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맛지마 니까야 MN 60

인용된 가르침 77구절

이 경을 9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만남과 확실한 가르침의 제시 6구절

세존께서 살라 마을의 장자들에게, 믿을 만한 스승이 없는 이들이 붙잡을 수 있는 확실한 가르침을 제시하십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느니라. 한때 세존께서는 꼬살라 지방을 유행하시며 큰 수행자 승가와 함께 꼬살라의 바라문 마을인 살라에 이르셨느니라.

Evaṁ me sutaṁ— ekaṁ samayaṁ bhagavā kosalesu cārikaṁ caramāno mahatā bhikkhusaṅghena saddhiṁ yena sālā nāma kosalānaṁ brāhmaṇagāmo tadavasar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경의 도입부로, 세존께서 꼬살라 지방을 유행하시다가 살라라는 바라문 마을에 도착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경의 제목인 '확실한 가르침(아빤나까)'은 이 마을의 장자들에게 주어지는 가르침을 가리키는데, 뒤이어 그들이 아직 믿을 만한 스승을 정하지 못했다는 사정이 밝혀지면서 왜 이런 가르침이 필요한지 드러납니다. 큰 승가와 함께 오셨다는 짧은 언급도, 뒤에서 장자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장면의 배경이 됩니다.

묵상

여러 갈래의 생각과 조언 가운데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적이 있나요? 그런 때 기댈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기준 하나를 떠올려 본다면 무엇일까요? 답을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살라의 바라문 장자들이 들었으니 ‘사꺄족 출신으로 사꺄 가문에서 출가한 수행자 고따마가 꼬살라를 유행하다가 큰 수행자 승가와 함께 살라에 이르렀다. 그 고따마 존자에게는 이런 좋은 명성이 자자하다.’

Assosuṁ kho sāleyyakā brāhmaṇagahapatikā: “samaṇo khalu bho gotamo sakyaputto sakyakulā pabbajito kosalesu cārikaṁ caramāno mahatā bhikkhusaṅghena saddhiṁ sālaṁ anuppatto. Taṁ kho pana bhavantaṁ gotamaṁ evaṁ kalyāṇo kittisaddo abbhuggato: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살라의 장자들에게 세존의 소문이 먼저 전해지는 대목입니다. '사꺄족 출신으로 사꺄 가문에서 출가했다'는 구절은 세존께서 왕족 가문을 스스로 떠나 출가하셨다는 사실을 짧게 환기하며, 뒤이어 그 명성의 구체적인 내용이 이어질 것을 예고합니다. 명성이 먼저 도착하고 사람이 뒤따르는 이 구조는 여러 경에서 스승을 처음 소개할 때 쓰는 전형적인 도입입니다. 다음 구절에서 그 좋은 명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어집니다.

묵상

누군가에 대한 좋은 평판을 먼저 듣고 나서 실제로 만나 보고 싶어진 경험이 있나요? 그 평판과 실제로 만났을 때의 느낌이 같았는지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둘 사이의 간격도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어요.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이며 완전히 깨달은 분이며 앎과 실천을 갖추었으며 잘 가신 분이며 세상을 아는 분이며 위없는 분이며 길들일 사람을 이끄는 분이며 신과 인간의 스승이며 깨달은 분이며 세존이시다’라 하였고,

‘itipi so bhagavā arahaṁ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ṁ buddho bhagavā’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장자들이 들은 명성의 구체적인 내용이 시작되는 대목으로, 여러 경에서 그대로 되풀이되는 아홉 가지 덕(여래십호 가운데 아홉)의 정형구가 온전히 등장합니다. 아라한, 완전히 깨달은 분에서 시작해 세존까지 이어지는 이 호칭들은 이 경만이 아니라 여러 경의 도입부에서 세존을 소개할 때 똑같이 쓰이는 표준 문구입니다. 하나하나가 독립된 칭호이면서도 함께 묶여 한 사람의 온전함을 그립니다.

묵상

누군가를 온전히 신뢰하게 만든 것이 그 사람의 말인가요, 아니면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인가요? 오늘 내가 누군가를 소개한다면 어떤 말을 가장 먼저 꺼낼까요? 여러 낱말 가운데 하나만 골라도 괜찮습니다.

그분은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하고 수행자와 바라문과 신과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을 스스로 뛰어난 앎으로 실현하시고 남에게 알리시며,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뜻과 표현을 갖춘 가르침을 설하시고 완전하고 청정한 삶을 밝히시니, 이러한 아라한을 뵙는 것이 참으로 좋다 하였느니라.

So imaṁ lokaṁ sadevakaṁ samārakaṁ sabrahmakaṁ sassamaṇabrāhmaṇiṁ pajaṁ sadevamanussaṁ sayaṁ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ti. So dhammaṁ deseti ādikalyāṇaṁ majjhekalyāṇaṁ pariyosānakalyāṇaṁ sātthaṁ sabyañjanaṁ, kevalaparipuṇṇaṁ parisuddhaṁ brahmacariyaṁ pakāseti. Sādhu kho pana tathārūpānaṁ arahataṁ dassanaṁ ho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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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아홉 가지 덕에 이어, 그 덕이 실제로 어떻게 드러나는지가 이어집니다. 세상을 스스로 알아 남에게 전한다는 구절과, 가르침이 처음과 중간과 끝이 좋다는 구절은 세존의 앎이 혼자만의 깨달음에 머물지 않고 가르침으로 흘러나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이를 뵙는 것이 좋다는 마지막 문장은 장자들이 곧이어 실제로 찾아가는 행동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다리가 됩니다.

묵상

말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만남 자체가 좋았던 경험이 있나요? 오늘 그런 사람을 한 명 떠올려 본다면 누구인가요? 그 사람을 왜 만나고 싶은지도 함께 물어보면 어떨까요?

살라의 바라문 장자들은 세존께 다가가 어떤 이는 절하고, 어떤 이는 인사를 나누고, 어떤 이는 합장하고, 어떤 이는 이름과 성씨를 아뢰고, 어떤 이는 잠자코 한쪽에 앉았느니라. 한쪽에 앉은 이들에게 세존께서 말씀하시니 ‘장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믿음을 굳건히 둘 만한 마음에 드는 스승이 있는가?’ ‘세존이시여, 저희에게는 믿음을 굳건히 둘 만한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습니다.’

Atha kho sāleyyakā brāhmaṇagahapatik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ṁsu; upasaṅkamitvā appekacce bhagavantaṁ abhivādetvā ekamantaṁ nisīdiṁsu. Appekacce bhagavatā saddhiṁ sammodiṁsu; sammodanīyaṁ kathaṁ sāraṇīyaṁ vītisāretvā ekamantaṁ nisīdiṁsu. Appekacce yena bhagavā tenañjaliṁ paṇāmetvā ekamantaṁ nisīdiṁsu. Appekacce bhagavato santike nāmagottaṁ sāvetvā ekamantaṁ nisīdiṁsu. Appekacce tuṇhībhūtā ekamantaṁ nisīdiṁsu. Ekamantaṁ nisinne kho sāleyyake brāhmaṇagahapatike bhagavā etadavoca: “atthi pana vo, gahapatayo, koci manāpo satthā yasmiṁ vo ākāravatī saddhā paṭiladdhā”ti? “Natthi kho no, bhante, koci manāpo satthā yasmiṁ no ākāravatī saddhā paṭiladdh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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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장자들이 세존께 다가가는 방식이 다섯 가지로 나열되는데, 이는 처음 만나는 이에게 예를 표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관용적 묘사입니다. 자리에 앉은 뒤 세존께서 던지신 첫 물음, 곧 믿을 만한 스승이 있는가는 이 경 전체의 출발점입니다. 장자들이 없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데서, 뒤이어 나올 확실한 가르침이 왜 그들에게 필요한지가 곧바로 드러납니다.

묵상

지금 내가 온전히 믿고 따르는 가르침이나 기준이 있나요? 만약 없다면, 그 빈자리를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될 수 있을까요? 없다고 답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어요.

‘장자들이여, 마음에 드는 스승을 얻지 못하였다면 이 확실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실천해야 하느니라. 장자들이여, 확실한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여 실천하면 그것이 그대들에게 오래도록 이익과 행복이 되리라. 장자들이여, 그러면 확실한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Manāpaṁ vo, gahapatayo, satthāraṁ alabhantehi ayaṁ apaṇṇako dhammo samādāya vattitabbo. Apaṇṇako hi, gahapatayo, dhammo samatto samādinno, so vo bhavissati dīgharattaṁ hitāya sukhāya. Katamo ca, gahapatayo, apaṇṇako dham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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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세존께서 장자들의 빈자리, 곧 믿을 스승이 없다는 사정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대안을 제시하십니다. '확실한 가르침(아빤나까)'이라는 이름은 도박에서 결코 지지 않는 확실한 패를 가리키는 말에서 왔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경에서는 어느 쪽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을 때에도 손해 볼 일 없는 태도를 뜻합니다. 뒤이어 이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다섯 가지 주제에 걸쳐 펼쳐집니다.

묵상

확신이 서지 않는 문제 앞에서, 어느 쪽이든 후회를 줄일 수 있는 선택을 찾아본 적이 있나요? 지금 판단하기 어려운 물음이 있다면, 그런 확실한 쪽이 있을지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다음 대목에서 그 답이 이어집니다.

2 내세가 있다는 데 서다 13구절

저 세상이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를 견주어, 어느 쪽을 택해도 손해가 없는 확실한 자리를 밝힙니다.

장자들이여, 어떤 수행자·바라문들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지니고 있으니 ‘보시에도 의미가 없고 제사에도 의미가 없고 공양에도 의미가 없으며, 선행과 악행의 결과와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으며,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홀연히 태어나는 중생도 없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뛰어난 앎으로 실현하여 알리는 바르게 이르고 바르게 실천한 수행자·바라문도 세상에 없다’라 하느니라.

Santi, gahapatayo,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natthi dinnaṁ, natthi yiṭṭhaṁ, natthi hutaṁ; natthi sukatadukkaṭānaṁ kammānaṁ phalaṁ vipāko, natthi ayaṁ loko, natthi paro loko; natthi mātā, natthi pitā; natthi sattā opapātikā; natthi loke samaṇabrāhmaṇā sammaggatā sammā paṭipannā ye imañca lokaṁ parañca lokaṁ sayaṁ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ntī’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확실한 가르침의 첫 주제로, 도덕과 인과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허무주의적 견해가 제시됩니다. 보시와 제사부터 부모의 존재, 자연발생적 중생, 깨달은 수행자의 존재까지 일곱 가지를 한꺼번에 부정하는 이 주장은, 뒤에 이어질 다섯 가지 주제(내세·행위·원인·형상 없는 경지·소멸) 가운데 첫째인 저 세상이 있는가를 다루는 실마리입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와 정반대되는 주장이 곧바로 이어집니다.

묵상

선한 행동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나요? 지금 내가 어떤 행동에 의미를 두고 있다면, 그 의미는 결과를 확인해서가 아니라 다른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장자들이여, 그 수행자·바라문들 가운데는 정반대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어 이렇게 말하느니라. ‘보시에도 의미가 있고 제사에도 의미가 있고 공양에도 의미가 있으며, 선행과 악행의 결과와 과보도 있고,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으며,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홀연히 태어나는 중생도 있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뛰어난 앎으로 실현하여 알리는 바르게 이르고 바르게 실천한 수행자·바라문도 세상에 있다.’

Tesaṁyeva kho, gahapatayo, samaṇabrāhmaṇānaṁ eke samaṇabrāhmaṇā ujuvipaccanīkavādā. Te evamāhaṁsu: ‘atthi dinnaṁ, atthi yiṭṭhaṁ, atthi hutaṁ; atthi sukatadukkaṭānaṁ kammānaṁ phalaṁ vipāko; atthi ayaṁ loko, atthi paro loko; atthi mātā, atthi pitā; atthi sattā opapātikā; atthi loke samaṇabrāhmaṇā sammaggatā sammā paṭipannā ye imañca lokaṁ parañca lokaṁ sayaṁ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ntī’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앞서 나온 허무주의 주장과 정반대로, 도덕과 인과를 온전히 긍정하는 견해가 그대로 대구를 이루어 제시됩니다. 부정하던 일곱 가지를 하나하나 긍정으로 뒤집는 이 대구는 이후 사이클마다 되풀이되는 이 경의 기본 틀입니다. 두 주장은 낱말 하나까지 정확히 대칭을 이루어, 어느 한쪽도 상대보다 더 정교하거나 허술하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세존께서 이 두 주장을 나란히 놓고 장자들에게 확인을 구하십니다.

묵상

완전히 반대되는 두 주장을 동시에 마주했을 때,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기 전에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이 순간에는 둘 중 하나를 고르지 않고 잠시 지켜보아도 괜찮을까요?

장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수행자·바라문들은 서로 정반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Taṁ kiṁ maññatha, gahapatayo: ‘nanume samaṇabrāhmaṇā aññamaññassa ujuvipaccanīkavādā’”ti? “Evaṁ, bhante”.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세존께서는 어느 쪽이 옳은지 곧바로 판정하지 않으시고, 먼저 두 주장이 서로 정면으로 모순된다는 사실에 장자들의 동의를 구하십니다. 짧은 물음과 짧은 대답이지만, 이 동의가 다음 구절부터 이어지는 여덟 겹의 분석 전체의 출발점이 됩니다. 판단에 앞서 사실관계부터 함께 확인하는 이 순서는 이 경에서 되풀이되는 대화 방식으로, 성급한 결론보다 확인을 앞세우는 세존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묵상

누군가와 의견이 갈릴 때, 결론을 내리기 전에 먼저 무엇이 서로 다른지부터 짚어 본 적이 있나요? 오늘 그런 확인의 순서를 한번 시도해 볼 수 있을까요? 서두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결이 달라질 수 있어요.

