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맛지마 니까야 MN 43

인용된 가르침 45구절

이 경을 16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지혜롭다는 것과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 5구절

마하꼿티따가 사리뿟따를 찾아가, 지혜롭지 못한 이와 지혜로운 이를 무엇으로 가르는지 묻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느니라.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의 동산에 머무르셨느니라. 그때 마하꼿티따 존자가 저녁 무렵 홀로 있음에서 나와 사리뿟따 존자를 찾아가 서로 인사를 나누었느니라. 정답고 뜻깊은 이야기를 마치고 한쪽에 앉아, 마하꼿티따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Evaṁ me sutaṁ— ekaṁ samayaṁ bhagavā sāvatthiyaṁ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Atha kho āyasmā mahākoṭṭhiko sāyanhasamayaṁ paṭisallānā vuṭṭhito yenāyasmā sāriputt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āyasmatā sāriputtena saddhiṁ sammodi. Sammodanīyaṁ kathaṁ sāraṇīyaṁ vītisāretvā ekamantaṁ nisīdi. Ekamantaṁ nisinno kho āyasmā mahākoṭṭhiko āyasmantaṁ sāriputtaṁ etadavoca: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이 경은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의 동산에 머무르실 때의 일을 배경으로 합니다. 마하꼿티따 존자와 사리뿟따 존자는 둘 다 세존의 뛰어난 제자로, 홀로 명상하던 마하꼿티따가 저녁 무렵 사리뿟따를 찾아가 인사를 나눈 뒤 한쪽에 앉아 묻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경이 열립니다. 이 경은 이후 서른 편이 넘도록 마하꼿티따가 묻고 사리뿟따가 답하는 문답으로만 이어지며, 지혜와 의식과 느낌과 인식처럼 서로 뒤섞여 보이는 마음의 작용들을 하나씩 촘촘히 가릅니다.

묵상

누군가에게 오래 품어 온 물음을 편하게 꺼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물음은 대개 어떤 자리, 어떤 마음 상태에서 떠오르나요? 지금 마음에 품고 있는 물음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아직 물음의 모양이 잡히지 않았다면, 그것도 괜찮은 출발이에요.

“벗이여, ‘지혜롭지 못한 이, 지혜롭지 못한 이’라고 말하나니, 어떻게 해서 지혜롭지 못한 이라고 말합니까?” “벗이여, ‘꿰뚫어 알지 못하고 꿰뚫어 알지 못한다’고 해서 지혜롭지 못한 이라고 말하나니, 무엇을 꿰뚫어 알지 못합니까?

“‘Duppañño duppañño’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duppaññoti vuccatī”ti? “‘Nappajānāti nappa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duppaññoti vuccati. Kiñca nappajānā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마하꼿티따의 첫 물음은 “지혜롭지 못한 이”라는 흔한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묻는 것입니다. 사리뿟따는 이를 동사 하나로 되짚어 답합니다.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롭지 못한 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꿰뚫어 알지 못하는가”라는 되물음은 답을 곧바로 주지 않고 한 걸음 더 파고드는 이 경 특유의 문답 방식을 잘 보여 줍니다. 다음 편에서 그 대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묵상

안다는 것과 꿰뚫어 안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 꿰뚫어 알지는 못했다고 느껴지는 무언가가 지금 있나요? 없어도 괜찮아요. 몰라도 괜찮으니, 그 자리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꿰뚫어 알지 못하나니, 이렇게 꿰뚫어 알지 못한다고 해서 지혜롭지 못한 이라고 말합니다.

‘Idaṁ dukkhan’ti nappajānāti, ‘ayaṁ dukkhasamudayo’ti nappajānāti, ‘ayaṁ dukkhanirodho’ti nappajānāti, ‘ay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nappajānāti. ‘Nappajānāti nappa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duppaññoti vucca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의 되물음에 대한 답으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대상이 괴로움과 그 일어남과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네 가지 진리로 밝혀집니다. 이는 뒤에 이어질 지혜(paññā)의 동사 “꿰뚫어 안다(pajānāti)”가 이 경 전체에서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미리 정해 두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 넷 가운데 하나라도 꿰뚫어 알지 못하면 지혜롭지 못한 이라 불린다는 것이 이 편의 결론입니다.

묵상

괴로움이 무엇이고 왜 일어나며 어떻게 그치는지, 이 네 가지를 지금 얼마나 또렷이 알고 있다고 느끼나요? 잘 모르겠다고 느껴져도 괜찮아요. 네 가지를 한꺼번에 다루려 애쓰지 않아도 돼요.

“훌륭하십니다, 벗이여.” 마하꼿티따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따르며, 다시 이렇게 다른 물음을 물었느니라. “벗이여, ‘지혜로운 이, 지혜로운 이’라고 말하나니, 어떻게 해서 지혜로운 이라고 말합니까?”

“Sādhāvuso”ti kho āyasmā mahākoṭṭhiko āyasmato sāriputtassa bhāsitaṁ abhinanditvā anumoditvā āyasmantaṁ sāriputtaṁ uttariṁ pañhaṁ apucchi: “‘Paññavā paññavā’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paññavāti vucca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마하꼿티따는 사리뿟따의 답에 “훌륭하십니다”라며 동의를 표한 뒤 곧바로 다음 물음으로 나아갑니다. 이번에는 정반대로 “지혜로운 이”를 묻습니다. 앞서 지혜롭지 못한 이를 물었던 것과 짝을 이루는 물음으로, 사리뿟따가 같은 틀로 답할 것을 예고합니다. 이렇게 부정과 긍정을 나란히 묻는 방식은 이 경 전체에서 되풀이되며, 뒤에 나올 의식과 느낌과 인식의 정의도 모두 이와 같은 짝을 이룹니다.

묵상

지혜롭지 못함을 먼저 묻고 그다음 지혜로움을 묻는 이 순서가, 지금 어떻게 다가오나요? 무엇이 아닌지 먼저 알고 나서야 무엇인지 더 잘 보이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나요? 순서를 바꿔 물어도 답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어요.

“벗이여, ‘꿰뚫어 알고 꿰뚫어 안다’고 해서 지혜로운 이라고 말하나니, 무엇을 꿰뚫어 압니까?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꿰뚫어 아나니, 이렇게 꿰뚫어 안다고 해서 지혜로운 이라고 말합니다.”

“‘Pajānāti pa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paññavāti vuccati. Kiñca pajānāti? ‘Idaṁ dukkhan’ti pajānāti, ‘ayaṁ dukkhasamudayo’ti pajānāti, ‘ayaṁ dukkhanirodho’ti pajānāti, ‘ay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pajānāti. ‘Pajānāti pa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paññavāti vucca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지혜로운 이가 꿰뚫어 아는 것 역시 앞서 지혜롭지 못한 이의 편과 똑같이 네 가지 진리임이 밝혀집니다. 부정이 긍정으로 바뀌었을 뿐 대상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지혜롭지 못함과 지혜로움을 나란히 놓고 같은 틀로 답하는 방식은 이 경 전체에서 되풀이되며, 뒤에 나올 의식과 느낌과 인식의 정의도 모두 이와 같은 “~하기 때문에 ~라 부른다”는 틀을 따릅니다.

묵상

네 가지 진리를 꿰뚫어 아는 것이 지혜의 전부라는 이 정의를 처음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지식이 많은 것과 이렇게 꿰뚫어 아는 것은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정답을 정해 두지 않고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2 의식이란 무엇인가 1구절

사리뿟따는 의식을 인식하는 작용으로 정의하고, 즐거움과 괴로움과 중립을 인식한다고 밝힙니다.

“벗이여, ‘의식, 의식’이라고 말하나니, 어떻게 해서 의식이라고 말합니까?” “벗이여, ‘의식하고 의식한다’고 해서 의식이라고 말하나니, 무엇을 의식합니까? 즐거움도 의식하고, 괴로움도 의식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도 의식하나니, 이렇게 의식한다고 해서 의식이라고 말합니다.”

“‘Viññāṇaṁ viññāṇan’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viññāṇanti vuccatī”ti? “‘Vijānāti vi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viññāṇanti vuccati. Kiñca vijānāti? Sukhantipi vijānāti, dukkhantipi vijānāti, adukkhamasukhantipi vijānāti. ‘Vijānāti vi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viññāṇanti vucca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지혜롭지 못함과 지혜로움을 가른 뒤, 마하꼿티따는 이제 자리를 옮겨 의식 자체를 묻습니다. 사리뿟따는 앞서와 같은 틀로 답하되, 이번 동사는 “의식한다(vijānāti)”입니다. 의식이 의식하는 대상은 즐거움과 괴로움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라는 세 가지 느낌의 결입니다. 이 정의는 뒤이어 나올 “느낌”의 정의와 겹쳐 보이는데, 바로 그 겹침이 다음 문답, 곧 지혜와 의식이 실제로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물음을 낳습니다.

묵상

즐겁다, 괴롭다, 그저 그렇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을 하루 중 얼마나 자주 느끼나요? 그 앎에 이름을 붙이거나 판단을 더하기 전, 그저 알아채기만 하는 순간이 있나요? 판단이 먼저 따라붙어도 괜찮으니 그저 알아채 보세요.

