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서 건져 올려 마른 땅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이 마음은 파닥거리느니라.
마라의 영역을 벗어나기 위하여.
Vārijova thale khitto, okamokataubbhato; Pariphandatidaṁ cittaṁ, māradheyyaṁ pahātave.
법구경 Dhammapada 34 배경
마음의 성질을 다룬 법구경 세 번째 품의 두 번째 게송입니다. 물고기를 물 밖으로 꺼내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 파닥거림은 물고기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명상을 시작한 마음의 상태를 정확히 이 그림으로 그리셨습니다. 늘 감각 대상들 사이를 헤엄치던 마음을 처음으로 그 밖에 놓아 보면, 마음은 예외 없이 요동칩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가 생깁니다 - "나는 명상에 소질이 없구나." 그러나 게송의 마지막 줄이 다른 해석을 줍니다. 그 파닥거림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마라의 영역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파닥거리는 것입니다.
묵상
명상을 시작하자마자 온갖 생각이 밀려온 경험이 있나요? 그때 "내 마음이 원래 이렇게 시끄러웠구나"를 처음 본 것이라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 처음으로 물 밖을 본 순간 아닐까요?
마음은 흔들리고 요동치며,
지키기 어렵고 막기 어렵느니라.
지혜로운 이는 그것을 곧게 만드나니,
화살 만드는 이가 화살대를 곧게 하듯이.
Phandanaṁ capalaṁ cittaṁ, dūrakkhaṁ dunnivārayaṁ; Ujuṁ karoti medhāvī, usukārova tejanaṁ.
법구경 Dhammapada 33 배경
앞 절반은 문제를, 뒷 절반은 해법을 말합니다. 그런데 두 절반을 잇는 것은 역접이 아니라 순접입니다. 흔들리고 요동치기 때문에 곧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화살 만드는 이의 비유가 이것을 보여 줍니다. 화살대를 곧게 펴는 일이 가능한 이유는 나무가 휘어지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곧고 단단한 쇠막대라면 펼 수도, 굽힐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빠르고 변덕스럽다는 것은 마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고,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다른 상태로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수행이 성립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만약 마음에 변하지 않는 본성이 있었다면, 어떤 훈련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묵상
"나는 원래 성격이 이래서"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 본 적 있나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훈련은 무의미하겠지요. 그런데 지난 십 년 사이 내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정말 말할 수 있나요?
수행자들이여, 닦았을 때 이 마음만큼 다루기 쉬운 것을
나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보지 못하느니라.
수행자들이여, 닦은 마음은 다루기 쉽느니라.
Nāhaṁ, bhikkhave, aññaṁ ekadhammampi samanupassāmi yaṁ evaṁ bhāvitaṁ kammaniyaṁ hoti yathayidaṁ, bhikkhave, cittaṁ. Cittaṁ, bhikkhave, bhāvitaṁ kammaniyaṁ hotī.
앙굿따라 니까야 AN 1.22 다루기 어려움 품 (Akammaniyavagga) 배경
이 짧은 경전은 바로 앞 경전과 짝을 이룹니다. 앞 경전에서 부처님은 "닦지 않았을 때 이 마음만큼 다루기 어려운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셨고, 여기서는 정확히 반대를 말씀하십니다. 두 문장에서 달라지는 낱말은 단 하나, 바위따(bhāvita) - "닦은"입니다. 대상은 그대로이고 조건 하나만 바뀝니다. 여기서 "다루기 쉬운"으로 옮긴 낱말이 중요합니다. 원어는 "일에 쓸 수 있는", "연장으로 쓸 만한"이라는 뜻으로, 대장장이가 쇠를 달구어 형태를 잡을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을 없애거나 잠재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쓸 수 있는 상태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훈련의 목표는 조용한 마음이 아니라 부릴 수 있는 마음입니다.
묵상
집중이 필요한 순간에 마음이 말을 듣지 않아 답답했던 적이 있나요? 그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조용하게 만드는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원하는 곳에 놓아 둘 수 있게 만드는 일이었을까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다른 어떤 친척도
해 주지 못하는 것을,
바르게 향한 마음이 해 주나니,
그보다 더 좋게 해 주느니라.
Na taṁ mātā pitā kayirā, aññe vāpi ca ñātakā; Sammāpaṇihitaṁ cittaṁ, seyyaso naṁ tato kare.
법구경 Dhammapada 43 배경
마음 품을 닫는 마지막 게송입니다. 바로 앞 게송이 짝을 이룹니다 - "잘못 향한 마음은 원수가 원수에게 하는 것보다 더한 해를 끼친다." 두 게송의 차이는 삼마빠니히따(sammāpaṇihita)와 밋차빠니히따(micchāpaṇihita), 곧 "바르게 놓인"과 "잘못 놓인"뿐입니다. 빠니히따는 활을 겨누듯 방향을 잡아 놓는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속도가 빠르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빠른 것에 방향이 붙으면 어느 쪽으로든 멀리 갑니다. 그래서 이 품은 속도를 줄이라는 말로 끝나지 않고, 방향을 잡으라는 말로 끝납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대신 해 줄 수 없다는 말이 무겁게 들리지만, 뒤집으면 아무도 대신 못 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묵상
오늘 하루, 내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문 방향은 어디였나요? 그 방향을 정한 사람이 나 자신이었나요, 아니면 그날의 알림음과 뉴스와 남의 말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