앞 절에서 정신과 물질의 조건이 의식이라고 했는데, 이 절에서는 의식의 조건을 다시 정신과 물질이라고 답합니다. 흔히 알려진 열두 고리의 연기에서는 의식보다 앞서 '의도적 형성', '무명'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경은 의식과 정신·물질이 서로를 조건 짓는 자리에서 멈춥니다. 이는 더 캐물을 시작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둘이 서로를 딛고 서 있는 순환 구조 자체가 이 경이 다루려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환은 22장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묵상

어느 하나가 먼저인지 딱 잘라 말하기 어렵고, 서로가 서로를 딛고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관계나 상황이 내 삶에도 있나요? 굳이 어느 쪽이 먼저인지 가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 지금 어떻게 느껴지나요?

아난다여, 이렇게 정신과 물질이 의식의 조건이고, 의식이 정신과 물질의 조건이고, 정신과 물질이 접촉의 조건이고, 접촉이 느낌의 조건이고, 느낌이 갈애의 조건이고, 갈애가 집착의 조건이고, 집착이 존재의 조건이고, 존재가 태어남의 조건이고, 태어남이 늙음과 죽음, 슬픔·탄식·괴로움·근심·번민의 조건이 되어 이 모두가 생겨나느니라. 이렇게 하여 이 온 무더기의 괴로움이 일어나느니라.

Iti kho, ānanda,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ṁ,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ṁ, nāmarūp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ṁ,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ṁ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앞 절까지 하나씩 세운 아홉 단계를 한 문장으로 꿰어 다시 읽어 주는 대목입니다. 정신과 물질에서 시작해 의식, 접촉, 느낌, 갈애, 취착, 존재, 태어남을 거쳐 마지막에 늙음과 죽음, 그리고 슬픔·탄식·괴로움·근심· 번민이라는 다섯 가지 부수적 고통까지 이어지는 전체 사슬을 한눈에 보게 합니다. '온 무더기의 괴로움'이라는 표현은 이 사슬 전체가 결국 하나의 괴로움 덩어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요약 이후 경은 방향을 바꾸어, 이 사슬의 각 연결 고리가 실제로 성립하는지를 하나씩 증명하는 절차로 들어갑니다.

묵상

괴로움이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 여러 조건이 겹쳐 쌓인 결과라는 것을 떠올리면, 지금 겪는 어려움을 보는 마음이 조금 달라지나요? 어느 한 조건 하나만 바뀌어도 전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3 늙음과 죽음에서 느낌까지, 사슬을 증명하다 6구절

세운 아홉 단계 가운데 앞의 다섯 단계를 하나씩 실제로 증명합니다.

‘태어남이 늙음과 죽음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아난다여, 그것이 어떻게 그러한지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다여, 태어남이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어떤 식으로도 전혀 없다고 하자. 신이 신으로, 간답바가 간답바로, 야차가 야차로, 귀신이 귀신으로, 인간이 인간으로, 네발짐승이 네발짐승으로, 새가 새로, 파충류가 파충류로 태어나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하자. 이렇게 태어남이 전혀 없어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하겠는가?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tadānanda, imināpetaṁ pariyāyena veditabbaṁ, yathā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ṁ. Jāti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ṁ sabbathā sabbaṁ kassaci kimhici, seyyathidaṁ— devānaṁ vā devattāya, gandhabbānaṁ vā gandhabbattāya, yakkhānaṁ vā yakkhattāya, bhūtānaṁ vā bhūtattāya, manussānaṁ vā manussattāya, catuppadānaṁ vā catuppadattāya, pakkhīnaṁ vā pakkhittāya, sarīsapānaṁ vā sarīsapattāya, tesaṁ tesañca hi, ānanda, sattānaṁ tadattāya jāti nābhavissa. Sabbaso jātiyā asati jātinirodhā api nu kho jarāmaraṇaṁ paññāyethā”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2장에서 세운 아홉 단계를 이제부터 하나씩 실제로 증명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이 절은 그 증명 방식의 본보기입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먼저 문제의 조건(여기서는 태어남)이 '완전히, 어디에도, 어떤 식으로도' 없다고 가정합니다. 그다음 그 조건이 없다면 결과(늙음과 죽음)도 있을 수 없는지를 묻습니다. 여덟 가지 존재 부류(천신부터 파충류까지)를 낱낱이 짚은 것은, 어떤 예외도 남기지 않고 '태어남이 없으면 늙음과 죽음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방식은 이후 4~19장의 모든 증명에서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묵상

어떤 결과가 반드시 그 원인이 있어야만 나타난다는 것을, 원인이 없는 경우를 상상해 봄으로써 확인해 본 적이 있나요? 지금 겪고 있는 일 하나를 골라, 그 일이 있기 전에 무엇이 먼저 있어야 했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늙음과 죽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태어남이니라.’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jarāmaraṇassa, yadidaṁ jā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앞 절에서 던진 물음에 대한 답과 결론입니다. 아난다는 '태어남이 전혀 없다면 늙음과 죽음도 있을 수 없다'는 데 동의합니다. 이를 근거로 부처님은 태어남이 늙음과 죽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네 개의 낱말을 나란히 쓴 것은 같은 말을 겹쳐 강조하는 이 경의 문체로, 뒤에 이어지는 모든 증명의 결론에서 똑같이 되풀이됩니다. 이 짧은 문답과 선언이 한 벌을 이루어, 이후 열네 번 더 형태를 바꾸어 가며 반복됩니다.

묵상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방식으로 확인해 보니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관계가 있나요? 아니면 여전히 복잡하게 느껴지는 관계가 있나요? 둘 다 있어도 괜찮아요. 지금은 그저 구별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존재가 태어남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욕망의 존재나 물질의 존재나 비물질의 존재나, 그 어떤 존재도 전혀 없다고 하자. 이렇게 존재가 전혀 없어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태어남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존재이니라.’

‘Bhavapaccayā jātī’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Bhav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ṁ sabbathā sabbaṁ kassaci kimhici, seyyathidaṁ— kāmabhavo vā rūpabhavo vā arūpabhavo vā, sabbaso bhave asati bhavanirodhā api nu kho jāti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jātiyā, yadidaṁ bhav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두 번째 증명으로, 앞 절과 같은 틀을 그대로 따릅니다. 되풀이되는 도입부('그것이 어떻게 그러한지 알아야 하느니라')는 '…'로 줄였습니다. 이번에 없다고 가정하는 것은 존재이며, 원문은 존재를 욕망의 존재(감각적 욕망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물질의 존재(물질은 있으나 감각적 욕망은 벗어난 세계)·비물질의 존재(물질조차 없는 세계) 셋으로 나눕니다. 이는 불교 우주관에서 존재 전체를 남김없이 아우르는 세 갈래이며, 이 셋 가운데 어디에도 존재가 없으면 태어남도 없다는 것이 이 절의 결론입니다.

묵상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는 '존재감' 같은 것이 사실은 여러 조건이 모여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떠올리면, 평소와 다른 느낌이 드나요? 무리해서 답을 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한번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집착이 존재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욕망에 대한 집착이나 견해에 대한 집착이나 규범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나 자아 이론에 대한 집착이나, 그 어떤 집착도 전혀 없다고 하자. 이렇게 집착이 전혀 없어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존재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집착이니라.’

‘Upādānapaccayā bhavo’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Upādānañ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ṁ sabbathā sabbaṁ kassaci kimhici, seyyathidaṁ— kāmupādānaṁ vā diṭṭhupādānaṁ vā sīlabbatupādānaṁ vā attavādupādānaṁ vā, sabbaso upādāne asati upādānanirodhā api nu kho bhav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bhavassa, yadidaṁ upādān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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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증명입니다. 이번에는 취착을 넷으로 나눕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 견해에 대한 취착, 규범과 의식(형식적인 계율이나 의례)에 대한 취착, 그리고 자아 이론에 대한 취착입니다. 물질뿐 아니라 생각과 믿음과 자아관까지도 붙들어 매달리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네 갈래가 보여 줍니다. 넷 가운데 어느 것이든 붙드는 데서 존재(다시 태어나 이어지는 삶)가 비롯된다는 것이 이 절의 결론입니다.

묵상

생각이나 믿음, 또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자기 이해에 유난히 강하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억지로 놓으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갈애가 집착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형색에 대한 갈애나 소리에 대한 갈애나 냄새에 대한 갈애나 맛에 대한 갈애나 감촉에 대한 갈애나 마음에 나타나는 것에 대한 갈애나, 그 어떤 갈애도 전혀 없다고 하자. 이렇게 갈애가 전혀 없어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집착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갈애이니라.’

‘Taṇhāpaccayā upādānan’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Taṇhā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ṁ sabbathā sabbaṁ kassaci kimhici, seyyathidaṁ— rūpataṇhā saddataṇhā gandhataṇhā rasataṇhā phoṭṭhabbataṇhā dhammataṇhā, sabbaso taṇhāya asati taṇhānirodhā api nu kho upādānaṁ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upādānassa, yadidaṁ taṇh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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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증명입니다. 갈애를 여섯 가지 감각 대상, 곧 눈에 보이는 형색·소리·냄새·맛·감촉·마음에 나타나는 것에 대한 갈애로 나눕니다. 이 여섯은 눈·귀·코·혀·몸·마음이라는 여섯 감각 문에 정확히 대응하며, 갈애가 어느 한 감각에 국한되지 않고 여섯 감각 모두를 통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여섯 갈래 가운데 어느 것이든 갈애가 없으면 취착도 없다는 것이 이 절의 결론입니다.

묵상

오늘 하루 동안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마음, 이 여섯 가운데 어느 문을 통해 가장 강한 끌림이나 밀어냄을 느꼈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괜찮은 관찰이에요.

‘느낌이 갈애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눈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이나 귀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이나 코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이나 혀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이나 몸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이나 마음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이나, 어떤 느낌도 전혀 없다고 하자. 이렇게 느낌이 전혀 없어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갈애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느낌이니라.’

‘Vedanāpaccayā taṇhā’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Vedanā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ṁ sabbathā sabbaṁ kassaci kimhici, seyyathidaṁ— cakkhusamphassajā vedanā sotasamphassajā vedanā ghānasamphassajā vedanā jivhāsamphassajā vedanā kāyasamphassajā vedanā manosamphassajā vedanā, sabbaso vedanāya asati vedanānirodhā api nu kho taṇhā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taṇhāya, yadidaṁ vedan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다섯 번째이자 이 앞부분 사슬의 마지막 증명입니다. 느낌을 여섯 감각의 접촉에서 생긴 여섯 가지로 나누어, 앞 절의 갈애와 정확히 같은 틀로 다시 짚습니다. 갈애의 뿌리가 느낌이고, 그 느낌은 어느 감각 문에서든 접촉을 거쳐야 비로소 생긴다는 것이 이로써 확정됩니다. 이 지점에서 태어남부터 느낌까지 다섯 단계의 증명이 모두 끝나고, 경은 9장에서 느낌 이후의 갈래로 화제를 넓혀 갑니다.

