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을 자아로 여기다

느낌을 자아와 겹쳐 여기는 세 가지 견해를 하나씩 되물어 반박하고, 해탈에 이르는 길을 보입니다.

아난다여, 자아로 여기는 이들은 어떻게 여기는가? 아난다여, 느낌을 자아로 여기는 이는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느니라. 혹은 ‘느낌은 결코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끼지 않는다’라고 여기는 이도 있느니라. 혹은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나의 자아가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가 느끼나니,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지녔다’라고 여기는 이도 있느니라.

4. Attasamanupassanā Kittāvatā ca, ānanda, attānaṁ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Vedanaṁ vā hi, ānanda, attānaṁ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vedanā me attā’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ṁvedano me attā’ti iti vā hi, ānanda, attānaṁ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ṭisaṁvedano me attā,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iti vā hi, ānanda, attānaṁ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자아에 대한 논의가 세 번째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앞서는 물질을 기준으로 자아를 '규정'하는 방식을 다뤘다면, 이제는 느낌을 기준으로 자아를 '여기는' 세 가지 방식을 다룹니다. 첫째는 느낌 자체가 자아라고 여기는 것, 둘째는 느낌은 자아가 아니되 자아는 아예 느끼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셋째는 느낌도 아니고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되 자아가 느낄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다음 28~31장에서 하나씩 반박됩니다.

묵상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곧 '나 자신'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나요? 아니면 감정과 '나'는 별개라고 느껴지는 쪽에 더 가까운가요? 지금 드는 생각을 그대로 알아차려 보아도 좋아요. 둘 다일 수도 있어요.

아난다여, 그 가운데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하느니라. ‘벗이여, 이 세 가지 느낌이 있으니,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그대는 이 세 가지 느낌 가운데 어느 것을 자아로 여기는가?’

Tatrānanda, yo so evamāha: ‘vedanā me attā’ti, so evamassa vacanīyo: ‘tisso kho imā, āvuso, vedanā—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Imāsaṁ kho tvaṁ tissannaṁ vedanānaṁ katamaṁ attato samanupassasī’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느낌을 자아로 여기는 첫 번째 견해를 반박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방법은 직접 부정하는 대신 되묻는 것입니다. 느낌에는 즐거운 것, 괴로운 것, 중립적인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어느 것을 자아로 여기느냐고 묻습니다. 이 물음 자체가 이미 함정을 품고 있습니다. 셋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순간 나머지 둘은 자아가 아니게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음 절에서 이 함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어집니다.

묵상

만약 '이 느낌이 곧 나 자신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지금 이 순간의 어떤 느낌을 골라야 할지 떠올려 볼 수 있나요? 고르기 어렵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을 말해 주는 것 같나요? 답이 없어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을 느끼는 그때에는 괴로운 느낌도 느끼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느끼지 않으니, 그때에는 오직 즐거운 느낌만을 느끼느니라. 괴로운 느낌을 느끼는 그때에는 즐거운 느낌도 느끼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느끼지 않으니, 그때에는 오직 괴로운 느낌만을 느끼느니라.

Yasmiṁ, ānanda, samaye sukhaṁ vedanaṁ vedeti, neva tasmiṁ samaye dukkhaṁ vedanaṁ vedeti, na adukkhamasukhaṁ vedanaṁ vedeti; sukhaṁyeva tasmiṁ samaye vedanaṁ vedeti. Yasmiṁ, ānanda, samaye dukkhaṁ vedanaṁ vedeti, neva tasmiṁ samaye sukhaṁ vedanaṁ vedeti, na adukkhamasukhaṁ vedanaṁ vedeti; dukkhaṁyeva tasmiṁ samaye vedanaṁ vede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방금 던진 물음에 답하기 전에, 먼저 세 느낌의 성질을 확인합니다. 세 느낌은 결코 동시에 나타나지 않고 한 번에 하나씩만 나타난다는 것을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을 예로 들어 보입니다. 이는 '어느 느낌이 자아인가'라는 물음이 왜 성립하기 어려운지를 보여 주는 준비 단계입니다. 만약 느낌이 곧 자아라면, 느낌이 바뀔 때마다 자아도 매번 다른 것으로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묵상

기분 좋은 순간과 힘든 순간, 그 둘이 동시에 마음을 채운 적은 없다는 것을 떠올려 볼 수 있나요?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떤 느낌이 자리하고 있는지 잠시 살펴보아도 좋아요.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는 그때에는 즐거운 느낌도 느끼지 않고 괴로운 느낌도 느끼지 않으니, 그때에는 오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을 느끼느니라.

