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디가 니까야 DN 27

인용된 가르침 71구절

이 경을 12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제사를 맡는 집안만 뛰어나다는 말은 옳은가 8구절

바라문 출신 두 수행자가 받은 모욕에서 경이 시작되는 자리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동쪽 승원, 미가라마따 강당에 머무셨다. 그때 바세타와 바라드와자는 수행자가 되기를 바라며 수행자들 사이에서 견습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저녁 무렵 홀로 있던 자리에서 나와 강당을 내려가 강당 그늘 아래 노지를 거닐고 계셨다.

Evaṁ me sutaṁ— ekaṁ samayaṁ bhagavā sāvatthiyaṁ viharati pubbārāme migāramātupāsāde. Tena kho pana samayena vāseṭṭhabhāradvājā bhikkhūsu parivasanti bhikkhubhāvaṁ ākaṅkhamānā. Atha kho bhagavā sāyanhasamayaṁ paṭisallānā vuṭṭhito pāsādā orohitvā pāsādapacchāyāyaṁ abbhokāse caṅkama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세상의 기원경을 여는 장면입니다. 바세타와 바라드와자는 둘 다 바라문 가문 출신으로, 아직 정식 수행자가 되지 못한 채 견습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존께서 저녁 산책을 하시는 평범한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이 경은 곧 바라문 계급의 우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긴 논의로 이어집니다. 두 사람이 바라문 출신이라는 사실이 뒤에 나올 대화의 배경이 됩니다.

묵상

자신이 속한 집단을 떠나 새로운 길을 걷기로 했을 때, 예전 집단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있나요? 그럴 때 어떤 마음으로 견뎠는지, 지금 돌아보면 그 마음이 어떻게 보이는지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는 세존께서 저녁 무렵 홀로 있던 자리에서 나와 강당을 내려가 강당 그늘 아래 노지를 거니시는 것을 보았다. 보고서 바라드와자에게 말하였다. “바라드와자 벗이여, 세존께서 저녁 무렵 강당 그늘 아래 노지를 거니십니다. 벗 바라드와자여, 우리도 세존께 가 봅시다. 어쩌면 세존의 곁에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Addasā kho vāseṭṭho bhagavantaṁ sāyanhasamayaṁ paṭisallānā vuṭṭhitaṁ pāsādā orohitvā pāsādapacchāyāyaṁ abbhokāse caṅkamantaṁ. Disvāna bhāradvājaṁ āmantesi: “ayaṁ, āvuso bhāradvāja, bhagavā sāyanhasamayaṁ paṭisallānā vuṭṭhito pāsādā orohitvā pāsādapacchāyāyaṁ abbhokāse caṅkamati. Āyāmāvuso bhāradvāja,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ssāma; appeva nāma labheyyāma bhagavato santikā dhammiṁ kathaṁ savanāyā”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바세타가 먼저 세존을 발견하고 바라드와자에게 함께 가자고 권하는 장면입니다. "어쩌면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소박하지만, 이 기대에서 시작된 대화가 뒤에서 세상의 기원과 계급의 유래를 다루는 긴 설법으로 번져 나갑니다. 다음 카드에서 바라드와자가 응하고 두 사람이 함께 세존께 다가가며, 그 뒤에야 비로소 세존께서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묵상

무언가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 하나로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간 경험이 있나요? 그 기대가 실제로 무엇으로 이어졌는지, 지금 돌아보면 어떤 마음이 드는지도 함께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벗이여.” 바라드와자는 바세타에게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바세타와 바라드와자는 세존께 다가가 절하고 세존을 뒤따라 거닐었다.

“Evamāvuso”ti kho bhāradvājo vāseṭṭhassa paccassosi. Atha kho vāseṭṭhabhāradvāj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ṁsu;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ṁ abhivādetvā bhagavantaṁ caṅkamantaṁ anucaṅkamiṁsu.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바라드와자가 바세타의 권유에 흔쾌히 응하고, 두 사람이 함께 세존께 다가가 절한 뒤 뒤따라 거니는 장면입니다. 아직 두 사람은 말을 건네지 못한 채 조용히 세존을 뒤따르기만 하는데, 이 침묵의 순간이 다음 절에서 세존께서 먼저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네시는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두 사람의 소박한 기대는 머지않아 뜻밖에도 계급 논쟁 전체를 여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묵상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청하러 갈 때, 말을 꺼내기 전 나란히 걷는 그 짧은 시간에는 어떤 마음이 오가나요? 설렘과 긴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컸는지, 지금 떠올리면 어떤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세존께서 바세타에게 말씀하셨다. “바세타여, 그대들은 둘 다 바라문 태생이고 바라문 가문 출신이면서, 바라문 가문에서 집을 떠나 출가하였느니라. 바세타여, 바라문들이 그대들을 욕하거나 비방하지는 않는가.” “세존이시여, 실로 바라문들은 있는 대로의 욕설로 저희를 남김없이 욕하고 비방합니다.” “바세타여, 그런데 바라문들은 어떻게 그대들을 욕하고 비방하는가.”

Atha kho bhagavā vāseṭṭhaṁ āmantesi: “tumhe khvattha, vāseṭṭha, brāhmaṇajaccā brāhmaṇakulīnā brāhmaṇakulā agārasmā anagāriyaṁ pabbajitā, kacci vo, vāseṭṭha, brāhmaṇā na akkosanti na paribhāsantī”ti? “Taggha no, bhante, brāhmaṇā akkosanti paribhāsanti attarūpāya paribhāsāya paripuṇṇāya, no aparipuṇṇāyā”ti. “Yathā kathaṁ pana vo, vāseṭṭha, brāhmaṇā akkosanti paribhāsanti attarūpāya paribhāsāya paripuṇṇāya, no aparipuṇṇāyā”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세존께서 먼저 두 사람의 처지를 헤아려 물으십니다. 바라문 가문 출신이면서 출가한 이들이 옛 동족에게 어떤 대우를 받는지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바세타는 숨김없이 "있는 대로의 욕설로 남김없이" 비방당하고 있다고 답하고, 상대를 다그치기보다 먼저 안부를 살피는 태도가 눈에 띕니다. 세존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말로 비방받는지 되물으십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다음 절에서 바라문들의 주장 그대로 인용됩니다.

묵상

자신이 선택한 길 때문에 예전에 속했던 곳에서 싫은 소리를 들었을 때, 그 말을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은 적이 있나요?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어땠는지, 털어놓지 못했다면 왜 그랬는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세존이시여, 바라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라문이야말로 가장 높은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낮다. 바라문이야말로 밝은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검다. 바라문만이 청정해지고, 바라문 아닌 이는 그러지 못한다. 바라문이야말로 범천의 친아들, 그 입에서 태어난 이, 범천이 낳고 범천이 지어내고 범천의 상속자다.’”

“Brāhmaṇā, bhante, evamāhaṁsu: ‘brāhmaṇova seṭṭho vaṇṇo, hīnā aññe vaṇṇā. Brāhmaṇova sukko vaṇṇo, kaṇhā aññe vaṇṇā. Brāhmaṇāva sujjhanti, no abrāhmaṇā. Brāhmaṇāva brahmuno puttā orasā mukhato jātā brahmajā brahmanimmitā brahmadāyād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바세타가 앞 절의 물음에 답하며 바라문들의 주장을 직접 인용합니다. 바라문 최고 계급론의 네 가지 근거, 곧 가장 높음, 가장 밝음, 오직 그들만의 청정함, 브라흐마의 친아들이라는 주장이 그대로 제시됩니다. 이 네 가지 주장은 뒤이은 세존의 반박에서 하나하나 다시 등장하므로, 원문 그대로 옮겨 다음 대화의 기준점으로 삼았습니다. 다음 카드에서는 이 주장에 이어지는, 출가한 두 사람을 향한 인신공격이 이어집니다.

묵상

누군가 태생이나 소속을 근거로 "너희는 원래 열등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그 말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그런데 그대들은 그 가장 높은 계급을 버리고 낮은 계급으로 들어갔다, 다름 아닌 머리를 민 가짜 수행자, 미천한 자, 검은 자, 우리 친족의 발에서 나온 자들에게로. 그것은 옳지 않고 마땅하지도 않다. 그대들이 가장 높은 계급을 버리고 낮은 계급으로 들어간 것은.’ 세존이시여, 바라문들은 저희를 이렇게 욕하고 비방합니다.”

Te tumhe seṭṭhaṁ vaṇṇaṁ hitvā hīnamattha vaṇṇaṁ ajjhupagatā, yadidaṁ muṇḍake samaṇake ibbhe kaṇhe bandhupādāpacce. Tayidaṁ na sādhu, tayidaṁ nappatirūpaṁ, yaṁ tumhe seṭṭhaṁ vaṇṇaṁ hitvā hīnamattha vaṇṇaṁ ajjhupagatā yadidaṁ muṇḍake samaṇake ibbhe kaṇhe bandhupādāpacce’ti. Evaṁ kho no, bhante, brāhmaṇā akkosanti paribhāsanti attarūpāya paribhāsāya paripuṇṇāya, no aparipuṇṇāyā”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의 네 가지 계급 주장에 이어, 이번에는 출가한 바세타와 바라드와자 두 사람을 직접 겨냥한 인신공격이 이어집니다. "머리를 민 가짜 사문", "우리 친족의 발에서 나온 자"라는 표현은 매우 모욕적인 말이며, 바세타는 이 말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세존께 그대로 전합니다. 감추거나 순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이 태도가, 다음 카드에서 이어질 세존의 반박에 힘을 실어 줍니다.

묵상

누군가 "너는 원래 있던 곳이 더 나았다"고 말하며 지금의 선택을 깎아내릴 때,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싶으신가요? 지금 떠오르는 그런 경험이 있다면 잠시 머물러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실로 바라문들은 옛일을 잊고서 그대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니라. ‘바라문이야말로 가장 높은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낮다. … 바라문이야말로 범천의 친아들, 그 입에서 태어난 이, 범천이 낳고 범천이 지어내고 범천의 상속자다.’

“Taggha vo, vāseṭṭha, brāhmaṇā porāṇaṁ assarantā evamāhaṁsu: … brāhmaṇāva brahmuno puttā orasā mukhato jātā brahmajā brahmanimmitā brahmadāyādā’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세존의 반박이 시작됩니다. 먼저 바라문들의 네 가지 주장을 앞 절과 똑같은 말로 다시 인용하시는데, 원문이 앞서 3.6-3.9에서 나온 것과 완전히 같은 문장이므로 이 카드에서는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만 옮기고 가운데 두 문장은 줄임표로 나타냈습니다. "옛일을 잊었다"는 말은 앞으로 나올 반박이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바라문들 자신도 알고 있었을 더 오래된 사실에 근거함을 미리 알리는 것입니다.

묵상

어떤 주장을 반박할 때, 그 주장을 먼저 정확히 되짚어 준 뒤에 반박하는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하지 않고 바로 반박했을 때와 어떤 차이가 있을지, 지금 떠오르는 예가 있다면 함께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런데 바라문의 여인들이 월경하고 임신하고 출산하고 젖을 먹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바라문들은 여인의 태에서 태어났으면서 이렇게 말하느니라. ‘바라문이야말로 가장 높은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낮다. … 바라문이야말로 범천의 친아들, 그 입에서 태어난 이, 범천이 낳고 범천이 지어내고 범천의 상속자다.’ 그들은 범천을 거짓으로 왜곡하고, 거짓을 말하며, 많은 허물을 짓는 것이니라.”

Dissanti kho pana, vāseṭṭha, brāhmaṇānaṁ brāhmaṇiyo utuniyopi gabbhiniyopi vijāyamānāpi pāyamānāpi. Te ca brāhmaṇā yonijāva samānā evamāhaṁsu: ‘brāhmaṇova seṭṭho vaṇṇo, hīnā aññe vaṇṇā; … brāhmaṇāva brahmuno puttā orasā mukhato jātā brahmajā brahmanimmitā brahmadāyādā’ti. Te brahmānañceva abbhācikkhanti, musā ca bhāsanti, bahuñca apuññaṁ pasavan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세존의 첫 반박 근거입니다. 바라문도 다른 계급과 똑같이 여인의 태에서 나고 자란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들어, "브라흐마의 입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이 관찰되는 사실과 어긋남을 보입니다. 원문은 4.8-4.11에서 앞서와 같은 네 문장을 다시 온전히 반복하므로, 이 카드에서는 처음 세 항목과 마지막 항목만 옮기고 가운데는 줄임표로 나타냈습니다. 결론은 강한 어조입니다 - 바라문들은 브라흐마를 거짓으로 왜곡하고, 거짓말을 하며, 많은 허물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묵상

어떤 주장이 그럴듯하게 들리다가도, 아주 단순한 사실 하나를 떠올리면 무너지는 경우가 있지요. 지금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어떤 구분이, 사실은 이런 단순한 확인만으로도 흔들릴 수 있지 않을까요?

2 행위가 사람을 가른다 15구절

네 계급 모두에서 나쁜 행위와 좋은 행위가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로 계급론을 반박하는 자리

“바세타여, 이 네 가지 계급이 있으니, 왕족, 바라문, 평민, 천민이니라.”

1. Catuvaṇṇasuddhi Cattārome, vāseṭṭha, vaṇṇā— khattiyā, brāhmaṇā, vessā, sudd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세존의 반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자리로, 원문은 이 대목에 "네 계급의 청정"이라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이는 경문이 아니라 후대 편집자가 붙인 표제이므로 그대로 옮기되 대화체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세존께서는 사회에 실제로 있는 네 계급, 곧 왕족·바라문·평민·천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논의를 시작하십니다. 계급이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 안에서 무엇이 사람을 가르는지를 되묻는 방식입니다.

묵상

어떤 구분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과, 그 구분이 사람의 가치를 정한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이야기일 수 있어요. 지금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구분 가운데, 이 둘을 구별해서 다시 생각해 볼 만한 것이 있을까요?

“바세타여, 왕족 가운데도 어떤 이는 살아있는 것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며,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하고, 이간하는 말을 하고, 거친 말을 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며, 탐욕스럽고, 악의를 품고, 삿된 견해를 지니느니라.”