장자들이여, 그 가운데 보시에도 의미가 없다는 등으로 주장하는 수행자·바라문들에게는 이런 일이 예상되니, 몸·말·뜻으로 짓는 선행이라는 세 가지 능숙한 것을 멀리하고, 몸·말·뜻으로 짓는 악행이라는 세 가지 능숙하지 못한 것을 받아들여 행하리라는 것이니라. 어떤 까닭인가? 그 수행자·바라문들은 능숙하지 못한 것들의 재난과 허물과 오염을 보지 못하고, 능숙한 것들의 벗어남이 주는 이익과 깨끗해짐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Tatra, gahapatayo,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natthi dinnaṁ, natthi yiṭṭhaṁ …pe… ye imañca lokaṁ parañca lokaṁ sayaṁ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ntī’ti tesametaṁ pāṭikaṅkhaṁ—yamidaṁ kāyasucaritaṁ, vacīsucaritaṁ, manosucaritaṁ—ime tayo kusale dhamme abhinivajjetvā yamidaṁ kāyaduccaritaṁ, vacīduccaritaṁ, manoduccaritaṁ—ime tayo akusale dhamme samādāya vattissanti. Taṁ kissa hetu? Na h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passanti akusalānaṁ dhammānaṁ ādīnavaṁ okāraṁ saṅkilesaṁ, kusalānaṁ dhammānaṁ nekkhamme ānisaṁsaṁ vodānapakkh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허무주의 견해를 지닌 이들에게 실제로 어떤 결과가 따를지 세존께서 예측하십니다.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선행과 악행이라는 익숙한 틀로 결론을 내리시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애초에 악행의 재난과 선행의 이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도덕적 실패를 의지의 나약함이 아니라 봄, 곧 견해의 문제로 짚는 것으로, 뒤이어 이 견해가 구체적으로 어떤 해로운 결과들을 낳는지 여덟 갈래로 분석됩니다.

묵상

어떤 행동이 좋은지 나쁜지 스스로 판단이 서지 않을 때, 결과를 미리 보지 못해 망설였던 경험이 있나요? 지금 내가 놓치고 있을지 모르는 결과가 있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가늠해 볼 수 있을까요?

실제로 저 세상이 있는데도 ‘저 세상은 없다’는 견해를 지니면 그것이 그릇된 견해이며, 실제로 저 세상이 있는데도 ‘저 세상은 없다’고 사유하면 그것이 그릇된 사유이며, 실제로 저 세상이 있는데도 ‘저 세상은 없다’고 말하면 그것이 그릇된 말이며, 실제로 저 세상이 있는데도 ‘저 세상은 없다’고 하여 저 세상을 아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는 것이 되느니라.

Santaṁyeva pana paraṁ lokaṁ ‘natthi paro loko’ tissa diṭṭhi hoti; sāssa hoti micchādiṭṭhi. Santaṁyeva kho pana paraṁ lokaṁ ‘natthi paro loko’ti saṅkappeti; svāssa hoti micchāsaṅkappo. Santaṁyeva kho pana paraṁ lokaṁ ‘natthi paro loko’ti vācaṁ bhāsati; sāssa hoti micchāvācā. Santaṁyeva kho pana paraṁ lokaṁ ‘natthi paro loko’ti āha; ye te arahanto paralokaviduno tesamayaṁ paccanīkaṁ kar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허무주의 견해가 왜 그릇된 것인지, 세존께서 네 겹으로 짚어 나가십니다. 견해·사유·말·성자들과의 관계라는 네 층위 모두에서 저 세상은 없다는 같은 문장이 그대로 되풀이되는데, 이는 하나의 그릇된 견해가 마음가짐과 말과 관계 전체에 걸쳐 파급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실제로 저 세상이 있는데도라는 전제는 세존께서 이미 그 존재를 사실로 두고 논의를 시작하신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묵상

한 가지 그릇된 생각이 말과 행동, 사람과의 관계에까지 번져 간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지금 마음에 걸리는 생각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어디까지 번져 있는지 가만히 살펴볼 수 있을까요?

실제로 저 세상이 있는데도 ‘저 세상은 없다’고 남을 설득하면 바르지 못한 가르침을 설득하는 것이 되며, 그로써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게 되니, 이렇게 좋은 계행은 버려지고 나쁜 계행이 자리 잡게 되느니라. 이 그릇된 견해와 사유와 말과 성자들에 대한 반대와 바르지 못한 가르침의 설득과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음, 이렇게 그릇된 견해를 조건으로 하여 이 많은 나쁘고 능숙하지 못한 것들이 생겨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paraṁ lokaṁ ‘natthi paro loko’ti paraṁ saññāpeti; sāssa hoti asaddhammasaññatti. Tāya ca pana asaddhammasaññattiyā attānukkaṁseti, paraṁ vambheti. Iti pubbeva kho panassa susīlyaṁ pahīnaṁ hoti, dussīlyaṁ paccupaṭṭhitaṁ— ayañca micchādiṭṭhi micchāsaṅkappo micchāvācā ariyānaṁ paccanīkatā asaddhammasaññatti attukkaṁsanā paravambhanā. Evamassime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micchādiṭṭhipaccay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앞선 네 겹에 이어, 그릇된 견해가 남을 설득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그 설득이 자신을 높이고 남을 낮추는 태도로, 마침내 계행의 뒤바뀜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세 단계가 제시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앞서 나온 여섯 가지, 곧 그릇된 견해·사유·말·반대·설득·자만을 모두 되짚으며, 이 모든 것이 그릇된 견해를 조건으로 생겨난다고 못박습니다. 하나의 견해가 원인이 되어 여러 갈래의 해로움이 뒤따른다는 연쇄가 이 대목의 핵심입니다.

묵상

내 생각이 옳다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 애쓰다가,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우쭐해진 적이 있나요? 그 우쭐함이 어디서 왔는지 잠시 돌아볼 수 있을까요? 설득의 열기가 식은 뒤에 다시 보면 다르게 보일까요?

장자들이여, 거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살피느니라. ‘만약 저 세상이 없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진 뒤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킨 것이 될 것이요,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고통스러운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날 것이니라. 저 세상이 없다는 그 말이 설령 진실이라 하여도, 이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슬기로운 이들에게 비난받으니 계행이 나쁘고 그릇된 견해를 지닌 허무주의자라는 것이니라.’

Tatra, gahapatayo,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sace kho natthi paro loko evamayaṁ bhavaṁ purisapuggalo kāyassa bhedā sotthimattānaṁ karissati; sace kho atthi paro loko, evamayaṁ bhavaṁ purisapuggalo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apāyaṁ duggatiṁ vinipātaṁ nirayaṁ upapajjissati. Kāmaṁ kho pana māhu paro loko, hotu nesaṁ bhavataṁ samaṇabrāhmaṇānaṁ saccaṁ vacanaṁ; atha ca panāyaṁ bhavaṁ purisapuggalo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gārayho—dussīlo purisapuggalo micchādiṭṭhi natthikavād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허무주의 견해를 실제로 택했을 때 벌어질 두 가지 경우를 슬기로운 사람이 미리 헤아려 봅니다. 저 세상이 없다면 그저 무사할 뿐이지만, 있다면 나쁜 곳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설령 그 견해가 맞다 하더라도 지금 이 삶에서 이미 계행이 나쁜 사람으로 비난받는다는 사실을 덧붙이십니다. 결과가 갈리기 전부터 이미 손해가 시작된다는 것이 이 대목의 요지입니다.

묵상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지금 당장 잃는 것이 있는 선택을 해 본 적이 있나요? 미래의 불확실함과는 별개로, 지금 이 순간에 치르는 대가를 먼저 살펴본다면 무엇이 보일까요? 그 대가를 알고도 같은 선택을 할지 자문해 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만약 저 세상이 실제로 있다면 이 사람에게는 양쪽 모두에서 지는 패가 되니, 곧 지금 여기에서 슬기로운 이들에게 비난받는 것과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고통스러운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 확실한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한 까닭에 한쪽으로만 치우쳐 서서 능숙한 자리를 놓쳐 버리느니라.

Sace kho attheva paro loko, evaṁ imassa bhoto purisapuggalassa ubhayattha kaliggaho— yañca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gārayho, yañca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apāyaṁ duggatiṁ vinipātaṁ nirayaṁ upapajjissati. Evamassāyaṁ apaṇṇako dhammo dussamatto samādinno, ekaṁsaṁ pharitvā tiṭṭhati, riñcati kusalaṁ ṭhān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저 세상이 실제로 있을 경우의 결과가 확정되며 이 첫 사이클의 결론이 내려집니다. 양쪽 모두에서 지는 패라는 표현은 이 경 전체를 관통하는 도박의 비유로, 지금 이 삶에서의 비난과 죽은 뒤의 나쁜 곳이라는 두 가지 손실이 겹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문장의 확실한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였다는 평가는, 이 견해가 한쪽의 이익만 바라보고 다른 쪽의 위험을 놓친 도박이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묵상

한 가지 선택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그 판단이 틀렸을 때를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지금 내가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다면, 다른 쪽의 가능성도 잠깐 열어 둘 수 있을까요? 열어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작이 됩니다.

장자들이여, 보시에도 의미가 있다는 등으로 주장하는 수행자·바라문들에게는 이런 일이 예상되니, 몸·말·뜻으로 짓는 악행이라는 세 가지 능숙하지 못한 것을 멀리하고, 몸·말·뜻으로 짓는 선행이라는 세 가지 능숙한 것을 받아들여 행하리라는 것이니라. 어떤 까닭인가? 그 수행자·바라문들은 능숙하지 못한 것들의 재난과 허물과 오염을 보고, 능숙한 것들의 벗어남이 주는 이익과 깨끗해짐도 보기 때문이니라.

Tatra, gahapatayo,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atthi dinnaṁ …pe… ye imañca lokaṁ parañca lokaṁ sayaṁ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ntī’ti tesametaṁ pāṭikaṅkhaṁ—yamidaṁ kāyaduccaritaṁ, vacīduccaritaṁ, manoduccaritaṁ—ime tayo akusale dhamme abhinivajjetvā yamidaṁ kāyasucaritaṁ, vacīsucaritaṁ, manosucaritaṁ—ime tayo kusale dhamme samādāya vattissanti. Taṁ kissa hetu? Passanti h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akusalānaṁ dhammānaṁ ādīnavaṁ okāraṁ saṅkilesaṁ, kusalānaṁ dhammānaṁ nekkhamme ānisaṁsaṁ vodānapakkh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허무주의 견해를 다룬 앞의 대목과 정확히 대구를 이루어, 이번에는 도덕과 인과를 긍정하는 이들에게 예상되는 결과가 제시됩니다. 문장 구조는 앞서와 똑같이 몸과 말과 뜻의 선행과 악행을 다루지만, 방향이 정반대로 뒤집혀 있습니다. 이들이 선행을 택하는 까닭 역시 의지가 아니라 봄, 곧 견해에 있다는 것이 앞과 동일하게 강조되는데, 이는 이 경이 도덕적 실천을 결국 무엇을 보는가의 문제로 다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묵상

어떤 행동의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미리 또렷이 본 뒤에 마음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기울었던 경험이 있나요? 지금 내가 미루고 있는 좋은 행동이 있다면, 그 결과를 더 또렷이 그려 보면 어떨까요?

실제로 저 세상이 있으니 ‘저 세상이 있다’는 견해를 지니면 그것이 바른 견해이며, 실제로 저 세상이 있으니 ‘저 세상이 있다’고 사유하면 그것이 바른 사유이며, 실제로 저 세상이 있으니 ‘저 세상이 있다’고 말하면 그것이 바른 말이며, 실제로 저 세상이 있으니 ‘저 세상이 있다’고 하여 저 세상을 아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지 않는 것이 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paraṁ lokaṁ ‘atthi paro loko’ tissa diṭṭhi hoti; sāssa hoti sammādiṭṭhi. Santaṁyeva kho pana paraṁ lokaṁ ‘atthi paro loko’ti saṅkappeti; svāssa hoti sammāsaṅkappo. Santaṁyeva kho pana paraṁ lokaṁ ‘atthi paro loko’ti vācaṁ bhāsati; sāssa hoti sammāvācā. Santaṁyeva kho pana paraṁ lokaṁ ‘atthi paro loko’ti āha; ye te arahanto paralokaviduno tesamayaṁ na paccanīkaṁ kar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앞서 그릇된 견해를 네 겹으로 짚었던 것과 똑같은 틀로, 이번에는 바른 견해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보입니다. 견해·사유·말·성자들과의 관계라는 같은 네 층위에서 저 세상이 있다는 문장이 그대로 반복되는데, 부정하던 자리마다 긍정이 들어서는 이 대구는 앞뒤 두 대목을 나란히 놓고 읽을 때 그 구조가 더 뚜렷이 드러납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 바른 견해가 어떻게 남에게까지 이어지는지가 마저 밝혀집니다.

