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알았기에 땅을 내 것이라 여기지 않다

아라한이 되어 번뇌를 다한 이는 같은 스물네 갈래를 직접 알면서도, 이미 완전히 알았기에 더 이상 생각으로 번지지 않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아라한이 되어 번뇌를 다하고, 청정한 삶을 살았으며, 할 일을 다 하였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목표를 이루었고, 존재의 족쇄를 없앴으며, 바른 지혜로 해탈한 수행자, 그 수행자도 땅을 땅이라고 직접 아느니라. 직접 알고서 땅을 생각하지 않으며, 땅에서 생각하지 않으며, 땅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며, ‘땅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땅을 기뻐하지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것을 완전히 알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느니라.

Yopi so, bhikkhave, bhikkhu arahaṁ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ṁyojano sammadaññāvimutto, sopi pathaviṁ pathavito abhijānāti; pathaviṁ pathavito abhiññāya pathaviṁ na maññati, pathaviyā na maññati, pathavito na maññati, pathaviṁ meti na maññati, pathaviṁ nābhinandati. Taṁ kissa hetu? ‘Pariññātaṁ tassā’ti vadāmi.

맛지마 니까야 MN 1 근본 법문경 (Mūlapariyāyasutta)

배경

아직 배우는 이를 기준으로 한 두 번째 방식이 끝나고, 이제 번뇌를 다한 이(아라한)를 기준으로 한 세 번째 방식이 시작됩니다. 아라한을 가리키는 이 일곱 겹의 표현(번뇌를 다함·청정한 삶·할 일을 다 함·짐을 내려놓음·목표를 이룸·족쇄를 없앰·바른 지혜로 해탈함)은 니까야 전체에서 아라한을 묘사할 때 정형구로 쓰이는 말입니다. 아직 배우는 이는 '생각하지 말라'는 금지를 받았지만, 아라한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있는 그대로의 서술로 바뀝니다. 까닭도 '완전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서 '완전히 알았기 때문'으로, 앞으로의 과제가 아니라 이미 이룬 사실이 됩니다.

묵상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고 느끼는 것과 이미 다 이루었다고 느끼는 것, 그 둘 사이의 마음가짐 차이를 떠올려 보면 어떠신가요? 지금 어느 쪽에 가까운지도 가만히 살펴보셔도 좋습니다.

물도 물이라고 직접 아느니라. 직접 알고서 물을 생각하지 않으며, 물에서 생각하지 않으며, 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며, ‘물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물을 기뻐하지 않느니라. 불도, 바람도, 존재들도, 신들도, 빠자빠띠도, 범천도, 광음천도 그와 같으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것을 완전히 알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느니라.

Āpaṁ …pe… tejaṁ … vāyaṁ … bhūte … deve … pajāpatiṁ … brahmaṁ … ābhassare …

맛지마 니까야 MN 1 근본 법문경 (Mūlapariyāyasutta)

배경

번뇌를 다한 이를 기준으로 한 이 세 번째 방식에서도, 땅에서 이미 온전한 형식을 밝혔으므로 물부터 광음천까지 여덟 갈래는 원문 자체의 표기로 낱말과 줄임표만 남습니다. 아직 배우는 이를 다룬 앞 방식과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줄어드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 경이 여덟 겹 전체에 걸쳐 하나의 정해진 틀을 정확히 지키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생각하지 말라'는 금지가 '생각하지 않는다'는 서술로 바뀐 점은 다릅니다.