Khattiyopi kho, vāseṭṭha, idhekacco pāṇātipātī hoti adinnādāyī kāmesumicchācārī musāvādī pisuṇavāco pharusavāco samphappalāpī abhijjhālu byāpannacitto micchādiṭṭhī.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왕족부터 시작해 열 가지 해로운 행위, 곧 살생·도둑질·삿된 음행·거짓말·이간질·거친 말·쓸데없는 말·탐욕·악의·삿된 견해를 하는 이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자리입니다. 이 열 가지는 불교 전통에서 "열 가지 해로운 행위"로 잘 알려진 목록과 같습니다. 몸·말·마음 셋으로 나눈 순서를 그대로 따릅니다. 다음 카드에서 이 행위들이 왜 나쁜지, 그리고 이것이 왕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이어집니다.

묵상

어느 집단에나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그 집단 전체를 판단할 때 얼마나 고려하고 있나요? 지금 떠오르는 집단이 있다면 잠시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그 판단이 공평했는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이런 것들은 해로우며 허물이 있고 익히지 말아야 하며 성자답지 못하니, 어두운 행위로서 어두운 결과를 낳아 지혜로운 이들의 나무람을 받나니, 왕족 가운데도 이런 이가 있느니라. 바라문 가운데도, 평민 가운데도, 천민 가운데도 마찬가지니라.”

Iti kho, vāseṭṭha, yeme dhammā akusalā akusalasaṅkhātā sāvajjā sāvajjasaṅkhātā asevitabbā asevitabbasaṅkhātā naalamariyā naalamariyasaṅkhātā kaṇhā kaṇhavipākā viññugarahitā, khattiyepi te idhekacce sandissanti. …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에서 나열된 열 가지 행위에 대한 평가입니다. 원문은 이 평가 문장을 바라문·평민·천민에 대해서도 같은 말로 그대로 되풀이하는데, 이 카드에서는 왕족의 경우만 온전히 옮기고 나머지 세 계급은 "마찬가지"로 줄였습니다. 핵심은 이 열 가지 나쁜 행위가 특정 계급에 국한되지 않고 네 계급 모두에 고루 나타난다는 것이며, 다음 카드에서는 반대로 좋은 행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 이어집니다.

묵상

어떤 행동이 "해롭다"고 판단할 때, 그 기준을 지금 나는 얼마나 분명히 알고 있나요? 그 기준이 어디서 왔는지, 스스로 정한 것인지 아니면 물려받은 것인지도 잠시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그러나 바세타여, 왕족 가운데도 어떤 이는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을 갖지 않으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고, 거친 말을 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며, 탐욕스럽지 않고, 악의가 없고, 바른 견해를 지니느니라.”

Khattiyopi kho, vāseṭṭha, idhekacco pāṇātipātā paṭivirato hoti, adinnādānā paṭivirato, kāmesumicchācārā paṭivirato, musāvādā paṭivirato, pisuṇāya vācāya paṭivirato, pharusāya vācāya paṭivirato, samphappalāpā paṭivirato, anabhijjhālu abyāpannacitto, sammādiṭṭhī.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자리입니다. 앞서 나열된 열 가지 해로운 행위를 하나하나 부정형으로 바꾸어, 그것을 하지 않는 이, 곧 좋은 행위를 하는 이가 왕족 가운데도 있다고 밝힙니다. 나쁜 행위(앞 카드)와 좋은 행위(이 카드)가 나란히 놓이는 구성이며, 이 둘을 함께 보아야 어느 한쪽만으로 판단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다음 카드에서 이 좋은 행위에 대한 평가와 다른 계급으로의 확장이 이어집니다.

묵상

나쁜 행위만이 아니라 좋은 행위도 특정 집단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기준을 다시 살펴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이런 것들은 이로우며 허물이 없고 익힐 만하며 성자다우니, 밝은 행위로서 밝은 결과를 낳아 지혜로운 이들의 칭찬을 받나니, 왕족 가운데도 이런 이가 있느니라. 바라문 가운데도, 평민 가운데도, 천민 가운데도 마찬가지니라.”

Iti kho, vāseṭṭha, yeme dhammā kusalā kusalasaṅkhātā anavajjā anavajjasaṅkhātā sevitabbā sevitabbasaṅkhātā alamariyā alamariyasaṅkhātā sukkā sukkavipākā viññuppasatthā, khattiyepi te idhekacce sandissanti. …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에서 나열된 좋은 행위에 대한 평가입니다. 원문 구조는 앞서 나쁜 행위를 평가한 문장과 정확히 대칭을 이루며, 이 카드에서도 왕족의 경우만 온전히 옮기고 나머지 세 계급은 "마찬가지"로 줄였습니다. "밝은 행위·밝은 결과·칭찬"이 "어두운 행위·어두운 결과·나무람"을 그대로 뒤집는 구조입니다. 나쁜 행위와 좋은 행위가 네 계급 모두에서 뒤섞여 나타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다음 절에서 이 둘이 "뒤섞여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어떤 행동이 "이롭다"고 판단할 때, 그 기준이 나쁜 행동을 가르는 기준과 정확히 반대라는 것을 알아차려 보아도 좋아요. 지금 그 기준을 스스로 세워 본다면 무엇일지 천천히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이렇게 네 계급 모두에서 어둡고 밝은 행위가 뒤섞여 나타나고, 지혜로운 이들의 나무람과 칭찬을 함께 받는데도, 바라문들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하느니라. ‘바라문이야말로 가장 높은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낮다. … 바라문이야말로 범천의 친아들, 그 입에서 태어난 이, 범천이 낳고 범천이 지어내고 범천의 상속자다.’

Imesu kho, vāseṭṭha, catūsu vaṇṇesu evaṁ ubhayavokiṇṇesu vattamānesu kaṇhasukkesu dhammesu viññugarahitesu ceva viññuppasatthesu ca yadettha brāhmaṇā evamāhaṁsu: ‘brāhmaṇova seṭṭho vaṇṇo, hīnā aññe vaṇṇā; … brāhmaṇāva brahmuno puttā orasā mukhato jātā brahmajā brahmanimmitā brahmadāyādā’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의 두 절에서 확인한 사실, 곧 어둡고 밝은 행위가 네 계급 모두에 뒤섞여 있다는 관찰을 요약한 뒤, 그런데도 바라문들이 여전히 앞서(3.6-3.9) 인용된 네 가지 주장을 되풀이한다고 지적합니다. 원문이 그 네 문장을 다시 그대로 인용하므로, 이 카드에서는 처음과 마지막 문장만 옮기고 가운데는 줄임표로 나타냈습니다. 사실과 주장이 이렇게 나란히 놓이면서 다음 절의 반박이 이어집니다.

묵상

사실이 이미 다르게 말하고 있는데도 예전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그런 모습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드나요? 나 자신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는지 돌아보아도 좋아요.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느니라.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바세타여, 이 네 계급 가운데 누구든 번뇌가 다하고 청정한 삶을 완성하여 할 일을 다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참된 목적을 이루어 존재의 족쇄를 남김없이 끊고 바르게 알아 해탈한 수행자가 있다면, 그는 이치로써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 불리나니, 이치 아닌 것으로는 아니니라.”

Taṁ tesaṁ viññū nānujānanti. Taṁ kissa hetu? Imesañhi, vāseṭṭha, catunnaṁ vaṇṇānaṁ yo hoti bhikkhu arahaṁ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ṁyojano sammadaññāvimutto, so nesaṁ aggamakkhāyati dhammeneva, no adhammen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절의 바라문 주장에 대해 세존께서 내리시는 첫 번째 결론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그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 이유로 네 계급 어디서든 번뇌를 다한 아라한이 나올 수 있고 그가 "이치(담마)"로써 으뜸이 된다는 것을 듭니다. 여기서 "담마"는 태생이나 혈통이 아니라 사람이 수행을 통해 실제로 이루어 낸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며, 이 구별이 경 전체의 결론을 미리 보여 줍니다.

묵상

어떤 사람을 가장 존경할 만하다고 느낄 때, 그 존경은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는가에서 오나요, 아니면 그 사람이 실제로 이루어 낸 것에서 오나요? 지금 떠오르는 사람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 지금 여기서도 다음 생에서도 그러하니라. 이것을 이렇게도 알아야 하나니, 어떻게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은지를.”

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Tadamināpetaṁ, vāseṭṭha, pariyāyena veditabbaṁ, yathā dhammov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의 결론, "이치로써 으뜸이 된다"는 말을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다"는 후렴으로 못 박습니다. 이 후렴은 경 전체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되며 각 논의의 매듭을 짓는 역할을 하는, 이 경의 중심 주제라 할 만한 문장입니다. 마지막 문장, "이렇게도 알아야 한다"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이 결론을 뒷받침하는 실제 사례가 제시될 것을 미리 알리는 문장입니다.

묵상

같은 결론이 다른 방식으로 다시 증명되는 것을 볼 때, 처음 한 번 들었을 때와 어떻게 다르게 다가오나요? 그 차이가 나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지도 잠시 천천히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은 수행자 고따마가 이웃한 사꺄족 가문에서 출가하였음을 알고 있느니라. 그런데 사꺄족은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을 따르는 처지이니, 사꺄족은 빠세나디 왕에게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 맞이하며 합장하고 예의를 갖추느니라. 바세타여, 사꺄족이 빠세나디 왕에게 갖추는 이 예의를, 빠세나디 왕은 오히려 여래에게 갖추나니, ‘수행자 고따마는 좋은 가문에서 났고 나는 나쁜 가문에서 났다.’

Jānāti kho, vāseṭṭha, rājā pasenadi kosalo: ‘samaṇo gotamo anantarā sakyakulā pabbajito’ti. Sakyā kho pana, vāseṭṭha, rañño pasenadissa kosalassa anuyuttā bhavanti. Karonti kho, vāseṭṭha, sakyā raññe pasenadimhi kosale nipaccakāraṁ abhivādanaṁ paccuṭṭhānaṁ añjalikammaṁ sāmīcikammaṁ. Iti kho, vāseṭṭha, yaṁ karonti sakyā raññe pasenadimhi kosale nipaccakāraṁ abhivādanaṁ paccuṭṭhānaṁ añjalikammaṁ sāmīcikammaṁ, karoti taṁ rājā pasenadi kosalo tathāgate nipaccakāraṁ abhivādanaṁ paccuṭṭhānaṁ añjalikammaṁ sāmīcikammaṁ, na naṁ ‘sujāto samaṇo gotamo, dujjātohamasm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담마가 태생을 넘어선다는 두 번째 실례로 빠세나디 왕의 일화가 제시됩니다. 사꺄족은 꼬살라국에 종속된 처지라 빠세나디 왕에게 신하로서 예를 갖추는데, 그 빠세나디 왕이 도리어 사꺄족 출신인 세존께 같은 예를 갖춘다는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왕이 세존을 그렇게 대우하는 이유가 다음 절에서 밝혀집니다. 인용부호 안의 말은 다음 절에서 부정될 왕의 생각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묵상

지위나 신분이 더 높은 사람이 오히려 다른 이유로 누군가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그때 그 예는 무엇 때문이라고 느껴졌는지, 왜 인상 깊었는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수행자 고따마는 힘이 세고 나는 약하다, 수행자 고따마는 잘생겼고 나는 못생겼다, 수행자 고따마는 권세가 있고 나는 보잘것없다’고 이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니라. 오히려 빠세나디 왕은 오직 이치를 존중하고 이치를 중히 여기고 이치를 받들고 이치를 공경하여, 그렇게 여래에게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 맞이하며 합장하고 예의를 갖추는 것이니라. 바세타여, 이것으로도 이렇게 알아야 하나니, 어떻게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은지를.”

Balavā samaṇo gotamo, dubbalohamasmi. Pāsādiko samaṇo gotamo, dubbaṇṇohamasmi. Mahesakkho samaṇo gotamo, appesakkhohamasmī’ti. Atha kho naṁ dhammaṁyeva sakkaronto dhammaṁ garuṁ karonto dhammaṁ mānento dhammaṁ pūjento dhammaṁ apacāyamāno evaṁ rājā pasenadi kosalo tathāgate nipaccakāraṁ karoti, abhivādanaṁ paccuṭṭhānaṁ añjalikammaṁ sāmīcikammaṁ. Imināpi kho etaṁ, vāseṭṭha, pariyāyena veditabbaṁ, yathā dhammov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절에서 인용된 왕의 생각을 세존께서 직접 부정하십니다. 왕이 세존께 예를 갖추는 것은 힘·외모·권세 같은 세속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오직 담마(이치) 그 자체를 존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아라한의 사례에 이어 담마가 태생을 넘어선다는 두 번째 실례로 제시된 것이며, 두 사례 모두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다"는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됩니다.

묵상

누군가를 존중할 때, 그 사람이 가진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키는 원칙이나 삶의 태도 때문이었던 적이 있나요? 그 존중은 조건 때문이었던 존중과 어떻게 달랐는지 천천히 견주어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대들은 서로 다른 태생, 다른 이름, 다른 가문, 다른 집안에서 집을 떠나 출가하였느니라. ‘그대들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그대들은 ‘저희는 사꺄의 아들을 따르는 수행자입니다’라고 밝히느니라.”

Tumhe khvattha, vāseṭṭha, nānājaccā nānānāmā nānāgottā nānākulā agārasmā anagāriyaṁ pabbajitā. ‘Ke tumhe’ti—puṭṭhā samānā ‘samaṇā sakyaputtiyāmhā’ti—paṭijānāth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세존께서 이제 바세타와 바라드와자 두 사람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십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태생과 가문 출신이면서도 똑같이 "사꺄의 아들을 따르는 사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앞서 바라문들의 계급 주장과 대비하여 읽으면, 이는 태생이 아니라 함께 따르는 스승과 길로 정체성을 삼는 완전히 다른 방식입니다. 태생의 차이가 하나의 새로운 정체성 앞에서 무의미해지는 이 모습이, 다음 카드에서 이어지는 더 깊은 선언의 바탕이 됩니다.

묵상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믿음이나 목표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나요? 그때 태생이나 배경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하게 느껴졌는지, 지금 돌아보면 어떤지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누구든 여래에 대한 믿음이 뿌리내리고 굳게 서서 확고하며 어떤 수행자나 바라문이나 신이나 마라나 브라흐마나 이 세상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이라면, 그는 이렇게 말해도 마땅하니라 - ‘나는 세존의 친아들, 그 입에서 태어난 이, 이치가 낳고 이치가 지어내고 이치의 상속자다.’”