묵상

바르다고 믿는 생각 하나가 말과 태도에까지 자연스럽게 스며든 경험이 있나요? 지금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실제로 말과 행동에서도 한결같은지 돌아볼 수 있을까요? 그 한결같음을 오늘 하나만 확인해 볼까요?

실제로 저 세상이 있으니 ‘저 세상이 있다’고 남을 설득하면 바른 가르침을 설득하는 것이 되며, 그로써 자신을 높이지도 남을 헐뜯지도 않게 되니, 이렇게 나쁜 계행은 버려지고 좋은 계행이 자리 잡게 되느니라. 이 바른 견해와 사유와 말과 성자들에 대한 반대 없음과 바른 가르침의 설득과 자신을 높이지 않고 남을 헐뜯지 않음, 이렇게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하여 이 많은 능숙한 것들이 생겨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paraṁ lokaṁ ‘atthi paro loko’ti paraṁ saññāpeti; sāssa hoti saddhammasaññatti. Tāya ca pana saddhammasaññattiyā nevattānukkaṁseti, na paraṁ vambheti. Iti pubbeva kho panassa dussīlyaṁ pahīnaṁ hoti, susīlyaṁ paccupaṭṭhitaṁ— ayañca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ariyānaṁ apaccanīkatā saddhammasaññatti anattukkaṁsanā aparavambhanā. Evamassime aneke kusalā dhammā sambhavanti sammādiṭṭhipaccay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바른 견해가 남을 설득하는 데까지 이어지고, 그 설득이 자만이나 폄훼 없이 이루어지며, 마침내 계행이 좋은 쪽으로 자리 잡는 마지막 세 단계가 완성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앞의 여섯 가지를 모두 되짚어, 이 모두가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생겨난다고 못박는데, 이는 앞서 허무주의 견해를 다룬 대목의 결론과 글자 하나까지 대구를 이루는 문장입니다. 하나의 바른 견해가 원인이 되어 여러 갈래의 이로움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묵상

바른 생각이 자만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으로 이어졌던 경험이 있나요? 지금 내가 확신하는 것 하나가, 나를 높이는 대신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그 확신을 남과 나누는 방식도 함께 살펴볼까요?

장자들이여, 거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살피느니라.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날 것이니라. 저 세상이 없다는 그 수행자·바라문들의 말이 설령 진실이라 하여도, 이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슬기로운 이들에게 칭찬받으니 계행이 좋고 바른 견해를 지녀 있음을 주장하는 이라는 것이니라.’

Tatra, gahapatayo,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sace kho atthi paro loko, evamayaṁ bhavaṁ purisapuggalo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sugatiṁ saggaṁ lokaṁ upapajjissati. Kāmaṁ kho pana māhu paro loko, hotu nesaṁ bhavataṁ samaṇabrāhmaṇānaṁ saccaṁ vacanaṁ; atha ca panāyaṁ bhavaṁ purisapuggalo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pāsaṁso—sīlavā purisapuggalo sammādiṭṭhi atthikavād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긍정하는 견해를 택했을 때의 결과가 앞의 부정적 사이클과 정확히 대칭을 이루며 제시됩니다. 저 세상이 있다면 좋은 곳에 태어나고, 없다 해도 지금 이 삶에서 이미 칭찬받는다는 것이니, 앞서 나온 손실의 논리가 여기서는 그대로 이익의 논리로 뒤집힙니다. 지금 이 삶에서의 칭찬과 죽은 뒤의 좋은 곳이라는 두 가지가 나란히 놓이는 것도 앞 대목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 이익이 양쪽 모두에서 확정되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쪽이 일어나도 손해 볼 일 없는 선택을 해 본 적이 있나요? 지금 내 앞에 있는 선택지 가운데, 그런 확실한 쪽이 있는지 한번 찾아볼 수 있을까요? 찾다 보면 뜻밖의 것이 눈에 들어올지도 몰라요.

만약 저 세상이 실제로 있다면 이 사람에게는 양쪽 모두에서 이기는 패가 되니, 곧 지금 여기에서 슬기로운 이들에게 칭찬받는 것과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 확실한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실천한 까닭에 양쪽 모두에 걸쳐 서서 능숙하지 못한 자리를 놓쳐 버리느니라.

Sace kho attheva paro loko, evaṁ imassa bhoto purisapuggalassa ubhayattha kaṭaggaho— yañca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pāsaṁso, yañca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sugatiṁ saggaṁ lokaṁ upapajjissati. Evamassāyaṁ apaṇṇako dhammo susamatto samādinno ubhayaṁsaṁ pharitvā tiṭṭhati, riñcati akusalaṁ ṭhān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저 세상이 실제로 있을 경우까지 확정되며 첫째 주제인 내세에 관한 사이클이 마무리됩니다. 앞서 나온 양쪽 모두에서 지는 패가 여기서는 양쪽 모두에서 이기는 패로 완전히 뒤집혀, 이 다섯 마디 사이클(주장-반박-예상되는 결과-여덟 겹 분석-도박의 셈)이 하나의 완결된 논증임을 보여 줍니다. 다음 대목에서 이 틀 그대로 둘째 주제인 행위의 효력으로 넘어갑니다.

묵상

손해 볼 일이 없다고 확신했던 선택이 실제로 두 가지 다 좋은 결과로 이어졌던 경험이 있나요? 그런 선택을 할 때 나는 무엇을 가장 먼저 따져 보았나요? 그 기준을 지금 다른 선택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까요?

3 행위가 헛되지 않다는 데 서다 17구절

행위에는 아무 결과가 없다는 견해와 결과가 있다는 견해를 견주어, 둘째 물음에서도 손해 없는 자리를 밝힙니다.

장자들이여, 어떤 수행자·바라문들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지니고 있으니 ‘처벌·훼손·고문·괴롭힘·억압·위협을 행하거나 행하게 하는 자, 살생·투도·가택 침입·약탈·외딴집 털이·노상강도·간음·거짓말을 행하는 자, 이런 자가 행하여도 악행이 되지 않으며, 면도날 같은 바퀴로 이 땅의 뭇 생명을 모두 한 덩이 살로 만든다 해도 그 때문에 생기는 악이나 악의 결과는 없다’라 하느니라.

Santi, gahapatayo,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karoto kārayato, chindato chedāpayato, pacato pācāpayato, socayato socāpayato, kilamato kilamāpayato, phandato phandāpayato, pāṇamatipātayato, adinnaṁ ādiyato, sandhiṁ chindato, nillopaṁ harato, ekāgārikaṁ karoto, paripanthe tiṭṭhato, paradāraṁ gacchato, musā bhaṇato; karoto na karīyati pāpaṁ. Khurapariyantena cepi cakkena yo imissā pathaviyā pāṇe ekaṁ maṁsakhalaṁ ekaṁ maṁsapuñjaṁ kareyya, n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natthi pāpassa āgamo.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확실한 가르침의 둘째 주제로, 행위 자체에 도덕적 효력이 없다는 견해가 제시됩니다. 처벌부터 거짓말까지 여러 행위를 나열한 뒤, 온 땅의 생명을 모두 죽여 한 덩이로 만들어도 악의 결과가 없다는 극단적인 비유로 마무리합니다. 이 과장된 비유는 이 견해가 얼마나 철저하게 행위와 결과의 연결을 끊는지를 극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것이며, 다음 구절에서 갠지스강의 비유로 한 번 더 이어집니다.

묵상

행동에 아무 결과가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그 상상이 지금 내가 행동을 조심하는 이유를 거꾸로 비추어 주지는 않나요? 그 이유를 오늘 한 문장으로 적어 볼 수 있을까요?

‘갠지스강 남쪽 기슭을 따라가며 죽이고 자르고 삶아도 그 때문에 생기는 악이나 악의 결과는 없으며, 갠지스강 북쪽 기슭을 따라가며 베풀고 제사 지내어도 그 때문에 생기는 공덕이나 공덕의 결과는 없으니, 보시로도 자제로도 절제로도 진실한 말로도 공덕은 없고 공덕의 결과도 없다’라 하느니라.

Dakkhiṇ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hananto ghātento, chindanto chedāpento, pacanto pācento; n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natthi pāpassa āgamo. Uttar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dadanto dāpento, yajanto yajāpento; natthi tatonidānaṁ puññaṁ, natthi puññassa āgamo. Dānena damena saṁyamena saccavajjena natthi puññaṁ, natthi puññassa āgam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앞선 극단적 비유가 강의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어 한 번 더 되풀이됩니다. 남쪽에서 죽여도 악이 없고 북쪽에서 베풀어도 공덕이 없다는 대칭적 구성은, 이 견해가 나쁜 행위만이 아니라 좋은 행위의 가치까지 똑같이 부정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보시·자제·절제·진실이라는 전통적인 덕목들을 하나하나 짚어 그 모두에 아무 결과가 없다고 못박으며, 다음 구절에서 이와 정반대되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선행에도 아무 보상이 없다면, 그래도 그 선행을 계속할 이유가 남아 있을까요? 지금 내가 대가 없이도 계속하고 있는 좋은 행동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 이유를 말로 표현해 볼 수 있을까요?

장자들이여, 그 수행자·바라문들 가운데는 정반대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어 이렇게 말하느니라. ‘처벌·훼손·고문·괴롭힘·억압·위협을 행하거나 행하게 하는 자, 살생·투도·가택 침입·약탈·외딴집 털이·노상강도·간음·거짓말을 행하는 자, 이런 자가 행하면 악행이 되며, 면도날 같은 바퀴로 이 땅의 뭇 생명을 모두 한 덩이 살로 만든다면 그 때문에 생기는 악과 악의 결과가 있다’라 하느니라.

Tesaṁyeva kho, gahapatayo, samaṇabrāhmaṇānaṁ eke samaṇabrāhmaṇā ujuvipaccanīkavādā te evamāhaṁsu: ‘karoto kārayato, chindato chedāpayato, pacato pācāpayato, socayato socāpayato, kilamato kilamāpayato, phandato phandāpayato, pāṇamatipātayato, adinnaṁ ādiyato, sandhiṁ chindato, nillopaṁ harato, ekāgārikaṁ karoto, paripanthe tiṭṭhato, paradāraṁ gacchato, musā bhaṇato; karoto karīyati pāpaṁ. Khurapariyantena cepi cakkena yo imissā pathaviyā pāṇe ekaṁ maṁsakhalaṁ ekaṁ maṁsapuñjaṁ kareyya, 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atthi pāpassa āgamo.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허무주의 견해와 정반대로, 행위에는 반드시 도덕적 결과가 따른다는 견해가 그대로 대구를 이루어 제시됩니다. 앞서 나온 행위 목록과 극단적 비유가 그대로 되풀이되면서, 오직 결론 부분, 곧 악행이 되지 않는다 대 악행이 된다만 정반대로 뒤집힙니다. 이렇게 같은 틀을 유지한 채 결론만 뒤집는 방식은 두 견해가 같은 사실을 놓고 다툰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묵상

같은 사실을 두고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두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그 둘의 말을 각각 끝까지 들어 본다면 무엇이 갈리는 지점인지 보일까요? 그 지점을 찾는 것만으로도 다툼의 결이 달라질 수 있어요.

‘갠지스강 남쪽 기슭을 따라가며 죽이고 자르고 삶으면 그 때문에 생기는 악과 악의 결과가 있으며, 갠지스강 북쪽 기슭을 따라가며 베풀고 제사 지내면 그 때문에 생기는 공덕과 공덕의 결과가 있으니, 보시로도 자제로도 절제로도 진실한 말로도 공덕이 있고 공덕의 결과도 있다’라 하느니라. 장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수행자·바라문들은 서로 정반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Dakkhiṇ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hananto ghātento, chindanto chedāpento, pacanto pācento; 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atthi pāpassa āgamo. Uttar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dadanto dāpento, yajanto yajāpento; atthi tatonidānaṁ puññaṁ, atthi puññassa āgamo. Dānena damena saṁyamena saccavajjena atthi puññaṁ, atthi puññassa āgamo’ti. Taṁ kiṁ maññatha, gahapatayo, nanume samaṇabrāhmaṇā aññamaññassa ujuvipaccanīkavādā”ti? “Evaṁ, bhante”.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긍정하는 견해의 나머지 절반이 완성되고, 세존께서 다시 한번 장자들에게 두 주장이 정면으로 모순됨을 확인하십니다. 이 확인의 절차가 벌써 두 번째로 되풀이되는데, 이는 이 경이 성급한 판정보다 사실관계의 확인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갠지스강 남쪽과 북쪽, 죽임과 베풂이라는 대칭 구조가 앞서 나온 견해와 정확히 반대로 완성되는 것도 이 대목에서 확인됩니다. 다음 구절부터 이 견해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대한 분석이 이어집니다.

묵상

두 주장이 정말 서로 반대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차가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확인이 왜 필요할지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급하게 결론짓지 않는 것이 오늘 나에게도 도움이 될 자리가 있을까요?

