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이 머무는 자리

중생이 태어날 수 있는 아홉 자리를 낱낱이 살펴, 그 어디에도 머물 이유가 없음을 보입니다.

아난다여, 의식이 머무는 자리는 일곱이고, 영역은 둘이니라. 무엇이 일곱인가? 아난다여, 몸이 다르고 인식도 다른 중생들이 있으니, 이를테면 인간과 어떤 신들과 악처에 떨어진 어떤 존재들이니라. 이것이 첫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5. Sattaviññāṇaṭṭhiti Satta kho, ānanda, viññāṇaṭṭhitiyo, dve āyatanāni. Katamā satta? Santānanda, sattā nān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manussā, ekacce ca devā, ekacce ca vinipātikā. Ayaṁ paṭhamā viññāṇaṭṭhi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자아에 대한 긴 논의를 마친 뒤, 경은 완전히 새로운 화제인 '의식이 머무는 자리'로 넘어갑니다. 이는 중생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존재의 영역을 몸과 인식의 같고 다름을 기준으로 일곱 가지로 분류한 것입니다. 첫 번째 자리는 몸도 다르고 인식도 다른 경우로, 인간과 낮은 하늘의 신들과 나쁜 곳에 태어난 존재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분류는 뒤이은 34장에서 각 자리에도 집착할 이유가 없음을 보이기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묵상

사람마다 몸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는 것을, 오늘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며 새삼 느껴 볼 수 있나요? 그 다름이 지금 어떻게 다가오나요? 불편함이든 신기함이든 있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몸은 다르나 인식은 하나인 중생들이 있으니, 첫 선정으로 다시 태어난 범천의 무리인 신들이니라. 이것이 두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아난다여, 몸은 하나이나 인식은 다른 중생들이 있으니, 빛나는 신들이니라. 이것이 세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Santānanda, sattā nānattakāyā ek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brahmakāyikā paṭhamābhinibbattā. Ayaṁ dutiyā viññāṇaṭṭhiti. Santānanda, sattā ek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ābhassarā. Ayaṁ tatiyā viññāṇaṭṭhi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두 번째와 세 번째 자리를 보입니다. 두 번째는 몸은 저마다 다르지만 인식은 하나로 같은 경우로, 첫 선정(초선)의 경지로 태어난 브라흐마 세계의 신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는 반대로 몸은 하나로 같지만 인식이 저마다 다른 경우로, 두 번째 선정에 해당하는 빛나는 신들의 세계입니다. 몸과 인식이라는 두 기준이 각각 같거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앞의 두 자리에 이어 계속 보여 줍니다.

묵상

겉모습은 저마다 달라도 마음이 통한다고 느낀 사람들이 있었나요? 반대로 겉모습은 비슷해도 마음이 제각각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나요? 둘 다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금은 그냥 넘어가도 됩니다.

아난다여, 몸도 하나이고 인식도 하나인 중생들이 있으니,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신들이니라. 이것이 네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아난다여,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넘어서고 부딪힘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다양한 인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허공은 끝이 없다’며 무한한 허공의 영역에 이른 중생들이 있느니라. 이것이 다섯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Santānanda, sattā ekattakāyā ek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subhakiṇhā. Ayaṁ catutthī viññāṇaṭṭhiti. Santānanda, sattā sabbaso rūpasaññānaṁ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ṁ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ṁ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ūpagā. Ayaṁ pañcamī viññāṇaṭṭhiti.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네 번째 자리는 몸도 인식도 모두 하나로 같은 경우로, 세 번째 선정에 해당하는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신들의 세계입니다. 이로써 몸과 인식의 같고 다름을 조합한 네 가지 자리가 모두 나왔습니다. 다섯 번째 자리부터는 기준이 바뀌어, 물질에 대한 인식 자체를 완전히 넘어선 무형의 경지, 곧 무한한 허공의 영역이 제시됩니다. 이는 몸을 지닌 세계에서 몸 없는 명상의 경지로 넘어가는 전환점입니다.

묵상

몸이라는 감각조차 넘어선 자리를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상상이 잘 그려지지 않아도, 그런 자리가 있다고 말해지는 것 자체를 가만히 받아들여 보아도 괜찮아요.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아난다여, 무한한 허공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의식은 끝이 없다’며 무한한 의식의 영역에 이른 중생들이 있느니라. 이것이 여섯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아난다여, 무한한 의식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아무것도 없다’며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이른 중생들이 있느니라. 이것이 일곱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이니라. 그 밖에 인식이 없는 중생의 영역과, 둘째로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영역이 있느니라.

Santānanda, sattā sabbaso ākāsānañcāyatanaṁ samatikkamma ‘anantaṁ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ūpagā. Ayaṁ chaṭṭhī viññāṇaṭṭhiti. Santānanda, sattā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ṁ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ūpagā. Ayaṁ sattamī viññāṇaṭṭhiti. Asaññasattāyatana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meva dutiyaṁ.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자리로 무한한 의식의 영역과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을 마저 보이고, 일곱 자리 전체를 마무리합니다. 이어서 이 일곱 자리에는 들지 않는 두 영역, 곧 인식이 아예 없는 중생의 영역과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영역을 따로 덧붙입니다. 이 둘이 '의식이 머무는 자리'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하나는 의식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고 다른 하나는 너무 미세해 '머문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음 34장에서는 이 일곱 자리와 두 영역 전부를 두고 즐거워할 만한지를 묻습니다.