3 지혜와 의식은 섞여 있으나 같지 않다 2구절

지혜와 의식은 서로 뒤섞여 있어 갈라낼 수 없으나, 하는 일은 서로 다르다고 밝힙니다.

“벗이여, 지혜와 의식, 이 두 가지는 섞여 있습니까, 따로 있습니까? 이 두 가지를 하나하나 가려내어 그 다름을 말할 수 있습니까?” “벗이여, 지혜와 의식, 이 두 가지는 섞여 있지 따로 있지 않나니, 이 두 가지를 하나하나 가려내어 그 다름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릇 꿰뚫어 아는 것을 곧 의식하고, 의식하는 것을 곧 꿰뚫어 아나니,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섞여 있지 따로 있지 않아 가려내어 그 다름을 말할 수 없습니다.”

“Yā cāvuso, paññā yañca viññāṇaṁ— ime dhammā saṁsaṭṭhā udāhu visaṁsaṭṭhā? Labbhā ca panimesaṁ dhammānaṁ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ṁ paññāpetun”ti? “Yā cāvuso, paññā yañca viññāṇaṁ— ime dhammā saṁsaṭṭhā, no visaṁsaṭṭhā. Na ca labbhā imesaṁ dhammānaṁ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ṁ paññāpetuṁ. Yaṁ hāvuso, pajānāti taṁ vijānāti, yaṁ vijānāti taṁ pajānāti. Tasmā ime dhammā saṁsaṭṭhā, no visaṁsaṭṭhā. Na ca labbhā imesaṁ dhammānaṁ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ṁ paññāpetun”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서 지혜와 의식을 각각 정의한 뒤, 마하꼿티따는 이 둘의 관계를 묻습니다. 사리뿟따의 답은 단호합니다. 둘은 뒤섞여 있어 실제 경험 속에서 하나하나 떼어내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고 가려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꿰뚫어 아는 것을 곧 의식하고, 의식하는 것을 곧 꿰뚫어 안다”는 한 문장을 듭니다. 이는 지혜와 의식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마음이 번갈아 켜지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의 앎 안에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 물음은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다르냐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지금 이 글을 읽으며 아는 것과 의식하는 것을 따로 떼어 느껴 볼 수 있나요? 둘이 뒤섞여 있어 가려낼 수 없다는 말이, 억지로 나누려 했던 경험과 비교해 어떻게 다가오나요? 나뉘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한 것은 아니에요.

“벗이여, 섞여 있어 따로 있지 않은 지혜와 의식, 이 두 가지는 무엇이 다릅니까?” “벗이여, 섞여 있어 따로 있지 않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지혜는 닦아야 할 것이요, 의식은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이 둘의 다름입니다.”

“Yā cāvuso, paññā yañca viññāṇaṁ— imesaṁ dhammānaṁ saṁsaṭṭhānaṁ no visaṁsaṭṭhānaṁ kiṁ nānākaraṇan”ti? “Yā cāvuso, paññā yañca viññāṇaṁ— imesaṁ dhammānaṁ saṁsaṭṭhānaṁ no visaṁsaṭṭhānaṁ paññā bhāvetabbā, viññāṇaṁ pariññeyyaṁ. Idaṁ nesaṁ nānākaraṇan”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뒤섞여 있어 가려낼 수 없다고 해서 지혜와 의식이 아예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리뿟따는 이 둘이 하는 일로써 다름을 밝힙니다. 지혜는 “닦아야 할 것(bhāvetabbā)”이고, 의식은 “완전히 알아야 할 것(pariññeyyaṁ)”입니다. 지혜는 수행으로 길러 자라게 하는 대상이지만, 의식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알아차려 그 성질을 꿰뚫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뒤섞여 하나처럼 작동하면서도 수행자가 그 각각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이렇게 다릅니다.

묵상

닦아서 길러야 할 것과, 이미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할 것을 구분해 본 적이 있나요? 지금 내 삶에서 애써 길러야 할 것과 그저 잘 알아차리기만 하면 될 것은 각각 무엇일까요? 둘 다 애매하게 느껴져도 괜찮아요.

4 느낌과 인식이란 무엇인가 2구절

사리뿟따는 느낌을 느끼는 작용으로, 인식을 알아보는 작용으로 정의합니다.

“벗이여, ‘느낌, 느낌’이라고 말하나니, 어떻게 해서 느낌이라고 말합니까?” “벗이여, ‘느끼고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고 말하나니, 무엇을 느낍니까? 즐거움도 느끼고, 괴로움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도 느끼나니, 이렇게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Vedanā vedanā’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vedanāti vuccatī”ti? “‘Vedeti vedetī’ti kho, āvuso, tasmā vedanāti vuccati. Kiñca vedeti? Sukhampi vedeti, dukkhampi vedeti, adukkhamasukhampi vedeti. ‘Vedeti vedetī’ti kho, āvuso, tasmā vedanāti vucca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의식의 정의를 마친 뒤, 마하꼿티따는 이번에는 느낌을 묻습니다. 답의 틀은 앞서와 같으나 동사가 “느낀다(vedeti)”로 바뀝니다. 느끼는 대상 역시 즐거움과 괴로움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라는 같은 세 가지입니다. 이로써 의식과 느낌이 겉으로는 같은 세 대상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는 “의식한다”는 동사로, 하나는 “느낀다”는 동사로 정의된다는 점에서 이미 다른 작용임이 예비적으로 드러납니다.

묵상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것과 그것을 의식하는 것, 이 둘의 차이를 지금 몸의 감각 하나로 확인해 볼 수 있나요? 굳이 구분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몸의 감각 하나만 골라도 충분해요.

“벗이여, ‘인식, 인식’이라고 말하나니, 어떻게 해서 인식이라고 말합니까?” “벗이여, ‘인식하고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고 말하나니, 무엇을 인식합니까? 푸른색도 인식하고, 노란색도 인식하고, 붉은색도 인식하고, 흰색도 인식하나니, 이렇게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고 말합니다.”

“‘Saññā saññā’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saññāti vuccatī”ti? “‘Sañjānāti sañ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saññāti vuccati. Kiñca sañjānāti? Nīlakampi sañjānāti, pītakampi sañjānāti, lohitakampi sañjānāti, odātampi sañjānāti. ‘Sañjānāti sañ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saññāti vucca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느낌 다음으로 인식을 묻습니다. 앞의 두 정의가 즐거움·괴로움·중립이라는 느낌의 결을 대상으로 삼았다면, 인식의 정의는 전혀 다른 예를 듭니다. 바로 푸른색·노란색·붉은색·흰색이라는 색깔입니다. 이는 인식(saññā)이 본래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특징을 알아보고 표지를 붙이는 작용임을 보여 주는 예로, 느낌의 세 갈래와는 층이 다른 예시를 골라 둘의 작용이 다름을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묵상

지금 눈에 보이는 색깔 하나를 알아보는 순간과, 그것이 즐거운지 괴로운지 느끼는 순간을 나누어 볼 수 있나요? 둘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 나뉘지 않아도 괜찮아요. 색깔이 아니어도, 지금 눈에 보이는 무엇이든 괜찮아요.

5 느낌과 인식과 의식이 함께 있다 1구절

느낌과 인식과 의식도 서로 뒤섞여 있어 갈라낼 수 없다고 밝힙니다.

“벗이여, 느낌과 인식과 의식, 이 세 가지는 섞여 있습니까, 따로 있습니까? 이 세 가지를 하나하나 가려내어 그 다름을 말할 수 있습니까?” “벗이여, 느낌과 인식과 의식, 이 세 가지는 섞여 있지 따로 있지 않나니, 이 세 가지를 하나하나 가려내어 그 다름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릇 느끼는 것을 곧 인식하고, 인식하는 것을 곧 의식하나니,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섞여 있지 따로 있지 않아 가려내어 그 다름을 말할 수 없습니다.”

“Yā cāvuso, vedanā yā ca saññā yañca viññāṇaṁ— ime dhammā saṁsaṭṭhā udāhu visaṁsaṭṭhā? Labbhā ca panimesaṁ dhammānaṁ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ṁ paññāpetun”ti? “Yā cāvuso, vedanā yā ca saññā yañca viññāṇaṁ— ime dhammā saṁsaṭṭhā, no visaṁsaṭṭhā. Na ca labbhā imesaṁ dhammānaṁ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ṁ paññāpetuṁ. Yaṁ hāvuso, vedeti taṁ sañjānāti, yaṁ sañjānāti taṁ vijānāti. Tasmā ime dhammā saṁsaṭṭhā no visaṁsaṭṭhā. Na ca labbhā imesaṁ dhammānaṁ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ṁ paññāpetun”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서 지혜와 의식 두 가지를 두고 물었던 것과 같은 물음을, 이번에는 느낌과 인식과 의식 세 가지로 넓혀 묻습니다. 답의 틀도 똑같습니다. 셋은 뒤섞여 있어 가려낼 수 없으며, 그 근거로 “느끼는 것을 곧 인식하고, 인식하는 것을 곧 의식한다”는 사슬을 듭니다. 이는 하나의 경험 속에서 느낌과 인식과 의식이 순서대로 켜지는 것이 아니라 한데 얽혀 함께 일어남을 보여 주며, 지혜와 의식의 관계에서 다룬 것과 같은 통찰을 세 가지로 확장합니다.

