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들이여, 어떤 수행자·바라문들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지니고 있으니
‘처벌·훼손·고문·괴롭힘·억압·위협을 행하거나 행하게 하는 자,
살생·투도·가택 침입·약탈·외딴집 털이·노상강도·간음·거짓말을 행하는 자,
이런 자가 행하여도 악행이 되지 않으며,
면도날 같은 바퀴로 이 땅의 뭇 생명을 모두 한 덩이 살로 만든다 해도
그 때문에 생기는 악이나 악의 결과는 없다’라 하느니라.
Santi, gahapatayo,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karoto kārayato, chindato chedāpayato, pacato pācāpayato, socayato socāpayato, kilamato kilamāpayato, phandato phandāpayato, pāṇamatipātayato, adinnaṁ ādiyato, sandhiṁ chindato, nillopaṁ harato, ekāgārikaṁ karoto, paripanthe tiṭṭhato, paradāraṁ gacchato, musā bhaṇato; karoto na karīyati pāpaṁ. Khurapariyantena cepi cakkena yo imissā pathaviyā pāṇe ekaṁ maṁsakhalaṁ ekaṁ maṁsapuñjaṁ kareyya, n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natthi pāpassa āgamo.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확실한 가르침의 둘째 주제로, 행위 자체에 도덕적 효력이 없다는 견해가 제시됩니다. 처벌부터 거짓말까지 여러 행위를 나열한 뒤, 온 땅의 생명을 모두 죽여 한 덩이로 만들어도 악의 결과가 없다는 극단적인 비유로 마무리합니다. 이 과장된 비유는 이 견해가 얼마나 철저하게 행위와 결과의 연결을 끊는지를 극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것이며, 다음 구절에서 갠지스강의 비유로 한 번 더 이어집니다.
묵상
행동에 아무 결과가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그 상상이 지금 내가 행동을 조심하는 이유를 거꾸로 비추어 주지는 않나요? 그 이유를 오늘 한 문장으로 적어 볼 수 있을까요?
‘갠지스강 남쪽 기슭을 따라가며 죽이고 자르고 삶아도
그 때문에 생기는 악이나 악의 결과는 없으며,
갠지스강 북쪽 기슭을 따라가며 베풀고 제사 지내어도
그 때문에 생기는 공덕이나 공덕의 결과는 없으니,
보시로도 자제로도 절제로도 진실한 말로도
공덕은 없고 공덕의 결과도 없다’라 하느니라.
Dakkhiṇ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hananto ghātento, chindanto chedāpento, pacanto pācento; n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natthi pāpassa āgamo. Uttar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dadanto dāpento, yajanto yajāpento; natthi tatonidānaṁ puññaṁ, natthi puññassa āgamo. Dānena damena saṁyamena saccavajjena natthi puññaṁ, natthi puññassa āgam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앞선 극단적 비유가 강의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어 한 번 더 되풀이됩니다. 남쪽에서 죽여도 악이 없고 북쪽에서 베풀어도 공덕이 없다는 대칭적 구성은, 이 견해가 나쁜 행위만이 아니라 좋은 행위의 가치까지 똑같이 부정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보시·자제·절제·진실이라는 전통적인 덕목들을 하나하나 짚어 그 모두에 아무 결과가 없다고 못박으며, 다음 구절에서 이와 정반대되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선행에도 아무 보상이 없다면, 그래도 그 선행을 계속할 이유가 남아 있을까요? 지금 내가 대가 없이도 계속하고 있는 좋은 행동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 이유를 말로 표현해 볼 수 있을까요?
장자들이여, 그 수행자·바라문들 가운데는 정반대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어 이렇게 말하느니라.
‘처벌·훼손·고문·괴롭힘·억압·위협을 행하거나 행하게 하는 자,
살생·투도·가택 침입·약탈·외딴집 털이·노상강도·간음·거짓말을 행하는 자,
이런 자가 행하면 악행이 되며,
면도날 같은 바퀴로 이 땅의 뭇 생명을 모두 한 덩이 살로 만든다면
그 때문에 생기는 악과 악의 결과가 있다’라 하느니라.
