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세타여, 그런데 그 뭇 삶들 가운데 몇몇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느니라.
‘아, 나쁜 것들이 뭇 삶들 사이에 나타났구나,
도둑질도 나타나고 비난도 나타나고 거짓말도 나타나고 몽둥이를 드는 일도 나타나고 내쫓김도 나타나다니.
우리가 차라리 해롭고 나쁜 것들을 떨쳐 버리면 어떨까.’”
11. Brāhmaṇamaṇḍala Atha kho tesaṁ, vāseṭṭha, sattānaṁyeva ekaccānaṁ etadahosi: ‘pāpakā vata, bho, dhammā sattesu pātubhūtā, yatra hi nāma adinnādānaṁ paññāyissati, garahā paññāyissati, musāvādo paññāyissati, daṇḍādānaṁ paññāyissati, pabbājanaṁ paññāyissati. Yannūna mayaṁ pāpake akusale dhamme vāheyyāmā’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왕족에 이어 두 번째 무리, 바라문의 유래가 시작됩니다. 앞서 왕족이 통치를 맡는 쪽을 택했다면, 이 무리는 반대로 사회의 문제 자체에서 물러나 해롭고 나쁜 것들을 떨쳐 버리는 쪽을 생각합니다. 같은 문제 앞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대응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자리이며,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하지 않고 나란히 놓는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다음 카드에서 이 생각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행동에서 이름이 생겨납니다.
묵상
사회의 여러 문제를 마주할 때, 뛰어들어 바로잡으려는 쪽과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을 지키려는 쪽, 두 갈래 길이 있지요. 지금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요? 둘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그들은 해롭고 나쁜 것들을 떨쳐 버렸느니라. ‘해롭고 나쁜 것들을 떨쳐 버린다’는 뜻에서 ‘브라흐마나,
브라흐마나’라는 첫 번째 말이 생겨났느니라.”
Te pāpake akusale dhamme vāhesuṁ. Pāpake akusale dhamme vāhentīti kho, vāseṭṭha, ‘brāhmaṇā, brāhmaṇā’ tveva paṭhamaṁ akkharaṁ upanibbatta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의 생각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고, 그 행동에서 "브라흐마나(바라문)"이라는 이름이 생겨납니다. 원문은 "떨쳐 버린다(vāhenti)"는 말에서 이 이름이 나왔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바라문 스스로 "청정하다"고 자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훨씬 소박한 유래입니다. 앞서 3.8에서 인용된 "바라문만이 청정해진다"는 주장과 나란히 놓고 보면 그 대비가 더욱 뚜렷합니다.
묵상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나 정체성의 진짜 유래를 알게 된다면, 그것을 대하는 마음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자랑스러움이나 부끄러움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까울지, 아니면 둘 다 아닐지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그들은 숲 속에 나뭇잎으로 오두막을 짓고 그 오두막에서 선정을 닦았으니,
숯불도 피우지 않고 연기도 내지 않고 절굿공이도 내려놓은 채,
저녁이면 저녁밥을 아침이면 아침밥을 구하러 마을이나 고을이나 왕도로 내려왔다가,
밥을 얻으면 다시 숲 속 오두막으로 돌아가 선정을 닦았느니라.”
Te araññāyatane paṇṇakuṭiyo karitvā paṇṇakuṭīsu jhāyanti vītaṅgārā vītadhūmā pannamusalā sāyaṁ sāyamāsāya pāto pātarāsāya gāmanigamarājadhāniyo osaranti ghāsamesamānā. Te ghāsaṁ paṭilabhitvā punadeva araññāyatane paṇṇakuṭīsu jhāyanti.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해롭고 나쁜 것을 떨쳐 버린 이들이 숲으로 물러나 선정을 닦으며 최소한의 방식으로 생계를 잇는 모습입니다. 요리를 위해 불을 피우거나 땅을 파는 일조차 하지 않고 하루 두 번 마을에서 밥만 구해 온다는 묘사는 이후 불교 승가의 탁발 전통과도 이어지는 이상적인 은둔 수행자의 모습이며, 검소함과 절제가 처음부터 이 무리의 특징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음 카드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이 이어집니다.
묵상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내려놓았을 때,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것이 있었나요? 그런 경험이 있다면 무엇을 내려놓았는지, 그 뒤에 무엇이 더 선명해졌는지도 함께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사람들이 이를 보고 말하였느니라. ‘이 뭇 삶들은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그 오두막에서 선정을 닦는구나.’
‘선정을 닦는다’는 뜻에서 ‘자야까, 자야까’라는 두 번째 말이 생겨났느니라.”