묵상

기분 좋은 느낌이든 불편한 느낌이든, 그 느낌이 몸의 어느 감각을 거쳐 들어왔는지 짚어 본 적이 있나요? 지금 이 글을 읽는 이 순간에도 어떤 감각이 함께 작동하고 있는지 살짝 알아차려 보아도 좋아요.

4 느낌에서 다툼까지, 또 하나의 갈래 12구절

느낌에서 갈애를 거쳐 다툼과 폭력에 이르는 또 다른 사슬을 세우고 증명합니다.

이렇게, 아난다여,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구함이, 구함을 조건으로 이득이, 이득을 조건으로 평가가, 평가를 조건으로 욕망과 탐욕이, 욕망과 탐욕을 조건으로 집착이, 집착을 조건으로 소유가, 소유를 조건으로 인색이, 인색을 조건으로 지킴이 있느니라.

Iti kho panetaṁ, ānanda, vedanaṁ paṭicca taṇhā, taṇhaṁ paṭicca pariyesanā, pariyesanaṁ paṭicca lābho, lābhaṁ paṭicca vinicchayo, vinicchayaṁ paṭicca chandarāgo, chandarāgaṁ paṭicca ajjhosānaṁ, ajjhosānaṁ paṭicca pariggaho, pariggahaṁ paṭicca macchariyaṁ, macchariyaṁ paṭicca ārakkh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5~8장에서 느낌까지 사슬을 증명한 부처님이, 이제 느낌에서 출발하는 또 다른 갈래를 새로 펼치십니다. 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나는 것까지는 앞서와 같지만, 그 뒤로는 취착으로 곧장 가지 않고 아홉 단계를 더 거칩니다. 갈애가 구함(찾아 나섬)을 낳고, 구함이 이득(손에 넣음)을, 이득이 평가(어떻게 쓸지 따짐)를, 평가가 욕망과 탐욕을, 그것이 집착을, 집착이 소유를, 소유가 인색을, 인색이 지킴(지키려는 방비)을 낳는 과정입니다. 이는 마음속의 갈애가 실제 세상에서 재물과 소유를 둘러싼 행동으로 번져 가는 경로를 보여 줍니다.

묵상

작은 바람 하나가 어느새 지키고 방어해야 할 무언가로 불어나 있던 경험이 있나요? 그 과정을 한 단계씩 되짚어 보면, 어디쯤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멈출 수 있었을지 가만히 살펴볼 수 있을까요?

지킴으로 말미암아 몽둥이를 드는 것과 칼을 드는 것과 다툼과 언쟁과 논쟁과 서로 삿대질함과 이간질과 거짓말, 이렇게 여러 나쁘고 유익하지 않은 것들이 생겨나느니라.

Ārakkhādhikaraṇaṁ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ṁtuvaṁpesuññamusāvādā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앞 절에서 마지막에 이른 '지킴'이 낳는 결과를 밝히는 대목입니다. 무언가를 지키려는 마음은 몽둥이와 칼을 드는 폭력에서부터 다툼·언쟁·논쟁 같은 말싸움, 서로 삿대질하며 대드는 것, 이간질, 거짓말까지 여덟 가지 나쁜 행위로 번져 갑니다. 사소한 느낌 하나에서 시작된 사슬이 결국 사회적 갈등과 폭력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이는 개인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연기가 어떻게 사람 사이의 다툼으로 확장되는지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이어지는 10~18장에서는 이 아홉 단계를 거꾸로 하나씩 증명합니다.

묵상

무언가를 지키려는 마음이 앞세워질 때, 말투나 행동이 평소보다 날카로워진 경험이 있나요? 그때 정말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볼 수 있을까요? 지금 뚜렷하게 잡히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킴으로 말미암아 몽둥이를 드는 것과 칼을 드는 것과 다툼과 언쟁과 논쟁과 서로 삿대질함과 이간질과 거짓말, 이런 여러 나쁘고 유익하지 않은 것들이 생겨난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지킴이 전혀 없어 지킴이 소멸하면, 이런 여러 나쁘고 유익하지 않은 것들이 생겨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이런 여러 나쁘고 유익하지 않은 것들이 생겨나는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지킴이니라.’

‘Ārakkhādhikaraṇaṁ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ṁtuvaṁpesuññamusāvādā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ī’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sabbaso ārakkhe asati ārakkhanirodhā api nu kho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ṁtuvaṁpesuññamusāvādā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eyyun”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ṁtuvaṁpesuññamusāvādānaṁ anekesaṁ pāpakānaṁ akusalānaṁ dhammānaṁ sambhavāya yadidaṁ ārakkh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9장에서 편 아홉 단계를 이제부터 거꾸로 하나씩 증명합니다. 이 절은 그 첫 번째로, 지킴이 없으면 몽둥이와 칼을 드는 것에서 거짓말까지 여덟 가지 나쁜 일도 없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여기서부터 18장까지는 4~8장과 똑같은 틀('그것이 어떻게 그러한지 알아야 하느니라'로 시작해 '없다고 하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결론으로 끝맺는 틀)이 아홉 번 되풀이되므로, 각 절에서는 반복되는 도입부를 '…'로 줄이고 그 절만의 고유한 내용만 옮겼습니다.

묵상

내가 무언가를 지키려는 마음을 내려놓는다면 어떤 다툼이 애초에 일어나지 않을지 상상해 볼 수 있나요? 실제로 내려놓을 수 있는지는 별개로 하고, 그저 상상만 해 보는 것으로 충분해요.

‘인색이 지킴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인색이 전혀 없어 인색이 소멸하면, 지킴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지킴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인색이니라.’

‘Macchariyaṁ paṭicca ārakkho’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sabbaso macchariye asati macchariyanirodhā api nu kho ārakkh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ārakkhassa, yadidaṁ macchariy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두 번째 증명입니다. 무언가를 지키려는 마음보다 먼저, 그것을 남과 나누고 싶지 않은 인색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입니다. 인색이 없다면 애초에 지킬 이유도 없다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인과관계입니다. 이 단계는 나눔과 지킴이 정확히 반대 방향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앞서 9~10장에서 지킴이 다툼과 폭력으로 번진다고 했으니, 그 뿌리를 한 걸음 더 거슬러 인색까지 짚어 낸 셈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나누기 아까워하는 마음이 들 때, 그 뒤에 곧바로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따라오는 것을 알아차린 적이 있나요? 그 두 마음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짧게 느껴지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소유가 인색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소유가 전혀 없어 소유가 소멸하면, 인색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인색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소유이니라.’

‘Pariggahaṁ paṭicca macchariyan’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sabbaso pariggahe asati pariggahanirodhā api nu kho macchariyaṁ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macchariyassa, yadidaṁ pariggah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세 번째 증명입니다. 인색한 마음보다 먼저,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소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입니다.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삼지 않았다면 인색해질 대상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유가 인색을 낳고 인색이 지킴을 낳는 이 두 단계는, 물건 하나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이미 그것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의 흐름이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직 다섯 단계가 더 남아 있지만, 사슬은 이미 소유라는 눈에 보이는 자리까지 뚜렷하게 내려와 있습니다.

묵상

'내 것'이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그전에는 없던 어떤 무게가 함께 따라오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있나요? 그 무게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뚜렷하게 잡히지 않아도 괜찮아요.

‘집착이 소유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집착이 전혀 없어 집착이 소멸하면, 소유가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소유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집착이니라.’

‘Ajjhosānaṁ paṭicca pariggaho’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sabbaso ajjhosāne asati ajjhosānanirodhā api nu kho pariggah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pariggahassa—yadidaṁ ajjhosān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네 번째 증명입니다. 소유하기에 앞서 먼저 그것에 들러붙는 집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입니다. 집착 없이는 '내 것'으로 삼는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착은 아직 소유로 굳어지기 전, 마음이 대상에 달라붙기 시작하는 첫 단계에 해당합니다. 앞서 4장의 증명 방식을 그대로 빌려, 이번에는 집착이라는 마음의 움직임 하나에 소유라는 사회적 관계 전체가 달려 있음을 보입니다.

묵상

아직 내 것이라 부르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어떤 대상에 은근히 달라붙어 있음을 알아차린 적이 있나요? 그 대상이 물건이었는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생각이었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욕망과 탐욕이 집착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욕망과 탐욕이 전혀 없어 욕망과 탐욕이 소멸하면, 집착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집착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욕망과 탐욕이니라.’

‘Chandarāgaṁ paṭicca ajjhosānan’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sabbaso chandarāge asati chandarāganirodhā api nu kho ajjhosānaṁ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ajjhosānassa, yadidaṁ chandarāg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다섯 번째 증명입니다. 집착보다 먼저 욕망과 탐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입니다. 원하는 마음과 탐하는 마음이 먼저 일지 않으면, 대상에 달라붙는 집착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단계는 뒤에 이어질 평가(어떻게 쓸지 따지는 마음)가 실제로 욕망과 탐욕으로 굳어지는 지점을 보여 줍니다. 사슬의 한가운데 자리한 이 고리는, 마음이 대상을 재는 데서 원하고 탐하는 데로 넘어가는 순간을 짚어 냅니다.

묵상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이 곧바로 집착으로 굳어지기 전 짧은 틈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 본 적이 있나요? 그 틈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지금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평가가 욕망과 탐욕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평가가 전혀 없어 평가가 소멸하면, 욕망과 탐욕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욕망과 탐욕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평가이니라.’

‘Vinicchayaṁ paṭicca chandarāgo’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sabbaso vinicchaye asati vinicchayanirodhā api nu kho chandarāg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chandarāgassa, yadidaṁ vinicchay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여섯 번째 증명입니다. 욕망과 탐욕보다 먼저 평가, 곧 손에 넣은 것을 어떻게 쓸지 따지고 재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입니다. 이득을 얻은 뒤 그것을 저울질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강한 욕망과 탐욕이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재는 마음 자체는 아직 중립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탐욕의 씨앗이 움튼다는 것을 이 절이 짚어 줍니다. 언뜻 계산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이 단계가 실은 탐욕이 자라나는 온상이라는 것이 이 증명의 요점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이리저리 따져 보는 동안, 어느새 그것을 더 간절히 원하게 된 경험이 있나요? 따지는 행위 자체가 마음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 갔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득이 평가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이득이 전혀 없어 이득이 소멸하면, 평가가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평가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이득이니라.’