묵상

하나의 경험 안에 느낌과 인식과 의식이 함께 있다는 말을, 지금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 하나에 대입해 볼 수 있나요? 굳이 억지로 나누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뒤섞여 있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아요.

6 감각을 넘어선 마음이 아는 것 3구절

다섯 감각을 벗어난 마음이 무엇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을 무엇으로 아는지, 지혜의 쓸모는 무엇인지 밝힙니다.

“벗이여, 다섯 감각 기능을 벗어나 온전히 맑아진 마노의 의식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벗이여, 다섯 감각 기능을 벗어나 온전히 맑아진 마노의 의식은 ‘공간은 끝이 없다’고 하여 공간이 끝없는 경지를 알아야 하고, ‘의식은 끝이 없다’고 하여 의식이 끝없는 경지를 알아야 하며, ‘아무것도 없다’고 하여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알아야 합니다.”

“Nissaṭṭhena hāvuso, pañcahi indriyehi parisuddhena manoviññāṇena kiṁ neyyan”ti? “Nissaṭṭhena, āvuso, pañcahi indriyehi parisuddhena manoviññāṇena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ṁ neyyaṁ, ‘anantaṁ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aṁ neyyaṁ,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ṁ neyyan”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이제까지 지혜·의식·느낌·인식이라는 개념 자체를 가려냈다면, 이 편부터는 눈·귀·코·혀·몸이라는 다섯 감각을 완전히 벗어난 마음이 무엇을 알 수 있는지로 화제가 옮겨 갑니다. 사리뿟따는 그런 마음이 알 수 있는 것으로 공간이 끝없는 경지, 의식이 끝없는 경지, 아무것도 없는 경지라는 세 가지 형체 없는 경지를 듭니다. 이는 감각이 완전히 가라앉은 깊은 선정에서 마음이 향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며, 뒤이어 그 앎의 방법을 묻는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다섯 감각을 완전히 내려놓은 마음이 무엇을 알 수 있을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워도 괜찮아요. 잠들기 직전처럼 감각이 옅어지는 순간을 겪어 본 적이 있나요? 상상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시작이에요.

“벗이여, 알아야 할 것을 무엇으로 압니까?” “벗이여, 알아야 할 것은 지혜의 눈으로 압니다.”

“Neyyaṁ panāvuso, dhammaṁ kena pajānātī”ti? “Neyyaṁ kho, āvuso, dhammaṁ paññācakkhunā pajānā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에서 형체 없는 세 경지를 “알아야 할 것”이라 밝혔으니, 이제 그것을 무엇으로 아는지를 묻습니다. 사리뿟따의 답은 짧고 명료합니다. 지혜의 눈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눈이나 귀 같은 물리적 감각이 이미 벗어난 자리이므로, 그 앎은 오직 지혜라는 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앞서 “지혜는 닦아야 할 것”이라 했던 정의와 이어지며, 지혜가 실제로 무엇을 위해 쓰이는지를 다음 물음으로 자연스럽게 열어 줍니다.

묵상

눈이나 귀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안다고 느껴지는 것이 있나요? 그런 앎을 어떤 말로 표현해 왔는지 떠올려 볼 수 있나요? 말로 다 옮기지 못해도 괜찮아요. 천천히 떠올려 봐도 괜찮아요.

“벗이여, 지혜는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벗이여, 지혜는 뛰어난 앎을 위한 것이요, 완전히 앎을 위한 것이요, 버림을 위한 것입니다.”

“Paññā panāvuso, kimatthiyā”ti? “Paññā kho, āvuso, abhiññatthā pariññatthā pahānatthā”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지혜의 눈으로 안다고 밝힌 데 이어, 이제 지혜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묻습니다. 사리뿟따는 세 가지를 듭니다. 뛰어난 앎, 완전한 앎, 그리고 버림입니다. 이 셋은 순서를 이루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먼저 곧바로 꿰뚫어 아는 뛰어난 앎이 있고, 그것이 무르익어 남김없이 아는 완전한 앎이 되며, 그 앎의 결실로 마침내 집착과 번뇌를 내려놓는 버림에 이릅니다. 지혜가 단지 정보를 쌓는 것이 아니라 놓아 버림으로 이어지는 앎임을 이 짧은 문답이 분명히 합니다.

묵상

무언가를 완전히 알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경험이 있나요? 지혜가 버림으로 이어진다는 이 말이, 그 경험과 어떻게 닿아 있나요? 아직 내려놓지 못한 것이 있어도 괜찮아요.

7 바른 견해는 어떻게 생기고 무엇을 낳는가 2구절

바른 견해가 생기는 두 조건과, 그것이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로 자라는 다섯 요소를 밝힙니다.

“벗이여, 바른 견해가 생기는 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까?” “벗이여, 바른 견해가 생기는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나니, 다른 이의 말과 이치에 맞는 생각입니다. 벗이여, 이 두 가지가 바른 견해가 생기는 조건입니다.”

“Kati panāvuso, paccayā sammādiṭṭhiyā uppādāyā”ti? “Dve kho, āvuso, paccayā sammādiṭṭhiyā uppādāya— parato ca ghoso, yoniso ca manasikāro. Ime kho, āvuso, dve paccayā sammādiṭṭhiyā uppādāyā”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화제는 이제 바른 견해로 옮겨 갑니다. 사리뿟따는 바른 견해가 저절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조건에서 생긴다고 밝힙니다. 하나는 “다른 이의 말”, 곧 바른 가르침을 들려주는 외부의 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이치에 맞는 생각”, 곧 들은 것을 스스로 곱씹어 헤아리는 내면의 작업입니다. 바깥에서 오는 것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 둘이 함께 있어야 바른 견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묵상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바른 생각 하나를 떠올려 보면, 그것은 누구의 말에서 왔고 어떤 헤아림을 거쳐 내 것이 되었나요? 둘 중 하나가 부족했던 적도 있었나요? 둘 다 잘 갖추어졌다고 느껴져도 좋아요.

“벗이여, 몇 가지 요소가 뒷받침할 때 바른 견해는 마음의 해탈이라는 결실과 이익을 낳고, 지혜의 해탈이라는 결실과 이익을 낳습니까?” “벗이여, 다섯 가지 요소가 뒷받침할 때 그러하나니, 곧 계행이 뒷받침하고, 배움이 뒷받침하고, 토론이 뒷받침하고, 고요함이 뒷받침하고, 꿰뚫어 봄이 뒷받침할 때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뒷받침할 때 바른 견해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이라는 결실과 이익을 낳습니다.”

“Katihi panāvuso, aṅgehi anuggahitā sammādiṭṭhi cetovimuttiphalā ca hoti cetovimuttiphalānisaṁsā ca, paññāvimuttiphalā ca hoti paññāvimuttiphalānisaṁsā cā”ti? “Pañcahi kho, āvuso, aṅgehi anuggahitā sammādiṭṭhi cetovimuttiphalā ca hoti cetovimuttiphalānisaṁsā ca, paññāvimuttiphalā ca hoti paññāvimuttiphalānisaṁsā ca. Idhāvuso, sammādiṭṭhi sīlānuggahitā ca hoti, sutānuggahitā ca hoti, sākacchānuggahitā ca hoti, samathānuggahitā ca hoti, vipassanānuggahitā ca hoti. Imehi kho, āvuso, pañcahaṅgehi anuggahitā sammādiṭṭhi cetovimuttiphalā ca hoti cetovimuttiphalānisaṁsā ca, paññāvimuttiphalā ca hoti paññāvimuttiphalānisaṁsā cā”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에서 바른 견해가 생기는 조건을 밝혔다면, 이 편은 그 바른 견해가 결실을 맺으려면 무엇이 뒷받침해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계행과 배움과 토론과 고요함(사마타)과 꿰뚫어 봄(위빳사나)이라는 다섯 요소입니다. 계행과 배움과 토론이 바른 견해의 바탕을 다진다면, 고요함과 꿰뚫어 봄은 그것을 실제 체험으로 무르익게 합니다. 이 다섯이 함께할 때 바른 견해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이라는 결실로 이어집니다.

묵상

계행과 배움과 토론과 고요함과 꿰뚫어 봄, 이 다섯 가운데 지금 내 삶에 가장 든든히 있는 것은 무엇이고, 가장 손이 덜 간 것은 무엇인가요? 다섯 모두를 갖추지 않았다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요.

8 존재와 다시 태어남 3구절

존재에는 세 가지가 있으며, 무명과 갈애로 다시 태어남이 이어지고 그것이 그치는 길도 밝힙니다.

“벗이여, 존재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벗이여, 존재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감각적 욕망의 세계에 있는 존재, 물질의 세계에 있는 존재, 형체 없는 세계에 있는 존재입니다.”