Yassa kho panassa, vāseṭṭha, tathāgate saddhā niviṭṭhā mūlajātā patiṭṭhitā daḷhā asaṁhāriyā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ṁ, tassetaṁ kallaṁ vacanāya: ‘bhagavatomhi putto oraso mukhato jāto dhammajo dhammanimmito dhammadāyādo’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에서 확인한 공통의 이름에 이어, 여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갖춘 이라면 "나는 세존의 친아들, 이치가 낳은 이"라고 스스로 말해도 된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앞서 바라문들이 "브라흐마의 친아들"이라 자처한 것(3.9)과 정확히 같은 틀을 빌려, 태생이 아니라 믿음과 이치가 참된 혈통을 이룬다고 맞세우는 것이며, 다음 카드에서 그 근거가 되는 여래의 다른 이름들이 밝혀집니다.

묵상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깊어졌던 순간이 있나요? 그 믿음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는지, 지금도 그 믿음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천천히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바세타여, ‘이치의 몸’이라는 것도, ‘범천의 몸’이라는 것도, ‘이치가 된 이’라는 것도, ‘범천이 된 이’라는 것도, 모두 여래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니라.”

Taṁ kissa hetu? Tathāgatassa hetaṁ, vāseṭṭha, adhivacanaṁ ‘dhammakāyo’ itipi, ‘brahmakāyo’ itipi, ‘dhammabhūto’ itipi, ‘brahmabhūto’ itip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절에서 "이치의 상속자"라 말해도 되는 까닭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여래를 가리키는 여러 별칭, 곧 "이치의 몸(담마까야)", "브라흐마의 몸(브라흐마까야)", "이치가 된 이", "브라흐마가 된 이"가 나열되는데, 이는 바라문들이 신성시하는 "브라흐마"라는 말조차 결국 여래 자신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흡수됨을 보여 줍니다. 이로써 두 수행자를 향한 세존의 위로가 마무리되고, 다음 절부터는 세상이 어떻게 지금 모습에 이르렀는지를 밝히는 훨씬 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묵상

어떤 낱말이 원래 가리키던 것과는 다른 더 깊은 뜻으로 쓰이는 것을 알아차린 경험이 있나요? 그 낱말을 다시 볼 때 느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천천히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언젠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 세상이 수축하는 때가 있느니라. 세상이 수축할 때 뭇 삶은 대개 극광천에 태어나느니라.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먹으며,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며, 영광에 머물러 아주 오랜 세월을 그렇게 지내느니라.”

Hoti kho so, vāseṭṭha, samayo yaṁ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ayaṁ loko saṁvaṭṭati. Saṁvaṭṭamāne loke yebhuyyena sattā ābhassarasaṁvattanikā honti. Te tattha honti manomayā pītibhakkhā sayaṁpabhā antalikkhacarā subhaṭṭhāyino ciraṁ dīghamaddhānaṁ tiṭṭhan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이 절부터 경의 두 번째 큰 부분, 곧 세상이 지금 모습에 이르기까지의 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세존께서는 계급 논쟁을 떠나 우주가 주기적으로 수축과 팽창을 되풀이한다는 배경을 먼저 놓습니다. 세상이 수축할 때 뭇 삶은 극광천(빛으로 가득한 하늘 세계)에 태어나, 아직 몸이 없이 마음으로만 이루어진 채 기쁨을 양식으로 삼으며 스스로 빛을 냅니다. 이 최초의 상태가 다음 카드에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며 조금씩 무너져 가는 과정의 출발점입니다.

묵상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몸과 배고픔과 갈라진 처지가, 사실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생겨난 것이라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잠시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또 언젠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 세상이 팽창하는 때가 있느니라. 세상이 팽창할 때 뭇 삶은 대개 극광천의 무리에서 죽어 이 세상으로 오느니라. 그들은 여기서도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먹으며,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며, 영광에 머물러 아주 오랜 세월을 그렇게 지내느니라.”

Hoti kho so, vāseṭṭha, samayo yaṁ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ayaṁ loko vivaṭṭati. Vivaṭṭamāne loke yebhuyyena sattā ābhassarakāyā cavitvā itthattaṁ āgacchanti. Tedha honti manomayā pītibhakkhā sayaṁpabhā antalikkhacarā subhaṭṭhāyino ciraṁ dīghamaddhānaṁ tiṭṭhan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의 수축에 이어, 세상이 다시 팽창하는 국면입니다. 극광천에 머물던 뭇 삶이 이번에는 그 하늘에서 죽어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데, 아직은 몸이 없이 마음으로만 이루어진 최초의 상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앞 카드와 거의 같은 문장이 되풀이되는 것은 수축과 팽창이 대칭을 이루는 순환임을 보여 줍니다. 이 최초의 순수한 상태가 다음 절부터 땅의 단맛을 맛보면서 서서히 무너져 가는 것이 이 경 후반부 전체의 줄거리입니다.

묵상

무언가 다시 시작될 때, 이전의 순수했던 상태를 그대로 지니고 출발했던 경험이 있나요? 그 상태가 그 뒤로 어떻게 변해 갔는지, 지금은 무엇이 남아 있는지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3 빛으로 살던 시절 3구절

캄캄한 어둠 속에서 땅의 단맛을 맛본 뭇 삶이 몸을 갖게 되고, 해와 달이 나타나기까지

“바세타여, 그때는 온통 물뿐이라 캄캄한 암흑이었느니라. 해도 달도 보이지 않았고, 별과 별자리도 보이지 않았고, 밤낮도 구별되지 않았고, 한 달도 보름도 구별되지 않았고, 계절과 해도 구별되지 않았고, 여자와 남자도 구별되지 않았으니, 뭇 삶은 그저 ‘뭇 삶’이라고만 헤아려졌느니라.”

2. Rasapathavipātubhāva Ekodakībhūtaṁ kho pana, vāseṭṭha, tena samayena hoti andhakāro andhakāratimisā. Na candimasūriyā paññāyanti, na nakkhattāni tārakarūpāni paññāyanti, na rattindivā paññāyanti, na māsaḍḍhamāsā paññāyanti, na utusaṁvaccharā paññāyanti, na itthipumā paññāyanti, sattā sattātveva saṅkhyaṁ gacchan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세상이 팽창하기 시작한 태초의 모습을 그립니다. 아직 해도 달도, 밤낮도, 계절도, 심지어 남녀의 구별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원문에 "2. 땅에서 우러난 단맛이 나타나다"라는 편집자의 소제목이 있어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나뉘지 않은 상태를 먼저 그려 두어야, 뒤이어 하나씩 나타나는 것들이 무엇을 바꾸어 놓았는지 그 의미가 비로소 또렷해집니다.

묵상

아직 아무런 구별도 이름도 없던 상태를 상상해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구별들이 언젠가 하나씩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오는지, 그 시작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달라지는지 느껴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러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뭇 삶에게 땅에서 우러난 단맛이 물 위에 엉겨 붙었으니, 마치 뜨거운 우유죽이 식으면서 그 위에 막이 엉기듯 그렇게 나타났느니라. 그것은 빛깔을 갖추고 향기를 갖추고 맛을 갖추었으니, 마치 잘 정제된 버터나 응유처럼 그런 빛깔이었고, 마치 티 없는 야생 꿀처럼 그런 맛이었느니라.”

Atha kho tesaṁ, vāseṭṭha, sattānaṁ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rasapathavī udakasmiṁ samatani; seyyathāpi nāma payaso tattassa nibbāyamānassa upari santānakaṁ hoti; evameva pāturahosi. Sā ahosi vaṇṇasampannā gandhasampannā rasasampannā, seyyathāpi nāma sampannaṁ vā sappi sampannaṁ vā navanītaṁ evaṁvaṇṇā ahosi. Seyyathāpi nāma khuddamadhuṁ aneḷakaṁ; evamassādā ahos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온통 물뿐이던 세상에 최초의 변화가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물 위에 우유죽 막처럼 엉겨 붙은 "땅에서 우러난 단맛"은 빛깔·향기·맛을 모두 갖춘 것으로 묘사됩니다. 버터와 꿀에 빗댄 두 비유는 이것이 뭇 삶에게 얼마나 매혹적으로 다가왔는지를 미리 보여 주며, 이 매혹 자체는 아직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다음 절에서 실제로 누군가 그것을 맛보는 장면으로 이어지며 갈애가 시작됩니다.

묵상

무언가 유난히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그 매혹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수 있어요. 그다음에 무엇을 선택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 선택을 지금 다시 내린다면 어떻게 하고 싶은가요?

“바세타여, 그때 어떤 뭇 삶 하나가 성급한 성질이라 ‘오, 이것이 대체 무엇일까’ 하며 손가락으로 땅에서 우러난 단맛을 찍어 맛보았느니라.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자 그것이 그의 마음에 들었고, 그에게 갈애가 스며들었느니라. 바세타여, 다른 뭇 삶들도 그 뭇 삶을 본떠 손가락으로 땅에서 우러난 단맛을 찍어 맛보았느니라. 그들에게도 그것이 마음에 들었고, 그들에게도 갈애가 스며들었느니라.”

Atha kho, vāseṭṭha, aññataro satto lolajātiko: ‘ambho, kimevidaṁ bhavissatī’ti rasapathaviṁ aṅguliyā sāyi. Tassa rasapathaviṁ aṅguliyā sāyato acchādesi, taṇhā cassa okkami. Aññepi kho, vāseṭṭha, sattā tassa sattassa diṭṭhānugatiṁ āpajjamānā rasapathaviṁ aṅguliyā sāyiṁsu. Tesaṁ rasapathaviṁ aṅguliyā sāyataṁ acchādesi, taṇhā ca tesaṁ okkam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성급한 성질의 한 존재가 호기심에 손가락으로 단맛을 찍어 맛본 것이 "갈애"가 처음 생겨나는 순간으로 그려집니다. 다른 이들이 그를 따라 하면서 갈애는 한 존재에서 그치지 않고 퍼져 나갑니다. 이 갈애가 뒤에 이어지는 모든 타락과 계급 분화, 사회 제도의 출발점이 됩니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본" 작은 행동 하나가 얼마나 멀리까지 이어지는지가 이 경 전체의 은유적 뼈대입니다.

묵상

아주 작은 호기심이나 충동에서 시작된 일이, 나중에 돌아보니 훨씬 큰 흐름의 시작이었던 경험이 있나요? 그 작은 시작을 지금 다시 본다면 무엇이 보이는지, 후회와는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4 해와 달이 나타나다 4구절

뭇 삶이 스스로 빛을 잃고, 대신 해와 달과 시간의 흐름이 생겨나는 자리

“바세타여, 그러자 그 뭇 삶들은 땅에서 우러난 단맛을 손으로 뭉쳐 덩이로 만들어 먹기 시작했느니라.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들의 스스로 빛나던 빛이 사라졌느니라. 스스로 빛나던 빛이 사라지자 해와 달이 나타났느니라.”

3. Candimasūriyādipātubhāva Atha kho te, vāseṭṭha, sattā rasapathaviṁ hatthehi āluppakārakaṁ upakkamiṁsu paribhuñjituṁ. Yato kho te, vāseṭṭha, sattā rasapathaviṁ hatthehi āluppakārakaṁ upakkamiṁsu paribhuñjituṁ. Atha tesaṁ sattānaṁ sayaṁpabhā antaradhāyi. Sayaṁpabhāya antarahitāya candimasūriyā pāturahesu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던 것이 손으로 뭉쳐 먹는 것으로 발전하면서, 뭇 삶은 몸에서 나던 스스로의 빛을 잃습니다. 그 빛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해 해와 달이 나타납니다. 원문의 "3. 해와 달이 나타나다"라는 소제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몸이 거칠어질수록 스스로 빛나던 존재는 바깥의 빛에 의존하는 존재로 바뀌어 가며, 이는 뒤이은 모든 상실의 첫 사례이자 앞으로 되풀이될 패턴의 원형입니다.

묵상

더 많이 가지려 할수록 오히려 스스로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나요? 그 자리를 무엇이 대신 채웠는지,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아니면 여전히 아쉬운지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해와 달이 나타나자 별과 별자리가 나타났고, 별과 별자리가 나타나자 밤과 낮이 구별되었으며, 밤낮이 구별되자 한 달과 보름이 구별되었고, 한 달과 보름이 구별되자 계절과 해가 구별되었느니라. 바세타여, 이만큼에서 이 세상은 다시 팽창을 마쳤느니라.”

Candimasūriyesu pātubhūtesu nakkhattāni tārakarūpāni pāturahesuṁ. Nakkhattesu tārakarūpesu pātubhūtesu rattindivā paññāyiṁsu. Rattindivesu paññāyamānesu māsaḍḍhamāsā paññāyiṁsu. Māsaḍḍhamāsesu paññāyamānesu utusaṁvaccharā paññāyiṁsu. Ettāvatā kho, vāseṭṭha, ayaṁ loko puna vivaṭṭo ho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해와 달의 출현을 시작으로 별자리, 밤낮, 한 달과 보름, 계절과 해까지 시간의 단위들이 하나씩 연쇄적으로 갖추어지는 과정입니다. 이는 앞서 11.2에서 "해도 달도, 밤낮도, 계절도 구별되지 않았다"고 했던 미분화 상태가 정확히 역순으로 채워지는 모습이며, 이로써 세상은 물리적으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다만 사회와 도덕의 분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묵상

없던 것이 하나씩 자리를 잡아 가며 지금의 질서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가운데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것이 무엇인지 다시 보이나요? 그 발견이 낯설게 느껴지는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 뭇 삶들은 땅에서 우러난 단맛을 먹으며 그것을 양식으로 삼아 아주 오랜 세월을 지냈느니라. 그런데 그들이 땅에서 우러난 단맛을 먹으며 오래 지낼수록, 그만큼 몸이 점점 거칠어지고 생김새도 서로 달라졌으니, 어떤 이는 잘생기고 어떤 이는 못생기게 되었느니라. 그러자 잘생긴 뭇 삶들이 못생긴 뭇 삶들을 업신여기며 ‘우리가 저들보다 잘생겼다, 저들은 우리보다 못생겼다’고 하였느니라.”