‘Lābhaṁ paṭicca vinicchayo’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sabbaso lābhe asati lābhanirodhā api nu kho vinicchay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vinicchayassa, yadidaṁ lābh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일곱 번째 증명입니다. 평가보다 먼저 이득, 곧 무언가를 실제로 손에 넣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입니다. 아직 손에 넣지 않은 것을 두고는 어떻게 쓸지 따질 것도 없다는 단순한 인과입니다. 구함이 이득으로, 이득이 평가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마음이 대상에 다가가는 순서를 하나씩 짚어 보여 줍니다. 아홉 단계 가운데 뒤에서 두 번째 자리로, 이제 사슬은 그 출발점인 구함 하나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묵상

바라던 것을 손에 넣자마자 곧바로 '이걸로 무엇을 할까' 하고 따지기 시작한 경험이 있나요? 손에 넣기 전과 후, 마음이 대상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구함이 이득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구함이 전혀 없어 구함이 소멸하면, 이득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이득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구함이니라.’

‘Pariyesanaṁ paṭicca lābho’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sabbaso pariyesanāya asati pariyesanānirodhā api nu kho lābh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lābhassa, yadidaṁ pariyesan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여덟 번째 증명입니다. 이득보다 먼저 구함, 곧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입니다. 찾아 나서지 않으면 손에 넣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절부터는 사슬이 갈애 가까이까지 다시 돌아와, 다음 절에서 이 아홉 단계 전체가 갈애 하나로 수렴하는 지점에 이릅니다. 지킴에서 시작해 거슬러 온 여덟 번의 증명이 이제 이 사슬의 첫머리, 곧 갈애 바로 앞자리에 다다랐습니다.

묵상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기 전, 그 행동을 밀어붙인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볼 수 있나요? 그 마음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이미 지나갔는지 가만히 살펴보아도 좋아요.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갈애가 구함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갈애가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어떤 식으로도 전혀 없다고 하자.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나 존재에 대한 갈애나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나, 어떤 갈애도 전혀 없다고 하자. 이렇게 갈애가 전혀 없어 갈애가 소멸하면, 구함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구함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갈애이니라.’

‘Taṇhaṁ paṭicca pariyesanā’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Taṇhā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ṁ sabbathā sabbaṁ kassaci kimhici, seyyathidaṁ—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sabbaso taṇhāya asati taṇhānirodhā api nu kho pariyesanā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pariyesanāya, yadidaṁ taṇh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9~17장에 걸친 아홉 단계 증명의 마지막 자리입니다. 구함보다 먼저 갈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이는데, 이번에는 갈애를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계속 있고자 하는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사라지고자 하는 갈애) 셋으로 나눕니다. 이 세 갈래는 7장에서 여섯 감각 대상으로 나눈 갈애와는 다른 방식의 분류로, 갈애가 무엇을 향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방향(가지려는 쪽과 없어지려는 쪽)을 향하는지에 주목합니다. 이로써 갈애에서 구함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고리가 확인됩니다.

묵상

무언가를 더 가지고 싶은 마음과, 반대로 지금 이 상황이 아예 없어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 둘 다 갈애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 지금 어떻게 다가오나요? 최근에 둘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마음을 품었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이렇게, 아난다여, 이 두 가지 현상은 느낌이라는 한 지점에서 만나 합쳐지느니라.

Iti kho, ānanda, ime dve dhammā dvayena vedanāya ekasamosaraṇā bhavan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9장부터 이어진 '지킴에서 구함까지' 아홉 단계 증명과, 4~8장의 '늙음과 죽음에서 갈애까지' 다섯 단계 증명이 여기서 하나로 합쳐집니다. 두 사슬 모두 결국 갈애를 거쳐 느낌이라는 같은 지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현상'이란 갈애에서 시작해 취착·존재·태어남·늙음과 죽음으로 가는 갈래와, 갈애에서 시작해 구함·이득·평가·욕망과 탐욕·집착·소유·인색·지킴·다툼으로 가는 갈래를 가리킵니다. 겉으로는 전혀 다른 두 방향(하나는 다시 태어남으로, 하나는 사회적 갈등으로)처럼 보이지만, 뿌리는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 이 한 문장의 요점입니다. 다음 19장부터는 이 느낌 자체의 조건을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묵상

전혀 관계없어 보이던 두 가지 어려움이 사실은 같은 뿌리, 이를테면 같은 느낌이나 같은 상황에서 함께 자라난 것임을 알아차린 적이 있나요? 지금 겪는 어려움 두 가지를 떠올려, 혹시 같은 자리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아닌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5 접촉에서 의식까지, 순환을 매듭짓다 9구절

접촉과 정신·물질과 의식이 서로를 조건 짓는 순환 구조를 증명하여 앞부분을 마무리합니다.

‘접촉이 느낌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 눈의 접촉이나 귀의 접촉이나 코의 접촉이나 혀의 접촉이나 몸의 접촉이나 마음의 접촉이나, 어떤 접촉도 전혀 없다고 하자. 이렇게 접촉이 전혀 없어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느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접촉이니라.’

‘Phassapaccayā vedanā’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 Phass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ṁ sabbathā sabbaṁ kassaci kimhici, seyyathidaṁ— cakkhusamphasso sotasamphasso ghānasamphasso jivhāsamphasso kāyasamphasso manosamphasso, sabbaso phasse asati phassanirodhā api nu kho vedanā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vedanāya, yadidaṁ phass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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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에서 갈애로 수렴한 두 사슬이 다시 하나로 합쳐진 지점에서, 이제 경은 4~8장에서 다루었던 원래 사슬로 돌아가 계속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절은 그 재개의 첫 증명으로, 느낌보다 먼저 접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8장의 느낌 증명과 똑같이 여섯 감각 문으로 나누어 보입니다. 여기서부터 22장까지는 접촉·정신과 물질· 의식이라는, 2장 문답의 마지막 세 단계를 증명합니다. 20~22장의 증명은 지금까지와 달리 '전혀 없다고 하자'는 단순한 가정을 넘어서는 더 정교한 논증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몸의 어느 한 감각이라도 완전히 닫혀 있다면 그 문으로는 어떤 느낌도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의 감각 하나를 예로 들어 떠올려 볼 수 있나요? 지금 잘 안 떠올라도 괜찮아요.

‘정신과 물질이 접촉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아난다여, 그것이 어떻게 그러한지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정신이라 불리는 무리를 알아보게 하는 모습과 특징과 표상과 가리킴, 그것이 전혀 없다면, 물질이라 불리는 무리에서 이름을 통한 접촉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Nāmarūpapaccayā phasso’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tadānanda, imināpetaṁ pariyāyena veditabbaṁ, yathā nāmarūpapaccayā phasso.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nām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tesu liṅgesu tesu nimittesu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rūpakāye adhivacanasam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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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의 조건이 정신과 물질임을 증명하는 대목으로, 앞선 증명들과 논증 방식이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그것이 전혀 없다면'이라고 단순히 존재 자체를 가정했다면, 여기서는 정신을 정신이라고 '알아볼 수 있게 하는' 모습·특징·표상·가리킴 네 가지가 없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묻습니다. 곧 인식되고 지칭될 수 없는 정신은 물질 쪽에서도 '이름을 통한 접촉'(생각이나 개념을 매개로 한 접촉)을 성립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접촉이 성립하려면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더 근본적인 조건을 짚는 논증입니다.

묵상

어떤 대상을 '이것'이라고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과 진짜로 마주쳤다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이름을 몰라 스쳐 지나간 것이 있다면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물질이라 불리는 무리를 알아보게 하는 모습과 특징과 표상과 가리킴, 그것이 전혀 없다면, 정신이라 불리는 무리에서 부딪힘을 통한 접촉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정신이라 불리는 무리와 물질이라 불리는 무리를 알아보게 하는 모습과 특징과 표상과 가리킴, 그것이 전혀 없다면, 이름을 통한 접촉이든 부딪힘을 통한 접촉이든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rūp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pe…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nāmakāye paṭighasam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Yehi, ānanda, ākārehi …pe… yehi uddesehi nāmakāyassa ca rūpakāyassa c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pe…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adhivacanasamphasso vā paṭighasamphasso vā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앞 절과 반대 방향, 그리고 둘을 합친 경우까지 잇달아 확인하는 대목입니다. 물질을 알아볼 수 없다면 정신 쪽에서도 '부딪힘을 통한 접촉'(감각 기관과 대상이 실제로 부딪히는 접촉)이 성립하지 않고, 정신과 물질 둘 다 알아볼 수 없다면 두 접촉 어느 쪽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원문은 이 되풀이되는 목록(모습·특징· 표상·가리킴)을 '…pe…'라는 표시로 줄여 적었는데, 이는 후대 편집자가 아니라 경 자체에 새겨진 되풀이 표시입니다. 여기서는 그 표시가 가리키는 내용을 그대로 풀어 옮겼습니다.

묵상

마음과 몸 가운데 어느 한쪽만으로는 세상과 온전히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어떤가요? 둘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아난다여, 정신과 물질을 알아보게 하는 모습과 특징과 표상과 가리킴, 그것이 전혀 없다면, 접촉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접촉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정신과 물질이니라.’

“Yehi, ānanda, ākārehi …pe… yehi uddesehi nāmarūp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pe…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phassassa, yadidaṁ nāmarūp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세 단계로 나누어 확인한 논증을 마무리하는 결론입니다. 이름을 통한 접촉이든 부딪힘을 통한 접촉이든, 결국 정신과 물질을 함께 알아볼 수 있어야 접촉 자체가 성립한다는 것이 최종 결론입니다. 이로써 접촉의 조건이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이 확정되고, 경은 다음 21장에서 정신과 물질의 조건인 의식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증명이 유난히 정교했던 것은, 다음 두 장에서 다룰 의식과 정신·물질의 순환 관계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묵상

무언가와 만났다고 느끼려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까요? 서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스쳐 간 만남이 있었다면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의식이 정신과 물질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아난다여, 그것이 어떻게 그러한지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다여, 의식이 어머니의 태에 내려오지 않는다면, 정신과 물질이 어머니의 태에서 엉기어 이루어지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tadānanda, imināpetaṁ pariyāyena veditabbaṁ, yathā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ṁ.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ṁ na 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ṁ mātukucchismiṁ samuccissathā”ti? “No hetaṁ, bhante”.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의식이 정신과 물질의 조건임을 보이는 이 증명은 세 가지 태내 발달의 장면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절은 그 첫 장면으로, 의식이 애초에 어머니의 태에 내려오지(자리 잡지) 않는다면 정신과 물질이 엉기어 몸을 이루는 일 자체가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을 보입니다. 이는 앞선 증명들의 추상적인 '전혀 없다고 하자'는 가정과 달리, 실제 생명이 잉태되는 구체적인 장면을 빌려 조건 관계를 보여 주는 방식입니다.