“Kati panāvuso, bhavā”ti? “Tayome, āvuso, bhavā— kāmabhavo, rūpabhavo, arūpabhavo”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화제는 이제 존재 자체로 옮겨 갑니다. 사리뿟따는 존재를 세 가지 세계로 나눕니다. 감각적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 물질은 있으나 감각적 욕망은 거친 형태로 있지 않은 세계, 물질조차 없는 형체 없는 세계입니다. 이는 불교 우주관에서 중생이 태어날 수 있는 존재의 전체 범위를 가리키며, 다음 편에서 묻는 “어떻게 다시 이런 존재로 태어나는가” 하는 물음의 배경이 됩니다.

묵상

지금 내가 마음을 쏟는 자리가 감각의 즐거움 쪽에 가까운가요, 아니면 그보다 고요한 무언가를 향하고 있나요? 어느 쪽이든 평가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이 순간의 방향만 가만히 살펴보아도 충분해요.

“벗이여, 어떻게 해서 미래에 다시 존재로 태어남이 있습니까?” “벗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중생들이 이런저런 자리마다 즐거워하나니, 이렇게 해서 미래에 다시 존재로 태어남이 있습니다.”

“Kathaṁ panāvuso, āyatiṁ punabbhavābhinibbatti hotī”ti? “Avijjānīvaraṇānaṁ kho, āvuso, sattānaṁ taṇhāsaṁyojanānaṁ tatratatrābhinandanā— evaṁ āyatiṁ punabbhavābhinibbatti ho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존재의 세 갈래를 밝힌 뒤, 마하꼿티따는 어떻게 다시 그런 존재로 태어나는지를 묻습니다. 사리뿟따는 무명(아위자)이라는 덮개와 갈애라는 묶음, 그리고 그 갈애가 만나는 자리마다 즐거워하는 성향, 이 셋을 원인으로 듭니다. 무명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가리고, 갈애가 그 위에서 다시 붙잡을 대상을 찾게 하며, 만나는 자리마다 즐거워하는 성향이 그 갈애를 계속 먹여 살립니다. 이 셋이 겹쳐 다시 태어남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묵상

마주치는 자리마다 즐거움을 찾으려는 마음이 오늘 몇 번이나 있었나요? 그것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알아채기만 한다면 무엇이 보이나요? 몇 번이었는지 세지 않아도 괜찮아요. 천천히 떠올려 봐도 괜찮아요.

“벗이여, 어떻게 해서 미래에 다시 존재로 태어남이 없습니까?” “벗이여, 무명이 빛바래고 참된 앎이 생기며 갈애가 소멸하나니, 이렇게 해서 미래에 다시 존재로 태어남이 없습니다.”

“Kathaṁ panāvuso, āyatiṁ punabbhavābhinibbatti na hotī”ti? “Avijjāvirāgā kho, āvuso, vijjuppādā taṇhānirodhā— evaṁ āyatiṁ punabbhavābhinibbatti na ho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과 정확히 대구를 이루는 자리로, 이번에는 다시 태어남이 없어지는 길을 묻습니다. 답은 앞 편의 원인 셋을 그대로 뒤집습니다. 무명이 빛바래고, 그 자리에 참된 앎이 생기며, 갈애가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무명이 걷히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참된 앎이 생기면 더는 갈애가 붙잡을 근거를 찾지 못하며, 그렇게 갈애 자체가 소멸합니다. 다시 태어남이 있고 없음의 두 갈래가 이렇게 원인과 그 소멸이라는 한 쌍으로 완결됩니다.

묵상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서 더는 붙잡고 싶지 않아졌던 경험이 있나요? 그런 앎은 억지로 애써서 온 것이었나요, 아니면 자연스럽게 다가온 것이었나요? 아직 그런 경험이 없어도 괜찮아요.

9 첫 번째 선정 4구절

첫 번째 선정이 무엇이며 몇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갖추는지 밝힙니다.

“벗이여, 첫 번째 선정이란 무엇입니까?” “벗이여, 여기 수행자는 감각적 욕망을 여의고 해로운 것들을 여의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살핌이 있고 여읨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첫 번째 선정을 갖추어 머무나니, 벗이여, 이를 일러 첫 번째 선정이라 합니다.”

“Katamaṁ panāvuso, paṭhamaṁ jhānan”ti? “Idhāvuso,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ṁ savicāraṁ vivekajaṁ pītisukhaṁ paṭham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idaṁ vuccati, āvuso, paṭhamaṁ jhānan”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화제는 이제 선정(자나)으로 옮겨 갑니다. 첫 번째 선정을 사리뿟따는 정형화된 문구로 정의합니다.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것들을 여읜 자리에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살핌이 남아 있고 그 여읨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함께하는 상태입니다. 이 정의는 이 경뿐 아니라 여러 경에서 되풀이되는 표준 정형구로, 다음 편들에서 이 첫 번째 선정을 이루는 요소의 수와 그 버림과 갖춤을 더 세밀히 분석합니다.

묵상

무언가에서 완전히 물러나 본 뒤에야 비로소 느껴지는 홀가분함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그 홀가분함 안에도 어떤 생각이나 살핌은 여전히 남아 있었나요? 완전히 물러나 보지 못했어도 괜찮아요.

“벗이여, 첫 번째 선정은 몇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까?” “벗이여, 첫 번째 선정은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나니, 여기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 수행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살핌과 희열과 행복과 마음이 하나로 모임이 있습니다. 벗이여, 첫 번째 선정은 이렇게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Paṭhamaṁ panāvuso, jhānaṁ katiaṅgikan”ti? “Paṭhamaṁ kho, āvuso, jhānaṁ pañcaṅgikaṁ. Idhāvuso, paṭhamaṁ jhānaṁ samāpannassa bhikkhuno vitakko ca vattati,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Paṭhamaṁ kho, āvuso, jhānaṁ evaṁ pañcaṅgikan”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첫 번째 선정을 정의한 데 이어, 이제 그것을 이루는 요소의 수를 묻습니다. 다섯 가지, 곧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살핌과 희열과 행복과 마음이 하나로 모임입니다. 앞 편의 정의에서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살핌과 희열과 행복만 드러나 있었는데, 이 편에서 마음이 하나로 모임(집중)이 다섯째 요소로 더해집니다. 이는 정의만으로는 다 드러나지 않던 요소까지 낱낱이 짚어야 온전한 분석이 된다는 이 경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묵상

생각과 살핌과 기쁨과 행복과 하나로 모인 집중, 이 다섯 가지가 함께 있는 순간을 마지막으로 경험한 것은 언제였나요? 지금 당장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천천히 떠올려 봐도 괜찮아요.

“벗이여, 첫 번째 선정은 몇 가지 요소를 버리고 몇 가지 요소를 갖춥니까?” “벗이여, 첫 번째 선정은 다섯 가지 요소를 버리고 다섯 가지 요소를 갖추나니, 여기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 수행자에게는 감각적 욕망이 버려지고, 악의가 버려지고, 해태와 혼침이 버려지고, 들뜸과 후회가 버려지고, 의심이 버려집니다.

“Paṭhamaṁ panāvuso, jhānaṁ kataṅgavippahīnaṁ kataṅgasamannāgatan”ti? “Paṭhamaṁ kho, āvuso, jhānaṁ pañcaṅgavippahīnaṁ, pañcaṅgasamannāgataṁ. Idhāvuso, paṭhamaṁ jhānaṁ samāpannassa bhikkhuno kāmacchando pahīno hoti, byāpādo pahīno hoti, thinamiddhaṁ pahīnaṁ hoti, uddhaccakukkuccaṁ pahīnaṁ hoti, vicikicchā pahīnā ho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이 편은 첫 번째 선정을 또 다른 각도에서 다시 봅니다. 앞서는 갖춘 요소만 물었다면, 이번에는 버린 것과 갖춘 것을 함께 묻습니다. 이 편에서는 그 가운데 버려지는 다섯, 곧 감각적 욕망·악의·해태와 혼침·들뜸과 후회·의심이라는 다섯 장애를 밝힙니다. 다음 편에서 갖추어지는 다섯 요소가 이어지며, 다섯 장애가 물러난 자리에 정확히 다섯 선정 요소가 들어선다는 대응이 완성됩니다.

묵상

감각적 욕망·악의·해태와 혼침·들뜸과 후회·의심, 이 다섯 가운데 지금 내 마음에 가장 자주 찾아오는 것은 무엇인가요? 알아채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다섯 가운데 하나도 낯설지 않다면 그것도 괜찮아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살핌과 희열과 행복과 마음이 하나로 모임이 있나니, 벗이여, 첫 번째 선정은 이렇게 다섯 가지 요소를 버리고 다섯 가지 요소를 갖춥니다.”

vitakko ca vattati,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Paṭhamaṁ kho, āvuso, jhānaṁ evaṁ pañcaṅgavippahīnaṁ pañcaṅgasamannāgatan”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에서 밝힌 다섯 장애가 버려진 자리에, 갖추는 다섯 요소가 이어집니다. 일으킨 생각·지속적 살핌·희열·행복·마음의 하나로 모임으로, 앞서 19편에서 이미 나온 것과 같은 다섯입니다. 다섯 장애가 물러난 그 자리에 정확히 다섯 선정 요소가 들어선다는 이 대응은, 선정이 단지 새로운 것을 얻는 일이 아니라 방해되던 것이 물러난 자리에 본래 가능했던 것이 드러나는 일임을 보여 줍니다.