Tesaṁyeva kho, gahapatayo, samaṇabrāhmaṇānaṁ eke samaṇabrāhmaṇā ujuvipaccanīkavādā te evamāhaṁsu: ‘karoto kārayato, chindato chedāpayato, pacato pācāpayato, socayato socāpayato, kilamato kilamāpayato, phandato phandāpayato, pāṇamatipātayato, adinnaṁ ādiyato, sandhiṁ chindato, nillopaṁ harato, ekāgārikaṁ karoto, paripanthe tiṭṭhato, paradāraṁ gacchato, musā bhaṇato; karoto karīyati pāpaṁ. Khurapariyantena cepi cakkena yo imissā pathaviyā pāṇe ekaṁ maṁsakhalaṁ ekaṁ maṁsapuñjaṁ kareyya, 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atthi pāpassa āgamo.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허무주의 견해와 정반대로, 행위에는 반드시 도덕적 결과가 따른다는 견해가 그대로 대구를 이루어 제시됩니다. 앞서 나온 행위 목록과 극단적 비유가 그대로 되풀이되면서, 오직 결론 부분, 곧 악행이 되지 않는다 대 악행이 된다만 정반대로 뒤집힙니다. 이렇게 같은 틀을 유지한 채 결론만 뒤집는 방식은 두 견해가 같은 사실을 놓고 다툰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묵상
같은 사실을 두고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두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그 둘의 말을 각각 끝까지 들어 본다면 무엇이 갈리는 지점인지 보일까요? 그 지점을 찾는 것만으로도 다툼의 결이 달라질 수 있어요.
‘갠지스강 남쪽 기슭을 따라가며 죽이고 자르고 삶으면
그 때문에 생기는 악과 악의 결과가 있으며,
갠지스강 북쪽 기슭을 따라가며 베풀고 제사 지내면
그 때문에 생기는 공덕과 공덕의 결과가 있으니,
보시로도 자제로도 절제로도 진실한 말로도
공덕이 있고 공덕의 결과도 있다’라 하느니라.
장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수행자·바라문들은 서로 정반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Dakkhiṇ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hananto ghātento, chindanto chedāpento, pacanto pācento; 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atthi pāpassa āgamo. Uttar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dadanto dāpento, yajanto yajāpento; atthi tatonidānaṁ puññaṁ, atthi puññassa āgamo. Dānena damena saṁyamena saccavajjena atthi puññaṁ, atthi puññassa āgamo’ti. Taṁ kiṁ maññatha, gahapatayo, nanume samaṇabrāhmaṇā aññamaññassa ujuvipaccanīkavādā”ti? “Evaṁ, bhante”.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긍정하는 견해의 나머지 절반이 완성되고, 세존께서 다시 한번 장자들에게 두 주장이 정면으로 모순됨을 확인하십니다. 이 확인의 절차가 벌써 두 번째로 되풀이되는데, 이는 이 경이 성급한 판정보다 사실관계의 확인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갠지스강 남쪽과 북쪽, 죽임과 베풂이라는 대칭 구조가 앞서 나온 견해와 정확히 반대로 완성되는 것도 이 대목에서 확인됩니다. 다음 구절부터 이 견해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대한 분석이 이어집니다.
묵상
두 주장이 정말 서로 반대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차가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확인이 왜 필요할지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급하게 결론짓지 않는 것이 오늘 나에게도 도움이 될 자리가 있을까요?
장자들이여, 이렇게 주장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을 보면
‘처벌·훼손·고문·괴롭힘·억압·위협·살생·투도·가택 침입·약탈·
외딴집 털이·노상강도·간음·거짓말을 행하여도 악행이 되지 않으며,
면도날 같은 바퀴로 뭇 생명을 한 덩이 살로 만든다 해도 악은 없으며,
갠지스강 남쪽 기슭에서 죽이고 자르고 삶아도…
보시로도 자제로도 절제로도 진실한 말로도
공덕은 없고 그 결과도 없다’라 하니,
“Tatra, gahapatayo,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karoto kārayato, chindato chedāpayato, pacato pācāpayato, socayato socāpayato, kilamato kilamāpayato, phandato phandāpayato, pāṇamatipātayato, adinnaṁ ādiyato, sandhiṁ chindato, nillopaṁ harato, ekāgārikaṁ karoto, paripanthe tiṭṭhato, paradāraṁ gacchato, musā bhaṇato; karoto na karīyati pāpaṁ. Khurapariyantena cepi cakkena yo imissā pathaviyā pāṇe ekaṁ maṁsakhalaṁ ekaṁ maṁsapuñjaṁ kareyya, n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natthi pāpassa āgamo. Dakkhiṇ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hananto ghātento …pe… dānena damena saṁyamena saccavajjena natthi puññaṁ, natthi puññassa āgam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행위 부정론자들에게 어떤 결과가 예상되는지 말씀하시기 전에, 세존께서 그 견해 전체를 다시 한번 불러오십니다. 처벌의 목록과 극단적 비유까지는 앞서와 똑같이 온전히 되풀이하시고, 갠지스강 비유의 가운데 부분만 '…뻬…'라는 원문 자체의 생략 표시로 줄여 마지막 결론 문장으로 곧장 건너뛰십니다. 앞서 이미 다 들었던 내용을 요약해 다시 세우는 이 방식은, 이제부터 이 견해를 평가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묵상
이미 들은 이야기를 요약해서 다시 짚어 주면, 그 이야기가 더 또렷하게 남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나요? 오늘 내가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리하다 보면 처음엔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도 해요.