묵상

몸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가장 첫 순간에 이미 무언가(의식)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금 나의 몸에 대해 떠올려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답을 정하지 않고 그저 떠올려 보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의식이 어머니의 태에 내려온 뒤 벗어나 버린다면, 정신과 물질이 이 상태로 태어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어린아이인 사내아이나 여자아이의 의식이 끊어져 버린다면, 정신과 물질이 자라나고 커지고 성숙해지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ṁ okkamitvā v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ṁ itthattāya abhinibbattissathā”ti? “No hetaṁ, bhante”. “Viññāṇañca hi, ānanda, daharasseva sato vocchijjissatha kumārakassa vā kumārikāya vā, api nu kho nāmarūpaṁ vuddhiṁ virūḷhiṁ vepullaṁ āpajjissathā”ti? “No hetaṁ, bhante”.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두 번째와 세 번째 장면입니다. 의식이 태에 내려온 뒤 도중에 벗어나 버리면(유산되면) 몸이 태어나는 데 이르지 못하고, 태어난 뒤에도 어린아이의 의식이 끊어지면 몸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합니다. 잉태·출생·성장이라는 생명의 세 고비마다 의식이 계속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정신과 물질이 의식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세 번에 걸쳐 확인합니다. 앞 절의 잉태 장면과 합쳐, 이 세 장면 전체가 다음 절의 결론을 뒷받침합니다.

묵상

몸이 자라고 나이 들어 가는 그 모든 순간에 의식이 한결같이 함께해 왔다는 것을, 지금 새삼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당연하게 여겨 온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경험이 될 수도 있어요. 서두르지 않아도 좋아요.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정신과 물질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의식이니라.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nāmarūpassa—yadidaṁ viññāṇ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세 장면에 걸친 태내 발달 논증의 결론입니다. 잉태와 유지와 성장, 이 세 고비 모두에서 의식이 함께해야 했다는 것으로부터, 의식이 정신과 물질의 원인이라는 것이 확정됩니다. 이로써 2장에서 세운 마지막 문답, 곧 '의식의 조건은 정신과 물질이다'라는 고리 하나만 남았습니다. 다음 22장에서 이 마지막 고리가 증명되면, 경의 앞부분 전체를 이루는 연기의 사슬이 완전히 매듭지어집니다.

묵상

생명이 이어지는 과정을 몇 개의 결정적인 고비로 나누어 보면, 그 고비마다 무엇이 함께해야 했는지 헤아려 본 적이 있나요? 지금 잘 그려지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그런 고비가 있었다는 것만 떠올려도 돼요.

‘정신과 물질이 의식의 조건이다’라고 나는 말하였느니라. 아난다여, 그것이 어떻게 그러한지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다여, 의식이 정신과 물질 안에 자리 잡지 못한다면, 장차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나 생겨남이 있다고 하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의식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정신과 물질이니라.’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tadānanda, imināpetaṁ pariyāyena veditabbaṁ, yathā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ṁ. Viññāṇañca hi, ānanda, nāmarūpe patiṭṭhaṁ na labhissatha, api nu kho āyatiṁ jātijarāmaraṇaṁ dukkhasamudayasambhavo paññāyeth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ṁ nidānaṁ esa samudayo esa paccayo viññāṇassa yadidaṁ nāmarūp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드디어 순환의 마지막 고리가 증명됩니다. 21장에서는 의식이 정신과 물질의 조건임을 보였는데, 이 절은 거꾸로 정신과 물질 또한 의식의 조건임을 보입니다. 의식이 몸과 마음(정신과 물질) 안에 자리 잡을 수 없다면 장차 태어나고 늙고 죽는 괴로움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2장에서 예고했던 순환, 곧 의식과 정신·물질이 서로를 조건 짓는 관계가 이제 양쪽 방향 모두 증명을 마쳤습니다. 이 순환은 더 앞선 원인을 찾아 나서는 대신, 둘이 서로 기대어 성립한다는 것 자체를 연기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묵상

서로가 서로를 딛고 서 있어서 어느 쪽이 먼저인지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관계를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관계를 마주했을 때 마음이 어땠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아난다여, 이만큼이 태어나고 늙고 죽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범위이니라. 이만큼이 이름의 길이고, 이만큼이 언어의 길이고, 이만큼이 설명의 길이고, 이만큼이 지혜가 다니는 범위이니, 이만큼 윤회가 굴러가서 이러한 상태로 나타나느니라. 곧 정신과 물질이 의식과 함께 서로를 조건으로 굴러가는 것이니라.

Ettāvatā kho, ānanda, jāyetha vā jīyetha vā mīyetha vā cavetha vā upapajjetha vā. Ettāvatā adhivacanapatho, ettāvatā niruttipatho, ettāvatā paññattipatho, ettāvatā paññāvacaraṁ, ettāvatā vaṭṭaṁ vattati itthattaṁ paññāpanāya yadidaṁ nāmarūpaṁ saha viññāṇena aññamaññapaccayatā pavatta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1~22장 전체, 곧 연기의 앞부분을 마무리하는 총괄 선언입니다. '이만큼'이라는 말이 다섯 번 되풀이되며, 나고 늙고 죽는 범위, 이름 붙일 수 있는 범위, 말할 수 있는 범위, 설명할 수 있는 범위, 지혜가 미치는 범위가 모두 정확히 여기, 곧 정신과 물질이 의식과 서로 조건 지으며 굴러가는 이 자리까지임을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경험하고 말하고 알 수 있는 모든 것의 테두리가 바로 이 상호 조건 관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순환보다 '더 앞선' 원인을 찾는 것이 애초에 언어와 지혜의 범위를 벗어난 물음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음 23장부터는 화제가 자아에 대한 견해로 넘어갑니다.

묵상

내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설명할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가 있다는 것을, 지금 떠오르는 한 가지 경험에 비추어 느껴 볼 수 있나요? 말로 다 담기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일 필요는 없어요.

6 자아를 규정하다 8구절

물질의 있고 없음과 유한·무한을 기준으로 자아를 규정하는 네 가지 방식을 분석합니다.

아난다여, 자아를 규정하는 이들은 어떻게 규정하는가? 아난다여, 물질을 지니고 유한한 것으로 자아를 규정하는 이는 ‘나의 자아는 물질을 지니고 유한하다’라고 규정하느니라. 혹은 물질을 지니고 무한한 것으로 자아를 규정하는 이는 ‘나의 자아는 물질을 지니고 무한하다’라고 규정하느니라.

2. Attapaññatti Kittāvatā ca, ānanda,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Rūpiṁ vā hi, ānanda, parit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rūpī me paritto attā’ti. Rūpiṁ vā hi, ānanda, anan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rūpī me ananto attā’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경의 화제가 연기에서 자아에 대한 견해로 넘어가는 대목입니다. 지금까지 무엇이 무엇을 조건 짓는지를 다뤘다면, 이제부터는 사람들이 '자아'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유형별로 정리합니다. 자아를 규정하는 방식은 물질을 지녔는지 아닌지, 그리고 유한한지 무한한지, 이 두 기준을 조합해 넷으로 나뉩니다. 이 절은 그 가운데 첫 두 가지, 곧 물질을 지니고 유한한 자아, 물질을 지니고 무한한 자아를 보입니다.

묵상

'나'라는 것을 몸이 있는 것으로, 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떠올려 본 적이 있나요? 지금 떠오르는 나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이 물질적인지 무한한지 한번 가늠해 볼 수 있을까요?

혹은 물질이 없이 유한한 것으로 자아를 규정하는 이는 ‘나의 자아는 물질이 없이 유한하다’라고 규정하느니라. 혹은 물질이 없이 무한한 것으로 자아를 규정하는 이는 ‘나의 자아는 물질이 없이 무한하다’라고 규정하느니라.

Arūpiṁ vā hi, ānanda, parit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arūpī me paritto attā’ti. Arūpiṁ vā hi, ānanda, anan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arūpī me ananto attā’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앞 절에 이어 나머지 두 유형을 마저 보입니다. 물질이 없이 유한한 자아, 물질이 없이 무한한 자아입니다. 이렇게 물질의 있고 없음과 유한·무한이라는 두 기준을 엇갈려 짜면 자아를 규정하는 방식이 모두 네 가지로 정리됩니다. 이 넷은 이어지는 24장에서 하나씩 분석되며, 결국 이 네 가지 모두가 '자아관이 잠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로 판정됩니다. 물질의 있고 없음이라는 기준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전제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묵상

몸이라는 형태 없이도 '나'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상상이 얼마나 뚜렷하게, 혹은 얼마나 흐릿하게 그려지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지금 잘 그려지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그 가운데 물질을 지니고 유한한 것으로 자아를 규정하는 이가 있느니라. 그는 지금 그렇게 규정하거나, 미래에 그렇게 되리라고 규정하거나, 또는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되도록 만들겠다’라고 생각하느니라. 아난다여, 이러할 때 ‘물질을 지니고 유한하다는 자아관이 잠재해 있다’라고 말할 만하니라.

Tatrānanda, yo so rūpiṁ parit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Etarahi vā so rūpiṁ parit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tattha bhāviṁ vā so rūpiṁ parit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atathaṁ vā pana santaṁ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hoti. Evaṁ santaṁ kho, ānanda, rūpiṁ parittattānudiṭṭhi anusetīti iccālaṁ vacanāya.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23장에서 나열한 네 유형을 이제 하나씩 분석합니다. 이 절은 그 첫 번째 본보기로, 물질을 지니고 유한한 자아를 규정하는 이가 실제로 어떤 세 가지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를 보입니다. 지금 그러하다고 여기거나, 미래에 그렇게 되리라 여기거나, 아직은 아니지만 그렇게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 세 방식 가운데 어느 것이든 그 사람 안에는 '이런 자아관'이 잠재해 있다고 판정됩니다. 이 분석 틀은 뒤의 세 유형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묵상

지금의 나에 대해서든, 앞으로 되고 싶은 나에 대해서든, '이런 내가 진짜 나다'라고 마음속에 그려 둔 모습이 있나요? 그 모습을 그저 알아차려 보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바꾸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물질을 지니고 무한한 것으로 자아를 규정하는 이도 마찬가지이니, 지금이든 미래든 그렇게 규정하거나 그렇게 되도록 만들겠다고 생각하느니라. 이러할 때 ‘물질을 지니고 무한하다는 자아관이 잠재해 있다’라고 말할 만하니라. 물질이 없이 유한한 것으로 자아를 규정하는 이도 마찬가지이니, 이러할 때 ‘물질이 없이 유한하다는 자아관이 잠재해 있다’라고 말할 만하니라.