묵상

무언가를 내려놓았을 때 그 빈자리에 뜻밖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찼던 경험이 있나요? 지금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 하나를 가만히 바라보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 것 같나요? 빈자리에 아직 아무것도 들어차지 않았어도 괜찮아요.

10 다섯 감각 기능과 마음 1구절

서로 다른 영역을 지닌 다섯 감각 기능이 결국 무엇에 의지하는지를 밝힙니다.

“벗이여, 눈의 기능·귀의 기능·코의 기능·혀의 기능·몸의 기능, 이 다섯 감각 기능은 저마다 다른 대상과 영역을 지녀 서로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못하나니, 이들은 무엇에 의지하며, 무엇이 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합니까?” (사리뿟따는 같은 말로 다섯 감각 기능을 되짚은 뒤 이렇게 답하였느니라.) “이 다섯 감각 기능은 마노에 의지하며, 마노가 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합니다.”

“Pañcimāni, āvuso, indriyāni nānāvisayāni nānāgocarāni,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ṁ paccanubhonti, seyyathidaṁ— cakkhundriyaṁ, sotindriyaṁ, ghānindriyaṁ, jivhindriyaṁ, kāyindriyaṁ. Imesaṁ kho, āvuso, pañcannaṁ indriyānaṁ nānāvisayānaṁ nānāgocarānaṁ,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ṁ paccanubhontānaṁ, kiṁ paṭisaraṇaṁ, ko ca nesaṁ gocaravisayaṁ paccanubhotī”ti? “Pañcimāni, āvuso, indriyāni nānāvisayāni nānāgocarāni,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ṁ paccanubhonti, seyyathidaṁ— cakkhundriyaṁ, sotindriyaṁ, ghānindriyaṁ, jivhindriyaṁ, kāyindriyaṁ. Imesaṁ kho, āvuso, pañcannaṁ indriyānaṁ nānāvisayānaṁ nānāgocarānaṁ,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ṁ paccanubhontānaṁ, mano paṭisaraṇaṁ, mano ca nesaṁ gocaravisayaṁ paccanubho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화제가 다시 바뀌어, 이번에는 다섯 감각 기능을 다룹니다. 마하꼿티따는 눈·귀·코·혀·몸이 저마다 다른 대상과 영역을 지녀 서로의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한 뒤, 그렇다면 이 다섯이 무엇에 의지하며 무엇이 그 각각의 영역을 경험하는지 묻습니다. 원문에서 사리뿟따는 같은 물음을 한 번 더 되짚은 뒤에 답하는데, 이 편에서는 그 되풀이를 생략하고 답만 옮겼습니다. 답은 “마노(뜻, 의근)”입니다. 눈이 색을, 귀가 소리를 경험하듯 저마다 다른 영역에 갇혀 있는 다섯 감각을 하나로 모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마노라는 것입니다.

묵상

지금 이 순간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이 하나의 경험으로 합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적이 있나요? 그 합쳐짐이 일어나는 자리를 마음이라 부른다면, 지금 그 자리를 느껴 볼 수 있나요?

11 목숨과 온기는 서로 기대어 있다 3구절

다섯 감각 기능이 목숨에 기대고 목숨은 온기에, 온기는 다시 목숨에 기댄다는 역설을 등불의 비유로 풀어냅니다.

“눈의 기능·귀의 기능·코의 기능·혀의 기능·몸의 기능, 이 다섯 감각 기능은 무엇에 의지하여 머뭅니까?” (같은 말로 되짚은 뒤 답하였느니라.) “이 다섯 감각 기능은 목숨에 의지하여 머뭅니다.” “그러면 목숨은 무엇에 의지하여 머뭅니까?” “목숨은 온기에 의지하여 머뭅니다.” “그러면 온기는 무엇에 의지하여 머뭅니까?” “온기는 목숨에 의지하여 머뭅니다.”

“Pañcimāni, āvuso, indriyāni, seyyathidaṁ— cakkhundriyaṁ, sotindriyaṁ, ghānindriyaṁ, jivhindriyaṁ, kāyindriyaṁ. Imāni kho, āvuso, pañcindriyāni kiṁ paṭicca tiṭṭhantī”ti? “Pañcimāni, āvuso, indriyāni, seyyathidaṁ— cakkhundriyaṁ, sotindriyaṁ, ghānindriyaṁ, jivhindriyaṁ, kāyindriyaṁ. Imāni kho, āvuso, pañcindriyāni āyuṁ paṭicca tiṭṭhantī”ti. “Āyu panāvuso, kiṁ paṭicca tiṭṭhatī”ti? “Āyu usmaṁ paṭicca tiṭṭhatī”ti. “Usmā panāvuso, kiṁ paṭicca tiṭṭhatī”ti? “Usmā āyuṁ paṭicca tiṭṭha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에서 다섯 감각이 마노에 의지한다고 밝힌 데 이어, 이번에는 그 감각들이 무엇에 의지하여 계속 작동하는지를 더 깊이 캐묻습니다. 답은 목숨(āyu)이며, 목숨은 다시 온기(usmā)에 의지하고, 그런데 온기는 다시 목숨에 의지한다고 합니다. 목숨이 온기에 기대는데 온기가 다시 목숨에 기댄다는 이 대답은 얼핏 앞뒤가 도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겉보기 순환이 다음 편에서 마하꼿티따의 되물음을 낳고, 그다음 편의 비유로 풀립니다.

묵상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있어서 무엇이 먼저인지 가리기 어려운 관계를 삶에서 본 적이 있나요? 굳이 하나를 먼저라고 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도 있을까요? 답을 굳이 정하지 않아도 관계는 여전히 이어질 수 있어요.

“벗이여, 나는 지금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이렇게 알아들었나니, ‘목숨은 온기에 의지하여 머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또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이렇게도 알아들었나니, ‘온기는 목숨에 의지하여 머문다’는 것입니다. 벗이여, 그렇다면 이 말의 뜻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Idāneva kho mayaṁ, āvuso, āyasmato sāriputtassa bhāsitaṁ evaṁ ājānāma: ‘āyu usmaṁ paṭicca tiṭṭhatī’ti. Idāneva pana mayaṁ, āvuso, āyasmato sāriputtassa bhāsitaṁ evaṁ ājānāma: ‘usmā āyuṁ paṭicca tiṭṭhatī’ti. Yathā kathaṁ panāvuso, imassa bhāsitassa attho daṭṭhabbo”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마하꼿티따는 사리뿟따의 답에서 앞뒤가 도는 것처럼 들리는 대목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짚어 되묻습니다. 목숨이 온기에 기댄다고 했다가 곧이어 온기가 목숨에 기댄다고 했으니, 이 말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논리적 흠을 찾아 상대를 곤란하게 하려는 물음이 아니라, 서로 기대는 관계를 어떻게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파고드는 물음입니다. 사리뿟따는 이 물음에 비유로 답합니다.

묵상

누군가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들렸을 때, 곧바로 틀렸다고 여기기보다 그 말의 뜻을 다시 물어본 적이 있나요? 그렇게 물었을 때 오히려 더 깊은 이해에 닿았던 경험이 있나요?

“그렇다면 벗이여, 그대에게 비유를 들겠으니, 비유를 들으면 슬기로운 이들 가운데는 말의 뜻을 알아듣는 이도 있습니다. 벗이여, 마치 기름 등불이 타오를 때 불꽃에 의지하여 빛이 나타나고, 빛에 의지하여 불꽃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벗이여, 목숨은 온기에 의지하여 머물고, 온기는 목숨에 의지하여 머뭅니다.”

“Tena hāvuso, upamaṁ te karissāmi; upamāyapidhekacce viññū purisā bhāsitassa atthaṁ ājānanti. Seyyathāpi, āvuso, telappadīpassa jhāyato acciṁ paṭicca ābhā paññāyati, ābhaṁ paṭicca acci paññāyati; evameva kho, āvuso, āyu usmaṁ paṭicca tiṭṭhati, usmā āyuṁ paṭicca tiṭṭha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사리뿟따는 기름 등불의 비유로 앞선 순환을 풀어냅니다. 타오르는 등불에서 불꽃과 빛은 어느 하나가 먼저이고 다른 하나가 나중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있어야 서로가 드러나는 관계입니다. 불꽃에 의지해 빛이 나타나고 빛에 의지해 불꽃이 나타난다는 말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두 가지가 동시에 서로를 성립시키는 관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목숨과 온기도 이와 같아서, 어느 한쪽을 근원으로 놓고 다른 쪽을 파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호 의존의 관계임을 이 비유가 보여 줍니다.

묵상

등불의 불꽃과 빛처럼,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할 수 없이 함께 있어야만 성립하는 관계가 내 삶에도 있나요? 그런 관계를 굳이 순서를 매겨 설명하려 했던 적은 없었나요? 비유가 완전히 들어맞지 않아도 괜찮아요.