Yasmiṁ, ānanda, samaye adukkhamasukhaṁ vedanaṁ vedeti, neva tasmiṁ samaye sukhaṁ vedanaṁ vedeti, na dukkhaṁ vedanaṁ vedeti; adukkhamasukhaṁyeva tasmiṁ samaye vedanaṁ vede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세 번째 느낌, 곧 중립적인 느낌에도 같은 원칙을 마저 적용해 확인을 마칩니다. 이로써 세 느낌이 서로 겹치지 않고 번갈아 나타난다는 것이 완전히 확인되었습니다. 다음 29장에서는 이 세 느낌이 모두 무상하다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느낌이 자아다'라는 견해가 최종적으로 반박됩니다. 세 느낌 가운데 어느 하나로도 자아를 고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이 두 절 전체의 결론입니다.

묵상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저 덤덤한 순간에도 나름의 색깔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 본 적이 있나요? 그런 순간을 무시하지 않고 잠시 머물러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지금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느낌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모두 무상하고 지어진 것이고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다하는 성질과 사라지는 성질과 빛바래는 성질과 소멸하는 성질을 지녔느니라.

Sukhāpi kho, ānanda, vedanā aniccā saṅkhatā paṭiccasamuppannā khayadhammā vayadhammā virāgadhammā nirodhadhammā. Dukkhāpi kho, ānanda, vedanā aniccā saṅkhatā paṭiccasamuppannā khayadhammā vayadhammā virāgadhammā nirodhadhammā. Adukkhamasukhāpi kho, ānanda, vedanā aniccā saṅkhatā paṭiccasamuppannā khayadhammā vayadhammā virāgadhammā nirodhadhamm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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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느낌이 서로 겹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데 이어, 이제 그 셋 모두가 무상하다는 사실을 더합니다. 원문은 이 문장을 세 느낌 각각에 대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되풀이하는데, 여기서는 한 문장에 세 느낌을 나란히 놓아 옮겼습니다. 즐거운 느낌마저 예외 없이 무상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음 절에서 이 무상함이 '느낌을 자아로 여기는 이'에게 무엇을 뜻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묵상

기분 좋은 순간조차 붙잡아 두려 하면 이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있나요? 그 사실이 지금 어떻게 다가오나요? 아쉬움이든 다른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도,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도, 그때마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는 생각이 일고, 그 느낌이 사라지면 그때마다 ‘나의 자아가 사라져 버렸다’라는 생각이 이느니라.

Tassa sukhaṁ vedanaṁ vediyamānassa ‘eso me attā’ti hoti. Tassāyeva sukhāya vedanāya nirodhā ‘byagā me attā’ti hoti. Dukkhaṁ vedanaṁ vediyamānassa ‘eso me attā’ti hoti. Tassāyeva dukkhāya vedanāya nirodhā ‘byagā me attā’ti hoti. Adukkhamasukhaṁ vedanaṁ vediyamānassa ‘eso me attā’ti hoti. Tassāyeva adukkhamasukhāya vedanāya nirodhā ‘byagā me attā’ti ho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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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을 자아로 여기는 이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이는 대목입니다. 원문은 즐거운·괴로운· 중립적 느낌 각각에 대해 '이것이 나의 자아다'와 '나의 자아가 사라졌다'는 두 문장을 되풀이하는데, 여기서는 세 느낌을 하나로 묶어 옮겼습니다. 느낌이 바뀔 때마다 자아가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면, 그 자아는 한순간도 온전히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다음 절에서 내려지는 최종 판정의 근거가 됩니다.

묵상

기분이 바뀔 때마다 '나'라는 것도 함께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진 적이 있나요? 그 흔들림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지 없는지, 지금 굳이 답을 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해요.