Atha kho te, vāseṭṭha, sattā rasapathaviṁ paribhuñjantā tambhakkhā tadāhārā ciraṁ dīghamaddhānaṁ aṭṭhaṁsu. Yathā yathā kho te, vāseṭṭha, sattā rasapathaviṁ paribhuñjantā tambhakkhā tadāhārā ciraṁ dīghamaddhānaṁ aṭṭhaṁsu tathā tathā tesaṁ sattānaṁ rasapathaviṁ paribhuñjantānaṁ kharattañceva kāyasmiṁ okkami, vaṇṇavevaṇṇatā ca paññāyittha. Ekidaṁ sattā vaṇṇavanto honti, ekidaṁ sattā dubbaṇṇā. Tattha ye te sattā vaṇṇavanto, te dubbaṇṇe satte atimaññanti: ‘mayametehi vaṇṇavantatarā, amhehete dubbaṇṇatarā’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갈애로 시작된 변화가 몸의 차이로 이어집니다. 오래 먹을수록 몸이 거칠어지고 외모가 갈라지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잘생김"과 "못생김"이라는 우열의 구분이 등장하고, 곧바로 업신여김으로 이어집니다. 원문에서 "외모"를 가리키는 말(vaṇṇa)은 뒤에서 "계급"을 가리키는 바로 그 낱말이기도 합니다. 겉모습의 우열을 가리던 이 말이 훗날 신분의 우열을 가리는 말로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대목은 뒤에 나올 계급 차별의 원형을 미리 보여 줍니다.

묵상

겉모습의 작은 차이가 우열을 가르는 잣대로 쓰이는 것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드나요? 나 자신도 그런 잣대를 무심코 써 본 적이 있는지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작이 될 수 있어요.

“그들이 외모를 두고 서로를 업신여기는 교만에 빠지자, 그 교만을 조건으로 땅에서 우러난 단맛이 사라졌느니라. 단맛이 사라지자 그들은 모여서 탄식하였느니라. ‘아, 그 맛이여, 아, 그 맛이여.’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맛있는 것을 얻으면 ‘아, 이 맛이여, 아, 이 맛이여’라고 말하나니, 이는 그저 저 옛 태초의 말을 따라 할 뿐, 그 참뜻은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Tesaṁ vaṇṇātimānapaccayā mānātimānajātikānaṁ rasapathavī antaradhāyi. Rasāya pathaviyā antarahitāya sannipatiṁsu. Sannipatitvā anutthuniṁsu: ‘aho rasaṁ, aho rasan’ti. Tadetarahipi manussā kañcideva surasaṁ labhitvā evamāhaṁsu: ‘aho rasaṁ, aho rasan’ti. Tadeva porāṇaṁ aggaññaṁ akkharaṁ anusaranti, na tvevassa atthaṁ ājānan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외모를 둘러싼 교만이 낳은 첫 번째 상실입니다. 뭇 삶들의 자만이 원인이 되어 그토록 매혹적이던 단맛이 통째로 사라지고, 그들은 모여서 탄식합니다. 이 경은 이 탄식의 말("아, 그 맛이여")이 오늘날 사람들이 맛있는 것을 먹을 때 하는 말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밝히며, 사람들이 그 유래는 모른 채 옛말만 흉내 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어원 설명은 이 경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되는 서술 방식입니다.

묵상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쓰는 말 가운데, 사실은 오래된 사연이 숨어 있는 말이 있을까요? 그 유래를 알고 나면 그 말이 다르게 들릴 수도 있겠지요. 지금 떠오르는 말이 있다면 잠시 머물러 보아도 좋아요.

5 버섯에서 쪼개지는 열매까지 5구절

단맛이 사라진 자리를 땅버섯이, 다시 그 자리를 쪼개지는 열매가 채우는 자리

“바세타여, 땅에서 우러난 단맛이 사라지자 그 뭇 삶들에게 땅버섯이 나타났으니, 마치 버섯처럼 그렇게 나타났느니라. 그것은 빛깔을 갖추고 향기를 갖추고 맛을 갖추었으니, 마치 잘 정제된 버터나 응유처럼 그런 빛깔이었고, 마치 티 없는 야생 꿀처럼 그런 맛이었느니라.”

4. Bhūmipappaṭakapātubhāva Atha kho tesaṁ, vāseṭṭha, sattānaṁ rasāya pathaviyā antarahitāya bhūmipappaṭako pāturahosi. Seyyathāpi nāma ahicchattako; evameva pāturahosi. So ahosi vaṇṇasampanno gandhasampanno rasasampanno, seyyathāpi nāma sampannaṁ vā sappi sampannaṁ vā navanītaṁ evaṁvaṇṇo ahosi. Seyyathāpi nāma khuddamadhuṁ aneḷakaṁ; evamassādo ahos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땅에서 우러난 단맛이 사라진 뒤, 그 자리를 대신하는 두 번째 양식으로 땅버섯이 나타납니다. 앞서 단맛을 묘사한 것과 똑같이 빛깔·향기·맛을 갖춘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이 경 전체에서 되풀이되는 서술 방식입니다. 새로운 양식이 나타날 때마다 이전 것과 같은 표현으로 매혹적임을 강조한 뒤, 그것에 의존하면서 다시 타락이 반복되는 구조이며, 이 반복 자체가 이 경이 전하려는 교훈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잃은 자리에 다른 것이 채워졌던 경험이 있나요? 그 새로운 것이 이전 것과 얼마나 닮아 있었는지, 아니면 전혀 달랐는지, 지금은 그 자리를 어떻게 느끼는지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 뭇 삶들은 땅버섯을 먹기 시작했느니라. 그것을 양식으로 삼아 아주 오랜 세월을 지냈는데, 그렇게 먹을수록 몸이 더욱더 거칠어지고 생김새도 서로 달라졌으니, 어떤 이는 잘생기고 어떤 이는 못생기게 되었느니라. 잘생긴 뭇 삶들이 못생긴 뭇 삶들을 업신여기며 ‘우리가 저들보다 잘생겼다, 저들은 우리보다 못생겼다’고 하였느니라. 그들이 그렇게 외모를 두고 교만에 빠지자, 그 교만을 조건으로 땅버섯이 사라졌느니라.”

Atha kho te, vāseṭṭha, sattā bhūmipappaṭakaṁ upakkamiṁsu paribhuñjituṁ. Te taṁ paribhuñjantā tambhakkhā tadāhārā ciraṁ dīghamaddhānaṁ aṭṭhaṁsu. Yathā yathā kho te, vāseṭṭha, sattā bhūmipappaṭakaṁ paribhuñjantā tambhakkhā tadāhārā ciraṁ dīghamaddhānaṁ aṭṭhaṁsu tathā tathā tesaṁ sattānaṁ bhiyyoso mattāya kharattañceva kāyasmiṁ okkami, vaṇṇavevaṇṇatā ca paññāyittha. Ekidaṁ sattā vaṇṇavanto honti, ekidaṁ sattā dubbaṇṇā. Tattha ye te sattā vaṇṇavanto, te dubbaṇṇe satte atimaññanti: ‘mayametehi vaṇṇavantatarā, amhehete dubbaṇṇatarā’ti. Tesaṁ vaṇṇātimānapaccayā mānātimānajātikānaṁ bhūmipappaṭako antaradhāy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땅에서 우러난 단맛이 사라졌던 것과 똑같은 순서, 곧 오래 먹음, 몸이 거칠어짐, 외모의 우열, 업신여김, 교만, 소멸이 땅버섯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같은 실수가 다른 양식을 두고 다시 벌어지는 것을 보여 주어, 이것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뭇 삶에게 반복되는 성향임을 드러내며, 다음 카드에서는 세 번째 양식을 두고 또 한 번 똑같은 일이 되풀이됩니다.

묵상

같은 실수를 형태만 바꾸어 되풀이한 적이 있나요? 그 되풀이를 알아차린 순간 무엇이 보였는지, 그 뒤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여전히 되풀이되는 부분이 있는지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땅버섯이 사라지자 쪼개지는 열매가 나타났으니, 마치 대나무 열매처럼 그렇게 나타났느니라. 그것은 빛깔을 갖추고 향기를 갖추고 맛을 갖추었으니, 마치 잘 정제된 버터나 응유처럼 그런 빛깔이었고, 마치 티 없는 야생 꿀처럼 그런 맛이었느니라. 그 뭇 삶들은 쪼개지는 열매를 먹기 시작했느니라.”

5. Padālatāpātubhāva Bhūmipappaṭake antarahite padālatā pāturahosi, seyyathāpi nāma kalambukā; evameva pāturahosi. Sā ahosi vaṇṇasampannā gandhasampannā rasasampannā, seyyathāpi nāma sampannaṁ vā sappi sampannaṁ vā navanītaṁ evaṁvaṇṇā ahosi. Seyyathāpi nāma khuddamadhuṁ aneḷakaṁ; evamassādā ahosi. Atha kho te, vāseṭṭha, sattā padālataṁ upakkamiṁsu paribhuñjitu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땅버섯에 이어 세 번째 양식인 "쪼개지는 열매"가 나타납니다. 이번에도 앞서와 똑같은 표현으로 그 매혹을 그리는데, 이렇게 세 차례 같은 패턴이 되풀이되면서 독자는 이 열매 역시 곧 같은 운명을 맞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됩니다. 원문의 "5. 쪼개지는 열매가 나타나다"라는 소제목을 그대로 옮겼으며, 다음 카드에서 예상대로 같은 결말, 곧 교만과 소멸이 되풀이됩니다.

묵상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미 짐작하면서도 같은 패턴에 다시 들어서는 순간이 있지요. 그런 순간을 알아차렸을 때 멈출 수 있었나요, 아니면 그대로 흘러갔나요? 지금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면 잠시 머물러 보아도 좋아요.

“그것을 양식으로 삼아 아주 오랜 세월을 지냈는데, 그렇게 먹을수록 몸이 더욱더 거칠어지고 생김새도 서로 달라졌으니, 어떤 이는 잘생기고 어떤 이는 못생기게 되었느니라. 잘생긴 뭇 삶들이 못생긴 뭇 삶들을 업신여기며 ‘우리가 저들보다 잘생겼다, 저들은 우리보다 못생겼다’고 하였느니라. 그들이 그렇게 외모를 두고 교만에 빠지자, 그 교만을 조건으로 쪼개지는 열매가 사라졌느니라.”

Te taṁ paribhuñjantā tambhakkhā tadāhārā ciraṁ dīghamaddhānaṁ aṭṭhaṁsu. Yathā yathā kho te, vāseṭṭha, sattā padālataṁ paribhuñjantā tambhakkhā tadāhārā ciraṁ dīghamaddhānaṁ aṭṭhaṁsu tathā tathā tesaṁ sattānaṁ bhiyyoso mattāya kharattañceva kāyasmiṁ okkami, vaṇṇavevaṇṇatā ca paññāyittha. Ekidaṁ sattā vaṇṇavanto honti, ekidaṁ sattā dubbaṇṇā. Tattha ye te sattā vaṇṇavanto, te dubbaṇṇe satte atimaññanti: ‘mayametehi vaṇṇavantatarā, amhehete dubbaṇṇatarā’ti. Tesaṁ vaṇṇātimānapaccayā mānātimānajātikānaṁ padālatā antaradhāy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세 번째로 되풀이되는 같은 패턴입니다. 오래 먹음, 몸이 거칠어짐, 외모의 우열, 업신여김, 교만, 소멸이라는 순서가 땅에서 우러난 단맛과 땅버섯에 이어 쪼개지는 열매에서도 정확히 되풀이됩니다. 세 번째 반복에 이르러 이 패턴은 이제 뭇 삶에게 깊이 뿌리내린 성향으로 굳어졌음을 보여 주며, 다음 카드에서는 앞서와 다른 새로운 반응, 곧 상실의 탄식이 처음 등장합니다.

묵상

세 번째로 같은 일이 반복될 때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습관임을 알아차리게 되지요. 지금 나에게도 세 번 이상 되풀이된 어떤 패턴이 있나요? 그것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쪼개지는 열매가 사라지자 그들은 모여서 탄식하였느니라. ‘아, 우리가 잃었구나. 아, 우리에게서 사라졌구나, 그 쪼개지는 열매가.’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어떤 괴로운 일을 당하면 ‘아, 우리가 잃었구나. 아, 우리에게서 사라졌구나’라고 말하나니, 이는 그저 저 옛 태초의 말을 따라 할 뿐, 그 참뜻은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Padālatāya antarahitāya sannipatiṁsu. Sannipatitvā anutthuniṁsu: ‘ahu vata no, ahāyi vata no padālatā’ti. Tadetarahipi manussā kenaci dukkhadhammena phuṭṭhā evamāhaṁsu: ‘ahu vata no, ahāyi vata no’ti. Tadeva porāṇaṁ aggaññaṁ akkharaṁ anusaranti, na tvevassa atthaṁ ājānan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쪼개지는 열매가 사라지자 뭇 삶들의 탄식이 이번에는 "잃음"을 뜻하는 말로 나옵니다. 앞서 땅에서 우러난 단맛을 잃었을 때는 "그 맛이여"라며 그리워했다면, 이번에는 "잃었구나"라며 상실 자체를 슬퍼합니다. 이 경은 이 말 또한 오늘날 사람들이 괴로운 일을 당했을 때 하는 말과 뿌리가 같다고 밝히며, 그 유래를 모른 채 옛말만 흉내 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묵상

무언가를 잃었을 때 자연스레 튀어나오는 말이 있나요?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그 순간의 마음만은 진짜였다는 것을 알아차려 보아도 좋아요. 지금 그 말을 다시 떠올리면 어떤가요?

6 저절로 자라는 벼, 그리고 성이 나타나다 4구절

갈지 않아도 여무는 벼가 나타나고, 몸이 거칠어지며 남녀의 몸이 갈라지는 자리

“바세타여, 쪼개지는 열매가 사라지자 그 뭇 삶들에게 갈지 않아도 여무는 벼가 나타났으니, 겨도 없고 뉘도 없이 깨끗하고 향기로우며 낟알만 고왔느니라. 저녁밥으로 거두어 오면 아침이면 다시 여물어 있었고, 아침밥으로 거두어 오면 저녁이면 다시 여물어 있어, 거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느니라. 그 뭇 삶들은 이 갈지 않아도 여무는 벼를 먹으며 그것을 양식으로 삼아 아주 오랜 세월을 지냈느니라.”