Tamenaṁ manussā disvā evamāhaṁsu: ‘ime kho, bho, sattā araññāyatane paṇṇakuṭiyo karitvā paṇṇakuṭīsu jhāyanti, vītaṅgārā vītadhūmā pannamusalā sāyaṁ sāyamāsāya pāto pātarāsāya gāmanigamarājadhāniyo osaranti ghāsamesamānā. Te ghāsaṁ paṭilabhitvā punadeva araññāyatane paṇṇakuṭīsu jhāyantī’ti, jhāyantīti kho, vāseṭṭha, ‘jhāyakā, jhāyakā’ tveva dutiyaṁ akkharaṁ upanibbatta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앞 카드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의 말에서 두 번째 이름 "자야까(선정을 닦는 이)"가 생겨납니다. 앞서 왕족의 이름들이 뭇 삶 스스로의 행동에서 나왔다면, 이 이름은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사람들의 말에서 나왔다는 점이 다르며, 이름이 늘 자기 선언만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다음 카드에서는 이 이름을 얻지 못하고 다른 길로 옮겨 간 이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며, 그들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붙습니다.
묵상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붙인 이름이나 평판이, 스스로 생각한 나의 모습과 얼마나 같거나 달랐던 경험이 있나요? 그 평판을 듣고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부인했는지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런데 그 뭇 삶들 가운데 몇몇은 숲 속 오두막에서 그 선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을이나 고을 근처로 내려와 머물며 책을 짓고 있었느니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말하였느니라.
‘이 뭇 삶들은 숲 속 오두막에서 선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을이나 고을 근처로 내려와 머물며 책을 짓는구나. 이제 이들은 선정을 닦지 않는구나.’ ‘이제 선정을 닦지 않는다’는 뜻에서 ‘앗자야까, 앗자야까’라는 세 번째 말이 생겨났느니라.”
Tesaṁyeva kho, vāseṭṭha, sattānaṁ ekacce sattā araññāyatane paṇṇakuṭīsu taṁ jhānaṁ anabhisambhuṇamānā gāmasāmantaṁ nigamasāmantaṁ osaritvā ganthe karontā acchanti. Tamenaṁ manussā disvā evamāhaṁsu: ‘ime kho, bho, sattā araññāyatane paṇṇakuṭīsu taṁ jhānaṁ anabhisambhuṇamānā gāmasāmantaṁ nigamasāmantaṁ osaritvā ganthe karontā acchanti, na dānime jhāyantī’ti. Na dānime jhāyantīti kho, vāseṭṭha, ‘ajjhāyakā, ajjhāyakā’ tveva tatiyaṁ akkharaṁ upanibbattaṁ.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숲의 선정 수행자들 가운데 일부가 그 수행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을 근처로 내려와 경전을 짓는 일로 옮겨 간 것에서 세 번째 이름 "앗자야까(경을 외는 이, 문헌에 밝은 이)"가 생겨납니다. 이 이름의 유래가 "더 이상 선정을 닦지 않는다"는 부정적 평가에서 나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다음 절에서는 한때 낮게 여겨지던 이 일이 훗날 오히려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묵상
한 가지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다른 길로 옮겨 간 것이, 시간이 지나고 보니 또 다른 가치를 지닌 선택이었던 경험이 있나요? 그때는 실패로 느껴졌더라도 지금 돌아보면 어떤 마음이 드나요?
“바세타여, 그때는 그것이 낮다고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그것이 가장 높다고 여겨지느니라.
바세타여, 이렇게 바라문의 무리는 그 옛 태초의 말로 생겨났으니, 다름 아닌 바로 그 뭇 삶들에게서, 다른 이들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부류에게서, 다른 부류가 아니라, 이치로써, 이치 아닌 것이 아니라 생겨난 것이니라. 바세타여,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 지금 여기서도 다음 생에서도 그러하니라.”
Hīnasammataṁ kho pana, vāseṭṭha, tena samayena hoti, tadetarahi seṭṭhasammataṁ. Iti kho, vāseṭṭha, evametassa brāhmaṇamaṇḍalassa porāṇena aggaññena akkharena abhinibbatti ahosi tesaṁyeva sattānaṁ, anaññesaṁ sadisānaṁyeva no asadisānaṁ dhammeneva, no adhammena. 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바라문 무리의 유래를 마무리하는 대목입니다. 문헌을 짓는 일이 한때는 선정을 포기한 낮은 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가장 높이 평가된다는 지적은, 사회적 평가라는 것이 얼마나 시대에 따라 뒤바뀌는지를 보여 줍니다. 왕족의 유래를 마무리했던 것과 똑같은 후렴("다름 아닌 바로 그 뭇 삶들에게서... 이치야말로 가장 높다")이 이번에도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묵상
한때 낮게 여겨지던 일이 지금은 높이 평가받는 경우를 알고 있나요? 그 평가는 무엇이 바뀌어서 달라졌을지, 지금의 평가도 언젠가 다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천천히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런데 그 뭇 삶들 가운데 몇몇은 성적 결합을 그대로 지니고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였느니라. ‘성적 결합을 지니고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한다’는 뜻에서 ‘벳사, 벳사’라는 말이 생겨났느니라.
바세타여, 이렇게 평민의 무리는 그 옛 태초의 말로 생겨났으니, 다름 아닌 바로 그 뭇 삶들에게서, 다른 부류가 아니라, 이치로써 생겨난 것이니라. 바세타여,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라.”