묵상

더없이 고요하고 미세해서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마음 상태를 언뜻 스쳐 본 적이 있나요?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런 결이 있다는 것만 알아 두어도 좋아요.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아난다여, 이 가운데 몸도 다르고 인식도 다른, 이를테면 인간과 어떤 신들과 악처에 떨어진 어떤 존재들이라는 첫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자리가 있느니라. 그것을 알고 그 일어남을 알고 그 사라짐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위험을 알고 그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옳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

Tatrānanda, yāyaṁ paṭhamā viññāṇaṭṭhiti nān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manussā, ekacce ca devā, ekacce ca vinipātikā.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ā ca samudayaṁ pajānāti, tassā ca atthaṅgamaṁ pajānāti, tassā ca assādaṁ pajānāti, tassā ca ādīnavaṁ pajānāti, tassā ca nissaraṇaṁ pajānāti, kallaṁ nu tena tadabhinanditun”ti? “No hetaṁ, bhante” …pe…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33장에서 늘어놓은 일곱 자리와 두 영역을 하나씩 검토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물음은 한결같습니다. 그 자리의 본모습과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거기서 벗어나는 길까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 자리를 즐거워하는 것이 과연 옳겠느냐는 것입니다. 첫 번째 자리에 대한 답은 '아니다'입니다. 원문은 이 물음과 답을 나머지 여섯 자리에도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pe…'라는 표시로 줄였는데, 이는 후대의 생략이 아니라 경 자체에 새겨진 표시입니다. 즐거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은 일곱 자리 전부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묵상

지금 머무르고 싶은 어떤 마음 상태가 있다면, 그 상태가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까지 함께 알고 있어도 여전히 그것을 붙들고 싶을까요? 지금 뚜렷한 답이 없어도 괜찮아요. 물음만 품어 보아도 충분해요.

아난다여, 이 가운데 인식이 없는 중생의 영역이 있느니라. 그것을 알고 그 일어남을 알고 그 사라짐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위험을 알고 그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옳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tatrānanda, yamidaṁ asaññasattāyatanaṁ.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a ca samudayaṁ pajānāti, tassa ca atthaṅgamaṁ pajānāti, tassa ca assādaṁ pajānāti, tassa ca ādīnavaṁ pajānāti, tassa ca nissaraṇaṁ pajānāti, kallaṁ nu tena tadabhinanditun”ti? “No hetaṁ, bhante”.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일곱 자리에 이어, 그 바깥에 있는 두 영역 가운데 첫 번째인 '인식이 없는 중생의 영역'에도 똑같은 물음을 던집니다. 인식조차 없는 지극히 고요한 상태라 해도, 그 본모습을 아는 이에게는 즐거워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답입니다. 이는 소멸에 가까운 상태조차 붙들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33장의 분류에서 이 영역이 일곱 자리에 들지 못했던 것도, 인식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묵상

아무 생각도 인식도 없는 상태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고 느껴 본 적이 있나요? 그 상상이 실제로 무엇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살짝 들여다볼 수 있을까요? 답이 없어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이 가운데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영역이 있느니라. 그것을 알고 그 일어남을 알고 그 사라짐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위험을 알고 그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옳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수행자가 이 일곱 자리와 이 두 영역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 취착 없이 해탈하면, 이를 일러 지혜로 해탈한 수행자라 하느니라.’

“Tatrānanda, yamida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ṁ.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a ca samudayaṁ pajānāti, tassa ca atthaṅgamaṁ pajānāti, tassa ca assādaṁ pajānāti, tassa ca ādīnavaṁ pajānāti, tassa ca nissaraṇaṁ pajānāti, kallaṁ nu tena tadabhinanditun”ti? “No hetaṁ, bhante”. “Yato kho, ānanda, bhikkhu imāsañca sattannaṁ viññāṇaṭṭhitīnaṁ imesañca dvinnaṁ āyatanānaṁ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ṁ viditvā anupādā vimutto hoti, ayaṁ vuccatānanda, bhikkhu paññāvimutto.

디가 니까야 DN 15 대인연경 (Mahānidānasutta)

배경

마지막 영역인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영역'까지 같은 물음으로 확인을 마친 뒤, 33~34장 전체를 마무리 짓는 결론이 이어집니다. 일곱 자리와 두 영역, 이 아홉 가지 모두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 어디에도 취착하지 않는 수행자를 '지혜로 해탈한 이(빤냐위뭇따)'라 부릅니다. 가장 미세하고 고요한 경지까지도 예외 없이 검토 대상이 된다는 것이, 이 결론의 무게를 더합니다.

묵상

아무리 좋아 보이는 상태라도 그 안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 지금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오나요?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느껴 보아도 좋아요. 답을 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