6. Akaṭṭhapākasālipātubhāva Atha kho tesaṁ, vāseṭṭha, sattānaṁ padālatāya antarahitāya akaṭṭhapāko sāli pāturahosi akaṇo athuso suddho sugandho taṇḍulapphalo. Yaṁ taṁ sāyaṁ sāyamāsāya āharanti, pāto taṁ hoti pakkaṁ paṭivirūḷhaṁ. Yaṁ taṁ pāto pātarāsāya āharanti, sāyaṁ taṁ hoti pakkaṁ paṭivirūḷhaṁ; nāpadānaṁ paññāyati. Atha kho te, vāseṭṭha, sattā akaṭṭhapākaṁ sāliṁ paribhuñjantā tambhakkhā tadāhārā ciraṁ dīghamaddhānaṁ aṭṭhaṁsu.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쪼개지는 열매에 이어 네 번째 양식인 벼가 나타납니다. 겨도 뉘도 없이 깨끗한 데다, 거두어 온 자리에서 하루 만에 다시 여물어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는 묘사는 앞의 세 양식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애쓸 필요 없는 상태를 그립니다. 원문의 "6. 갈지 않아도 여무는 벼가 나타나다"라는 소제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 안락함이 뒤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가 이어지는 여러 절의 주제입니다.

묵상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 있었나요? 그런 여유로움이 계속될 것이라 여겼던 순간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그런데 그 뭇 삶들이 갈지 않아도 여무는 벼를 먹으며 그것을 양식으로 오래 지낼수록, 그만큼 몸이 더욱더 거칠어지고 생김새도 서로 달라졌으니, 여자에게는 여자의 특징이, 남자에게는 남자의 특징이 나타났느니라. 여자는 남자를 지나치게 오래 바라보고 남자도 여자를 그리하였느니라. 그렇게 서로를 지나치게 오래 바라보는 사이 탐욕이 일어났고, 몸에는 애타는 열기가 스며들었느니라.”

7. Itthipurisaliṅgapātubhāva Yathā yathā kho te, vāseṭṭha, sattā akaṭṭhapākaṁ sāliṁ paribhuñjantā tambhakkhā tadāhārā ciraṁ dīghamaddhānaṁ aṭṭhaṁsu tathā tathā tesaṁ sattānaṁ bhiyyoso mattāya kharattañceva kāyasmiṁ okkami, vaṇṇavevaṇṇatā ca paññāyittha, itthiyā ca itthiliṅgaṁ pāturahosi purisassa ca purisaliṅgaṁ. Itthī ca purisaṁ ativelaṁ upanijjhāyati puriso ca itthiṁ. Tesaṁ ativelaṁ aññamaññaṁ upanijjhāyataṁ sārāgo udapādi, pariḷāho kāyasmiṁ okkam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벼를 먹으며 몸이 거칠어지는 것은 앞서와 같은 패턴이지만, 이번에는 외모의 우열이 아니라 남녀의 신체적 차이가 처음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전환점을 이룹니다. 원문의 "7. 남녀의 특징이 나타나다"라는 소제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다 탐욕과 열기가 이는 과정은 다음 절의 성적 결합으로 곧바로 이어지며, 이 경에서 성별의 구별과 성적 욕망이 함께 등장하는 자리입니다.

묵상

몸의 변화나 새로운 감정이 낯설게 다가왔던 때를 기억하나요? 그런 낯섦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누군가에게 털어놓았는지, 아니면 혼자 삭이며 지냈는지도 천천히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그들은 그 열기로 인해 성적으로 결합하였느니라. 그때 다른 뭇 삶들이 그렇게 결합하는 이들을 보고서, 어떤 이는 흙을 던지고 어떤 이는 재를 던지고 어떤 이는 쇠똥을 던지며 ‘없어져라, 부정한 것아. 없어져라, 부정한 것아. 어찌 뭇 삶이 뭇 삶에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하였느니라.”

Te pariḷāhapaccayā methunaṁ dhammaṁ paṭiseviṁsu. Ye kho pana te, vāseṭṭha, tena samayena sattā passanti methunaṁ dhammaṁ paṭisevante, aññe paṁsuṁ khipanti, aññe seṭṭhiṁ khipanti, aññe gomayaṁ khipanti: ‘nassa asuci, nassa asucī’ti. ‘Kathañhi nāma satto sattassa evarūpaṁ karissatī’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남녀의 첫 성적 결합이 당시 사회에서는 부정한 것으로 여겨져 거센 비난을 받았음을 보여 줍니다. 흙과 재와 쇠똥을 던지며 "부정한 것"이라 외치는 반응은 지금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지만, 이는 이 경이 그리는 사회 변화가 결코 매끄럽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훗날 사회 전체가 받아들이는 일이 처음에는 이렇게 거센 거부를 겪었다는 점이 다음 카드에서 이어집니다.

묵상

지금은 자연스러운 일이 예전에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드나요? 그 비난이 지금 기준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오늘날에도 어떤 지방에서는 신부를 데려갈 때 어떤 이는 흙을 던지고 어떤 이는 재를 던지고 어떤 이는 쇠똥을 던지나니, 이는 그저 저 옛 태초의 말을 따라 할 뿐, 그 참뜻은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Tadetarahipi manussā ekaccesu janapadesu vadhuyā nibbuyhamānāya aññe paṁsuṁ khipanti, aññe seṭṭhiṁ khipanti, aññe gomayaṁ khipanti. Tadeva porāṇaṁ aggaññaṁ akkharaṁ anusaranti, na tvevassa atthaṁ ājānan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에서 성적 결합을 부정하다고 비난하며 흙과 재와 쇠똥을 던졌던 관습이, 오늘날 일부 지방의 결혼 풍습(신부에게 흙이나 재를 던지는 것)으로 흔적을 남겼다고 밝힙니다. 한때 지탄받던 일이 다음 절에서는 사회 전체가 받아들이는 일로 바뀌는데, 이 변화의 속도와 방향이 이 경이 그리는 사회 변화의 한 특징이며, 옛 관습의 흔적이 뜻도 모른 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묵상

한 시대에 손가락질받던 일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러운 일로 바뀌는 경우를 본 적이 있나요? 그 변화가 무엇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있을까요?

7 감추려는 집과 게으름이 낳은 것 4구절

한때 부정하다던 일이 당연해지고, 편해지려는 마음이 쌓여 벼농사를 망치기까지

“바세타여, 그때는 이치 아니라 여겨지던 것이 오늘날에는 이치라 여겨지느니라. 그때 성적으로 결합하는 뭇 삶들은 한두 달 동안 마을이나 고을에 들어갈 수 없었느니라. 그러다가 뭇 삶들이 이 옳지 못한 일에 지나치게 빠져들자, 이제 그 옳지 못한 일을 감추기 위해 집을 짓기 시작하였느니라.”

8. Methunadhammasamācāra Adhammasammataṁ kho pana, vāseṭṭha, tena samayena hoti, tadetarahi dhammasammataṁ. Ye kho pana, vāseṭṭha, tena samayena sattā methunaṁ dhammaṁ paṭisevanti, te māsampi dvemāsampi na labhanti gāmaṁ vā nigamaṁ vā pavisituṁ. Yato kho te, vāseṭṭha, sattā tasmiṁ asaddhamme ativelaṁ pātabyataṁ āpajjiṁsu. Atha agārāni upakkamiṁsu kātuṁ tasseva asaddhammassa paṭicchādanattha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절에서 거센 비난을 받던 성적 결합이 이 절에서는 사회에 자리 잡아 가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한두 달의 격리라는 벌칙이 있었지만, 그런 일이 잦아지자 사람들은 그것을 그만두는 대신 아예 감추는 쪽을 택해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집"이라는 인류의 발명이 여기서는 편안함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려지며, 다음 카드에서는 또 다른 발명인 저장이 게으름에서 비롯됩니다.

묵상

잘못을 그만두는 대신 감추는 쪽을 택했던 경험이 있나요? 감추기 위해 들인 노력이, 차라리 다른 곳에 쓰였다면 어땠을지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지금이라면 다르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바세타여, 그때 게으른 성질의 어떤 뭇 삶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느니라. ‘오, 내가 어찌 저녁밥은 저녁에, 아침밥은 아침에 따로 벼를 거두어 오느라 애써야 하는가. 차라리 한 번에 저녁밥과 아침밥을 함께 거두어 오면 어떨까.’ 그리하여 그 뭇 삶은 한 번에 저녁밥과 아침밥을 함께 거두어 왔느니라.”

Atha kho, vāseṭṭha, aññatarassa sattassa alasajātikassa etadahosi: ‘ambho, kimevāhaṁ vihaññāmi sāliṁ āharanto sāyaṁ sāyamāsāya pāto pātarāsāya. Yannūnāhaṁ sāliṁ āhareyyaṁ sakideva sāyapātarāsāyā’ti. Atha kho so, vāseṭṭha, satto sāliṁ āhāsi sakideva sāyapātarāsāy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집을 짓기 시작한 데 이어, 이번에는 게으름에서 비롯된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됩니다. 하루에 두 번 벼를 거두던 수고를 줄이려고 한 번에 두 끼 분량을 거두어 오는 것인데, 이 사소해 보이는 선택이 다음 절들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벼가 원래 매일 저절로 다시 여물었다는 앞선 설정(16.2-16.3)을 기억하면, 이 선택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묵상

작은 편의를 위해 내린 선택이 나중에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진 경험이 있나요? 그 선택을 내리던 순간에는 무엇이 보이지 않았을까요? 지금이라면 무엇을 다르게 볼 수 있을지 천천히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때 다른 어떤 뭇 삶이 그 뭇 삶에게 다가가 말하였느니라. ‘여보게, 벼를 거두러 갑시다.’ ‘되었네, 나는 이미 한 번에 저녁밥과 아침밥을 함께 거두어 두었네.’ 그러자 그 뭇 삶도 그를 본떠 한 번에 이틀 치를 거두어 왔으니, ‘이렇게 해도 괜찮구나’ 하였느니라. … 이렇게 하여 마침내 어떤 뭇 삶은 한 번에 여드레 치를 거두어 왔으니, ‘이렇게 해도 괜찮구나’ 하였느니라.”

Atha kho, vāseṭṭha, aññataro satto yena so satt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taṁ sattaṁ etadavoca: ‘ehi, bho satta, sālāhāraṁ gamissāmā’ti. ‘Alaṁ, bho satta, āhato me sāli sakideva sāyapātarāsāyā’ti. Atha kho so, vāseṭṭha, satto tassa sattassa diṭṭhānugatiṁ āpajjamāno sāliṁ āhāsi sakideva dvīhāya. ‘Evampi kira, bho, sādhū’ti. … Atha kho so, vāseṭṭha, satto tassa sattassa diṭṭhānugatiṁ āpajjamāno sāliṁ āhāsi sakideva aṭṭhāhāya, ‘evampi kira, bho, sādhū’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한 존재의 게으름이 다른 존재에게 그대로 옮겨 붙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입니다. 원문은 이틀 치, 나흘 치, 여드레 치로 늘어나는 과정을 거의 같은 문장으로 세 번 되풀이하는데, 이 카드에서는 처음(이틀 치로 늘리는 장면)과 마지막(여드레 치까지 이른 결과)만 온전히 옮기고 가운데(나흘 치로 늘리는 장면)는 줄임표로 나타냈습니다. "이렇게 해도 괜찮구나"라는 안일한 생각이 매번 되풀이되며 점점 더 큰 저장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누군가 시작한 편법을 나도 괜찮겠지 하며 따라 한 적이 있나요? 그렇게 한 걸음씩 넓어진 선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살펴보아도 좋아요.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면 어디서 멈추고 싶은가요?

“바세타여, 그런데 그 뭇 삶들이 이렇게 벼를 쌓아 두고 먹기 시작하자, 낟알에 겨가 덮이고 뉘도 덮였으며, 베어 낸 자리는 다시 여물지 않아 거둔 흔적이 남게 되었고, 벼는 무더기무더기로 무리 지어 서게 되었느니라.”

Yato kho te, vāseṭṭha, sattā sannidhikārakaṁ sāliṁ upakkamiṁsu paribhuñjituṁ. Atha kaṇopi taṇḍulaṁ pariyonandhi, thusopi taṇḍulaṁ pariyonandhi; lūnampi nappaṭivirūḷhaṁ, apadānaṁ paññāyittha, saṇḍasaṇḍā sālayo aṭṭhaṁsu.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여드레 치까지 쌓아 두는 저장 습관이 낳은 결과입니다. 원래는 겨도 뉘도 없이 깨끗했고 거둔 자리가 하루 만에 다시 여물어 흔적조차 없었던 벼(16.1)가, 이제는 겨와 뉘로 덮이고 베어 낸 자리가 회복되지 않으며 무더기로 뭉쳐 자라는 지금의 벼로 바뀝니다. 저절로 넉넉하던 자연이 사람의 욕심 앞에서 유한한 자원으로 바뀌는 이 순간이, 다음 카드에서 뭇 삶들의 탄식과 반성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넉넉하던 것이 유한해지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달은 적이 있나요? 지금 당연하게 넉넉하다고 여기는 것 가운데,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있을까요? 잠시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8 밭을 나누다 6구절

벼가 상해 가는 것을 보고 밭을 나누기로 하지만, 곧바로 도둑질과 매질이 뒤따르는 자리

“바세타여, 그 뭇 삶들은 모여서 탄식하였느니라. ‘아, 나쁜 것들이 뭇 삶들 사이에 나타났구나. 우리는 예전에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먹으며,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며, 영광에 머물러 아주 오랜 세월을 그렇게 지냈는데.’”