장자들이여, 이렇게 주장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을 보면 ‘처벌·훼손·고문·괴롭힘·억압·위협·살생·투도·가택 침입·약탈· 외딴집 털이·노상강도·간음·거짓말을 행하여도 악행이 되지 않으며, 면도날 같은 바퀴로 뭇 생명을 한 덩이 살로 만든다 해도 악은 없으며, 갠지스강 남쪽 기슭에서 죽이고 자르고 삶아도… 보시로도 자제로도 절제로도 진실한 말로도 공덕은 없고 그 결과도 없다’라 하니,

“Tatra, gahapatayo,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karoto kārayato, chindato chedāpayato, pacato pācāpayato, socayato socāpayato, kilamato kilamāpayato, phandato phandāpayato, pāṇamatipātayato, adinnaṁ ādiyato, sandhiṁ chindato, nillopaṁ harato, ekāgārikaṁ karoto, paripanthe tiṭṭhato, paradāraṁ gacchato, musā bhaṇato; karoto na karīyati pāpaṁ. Khurapariyantena cepi cakkena yo imissā pathaviyā pāṇe ekaṁ maṁsakhalaṁ ekaṁ maṁsapuñjaṁ kareyya, n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natthi pāpassa āgamo. Dakkhiṇ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hananto ghātento …pe… dānena damena saṁyamena saccavajjena natthi puññaṁ, natthi puññassa āgam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행위 부정론자들에게 어떤 결과가 예상되는지 말씀하시기 전에, 세존께서 그 견해 전체를 다시 한번 불러오십니다. 처벌의 목록과 극단적 비유까지는 앞서와 똑같이 온전히 되풀이하시고, 갠지스강 비유의 가운데 부분만 '…뻬…'라는 원문 자체의 생략 표시로 줄여 마지막 결론 문장으로 곧장 건너뛰십니다. 앞서 이미 다 들었던 내용을 요약해 다시 세우는 이 방식은, 이제부터 이 견해를 평가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묵상

이미 들은 이야기를 요약해서 다시 짚어 주면, 그 이야기가 더 또렷하게 남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나요? 오늘 내가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리하다 보면 처음엔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도 해요.

이런 이들에게는 몸·말·뜻으로 짓는 선행이라는 세 가지 능숙한 것을 멀리하고, 몸·말·뜻으로 짓는 악행이라는 세 가지 능숙하지 못한 것을 받아들여 행하리라는 것이 예상되느니라. 어떤 까닭인가? 그 수행자·바라문들은 능숙하지 못한 것들의 재난과 허물과 오염을 보지 못하고, 능숙한 것들의 벗어남이 주는 이익과 깨끗해짐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tesametaṁ pāṭikaṅkhaṁ—yamidaṁ kāyasucaritaṁ, vacīsucaritaṁ, manosucaritaṁ—ime tayo kusale dhamme abhinivajjetvā yamidaṁ kāyaduccaritaṁ, vacīduccaritaṁ, manoduccaritaṁ—ime tayo akusale dhamme samādāya vattissanti. Taṁ kissa hetu? Na h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passanti akusalānaṁ dhammānaṁ ādīnavaṁ okāraṁ saṅkilesaṁ, kusalānaṁ dhammānaṁ nekkhamme ānisaṁsaṁ vodānapakkh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행위 부정론을 지닌 이들에게 실제로 어떤 결과가 따를지 세존께서 예측하십니다.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선행과 악행이라는 익숙한 틀로 결론을 내리시는데, 그 까닭은 내세를 다룬 첫 사이클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문장으로 설명됩니다. 대상이 되는 견해는 바뀌었어도 그 견해가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심리적 구조, 곧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하는가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묵상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결과가 있다면, 그것을 보지 못해서인가요, 아니면 보고도 외면하고 있는 것인가요? 둘의 차이를 한번 가만히 짚어 볼 수 있을까요? 어느 쪽이든 지금부터 다시 볼 수 있어요.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는데도 ‘행위에 효력이 없다’는 견해를 지니면 그것이 그릇된 견해이며,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는데도 ‘행위에 효력이 없다’고 사유하면 그것이 그릇된 사유이며,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는데도 ‘행위에 효력이 없다’고 말하면 그것이 그릇된 말이며,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는데도 ‘행위에 효력이 없다’고 하여 행위의 효력을 가르치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는 것이 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natthi kiriyā’ tissa diṭṭhi hoti; sāssa hoti micchādiṭṭhi.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natthi kiriyā’ti saṅkappeti; svāssa hoti micchāsaṅkappo.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natthi kiriyā’ti vācaṁ bhāsati; sāssa hoti micchāvācā.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natthi kiriyā’ti āha, ye te arahanto kiriyavādā tesamayaṁ paccanīkaṁ kar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행위 부정론이 왜 그릇된 것인지, 내세 사이클과 똑같은 네 겹의 틀로 짚어 나갑니다. 대상이 저 세상에서 행위의 효력으로 바뀌었을 뿐, 견해·사유·말·성자들과의 관계라는 네 층위와 그 논리는 완전히 동일합니다. 이렇게 같은 틀이 되풀이될수록, 이 경이 겨냥하는 것은 특정 견해의 내용이 아니라 근거 없이 단정하는 태도 자체임이 더욱 뚜렷해집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 그릇된 견해가 남을 설득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나머지 절반이 마저 밝혀집니다.

묵상

결과를 직접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결과가 없다고 단정 지은 적이 있나요? 보지 못함과 없음을 구별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그 구별이 오늘 하나의 판단을 늦추어 줄 수 있을까요?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는데도 ‘행위에 효력이 없다’고 남을 설득하면 바르지 못한 가르침을 설득하는 것이 되며, 그로써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게 되니, 이렇게 좋은 계행은 버려지고 나쁜 계행이 자리 잡게 되느니라. 이 그릇된 견해와 사유와 말과 성자들에 대한 반대와 바르지 못한 가르침의 설득과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음, 이렇게 그릇된 견해를 조건으로 하여 이 많은 나쁘고 능숙하지 못한 것들이 생겨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natthi kiriyā’ti paraṁ saññāpeti; sāssa hoti asaddhammasaññatti. Tāya ca pana asaddhammasaññattiyā attānukkaṁseti, paraṁ vambheti. Iti pubbeva kho panassa susīlyaṁ pahīnaṁ hoti, dussīlyaṁ paccupaṭṭhitaṁ— ayañca micchādiṭṭhi micchāsaṅkappo micchāvācā ariyānaṁ paccanīkatā asaddhammasaññatti attukkaṁsanā paravambhanā. Evamassime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micchādiṭṭhipaccay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여덟 겹 분석의 나머지 절반이 마무리되며, 이번에도 내세 사이클의 결론 문장과 정확히 같은 구조로 끝맺습니다. 그릇된 견해 하나가 사유·말·관계·설득·자만을 거쳐 계행 전체를 무너뜨리는 이 연쇄는 대상만 바뀐 채 두 번째로 되풀이되는데, 이렇게 반복되는 구조 자체가 이 경의 논증 방식이 임의적이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다음 대목에서는 이 견해를 실제로 택했을 때 벌어질 두 가지 경우를 슬기로운 사람이 헤아려 봅니다.

묵상

그릇된 생각 하나가 처음에는 사소해 보였지만 점점 다른 영역까지 물들였던 경험이 있나요? 그 연쇄를 처음 끊을 수 있었던 자리는 어디였을까요? 지금 돌아보면 그 자리가 더 뚜렷이 보이나요?

장자들이여, 거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살피느니라. ‘만약 행위에 효력이 없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진 뒤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킨 것이 될 것이요, 만약 효력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고통스러운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날 것이니라. 효력이 없다는 그 말이 설령 진실이라 하여도, 이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슬기로운 이들에게 비난받으니 계행이 나쁘고 행위의 효력을 부정하는 그릇된 견해를 지녔다는 것이니라.’

Tatra, gahapatayo,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sace kho natthi kiriyā, evamayaṁ bhavaṁ purisapuggalo kāyassa bhedā sotthimattānaṁ karissati; sace kho atthi kiriyā evamayaṁ bhavaṁ purisapuggalo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apāyaṁ duggatiṁ vinipātaṁ nirayaṁ upapajjissati. Kāmaṁ kho pana māhu kiriyā, hotu nesaṁ bhavataṁ samaṇabrāhmaṇānaṁ saccaṁ vacanaṁ; atha ca panāyaṁ bhavaṁ purisapuggalo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gārayho—dussīlo purisapuggalo micchādiṭṭhi akiriyavād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행위 부정론을 실제로 택했을 때 벌어질 두 가지 경우를 슬기로운 사람이 미리 헤아려 봅니다. 내세를 다룬 첫 사이클과 똑같은 틀로, 행위에 효력이 없다면 무사할 뿐이지만 있다면 나쁜 곳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여기서도 그치지 않으시고, 설령 그 견해가 맞다 하더라도 지금 이 삶에서 이미 계행이 나쁜 사람으로 비난받는다는 사실을 덧붙이십니다. 결과를 기다리기도 전에 이미 대가가 시작된다는 것이 이 셈법의 핵심입니다.

묵상

행위에는 아무 결과가 없다고 믿었다가, 지금 이 삶에서 이미 주변의 신뢰를 잃은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그 손실이 먼 훗날의 결과보다 먼저 찾아온다는 것을 오늘 느껴 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만약 행위에 실제로 효력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는 양쪽 모두에서 지는 패가 되니, 곧 지금 여기에서 슬기로운 이들에게 비난받는 것과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고통스러운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 확실한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한 까닭에 한쪽으로만 치우쳐 서서 능숙한 자리를 놓쳐 버리느니라.

Sace kho attheva kiriyā, evaṁ imassa bhoto purisapuggalassa ubhayattha kaliggaho— yañca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gārayho, yañca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apāyaṁ duggatiṁ vinipātaṁ nirayaṁ upapajjissati. Evamassāyaṁ apaṇṇako dhammo dussamatto samādinno, ekaṁsaṁ pharitvā tiṭṭhati, riñcati kusalaṁ ṭhān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행위에 실제로 효력이 있을 경우의 결과가 확정되며 이 사이클의 결론이 내려집니다. 양쪽 모두에서 지는 패라는 표현은 내세 사이클과 똑같이 되풀이되는 이 경 전체의 도박 비유로, 지금 이 삶에서의 비난과 죽은 뒤의 나쁜 곳이라는 두 가지 손실이 겹친다는 뜻입니다. 확실한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였다는 평가는 이 견해가 한쪽의 이익만 바라보고 다른 쪽의 위험을 놓친 도박이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묵상

행위가 실제로 효력이 있는데도 없다고 믿고 손해를 감수하려는 이가 있다면, 오늘 그 판단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고 권해 볼 수 있을까요? 그 권유를 나 자신에게도 건네 볼 수 있을까요?

장자들이여, 이렇게 주장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을 보면 ‘처벌·훼손·고문·괴롭힘·억압·위협을 행하거나 행하게 하는 자, 살생·투도·가택 침입·약탈·외딴집 털이·노상강도·간음·거짓말을 행하는 자, 이런 자가 행하면 악행이 되며, 면도날 같은 바퀴로 이 땅의 뭇 생명을 모두 한 덩이 살로 만든다면 그 때문에 생기는 악과 악의 결과가 있다’라 하니,

Tatra, gahapatayo,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karoto kārayato, chindato chedāpayato, pacato pācāpayato, socayato socāpayato, kilamato kilamāpayato, phandato phandāpayato, pāṇamatipātayato, adinnaṁ ādiyato, sandhiṁ chindato, nillopaṁ harato, ekāgārikaṁ karoto, paripanthe tiṭṭhato, paradāraṁ gacchato, musā bhaṇato; karoto karīyati pāpaṁ. Khurapariyantena cepi cakkena yo imissā pathaviyā pāṇe ekaṁ maṁsakhalaṁ ekaṁ maṁsapuñjaṁ kareyya, 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atthi pāpassa āgamo.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이번에는 행위를 긍정하는 견해가 다시 불려 나오는데, 앞서 나온 사이클과 달리 여기서는 처벌의 목록과 극단적 비유가 생략 없이 그대로 완전히 되풀이됩니다. 원문이 어느 자리는 줄이고 어느 자리는 그대로 두는지가 사이클마다 다르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앞서 부정론을 다룬 대목에서는 가운데 부분을 줄였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온전히 세워집니다. 다음 구절에서 갠지스강 비유와 예상되는 결과가 이어집니다.

묵상

같은 이야기를 다시 들을 때, 축약해서 듣는 것과 처음처럼 온전히 다시 듣는 것은 마음에 어떻게 다르게 남나요? 오늘은 이미 아는 이야기 하나를 처음 듣듯 다시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갠지스강 남쪽 기슭을 따라가며 죽이고 자르고 삶으면 그 때문에 생기는 악과 악의 결과가 있으며, 갠지스강 북쪽 기슭을 따라가며 베풀고 제사 지내면 그 때문에 생기는 공덕과 공덕의 결과가 있으니, 보시로도 자제로도 절제로도 진실한 말로도 공덕이 있고 공덕의 결과도 있다’라 하느니라.

Dakkhiṇ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hananto ghātento, chindanto chedāpento, pacanto pācento, atthi tatonidānaṁ pāpaṁ, atthi pāpassa āgamo. Uttarañcepi gaṅgāya tīraṁ gaccheyya dadanto dāpento, yajanto yajāpento, atthi tatonidānaṁ puññaṁ, atthi puññassa āgamo. Dānena damena saṁyamena saccavajjena atthi puññaṁ, atthi puññassa āgam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갠지스강 비유의 나머지 절반, 곧 남쪽에서 죽이면 악이 있고 북쪽에서 베풀면 공덕이 있다는 대목이 완성됩니다. 이는 앞서 부정론자들이 똑같은 강을 두고 정반대로 말했던 것과 낱말 하나까지 대구를 이루는데, 다만 있다·없다는 결론만 뒤집혀 있습니다. 보시·자제·절제·진실이라는 덕목을 하나하나 짚는 마지막 문장도 마찬가지로 대칭을 이룹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 견해를 지닌 이들에게 예상되는 결과가 이어집니다.