이런 이들에게는 몸·말·뜻으로 짓는 선행이라는 세 가지 능숙한 것을 멀리하고,
몸·말·뜻으로 짓는 악행이라는 세 가지 능숙하지 못한 것을 받아들여 행하리라는 것이
예상되느니라.
어떤 까닭인가? 그 수행자·바라문들은 능숙하지 못한 것들의 재난과 허물과 오염을 보지 못하고,
능숙한 것들의 벗어남이 주는 이익과 깨끗해짐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tesametaṁ pāṭikaṅkhaṁ—yamidaṁ kāyasucaritaṁ, vacīsucaritaṁ, manosucaritaṁ—ime tayo kusale dhamme abhinivajjetvā yamidaṁ kāyaduccaritaṁ, vacīduccaritaṁ, manoduccaritaṁ—ime tayo akusale dhamme samādāya vattissanti. Taṁ kissa hetu? Na h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passanti akusalānaṁ dhammānaṁ ādīnavaṁ okāraṁ saṅkilesaṁ, kusalānaṁ dhammānaṁ nekkhamme ānisaṁsaṁ vodānapakkh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행위 부정론을 지닌 이들에게 실제로 어떤 결과가 따를지 세존께서 예측하십니다.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선행과 악행이라는 익숙한 틀로 결론을 내리시는데, 그 까닭은 내세를 다룬 첫 사이클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문장으로 설명됩니다. 대상이 되는 견해는 바뀌었어도 그 견해가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심리적 구조, 곧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하는가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묵상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결과가 있다면, 그것을 보지 못해서인가요, 아니면 보고도 외면하고 있는 것인가요? 둘의 차이를 한번 가만히 짚어 볼 수 있을까요? 어느 쪽이든 지금부터 다시 볼 수 있어요.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는데도 ‘행위에 효력이 없다’는 견해를 지니면 그것이 그릇된 견해이며,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는데도 ‘행위에 효력이 없다’고 사유하면 그것이 그릇된 사유이며,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는데도 ‘행위에 효력이 없다’고 말하면 그것이 그릇된 말이며,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는데도 ‘행위에 효력이 없다’고 하여
행위의 효력을 가르치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는 것이 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natthi kiriyā’ tissa diṭṭhi hoti; sāssa hoti micchādiṭṭhi.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natthi kiriyā’ti saṅkappeti; svāssa hoti micchāsaṅkappo.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natthi kiriyā’ti vācaṁ bhāsati; sāssa hoti micchāvācā.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natthi kiriyā’ti āha, ye te arahanto kiriyavādā tesamayaṁ paccanīkaṁ kar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행위 부정론이 왜 그릇된 것인지, 내세 사이클과 똑같은 네 겹의 틀로 짚어 나갑니다. 대상이 저 세상에서 행위의 효력으로 바뀌었을 뿐, 견해·사유·말·성자들과의 관계라는 네 층위와 그 논리는 완전히 동일합니다. 이렇게 같은 틀이 되풀이될수록, 이 경이 겨냥하는 것은 특정 견해의 내용이 아니라 근거 없이 단정하는 태도 자체임이 더욱 뚜렷해집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 그릇된 견해가 남을 설득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나머지 절반이 마저 밝혀집니다.
묵상
결과를 직접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결과가 없다고 단정 지은 적이 있나요? 보지 못함과 없음을 구별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그 구별이 오늘 하나의 판단을 늦추어 줄 수 있을까요?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는데도 ‘행위에 효력이 없다’고 남을 설득하면
바르지 못한 가르침을 설득하는 것이 되며,
그로써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게 되니,
이렇게 좋은 계행은 버려지고 나쁜 계행이 자리 잡게 되느니라.