이렇게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말하는 이는, 지금 여기서 무상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뒤섞이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질을 지닌 것을 자아로 여기는 것이니라.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로써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Iti so diṭṭheva dhamme aniccasukhadukkhavokiṇṇaṁ uppādavayadhammaṁ attānaṁ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yo so evamāha: ‘vedanā me attā’ti.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ṁ nakkhamati: ‘vedanā me attā’ti samanupassitu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느낌을 자아로 여기는 첫 번째 견해에 대한 반박을 매듭짓는 대목입니다. 느낌은 무상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뒤섞여 있고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인데, 그런 것을 자아라고 여긴다면 결국 자아 역시 그렇게 불안정한 것으로 규정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세존은 이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다음 30장에서는 두 번째 견해, 곧 '자아는 아예 느끼지 않는다'는 입장이 다루어집니다.

묵상

끊임없이 바뀌고 뒤섞이는 것에 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걸어 두었다면, 그것을 알아차린 지금 어떤 마음이 드나요? 답을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아난다여, 그 가운데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끼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하느니라. ‘벗이여, 그러나 느껴지는 것이 전혀 없는 곳에 ‘나는 있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로써 자아는 느끼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Tatrānanda, yo so evamāha: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ṁvedano me attā’ti, so evamassa vacanīyo: ‘yattha panāvuso, sabbaso vedayitaṁ natthi api nu kho, tattha “ayamahamasmī”ti siy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ṁ nakkhama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ṁvedano me attā’ti samanupassitu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두 번째 견해, 곧 느낌은 자아가 아니되 자아는 아예 느끼지 않는다는 입장을 반박합니다. 논증은 짧고 직접적입니다. 무언가를 느끼는 작용이 전혀 없는 곳에서 '나는 있다'라는 자기 인식 자체가 생겨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답은 '없다'입니다. 자아를 느낌과 완전히 떼어 놓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자아를 느낀다는 사실 자체에 기대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반전입니다.

묵상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이 언제 가장 뚜렷했는지 떠올려 보면, 그 순간에 어떤 감각이나 느낌이 함께 있었나요? 완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도 '나'를 느낄 수 있을지 가만히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아난다여, 그 가운데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나의 자아가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가 느끼나니,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지녔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하느니라.

Tatrānanda, yo so evamāha: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ṭisaṁvedano me attā,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So evamassa vacanīy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세 번째이자 마지막 견해를 반박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이 견해는 앞의 두 견해를 절충한 듯 보입니다. 느낌 자체는 아니지만, 자아가 느낄 수 있는 성질을 타고났다는 것입니다. 얼핏 균형 잡힌 입장처럼 들리지만, 다음 절에서 똑같은 방식의 되물음이 이 입장 역시 무너뜨립니다. 27장에서 예고된 세 견해 가운데 마지막 자리이며, 이 반박이 끝나면 자아에 대한 세 견해 전체가 매듭지어집니다.

묵상

느낌과 완전히 같지도,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자리에 '나'를 놓아 두려 한 적이 있나요? 그 자리가 실제로 어디였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벗이여, 느낌들이 남김없이 완전히, 어떤 식으로도 소멸한다고 하자. 느낌이 전혀 없어 느낌이 소멸하면, 그곳에 ‘나는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로써 자아가 느끼는 성질을 지녔다고 여기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vedanā ca hi, āvuso, sabbena sabbaṁ sabbathā sabbaṁ aparisesā nirujjheyyuṁ. Sabbaso vedanāya asati vedanānirodhā api nu kho tattha ‘ayamahamasmī’ti siyā”ti? “No hetaṁ, bhante”.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ṁ nakkhama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ṭisaṁvedano me attā,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samanupassitu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세 번째 견해를 무너뜨리는 되물음입니다. 만약 느낌이 완전히 소멸한다면, '나는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그래도 남아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답은 역시 '없다'입니다. 자아가 '느낄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실제로는 느낌에 기대어서만 자아를 확인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이로써 27장에서 제시된 세 견해, 곧 느낌이 자아다·자아는 안 느낀다·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지녔다는 세 입장이 모두 반박되었습니다.

묵상

'느낌이 전혀 없어도 나는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지,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나요?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아도, 그 물음 자체를 품어 보는 것으로 충분해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수행자가 느낌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느끼지 않는 것을 자아로 여기지도 않고, ‘나의 자아가 느끼나니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지녔다’라고 여기지도 않을 때, 이렇게 여기지 않는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취착하지 않으며, 취착하지 않아 동요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아 스스로 반열반하나니, ‘태어남은 다하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할 일을 마쳤으니, 다시는 이런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그는 아느니라.