묵상

결과가 있다고 믿을 때 자연스럽게 몸가짐이 달라졌던 경험이 있나요? 오늘 내가 결과를 믿기에 계속하고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요? 그 행동을 낳은 믿음이 무엇인지도 함께 짚어 볼까요?

이렇게 주장하는 수행자·바라문들에게는 몸·말·뜻으로 짓는 악행이라는 세 가지 능숙하지 못한 것을 멀리하고 몸·말·뜻으로 짓는 선행이라는 세 가지 능숙한 것을 받아들여 행하리라는 것이 예상되느니라. 어떤 까닭인가? 그 수행자·바라문들은 능숙하지 못한 것들의 재난과 허물과 오염을 보고, 능숙한 것들의 벗어남이 주는 이익과 깨끗해짐도 보기 때문이니라.

tesametaṁ pāṭikaṅkhaṁ yamidaṁ kāyaduccaritaṁ, vacīduccaritaṁ, manoduccaritaṁ—ime tayo akusale dhamme abhinivajjetvā yamidaṁ kāyasucaritaṁ, vacīsucaritaṁ, manosucaritaṁ—ime tayo kusale dhamme samādāya vattissanti. Taṁ kissa hetu? Passanti h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akusalānaṁ dhammānaṁ ādīnavaṁ okāraṁ saṅkilesaṁ, kusalānaṁ dhammānaṁ nekkhamme ānisaṁsaṁ vodānapakkh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예상되는 결과와 그 까닭이 함께 제시되며, 앞서 여러 차례 되풀이된 것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됩니다. 결과를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가 도덕적 실천의 갈림길이라는 이 경의 일관된 주장이 행위의 효력이라는 주제에서도 그대로 확인됩니다. 재난과 허물과 오염을 보는 눈과 이익과 깨끗해짐을 보는 눈, 이 두 봄의 차이가 사이클마다 되풀이되는 열쇠말입니다. 다음 대목에서 이 바른 견해가 왜 옳은지 여덟 겹으로 분석됩니다.

묵상

결과를 또렷이 본 뒤에 마음이 자연스럽게 좋은 쪽으로 기울었던 경험이 있나요? 오늘 내가 미루고 있는 행동 하나의 결과를 미리 그려 보면 어떨까요? 그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움직일 수 있어요.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으니 ‘행위에 효력이 있다’는 견해를 지니면 그것이 바른 견해이며,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으니 ‘행위에 효력이 있다’고 사유하면 그것이 바른 사유이며,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으니 ‘행위에 효력이 있다’고 말하면 그것이 바른 말이며,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으니 ‘행위에 효력이 있다’고 하여 행위의 효력을 가르치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지 않는 것이 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atthi kiriyā’ tissa diṭṭhi hoti; sāssa hoti sammādiṭṭhi.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atthi kiriyā’ti saṅkappeti; svāssa hoti sammāsaṅkappo.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atthi kiriyā’ti vācaṁ bhāsati; sāssa hoti sammāvācā.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atthi kiriyā’ti āha; ye te arahanto kiriyavādā tesamayaṁ na paccanīkaṁ kar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바른 견해의 네 겹 분석이 행위의 효력이라는 주제로 다시 한번 펼쳐집니다. 이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다섯 가지 주제 모두에 똑같은 잣대가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장치입니다. 저 세상이든 행위의 효력이든, 실제로 있는 것을 있다고 보는 것이 바른 견해의 출발점이라는 원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 바른 견해가 남을 설득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나머지 절반이 마저 밝혀집니다.

묵상

행위에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실제로 확인한 경험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 확인이 지금 내 태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그 영향을 오늘 하나만 짚어 보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나요?

실제로 행위에 효력이 있으니 ‘행위에 효력이 있다’고 남을 설득하면 바른 가르침을 설득하는 것이 되며, 그로써 자신을 높이지도 남을 헐뜯지도 않게 되니, 이렇게 나쁜 계행은 버려지고 좋은 계행이 자리 잡게 되느니라. 이 바른 견해와 사유와 말과 성자들에 대한 반대 없음과 바른 가르침의 설득과 자신을 높이지 않고 남을 헐뜯지 않음, 이렇게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하여 이 많은 능숙한 것들이 생겨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kiriyaṁ ‘atthi kiriyā’ti paraṁ saññāpeti; sāssa hoti saddhammasaññatti. Tāya ca pana saddhammasaññattiyā nevattānukkaṁseti, na paraṁ vambheti. Iti pubbeva kho panassa dussīlyaṁ pahīnaṁ hoti, susīlyaṁ paccupaṭṭhitaṁ— ayañca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ariyānaṁ apaccanīkatā saddhammasaññatti anattukkaṁsanā aparavambhanā. Evamassime aneke kusalā dhammā sambhavanti sammādiṭṭhipaccay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바른 견해의 여덟 겹 분석이 완성되며 둘째 주제의 긍정적 결론이 마무리됩니다. 그릇된 견해가 낳는 연쇄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이 문장은, 행위의 효력을 믿는 바른 견해 하나가 계행 전체를 좋은 쪽으로 이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신을 높이지 않고 남을 헐뜯지 않는다는 구절은 바른 견해가 겸손과도 이어진다는 점을 알려 줍니다. 다음 대목에서는 슬기로운 사람의 도박 셈이 행위의 효력이라는 주제로 다시 펼쳐집니다.

묵상

바른 견해 하나가 여러 좋은 습관으로 이어졌던 경험이 있나요? 그 시작점이 무엇이었는지 오늘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그 시작을 오늘 다른 자리에도 한번 놓아 볼 수 있을까요?

장자들이여, 거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살피느니라. ‘만약 행위에 효력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날 것이니라. 행위에 효력이 없다는 그 말이 설령 진실이라 하여도, 이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슬기로운 이들에게 칭찬받으니 계행이 좋고 바른 견해를 지녀 행위의 효력을 주장하는 이라는 것이니라.’

Tatra, gahapatayo,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sace kho atthi kiriyā, evamayaṁ bhavaṁ purisapuggalo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sugatiṁ saggaṁ lokaṁ upapajjissati. Kāmaṁ kho pana māhu kiriyā, hotu nesaṁ bhavataṁ samaṇabrāhmaṇānaṁ saccaṁ vacanaṁ; atha ca panāyaṁ bhavaṁ purisapuggalo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pāsaṁso—sīlavā purisapuggalo sammādiṭṭhi kiriyavād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긍정하는 견해를 택했을 때의 결과가 앞의 부정적 사이클과 정확히 대칭을 이루며 제시됩니다. 행위에 효력이 있다면 좋은 곳에 태어나고, 없다 해도 지금 이 삶에서 이미 칭찬받는다는 것이니, 앞서 나온 손실의 논리가 여기서는 그대로 이익의 논리로 뒤집힙니다. 지금 이 삶에서의 칭찬과 죽은 뒤의 좋은 곳이라는 두 가지가 나란히 놓이는 것도 앞 대목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 이익이 양쪽 모두에서 확정되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행위에 효력이 있다고 믿고 오늘 하루를 살아 본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그 믿음이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 하루쯤 지켜보아도 좋겠습니다. 작은 행동 하나부터 시작해 볼 수 있을까요?

만약 행위에 실제로 효력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는 양쪽 모두에서 이기는 패가 되니, 곧 지금 여기에서 슬기로운 이들에게 칭찬받는 것과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 확실한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실천한 까닭에 양쪽 모두에 걸쳐 서서 능숙하지 못한 자리를 놓쳐 버리느니라.

Sace kho attheva kiriyā, evaṁ imassa bhoto purisapuggalassa ubhayattha kaṭaggaho— yañca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pāsaṁso, yañca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sugatiṁ saggaṁ lokaṁ upapajjissati. Evamassāyaṁ apaṇṇako dhammo susamatto samādinno, ubhayaṁsaṁ pharitvā tiṭṭhati, riñcati akusalaṁ ṭhān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행위에 실제로 효력이 있을 경우까지 확정되며 둘째 주제인 행위의 효력에 관한 사이클이 마무리됩니다. 앞서 나온 양쪽 모두에서 지는 패가 여기서는 양쪽 모두에서 이기는 패로 완전히 뒤집혀, 내세 사이클과 같은 다섯 마디 구조, 곧 주장과 반박과 예상되는 결과와 여덟 겹 분석과 도박의 셈이 두 번째 주제에서도 그대로 완결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음 대목에서 이 틀 그대로 셋째 주제인 원인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묵상

손해 볼 일이 없는 선택을 찾은 뒤에도, 그 선택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또 다른 걸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그 걸음을 하나 떼어 볼 수 있을까요? 앎과 행함 사이의 그 틈을 살펴볼 수 있을까요?

4 원인이 있다는 데 서다 16구절

중생이 오염되고 청정해지는 데 원인이 없다는 견해와 있다는 견해를 견주어, 셋째 물음에서도 손해 없는 자리를 밝힙니다.

장자들이여, 어떤 수행자·바라문들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지니고 있으니 ‘중생이 오염되는 데는 원인도 조건도 없으니 원인도 조건도 없이 중생은 오염되며, 중생이 청정해지는 데도 원인도 조건도 없으니 원인도 조건도 없이 중생은 청정해진다’라 하느니라.

Santi, gahapatayo,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natthi hetu, natthi paccayo sattānaṁ saṅkilesāya; ahetū appaccayā sattā saṅkilissanti. Natthi hetu, natthi paccayo sattānaṁ visuddhiyā; ahetū appaccayā sattā visujjhan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확실한 가르침의 셋째 주제로, 도덕적 원인과 결과의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가 제시됩니다. 중생이 오염되고 청정해지는 데에 아무 원인도 조건도 없다는 이 주장은, 앞서 다룬 저 세상과 행위의 효력을 넘어 이제는 그 둘을 잇는 인과의 사슬 자체를 끊어 버립니다. 오염과 청정을 나란히 부정하는 이 두 문장은 다음 구절에서 인간의 힘과 노력까지 부정하는 더 급진적인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내 마음이 오염되거나 맑아지는 데 아무 원인이 없다고 한다면, 지금 내가 애쓰는 일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물음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을 오늘 한번 찾아볼 수 있을까요?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인간의 기력도 노력도 없으니, 모든 중생과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와 모든 영혼은 자재함도 힘도 정진도 없이 운명과 우연과 본성에 따라 정해져 여섯 갈래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겪는다’라 하느니라.

Natthi balaṁ, natthi vīriyaṁ, natthi purisathāmo, natthi purisaparakkamo; sabbe sattā sabbe pāṇā sabbe bhūtā sabbe jīvā avasā abalā avīriyā niyatisaṅgatibhāvapariṇatā chasvevābhijātīsu sukhadukkhaṁ paṭisaṁvedentī’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앞선 인과 부정에 이어, 이번에는 인간의 힘과 노력 자체를 부정하는 더 급진적인 주장으로 나아갑니다. 모든 중생이 운명·우연·본성이라는 세 가지 힘에 의해 이미 정해진 대로 여섯 갈래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겪을 뿐이라는 이 견해는 결정론이라 부를 만한 입장입니다.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이 주장이야말로 이 경이 겨냥하는 다섯 물음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상

내 노력과 상관없이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느낀 순간이 있나요? 그런 느낌이 들 때, 그래도 오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 작은 선택 하나가 생각보다 큰 뜻을 지닐 수 있어요.

장자들이여, 그 수행자·바라문들 가운데는 정반대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어 이렇게 말하느니라. ‘중생이 오염되는 데는 원인과 조건이 있으니 원인과 조건이 있어 중생은 오염되며, 중생이 청정해지는 데도 원인과 조건이 있으니 원인과 조건이 있어 중생은 청정해진다’라 하느니라.

Tesaṁyeva kho, gahapatayo, samaṇabrāhmaṇānaṁ eke samaṇabrāhmaṇā ujuvipaccanīkavādā. Te evamāhaṁsu: ‘atthi hetu, atthi paccayo sattānaṁ saṅkilesāya; sahetū sappaccayā sattā saṅkilissanti. Atthi hetu, atthi paccayo sattānaṁ visuddhiyā; sahetū sappaccayā sattā visujjhan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인과를 부정하는 견해와 정반대로, 중생의 오염과 청정에는 분명한 원인과 조건이 있다는 견해가 그대로 대구를 이루어 제시됩니다. 부정하던 자리마다 긍정이 들어서는 이 구조는 앞의 두 사이클과 똑같은 틀이며, 오염과 청정 둘 다에 원인이 있다고 못박는 것도 앞 문단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다음 구절에서 힘과 노력에 관한 주장까지 마저 뒤집혀 긍정하는 견해가 완성됩니다.

묵상

내 마음이 맑아지는 데 분명한 원인과 조건이 있다고 믿을 때, 그 믿음이 오늘 내 행동에 어떤 차이를 만드나요? 지금 내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기대고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요? 그 원인을 오늘 한 번 더 믿어 볼 수 있을까요?