이 그릇된 견해와 사유와 말과 성자들에 대한 반대와
바르지 못한 가르침의 설득과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음,
이렇게 그릇된 견해를 조건으로 하여 이 많은 나쁘고 능숙하지 못한 것들이 생겨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natthi kiriyā’ti paraṁ saññāpeti; sāssa hoti asaddhammasaññatti. Tāya ca pana asaddhammasaññattiyā attānukkaṁseti, paraṁ vambheti. Iti pubbeva kho panassa susīlyaṁ pahīnaṁ hoti, dussīlyaṁ paccupaṭṭhitaṁ— ayañca micchādiṭṭhi micchāsaṅkappo micchāvācā ariyānaṁ paccanīkatā asaddhammasaññatti attukkaṁsanā paravambhanā. Evamassime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micchādiṭṭhipaccay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여덟 겹 분석의 나머지 절반이 마무리되며, 이번에도 내세 사이클의 결론 문장과 정확히 같은 구조로 끝맺습니다. 그릇된 견해 하나가 사유·말·관계·설득·자만을 거쳐 계행 전체를 무너뜨리는 이 연쇄는 대상만 바뀐 채 두 번째로 되풀이되는데, 이렇게 반복되는 구조 자체가 이 경의 논증 방식이 임의적이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다음 대목에서는 이 견해를 실제로 택했을 때 벌어질 두 가지 경우를 슬기로운 사람이 헤아려 봅니다.
묵상
그릇된 생각 하나가 처음에는 사소해 보였지만 점점 다른 영역까지 물들였던 경험이 있나요? 그 연쇄를 처음 끊을 수 있었던 자리는 어디였을까요? 지금 돌아보면 그 자리가 더 뚜렷이 보이나요?
장자들이여, 거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살피느니라.
‘만약 행위에 효력이 없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진 뒤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킨 것이 될 것이요,
만약 효력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고통스러운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날 것이니라.
효력이 없다는 그 말이 설령 진실이라 하여도,
이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슬기로운 이들에게 비난받으니
계행이 나쁘고 행위의 효력을 부정하는 그릇된 견해를 지녔다는 것이니라.’
Tatra, gahapatayo,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sace kho natthi kiriyā, evamayaṁ bhavaṁ purisapuggalo kāyassa bhedā sotthimattānaṁ karissati; sace kho atthi kiriyā evamayaṁ bhavaṁ purisapuggalo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apāyaṁ duggatiṁ vinipātaṁ nirayaṁ upapajjissati. Kāmaṁ kho pana māhu kiriyā, hotu nesaṁ bhavataṁ samaṇabrāhmaṇānaṁ saccaṁ vacanaṁ; atha ca panāyaṁ bhavaṁ purisapuggalo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gārayho—dussīlo purisapuggalo micchādiṭṭhi akiriyavād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행위 부정론을 실제로 택했을 때 벌어질 두 가지 경우를 슬기로운 사람이 미리 헤아려 봅니다. 내세를 다룬 첫 사이클과 똑같은 틀로, 행위에 효력이 없다면 무사할 뿐이지만 있다면 나쁜 곳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여기서도 그치지 않으시고, 설령 그 견해가 맞다 하더라도 지금 이 삶에서 이미 계행이 나쁜 사람으로 비난받는다는 사실을 덧붙이십니다. 결과를 기다리기도 전에 이미 대가가 시작된다는 것이 이 셈법의 핵심입니다.
묵상
행위에는 아무 결과가 없다고 믿었다가, 지금 이 삶에서 이미 주변의 신뢰를 잃은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그 손실이 먼 훗날의 결과보다 먼저 찾아온다는 것을 오늘 느껴 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만약 행위에 실제로 효력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는 양쪽 모두에서 지는 패가 되니,
곧 지금 여기에서 슬기로운 이들에게 비난받는 것과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고통스러운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 확실한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한 까닭에
한쪽으로만 치우쳐 서서 능숙한 자리를 놓쳐 버리느니라.