9. Sālivibhāga Atha kho te, vāseṭṭha, sattā sannipatiṁsu, sannipatitvā anutthuniṁsu: ‘pāpakā vata, bho, dhammā sattesu pātubhūtā. Mayañhi pubbe manomayā ahumhā pītibhakkhā sayaṁpabhā antalikkhacarā subhaṭṭhāyino, ciraṁ dīghamaddhānaṁ aṭṭhamh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벼농사가 망가진 것을 본 뭇 삶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처지 전체를 되돌아보며 탄식하는 자리입니다. "예전에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기쁨을 먹으며 스스로 빛나던" 최초의 상태(10.3, 10.6)를 스스로 떠올리는 이 대목부터, 이야기의 시점이 세존의 서술에서 뭇 삶 자신의 목소리로 바뀝니다. 다음 카드에서는 그 뒤로 벌어진 모든 일을 자신들의 입으로 처음부터 되짚는 긴 회고가 이어집니다.

묵상

지금의 상황이 힘겨울 때, 예전에는 더 단순하고 편안했던 시절을 그리워한 적이 있나요? 그 그리움이 지금 무엇을 알려 주는지, 그 시절로 정말 돌아가고 싶은지도 잠시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에게 땅에서 우러난 단맛이 물에 엉겼다… (우리의 나쁘고 해로운 것들 때문에 그 단맛이 사라지고, 땅버섯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쪼개지는 열매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마침내 갈지 않아도 여무는 벼가 나타났다.) …우리는 갈지 않아도 여무는 벼를 먹으며 그것을 양식으로 삼아 아주 오랜 세월을 지냈다…”

Tesaṁ no amhākaṁ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rasapathavī udakasmiṁ samatani. … Te mayaṁ akaṭṭhapākaṁ sāliṁ paribhuñjantā tambhakkhā tadāhārā ciraṁ dīghamaddhānaṁ aṭṭhamh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뭇 삶들이 앞서 10장에서 16장까지 세존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전체, 곧 땅에서 우러난 단맛부터 땅버섯, 쪼개지는 열매, 갈지 않아도 여무는 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건을 이번에는 1인칭 "우리"로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합니다. 원문은 앞서 나온 문장들을 인칭만 바꾸어 스물두 개의 절에 걸쳐 그대로 되풀이하므로, 이 카드에서는 그 회고 전체를 요약해 한 문단으로 옮기고 세부 문장은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앞서 나온 사건과 순서가 정확히 같다는 점, 그리고 이번에는 원인을 "우리의 나쁘고 해로운 것들" 때문이라고 스스로 밝힌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는 뭇 삶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것입니다.

묵상

지나온 일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탓"이라는 말로 다시 이야기해 본 적이 있나요? 그렇게 다시 말해 보면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 것이 있는지, 그 말이 자신을 탓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도 느껴 보아도 좋아요.

“…우리의 나쁘고 해로운 것들 때문에 이제 낟알에 겨가 덮이고 뉘도 덮였으며, 베어 낸 자리는 다시 여물지 않아 거둔 흔적이 남게 되었고, 벼는 무더기무더기로 무리 지어 서게 되었느니라. 우리가 차라리 벼를 나누어 경계를 세우면 어떨까.’ 바세타여, 그리하여 그 뭇 삶들은 벼를 나누고 경계를 세웠느니라.”

Tesaṁ no pāpakānaṁyeva akusalānaṁ dhammānaṁ pātubhāvā kaṇopi taṇḍulaṁ pariyonandhi, thusopi taṇḍulaṁ pariyonandhi, lūnampi nappaṭivirūḷhaṁ, apadānaṁ paññāyittha, saṇḍasaṇḍā sālayo ṭhitā. Yannūna mayaṁ sāliṁ vibhajeyyāma, mariyādaṁ ṭhapeyyāmā’ti. Atha kho te, vāseṭṭha, sattā sāliṁ vibhajiṁsu, mariyādaṁ ṭhapesu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긴 회고를 마친 뭇 삶들이 마침내 내린 결론입니다. 벼가 저절로 넉넉히 자라던 시절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것을 나누고 경계를 세워 각자의 몫을 정하자는 것입니다. 사유 재산과 소유의 경계라는 개념이 이 경에서 처음 등장하는 자리이며, 이는 좋은 뜻에서 나온 합의였지만 바로 다음 절에서 그 경계를 넘는 도둑질로 이어지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던 합의가 오히려 새로운 문제의 씨앗이 되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묵상

자원이 부족해지면 나누는 방식을 새로 정해야 할 때가 있지요. 그렇게 정한 경계가 나중에 오히려 다툼의 씨앗이 된 경험이 있나요? 처음 정할 때 무엇을 더 살폈더라면 좋았을지 천천히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때 성급한 성질의 어떤 뭇 삶이 자기 몫은 지키면서 남의 몫을 주지 않은 채로 가져다 먹었느니라.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말하였느니라. ‘그대는 나쁜 짓을 하였다, 벗이여. 자기 몫은 지키면서 남의 몫을 주지 않은 채로 가져다 먹다니.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 벗이여.’ ‘그리하겠습니다, 여러분.’ 그 뭇 삶은 그들에게 그렇게 대답하였느니라.”

Atha kho, vāseṭṭha, aññataro satto lolajātiko sakaṁ bhāgaṁ parirakkhanto aññataraṁ bhāgaṁ adinnaṁ ādiyitvā paribhuñji. Tamenaṁ aggahesuṁ, gahetvā etadavocuṁ: ‘pāpakaṁ vata, bho satta, karosi, yatra hi nāma sakaṁ bhāgaṁ parirakkhanto aññataraṁ bhāgaṁ adinnaṁ ādiyitvā paribhuñjasi. Māssu, bho satta, punapi evarūpamakāsī’ti. ‘Evaṁ, bho’ti kho, vāseṭṭha, so satto tesaṁ sattānaṁ paccassos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경계를 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도둑질이 벌어집니다. 앞서 첫 갈애(11.9)를 낸 존재도 "성급한 성질"이었다는 같은 표현이 여기서 되풀이되어, 도둑질 또한 갈애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암시합니다. 사람들은 아직 벌을 주지 않고 말로 타이르며 다짐만 받는데, 이 관용이 다음 절에서 세 번째 반복 뒤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면서 처벌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묵상

누군가 잘못을 했을 때 처음에는 말로 타이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 관용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관용과 방치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지도 천천히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런데 그 뭇 삶은 두 번째에도 … 세 번째에도 자기 몫은 지키면서 남의 몫을 주지 않은 채로 가져다 먹었느니라.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다시 말하였느니라. ‘그대는 나쁜 짓을 하였다, 벗이여. 자기 몫은 지키면서 남의 몫을 주지 않은 채로 가져다 먹다니.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 벗이여.’”

Dutiyampi kho, vāseṭṭha, so satto …pe… … tatiyampi kho, vāseṭṭha, so satto sakaṁ bhāgaṁ parirakkhanto aññataraṁ bhāgaṁ adinnaṁ ādiyitvā paribhuñji. Tamenaṁ aggahesuṁ, gahetvā etadavocuṁ: ‘pāpakaṁ vata, bho satta, karosi, yatra hi nāma sakaṁ bhāgaṁ parirakkhanto aññataraṁ bhāgaṁ adinnaṁ ādiyitvā paribhuñjasi. Māssu, bho satta, punapi evarūpamakāsī’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같은 존재가 두 번째, 세 번째로 도둑질을 되풀이합니다. 원문은 두 번째 반복을 "…pe…"로 줄이고 세 번째부터 다시 온전한 문장으로 서술하므로, 이 카드도 그 표시를 그대로 살렸습니다. 두 번은 말로 타일렀지만 세 번째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자, 말로 하는 타이름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나고, 다음 절에서는 마침내 말이 아니라 매질이 등장하며 처벌의 수위가 한 단계 높아집니다.

묵상

타이르는 말만으로는 멈추지 않는 행동을 본 적이 있나요? 그럴 때 다음 단계로 무엇이 필요하다고 느끼셨는지, 그 판단이 쉽지 않았다면 무엇이 가장 망설여졌는지도 천천히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그러자 사람들은 어떤 이는 주먹으로, 어떤 이는 돌로, 어떤 이는 몽둥이로 그를 때렸느니라. 바세타여, 바로 이날부터 도둑질이 나타났고, 비난이 나타났고, 거짓말이 나타났고, 몽둥이를 드는 일이 나타났느니라.”

Aññe pāṇinā pahariṁsu, aññe leḍḍunā pahariṁsu, aññe daṇḍena pahariṁsu. Tadagge kho, vāseṭṭha, adinnādānaṁ paññāyati, garahā paññāyati, musāvādo paññāyati, daṇḍādānaṁ paññāya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말로 타이르던 것이 마침내 물리적 처벌로 바뀌는 순간이며, 이 절의 마지막 문장이 이 대목 전체의 결론입니다. 도둑질·비난·거짓말·몽둥이질, 이 네 가지가 "바로 이날부터" 나타났다는 표현은 이것들이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생겨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 사회의 문제들이 하나의 사건에서 연쇄적으로 파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네 가지 문제가 다음 절에서 "재판관"을 세우는 계기가 됩니다.

묵상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어떤 갈등의 해결 방식이, 사실은 특정한 사건에서 비롯되어 굳어진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나요? 그 방식이 지금도 최선인지 다시 물어보아도 좋아요.

9 다 함께 뽑은 왕 5구절

도둑질과 매질이 그치지 않자, 대중이 함께 한 사람을 뽑아 다스림을 맡기는 자리

“바세타여, 그 뭇 삶들은 모여서 탄식하였느니라. ‘아, 나쁜 것들이 뭇 삶들 사이에 나타났구나, 도둑질도 나타나고 비난도 나타나고 거짓말도 나타나고 몽둥이를 드는 일도 나타나다니. 우리가 차라리 한 사람을 뽑아, 마땅히 나무랄 이를 나무라고 마땅히 비난할 이를 비난하고 마땅히 내쫓을 이를 내쫓게 하면 어떨까. 우리는 그 대가로 벼의 몫을 나누어 주리라.’”

10. Mahāsammatarājā Atha kho te, vāseṭṭha, sattā sannipatiṁsu, sannipatitvā anutthuniṁsu: ‘pāpakā vata bho dhammā sattesu pātubhūtā, yatra hi nāma adinnādānaṁ paññāyissati, garahā paññāyissati, musāvādo paññāyissati, daṇḍādānaṁ paññāyissati. Yannūna mayaṁ ekaṁ sattaṁ sammanneyyāma, yo no sammā khīyitabbaṁ khīyeyya, sammā garahitabbaṁ garaheyya, sammā pabbājetabbaṁ pabbājeyya. Mayaṁ panassa sālīnaṁ bhāgaṁ anuppadassāmā’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도둑질과 매질이 그치지 않자, 뭇 삶들은 이번에는 재판과 처벌을 한 사람에게 맡기고 그 대가로 벼를 나누어 주자는 새로운 합의에 이릅니다. 원문의 "10. 대중이 함께 뽑은 왕"이라는 소제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는 통치자와 세금(여기서는 벼의 몫)이라는 개념이 함께 등장하는 자리이며, 처벌을 개인의 손이 아니라 합의된 제도에 맡기려는 첫 시도이기도 합니다.

묵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정한 역할을 한 사람에게 맡기고 그 대가를 지불하자는 합의를 본 적이 있나요? 그런 합의가 만들어지는 순간에는 어떤 마음들이 오갔을지, 그 합의가 지금도 유효한지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 뭇 삶들은 자기들 가운데 가장 잘생기고 가장 보기 좋고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위엄 있는 이에게 다가가 말하였느니라. ‘이리 오시오, 그대여. 마땅히 나무랄 이를 나무라고 마땅히 비난할 이를 비난하고 마땅히 내쫓을 이를 내쫓아 주시오. 우리는 그 대가로 그대에게 벼의 몫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Atha kho te, vāseṭṭha, sattā yo nesaṁ satto abhirūpataro ca dassanīyataro ca pāsādikataro ca mahesakkhataro ca taṁ sattaṁ upasaṅkamitvā etadavocuṁ: ‘ehi, bho satta, sammā khīyitabbaṁ khīya, sammā garahitabbaṁ garaha, sammā pabbājetabbaṁ pabbājeh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뭇 삶들이 뽑은 이가 "가장 잘생기고 가장 위엄 있는 이"였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앞서 13장에서 외모의 우열이 업신여김의 근거였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같은 잣대가 지도자를 뽑는 근거로 쓰이며, 사람들이 흔히 지도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 첫 왕이 될 이에게 다가가 역할과 그 대가를 구체적으로 제안하는 이 장면이, 다음 카드에서 그가 응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사람들이 누군가를 지도자로 세울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그 기준이 지금과 그때가 얼마나 같거나 다를지, 나라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싶은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그리하겠습니다, 여러분.’ 그는 그들에게 그렇게 대답하고, 그대로 행하였느니라.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게 벼의 몫을 나누어 주었느니라.”

Mayaṁ pana te sālīnaṁ bhāgaṁ anuppadassāmā’ti. ‘Evaṁ, bho’ti kho, vāseṭṭha, so satto tesaṁ sattānaṁ paṭissuṇitvā sammā khīyitabbaṁ khīyi, sammā garahitabbaṁ garahi, sammā pabbājetabbaṁ pabbājesi. Te panassa sālīnaṁ bhāgaṁ anuppadaṁsu.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뽑힌 이가 제안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그 역할을 수행하자, 사람들은 약속대로 벼의 몫을 나누어 줍니다. 이 첫 왕은 강제로 권력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요청에 응해 역할을 맡고 그 대가를 받는 방식으로 등장하며, 이는 세습이나 정복이 아니라 합의와 계약에 가까운 성립 과정이며, 왕이라는 자리가 처음부터 그런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 줍니다. 다음 카드에서는 이 사건에서 비롯된 세 가지 칭호의 유래가 이어집니다.

묵상

누군가에게 역할을 맡기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약속이 실제로 지켜지는 것을 볼 때, 그 관계에 대한 신뢰가 어떻게 쌓여 가나요? 반대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어땠을지도 함께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대중이 뽑았다’는 뜻에서 ‘마하삼마따, 마하삼마따’라는 첫 번째 말이 생겨났느니라. ‘밭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캇띠야, 캇띠야’라는 두 번째 말이 생겨났느니라. ‘이치로써 남을 기쁘게 한다’는 뜻에서 ‘라자, 라자’라는 세 번째 말이 생겨났느니라.”