‘힘도 있고 정진도 있고 인간의 기력도 노력도 있으니, 모든 중생과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와 모든 영혼이 자재함도 힘도 정진도 없이 운명과 우연과 본성에 따라 정해져 여섯 갈래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겪는 것은 아니다’라 하느니라. 장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수행자·바라문들은 서로 정반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Atthi balaṁ, atthi vīriyaṁ, atthi purisathāmo, atthi purisaparakkamo; na sabbe sattā sabbe pāṇā sabbe bhūtā sabbe jīvā avasā abalā avīriyā niyatisaṅgatibhāvapariṇatā chasvevābhijātīsu sukhadukkhaṁ paṭisaṁvedentī’ti. Taṁ kiṁ maññatha, gahapatayo, nanume samaṇabrāhmaṇā aññamaññassa ujuvipaccanīkavādā”ti? “Evaṁ, bhante”.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결정론을 뒤집는 마지막 절반과, 세존께서 다시 확인을 구하시는 절차가 이어집니다. 힘과 노력이 실제로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중생이 운명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긍정하는 견해가 완성됩니다. 셋째 주제에서도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이 확인 절차는 판단에 앞서 사실관계부터 짚는 이 경의 일관된 태도를 보여 주며, 다음 대목부터 이 두 견해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가 이어집니다.

묵상

노력이 헛되지 않다고 믿을 때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고 느낄 때, 같은 하루도 다르게 살아지지 않을까요? 오늘 하루, 그 믿음의 차이를 실제로 느껴 볼 수 있을까요? 작은 실험 삼아 하루만 지켜보아도 좋겠습니다.

장자들이여, 이렇게 주장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을 보면 ‘중생이 오염되는 데도 청정해지는 데도 원인도 조건도 없으며,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인간의 기력도 노력도 없으니, 모든 중생과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와 모든 영혼은 자재함도 힘도 정진도 없이 운명과 우연과 본성에 따라 정해져 여섯 갈래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겪는다’라 하니,

“Tatra, gahapatayo,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natthi hetu, natthi paccayo sattānaṁ saṅkilesāya; ahetū appaccayā sattā saṅkilissanti. Natthi hetu, natthi paccayo sattānaṁ visuddhiyā; ahetū appaccayā sattā visujjhanti. Natthi balaṁ, natthi vīriyaṁ, natthi purisathāmo, natthi purisaparakkamo; sabbe sattā sabbe pāṇā sabbe bhūtā sabbe jīvā avasā abalā avīriyā niyatisaṅgatibhāvapariṇatā chasvevābhijātīsu sukhadukkhaṁ paṭisaṁvedentī’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원인 부정론자들에게 예상되는 결과를 말씀하시기 전에, 세존께서 그 견해 전체를 다시 한번 온전히 불러오십니다. 앞의 두 사이클과 달리 이번에는 원문 자체의 생략 표시 없이 오염과 청정, 힘과 노력에 관한 견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완전히 되풀이됩니다. 이렇게 사이클마다 생략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도 원문을 꼼꼼히 볼 때만 드러나는 특징이며, 다음 구절에서 이 견해에 예상되는 결과가 이어집니다.

묵상

이미 들은 주장을 다시 온전히 들으니 처음과는 다르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나요? 두 번째로 들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반복이 때로는 새로운 발견의 문이 되기도 해요.

이 수행자·바라문들에게는 몸으로 짓는 선행과 말로 짓는 선행과 뜻으로 짓는 선행, 이 세 가지 능숙한 것은 멀리하고, 몸으로 짓는 악행과 말로 짓는 악행과 뜻으로 짓는 악행, 이 세 가지 능숙하지 못한 것을 받아들여 행할 것이 예상되느니라. 어떤 까닭인가? 그들은 능숙하지 못한 것들의 재난과 허물과 오염을 보지 못하고, 능숙한 것들의 벗어남이 주는 이익과 깨끗해짐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tesametaṁ pāṭikaṅkhaṁ—yamidaṁ kāyasucaritaṁ, vacīsucaritaṁ, manosucaritaṁ—ime tayo kusale dhamme abhinivajjetvā yamidaṁ kāyaduccaritaṁ, vacīduccaritaṁ, manoduccaritaṁ—ime tayo akusale dhamme samādāya vattissanti. Taṁ kissa hetu? Na h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passanti akusalānaṁ dhammānaṁ ādīnavaṁ okāraṁ saṅkilesaṁ, kusalānaṁ dhammānaṁ nekkhamme ānisaṁsaṁ vodānapakkh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원인 부정론을 지닌 이들에게 실제로 어떤 결과가 따를지 세존께서 예측하십니다. 앞선 두 사이클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문장으로, 몸과 말과 뜻의 선행과 악행이라는 틀과 그 까닭이 다시 제시됩니다. 대상이 되는 견해는 저 세상에서 행위의 효력으로, 다시 원인의 문제로 계속 바뀌어도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구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며, 다음 대목에서 이 견해가 왜 그릇된 것인지 여덟 겹으로 분석됩니다.

묵상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결과가 있다면, 그것을 보지 못해서인가요, 아니면 보고도 외면하고 있는 것인가요? 이 물음을 세 번째로 다시 마주하니 어떤 느낌이 드나요? 매번 같은 물음이라도 답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어요.

실제로 원인이 있는데도 ‘원인이 없다’는 견해를 지니면 그것이 그릇된 견해이며, 실제로 원인이 있는데도 ‘원인이 없다’고 사유하면 그것이 그릇된 사유이며, 실제로 원인이 있는데도 ‘원인이 없다’고 말하면 그것이 그릇된 말이며, 실제로 원인이 있는데도 ‘원인이 없다’고 하여 원인을 가르치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는 것이 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hetuṁ ‘natthi hetū’ tissa diṭṭhi hoti; sāssa hoti micchādiṭṭhi. Santaṁyeva kho pana hetuṁ ‘natthi hetū’ti saṅkappeti; svāssa hoti micchāsaṅkappo. Santaṁyeva kho pana hetuṁ ‘natthi hetū’ti vācaṁ bhāsati; sāssa hoti micchāvācā. Santaṁyeva kho pana hetuṁ ‘natthi hetū’ti āha; ye te arahanto hetuvādā tesamayaṁ paccanīkaṁ kar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원인 부정론이 왜 그릇된 것인지, 앞선 두 사이클과 똑같은 네 겹의 틀로 짚어 나갑니다. 대상이 행위의 효력에서 원인으로 바뀌었을 뿐, 견해·사유·말·성자들과의 관계라는 네 층위와 그 논리는 완전히 동일합니다. 다섯 가지 주제 가운데 셋째에서도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이 틀은, 이 경이 내용이 아니라 형식, 곧 근거 없이 단정하는 태도 자체를 겨냥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묵상

원인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원인이 없다고 단정 지은 적이 있나요? 찾지 못함과 없음을 구별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그 구별이 오늘 하나의 판단을 늦추어 줄 수 있을까요?

실제로 원인이 있는데도 ‘원인이 없다’고 남을 설득하면 바르지 못한 가르침을 설득하는 것이 되며, 그로써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게 되니, 이렇게 좋은 계행은 버려지고 나쁜 계행이 자리 잡게 되느니라. 이 그릇된 견해와 사유와 말과 성자들에 대한 반대와 바르지 못한 가르침의 설득과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음, 이렇게 그릇된 견해를 조건으로 하여 이 많은 나쁘고 능숙하지 못한 것들이 생겨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hetuṁ ‘natthi hetū’ti paraṁ saññāpeti; sāssa hoti asaddhammasaññatti. Tāya ca pana asaddhammasaññattiyā attānukkaṁseti, paraṁ vambheti. Iti pubbeva kho panassa susīlyaṁ pahīnaṁ hoti, dussīlyaṁ paccupaṭṭhitaṁ— ayañca micchādiṭṭhi micchāsaṅkappo micchāvācā ariyānaṁ paccanīkatā asaddhammasaññatti attānukkaṁsanā paravambhanā. Evamassime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micchādiṭṭhipaccay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여덟 겹 분석의 나머지 절반이 마무리되며, 이번에도 앞선 두 사이클의 결론 문장과 정확히 같은 구조로 끝맺습니다. 그릇된 견해 하나가 사유·말·관계·설득·자만을 거쳐 계행 전체를 무너뜨리는 이 연쇄가 세 번째로 되풀이되는데, 대상만 바뀔 뿐 그 구조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 경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다음 대목에서는 이 견해를 실제로 택했을 때 벌어질 두 가지 경우가 헤아려집니다.

묵상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노력 자체를 놓아 버린 적이 있나요?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다르게 해 보고 싶나요? 지금이라도 그 걸음을 다시 떼어 볼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장자들이여, 거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살피느니라. ‘만약 원인이 없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진 뒤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킨 것이 될 것이요, 만약 원인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고통스러운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날 것이니라. 원인이 없다는 그 말이 설령 진실이라 하여도, 이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슬기로운 이들에게 비난받으니 계행이 나쁘고 원인을 부정하는 그릇된 견해를 지녔다는 것이니라.’

Tatra, gahapatayo,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sace kho natthi hetu, evamayaṁ bhavaṁ purisapuggalo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sotthimattānaṁ karissati; sace kho atthi hetu, evamayaṁ bhavaṁ purisapuggalo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apāyaṁ duggatiṁ vinipātaṁ nirayaṁ upapajjissati. Kāmaṁ kho pana māhu hetu, hotu nesaṁ bhavataṁ samaṇabrāhmaṇānaṁ saccaṁ vacanaṁ; atha ca panāyaṁ bhavaṁ purisapuggalo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gārayho—dussīlo purisapuggalo micchādiṭṭhi ahetukavād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원인 부정론을 실제로 택했을 때 벌어질 두 가지 경우를 슬기로운 사람이 미리 헤아려 봅니다. 앞선 두 사이클과 똑같은 틀로, 원인이 없다면 무사할 뿐이지만 있다면 나쁜 곳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여기서도 그치지 않으시고, 설령 그 견해가 맞다 하더라도 지금 이 삶에서 이미 계행이 나쁜 사람으로 비난받는다는 사실을 덧붙이십니다. 이 도박의 셈이 세 번째 주제에서도 조금도 다르지 않게 되풀이됩니다.

묵상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지금 당장 잃는 것이 있는 선택을 해 본 적이 있나요? 지금 이 순간에 치르는 대가를 먼저 살펴본다면 무엇이 보일까요? 그 대가를 알고도 같은 선택을 할지 자문해 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만약 원인이 실제로 있다면 이 사람에게는 양쪽 모두에서 지는 패가 되니, 곧 지금 여기에서 슬기로운 이들에게 비난받는 것과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고통스러운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 확실한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한 까닭에 한쪽으로만 치우쳐 서서 능숙한 자리를 놓쳐 버리느니라.

Sace kho attheva hetu, evaṁ imassa bhoto purisapuggalassa ubhayattha kaliggaho— yañca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gārayho, yañca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apāyaṁ duggatiṁ vinipātaṁ nirayaṁ upapajjissati. Evamassāyaṁ apaṇṇako dhammo dussamatto samādinno, ekaṁsaṁ pharitvā tiṭṭhati, riñcati kusalaṁ ṭhān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원인이 실제로 있을 경우의 결과가 확정되며 이 사이클의 결론이 내려집니다. 양쪽 모두에서 지는 패라는 표현이 세 번째로 되풀이되며, 지금 이 삶에서의 비난과 죽은 뒤의 나쁜 곳이라는 두 가지 손실이 겹친다는 뜻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확실한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였다는 이 평가는 원인 부정론이 결국 손해뿐인 도박이었음을 확인해 주며, 다음 대목에서 원인을 긍정하는 견해가 왜 옳은지 분석됩니다.

묵상

원인이 없다고 믿고 노력을 놓아 버렸다가, 뒤늦게 그 노력이 필요했음을 깨달은 경험이 있나요? 지금이라면 그 깨달음을 어떻게 살려 볼 수 있을까요? 늦었다고 느껴져도 오늘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장자들이여, 이렇게 주장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을 보면 ‘중생이 오염되는 데도 청정해지는 데도 원인과 조건이 있으며, 힘도 있고 정진도 있고 인간의 기력도 노력도 있으니, 모든 중생과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와 모든 영혼이 자재함도 힘도 정진도 없이 운명과 우연과 본성에 따라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라 하니,

Tatra, gahapatayo,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atthi hetu, atthi paccayo sattānaṁ saṅkilesāya; sahetū sappaccayā sattā saṅkilissanti. Atthi hetu, atthi paccayo sattānaṁ visuddhiyā; sahetū sappaccayā sattā visujjhanti. Atthi balaṁ, atthi vīriyaṁ, atthi purisathāmo, atthi purisaparakkamo; na sabbe sattā sabbe pāṇā sabbe bhūtā sabbe jīvā avasā abalā avīriyā niyatisaṅgatibhāvapariṇatā chasvevābhijātīsu sukhadukkhaṁ paṭisaṁvedentī’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이번에는 원인을 긍정하는 견해가 다시 불려 나오는데, 여기서도 부정론과 마찬가지로 앞서 나온 내용이 생략 없이 완전히 되풀이됩니다. 오염과 청정의 원인, 힘과 노력의 존재, 운명론의 부정까지 세 겹의 주장이 고스란히 다시 세워지고, 다음 구절에서 이 견해를 지닌 이들에게 예상되는 결과가 이어집니다. 부정과 긍정이 사이클마다 같은 방식으로 온전히 되풀이되는 것도 이 경의 논증이 임의적이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묵상

내 노력에 힘이 있다고 믿는 것과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것,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이 지금 내 하루를 더 낫게 만들어 줄까요?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 믿음을 시험해 볼 수 있을까요?

