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여,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과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과 비어 있다는 마음의 해탈과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 이것들은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르다고 할 근거가 있고,
뜻은 하나이고 표현만 다르다고 할 근거도 있습니다.”
“Yā cāyaṁ, āvuso, appamāṇā cetovimutti, yā ca ākiñcaññā cetovimutti, yā ca suññatā cetovimutti, yā ca animittā cetovimutti—atthi kho, āvuso, pariyāyo yaṁ pariyāyaṁ āgamma ime dhammā nānātthā ceva nānābyañjanā ca; atthi ca kho, āvuso, pariyāyo yaṁ pariyāyaṁ āgamma ime dhammā ekatthā, byañjanameva nānaṁ.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의 물음에 사리뿟따는 양쪽 다 옳다는 답으로 문을 엽니다. 이 네 가지 해탈이 뜻과 표현 모두에서 다르다고 볼 근거도 있고, 뜻은 하나이면서 표현만 다르다고 볼 근거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급하게 어느 한쪽으로 결론짓지 않고 두 갈래를 모두 짚어 보이려는 태도입니다. 이어지는 편들에서 사리뿟따는 먼저 이 넷이 서로 다르다고 볼 수 있는 자리를 하나씩 풀어내고, 그다음 뜻이 같다고 볼 수 있는 자리를 다시 풀어냅니다.
묵상
하나의 물음에 “둘 다 맞다”는 답을 들었을 때, 성급하게 하나를 고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어떻게 다가오나요? 지금 마음속에 양쪽 다 일리 있어 보이는 물음이 있나요? 없어도 괜찮으니 천천히 살펴보세요.
“벗이여, 무엇이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자리입니까?
여기 수행자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고 머무나니,
이렇게 둘째·셋째·넷째 방향도,
또 위아래와 사방을 널리, 모든 곳에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크고 넓고 한량없으며 원한도 성냄도 없이
가득 채우고 머뭅니다.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도 이와 같이,
함께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도 이와 같이 합니다.
Katamo cāvuso, pariyāyo yaṁ pariyāyaṁ āgamma ime dhammā nānātthā ceva nānābyañjanā ca? Idhāvuso, bhikkhu mettāsahagatena cetasā ekaṁ disaṁ pharitvā viharati, tathā dutiyaṁ, tathā tatiyaṁ, tathā catutthaṁ. Iti uddhamadho tiriyaṁ sabbadhi sabbattatāya sabbāvantaṁ lokaṁ mettāsahagatena cetasā vipulena mahaggatena appamāṇena averena abyābajjhena pharitvā viharati. Karuṇāsahagatena cetasā …pe… muditāsahagatena cetasā …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넷이 서로 다르다고 볼 수 있는 자리의 첫째로, 사리뿟따는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을 자애·연민·함께 기뻐함·평정이라는 네 가지 거룩한 마음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원문은 자애를 모든 방향, 모든 존재에게 크고 넓고 한량없이 펴는 모습을 온전히 편 뒤, 연민과 함께 기뻐함은 “자애와 같은 방식으로”라는 생략으로 줄입니다. 다음 편에서 네 번째인 평정이 다시 온전히 펼쳐지고, 이 넷을 통틀어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이라 부르는 까닭이 밝혀집니다.
묵상
자애나 연민 같은 마음을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방향, 모든 존재에게 넓혀 본다는 것이 지금 가능하게 느껴지나요, 아득하게 느껴지나요? 가까운 한 사람에게부터 시작해도 괜찮아요.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고 머무나니,
이렇게 둘째·셋째·넷째 방향도, 또 위아래와 사방을 널리,
모든 곳에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크고 넓고 한량없으며 원한도 성냄도 없이
가득 채우고 머무나니,
벗이여, 이를 일러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upekkhāsahagatena cetasā ekaṁ disaṁ pharitvā viharati, tathā dutiyaṁ, tathā tatiyaṁ, tathā catutthaṁ. Iti uddhamadho tiriyaṁ sabbadhi sabbattatāya sabbāvantaṁ lokaṁ upekkhāsahagatena cetasā vipulena mahaggatena appamāṇena averena abyābajjhena pharitvā viharati. Ayaṁ vuccatāvuso, appamāṇā cetovimut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에서 자애와 연민과 함께 기뻐함을 편 데 이어, 네 번째인 평정이 다시 온전한 문장으로 펼쳐집니다. 이 네 가지 거룩한 마음을 모든 방향, 모든 존재에게 크고 넓고 한량없이 펴는 것이 바로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이라 불리는 까닭입니다. 다음 편부터는 나머지 세 해탈, 곧 아무것도 없음과 비어 있음과 표상 없음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정의됩니다. 이 편은 다음 편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한 매듭입니다.
