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네 이름이 가리키는 흔들림 없는 풀려남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다한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이야말로 넷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밝힙니다.

“벗이여, 무엇이 이 넷이 뜻은 하나이고 표현만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자리입니까? 벗이여, 탐욕은 한계를 만드는 것이요, 성냄도 한계를 만드는 것이요, 어리석음도 한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번뇌를 다한 수행자에게는 이것들이 이미 버려지고 뿌리째 끊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나니, 벗이여,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들 가운데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이 으뜸이라 일컬어지며, 그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은 탐욕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비어 있습니다.

Katamo cāvuso, pariyāyo yaṁ pariyāyaṁ āgamma ime dhammā ekatthā byañjanameva nānaṁ? Rāgo kho, āvuso, pamāṇakaraṇo, doso pamāṇakaraṇo, moho pamāṇakaraṇo. Te khīṇāsavassa bhikkhuno pahīnā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ṅkatā āyatiṁ anuppādadhammā. Yāvatā kho, āvuso, appamāṇā cetovimuttiyo, akuppā tāsaṁ cetovimutti aggamakkhāyati. Sā kho panākuppā cetovimutti suññā rāgena, suññā dosena, suññā mohena.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이제 사리뿟따는 넷이 뜻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는 자리로 넘어갑니다. 그 열쇠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한계를 만드는 것”이라는 통찰입니다. 마음에 한계를 짓는 이 셋이 완전히 뿌리 뽑혀 다시 일어나지 않는 상태, 곧 흔들림 없는 해탈이야말로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합니다. 앞서 자애 등으로 펼치는 한량없는 해탈도 훌륭하지만, 탐진치가 완전히 비워진 흔들림 없는 자리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 정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묵상

탐욕이나 성냄이 마음에 “한계”를 만든다는 이 표현이, 지금 어떤 경험과 맞닿아 있나요? 한계가 옅어졌던 순간이 있었다면, 그때 마음은 어떻게 더 넓어졌나요? 넓어진 경험이 아직 없어도 괜찮아요.

“벗이여, 탐욕은 무언가에 걸리는 것이요, 성냄도 무언가에 걸리는 것이요, 어리석음도 무언가에 걸리는 것입니다. 번뇌를 다한 수행자에게는 이것들이 이미 버려지고 뿌리째 끊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나니, 벗이여,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들 가운데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이 으뜸이라 일컬어지며, 그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은 탐욕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비어 있습니다.

Rāgo kho, āvuso, kiñcano, doso kiñcano, moho kiñcano. Te khīṇāsavassa bhikkhuno pahīnā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ṅkatā āyatiṁ anuppādadhammā. Yāvatā kho, āvuso, ākiñcaññā cetovimuttiyo, akuppā tāsaṁ cetovimutti aggamakkhāyati. Sā kho panākuppā cetovimutti suññā rāgena, suññā dosena, suññā mohena.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앞 편과 같은 틀로,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해탈 쪽에서 같은 통찰을 되풀이합니다. 이번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무언가에 걸리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무소유처가 “아무것도 없음”을 향한 해탈인데, 탐진치야말로 마음이 여전히 “무언가”에 걸려 있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셋이 뿌리 뽑힌 흔들림 없는 해탈이 아무것도 없다는 해탈들 가운데도 으뜸이라고 합니다.

묵상

지금 마음이 걸려 있는 “무언가”를 하나 떠올려 볼 수 있나요? 그것이 사라진다면 무엇이 남을지,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상상이 잘 안 되어도 괜찮아요. 천천히 떠올려 봐도 괜찮아요.

“벗이여, 탐욕은 표상을 만드는 것이요, 성냄도 표상을 만드는 것이요, 어리석음도 표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번뇌를 다한 수행자에게는 이것들이 이미 버려지고 뿌리째 끊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나니, 벗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들 가운데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이 으뜸이라 일컬어지며, 그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은 탐욕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비어 있습니다.

Rāgo kho, āvuso, nimittakaraṇo, doso nimittakaraṇo, moho nimittakaraṇo. Te khīṇāsavassa bhikkhuno pahīnā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ṅkatā āyatiṁ anuppādadhammā. Yāvatā kho, āvuso, animittā cetovimuttiyo, akuppā tāsaṁ cetovimutti aggamakkhāyati. Sā kho panākuppā cetovimutti suññā rāgena, suññā dosena, suññā mohena.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마지막으로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 쪽에서 같은 통찰이 되풀이됩니다. 이번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표상을 만드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표상 없음을 향한 해탈인데, 탐진치야말로 마음에 온갖 표상을 만들어 내는 바로 그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로써 한량없음·아무것도 없음·표상 없음이라는 세 자리 모두에서 흔들림 없는 해탈이 그 정점임이 확인됩니다. 다음 편에서 이 셋이 뜻은 하나라는 결론과 함께 사리뿟따의 긴 답변이 마무리됩니다.

묵상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에 표상을, 곧 온갖 모습과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이 말이 지금 어떻게 다가오나요? 마음이 유난히 바빴던 순간을 떠올려 볼 수 있나요? 바빴던 순간이 잘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벗이여, 이것이 바로 이 네 가지가 뜻은 하나이고 표현만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마하꼿티따 존자는 만족하여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였느니라.

Ayaṁ kho, āvuso, pariyāyo yaṁ pariyāyaṁ āgamma ime dhammā ekatthā byañjanameva nānan”ti. Idamavocāyasmā sāriputto. Attamano āyasmā mahākoṭṭhiko āyasmato sāriputtassa bhāsitaṁ abhinandīti.

맛지마 니까야 MN 43 교리문답 큰경 (Mahāvedallasutta)

배경

사리뿟따는 한량없음·아무것도 없음·표상 없음이라는 세 자리 모두에서 흔들림 없는 해탈이 정점임을 확인한 뒤, “이것이 이 넷이 뜻은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자리”라는 말로 자신의 긴 답변을 마무리합니다. 경의 마지막 두 문장은 사리뿟따가 이렇게 말했으며 마하꼿티따가 만족하여 기뻐했다는 서술로, 첫 편에서 마하꼿티따가 저녁 무렵 사리뿟따를 찾아가며 시작된 이 문답이 여기서 원만히 닫힙니다.

묵상

긴 물음과 답을 끝까지 따라온 지금, 지혜와 의식과 느낌과 인식, 이 넷 가운데 가장 또렷해진 것은 무엇인가요? 다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어도 괜찮아요. 천천히 떠올려 봐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