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려는 집과 게으름이 낳은 것

한때 부정하다던 일이 당연해지고, 편해지려는 마음이 쌓여 벼농사를 망치기까지

“바세타여, 그때는 이치 아니라 여겨지던 것이 오늘날에는 이치라 여겨지느니라. 그때 성적으로 결합하는 뭇 삶들은 한두 달 동안 마을이나 고을에 들어갈 수 없었느니라. 그러다가 뭇 삶들이 이 옳지 못한 일에 지나치게 빠져들자, 이제 그 옳지 못한 일을 감추기 위해 집을 짓기 시작하였느니라.”

8. Methunadhammasamācāra Adhammasammataṁ kho pana, vāseṭṭha, tena samayena hoti, tadetarahi dhammasammataṁ. Ye kho pana, vāseṭṭha, tena samayena sattā methunaṁ dhammaṁ paṭisevanti, te māsampi dvemāsampi na labhanti gāmaṁ vā nigamaṁ vā pavisituṁ. Yato kho te, vāseṭṭha, sattā tasmiṁ asaddhamme ativelaṁ pātabyataṁ āpajjiṁsu. Atha agārāni upakkamiṁsu kātuṁ tasseva asaddhammassa paṭicchādanattha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절에서 거센 비난을 받던 성적 결합이 이 절에서는 사회에 자리 잡아 가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한두 달의 격리라는 벌칙이 있었지만, 그런 일이 잦아지자 사람들은 그것을 그만두는 대신 아예 감추는 쪽을 택해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집"이라는 인류의 발명이 여기서는 편안함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려지며, 다음 카드에서는 또 다른 발명인 저장이 게으름에서 비롯됩니다.

묵상

잘못을 그만두는 대신 감추는 쪽을 택했던 경험이 있나요? 감추기 위해 들인 노력이, 차라리 다른 곳에 쓰였다면 어땠을지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지금이라면 다르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바세타여, 그때 게으른 성질의 어떤 뭇 삶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느니라. ‘오, 내가 어찌 저녁밥은 저녁에, 아침밥은 아침에 따로 벼를 거두어 오느라 애써야 하는가. 차라리 한 번에 저녁밥과 아침밥을 함께 거두어 오면 어떨까.’ 그리하여 그 뭇 삶은 한 번에 저녁밥과 아침밥을 함께 거두어 왔느니라.”

Atha kho, vāseṭṭha, aññatarassa sattassa alasajātikassa etadahosi: ‘ambho, kimevāhaṁ vihaññāmi sāliṁ āharanto sāyaṁ sāyamāsāya pāto pātarāsāya. Yannūnāhaṁ sāliṁ āhareyyaṁ sakideva sāyapātarāsāyā’ti. Atha kho so, vāseṭṭha, satto sāliṁ āhāsi sakideva sāyapātarāsāy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집을 짓기 시작한 데 이어, 이번에는 게으름에서 비롯된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됩니다. 하루에 두 번 벼를 거두던 수고를 줄이려고 한 번에 두 끼 분량을 거두어 오는 것인데, 이 사소해 보이는 선택이 다음 절들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벼가 원래 매일 저절로 다시 여물었다는 앞선 설정(16.2-16.3)을 기억하면, 이 선택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묵상

작은 편의를 위해 내린 선택이 나중에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진 경험이 있나요? 그 선택을 내리던 순간에는 무엇이 보이지 않았을까요? 지금이라면 무엇을 다르게 볼 수 있을지 천천히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때 다른 어떤 뭇 삶이 그 뭇 삶에게 다가가 말하였느니라. ‘여보게, 벼를 거두러 갑시다.’ ‘되었네, 나는 이미 한 번에 저녁밥과 아침밥을 함께 거두어 두었네.’ 그러자 그 뭇 삶도 그를 본떠 한 번에 이틀 치를 거두어 왔으니, ‘이렇게 해도 괜찮구나’ 하였느니라. … 이렇게 하여 마침내 어떤 뭇 삶은 한 번에 여드레 치를 거두어 왔으니, ‘이렇게 해도 괜찮구나’ 하였느니라.”

Atha kho, vāseṭṭha, aññataro satto yena so satt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taṁ sattaṁ etadavoca: ‘ehi, bho satta, sālāhāraṁ gamissāmā’ti. ‘Alaṁ, bho satta, āhato me sāli sakideva sāyapātarāsāyā’ti. Atha kho so, vāseṭṭha, satto tassa sattassa diṭṭhānugatiṁ āpajjamāno sāliṁ āhāsi sakideva dvīhāya. ‘Evampi kira, bho, sādhū’ti. … Atha kho so, vāseṭṭha, satto tassa sattassa diṭṭhānugatiṁ āpajjamāno sāliṁ āhāsi sakideva aṭṭhāhāya, ‘evampi kira, bho, sādhū’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한 존재의 게으름이 다른 존재에게 그대로 옮겨 붙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입니다. 원문은 이틀 치, 나흘 치, 여드레 치로 늘어나는 과정을 거의 같은 문장으로 세 번 되풀이하는데, 이 카드에서는 처음(이틀 치로 늘리는 장면)과 마지막(여드레 치까지 이른 결과)만 온전히 옮기고 가운데(나흘 치로 늘리는 장면)는 줄임표로 나타냈습니다. "이렇게 해도 괜찮구나"라는 안일한 생각이 매번 되풀이되며 점점 더 큰 저장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누군가 시작한 편법을 나도 괜찮겠지 하며 따라 한 적이 있나요? 그렇게 한 걸음씩 넓어진 선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살펴보아도 좋아요.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면 어디서 멈추고 싶은가요?

“바세타여, 그런데 그 뭇 삶들이 이렇게 벼를 쌓아 두고 먹기 시작하자, 낟알에 겨가 덮이고 뉘도 덮였으며, 베어 낸 자리는 다시 여물지 않아 거둔 흔적이 남게 되었고, 벼는 무더기무더기로 무리 지어 서게 되었느니라.”

Yato kho te, vāseṭṭha, sattā sannidhikārakaṁ sāliṁ upakkamiṁsu paribhuñjituṁ. Atha kaṇopi taṇḍulaṁ pariyonandhi, thusopi taṇḍulaṁ pariyonandhi; lūnampi nappaṭivirūḷhaṁ, apadānaṁ paññāyittha, saṇḍasaṇḍā sālayo aṭṭhaṁsu.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여드레 치까지 쌓아 두는 저장 습관이 낳은 결과입니다. 원래는 겨도 뉘도 없이 깨끗했고 거둔 자리가 하루 만에 다시 여물어 흔적조차 없었던 벼(16.1)가, 이제는 겨와 뉘로 덮이고 베어 낸 자리가 회복되지 않으며 무더기로 뭉쳐 자라는 지금의 벼로 바뀝니다. 저절로 넉넉하던 자연이 사람의 욕심 앞에서 유한한 자원으로 바뀌는 이 순간이, 다음 카드에서 뭇 삶들의 탄식과 반성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넉넉하던 것이 유한해지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달은 적이 있나요? 지금 당연하게 넉넉하다고 여기는 것 가운데,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있을까요? 잠시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