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여, 존재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벗이여, 존재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감각적 욕망의 세계에 있는 존재, 물질의 세계에 있는 존재,
형체 없는 세계에 있는 존재입니다.”
“Kati panāvuso, bhavā”ti? “Tayome, āvuso, bhavā— kāmabhavo, rūpabhavo, arūpabhavo”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화제는 이제 존재 자체로 옮겨 갑니다. 사리뿟따는 존재를 세 가지 세계로 나눕니다. 감각적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 물질은 있으나 감각적 욕망은 거친 형태로 있지 않은 세계, 물질조차 없는 형체 없는 세계입니다. 이는 불교 우주관에서 중생이 태어날 수 있는 존재의 전체 범위를 가리키며, 다음 편에서 묻는 “어떻게 다시 이런 존재로 태어나는가” 하는 물음의 배경이 됩니다.
묵상
지금 내가 마음을 쏟는 자리가 감각의 즐거움 쪽에 가까운가요, 아니면 그보다 고요한 무언가를 향하고 있나요? 어느 쪽이든 평가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이 순간의 방향만 가만히 살펴보아도 충분해요.
“벗이여, 어떻게 해서 미래에
다시 존재로 태어남이 있습니까?”
“벗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중생들이
이런저런 자리마다 즐거워하나니,
이렇게 해서 미래에 다시 존재로 태어남이 있습니다.”
“Kathaṁ panāvuso, āyatiṁ punabbhavābhinibbatti hotī”ti? “Avijjānīvaraṇānaṁ kho, āvuso, sattānaṁ taṇhāsaṁyojanānaṁ tatratatrābhinandanā— evaṁ āyatiṁ punabbhavābhinibbatti ho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존재의 세 갈래를 밝힌 뒤, 마하꼿티따는 어떻게 다시 그런 존재로 태어나는지를 묻습니다. 사리뿟따는 무명(아위자)이라는 덮개와 갈애라는 묶음, 그리고 그 갈애가 만나는 자리마다 즐거워하는 성향, 이 셋을 원인으로 듭니다. 무명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가리고, 갈애가 그 위에서 다시 붙잡을 대상을 찾게 하며, 만나는 자리마다 즐거워하는 성향이 그 갈애를 계속 먹여 살립니다. 이 셋이 겹쳐 다시 태어남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묵상
마주치는 자리마다 즐거움을 찾으려는 마음이 오늘 몇 번이나 있었나요? 그것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알아채기만 한다면 무엇이 보이나요? 몇 번이었는지 세지 않아도 괜찮아요. 천천히 떠올려 봐도 괜찮아요.
“벗이여, 어떻게 해서 미래에
다시 존재로 태어남이 없습니까?”
“벗이여, 무명이 빛바래고 참된 앎이 생기며
갈애가 소멸하나니,
이렇게 해서 미래에 다시 존재로 태어남이 없습니다.”
“Kathaṁ panāvuso, āyatiṁ punabbhavābhinibbatti na hotī”ti? “Avijjāvirāgā kho, āvuso, vijjuppādā taṇhānirodhā— evaṁ āyatiṁ punabbhavābhinibbatti na ho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과 정확히 대구를 이루는 자리로, 이번에는 다시 태어남이 없어지는 길을 묻습니다. 답은 앞 편의 원인 셋을 그대로 뒤집습니다. 무명이 빛바래고, 그 자리에 참된 앎이 생기며, 갈애가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무명이 걷히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참된 앎이 생기면 더는 갈애가 붙잡을 근거를 찾지 못하며, 그렇게 갈애 자체가 소멸합니다. 다시 태어남이 있고 없음의 두 갈래가 이렇게 원인과 그 소멸이라는 한 쌍으로 완결됩니다.
묵상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서 더는 붙잡고 싶지 않아졌던 경험이 있나요? 그런 앎은 억지로 애써서 온 것이었나요, 아니면 자연스럽게 다가온 것이었나요? 아직 그런 경험이 없어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