Sace kho attheva kiriyā, evaṁ imassa bhoto purisapuggalassa ubhayattha kaliggaho— yañca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gārayho, yañca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apāyaṁ duggatiṁ vinipātaṁ nirayaṁ upapajjissati. Evamassāyaṁ apaṇṇako dhammo dussamatto samādinno, ekaṁsaṁ pharitvā tiṭṭhati, riñcati kusalaṁ ṭhān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행위에 실제로 효력이 있을 경우의 결과가 확정되며 이 사이클의 결론이 내려집니다. 양쪽 모두에서 지는 패라는 표현은 내세 사이클과 똑같이 되풀이되는 이 경 전체의 도박 비유로, 지금 이 삶에서의 비난과 죽은 뒤의 나쁜 곳이라는 두 가지 손실이 겹친다는 뜻입니다. 확실한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였다는 평가는 이 견해가 한쪽의 이익만 바라보고 다른 쪽의 위험을 놓친 도박이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묵상
행위가 실제로 효력이 있는데도 없다고 믿고 손해를 감수하려는 이가 있다면, 오늘 그 판단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고 권해 볼 수 있을까요? 그 권유를 나 자신에게도 건네 볼 수 있을까요?
장자들이여, 이렇게 주장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을 보면
‘처벌·훼손·고문·괴롭힘·억압·위협을 행하거나 행하게 하는 자,
살생·투도·가택 침입·약탈·외딴집 털이·노상강도·간음·거짓말을 행하는 자,
이런 자가 행하면 악행이 되며,
면도날 같은 바퀴로 이 땅의 뭇 생명을 모두 한 덩이 살로 만든다면
그 때문에 생기는 악과 악의 결과가 있다’라 하니,
Tatra, gahapatayo,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karoto kārayato, chindato chedāpayato, pacato pācāpayato, socayato socāpayato, kilamato kilamāpayato, phandato phandāpayato, pāṇamatipātayato, adinnaṁ ādiyato, sandhiṁ chindato, nillopaṁ harato, ekāgārikaṁ karoto, paripanthe tiṭṭhato, paradāraṁ gacchato, musā bhaṇato; karoto karīyati pāpaṁ. Khurapariyantena cepi cakkena yo imissā pathaviyā pāṇe ekaṁ maṁsakhalaṁ ekaṁ maṁsapuñjaṁ kareyya, 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atthi pāpassa āgamo.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이번에는 행위를 긍정하는 견해가 다시 불려 나오는데, 앞서 나온 사이클과 달리 여기서는 처벌의 목록과 극단적 비유가 생략 없이 그대로 완전히 되풀이됩니다. 원문이 어느 자리는 줄이고 어느 자리는 그대로 두는지가 사이클마다 다르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앞서 부정론을 다룬 대목에서는 가운데 부분을 줄였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온전히 세워집니다. 다음 구절에서 갠지스강 비유와 예상되는 결과가 이어집니다.
묵상
같은 이야기를 다시 들을 때, 축약해서 듣는 것과 처음처럼 온전히 다시 듣는 것은 마음에 어떻게 다르게 남나요? 오늘은 이미 아는 이야기 하나를 처음 듣듯 다시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갠지스강 남쪽 기슭을 따라가며 죽이고 자르고 삶으면
그 때문에 생기는 악과 악의 결과가 있으며,
갠지스강 북쪽 기슭을 따라가며 베풀고 제사 지내면
그 때문에 생기는 공덕과 공덕의 결과가 있으니,
보시로도 자제로도 절제로도 진실한 말로도
공덕이 있고 공덕의 결과도 있다’라 하느니라.
Dakkhiṇ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hananto ghātento, chindanto chedāpento, pacanto pācento, 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atthi pāpassa āgamo. Uttar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dadanto dāpento, yajanto yajāpento, atthi tatonidānaṁ puññaṁ, atthi puññassa āgamo. Dānena damena saṁyamena saccavajjena atthi puññaṁ, atthi puññassa āgam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갠지스강 비유의 나머지 절반, 곧 남쪽에서 죽이면 악이 있고 북쪽에서 베풀면 공덕이 있다는 대목이 완성됩니다. 이는 앞서 부정론자들이 똑같은 강을 두고 정반대로 말했던 것과 낱말 하나까지 대구를 이루는데, 다만 있다·없다는 결론만 뒤집혀 있습니다. 보시·자제·절제·진실이라는 덕목을 하나하나 짚는 마지막 문장도 마찬가지로 대칭을 이룹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 견해를 지닌 이들에게 예상되는 결과가 이어집니다.