12. Vessamaṇḍala Tesaṁyeva kho, vāseṭṭha, sattānaṁ ekacce sattā methunaṁ dhammaṁ samādāya visukammante payojesuṁ. Methunaṁ dhammaṁ samādāya visukammante payojentīti kho, vāseṭṭha, ‘vessā, vessā’ tveva akkharaṁ upanibbattaṁ. Iti kho, vāseṭṭha, evametassa vessamaṇḍalassa porāṇena aggaññena akkharena abhinibbatti ahosi tesaññeva sattānaṁ anaññesaṁ sadisānaṁyeva, no asadisānaṁ, dhammeneva no adhammena. 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왕족과 바라문에 이어 세 번째 무리, 평민의 유래는 매우 짧게 다루어집니다. 성적 결합(가정을 이루는 삶)을 유지하며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서 "벳사(평민)"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원문의 "12. 평민의 무리"라는 소제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앞의 두 무리와 마찬가지로 같은 후렴으로 마무리되며, 이 카드에서는 반복되는 후렴 문구를 조금 줄여 옮겼습니다.
묵상
가정을 꾸리고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삶도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길이라는 것을, 지금 얼마나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있나요? 스스로의 하루하루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바세타여, 그런데 그 뭇 삶들 가운데 남은 이들은 거칠게 사냥하며 하찮은 일로 살아갔느니라. ‘거칠게 사냥하며 하찮은 일로 산다’는 뜻에서 ‘숫다, 숫다’라는 말이 생겨났느니라.
바세타여, 이렇게 천민의 무리는 그 옛 태초의 말로 생겨났으니, 다름 아닌 바로 그 뭇 삶들에게서, 다른 부류가 아니라, 이치로써 생겨난 것이니라. 바세타여,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라.”
13. Suddamaṇḍala Tesaññeva kho, vāseṭṭha, sattānaṁ ye te sattā avasesā te luddācārā khuddācārā ahesuṁ. Luddācārā khuddācārāti kho, vāseṭṭha, ‘suddā, suddā’ tveva akkharaṁ upanibbattaṁ. Iti kho, vāseṭṭha, evametassa suddamaṇḍalassa porāṇena aggaññena akkharena abhinibbatti ahosi tesaṁyeva sattānaṁ anaññesaṁ, sadisānaṁyeva no asadisānaṁ, dhammeneva, no adhammena. 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네 무리 가운데 마지막인 천민의 유래입니다. 앞의 세 무리가 각자 통치, 수행, 생업이라는 적극적인 선택에서 이름을 얻은 것과 달리, 이 무리는 "남은 이들"이라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소개됩니다. 원문 자체가 이 계급을 "거칠게 사냥하며 하찮은 일로 산다"는 표현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당시 사회의 편견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무리의 유래를 마무리하는 후렴은 앞의 세 무리와 똑같이 "이치로써 생겨났다"는 것이며, 뒤에 이어지는 절들에서는 이 네 무리 가운데 어디에서 태어났든 행위에 따라 같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묵상
사회가 어떤 일을 낮잡아 보는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나요? 그 시선과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실제 값어치는 다른 문제일 수 있어요. 지금 떠오르는 일이 있다면 다시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런데 이런 때가 있었으니, 왕족 가운데도 자기 삶의 방식을 나무라며 집을 떠나 출가하여 ‘나는 수행자가 되리라’ 하는 이가 있었고, 바라문 가운데도, 평민 가운데도, 천민 가운데도 마찬가지였느니라.
바세타여, 이 네 무리에서 수행자의 무리가 생겨났으니, 다름 아닌 바로 그 뭇 삶들에게서, 다른 부류가 아니라, 이치로써 생겨난 것이니라. 바세타여,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 지금 여기서도 다음 생에서도 그러하니라.”
Ahu kho so, vāseṭṭha, samayo, yaṁ khattiyopi sakaṁ dhammaṁ garahamāno agārasmā anagāriyaṁ pabbajati: ‘samaṇo bhavissāmī’ti. … suddopi kho, vāseṭṭha, sakaṁ dhammaṁ garahamāno agārasmā anagāriyaṁ pabbajati: ‘samaṇo bhavissāmī’ti. Imehi kho, vāseṭṭha, catūhi maṇḍalehi samaṇamaṇḍalassa abhinibbatti ahosi, tesaṁyeva sattānaṁ anaññesaṁ, sadisānaṁyeva no asadisānaṁ, dhammeneva no adhammena. 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세상의 기원경 (Aggaññasutta) 배경
왕족·바라문·평민·천민, 이 네 무리가 모두 자리 잡은 뒤, 이번에는 그 네 무리 각각에서 자기 삶의 방식을 등지고 출가하는 이들이 나타나 다섯 번째 무리인 "사문"이 생겨납니다. 원문은 바라문과 평민의 경우를 "…pe…"로 줄이고 있어 그대로 살렸습니다. 사문이라는 무리가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네 무리 모두에서 나올 수 있다는 점이, 뒤에 이어지는 "어느 계급에서든 아라한이 나올 수 있다"는 이 경의 결론을 준비합니다.
묵상
태어난 자리와 상관없이 스스로 새로운 길을 택해 걸어간 사람을 알고 있나요? 그 선택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지, 나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