12 죽음과 멈춤은 다르다 4구절

느낌과 인식이 멈춘 성취와 죽음이 어떻게 다른지, 몸이 버려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벗이여, 생명을 이루는 힘과 느껴지는 것들은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생명을 이루는 힘과 느껴지는 것들은 서로 다른 것입니까?” “벗이여, 생명을 이루는 힘과 느껴지는 것들은 같지 않습니다. 만약 이 둘이 같은 것이라면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 성취에 든 수행자가 그 성취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나, 이 둘이 서로 다르기에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 성취에 든 수행자가 그 성취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타납니다.”

“Teva nu kho, āvuso, āyusaṅkhārā, te vedaniyā dhammā udāhu aññe āyusaṅkhārā aññe vedaniyā dhammā”ti? “Na kho, āvuso, teva āyusaṅkhārā te vedaniyā dhammā. Te ca hāvuso, āyusaṅkhārā abhaviṁsu te vedaniyā dhammā, na yidaṁ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nnassa bhikkhuno vuṭṭhānaṁ paññāyetha. Yasmā ca kho, āvuso, aññe āyusaṅkhārā aññe vedaniyā dhammā, tasmā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nnassa bhikkhuno vuṭṭhānaṁ paññāya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목숨과 온기의 관계를 밝힌 뒤, 이제 목숨을 이루는 힘과 느낌으로 경험되는 것들의 관계를 묻습니다. 사리뿟따는 이 둘이 서로 다르다고 답하며, 만약 같았다면 인식과 느낌이 완전히 멈춘 깊은 선정(상수멸)에 든 수행자가 다시 그 선정에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를 듭니다. 목숨을 이루는 힘은 그 선정 중에도 이어지지만 느낌은 그 사이 완전히 멎기 때문에, 둘이 다르다는 사실 덕분에 수행자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 편의 “몸이 죽음에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을 밝히는 발판이 됩니다.

묵상

살아 있다는 것과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이 완전히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나요? 느낌이 잠시 옅어져도 삶 자체는 이어지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확신이 서지 않아도 괜찮아요.

“벗이여, 몇 가지가 이 몸을 떠나야 이 몸이 마치 감각없는 나무토막처럼 버려지고 내던져진 채 눕게 됩니까?” “벗이여, 목숨과 온기와 의식, 이 세 가지가 이 몸을 떠나야 이 몸이 마치 감각없는 나무토막처럼 버려지고 내던져진 채 눕게 됩니다.”

“Yadā nu kho, āvuso, imaṁ kāyaṁ kati dhammā jahanti; athāyaṁ kāyo ujjhito avakkhitto seti, yathā kaṭṭhaṁ acetanan”ti? “Yadā kho, āvuso, imaṁ kāyaṁ tayo dhammā jahanti—āyu usmā ca viññāṇaṁ; athāyaṁ kāyo ujjhito avakkhitto seti, yathā kaṭṭhaṁ acetanan”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서 목숨·온기·의식 세 가지가 각각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밝혀 왔으니, 이 편은 그 셋이 함께 몸을 떠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룹니다. 답은 목숨과 온기와 의식, 이 세 가지가 모두 몸을 떠나야 비로소 몸이 감각 없는 나무토막처럼 버려진 채 눕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하나씩 살펴본 세 요소가 여기서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함께 모입니다. 다음 편은 이 죽음을, 겉보기에 비슷해 보이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이라는 성취와 나란히 놓고 그 차이를 밝힙니다.

묵상

죽은 이의 몸을 나무토막에 비유하는 이 말이 낯설거나 힘겹게 느껴진다면, 이 대목은 잠시 건너뛰고 다음으로 넘어가도 괜찮아요. 지금 이 몸에 목숨과 온기와 의식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나요?

“벗이여, 목숨을 다해 죽은 이와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 성취에 든 수행자, 이 둘의 다름은 무엇입니까?” “벗이여, 목숨을 다해 죽은 이는 몸과 말과 마음의 작용이 소멸하여 가라앉고, 목숨이 다하고, 온기가 식고, 감각 기능이 무너집니다.

“Yvāyaṁ, āvuso, mato kālaṅkato, yo cāyaṁ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nno—imesaṁ kiṁ nānākaraṇan”ti? “Yvāyaṁ, āvuso, mato kālaṅkato tassa kāy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vacī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citt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āyu parikkhīṇo, usmā vūpasantā, indriyāni paribhinnān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이 편은 앞서 다룬 죽음과, 겉보기에 비슷해 보이는 인식과 느낌이 완전히 소멸한 선정을 나란히 놓고 그 다름을 묻습니다. 먼저 목숨을 다해 죽은 이의 경우를 밝히니, 몸과 말과 마음의 작용이 가라앉고 목숨이 다하고 온기가 식으며 감각 기능이 무너집니다. 죽음이 생명의 조건 전체가 함께 끝나는 사건임을 이 편이 먼저 확인합니다. 다음 편에서 이와 다른 경우, 곧 선정에 든 수행자의 상태가 이어집니다.

묵상

이 대목이 지금 마음에 무겁게 다가온다면 잠시 건너뛰고 다음으로 넘어가도 괜찮아요. 가까운 이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면, 이 구절을 어떤 마음으로 읽게 되나요? 천천히 떠올려 봐도 괜찮아요.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 성취에 든 수행자도 몸과 말과 마음의 작용이 소멸하여 가라앉으나, 목숨이 다하지 않고, 온기가 식지 않으며, 감각 기능이 오히려 맑아지나니, 벗이여, 이것이 목숨을 다해 죽은 이와 그 성취에 든 수행자의 다름입니다.”

Yo cāyaṁ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nno tassapi kāy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vacī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citt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āyu na parikkhīṇo, usmā avūpasantā, indriyāni vippasannāni. Yvāyaṁ, āvuso, mato kālaṅkato, yo cāyaṁ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nno—idaṁ nesaṁ nānākaraṇan”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의 죽음과 대구를 이루어, 이번에는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 성취에 든 수행자의 경우를 밝힙니다. 몸과 말과 마음의 작용이 가라앉는다는 점은 죽음과 같지만, 목숨이 다하지 않고 온기가 식지 않으며 감각 기능이 오히려 더 맑아진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겉모습은 고요히 멈춘 것처럼 같아 보여도 그 안에서 생명의 조건이 이어지느냐 끊어지느냐가 이 둘을 완전히 갈라놓는다는 것이 이 편의 결론입니다.

묵상

겉으로는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상태를 경험해 본 적이 있나요? 멈춤과 끝남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지금 어떤 예로 떠올려 볼 수 있나요? 예가 쉽게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13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마음의 풀려남 1구절

네 번째 선정에 해당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이루는 네 조건을 밝힙니다.

“벗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는 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까?” “벗이여, 네 가지 조건이 있나니, 여기 수행자는 즐거움을 버리고 괴로움을 버리며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고 평정과 알아차림이 온전히 맑은 네 번째 선정을 갖추어 머무나니, 벗이여, 이 네 가지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는 조건입니다.”

“Kati panāvuso, paccayā adukkhamasukh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ti? “Cattāro kho, āvuso, paccayā adukkhamasukh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 Idhāvuso,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ṁ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ṁ upekkhāsatipārisuddhiṁ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Ime kho, āvuso, cattāro paccayā adukkhamasukh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죽음과 선정의 차이를 밝힌 뒤, 화제는 다시 마음의 해탈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은 곧 네 번째 선정을 가리키며, 그 네 가지 조건이 곧 네 번째 선정의 정의 자체를 이룹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모두 버리고 이전의 기쁨과 근심마저 가라앉아, 평정과 알아차림만이 맑게 남는 자리입니다. 이 편을 시작으로 뒤이어 여러 종류의 마음의 해탈이 하나씩 소개되며, 그 갈래와 관계가 이 경의 마지막 큰 주제를 이룹니다.

묵상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그저 고요하고 분명하기만 한 상태를 경험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순간이 있었다면, 그때 마음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나요?

14 특징에 매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에 들고 머물고 나오는 조건 3구절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이루고 그 안에 머물며 다시 나오는 데 각각 필요한 조건을 밝힙니다.

“벗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이루는 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까?” “벗이여, 두 가지 조건이 있나니, 온갖 표상에 마음을 두지 않음과 표상 없는 세계에 마음을 둠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그것을 이루는 조건입니다.”

“Kati pan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ti? “Dve kho, 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 sabbanimittānañca amanasikāro, animittāya ca dhātuyā manasikāro. Ime kho, āvuso, dve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네 번째 선정을 밝힌 데 이어, 이번에는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라는 또 다른 갈래를 다룹니다. 표상이란 마음에 떠오르는 온갖 모습과 이미지를 말하며, 이 해탈은 그 모든 표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표상 없는 세계로 마음을 향하는 데서 옵니다. 그것을 처음 이루는 데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 곧 온갖 표상에 마음을 두지 않음과 표상 없는 세계에 마음을 둠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룬 뒤 그 안에 머무는 데 필요한 조건이 이어집니다.

묵상

표상, 곧 마음에 떠오르는 온갖 모습과 이미지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 어떻게 느껴지나요? 상상하기 어려워도 괜찮아요. 상상이 흐릿해도 괜찮으니 잠시 머물러 보세요. 천천히 떠올려 봐도 괜찮아요.