묵상
결과가 있다고 믿을 때 자연스럽게 몸가짐이 달라졌던 경험이 있나요? 오늘 내가 결과를 믿기에 계속하고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요? 그 행동을 낳은 믿음이 무엇인지도 함께 짚어 볼까요?
이렇게 주장하는 수행자·바라문들에게는
몸·말·뜻으로 짓는 악행이라는 세 가지 능숙하지 못한 것을 멀리하고
몸·말·뜻으로 짓는 선행이라는 세 가지 능숙한 것을 받아들여 행하리라는 것이 예상되느니라.
어떤 까닭인가? 그 수행자·바라문들은 능숙하지 못한 것들의 재난과 허물과 오염을 보고,
능숙한 것들의 벗어남이 주는 이익과 깨끗해짐도 보기 때문이니라.
tesametaṁ pāṭikaṅkhaṁ yamidaṁ kāyaduccaritaṁ, vacīduccaritaṁ, manoduccaritaṁ—ime tayo akusale dhamme abhinivajjetvā yamidaṁ kāyasucaritaṁ, vacīsucaritaṁ, manosucaritaṁ—ime tayo kusale dhamme samādāya vattissanti. Taṁ kissa hetu? Passanti h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akusalānaṁ dhammānaṁ ādīnavaṁ okāraṁ saṅkilesaṁ, kusalānaṁ dhammānaṁ nekkhamme ānisaṁsaṁ vodānapakkh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예상되는 결과와 그 까닭이 함께 제시되며, 앞서 여러 차례 되풀이된 것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됩니다. 결과를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가 도덕적 실천의 갈림길이라는 이 경의 일관된 주장이 행위의 효력이라는 주제에서도 그대로 확인됩니다. 재난과 허물과 오염을 보는 눈과 이익과 깨끗해짐을 보는 눈, 이 두 봄의 차이가 사이클마다 되풀이되는 열쇠말입니다. 다음 대목에서 이 바른 견해가 왜 옳은지 여덟 겹으로 분석됩니다.
묵상
결과를 또렷이 본 뒤에 마음이 자연스럽게 좋은 쪽으로 기울었던 경험이 있나요? 오늘 내가 미루고 있는 행동 하나의 결과를 미리 그려 보면 어떨까요? 그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움직일 수 있어요.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으니 ‘행위에 효력이 있다’는 견해를 지니면 그것이 바른 견해이며,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으니 ‘행위에 효력이 있다’고 사유하면 그것이 바른 사유이며,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으니 ‘행위에 효력이 있다’고 말하면 그것이 바른 말이며,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으니 ‘행위에 효력이 있다’고 하여
행위의 효력을 가르치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지 않는 것이 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atthi kiriyā’ tissa diṭṭhi hoti; sāssa hoti sammādiṭṭhi.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atthi kiriyā’ti saṅkappeti; svāssa hoti sammāsaṅkappo.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atthi kiriyā’ti vācaṁ bhāsati; sāssa hoti sammāvācā.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atthi kiriyā’ti āha; ye te arahanto kiriyavādā tesamayaṁ na paccanīkaṁ kar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바른 견해의 네 겹 분석이 행위의 효력이라는 주제로 다시 한번 펼쳐집니다. 이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다섯 가지 주제 모두에 똑같은 잣대가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장치입니다. 저 세상이든 행위의 효력이든, 실제로 있는 것을 있다고 보는 것이 바른 견해의 출발점이라는 원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 바른 견해가 남을 설득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나머지 절반이 마저 밝혀집니다.
묵상
행위에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실제로 확인한 경험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 확인이 지금 내 태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그 영향을 오늘 하나만 짚어 보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나요?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으니 ‘행위에 효력이 있다’고 남을 설득하면
바른 가르침을 설득하는 것이 되며,
그로써 자신을 높이지도 남을 헐뜯지도 않게 되니,
이렇게 나쁜 계행은 버려지고 좋은 계행이 자리 잡게 되느니라.