Tatrānanda, yo so rūpiṁ anan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Etarahi vā so rūpiṁ anan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tattha bhāviṁ vā so rūpiṁ anan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atathaṁ vā pana santaṁ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hoti. Evaṁ santaṁ kho, ānanda, rūpiṁ anantattānudiṭṭhi anusetīti iccālaṁ vacanāya. Tatrānanda, yo so arūpiṁ parit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Etarahi vā so arūpiṁ parit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tattha bhāviṁ vā so arūpiṁ parit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atathaṁ vā pana santaṁ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hoti. Evaṁ santaṁ kho, ānanda, arūpiṁ parittattānudiṭṭhi anusetīti iccālaṁ vacanāya.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형은 첫 번째와 완전히 같은 틀로 분석되므로, 원문도 '마찬가지다'라는 식으로 되풀이 구조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여기서는 그 반복을 압축해 옮기되, 물질을 지니고 무한한 자아, 물질이 없이 유한한 자아라는 두 유형을 빠짐없이 짚었습니다. 셋 다 같은 결론, 곧 지금이든 미래든 그렇게 여기거나 그렇게 만들려는 마음 안에 해당 자아관이 잠재해 있다는 판정으로 끝납니다.

묵상

'무한하다'거나 '형태가 없다'는 식으로, 좀 더 추상적으로 그려 본 나의 모습이 있었나요? 구체적인 모습이든 추상적인 모습이든, 둘 다 마음이 그려 낸 그림이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 어떻게 다가오나요?

아난다여, 그 가운데 물질이 없이 무한한 것으로 자아를 규정하는 이가 있느니라. 그는 지금 그렇게 규정하거나, 미래에 그렇게 되리라고 규정하거나, 또는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되도록 만들겠다’라고 생각하느니라. 아난다여, 이러할 때 ‘물질이 없이 무한하다는 자아관이 잠재해 있다’라고 말할 만하니라. 아난다여, 이만큼이 자아를 규정하는 이들이 규정하는 방식이니라.

Tatrānanda, yo so arūpiṁ anan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Etarahi vā so arūpiṁ anan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tattha bhāviṁ vā so arūpiṁ anantaṁ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atathaṁ vā pana santaṁ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hoti. Evaṁ santaṁ kho, ānanda, arūpiṁ anantattānudiṭṭhi anusetīti iccālaṁ vacanāya. Ettāvatā kho, ānanda, attānaṁ paññapento paññape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네 번째 유형을 마저 분석하고, 23~24장 전체를 마무리하는 요약을 덧붙입니다. 물질이 없이 무한한 자아를 규정하는 이 역시 앞의 세 유형과 똑같은 방식으로 분석되어, 그 안에 해당 자아관이 잠재해 있다고 판정됩니다. 마지막 문장 '이만큼이 규정하는 방식이다'는 네 유형이 자아를 규정하는 모든 경우를 남김없이 아우른다는 것을 못 박습니다. 다음 25~26장에서는 이 네 유형을 정확히 뒤집어, 자아를 규정하지 않는 경우를 다룹니다.

묵상

물질도 없고 한계도 없는, 가장 추상적인 형태로 '나'를 그려 본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그런 그림을 그려 보는 것 자체가 지금 어떤 느낌을 주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잘 안 그려져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자아를 규정하지 않는 이들은 어떻게 규정하지 않는가? 아난다여, 물질을 지니고 유한한 것으로도, 물질을 지니고 무한한 것으로도, 물질이 없이 유한한 것으로도, 물질이 없이 무한한 것으로도, 자아를 규정하지 않느니라.

3. Naattapaññatti Kittāvatā ca, ānanda,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Rūpiṁ vā hi, ānanda, parit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rūpī me paritto attā’ti. Rūpiṁ vā hi, ānanda, anan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rūpī me ananto attā’ti. Arūpiṁ vā hi, ānanda, parit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rūpī me paritto attā’ti. Arūpiṁ vā hi, ānanda, anan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rūpī me ananto attā’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23장에서 나열한 네 유형을 그대로 가져와 정확히 반대로 뒤집는 대목입니다. 원문은 23장과 마찬가지로 '물질을 지니고 유한한 것으로 자아를 규정하지 않는 이는 규정하지 않나니 나의 자아는 물질을 지니고 유한하다고 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네 번 되풀이하는데, 여기서는 네 유형을 한 문장에 나란히 놓아 옮겼습니다.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아를 이 네 틀 가운데 어느 것으로도 고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26장에서 이 부정 역시 24장과 같은 방식으로 분석됩니다.

묵상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딱 잘라 규정하지 않고 지내 본 순간이 있나요? 그런 순간이 불안하게 느껴졌는지, 오히려 홀가분하게 느껴졌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둘 다였을 수도 있어요.

아난다여, 그 가운데 물질을 지니고 유한한 것으로도 무한한 것으로도 자아를 규정하지 않는 이가 있느니라. 그는 지금도 미래도 그렇게 규정하지 않으며, ‘그렇게 되도록 만들겠다’라고도 생각하지 않느니라. 아난다여, 이러할 때 물질을 지니고 유한하다는 자아관도 무한하다는 자아관도 잠재해 있지 않다고 말할 만하니라.

Tatrānanda, yo so rūpiṁ parit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Etarahi vā so rūpiṁ parit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tattha bhāviṁ vā so rūpiṁ parit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tathaṁ vā pana santaṁ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na hoti. Evaṁ santaṁ kho, ānanda, rūpiṁ parittattānudiṭṭhi nānusetīti iccālaṁ vacanāya. Tatrānanda, yo so rūpiṁ anan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Etarahi vā so rūpiṁ anan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tattha bhāviṁ vā so rūpiṁ anan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tathaṁ vā pana santaṁ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na hoti. Evaṁ santaṁ kho, ānanda, rūpiṁ anantattānudiṭṭhi nānusetīti iccālaṁ vacanāya.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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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에서 자아를 규정하는 이들을 분석한 것과 똑같은 틀로, 이번에는 규정하지 않는 이들을 분석합니다. 물질을 지니고 유한한 자아, 물질을 지니고 무한한 자아, 이 둘 다에 대해 지금도 미래도 그렇게 여기지 않고, 그렇게 만들려는 마음도 없다면, 그 자아관이 아예 잠재해 있지 않다고 판정됩니다. 24장의 판정과 정확히 대구를 이루는 이 판정은, 자아관이 있고 없고가 결국 마음이 무엇을 향해 움직이는지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묵상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생각도,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도 없이 그냥 있어 본 순간이 있다면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그런 순간이 낯설게 느껴져도 괜찮아요. 흔치 않은 순간이니까요.

물질이 없이 유한한 것으로도 무한한 것으로도 자아를 규정하지 않는 이도 마찬가지이니, 이러할 때 그런 자아관도 잠재해 있지 않다고 말할 만하니라. 아난다여, 이만큼이 자아를 규정하지 않는 이들이 규정하지 않는 방식이니라.

Tatrānanda, yo so arūpiṁ parit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Etarahi vā so arūpiṁ parit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tattha bhāviṁ vā so arūpiṁ parit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tathaṁ vā pana santaṁ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na hoti. Evaṁ santaṁ kho, ānanda, arūpiṁ parittattānudiṭṭhi nānusetīti iccālaṁ vacanāya. Tatrānanda, yo so arūpiṁ anan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Etarahi vā so arūpiṁ anan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tattha bhāviṁ vā so arūpiṁ anantaṁ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tathaṁ vā pana santaṁ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na hoti. Evaṁ santaṁ kho, ānanda, arūpiṁ anantattānudiṭṭhi nānusetīti iccālaṁ vacanāya. Ettāvatā kho, ānanda, attānaṁ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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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두 유형, 곧 물질이 없이 유한한 자아와 물질이 없이 무한한 자아에 대해서도 같은 판정을 내리며 25~26장 전체를 마무리합니다. 결국 물질의 있고 없음, 유한과 무한을 조합한 네 가지 자아관 가운데 어느 것도 붙들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자아관도 잠재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나는 모른다'는 무지가 아니라, 넷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전제 자체에서 벗어난 태도를 가리킵니다. 다음 27장부터는 자아를 '규정'하는 문제에서 자아를 느낌과 겹쳐 '여기는' 문제로 초점이 옮겨 갑니다.

묵상

넷 중 하나를 반드시 골라야 한다고 여겨 온 물음이 있다면, 애초에 그 넷 말고 다른 길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어떻게 다가오나요? 답을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물음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7 느낌을 자아로 여기다 13구절

느낌을 자아와 겹쳐 여기는 세 가지 견해를 하나씩 되물어 반박하고, 해탈에 이르는 길을 보입니다.

아난다여, 자아로 여기는 이들은 어떻게 여기는가? 아난다여, 느낌을 자아로 여기는 이는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느니라. 혹은 ‘느낌은 결코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끼지 않는다’라고 여기는 이도 있느니라. 혹은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나의 자아가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가 느끼나니,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지녔다’라고 여기는 이도 있느니라.

4. Attasamanupassanā Kittāvatā ca, ānanda, attānaṁ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Vedanaṁ vā hi, ānanda, attānaṁ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vedanā me attā’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ṁvedano me attā’ti iti vā hi, ānanda, attānaṁ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ṭisaṁvedano me attā,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iti vā hi, ānanda, attānaṁ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자아에 대한 논의가 세 번째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앞서는 물질을 기준으로 자아를 '규정'하는 방식을 다뤘다면, 이제는 느낌을 기준으로 자아를 '여기는' 세 가지 방식을 다룹니다. 첫째는 느낌 자체가 자아라고 여기는 것, 둘째는 느낌은 자아가 아니되 자아는 아예 느끼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셋째는 느낌도 아니고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되 자아가 느낄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다음 28~31장에서 하나씩 반박됩니다.

묵상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곧 '나 자신'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나요? 아니면 감정과 '나'는 별개라고 느껴지는 쪽에 더 가까운가요? 지금 드는 생각을 그대로 알아차려 보아도 좋아요. 둘 다일 수도 있어요.

아난다여, 그 가운데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하느니라. ‘벗이여, 이 세 가지 느낌이 있으니,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그대는 이 세 가지 느낌 가운데 어느 것을 자아로 여기는가?’

Tatrānanda, yo so evamāha: ‘vedanā me attā’ti, so evamassa vacanīyo: ‘tisso kho imā, āvuso, vedanā—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Imāsaṁ kho tvaṁ tissannaṁ vedanānaṁ katamaṁ attato samanupassasī’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느낌을 자아로 여기는 첫 번째 견해를 반박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방법은 직접 부정하는 대신 되묻는 것입니다. 느낌에는 즐거운 것, 괴로운 것, 중립적인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어느 것을 자아로 여기느냐고 묻습니다. 이 물음 자체가 이미 함정을 품고 있습니다. 셋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순간 나머지 둘은 자아가 아니게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음 절에서 이 함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어집니다.