“벗이여, 그렇다면 그 안에 머무는 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까?” “벗이여, 세 가지 조건이 있나니, 온갖 표상에 마음을 두지 않음과 표상 없는 세계에 마음을 둠과 앞서 마음을 그렇게 이끌어 둠이니, 이 세 가지가 그 안에 머무는 조건입니다.”

“Kati pan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ṭhitiyā”ti? “Tayo kho, 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ṭhitiyā— sabbanimittānañca amanasikāro, animittāya ca dhātuyā manasikāro, pubbe ca abhisaṅkhāro. Ime kho, āvuso, tay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ṭhitiyā”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에서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이루는 두 조건을 밝힌 데 이어, 이번에는 그 안에 계속 머무는 데 필요한 조건을 묻습니다. 답은 세 가지로, 이룸의 두 조건에 “앞서 마음을 그렇게 이끌어 둠”이라는 조건이 더해집니다. 순간적으로 이르는 것과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 다른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 하나의 추가된 조건이 보여 줍니다. 이 편은 다음 편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한 매듭입니다.

묵상

어떤 상태에 한 번 이르는 것과 그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껴 본 적이 있나요? 지금 삶에서 이르기는 했지만 머물기는 아직 서툰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아직 이르지 못한 상태도, 이미 서툰 머묾도 모두 괜찮아요.

“벗이여, 그렇다면 그 안에서 나오는 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까?” “벗이여, 두 가지 조건이 있나니, 온갖 표상에 마음을 둠과 표상 없는 세계에 마음을 두지 않음이니, 이 두 가지가 그 안에서 나오는 조건입니다.” “벗이여,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과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과 비어 있다는 마음의 해탈과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 이것들은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뜻은 하나이고 표현만 다른 것입니까?”

“Kati pan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vuṭṭhānāyā”ti? “Dve kho, 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vuṭṭhānāya— sabbanimittānañca manasikāro, animittāya ca dhātuyā amanasikāro. Ime kho, āvuso, dve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vuṭṭhānāyā”ti. “Yā cāyaṁ, āvuso, appamāṇā cetovimutti, yā ca ākiñcaññā cetovimutti, yā ca suññatā cetovimutti, yā ca animittā cetovimutti—ime dhammā nānātthā ceva nānābyañjanā ca udāhu ekatthā byañjanameva nānan”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에서 나오는 조건까지 밝힌 뒤, 마하꼿티따는 이제 시야를 넓혀 새로운 물음을 던집니다. 지금까지 나온 표상 없는 해탈에 더해, 한량없는 해탈과 아무것도 없다는 해탈과 비어 있다는 해탈까지 네 가지 마음의 해탈을 한자리에 놓고, 이들이 정말 서로 다른 것인지 아니면 같은 것을 다르게 부르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이 물음이 다음 편들에서 이어지는 이 경의 마지막 큰 주제, 곧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해탈들의 관계를 여는 문이 됩니다.

묵상

같은 것을 두고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 마치 다른 것처럼 여겼던 경험이 있나요?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반드시 실체까지 다른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어떤 예가 떠오르나요? 예가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15 뜻이 다른 자리 - 넷의 쓰임이 다르다 6구절

한량없음과 아무것도 없음과 비어 있음과 표상 없음, 이 네 가지 마음의 해탈이 뜻과 표현에서 서로 다른 자리를 밝힙니다.

“벗이여,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과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과 비어 있다는 마음의 해탈과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 이것들은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르다고 할 근거가 있고, 뜻은 하나이고 표현만 다르다고 할 근거도 있습니다.”

“Yā cāyaṁ, āvuso, appamāṇā cetovimutti, yā ca ākiñcaññā cetovimutti, yā ca suññatā cetovimutti, yā ca animittā cetovimutti—atthi kho, āvuso, pariyāyo yaṁ pariyāyaṁ āgamma ime dhammā nānātthā ceva nānābyañjanā ca; atthi ca kho, āvuso, pariyāyo yaṁ pariyāyaṁ āgamma ime dhammā ekatthā, byañjanameva nānaṁ.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의 물음에 사리뿟따는 양쪽 다 옳다는 답으로 문을 엽니다. 이 네 가지 해탈이 뜻과 표현 모두에서 다르다고 볼 근거도 있고, 뜻은 하나이면서 표현만 다르다고 볼 근거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급하게 어느 한쪽으로 결론짓지 않고 두 갈래를 모두 짚어 보이려는 태도입니다. 이어지는 편들에서 사리뿟따는 먼저 이 넷이 서로 다르다고 볼 수 있는 자리를 하나씩 풀어내고, 그다음 뜻이 같다고 볼 수 있는 자리를 다시 풀어냅니다.

묵상

하나의 물음에 “둘 다 맞다”는 답을 들었을 때, 성급하게 하나를 고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어떻게 다가오나요? 지금 마음속에 양쪽 다 일리 있어 보이는 물음이 있나요? 없어도 괜찮으니 천천히 살펴보세요.

“벗이여, 무엇이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자리입니까? 여기 수행자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고 머무나니, 이렇게 둘째·셋째·넷째 방향도, 또 위아래와 사방을 널리, 모든 곳에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크고 넓고 한량없으며 원한도 성냄도 없이 가득 채우고 머뭅니다.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도 이와 같이, 함께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도 이와 같이 합니다.

Katamo cāvuso, pariyāyo yaṁ pariyāyaṁ āgamma ime dhammā nānātthā ceva nānābyañjanā ca? Idhāvuso, bhikkhu mettāsahagatena cetasā ekaṁ disaṁ pharitvā viharati, tathā dutiyaṁ, tathā tatiyaṁ, tathā catutthaṁ. Iti uddhamadho tiriyaṁ sabbadhi sabbattatāya sabbāvantaṁ lokaṁ mettāsahagatena cetasā vipulena mahaggatena appamāṇena averena abyābajjhena pharitvā viharati. Karuṇāsahagatena cetasā …pe… muditāsahagatena cetasā …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넷이 서로 다르다고 볼 수 있는 자리의 첫째로, 사리뿟따는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을 자애·연민·함께 기뻐함·평정이라는 네 가지 거룩한 마음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원문은 자애를 모든 방향, 모든 존재에게 크고 넓고 한량없이 펴는 모습을 온전히 편 뒤, 연민과 함께 기뻐함은 “자애와 같은 방식으로”라는 생략으로 줄입니다. 다음 편에서 네 번째인 평정이 다시 온전히 펼쳐지고, 이 넷을 통틀어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이라 부르는 까닭이 밝혀집니다.

묵상

자애나 연민 같은 마음을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방향, 모든 존재에게 넓혀 본다는 것이 지금 가능하게 느껴지나요, 아득하게 느껴지나요? 가까운 한 사람에게부터 시작해도 괜찮아요.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고 머무나니, 이렇게 둘째·셋째·넷째 방향도, 또 위아래와 사방을 널리, 모든 곳에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크고 넓고 한량없으며 원한도 성냄도 없이 가득 채우고 머무나니, 벗이여, 이를 일러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upekkhāsahagatena cetasā ekaṁ disaṁ pharitvā viharati, tathā dutiyaṁ, tathā tatiyaṁ, tathā catutthaṁ. Iti uddhamadho tiriyaṁ sabbadhi sabbattatāya sabbāvantaṁ lokaṁ upekkhāsahagatena cetasā vipulena mahaggatena appamāṇena averena abyābajjhena pharitvā viharati. Ayaṁ vuccatāvuso, appamāṇā cetovimut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에서 자애와 연민과 함께 기뻐함을 편 데 이어, 네 번째인 평정이 다시 온전한 문장으로 펼쳐집니다. 이 네 가지 거룩한 마음을 모든 방향, 모든 존재에게 크고 넓고 한량없이 펴는 것이 바로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이라 불리는 까닭입니다. 다음 편부터는 나머지 세 해탈, 곧 아무것도 없음과 비어 있음과 표상 없음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정의됩니다. 이 편은 다음 편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한 매듭입니다.

묵상

좋고 싫음을 넘어선 평정한 마음을,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로 넓혀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지금 당장 그려지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려지지 않아도, 그 방향으로 마음을 두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벗이여, 무엇이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입니까? 여기 수행자는 의식이 끝없는 경지를 완전히 넘어서서 ‘아무것도 없다’고 하여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갖추어 머무나니, 벗이여, 이를 일러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Katamā cāvuso, ākiñcaññā cetovimutti? Idhāvuso, bhikkhu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ṁ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vuccatāvuso, ākiñcaññā cetovimut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넷 가운데 둘째로,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을 정의합니다. 이는 앞서 감각을 벗어난 마음이 알 수 있는 경지 가운데 하나로 이미 나온 “아무것도 없는 경지(무소유처)”를 곧바로 가리킵니다. 의식이 끝없는 경지마저 완전히 넘어서서 그 어떤 것도 없다고 여기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 이 해탈의 내용입니다. 앞선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이 자애 등 네 가지 마음을 널리 펴는 방식이라면, 이 해탈은 대상을 남김없이 덜어 내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결이 다릅니다.

묵상

무언가를 채우기보다 덜어 냄으로써 오히려 편안해졌던 경험이 있나요? 넓게 펴는 마음과 완전히 덜어 내는 마음, 이 둘은 서로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둘 다 낯설게 느껴져도 괜찮아요.