Yato kho, ānanda, bhikkhu neva vedanaṁ attānaṁ samanupassati, nopi appaṭisaṁvedanaṁ attānaṁ samanupassati, nopi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samanupassati. So evaṁ na samanupassanto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anupādiyaṁ na paritassati, aparitassaṁ paccattaññeva parinibbāyati, ‘khīṇā jāti, vusitaṁ brahmacariyaṁ, kataṁ karaṇīyaṁ, nāparaṁ itthattāyā’ti pajānā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27~31장에 걸쳐 반박된 세 견해를 모두 내려놓았을 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이는, 자아에 대한 논의 전체의 결론입니다. 세 견해 가운데 어느 것도 붙들지 않는 수행자는 세상의 그 무엇도 취착하지 않고, 취착이 없으니 동요하지도 않으며, 동요가 없으니 스스로 반열반(완전히 사그라짐)에 이릅니다. '태어남은 다하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는 문장은 아라한과를 선언할 때 초기 경전에서 되풀이되는 정형구로, 자아에 대한 세 견해를 벗어나는 일이 곧 해탈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묵상

어떤 것을 '나'라고 붙들지 않을 때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나요? 아직 그런 경험이 낯설다면,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만 기억해 두어도 좋아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이렇게 마음이 해탈한 수행자를 두고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옳지 않으니, ‘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라는 말도, ‘여래는 죽은 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라는 말도, ‘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라는 말도,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다’라는 말도 옳지 않으니라.

Evaṁ vimuttacittaṁ kho, ānanda, bhikkhuṁ yo evaṁ vadeyya: ‘hoti tathāgato paraṁ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Na hoti tathāgato paraṁ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Hoti ca na ca hoti tathāgato paraṁ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Neva hoti na na hoti tathāgato paraṁ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해탈한 수행자에 대해 흔히 던져지는 네 가지 물음, 곧 여래(완전히 해탈한 이)가 죽은 뒤에 존재하는지를 둘러싼 네 갈래 견해(존재한다·존재하지 않는다·둘 다이다·둘 다 아니다)를 나열하며, 그 어느 쪽으로도 단정해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밝힙니다. 이 네 가지는 초기 경전에서 '설명되지 않는 것들'로 유명한 물음이며, 부처님은 늘 이 네 갈래 가운데 어느 것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 까닭이 설명됩니다.

묵상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을 붙들고 오래 씨름해 본 적이 있나요? 그 물음에 답을 내지 않고 그냥 내려놓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어떻게 느껴지나요? 낯설게 느껴져도 괜찮아요.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명칭과 언어와 개념과 지혜와 윤회가 미치는 범위, 그 모든 것을 직접 앎으로 해탈한 수행자를 두고 ‘그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으니라.

Taṁ kissa hetu? Yāvatā, ānanda, adhivacanaṁ yāvatā adhivacanapatho, yāvatā nirutti yāvatā niruttipatho, yāvatā paññatti yāvatā paññattipatho, yāvatā paññā yāvatā paññāvacaraṁ, yāvatā vaṭṭaṁ, yāvatā vaṭṭati, tadabhiññāvimutto bhikkhu, tadabhiññāvimuttaṁ bhikkhuṁ ‘na jānāti na passati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앞 절에서 네 가지 물음 모두를 물리친 까닭을 밝힙니다. 22장의 마무리에서 '이만큼이 이름과 언어와 설명과 지혜가 미치는 범위'라고 했던 것과 같은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여래가 죽은 뒤 어떠한지를 묻는 네 갈래 물음은 애초에 명칭과 언어와 개념과 지혜가 미치는 범위 안에서 던져지는데, 그 범위 전체를 직접 앎으로 꿰뚫어 해탈한 수행자에게 그 물음을 들이대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자아에 대한 긴 논의 전체가 마무리되고, 다음 33장부터는 의식이 머무는 자리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주제로 넘어갑니다.

묵상

말이나 개념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경험을 마주한 적이 있나요? 그럴 때는 굳이 말로 정리하려 애쓰지 않고 그냥 두어도 괜찮다는 것이, 지금 어떻게 다가오나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