묵상
좋고 싫음을 넘어선 평정한 마음을,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로 넓혀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지금 당장 그려지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려지지 않아도, 그 방향으로 마음을 두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벗이여, 무엇이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입니까?
여기 수행자는 의식이 끝없는 경지를
완전히 넘어서서 ‘아무것도 없다’고 하여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갖추어 머무나니,
벗이여, 이를 일러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Katamā cāvuso, ākiñcaññā cetovimutti? Idhāvuso, bhikkhu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ṁ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vuccatāvuso, ākiñcaññā cetovimu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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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가운데 둘째로,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을 정의합니다. 이는 앞서 감각을 벗어난 마음이 알 수 있는 경지 가운데 하나로 이미 나온 “아무것도 없는 경지(무소유처)”를 곧바로 가리킵니다. 의식이 끝없는 경지마저 완전히 넘어서서 그 어떤 것도 없다고 여기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 이 해탈의 내용입니다. 앞선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이 자애 등 네 가지 마음을 널리 펴는 방식이라면, 이 해탈은 대상을 남김없이 덜어 내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결이 다릅니다.
묵상
무언가를 채우기보다 덜어 냄으로써 오히려 편안해졌던 경험이 있나요? 넓게 펴는 마음과 완전히 덜어 내는 마음, 이 둘은 서로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둘 다 낯설게 느껴져도 괜찮아요.
“벗이여, 무엇이 비어 있다는
마음의 해탈입니까?
여기 수행자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서
이렇게 살피나니,
‘이것은 자아로도 비어 있고
자아에 속한 것으로도 비어 있다’고 살핍니다.
벗이여, 이를 일러 비어 있다는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Katamā cāvuso, suññatā cetovimutti? Idhāvuso,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iti paṭisañcikkhati: ‘suññamidaṁ attena vā attaniyena vā’ti. Ayaṁ vuccatāvuso, suññatā cetovimu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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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비어 있다는 마음의 해탈을 정의합니다. 이는 앞의 두 해탈과 달리 감각을 벗어난 깊은 선정이 아니라, 숲이나 나무 밑이나 빈집처럼 한적한 곳에서 지금 경험되는 것을 그 자체로 살피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자아로도, 자아에 속한 것으로도 비어 있다”는 살핌이 그 핵심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경험 안에서 “나”나 “내 것”이라 붙잡을 만한 실체를 찾을 수 없다고 보는 이 관찰이 바로 비어 있음이라 불리는 까닭입니다.
묵상
지금 이 순간의 경험 가운데 “이것이 바로 나다”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나요? 그렇게 확신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불안해질 필요는 없어요. 찾지 못한 채로 남겨 두어도 괜찮아요.
“벗이여, 무엇이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입니까?
여기 수행자는 온갖 표상에 마음을 두지 않아
표상 없는 마음의 집중을
갖추어 머무나니,
벗이여, 이를 일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벗이여, 이것이 바로 이 네 가지가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Katamā cāvuso, animittā cetovimutti? Idhāvuso, bhikkhu sabbanimittānaṁ amanasikārā animittaṁ cetosamādhi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vuccatāvuso, animittā cetovimutti. Ayaṁ kho, āvuso, pariyāyo yaṁ pariyāyaṁ āgamma ime dhammā nānātthā ceva nānābyañjanā ca.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넷 가운데 마지막으로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정의합니다. 이는 앞서 27~29편에서 이루고 머물고 나오는 조건을 이미 다룬 바로 그 해탈로, 온갖 표상에 마음을 두지 않는 데서 옵니다. 이로써 자애 등을 펴는 방식, 대상을 덜어 내는 방식, 있는 그대로 살피는 방식, 표상을 두지 않는 방식이라는 네 가지 서로 다른 길이 모두 소개되었고, 사리뿟따는 “이것이 이 넷이 서로 다르다고 볼 수 있는 자리”라는 말로 이 갈래를 마무리합니다. 다음 편부터는 이 넷이 뜻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는 자리로 넘어갑니다.
묵상
지금까지 나온 네 가지 마음의 해탈, 곧 펴는 마음과 덜어 내는 마음과 살피는 마음과 표상을 두지 않는 마음 가운데, 지금 내게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를 고르지 못해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