Mahājanasammatoti kho, vāseṭṭha, ‘mahāsammato, mahāsammato’ tveva paṭhamaṁ akkharaṁ upanibbattaṁ. Khettānaṁ adhipatīti kho, vāseṭṭha, ‘khattiyo, khattiyo’ tveva dutiyaṁ akkharaṁ upanibbattaṁ. Dhammena pare rañjetīti kho, vāseṭṭha, ‘rājā, rājā’ tveva tatiyaṁ akkharaṁ upanibbatta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서 왕이 된 이가 얻은 세 가지 칭호의 유래를 밝히는 어원 설명입니다. "마하삼마따(대중이 뽑음)", "캇띠야(밭의 주인)", "라자(이치로 기쁘게 함)"라는 세 말이 순서대로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 어원들은 정확한 언어학적 사실이라기보다 세존께서 계급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든 것으로, 핵심은 왕족이라는 신분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와 합의에서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묵상

어떤 자리나 신분의 유래를 알고 나면, 그것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기도 하지요.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어떤 지위의 유래를 안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궁금해지는 지위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바세타여, 이렇게 왕족의 무리는 그 옛 태초의 말로 생겨났으니, 다름 아닌 바로 그 뭇 삶들에게서, 다른 이들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부류에게서, 다른 부류가 아니라, 이치로써, 이치 아닌 것이 아니라 생겨난 것이니라. 바세타여,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 지금 여기서도 다음 생에서도 그러하니라.”

Iti kho, vāseṭṭha, evametassa khattiyamaṇḍalassa porāṇena aggaññena akkharena abhinibbatti ahosi tesaṁyeva sattānaṁ, anaññesaṁ. Sadisānaṁyeva, no asadisānaṁ. Dhammeneva, no adhammena. 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왕족 무리의 유래를 마무리하는 후렴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그 뭇 삶들에게서... 이치로써 생겨났다"는 이 문장은 뒤에 나올 바라문·평민·천민 무리의 유래를 마무리할 때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정형구이며, 그때마다 계급의 이름만 바뀔 뿐 결론은 언제나 "이치야말로 가장 높다"는 것입니다. 이 되풀이 자체가 네 무리 모두 같은 원리로 생겨났음을 강조하는 장치입니다.

묵상

같은 결론이 여러 다른 상황에 되풀이해서 적용되는 것을 볼 때, 그 결론이 얼마나 폭넓게 통하는 원리인지 느껴지나요? 지금 나의 삶에도 적용해 볼 수 있는 원리가 있는지 천천히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10 삶의 방식에 따라 서로 다른 세 무리가 생기다 9구절

왕족에 이어 바라문, 평민, 천민이라는 나머지 세 무리가 차례로 생겨나는 자리

“바세타여, 그런데 그 뭇 삶들 가운데 몇몇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느니라. ‘아, 나쁜 것들이 뭇 삶들 사이에 나타났구나, 도둑질도 나타나고 비난도 나타나고 거짓말도 나타나고 몽둥이를 드는 일도 나타나고 내쫓김도 나타나다니. 우리가 차라리 해롭고 나쁜 것들을 떨쳐 버리면 어떨까.’”

11. Brāhmaṇamaṇḍala Atha kho tesaṁ, vāseṭṭha, sattānaṁyeva ekaccānaṁ etadahosi: ‘pāpakā vata, bho, dhammā sattesu pātubhūtā, yatra hi nāma adinnādānaṁ paññāyissati, garahā paññāyissati, musāvādo paññāyissati, daṇḍādānaṁ paññāyissati, pabbājanaṁ paññāyissati. Yannūna mayaṁ pāpake akusale dhamme vāheyyāmā’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왕족에 이어 두 번째 무리, 바라문의 유래가 시작됩니다. 앞서 왕족이 통치를 맡는 쪽을 택했다면, 이 무리는 반대로 사회의 문제 자체에서 물러나 해롭고 나쁜 것들을 떨쳐 버리는 쪽을 생각합니다. 같은 문제 앞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대응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자리이며,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하지 않고 나란히 놓는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다음 카드에서 이 생각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행동에서 이름이 생겨납니다.

묵상

사회의 여러 문제를 마주할 때, 뛰어들어 바로잡으려는 쪽과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을 지키려는 쪽, 두 갈래 길이 있지요. 지금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요? 둘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그들은 해롭고 나쁜 것들을 떨쳐 버렸느니라. ‘해롭고 나쁜 것들을 떨쳐 버린다’는 뜻에서 ‘브라흐마나, 브라흐마나’라는 첫 번째 말이 생겨났느니라.”

Te pāpake akusale dhamme vāhesuṁ. Pāpake akusale dhamme vāhentīti kho, vāseṭṭha, ‘brāhmaṇā, brāhmaṇā’ tveva paṭhamaṁ akkharaṁ upanibbatta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의 생각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고, 그 행동에서 "브라흐마나(바라문)"이라는 이름이 생겨납니다. 원문은 "떨쳐 버린다(vāhenti)"는 말에서 이 이름이 나왔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바라문 스스로 "청정하다"고 자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훨씬 소박한 유래입니다. 앞서 3.8에서 인용된 "바라문만이 청정해진다"는 주장과 나란히 놓고 보면 그 대비가 더욱 뚜렷합니다.

묵상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나 정체성의 진짜 유래를 알게 된다면, 그것을 대하는 마음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자랑스러움이나 부끄러움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까울지, 아니면 둘 다 아닐지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그들은 숲 속에 나뭇잎으로 오두막을 짓고 그 오두막에서 선정을 닦았으니, 숯불도 피우지 않고 연기도 내지 않고 절굿공이도 내려놓은 채, 저녁이면 저녁밥을 아침이면 아침밥을 구하러 마을이나 고을이나 왕도로 내려왔다가, 밥을 얻으면 다시 숲 속 오두막으로 돌아가 선정을 닦았느니라.”

Te araññāyatane paṇṇakuṭiyo karitvā paṇṇakuṭīsu jhāyanti vītaṅgārā vītadhūmā pannamusalā sāyaṁ sāyamāsāya pāto pātarāsāya gāmanigamarājadhāniyo osaranti ghāsamesamānā. Te ghāsaṁ paṭilabhitvā punadeva araññāyatane paṇṇakuṭīsu jhāyan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해롭고 나쁜 것을 떨쳐 버린 이들이 숲으로 물러나 선정을 닦으며 최소한의 방식으로 생계를 잇는 모습입니다. 요리를 위해 불을 피우거나 땅을 파는 일조차 하지 않고 하루 두 번 마을에서 밥만 구해 온다는 묘사는 이후 불교 승가의 탁발 전통과도 이어지는 이상적인 은둔 수행자의 모습이며, 검소함과 절제가 처음부터 이 무리의 특징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음 카드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이 이어집니다.

묵상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내려놓았을 때,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것이 있었나요? 그런 경험이 있다면 무엇을 내려놓았는지, 그 뒤에 무엇이 더 선명해졌는지도 함께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사람들이 이를 보고 말하였느니라. ‘이 뭇 삶들은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그 오두막에서 선정을 닦는구나.’ ‘선정을 닦는다’는 뜻에서 ‘자야까, 자야까’라는 두 번째 말이 생겨났느니라.”

Tamenaṁ manussā disvā evamāhaṁsu: ‘ime kho, bho, sattā araññāyatane paṇṇakuṭiyo karitvā paṇṇakuṭīsu jhāyanti, vītaṅgārā vītadhūmā pannamusalā sāyaṁ sāyamāsāya pāto pātarāsāya gāmanigamarājadhāniyo osaranti ghāsamesamānā. Te ghāsaṁ paṭilabhitvā punadeva araññāyatane paṇṇakuṭīsu jhāyantī’ti, jhāyantīti kho, vāseṭṭha, ‘jhāyakā, jhāyakā’ tveva dutiyaṁ akkharaṁ upanibbatta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의 말에서 두 번째 이름 "자야까(선정을 닦는 이)"가 생겨납니다. 앞서 왕족의 이름들이 뭇 삶 스스로의 행동에서 나왔다면, 이 이름은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사람들의 말에서 나왔다는 점이 다르며, 이름이 늘 자기 선언만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다음 카드에서는 이 이름을 얻지 못하고 다른 길로 옮겨 간 이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며, 그들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붙습니다.

묵상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붙인 이름이나 평판이, 스스로 생각한 나의 모습과 얼마나 같거나 달랐던 경험이 있나요? 그 평판을 듣고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부인했는지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런데 그 뭇 삶들 가운데 몇몇은 숲 속 오두막에서 그 선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을이나 고을 근처로 내려와 머물며 책을 짓고 있었느니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말하였느니라. ‘이 뭇 삶들은 숲 속 오두막에서 선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을이나 고을 근처로 내려와 머물며 책을 짓는구나. 이제 이들은 선정을 닦지 않는구나.’ ‘이제 선정을 닦지 않는다’는 뜻에서 ‘앗자야까, 앗자야까’라는 세 번째 말이 생겨났느니라.”

Tesaṁyeva kho, vāseṭṭha, sattānaṁ ekacce sattā araññāyatane paṇṇakuṭīsu taṁ jhānaṁ anabhisambhuṇamānā gāmasāmantaṁ nigamasāmantaṁ osaritvā ganthe karontā acchanti. Tamenaṁ manussā disvā evamāhaṁsu: ‘ime kho, bho, sattā araññāyatane paṇṇakuṭīsu taṁ jhānaṁ anabhisambhuṇamānā gāmasāmantaṁ nigamasāmantaṁ osaritvā ganthe karontā acchanti, na dānime jhāyantī’ti. Na dānime jhāyantīti kho, vāseṭṭha, ‘ajjhāyakā, ajjhāyakā’ tveva tatiyaṁ akkharaṁ upanibbatta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숲의 선정 수행자들 가운데 일부가 그 수행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을 근처로 내려와 경전을 짓는 일로 옮겨 간 것에서 세 번째 이름 "앗자야까(경을 외는 이, 문헌에 밝은 이)"가 생겨납니다. 이 이름의 유래가 "더 이상 선정을 닦지 않는다"는 부정적 평가에서 나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다음 절에서는 한때 낮게 여겨지던 이 일이 훗날 오히려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묵상

한 가지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다른 길로 옮겨 간 것이, 시간이 지나고 보니 또 다른 가치를 지닌 선택이었던 경험이 있나요? 그때는 실패로 느껴졌더라도 지금 돌아보면 어떤 마음이 드나요?

“바세타여, 그때는 그것이 낮다고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그것이 가장 높다고 여겨지느니라. 바세타여, 이렇게 바라문의 무리는 그 옛 태초의 말로 생겨났으니, 다름 아닌 바로 그 뭇 삶들에게서, 다른 이들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부류에게서, 다른 부류가 아니라, 이치로써, 이치 아닌 것이 아니라 생겨난 것이니라. 바세타여,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 지금 여기서도 다음 생에서도 그러하니라.”

Hīnasammataṁ kho pana, vāseṭṭha, tena samayena hoti, tadetarahi seṭṭhasammataṁ. Iti kho, vāseṭṭha, evametassa brāhmaṇamaṇḍalassa porāṇena aggaññena akkharena abhinibbatti ahosi tesaṁyeva sattānaṁ, anaññesaṁ sadisānaṁyeva no asadisānaṁ dhammeneva, no adhammena. 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바라문 무리의 유래를 마무리하는 대목입니다. 문헌을 짓는 일이 한때는 선정을 포기한 낮은 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가장 높이 평가된다는 지적은, 사회적 평가라는 것이 얼마나 시대에 따라 뒤바뀌는지를 보여 줍니다. 왕족의 유래를 마무리했던 것과 똑같은 후렴("다름 아닌 바로 그 뭇 삶들에게서... 이치야말로 가장 높다")이 이번에도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묵상

한때 낮게 여겨지던 일이 지금은 높이 평가받는 경우를 알고 있나요? 그 평가는 무엇이 바뀌어서 달라졌을지, 지금의 평가도 언젠가 다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천천히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런데 그 뭇 삶들 가운데 몇몇은 성적 결합을 그대로 지니고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였느니라. ‘성적 결합을 지니고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한다’는 뜻에서 ‘벳사, 벳사’라는 말이 생겨났느니라. 바세타여, 이렇게 평민의 무리는 그 옛 태초의 말로 생겨났으니, 다름 아닌 바로 그 뭇 삶들에게서, 다른 부류가 아니라, 이치로써 생겨난 것이니라. 바세타여,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라.”

12. Vessamaṇḍala Tesaṁyeva kho, vāseṭṭha, sattānaṁ ekacce sattā methunaṁ dhammaṁ samādāya visukammante payojesuṁ. Methunaṁ dhammaṁ samādāya visukammante payojentīti kho, vāseṭṭha, ‘vessā, vessā’ tveva akkharaṁ upanibbattaṁ. Iti kho, vāseṭṭha, evametassa vessamaṇḍalassa porāṇena aggaññena akkharena abhinibbatti ahosi tesaññeva sattānaṁ anaññesaṁ sadisānaṁyeva, no asadisānaṁ, dhammeneva no adhammena. 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왕족과 바라문에 이어 세 번째 무리, 평민의 유래는 매우 짧게 다루어집니다. 성적 결합(가정을 이루는 삶)을 유지하며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서 "벳사(평민)"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원문의 "12. 평민의 무리"라는 소제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앞의 두 무리와 마찬가지로 같은 후렴으로 마무리되며, 이 카드에서는 반복되는 후렴 문구를 조금 줄여 옮겼습니다.

묵상

가정을 꾸리고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삶도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길이라는 것을, 지금 얼마나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있나요? 스스로의 하루하루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바세타여, 그런데 그 뭇 삶들 가운데 남은 이들은 거칠게 사냥하며 하찮은 일로 살아갔느니라. ‘거칠게 사냥하며 하찮은 일로 산다’는 뜻에서 ‘숫다, 숫다’라는 말이 생겨났느니라. 바세타여, 이렇게 천민의 무리는 그 옛 태초의 말로 생겨났으니, 다름 아닌 바로 그 뭇 삶들에게서, 다른 부류가 아니라, 이치로써 생겨난 것이니라. 바세타여,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라.”