이 수행자·바라문들에게는 몸으로 짓는 악행과 말로 짓는 악행과 뜻으로 짓는 악행, 이 세 가지 능숙하지 못한 것은 멀리하고, 몸으로 짓는 선행과 말로 짓는 선행과 뜻으로 짓는 선행, 이 세 가지 능숙한 것을 받아들여 행할 것이 예상되느니라. 어떤 까닭인가? 그들은 능숙하지 못한 것들의 재난과 허물과 오염을 보고, 능숙한 것들의 벗어남이 주는 이익과 깨끗해짐도 보기 때문이니라.

tesametaṁ pāṭikaṅkhaṁ—yamidaṁ kāyaduccaritaṁ, vacīduccaritaṁ, manoduccaritaṁ—ime tayo akusale dhamme abhinivajjetvā yamidaṁ kāyasucaritaṁ, vacīsucaritaṁ, manosucaritaṁ—ime tayo kusale dhamme samādāya vattissanti. Taṁ kissa hetu? Passanti h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akusalānaṁ dhammānaṁ ādīnavaṁ okāraṁ saṅkilesaṁ, kusalānaṁ dhammānaṁ nekkhamme ānisaṁsaṁ vodānapakkh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원인을 긍정하는 이들에게 예상되는 결과와 그 까닭이 함께 제시됩니다. 앞선 두 사이클과 똑같이 몸과 말과 뜻의 선행과 악행이라는 틀로 결론이 내려지고, 결과를 보는가 보지 못하는가라는 이 경의 일관된 기준이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이 기준이 다섯 가지 주제 가운데 세 번째까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이어져 온 셈입니다. 다음 대목에서 이 바른 견해가 왜 옳은지 여덟 겹으로 분석됩니다.

묵상

결과를 또렷이 본 뒤에 마음이 자연스럽게 좋은 쪽으로 기울었던 경험이 있나요? 오늘 내가 미루고 있는 행동 하나의 결과를 미리 그려 본다면 어떤 장면이 떠오를까요? 그 장면이 오늘의 발걸음을 조금 앞당겨 줄 수 있을까요?

실제로 원인이 있으니 ‘원인이 있다’는 견해를 지니면 그것이 바른 견해이며, 실제로 원인이 있으니 ‘원인이 있다’고 사유하면 그것이 바른 사유이며, 실제로 원인이 있으니 ‘원인이 있다’고 말하면 그것이 바른 말이며, 실제로 원인이 있으니 ‘원인이 있다’고 하여 원인을 가르치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지 않는 것이 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hetuṁ ‘atthi hetū’ tissa diṭṭhi hoti; sāssa hoti sammādiṭṭhi. Santaṁyeva kho pana hetuṁ ‘atthi hetū’ti saṅkappeti; svāssa hoti sammāsaṅkappo. Santaṁyeva kho pana hetuṁ ‘atthi hetū’ti vācaṁ bhāsati; sāssa hoti sammāvācā. Santaṁyeva kho pana hetuṁ ‘atthi hetū’ti āha, ye te arahanto hetuvādā tesamayaṁ na paccanīkaṁ kar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바른 견해의 네 겹 분석이 원인이라는 주제로 다시 한번 펼쳐집니다. 저 세상과 행위의 효력에 이어 원인에서도, 실제로 있는 것을 있다고 보는 것이 바른 견해의 출발점이라는 원리가 세 번째로 확인됩니다. 견해·사유·말·성자들과의 관계라는 같은 네 층위가 대상만 바꾸어 세 번째로 되풀이되는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 바른 견해가 남을 설득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나머지 절반이 마저 밝혀집니다.

묵상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실제로 확인한 경험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 확인이 지금 내 태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그 영향을 오늘 하나만 짚어 보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나요?

실제로 원인이 있으니 ‘원인이 있다’고 남을 설득하면 바른 가르침을 설득하는 것이 되며, 그로써 자신을 높이지도 남을 헐뜯지도 않게 되니, 이렇게 나쁜 계행은 버려지고 좋은 계행이 자리 잡게 되느니라. 이 바른 견해와 사유와 말과 성자들에 대한 반대 없음과 바른 가르침의 설득과 자신을 높이지 않고 남을 헐뜯지 않음, 이렇게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하여 이 많은 능숙한 것들이 생겨나느니라.

Santaṁyeva kho pana hetuṁ ‘atthi hetū’ti paraṁ saññāpeti; sāssa hoti saddhammasaññatti. Tāya ca pana saddhammasaññattiyā nevattānukkaṁseti, na paraṁ vambheti. Iti pubbeva kho panassa dussīlyaṁ pahīnaṁ hoti, susīlyaṁ paccupaṭṭhitaṁ— ayañca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ariyānaṁ apaccanīkatā saddhammasaññatti anattukkaṁsanā aparavambhanā. Evamassime aneke kusalā dhammā sambhavanti sammādiṭṭhipaccay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바른 견해의 여덟 겹 분석이 완성되며 셋째 주제의 긍정적 결론이 마무리됩니다. 그릇된 견해가 낳는 연쇄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이 문장은, 원인을 믿는 바른 견해 하나가 계행 전체를 좋은 쪽으로 이끈다는 것을 세 번째로 보여 줍니다. 저 세상과 행위의 효력과 원인이라는 세 주제 모두에서 이 결론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도 확인됩니다. 다음 대목에서는 슬기로운 사람의 도박 셈이 원인이라는 주제로 마지막으로 펼쳐집니다.

묵상

바른 견해가 자신을 높이는 대신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저 세상과 행위의 효력과 원인이라는 세 번의 되풀이를 통해 이제 뚜렷해졌나요? 오늘 그 가운데 하나를 실제로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장자들이여, 거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살피느니라. ‘만약 원인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날 것이니라. 원인이 없다는 그 말이 설령 진실이라 하여도, 이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슬기로운 이들에게 칭찬받으니 계행이 좋고 원인을 주장하는 바른 견해를 지녔다는 것이니라.’

Tatra, gahapatayo,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sace kho atthi hetu, evamayaṁ bhavaṁ purisapuggalo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sugatiṁ saggaṁ lokaṁ upapajjissati. Kāmaṁ kho pana māhu hetu, hotu nesaṁ bhavataṁ samaṇabrāhmaṇānaṁ saccaṁ vacanaṁ; atha ca panāyaṁ bhavaṁ purisapuggalo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pāsaṁso—sīlavā purisapuggalo sammādiṭṭhi hetuvād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긍정하는 견해를 택했을 때의 결과가 앞의 부정적 사이클과 정확히 대칭을 이루며 제시됩니다. 원인이 있다면 좋은 곳에 태어나고, 없다 해도 지금 이 삶에서 이미 칭찬받는다는 것이니, 앞서 나온 손실의 논리가 여기서는 그대로 이익의 논리로 뒤집힙니다. 지금 이 삶에서의 칭찬과 죽은 뒤의 좋은 곳이라는 두 가지가 나란히 놓이는 것도 앞 대목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 이익이 양쪽 모두에서 확정되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원인이 있다고 믿는 것과 없다고 믿는 것 가운데, 지금 내 노력에 더 힘을 실어 주는 쪽은 어느 쪽인가요?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 믿음을 시험해 보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결과를 미리 정하지 않고 그저 지켜볼 수 있을까요?

만약 원인이 실제로 있다면 이 사람에게는 양쪽 모두에서 이기는 패가 되니, 곧 지금 여기에서 슬기로운 이들에게 칭찬받는 것과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 확실한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실천한 까닭에 양쪽 모두에 걸쳐 서서 능숙하지 못한 자리를 놓쳐 버리느니라.

Sace kho atthi hetu, evaṁ imassa bhoto purisapuggalassa ubhayattha kaṭaggaho— yañca diṭṭheva dhamme viññūnaṁ pāsaṁso, yañca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sugatiṁ saggaṁ lokaṁ upapajjissati. Evamassāyaṁ apaṇṇako dhammo susamatto samādinno, ubhayaṁsaṁ pharitvā tiṭṭhati, riñcati akusalaṁ ṭhān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원인이 실제로 있을 경우까지 확정되며 셋째 주제인 원인에 관한 사이클이 마무리됩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 주제, 곧 내세와 행위의 효력과 원인이 모두 같은 다섯 마디 구조로 다루어졌다는 것이 이로써 완전히 확인됩니다. 다음 대목부터는 형상 없는 경지와 존재의 소멸이라는 나머지 두 주제로 넘어가는데, 그 논증 방식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띠기 시작합니다.

묵상

세 번이나 되풀이된 이 도박의 셈을 지금 나의 어떤 고민에 적용해 볼 수 있을까요? 어느 쪽이든 손해가 없는 자리를 오늘 하나 찾아본다면 무엇이 보일까요? 그 자리를 찾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어요.

5 형상 없는 경지가 있다는 데 서다 5구절

형상 없는 경지가 있는지 없는지 몸소 알지 못해도, 판단을 미룬 채 손해 없는 길을 찾는 법을 밝힙니다.

장자들이여, 어떤 수행자·바라문들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지니고 있으니 ‘형상 없는 경지는 어디에도 전혀 없다’라 하느니라.

Santi, gahapatayo,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natthi sabbaso āruppā’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확실한 가르침의 넷째 주제로, 명상 수행이 이를 수 있는 형상 없는 경지가 실제로 있는지를 다룹니다. 앞선 세 주제와 달리 이 주제는 도덕적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수행으로 도달하는 경지의 유무를 묻는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릅니다. 짧은 한 문장으로 된 이 견해는 뒤에 이어질 정반대 주장과 대구를 이루기 위한 발판이며, 두 주장 모두 직접 겪어 보지 않고는 확인할 수 없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묵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경지나 상태가 정말 있는지 없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나요? 그 궁금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오늘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답을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장자들이여, 그 수행자·바라문들 가운데는 정반대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어 이렇게 말하느니라. ‘형상 없는 경지는 어디에나 전혀 남김없이 있다’라 하느니라. 장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수행자·바라문들은 서로 정반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Tesaṁyeva kho, gahapatayo, samaṇabrāhmaṇānaṁ eke samaṇabrāhmaṇā ujuvipaccanīkavādā. Te evamāhaṁsu: ‘atthi sabbaso āruppā’ti. Taṁ kiṁ maññatha, gahapatayo, nanume samaṇabrāhmaṇā aññamaññassa ujuvipaccanīkavādā”ti? “Evaṁ, bhante”.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형상 없는 경지가 전혀 없다는 견해와 정반대로, 완전히 있다는 견해가 그대로 대구를 이루어 제시됩니다. 앞선 세 주제와 마찬가지로 두 극단이 정면으로 맞서고, 세존께서 다시 장자들에게 그 모순을 확인하십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부터는 앞의 세 주제와 전혀 다른 방식의 논증이 펼쳐지는데, 몸과 말과 뜻의 선행·악행이라는 틀 대신 슬기로운 사람의 정직한 인정에서 출발합니다. 이 전환은 형상 없는 경지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한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두고 두 사람이 정반대로 단언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그럴 때 나는 어느 쪽 손을 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나요? 어느 쪽도 들지 않는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볼까요?

장자들이여, 거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살피느니라. ‘형상 없는 경지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이 있으나 이는 내가 보지 못한 것이요, 형상 없는 경지가 남김없이 있다고 말하는 수행자·바라문들도 있으나 이 또한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알지도 보지도 못한 채 한쪽만을 붙들어 ‘이것만이 진실이요 다른 것은 헛되다’라 말하는 것은 나에게 옳지 않으리라.’

“Tatra, gahapatayo,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ye kho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natthi sabbaso āruppā’ti, idaṁ me adiṭṭhaṁ; yep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atthi sabbaso āruppā’ti, idaṁ me aviditaṁ. Ahañceva kho pana ajānanto apassanto ekaṁsena ādāya vohareyyaṁ— idameva saccaṁ, moghamaññanti, na metaṁ assa patirūp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앞선 세 주제와 달리, 여기서는 세존께서 몸과 말과 뜻의 선행·악행이라는 틀을 쓰지 않으십니다. 대신 슬기로운 사람이 자신이 보지도 알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논증이 시작됩니다. 겪어 보지 못한 것을 두고 어느 한쪽을 단정하지 않는 이 태도는, 앞서 다룬 세 주제의 확신에 찬 어조와 뚜렷이 대비되며, 정직한 모름이야말로 다음에 이어질 지혜로운 선택의 출발점임을 보여 줍니다.

묵상

잘 모르는 것을 두고 성급하게 한쪽 편을 들었다가 뒤늦게 후회한 적이 있나요? 지금 판단을 미루어도 괜찮은 물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미루는 것도 하나의 성숙한 선택일 수 있어요.

‘형상 없는 경지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나는 형상을 지니고 마음으로 이루어진 신들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 확실한 자리가 될 것이요, 형상 없는 경지가 남김없이 있다고 말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나는 형상 없이 인식으로 이루어진 신들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 확실한 자리가 될 것이니라.’