묵상

만약 '이 느낌이 곧 나 자신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지금 이 순간의 어떤 느낌을 골라야 할지 떠올려 볼 수 있나요? 고르기 어렵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을 말해 주는 것 같나요? 답이 없어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을 느끼는 그때에는 괴로운 느낌도 느끼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느끼지 않으니, 그때에는 오직 즐거운 느낌만을 느끼느니라. 괴로운 느낌을 느끼는 그때에는 즐거운 느낌도 느끼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느끼지 않으니, 그때에는 오직 괴로운 느낌만을 느끼느니라.

Yasmiṁ, ānanda, samaye sukhaṁ vedanaṁ vedeti, neva tasmiṁ samaye dukkhaṁ vedanaṁ vedeti, na adukkhamasukhaṁ vedanaṁ vedeti; sukhaṁyeva tasmiṁ samaye vedanaṁ vedeti. Yasmiṁ, ānanda, samaye dukkhaṁ vedanaṁ vedeti, neva tasmiṁ samaye sukhaṁ vedanaṁ vedeti, na adukkhamasukhaṁ vedanaṁ vedeti; dukkhaṁyeva tasmiṁ samaye vedanaṁ vede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방금 던진 물음에 답하기 전에, 먼저 세 느낌의 성질을 확인합니다. 세 느낌은 결코 동시에 나타나지 않고 한 번에 하나씩만 나타난다는 것을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을 예로 들어 보입니다. 이는 '어느 느낌이 자아인가'라는 물음이 왜 성립하기 어려운지를 보여 주는 준비 단계입니다. 만약 느낌이 곧 자아라면, 느낌이 바뀔 때마다 자아도 매번 다른 것으로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묵상

기분 좋은 순간과 힘든 순간, 그 둘이 동시에 마음을 채운 적은 없다는 것을 떠올려 볼 수 있나요?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떤 느낌이 자리하고 있는지 잠시 살펴보아도 좋아요.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는 그때에는 즐거운 느낌도 느끼지 않고 괴로운 느낌도 느끼지 않으니, 그때에는 오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을 느끼느니라.

Yasmiṁ, ānanda, samaye adukkhamasukhaṁ vedanaṁ vedeti, neva tasmiṁ samaye sukhaṁ vedanaṁ vedeti, na dukkhaṁ vedanaṁ vedeti; adukkhamasukhaṁyeva tasmiṁ samaye vedanaṁ vede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세 번째 느낌, 곧 중립적인 느낌에도 같은 원칙을 마저 적용해 확인을 마칩니다. 이로써 세 느낌이 서로 겹치지 않고 번갈아 나타난다는 것이 완전히 확인되었습니다. 다음 29장에서는 이 세 느낌이 모두 무상하다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느낌이 자아다'라는 견해가 최종적으로 반박됩니다. 세 느낌 가운데 어느 하나로도 자아를 고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이 두 절 전체의 결론입니다.

묵상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저 덤덤한 순간에도 나름의 색깔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 본 적이 있나요? 그런 순간을 무시하지 않고 잠시 머물러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지금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느낌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모두 무상하고 지어진 것이고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다하는 성질과 사라지는 성질과 빛바래는 성질과 소멸하는 성질을 지녔느니라.

Sukhāpi kho, ānanda, vedanā aniccā saṅkhatā paṭiccasamuppannā khayadhammā vayadhammā virāgadhammā nirodhadhammā. Dukkhāpi kho, ānanda, vedanā aniccā saṅkhatā paṭiccasamuppannā khayadhammā vayadhammā virāgadhammā nirodhadhammā. Adukkhamasukhāpi kho, ānanda, vedanā aniccā saṅkhatā paṭiccasamuppannā khayadhammā vayadhammā virāgadhammā nirodhadhamm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세 느낌이 서로 겹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데 이어, 이제 그 셋 모두가 무상하다는 사실을 더합니다. 원문은 이 문장을 세 느낌 각각에 대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되풀이하는데, 여기서는 한 문장에 세 느낌을 나란히 놓아 옮겼습니다. 즐거운 느낌마저 예외 없이 무상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음 절에서 이 무상함이 '느낌을 자아로 여기는 이'에게 무엇을 뜻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묵상

기분 좋은 순간조차 붙잡아 두려 하면 이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있나요? 그 사실이 지금 어떻게 다가오나요? 아쉬움이든 다른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도,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도, 그때마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는 생각이 일고, 그 느낌이 사라지면 그때마다 ‘나의 자아가 사라져 버렸다’라는 생각이 이느니라.

Tassa sukhaṁ vedanaṁ vediyamānassa ‘eso me attā’ti hoti. Tassāyeva sukhāya vedanāya nirodhā ‘byagā me attā’ti hoti. Dukkhaṁ vedanaṁ vediyamānassa ‘eso me attā’ti hoti. Tassāyeva dukkhāya vedanāya nirodhā ‘byagā me attā’ti hoti. Adukkhamasukhaṁ vedanaṁ vediyamānassa ‘eso me attā’ti hoti. Tassāyeva adukkhamasukhāya vedanāya nirodhā ‘byagā me attā’ti ho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느낌을 자아로 여기는 이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이는 대목입니다. 원문은 즐거운·괴로운· 중립적 느낌 각각에 대해 '이것이 나의 자아다'와 '나의 자아가 사라졌다'는 두 문장을 되풀이하는데, 여기서는 세 느낌을 하나로 묶어 옮겼습니다. 느낌이 바뀔 때마다 자아가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면, 그 자아는 한순간도 온전히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다음 절에서 내려지는 최종 판정의 근거가 됩니다.

묵상

기분이 바뀔 때마다 '나'라는 것도 함께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진 적이 있나요? 그 흔들림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지 없는지, 지금 굳이 답을 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해요.

이렇게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말하는 이는, 지금 여기서 무상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뒤섞이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질을 지닌 것을 자아로 여기는 것이니라.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로써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Iti so diṭṭheva dhamme aniccasukhadukkhavokiṇṇaṁ uppādavayadhammaṁ attānaṁ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yo so evamāha: ‘vedanā me attā’ti.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ṁ nakkhamati: ‘vedanā me attā’ti samanupassitu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느낌을 자아로 여기는 첫 번째 견해에 대한 반박을 매듭짓는 대목입니다. 느낌은 무상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뒤섞여 있고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인데, 그런 것을 자아라고 여긴다면 결국 자아 역시 그렇게 불안정한 것으로 규정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세존은 이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다음 30장에서는 두 번째 견해, 곧 '자아는 아예 느끼지 않는다'는 입장이 다루어집니다.

묵상

끊임없이 바뀌고 뒤섞이는 것에 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걸어 두었다면, 그것을 알아차린 지금 어떤 마음이 드나요? 답을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아난다여, 그 가운데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끼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하느니라. ‘벗이여, 그러나 느껴지는 것이 전혀 없는 곳에 ‘나는 있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로써 자아는 느끼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Tatrānanda, yo so evamāha: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ṁvedano me attā’ti, so evamassa vacanīyo: ‘yattha panāvuso, sabbaso vedayitaṁ natthi api nu kho, tattha “ayamahamasmī”ti siy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ṁ nakkhama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ṁvedano me attā’ti samanupassitu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두 번째 견해, 곧 느낌은 자아가 아니되 자아는 아예 느끼지 않는다는 입장을 반박합니다. 논증은 짧고 직접적입니다. 무언가를 느끼는 작용이 전혀 없는 곳에서 '나는 있다'라는 자기 인식 자체가 생겨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답은 '없다'입니다. 자아를 느낌과 완전히 떼어 놓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자아를 느낀다는 사실 자체에 기대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반전입니다.

묵상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이 언제 가장 뚜렷했는지 떠올려 보면, 그 순간에 어떤 감각이나 느낌이 함께 있었나요? 완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도 '나'를 느낄 수 있을지 가만히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아난다여, 그 가운데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나의 자아가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가 느끼나니,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지녔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하느니라.

Tatrānanda, yo so evamāha: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ṭisaṁvedano me attā,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So evamassa vacanīy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세 번째이자 마지막 견해를 반박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이 견해는 앞의 두 견해를 절충한 듯 보입니다. 느낌 자체는 아니지만, 자아가 느낄 수 있는 성질을 타고났다는 것입니다. 얼핏 균형 잡힌 입장처럼 들리지만, 다음 절에서 똑같은 방식의 되물음이 이 입장 역시 무너뜨립니다. 27장에서 예고된 세 견해 가운데 마지막 자리이며, 이 반박이 끝나면 자아에 대한 세 견해 전체가 매듭지어집니다.

묵상

느낌과 완전히 같지도,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자리에 '나'를 놓아 두려 한 적이 있나요? 그 자리가 실제로 어디였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벗이여, 느낌들이 남김없이 완전히, 어떤 식으로도 소멸한다고 하자. 느낌이 전혀 없어 느낌이 소멸하면, 그곳에 ‘나는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로써 자아가 느끼는 성질을 지녔다고 여기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vedanā ca hi, āvuso, sabbena sabbaṁ sabbathā sabbaṁ aparisesā nirujjheyyuṁ. Sabbaso vedanāya asati vedanānirodhā api nu kho tattha ‘ayamahamasmī’ti siy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ṁ nakkhama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ṭisaṁvedano me attā,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samanupassitu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세 번째 견해를 무너뜨리는 되물음입니다. 만약 느낌이 완전히 소멸한다면, '나는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그래도 남아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답은 역시 '없다'입니다. 자아가 '느낄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실제로는 느낌에 기대어서만 자아를 확인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이로써 27장에서 제시된 세 견해, 곧 느낌이 자아다·자아는 안 느낀다·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지녔다는 세 입장이 모두 반박되었습니다.

묵상

'느낌이 전혀 없어도 나는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지,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나요?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아도, 그 물음 자체를 품어 보는 것으로 충분해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수행자가 느낌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느끼지 않는 것을 자아로 여기지도 않고, ‘나의 자아가 느끼나니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지녔다’라고 여기지도 않을 때, 이렇게 여기지 않는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취착하지 않으며, 취착하지 않아 동요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아 스스로 반열반하나니, ‘태어남은 다하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할 일을 마쳤으니, 다시는 이런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그는 아느니라.

