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롭다는 것과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

마하꼿티따가 사리뿟따를 찾아가, 지혜롭지 못한 이와 지혜로운 이를 무엇으로 가르는지 묻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느니라.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의 동산에 머무르셨느니라. 그때 마하꼿티따 존자가 저녁 무렵 홀로 있음에서 나와 사리뿟따 존자를 찾아가 서로 인사를 나누었느니라. 정답고 뜻깊은 이야기를 마치고 한쪽에 앉아, 마하꼿티따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Evaṁ me sutaṁ— ekaṁ samayaṁ bhagavā sāvatthiyaṁ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Atha kho āyasmā mahākoṭṭhiko sāyanhasamayaṁ paṭisallānā vuṭṭhito yenāyasmā sāriputt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āyasmatā sāriputtena saddhiṁ sammodi. Sammodanīyaṁ kathaṁ sāraṇīyaṁ vītisāretvā ekamantaṁ nisīdi. Ekamantaṁ nisinno kho āyasmā mahākoṭṭhiko āyasmantaṁ sāriputtaṁ etadavoca: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이 경은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의 동산에 머무르실 때의 일을 배경으로 합니다. 마하꼿티따 존자와 사리뿟따 존자는 둘 다 세존의 뛰어난 제자로, 홀로 명상하던 마하꼿티따가 저녁 무렵 사리뿟따를 찾아가 인사를 나눈 뒤 한쪽에 앉아 묻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경이 열립니다. 이 경은 이후 서른 편이 넘도록 마하꼿티따가 묻고 사리뿟따가 답하는 문답으로만 이어지며, 지혜와 의식과 느낌과 인식처럼 서로 뒤섞여 보이는 마음의 작용들을 하나씩 촘촘히 가릅니다.

묵상

누군가에게 오래 품어 온 물음을 편하게 꺼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물음은 대개 어떤 자리, 어떤 마음 상태에서 떠오르나요? 지금 마음에 품고 있는 물음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아직 물음의 모양이 잡히지 않았다면, 그것도 괜찮은 출발이에요.

“벗이여, ‘지혜롭지 못한 이, 지혜롭지 못한 이’라고 말하나니, 어떻게 해서 지혜롭지 못한 이라고 말합니까?” “벗이여, ‘꿰뚫어 알지 못하고 꿰뚫어 알지 못한다’고 해서 지혜롭지 못한 이라고 말하나니, 무엇을 꿰뚫어 알지 못합니까?

“‘Duppañño duppañño’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duppaññoti vuccatī”ti? “‘Nappajānāti nappa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duppaññoti vuccati. Kiñca nappajān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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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마하꼿티따의 첫 물음은 “지혜롭지 못한 이”라는 흔한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묻는 것입니다. 사리뿟따는 이를 동사 하나로 되짚어 답합니다.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롭지 못한 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꿰뚫어 알지 못하는가”라는 되물음은 답을 곧바로 주지 않고 한 걸음 더 파고드는 이 경 특유의 문답 방식을 잘 보여 줍니다. 다음 편에서 그 대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묵상

안다는 것과 꿰뚫어 안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 꿰뚫어 알지는 못했다고 느껴지는 무언가가 지금 있나요? 없어도 괜찮아요. 몰라도 괜찮으니, 그 자리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꿰뚫어 알지 못하나니, 이렇게 꿰뚫어 알지 못한다고 해서 지혜롭지 못한 이라고 말합니다.

‘Idaṁ dukkhan’ti nappajānāti, ‘ayaṁ dukkhasamudayo’ti nappajānāti, ‘ayaṁ dukkhanirodho’ti nappajānāti, ‘ay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nappajānāti. ‘Nappajānāti nappa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duppaññoti vucca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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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 편의 되물음에 대한 답으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대상이 괴로움과 그 일어남과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네 가지 진리로 밝혀집니다. 이는 뒤에 이어질 지혜(paññā)의 동사 “꿰뚫어 안다(pajānāti)”가 이 경 전체에서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미리 정해 두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 넷 가운데 하나라도 꿰뚫어 알지 못하면 지혜롭지 못한 이라 불린다는 것이 이 편의 결론입니다.

묵상

괴로움이 무엇이고 왜 일어나며 어떻게 그치는지, 이 네 가지를 지금 얼마나 또렷이 알고 있다고 느끼나요? 잘 모르겠다고 느껴져도 괜찮아요. 네 가지를 한꺼번에 다루려 애쓰지 않아도 돼요.

“훌륭하십니다, 벗이여.” 마하꼿티따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따르며, 다시 이렇게 다른 물음을 물었느니라. “벗이여, ‘지혜로운 이, 지혜로운 이’라고 말하나니, 어떻게 해서 지혜로운 이라고 말합니까?”

“Sādhāvuso”ti kho āyasmā mahākoṭṭhiko āyasmato sāriputtassa bhāsitaṁ abhinanditvā anumoditvā āyasmantaṁ sāriputtaṁ uttariṁ pañhaṁ apucchi: “‘Paññavā paññavā’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paññavāti vucca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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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마하꼿티따는 사리뿟따의 답에 “훌륭하십니다”라며 동의를 표한 뒤 곧바로 다음 물음으로 나아갑니다. 이번에는 정반대로 “지혜로운 이”를 묻습니다. 앞서 지혜롭지 못한 이를 물었던 것과 짝을 이루는 물음으로, 사리뿟따가 같은 틀로 답할 것을 예고합니다. 이렇게 부정과 긍정을 나란히 묻는 방식은 이 경 전체에서 되풀이되며, 뒤에 나올 의식과 느낌과 인식의 정의도 모두 이와 같은 짝을 이룹니다.

묵상

지혜롭지 못함을 먼저 묻고 그다음 지혜로움을 묻는 이 순서가, 지금 어떻게 다가오나요? 무엇이 아닌지 먼저 알고 나서야 무엇인지 더 잘 보이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나요? 순서를 바꿔 물어도 답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어요.

“벗이여, ‘꿰뚫어 알고 꿰뚫어 안다’고 해서 지혜로운 이라고 말하나니, 무엇을 꿰뚫어 압니까?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꿰뚫어 아나니, 이렇게 꿰뚫어 안다고 해서 지혜로운 이라고 말합니다.”

“‘Pajānāti pa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paññavāti vuccati. Kiñca pajānāti? ‘Idaṁ dukkhan’ti pajānāti, ‘ayaṁ dukkhasamudayo’ti pajānāti, ‘ayaṁ dukkhanirodho’ti pajānāti, ‘ay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pajānāti. ‘Pajānāti pa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paññavāti vucca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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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 편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지혜로운 이가 꿰뚫어 아는 것 역시 앞서 지혜롭지 못한 이의 편과 똑같이 네 가지 진리임이 밝혀집니다. 부정이 긍정으로 바뀌었을 뿐 대상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지혜롭지 못함과 지혜로움을 나란히 놓고 같은 틀로 답하는 방식은 이 경 전체에서 되풀이되며, 뒤에 나올 의식과 느낌과 인식의 정의도 모두 이와 같은 “~하기 때문에 ~라 부른다”는 틀을 따릅니다.

묵상

네 가지 진리를 꿰뚫어 아는 것이 지혜의 전부라는 이 정의를 처음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지식이 많은 것과 이렇게 꿰뚫어 아는 것은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정답을 정해 두지 않고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