“벗이여, 무엇이 비어 있다는 마음의 해탈입니까? 여기 수행자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서 이렇게 살피나니, ‘이것은 자아로도 비어 있고 자아에 속한 것으로도 비어 있다’고 살핍니다. 벗이여, 이를 일러 비어 있다는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Katamā cāvuso, suññatā cetovimutti? Idhāvuso,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iti paṭisañcikkhati: ‘suññamidaṁ attena vā attaniyena vā’ti. Ayaṁ vuccatāvuso, suññatā cetovimut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셋째로, 비어 있다는 마음의 해탈을 정의합니다. 이는 앞의 두 해탈과 달리 감각을 벗어난 깊은 선정이 아니라, 숲이나 나무 밑이나 빈집처럼 한적한 곳에서 지금 경험되는 것을 그 자체로 살피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자아로도, 자아에 속한 것으로도 비어 있다”는 살핌이 그 핵심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경험 안에서 “나”나 “내 것”이라 붙잡을 만한 실체를 찾을 수 없다고 보는 이 관찰이 바로 비어 있음이라 불리는 까닭입니다.

묵상

지금 이 순간의 경험 가운데 “이것이 바로 나다”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나요? 그렇게 확신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불안해질 필요는 없어요. 찾지 못한 채로 남겨 두어도 괜찮아요.

“벗이여, 무엇이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입니까? 여기 수행자는 온갖 표상에 마음을 두지 않아 표상 없는 마음의 집중을 갖추어 머무나니, 벗이여, 이를 일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벗이여, 이것이 바로 이 네 가지가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Katamā cāvuso, animittā cetovimutti? Idhāvuso, bhikkhu sabbanimittānaṁ amanasikārā animittaṁ cetosamādhi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vuccatāvuso, animittā cetovimutti. Ayaṁ kho, āvuso, pariyāyo yaṁ pariyāyaṁ āgamma ime dhammā nānātthā ceva nānābyañjanā ca.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넷 가운데 마지막으로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정의합니다. 이는 앞서 27~29편에서 이루고 머물고 나오는 조건을 이미 다룬 바로 그 해탈로, 온갖 표상에 마음을 두지 않는 데서 옵니다. 이로써 자애 등을 펴는 방식, 대상을 덜어 내는 방식, 있는 그대로 살피는 방식, 표상을 두지 않는 방식이라는 네 가지 서로 다른 길이 모두 소개되었고, 사리뿟따는 “이것이 이 넷이 서로 다르다고 볼 수 있는 자리”라는 말로 이 갈래를 마무리합니다. 다음 편부터는 이 넷이 뜻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는 자리로 넘어갑니다.

묵상

지금까지 나온 네 가지 마음의 해탈, 곧 펴는 마음과 덜어 내는 마음과 살피는 마음과 표상을 두지 않는 마음 가운데, 지금 내게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를 고르지 못해도 괜찮아요.

16 서로 다른 네 이름이 가리키는 흔들림 없는 풀려남 4구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다한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이야말로 넷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밝힙니다.

“벗이여, 무엇이 이 넷이 뜻은 하나이고 표현만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자리입니까? 벗이여, 탐욕은 한계를 만드는 것이요, 성냄도 한계를 만드는 것이요, 어리석음도 한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번뇌를 다한 수행자에게는 이것들이 이미 버려지고 뿌리째 끊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나니, 벗이여,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들 가운데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이 으뜸이라 일컬어지며, 그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은 탐욕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비어 있습니다.

Katamo cāvuso, pariyāyo yaṁ pariyāyaṁ āgamma ime dhammā ekatthā byañjanameva nānaṁ? Rāgo kho, āvuso, pamāṇakaraṇo, doso pamāṇakaraṇo, moho pamāṇakaraṇo. Te khīṇāsavassa bhikkhuno pahīnā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ṅkatā āyatiṁ anuppādadhammā. Yāvatā kho, āvuso, appamāṇā cetovimuttiyo, akuppā tāsaṁ cetovimutti aggamakkhāyati. Sā kho panākuppā cetovimutti suññā rāgena, suññā dosena, suññā mohena.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이제 사리뿟따는 넷이 뜻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는 자리로 넘어갑니다. 그 열쇠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한계를 만드는 것”이라는 통찰입니다. 마음에 한계를 짓는 이 셋이 완전히 뿌리 뽑혀 다시 일어나지 않는 상태, 곧 흔들림 없는 해탈이야말로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합니다. 앞서 자애 등으로 펼치는 한량없는 해탈도 훌륭하지만, 탐진치가 완전히 비워진 흔들림 없는 자리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 정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묵상

탐욕이나 성냄이 마음에 “한계”를 만든다는 이 표현이, 지금 어떤 경험과 맞닿아 있나요? 한계가 옅어졌던 순간이 있었다면, 그때 마음은 어떻게 더 넓어졌나요? 넓어진 경험이 아직 없어도 괜찮아요.

“벗이여, 탐욕은 무언가에 걸리는 것이요, 성냄도 무언가에 걸리는 것이요, 어리석음도 무언가에 걸리는 것입니다. 번뇌를 다한 수행자에게는 이것들이 이미 버려지고 뿌리째 끊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나니, 벗이여,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들 가운데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이 으뜸이라 일컬어지며, 그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은 탐욕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비어 있습니다.

Rāgo kho, āvuso, kiñcano, doso kiñcano, moho kiñcano. Te khīṇāsavassa bhikkhuno pahīnā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ṅkatā āyatiṁ anuppādadhammā. Yāvatā kho, āvuso, ākiñcaññā cetovimuttiyo, akuppā tāsaṁ cetovimutti aggamakkhāyati. Sā kho panākuppā cetovimutti suññā rāgena, suññā dosena, suññā mohena.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과 같은 틀로,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 쪽에서 같은 통찰을 되풀이합니다. 이번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무언가에 걸리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무소유처가 “아무것도 없음”을 향한 해탈인데, 탐진치야말로 마음이 여전히 “무언가”에 걸려 있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셋이 뿌리 뽑힌 흔들림 없는 해탈이 아무것도 없다는 해탈들 가운데도 으뜸이라고 합니다.

묵상

지금 마음이 걸려 있는 “무언가”를 하나 떠올려 볼 수 있나요? 그것이 사라진다면 무엇이 남을지,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상상이 잘 안 되어도 괜찮아요. 천천히 떠올려 봐도 괜찮아요.

“벗이여, 탐욕은 표상을 만드는 것이요, 성냄도 표상을 만드는 것이요, 어리석음도 표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번뇌를 다한 수행자에게는 이것들이 이미 버려지고 뿌리째 끊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나니, 벗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들 가운데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이 으뜸이라 일컬어지며, 그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은 탐욕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비어 있습니다.

Rāgo kho, āvuso, nimittakaraṇo, doso nimittakaraṇo, moho nimittakaraṇo. Te khīṇāsavassa bhikkhuno pahīnā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ṅkatā āyatiṁ anuppādadhammā. Yāvatā kho, āvuso, animittā cetovimuttiyo, akuppā tāsaṁ cetovimutti aggamakkhāyati. Sā kho panākuppā cetovimutti suññā rāgena, suññā dosena, suññā mohena.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마지막으로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 쪽에서 같은 통찰이 되풀이됩니다. 이번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표상을 만드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표상 없음을 향한 해탈인데, 탐진치야말로 마음에 온갖 표상을 만들어 내는 바로 그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로써 한량없음·아무것도 없음·표상 없음이라는 세 자리 모두에서 흔들림 없는 해탈이 그 정점임이 확인됩니다. 다음 편에서 이 셋이 뜻은 하나라는 결론과 함께 사리뿟따의 긴 답변이 마무리됩니다.

묵상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에 표상을, 곧 온갖 모습과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이 말이 지금 어떻게 다가오나요? 마음이 유난히 바빴던 순간을 떠올려 볼 수 있나요? 바빴던 순간이 잘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벗이여, 이것이 바로 이 네 가지가 뜻은 하나이고 표현만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마하꼿티따 존자는 만족하여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였느니라.

Ayaṁ kho, āvuso, pariyāyo yaṁ pariyāyaṁ āgamma ime dhammā ekatthā byañjanameva nānan”ti. Idamavocāyasmā sāriputto. Attamano āyasmā mahākoṭṭhiko āyasmato sāriputtassa bhāsitaṁ abhinand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사리뿟따는 한량없음·아무것도 없음·표상 없음이라는 세 자리 모두에서 흔들림 없는 해탈이 정점임을 확인한 뒤, “이것이 이 넷이 뜻은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자리”라는 말로 자신의 긴 답변을 마무리합니다. 경의 마지막 두 문장은 사리뿟따가 이렇게 말했으며 마하꼿티따가 만족하여 기뻐했다는 서술로, 첫 편에서 마하꼿티따가 저녁 무렵 사리뿟따를 찾아가며 시작된 이 문답이 여기서 원만히 닫힙니다.

묵상

긴 물음과 답을 끝까지 따라온 지금, 지혜와 의식과 느낌과 인식, 이 넷 가운데 가장 또렷해진 것은 무엇인가요? 다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어도 괜찮아요. 천천히 떠올려 봐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