Yato kho, ānanda, bhikkhu neva vedanaṁ attānaṁ samanupassati, nopi appaṭisaṁvedanaṁ attānaṁ samanupassati, nopi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samanupassati. So evaṁ na samanupassanto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anupādiyaṁ na paritassati, aparitassaṁ paccattaññeva parinibbāyati, ‘khīṇā jāti, vusitaṁ brahmacariyaṁ, kataṁ karaṇīyaṁ, nāparaṁ itthattāyā’ti pajānā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27~31장에 걸쳐 반박된 세 견해를 모두 내려놓았을 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이는, 자아에 대한 논의 전체의 결론입니다. 세 견해 가운데 어느 것도 붙들지 않는 수행자는 세상의 그 무엇도 취착하지 않고, 취착이 없으니 동요하지도 않으며, 동요가 없으니 스스로 반열반(완전히 사그라짐)에 이릅니다. '태어남은 다하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는 문장은 아라한과를 선언할 때 초기 경전에서 되풀이되는 정형구로, 자아에 대한 세 견해를 벗어나는 일이 곧 해탈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묵상

어떤 것을 '나'라고 붙들지 않을 때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나요? 아직 그런 경험이 낯설다면,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만 기억해 두어도 좋아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이렇게 마음이 해탈한 수행자를 두고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옳지 않으니, ‘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라는 말도, ‘여래는 죽은 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라는 말도, ‘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라는 말도,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다’라는 말도 옳지 않으니라.

Evaṁ vimuttacittaṁ kho, ānanda, bhikkhuṁ yo evaṁ vadeyya: ‘hoti tathāgato paraṁ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Na hoti tathāgato paraṁ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Hoti ca na ca hoti tathāgato paraṁ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Neva hoti na na hoti tathāgato paraṁ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해탈한 수행자에 대해 흔히 던져지는 네 가지 물음, 곧 여래(완전히 해탈한 이)가 죽은 뒤에 존재하는지를 둘러싼 네 갈래 견해(존재한다·존재하지 않는다·둘 다이다·둘 다 아니다)를 나열하며, 그 어느 쪽으로도 단정해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밝힙니다. 이 네 가지는 초기 경전에서 '설명되지 않는 것들'로 유명한 물음이며, 부처님은 늘 이 네 갈래 가운데 어느 것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 까닭이 설명됩니다.

묵상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을 붙들고 오래 씨름해 본 적이 있나요? 그 물음에 답을 내지 않고 그냥 내려놓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어떻게 느껴지나요? 낯설게 느껴져도 괜찮아요.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명칭과 언어와 개념과 지혜와 윤회가 미치는 범위, 그 모든 것을 직접 앎으로 해탈한 수행자를 두고 ‘그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으니라.

Taṁ kissa hetu? Yāvatā, ānanda, adhivacanaṁ yāvatā adhivacanapatho, yāvatā nirutti yāvatā niruttipatho, yāvatā paññatti yāvatā paññattipatho, yāvatā paññā yāvatā paññāvacaraṁ, yāvatā vaṭṭaṁ, yāvatā vaṭṭati, tadabhiññāvimutto bhikkhu, tadabhiññāvimuttaṁ bhikkhuṁ ‘na jānāti na passati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앞 절에서 네 가지 물음 모두를 물리친 까닭을 밝힙니다. 22장의 마무리에서 '이만큼이 이름과 언어와 설명과 지혜가 미치는 범위'라고 했던 것과 같은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여래가 죽은 뒤 어떠한지를 묻는 네 갈래 물음은 애초에 명칭과 언어와 개념과 지혜가 미치는 범위 안에서 던져지는데, 그 범위 전체를 직접 앎으로 꿰뚫어 해탈한 수행자에게 그 물음을 들이대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자아에 대한 긴 논의 전체가 마무리되고, 다음 33장부터는 의식이 머무는 자리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주제로 넘어갑니다.

묵상

말이나 개념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경험을 마주한 적이 있나요? 그럴 때는 굳이 말로 정리하려 애쓰지 않고 그냥 두어도 괜찮다는 것이, 지금 어떻게 다가오나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8 의식이 머무는 자리 7구절

중생이 태어날 수 있는 아홉 자리를 낱낱이 살펴, 그 어디에도 머물 이유가 없음을 보입니다.

아난다여, 의식이 머무는 자리는 일곱이고, 영역은 둘이니라. 무엇이 일곱인가? 아난다여, 몸이 다르고 인식도 다른 중생들이 있으니, 이를테면 인간과 어떤 신들과 악처에 떨어진 어떤 존재들이니라. 이것이 첫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5. Sattaviññāṇaṭṭhiti Satta kho, ānanda, viññāṇaṭṭhitiyo, dve āyatanāni. Katamā satta? Santānanda, sattā nān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manussā, ekacce ca devā, ekacce ca vinipātikā. Ayaṁ paṭhamā viññāṇaṭṭhi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자아에 대한 긴 논의를 마친 뒤, 경은 완전히 새로운 화제인 '의식이 머무는 자리'로 넘어갑니다. 이는 중생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존재의 영역을 몸과 인식의 같고 다름을 기준으로 일곱 가지로 분류한 것입니다. 첫 번째 자리는 몸도 다르고 인식도 다른 경우로, 인간과 낮은 하늘의 신들과 나쁜 곳에 태어난 존재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분류는 뒤이은 34장에서 각 자리에도 집착할 이유가 없음을 보이기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묵상

사람마다 몸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는 것을, 오늘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며 새삼 느껴 볼 수 있나요? 그 다름이 지금 어떻게 다가오나요? 불편함이든 신기함이든 있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몸은 다르나 인식은 하나인 중생들이 있으니, 첫 선정으로 다시 태어난 범천의 무리인 신들이니라. 이것이 두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아난다여, 몸은 하나이나 인식은 다른 중생들이 있으니, 빛나는 신들이니라. 이것이 세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Santānanda, sattā nānattakāyā ek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brahmakāyikā paṭhamābhinibbattā. Ayaṁ dutiyā viññāṇaṭṭhiti. Santānanda, sattā ek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ābhassarā. Ayaṁ tatiyā viññāṇaṭṭhi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두 번째와 세 번째 자리를 보입니다. 두 번째는 몸은 저마다 다르지만 인식은 하나로 같은 경우로, 첫 선정(초선)의 경지로 태어난 브라흐마 세계의 신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는 반대로 몸은 하나로 같지만 인식이 저마다 다른 경우로, 두 번째 선정에 해당하는 빛나는 신들의 세계입니다. 몸과 인식이라는 두 기준이 각각 같거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앞의 두 자리에 이어 계속 보여 줍니다.

묵상

겉모습은 저마다 달라도 마음이 통한다고 느낀 사람들이 있었나요? 반대로 겉모습은 비슷해도 마음이 제각각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나요? 둘 다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금은 그냥 넘어가도 됩니다.

아난다여, 몸도 하나이고 인식도 하나인 중생들이 있으니,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신들이니라. 이것이 네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아난다여,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넘어서고 부딪힘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다양한 인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허공은 끝이 없다’며 무한한 허공의 영역에 이른 중생들이 있느니라. 이것이 다섯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Santānanda, sattā ekattakāyā ek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subhakiṇhā. Ayaṁ catutthī viññāṇaṭṭhiti. Santānanda, sattā sabbaso rūpasaññānaṁ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ṁ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ṁ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ūpagā. Ayaṁ pañcamī viññāṇaṭṭhi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네 번째 자리는 몸도 인식도 모두 하나로 같은 경우로, 세 번째 선정에 해당하는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신들의 세계입니다. 이로써 몸과 인식의 같고 다름을 조합한 네 가지 자리가 모두 나왔습니다. 다섯 번째 자리부터는 기준이 바뀌어, 물질에 대한 인식 자체를 완전히 넘어선 무형의 경지, 곧 무한한 허공의 영역이 제시됩니다. 이는 몸을 지닌 세계에서 몸 없는 명상의 경지로 넘어가는 전환점입니다.

묵상

몸이라는 감각조차 넘어선 자리를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상상이 잘 그려지지 않아도, 그런 자리가 있다고 말해지는 것 자체를 가만히 받아들여 보아도 괜찮아요.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아난다여, 무한한 허공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의식은 끝이 없다’며 무한한 의식의 영역에 이른 중생들이 있느니라. 이것이 여섯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아난다여, 무한한 의식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아무것도 없다’며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이른 중생들이 있느니라. 이것이 일곱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그 밖에 인식이 없는 중생의 영역과, 둘째로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영역이 있느니라.

Santānanda, sattā sabbaso ākāsānañcāyatanaṁ samatikkamma ‘anantaṁ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ūpagā. Ayaṁ chaṭṭhī viññāṇaṭṭhiti. Santānanda, sattā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ṁ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ūpagā. Ayaṁ sattamī viññāṇaṭṭhiti. Asaññasattāyatana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meva dutiy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자리로 무한한 의식의 영역과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을 마저 보이고, 일곱 자리 전체를 마무리합니다. 이어서 이 일곱 자리에는 들지 않는 두 영역, 곧 인식이 아예 없는 중생의 영역과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영역을 따로 덧붙입니다. 이 둘이 '의식이 머무는 자리'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하나는 의식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고 다른 하나는 너무 미세해 '머문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음 34장에서는 이 일곱 자리와 두 영역 전부를 두고 즐거워할 만한지를 묻습니다.

묵상

더없이 고요하고 미세해서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마음 상태를 언뜻 스쳐 본 적이 있나요?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런 결이 있다는 것만 알아 두어도 좋아요.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아난다여, 이 가운데 몸도 다르고 인식도 다른, 이를테면 인간과 어떤 신들과 악처에 떨어진 어떤 존재들이라는 첫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가 있느니라. 그것을 알고 그 일어남을 알고 그 사라짐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위험을 알고 그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옳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

Tatrānanda, yāyaṁ paṭhamā viññāṇaṭṭhiti nān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manussā, ekacce ca devā, ekacce ca vinipātikā.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ā ca samudayaṁ pajānāti, tassā ca atthaṅgamaṁ pajānāti, tassā ca assādaṁ pajānāti, tassā ca ādīnavaṁ pajānāti, tassā ca nissaraṇaṁ pajānāti, kallaṁ nu tena tadabhinanditun”ti? “No hetaṁ, bhante” …pe…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33장에서 늘어놓은 일곱 자리와 두 영역을 하나씩 검토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물음은 한결같습니다. 그 자리의 본모습과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거기서 벗어나는 길까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 자리를 즐거워하는 것이 과연 옳겠느냐는 것입니다. 첫 번째 자리에 대한 답은 '아니다'입니다. 원문은 이 물음과 답을 나머지 여섯 자리에도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pe…'라는 표시로 줄였는데, 이는 후대의 생략이 아니라 경 자체에 새겨진 표시입니다. 즐거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은 일곱 자리 전부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묵상

지금 머무르고 싶은 어떤 마음 상태가 있다면, 그 상태가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까지 함께 알고 있어도 여전히 그것을 붙들고 싶을까요? 지금 뚜렷한 답이 없어도 괜찮아요. 물음만 품어 보아도 충분해요.