13. Suddamaṇḍala Tesaññeva kho, vāseṭṭha, sattānaṁ ye te sattā avasesā te luddācārā khuddācārā ahesuṁ. Luddācārā khuddācārāti kho, vāseṭṭha, ‘suddā, suddā’ tveva akkharaṁ upanibbattaṁ. Iti kho, vāseṭṭha, evametassa suddamaṇḍalassa porāṇena aggaññena akkharena abhinibbatti ahosi tesaṁyeva sattānaṁ anaññesaṁ, sadisānaṁyeva no asadisānaṁ, dhammeneva, no adhammena. 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네 무리 가운데 마지막인 천민의 유래입니다. 앞의 세 무리가 각자 통치, 수행, 생업이라는 적극적인 선택에서 이름을 얻은 것과 달리, 이 무리는 "남은 이들"이라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소개됩니다. 원문 자체가 이 계급을 "거칠게 사냥하며 하찮은 일로 산다"는 표현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당시 사회의 편견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무리의 유래를 마무리하는 후렴은 앞의 세 무리와 똑같이 "이치로써 생겨났다"는 것이며, 뒤에 이어지는 절들에서는 이 네 무리 가운데 어디에서 태어났든 행위에 따라 같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묵상

사회가 어떤 일을 낮잡아 보는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나요? 그 시선과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실제 값어치는 다른 문제일 수 있어요. 지금 떠오르는 일이 있다면 다시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런데 이런 때가 있었으니, 왕족 가운데도 자기 삶의 방식을 나무라며 집을 떠나 출가하여 ‘나는 수행자가 되리라’ 하는 이가 있었고, 바라문 가운데도, 평민 가운데도, 천민 가운데도 마찬가지였느니라. 바세타여, 이 네 무리에서 수행자의 무리가 생겨났으니, 다름 아닌 바로 그 뭇 삶들에게서, 다른 부류가 아니라, 이치로써 생겨난 것이니라. 바세타여,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 지금 여기서도 다음 생에서도 그러하니라.”

Ahu kho so, vāseṭṭha, samayo, yaṁ khattiyopi sakaṁ dhammaṁ garahamāno agārasmā anagāriyaṁ pabbajati: ‘samaṇo bhavissāmī’ti. … suddopi kho, vāseṭṭha, sakaṁ dhammaṁ garahamāno agārasmā anagāriyaṁ pabbajati: ‘samaṇo bhavissāmī’ti. Imehi kho, vāseṭṭha, catūhi maṇḍalehi samaṇamaṇḍalassa abhinibbatti ahosi, tesaṁyeva sattānaṁ anaññesaṁ, sadisānaṁyeva no asadisānaṁ, dhammeneva no adhammena. 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왕족·바라문·평민·천민, 이 네 무리가 모두 자리 잡은 뒤, 이번에는 그 네 무리 각각에서 자기 삶의 방식을 등지고 출가하는 이들이 나타나 다섯 번째 무리인 "사문"이 생겨납니다. 원문은 바라문과 평민의 경우를 "…pe…"로 줄이고 있어 그대로 살렸습니다. 사문이라는 무리가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네 무리 모두에서 나올 수 있다는 점이, 뒤에 이어지는 "어느 계급에서든 아라한이 나올 수 있다"는 이 경의 결론을 준비합니다.

묵상

태어난 자리와 상관없이 스스로 새로운 길을 택해 걸어간 사람을 알고 있나요? 그 선택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지, 나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11 행위가 갈 곳을 정한다 3구절

태생이 아니라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지은 행위가 다음 생을 정한다는 결론

“바세타여, 왕족도 몸으로 나쁜 짓을 하고 말로 나쁜 짓을 하고 마음으로 나쁜 짓을 하며 삿된 견해를 지니고 삿된 견해에 따른 행위를 받아들이면, 그 인연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나쁜 곳·나쁜 길·파멸처·지옥에 태어나느니라. 바라문도, 평민도, 천민도, 사문도 마찬가지니라.”

14. Duccaritādikathā Khattiyopi kho, vāseṭṭha, kāyena duccaritaṁ caritvā vācāya duccaritaṁ caritvā manasā duccaritaṁ caritvā micchādiṭṭhiko micchādiṭṭhikammasamādāno micchādiṭṭhikammasamādānahetu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apāyaṁ duggatiṁ vinipātaṁ nirayaṁ upapajjati. …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왕족·바라문·평민·천민·사문이라는 다섯 무리의 유래를 모두 밝힌 뒤, 이제 그 유래와 무관하게 적용되는 원리로 넘어갑니다. 원문의 "14. 나쁜 행위에 대한 이야기"라는 소제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몸·말·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와 삿된 견해가 어느 무리에서 나왔든 똑같이 나쁜 곳에 태어나는 과보로 이어진다는 것이 핵심이며, 원문은 왕족의 경우를 온전히 서술한 뒤 나머지 넷은 "…pe…"로 줄여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묵상

어떤 결과가 그 사람의 출신이나 배경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 실제로 한 행동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것이, 지금 나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그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순간도 있을까요?

“바세타여, 왕족도 몸으로 좋은 일을 하고 말로 좋은 일을 하고 마음으로 좋은 일을 하며 바른 견해를 지니고 바른 견해에 따른 행위를 받아들이면, 그 인연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나느니라. 바라문도, 평민도, 천민도, 사문도 마찬가지니라.”

Khattiyopi kho, vāseṭṭha, kāyena sucaritaṁ caritvā vācāya sucaritaṁ caritvā manasā sucaritaṁ caritvā sammādiṭṭhiko sammādiṭṭhikammasamādāno sammādiṭṭhikammasamādānahetu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sugatiṁ saggaṁ lokaṁ upapajjati. …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자리입니다. 몸·말·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와 바른 견해가 다섯 무리 모두에서 똑같이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나는 과보로 이어집니다. 지옥으로 이끄는 조건과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이 구조가 업의 원리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나쁜 행위(앞 카드)와 좋은 행위(이 카드)가 나란히 놓이면서, 다음 카드의 "행위가 뒤섞인 경우"로 이어집니다.

묵상

좋은 결과도 나쁜 결과와 똑같이 태생이 아니라 행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지금의 노력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 노력을 앞으로 어떻게 이어가고 싶은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왕족도 몸으로 두 가지를 행하고 말로 두 가지를 행하고 마음으로 두 가지를 행하며 뒤섞인 견해를 지니고 뒤섞인 견해에 따른 행위를 받아들이면, 그 인연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겪게 되느니라. 바라문도, 평민도, 천민도, 사문도 마찬가지니라.”

Khattiyopi kho, vāseṭṭha, kāyena dvayakārī, vācāya dvayakārī, manasā dvayakārī, vimissadiṭṭhiko vimissadiṭṭhikammasamādāno vimissadiṭṭhikammasamādānahetu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sukhadukkhappaṭisaṁvedī hoti. …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나쁜 행위와 좋은 행위에 이어 세 번째 경우, 곧 둘이 뒤섞인 행위를 다룹니다. 실제 삶에서는 순전히 나쁘거나 순전히 좋은 경우보다 이렇게 뒤섞인 경우가 더 흔하다는 점에서, 이 카드는 앞의 두 극단적 사례보다 오히려 더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로써 다섯 무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세 가지 경우(나쁨·좋음·뒤섞임)가 완성되고, 다음 절부터는 이 뒤섞임을 넘어서는 길이 제시됩니다.

묵상

완전히 좋지도 완전히 나쁘지도 않은, 뒤섞인 행위들로 이루어진 자신의 하루를 떠올려 보면 어떤가요? 그 뒤섞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무엇이 시작될 수 있을까요? 애써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12 지혜와 실천을 갖춘 이가 으뜸이다 5구절

몸과 말과 마음을 단속하여 깨달음에 이르면 계급을 넘어선다는 결론과 브라흐마의 게송

“바세타여, 왕족도 몸을 단속하고 말을 단속하고 마음을 단속하여 깨달음으로 이끄는 일곱 가지 요소를 닦으면, 바로 이 삶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느니라. 바라문도, 평민도, 천민도, 사문도 마찬가지니라.”

15. Bodhipakkhiyabhāvanā Khattiyopi kho, vāseṭṭha, kāyena saṁvuto vācāya saṁvuto manasā saṁvuto sattannaṁ bodhipakkhiyānaṁ dhammānaṁ bhāvanamanvāya diṭṭheva dhamme parinibbāyati. …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나쁨·좋음·뒤섞임이라는 세 가지 과보를 넘어서는 네 번째 길이 제시됩니다. 원문의 "15. 깨달음으로 이끄는 요소를 닦음"이라는 소제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몸·말·마음을 단속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사띠·법을 가려 살핌·정진·희열·경안·삼매·평온)를 닦으면 다섯 무리 가운데 누구든 이 삶에서 바로 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는 계급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이 경의 결론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묵상

어떤 결과에 이르는 길이 타고난 조건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알면, 지금 내가 그 길에 들어설 마음이 조금 더 생기나요?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천천히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이 네 무리 가운데 누구든 번뇌가 다하고 청정한 삶을 완성하여 할 일을 다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참된 목적을 이루어 존재의 족쇄를 남김없이 끊고 바르게 알아 해탈한 수행자가 있다면, 그는 이치로써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 불리나니, 이치 아닌 것으로는 아니니라. 바세타여,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 지금 여기서도 다음 생에서도 그러하니라.”

Imesañhi, vāseṭṭha, catunnaṁ vaṇṇānaṁ yo hoti bhikkhu arahaṁ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ṁyojano sammadaññāvimutto, so nesaṁ aggamakkhāyati dhammeneva, no adhammena. 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이 경 앞부분(7.8-7.9)에서 이미 나왔던 문장이 여기서 그대로 되풀이되며 경 전체의 결론을 이룹니다. 계급 논쟁에서 시작해 세상의 기원, 사회 제도의 성립, 업의 원리까지 긴 이야기를 거친 뒤, 마지막에 다시 확인하는 것은 결국 처음과 같은 한 문장,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다"는 것입니다. 이 되풀이는 우연이 아니라, 그사이의 모든 이야기가 이 한 문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묵상

긴 이야기 끝에 처음 들었던 말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 말이 처음 들었을 때와 다르게 다가온 경험이 있나요? 지금 이 말은 어떻게 다가오는지, 그 차이가 무엇을 알려 주는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브라흐마 사낭꾸마라도 이런 게송을 읊었느니라. ‘왕족이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으뜸이니 가문을 따지는 이들에게는 그러하도다. 그러나 지혜와 실천을 갖춘 이는 신과 인간 가운데서도 으뜸이도다.’ 바세타여, 브라흐마 사낭꾸마라의 이 게송은 잘 노래되었지 잘못 노래되지 않았고, 잘 말해졌지 잘못 말해지지 않았고, 이롭지 해롭지 않으니, 나도 이에 동의하느니라.”

Brahmunā pesā, vāseṭṭha, sanaṅkumārena gāthā bhāsitā: ‘Khattiyo seṭṭho janetasmiṁ, ye gottapaṭisārino; Vijjācaraṇasampanno, so seṭṭho devamānuse’ti. Sā kho panesā, vāseṭṭha, brahmunā sanaṅkumārena gāthā sugītā, no duggītā. Subhāsitā, no dubbhāsitā. Atthasaṁhitā, no anatthasaṁhitā. Anumatā may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경의 결론부에서 세존께서는 뜻밖에도 바라문들이 신성시하는 브라흐마 신, 그중에서도 사낭꾸마라의 게송을 인용해 힘을 싣습니다. 이 게송은 가문을 따지는 세속의 기준에서는 왕족이 으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참으로 신과 인간을 통틀어 으뜸인 것은 "지혜와 실천을 갖춘 이"라고 노래합니다. 바라문 스스로 받드는 신의 입을 빌려 계급이 아니라 지혜와 실천이 참된 기준임을 확인시키는 절묘한 구성입니다.

묵상

세속의 기준으로 인정받는 것과, 그 사람이 실제로 갖춘 지혜와 실천으로 인정받는 것은 다른 이야기일 수 있어요. 지금 나는 어느 쪽을 더 갖추고 싶은가요? 둘 다일 필요는 없다는 것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나도 이렇게 말하노라. ‘왕족이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으뜸이니 가문을 따지는 이들에게는 그러하도다. 그러나 지혜와 실천을 갖춘 이는 신과 인간 가운데서도 으뜸이도다.’”

Ahampi, vāseṭṭha, evaṁ vadāmi— Khattiyo seṭṭho janetasmiṁ, ye gottapaṭisārino; Vijjācaraṇasampanno, so seṭṭho devamānuse”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세존께서 브라흐마 사낭꾸마라의 게송에 동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그 게송을 자신의 말로 직접 되풀이하십니다. 앞 카드에서 인용으로 그친 것이 여기서는 세존 자신의 선언이 됩니다. 이렇게 같은 게송이 두 번 놓이면서, 신의 말과 부처님의 말이 하나로 겹쳐 이 결론에 가장 무거운 권위를 실으며, 경 전체의 길고 복잡한 논의가 마침내 이 짧은 한 게송으로 수렴됩니다.

묵상

누군가 옳다고 인정한 것을 다시 자기 목소리로 되풀이해 말해 본 적이 있나요? 그렇게 되풀이하는 것이 단순한 반복 이상의 의미를 가질 때는 언제일지, 지금 떠오르는 말이 있다면 소리 내어 되뇌어 보아도 좋아요.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세타와 바라드와자는 기뻐하며 세존의 말씀을 반겼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vāseṭṭhabhāradvājā bhagavato bhāsitaṁ abhinandun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경 전체를 마무리하는 짧은 결말입니다. 바라문 출신인 두 수행자가 받은 모욕에서 시작된 이 긴 대화는, 계급의 유래와 세상의 기원을 거쳐 "이치와 지혜와 실천이 태생을 넘어선다"는 결론에 이르러 두 사람의 기쁨으로 끝을 맺습니다. 처음의 모욕과 끝의 기쁨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구성이며, 두 수행자는 끝까지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그저 기뻐하며 받아들일 뿐입니다.

묵상

오랜 시간 이어진 이야기 끝에 마음이 홀가분해지거나 무언가 풀렸다고 느낀 경험이 있나요? 이 긴 이야기를 따라온 지금, 어떤 마음이 남아 있는지 서두르지 않고 잠시 머물러 보아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