이 바른 견해와 사유와 말과 성자들에 대한 반대 없음과
바른 가르침의 설득과 자신을 높이지 않고 남을 헐뜯지 않음,
이렇게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하여 이 많은 능숙한 것들이 생겨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atthi kiriyā’ti paraṁ saññāpeti; sāssa hoti saddhammasaññatti. Tāya ca pana saddhammasaññattiyā nevattānukkaṁseti, na paraṁ vambheti. Iti pubbeva kho panassa dussīlyaṁ pahīnaṁ hoti, susīlyaṁ paccupaṭṭhitaṁ— ayañca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ariyānaṁ apaccanīkatā saddhammasaññatti anattukkaṁsanā aparavambhanā. Evamassime aneke kusalā dhammā sambhavanti sammādiṭṭhipaccay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바른 견해의 여덟 겹 분석이 완성되며 둘째 주제의 긍정적 결론이 마무리됩니다. 그릇된 견해가 낳는 연쇄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이 문장은, 행위의 효력을 믿는 바른 견해 하나가 계행 전체를 좋은 쪽으로 이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신을 높이지 않고 남을 헐뜯지 않는다는 구절은 바른 견해가 겸손과도 이어진다는 점을 알려 줍니다. 다음 대목에서는 슬기로운 사람의 도박 셈이 행위의 효력이라는 주제로 다시 펼쳐집니다.
묵상
바른 견해 하나가 여러 좋은 습관으로 이어졌던 경험이 있나요? 그 시작점이 무엇이었는지 오늘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그 시작을 오늘 다른 자리에도 한번 놓아 볼 수 있을까요?
장자들이여, 거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살피느니라.
‘만약 행위에 효력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날 것이니라.
행위에 효력이 없다는 그 말이 설령 진실이라 하여도,
이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슬기로운 이들에게 칭찬받으니
계행이 좋고 바른 견해를 지녀 행위의 효력을 주장하는 이라는 것이니라.’
Tatra, gahapatayo,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sace kho atthi kiriyā, evamayaṁ bhavaṁ purisapuggalo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sugatiṁ saggaṁ lokaṁ upapajjissati. Kāmaṁ kho pana māhu kiriyā, hotu nesaṁ bhavataṁ samaṇabrāhmaṇānaṁ saccaṁ vacanaṁ; atha ca panāyaṁ bhavaṁ purisapuggalo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pāsaṁso—sīlavā purisapuggalo sammādiṭṭhi kiriyavād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긍정하는 견해를 택했을 때의 결과가 앞의 부정적 사이클과 정확히 대칭을 이루며 제시됩니다. 행위에 효력이 있다면 좋은 곳에 태어나고, 없다 해도 지금 이 삶에서 이미 칭찬받는다는 것이니, 앞서 나온 손실의 논리가 여기서는 그대로 이익의 논리로 뒤집힙니다. 지금 이 삶에서의 칭찬과 죽은 뒤의 좋은 곳이라는 두 가지가 나란히 놓이는 것도 앞 대목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 이익이 양쪽 모두에서 확정되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행위에 효력이 있다고 믿고 오늘 하루를 살아 본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그 믿음이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 하루쯤 지켜보아도 좋겠습니다. 작은 행동 하나부터 시작해 볼 수 있을까요?
만약 행위에 실제로 효력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는
양쪽 모두에서 이기는 패가 되니,
곧 지금 여기에서 슬기로운 이들에게 칭찬받는 것과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 확실한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실천한 까닭에
양쪽 모두에 걸쳐 서서 능숙하지 못한 자리를 놓쳐 버리느니라.
Sace kho attheva kiriyā, evaṁ imassa bhoto purisapuggalassa ubhayattha kaṭaggaho— yañca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pāsaṁso, yañca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sugatiṁ saggaṁ lokaṁ upapajjissati. Evamassāyaṁ apaṇṇako dhammo susamatto samādinno, ubhayaṁsaṁ pharitvā tiṭṭhati, riñcati akusalaṁ ṭhān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행위에 실제로 효력이 있을 경우까지 확정되며 둘째 주제인 행위의 효력에 관한 사이클이 마무리됩니다. 앞서 나온 양쪽 모두에서 지는 패가 여기서는 양쪽 모두에서 이기는 패로 완전히 뒤집혀, 내세 사이클과 같은 다섯 마디 구조, 곧 주장과 반박과 예상되는 결과와 여덟 겹 분석과 도박의 셈이 두 번째 주제에서도 그대로 완결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음 대목에서 이 틀 그대로 셋째 주제인 원인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묵상
손해 볼 일이 없는 선택을 찾은 뒤에도, 그 선택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또 다른 걸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그 걸음을 하나 떼어 볼 수 있을까요? 앎과 행함 사이의 그 틈을 살펴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