아난다여, 이 가운데 인식이 없는 중생의 영역이 있느니라. 그것을 알고 그 일어남을 알고 그 사라짐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위험을 알고 그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옳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tatrānanda, yamidaṁ asaññasattāyatanaṁ.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a ca samudayaṁ pajānāti, tassa ca atthaṅgamaṁ pajānāti, tassa ca assādaṁ pajānāti, tassa ca ādīnavaṁ pajānāti, tassa ca nissaraṇaṁ pajānāti, kallaṁ nu tena tadabhinanditun”ti? “No hetaṁ, bhante”.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일곱 자리에 이어, 그 바깥에 있는 두 영역 가운데 첫 번째인 '인식이 없는 중생의 영역'에도 똑같은 물음을 던집니다. 인식조차 없는 지극히 고요한 상태라 해도, 그 본모습을 아는 이에게는 즐거워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답입니다. 이는 소멸에 가까운 상태조차 붙들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33장의 분류에서 이 영역이 일곱 자리에 들지 못했던 것도, 인식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묵상

아무 생각도 인식도 없는 상태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고 느껴 본 적이 있나요? 그 상상이 실제로 무엇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살짝 들여다볼 수 있을까요? 답이 없어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이 가운데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영역이 있느니라. 그것을 알고 그 일어남을 알고 그 사라짐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위험을 알고 그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옳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수행자가 이 일곱 자리와 이 두 영역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 취착 없이 해탈하면, 이를 일러 지혜로 해탈한 수행자라 하느니라.’

“Tatrānanda, yamida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ṁ.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a ca samudayaṁ pajānāti, tassa ca atthaṅgamaṁ pajānāti, tassa ca assādaṁ pajānāti, tassa ca ādīnavaṁ pajānāti, tassa ca nissaraṇaṁ pajānāti, kallaṁ nu tena tadabhinanditun”ti? “No hetaṁ, bhante”. “Yato kho, ānanda, bhikkhu imāsañca sattannaṁ viññāṇaṭṭhitīnaṁ imesañca dvinnaṁ āyatanānaṁ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ṁ viditvā anupādā vimutto hoti, ayaṁ vuccatānanda, bhikkhu paññāvimutt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마지막 영역인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영역'까지 같은 물음으로 확인을 마친 뒤, 33~34장 전체를 마무리 짓는 결론이 이어집니다. 일곱 자리와 두 영역, 이 아홉 가지 모두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 어디에도 취착하지 않는 수행자를 '지혜로 해탈한 이(빤냐위뭇따)'라 부릅니다. 가장 미세하고 고요한 경지까지도 예외 없이 검토 대상이 된다는 것이, 이 결론의 무게를 더합니다.

묵상

아무리 좋아 보이는 상태라도 그 안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 지금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오나요?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느껴 보아도 좋아요. 답을 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9 여덟 가지 벗어남과 마음·지혜로 함께 풀려남 6구절

수행자가 실제로 드나드는 여덟 단계의 해탈과, 그 정점인 양쪽으로 해탈함을 밝힙니다.

아난다여, 여덟 해탈이 있느니라. 무엇이 여덟인가? 물질을 지닌 채 물질을 보는 것이 첫째 해탈이고, 안으로 물질을 인식하지 않으며 밖의 물질을 보는 것이 둘째이니라. 오직 아름다움에 마음을 둔 것이 셋째 해탈이니라.

6. Aṭṭhavimokkha Aṭṭha kho ime, ānanda, vimokkhā. Katame aṭṭha? Rūpī rūpāni passati ayaṁ paṭhamo vimokkho. Ajjhattaṁ arūpasaññī bahiddhā rūpāni passati, ayaṁ dutiyo vimokkho. Subhanteva adhimutto hoti, ayaṁ tatiyo vimokkh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의식이 머무는 자리에 대한 논의에 이어, 이제 수행자가 실제로 닦아 들어가는 '여덟 해탈'을 다룹니다. 앞서 33~34장이 중생이 태어날 수 있는 자리를 그저 살펴보는 것이었다면, 이 여덟 해탈은 수행자가 스스로 단계를 밟아 들어가는 실제 명상의 과정입니다. 처음 세 단계는 물질(형상)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로 구분됩니다. 물질을 지니고 물질을 보는 단계, 안으로는 물질에 대한 인식 없이 밖의 물질만 보는 단계, 그리고 아름다움 자체에 마음을 오롯이 두는 단계입니다.

묵상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안에서 보는지 밖에서 보는지에 따라 인상이 달라진 경험이 있나요? 지금 당장 답하지 않아도, 그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만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넘어서고 부딪힘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다양한 인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허공은 끝이 없다’며 무한한 허공의 영역에 들어 머무는 것이 넷째 해탈이니라. 이를 넘어 ‘의식은 끝이 없다’며 무한한 의식의 영역에 들어 머무는 것이 다섯째이니라.

Sabbaso rūpasaññānaṁ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ṁ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ṁ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catuttho vimokkho. Sabbaso ākāsānañcāyatanaṁ samatikkamma ‘anantaṁ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pañcamo vimokkh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물질을 다루던 앞의 세 단계를 지나, 이제부터는 형상 없는 경지로 들어갑니다. 넷째 해탈은 물질에 대한 인식 자체를 완전히 벗어나 무한한 허공에 드는 것이고, 다섯째는 그 허공의 인식마저 넘어 무한한 의식에 드는 것입니다. 이는 33장에서 다룬 의식이 머무는 다섯째·여섯째 자리와 같은 경지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태어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수행자가 스스로 들어가는 선정의 단계로 다루어집니다.

묵상

생각이 하나씩 잦아들며 점점 넓어지기만 하는 상태를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그 상상이 흐릿해도 괜찮아요, 그런 방향이 있다는 것만 느껴 보아도 좋아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떠올려 보아도 됩니다.

무한한 의식의 영역을 넘어 ‘아무것도 없다’며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들어 머무는 것이 여섯째이고,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을 넘어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영역에 들어 머무는 것이 일곱째이니라.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ṁ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chaṭṭho vimokkho. Sabbaso ākiñcaññāyatanaṁ samatikkamm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sattamo vimokkh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여섯째와 일곱째 해탈로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과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영역까지 나아갑니다. 한 단계씩 더 미세하고 고요한 경지로 나아가는 이 흐름은, 앞서 33장에서 다룬 자리들을 수행자가 실제로 밟아 올라가는 순서와 정확히 겹칩니다. 다음 절에서 마지막 여덟째 해탈, 곧 인식과 느낌의 소멸에 이르러 이 흐름이 완결됩니다. 인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말하기 어려운 경계까지 다가선 자리이기도 합니다.

묵상

한 단계씩 더 고요해지는 과정을 몸으로 겪어 본 적이 있나요? 명상이 아니어도, 마음이 점점 가라앉던 순간이 있었다면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천천히 떠올려 보세요.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영역을 넘어 인식과 느낌의 소멸에 들어 머무는 것이 여덟째 해탈이니라. 아난다여, 이것이 여덟 해탈이니라.

Sabbas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ṁ samatikkamma saññāvedayitanirodha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aṭṭhamo vimokkho. Ime kho, ānanda, aṭṭha vimokkh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여덟 단계에 걸친 해탈의 마지막 자리, 곧 인식과 느낌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는 경지에 이르며 이 목록이 마무리됩니다. 물질을 보는 단계에서 시작해 형상 없는 영역들을 차례로 넘어, 끝내 인식과 느낌마저 없는 자리에 이르는 이 여덟 단계는 이 경뿐 아니라 여러 경에서 되풀이되는 잘 알려진 정형구입니다. 다음 36장에서는 이 여덟 해탈을 실제로 자유자재하게 넘나드는 경지가 설명됩니다.

묵상

생각도 느낌도 완전히 멈춘 상태를 상상하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두렵게 느껴지든 평온하게 느껴지든, 둘 다 자연스러운 반응이에요. 지금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천천히 떠올려 보세요.

아난다여, 수행자가 이 여덟 해탈을 순서대로도 들고 거꾸로도 들고 순서대로와 거꾸로도 들며,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들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며, 번뇌가 다하여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지금 여기서 스스로 직접 앎으로 실현하여 갖추어 머물면, 이를 일러 양쪽으로 해탈한 수행자라 하느니라. 아난다여, 이 양쪽으로 해탈함보다 더 높거나 더 뛰어난 양쪽으로 해탈함은 없느니라.

Yato kho, ānanda, bhikkhu ime aṭṭha vimokkhe anulomampi samāpajjati, paṭilomampi samāpajjati, anulomapaṭilomampi samāpajjati, yatthicchakaṁ yadicchakaṁ yāvaticchakaṁ samāpajjatipi vuṭṭhātipi. Āsavānañca khayā anāsavaṁ cetovimuttiṁ paññāvimuttiṁ diṭṭheva dhamme sayaṁ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vuccatānanda, bhikkhu ubhatobhāgavimutto. Imāya ca, ānanda, ubhatobhāgavimuttiyā aññā ubhatobhāgavimutti uttaritarā vā paṇītatarā vā natthī”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경 전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여덟 해탈을 순서대로도 거꾸로도,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게 되고, 그 위에 번뇌가 다한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까지 갖춘 이를 '양쪽으로 해탈한 이(우바또바가위뭇따)'라 부릅니다. 이는 34장의 '지혜로 해탈한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경지로, 선정의 자유자재함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모두 갖춘 상태입니다. 세존은 이보다 더 높은 해탈은 없다고 단언하시며 연기에서 시작해 해탈에 이르는 경 전체의 여정을 마무리하십니다.

묵상

어떤 상태에도 자유롭게 들고 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하나에 갇혀 있는 것과는 다른 자유일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유난히 벗어나기 어렵게 느끼는 상태가 있다면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 존자는 만족하여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였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o āyasmā ānando bhagavato bhāsitaṁ abhinandī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경을 맺는 서술자의 문장입니다. 세존께서 말씀을 마치셨고, 아난다 존자가 만족하여 기뻐했다는 짧은 서술로 긴 대화가 마무리됩니다. 경의 첫머리에서 아난다는 연기가 '뻔하다'고 말했다가 부처님께 곧바로 바로잡힌 바 있습니다. 연기의 사슬을 낱낱이 증명받고 자아에 대한 견해를 반박받고 해탈에 이르는 전 과정을 들은 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말이 온전히 되돌려지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경이 이 모음에서 두 번째 경임을 밝히는 편집자의 표시입니다.

묵상

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서야 비로소 처음의 내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깨달은 경험이 있나요? 그런 경험이 지금 어떻게 남아 있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