묵상

같은 틀이 여러 번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서, 지금 그 규칙성 자체에서 어떤 안정감이나 지루함이 느껴지시나요? 둘 다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으니 그대로 받아들이셔도 좋습니다.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변정천도 변정천이라고 직접 아느니라. 직접 알고서 변정천을 생각하지 않으며, 변정천에서 생각하지 않으며, 변정천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며, ‘변정천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변정천을 기뻐하지 않느니라. 광과천도, 정복자도, 무한한 허공의 경지도, 무한한 의식의 경지도, 아무것도 없는 경지도, 인식도 아니고 인식 아님도 아닌 경지도 그와 같으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것을 완전히 알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느니라.

subhakiṇhe … vehapphale … abhibhuṁ … ākāsānañcāyatanaṁ … viññāṇañcāyatanaṁ … ākiñcaññāyatanaṁ …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ṁ …

맛지마 니까야 MN 1 근본 법문경 (Mūlapariyāyasutta)

배경

앞 편에 이어 하늘 세계의 나머지 단계와 정복자, 네 가지 무색의 경지까지 일곱 갈래가 같은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번뇌를 다한 이에게는 이런 높은 선정의 경지들마저 이미 완전히 알려진 것이어서, 굳이 다시 생각을 보탤 이유가 없습니다. 이는 억누르거나 참는 것이 아니라, 다 알았기에 저절로 그렇게 되는 상태임을 뜻하며, 앞서 다룬 여덟 가지 선정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묵상

무언가를 억지로 참는 것과 이미 다 알아서 저절로 놓아지는 것, 이 둘의 차이를 실제로 느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직 그런 경험이 뚜렷하지 않다면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본 것도 본 것이라고 직접 아느니라. 직접 알고서 본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본 것에서 생각하지 않으며, 본 것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며, ‘본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본 것을 기뻐하지 않느니라. 들은 것도, 느낀 것도, 안 것도, 하나됨도, 여럿됨도, 모든 것도 그와 같으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것을 완전히 알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느니라.

diṭṭhaṁ … sutaṁ … mutaṁ … viññātaṁ … ekattaṁ … nānattaṁ … sabbaṁ …

맛지마 니까야 MN 1 근본 법문경 (Mūlapariyāyasutta)

배경

감각으로 알려지는 네 갈래와 개념적인 세 갈래까지, 나머지 일곱 갈래가 이 편에서 마무리됩니다. 이로써 번뇌를 다한 이를 기준으로 스물세 갈래가 모두 다루어졌고, 다음 편의 열반만이 남습니다. 일상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감각조차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생각을 보태는 계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목록이 실제로 뜻하는 바입니다. 가장 높은 경지와 가장 흔한 감각이 여기서 같은 자리에 놓입니다.

묵상

지금 눈앞에 보이거나 들리는 것에 아무 생각도 보태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둔다면, 어떤 느낌일지 잠깐 상상해 보시겠어요? 잘 안 되어도 괜찮으니 가볍게 시도해 보셔도 좋습니다.

열반을 열반이라고 직접 아느니라. 직접 알고서 열반을 생각하지 않으며, 열반에서 생각하지 않으며, 열반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며, ‘열반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열반을 기뻐하지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것을 완전히 알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느니라.

nibbānaṁ nibbānato abhijānāti; nibbānaṁ nibbānato abhiññāya nibbānaṁ na maññati, nibbānasmiṁ na maññati, nibbānato na maññati, nibbānaṁ meti na maññati, nibbānaṁ nābhinandati. Taṁ kissa hetu? ‘Pariññātaṁ tassā’ti vadāmi.

맛지마 니까야 MN 1 근본 법문경 (Mūlapariyāyasutta)

배경

번뇌를 다한 이를 기준으로 한 세 번째 방식의 마지막 갈래, 열반입니다. 아라한은 열반을 직접 알면서도 생각을 보태거나 '내 것'으로 여기거나 기뻐하지 않는데, 이는 열반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이미 완전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부터는 같은 아라한을 기준으로 하되, 그 까닭을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소멸이라는 더 구체적인 말로 풀어내는 네 번째 방식이 이어집니다.

묵상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것 앞에서는 더 이상 애써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 지금 어떤 홀가분함으로 다가오시나요? 아직 그렇게 느껴지지 않아도 그대로 괜찮습니다.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