Ye kho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natthi sabbaso āruppā’ti, sace tesaṁ bhavataṁ samaṇabrāhmaṇānaṁ saccaṁ vacanaṁ, ṭhānametaṁ vijjati— ye te devā rūpino manomayā, apaṇṇakaṁ me tatrūpapatti bhavissati. Ye pana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atthi sabbaso āruppā’ti, sace tesaṁ bhavataṁ samaṇabrāhmaṇānaṁ saccaṁ vacanaṁ, ṭhānametaṁ vijjati— ye te devā arūpino saññāmayā, apaṇṇakaṁ me tatrūpapatti bhavissa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판단을 유보한 슬기로운 사람이 그럼에도 자신에게 유리한 확실한 자리를 찾아냅니다. 어느 쪽 주장이 옳든, 그 주장을 따라 명상을 닦으면 그에 맞는 신들 가운데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견해를 두고 다투는 대신, 두 견해 모두에서 손해 보지 않는 실천을 택하는 이 경의 핵심 전략을 형상 없는 경지라는 주제에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앞선 세 주제의 도박 셈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지혜입니다.

묵상

어느 쪽이 맞는지 몰라도 두 경우 모두에 대비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본 적이 있나요? 지금 확신이 서지 않는 일 앞에서, 그런 길이 있을지 한번 찾아볼 수 있을까요? 찾다 보면 뜻밖의 여유가 생길지도 몰라요.

형상을 이유로 몽둥이를 들고 칼을 들며 다투고 싸우고 언쟁하고 서로 헐뜯고 이간질하고 거짓말하는 일들이 보이나 형상 없는 곳에는 이런 일이 전혀 없느니라. 이렇게 살펴서 그는 오직 형상에 대한 싫어하여 떠남과 사라짐과 소멸을 향해 나아가느니라.

Dissanti kho pana rūpādhikaraṇaṁ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ṁtuvaṁpesuññamusāvādā. ‘Natthi kho panetaṁ sabbaso arūpe’ti. So iti paṭisaṅkhāya rūpānaṁyev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panno h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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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 없는 경지를 둘러싼 논증의 마지막 매듭으로, 세존께서 형상과 다툼을 연결지으십니다. 몽둥이와 칼, 이간질과 거짓말이 모두 형상을 두고 벌어지는 일이라는 관찰은, 앞서 나온 판단 유보나 확실한 자리 찾기를 넘어 실제 수행의 방향, 곧 형상에서 멀어지는 쪽을 가리킵니다. 넷째 주제는 이렇게 도덕적 옳고 그름이 아니라 수행의 방향 제시로 마무리되며, 다음 대목에서 다섯째이자 마지막 주제인 존재의 소멸로 넘어갑니다.

묵상

가진 것이나 보이는 것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그런 다툼에서 한 걸음 물러나면 무엇이 더 잘 보일까요? 오늘 그 물러섬을 아주 잠깐이라도 시도해 볼 수 있을까요?

6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 있다는 데 서다 5구절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 있는지 없는지 몸소 알지 못해도, 그 견해가 마음을 탐욕 쪽으로 이끄는지 놓음 쪽으로 이끄는지로 가늠하는 법을 밝힙니다.

장자들이여, 어떤 수행자·바라문들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지니고 있으니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란 어디에도 전혀 없다’라 하느니라.

Santi, gahapatayo,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natthi sabbaso bhavanirodh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확실한 가르침의 다섯째이자 마지막 주제로, 존재가 완전히 소멸하는 경지, 곧 열반이 실제로 있는지를 다룹니다. 앞선 형상 없는 경지와 마찬가지로 이 주제도 도덕적 선악이 아니라 수행이 이를 수 있는 경지의 유무를 묻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와 정반대되는 주장이 이어지며, 이 경 전체의 마지막 사이클이 시작됩니다. 다섯 가지 주제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 이렇게 마지막 자리에 놓입니다.

묵상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가 정말 있을지 궁금했던 적이 있나요? 그 물음을 지금 당장 풀지 못해도 괜찮다고 느껴 볼 수 있을까요? 풀리지 않은 채로 두어도 삶은 계속되고, 오늘 하루도 그 나름의 자리를 지닙니다.

장자들이여, 그 수행자·바라문들 가운데는 정반대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어 이렇게 말하느니라.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란 어디에나 전혀 남김없이 있다’라 하느니라. 장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수행자·바라문들은 서로 정반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Tesaṁyeva kho, gahapatayo, samaṇabrāhmaṇānaṁ eke samaṇabrāhmaṇā ujuvipaccanīkavādā. Te evamāhaṁsu: ‘atthi sabbaso bhavanirodho’ti. Taṁ kiṁ maññatha, gahapatayo, nanume samaṇabrāhmaṇā aññamaññassa ujuvipaccanīkavādā”ti? “Evaṁ, bhante”.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존재의 소멸이 전혀 없다는 견해와 정반대로, 완전히 있다는 견해가 그대로 대구를 이루어 제시됩니다. 형상 없는 경지를 다룬 넷째 주제와 똑같은 틀로 두 극단이 맞서고, 세존께서 다시 확인을 구하십니다. 다음 대목에서도 넷째 주제와 같은 방식으로, 몸과 말과 뜻의 틀 대신 슬기로운 사람의 정직한 인정에서 논증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마지막 두 주제는 나란히 같은 방식으로 다루어집니다.

묵상

완전한 소멸이나 궁극의 평화 같은 것을 두고, 있다 없다를 성급히 정하고 싶었던 적이 있나요? 그 물음을 열어 둔 채로 지내 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열어 둔 채로도 지금 이 순간은 그대로 있습니다.

장자들이여, 거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살피느니라.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란 전혀 없다고 말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이 있으나 이는 내가 보지 못한 것이요,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란 남김없이 있다고 말하는 수행자·바라문들도 있으나 이 또한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알지도 보지도 못한 채 한쪽만을 붙들어 ‘이것만이 진실이요 다른 것은 헛되다’라 말하는 것은 나에게 옳지 않으리라.’

“Tatra, gahapatayo,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ye kho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natthi sabbaso bhavanirodho’ti, idaṁ me adiṭṭhaṁ; yep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atthi sabbaso bhavanirodho’ti, idaṁ me aviditaṁ. Ahañceva kho pana ajānanto apassanto ekaṁsena ādāya vohareyyaṁ— idameva saccaṁ, moghamaññanti, na metaṁ assa patirūpaṁ.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형상 없는 경지를 다룰 때와 똑같이,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이 보지도 알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라는, 이 경에서 가장 근본적이라 할 물음 앞에서도 성급한 단정을 피하는 이 태도는 다섯 가지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이 경의 정신을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겪지 않은 것을 겪은 척하지 않는 이 정직함이 다음 구절의 확실한 셈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궁극의 물음 앞에서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직한 태도로 느껴질 때가 있나요? 지금 나에게 그런 모름을 인정해도 괜찮은 물음이 있을까요? 인정한 뒤에 오는 마음의 여유도 함께 느껴 볼까요?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란 전혀 없다고 말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나는 형상 없이 인식으로 이루어진 신들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 확실한 자리가 될 것이요,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란 남김없이 있다고 말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나는 바로 이 삶에서 완전히 소멸에 들 것이니라.’

Ye kho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natthi sabbaso bhavanirodho’ti, sace tesaṁ bhavataṁ samaṇabrāhmaṇānaṁ saccaṁ vacanaṁ, ṭhānametaṁ vijjati— ye te devā arūpino saññāmayā apaṇṇakaṁ me tatrūpapatti bhavissati. Ye pana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atthi sabbaso bhavanirodho’ti, sace tesaṁ bhavataṁ samaṇabrāhmaṇānaṁ saccaṁ vacanaṁ, ṭhānametaṁ vijjati— yaṁ diṭṭheva dhamme parinibbāyissām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판단을 유보한 슬기로운 사람이 이번에도 자신에게 유리한 확실한 자리를 찾아냅니다. 소멸이 없다면 형상 없는 신들 가운데 태어나고, 있다면 이 삶에서 바로 완전한 소멸에 이른다는 것이니, 어느 쪽이든 손해가 없습니다. 앞선 형상 없는 경지의 논증과 같은 틀이지만, 이번에는 최종 목적지가 열반 그 자체라는 점에서 무게가 다르며, 다음 구절에서 두 견해를 가늠하는 마지막 기준이 이어집니다.

묵상

어느 쪽이 진실이든 내가 나아갈 방향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그 사실이 지금 마음을 어떻게 편하게 해 줄까요? 오늘 그 편안함을 잠시 느껴 볼 수 있을까요? 서두르지 않아도 길은 이미 놓여 있어요.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란 전혀 없다고 말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의 그 견해는 탐욕과 속박과 즐김과 집착과 집착에 가까우며,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란 남김없이 있다고 말하는 수행자·바라문들의 그 견해는 탐욕 없음과 속박 없음과 즐기지 않음과 집착 없음과 집착 없음에 가까우니라. 이렇게 살펴서 그는 오직 존재에 대한 싫어하여 떠남과 사라짐과 소멸을 향해 나아가느니라.

Ye kho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natthi sabbaso bhavanirodho’ti, tesamayaṁ diṭṭhi sārāgāya santike, saṁyogāya santike, abhinandanāya santike, ajjhosānāya santike, upādānāya santike. Ye pana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atthi sabbaso bhavanirodho’ti, tesamayaṁ diṭṭhi asārāgāya santike, asaṁyogāya santike, anabhinandanāya santike, anajjhosānāya santike, anupādānāya santiketi. So iti paṭisaṅkhāya bhavānaṁyev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panno ho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이 경의 마지막 논증으로, 세존께서 두 견해를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 견해가 마음을 어디로 이끄는지로 평가하십니다. 소멸을 부정하는 견해는 탐욕과 집착 쪽으로, 긍정하는 견해는 탐욕 없음과 집착 없음 쪽으로 기운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형상 없는 경지를 다룬 넷째 주제의 결론과 거의 같은 말로 존재 자체에 대한 싫어함과 소멸을 향한 나아감을 가리키며, 다섯 가지 주제 전체의 논증을 마무리 짓습니다.

묵상

어떤 믿음이 나를 더 붙잡는 쪽으로 이끄는지, 아니면 더 놓아주는 쪽으로 이끄는지 돌아본 적이 있나요?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생각 하나가 나를 어느 쪽으로 이끌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7 네 부류의 사람 6구절

확실한 가르침을 마치신 뒤, 자신을 괴롭히는 이·남을 괴롭히는 이·둘 다 괴롭히는 이·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이를 나누어 보이십니다.

장자들이여, 세상에는 이 네 부류의 사람이 있어 존재하니 무엇이 넷인가?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이로서 자신을 괴롭히는 수행에 전념하며, 여기 어떤 사람은 남을 괴롭히는 이로서 남을 괴롭히는 수행에 전념하며,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 이로서 자신과 남을 괴롭히는 수행에 전념하느니라.

Cattārome, gahapatayo, puggalā santo saṁvijjamānā lokasmiṁ. Katame cattāro? Idha, gahapatayo, ekacco puggalo attantapo hoti attaparitāpanānuyogamanuyutto. Idha, gahapatayo, ekacco puggalo parantapo hoti paraparitāpanānuyogamanuyutto. Idha, gahapatayo, ekacco puggalo attantapo ca hoti attaparitāpanānuyogamanuyutto parantapo ca paraparitāpanānuyogamanuyutto.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확실한 가르침이 마무리된 뒤, 세존께서 화제를 바꾸어 세상에 있는 네 부류의 사람을 소개하십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이, 남을 괴롭히는 이, 둘 다 괴롭히는 이라는 세 부류가 먼저 제시되는데, 이는 앞선 다섯 주제의 견해 다툼과는 달리 실제 삶의 방식을 놓고 벌이는 분류입니다. 다음 구절에서 넷째 부류가 이어지며 네 갈래의 목록이 완성되고, 이어서 각 부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하나씩 풀이됩니다.

묵상

누군가를 힘들게 하거나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이루려 한 적이 있나요? 그 방식이 정말 필요했는지 오늘 한번 돌아볼 수 있을까요? 다른 길이 있었을지도 함께 생각해 볼까요?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도 괴롭히지 않고 남도 괴롭히지 않는 이로서 자신과 남을 괴롭히지 않는 데 전념하니, 그는 자신도 괴롭히지 않고 남도 괴롭히지 않아 지금 여기에서 바라는 것이 없고 꺼지고 서늘해져 행복을 경험하며 범천처럼 지내느니라.

Idha, gahapatayo, ekacco puggalo nevattantapo hoti nāttaparitāpanānuyogamanuyutto na parantapo na paraparitāpanānuyogamanuyutto; so anattantapo aparantapo diṭṭheva dhamme nicchāto nibbuto sītībhūto sukhappaṭisaṁvedī brahmabhūtena attanā vihara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넷째이자 마지막 부류가 제시되며 네 사람의 목록이 완성됩니다. 앞의 세 부류가 모두 누군가를 괴롭히는 데 전념하는 것과 달리, 이 넷째 부류만이 아무도 괴롭히지 않으면서 지금 이 삶에서 이미 행복하다고 묘사됩니다. 바라는 것이 없고 꺼지고 서늘해진다는 표현은 열반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수행의 목표가 고행이나 억압이 아니라 이런 서늘한 평온임을 미리 보여 줍니다.

묵상

괴롭히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태를 경험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순간이 있었다면,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그 조건을 오늘 다시 마련해 볼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장자들이여, 그러면 자신을 괴롭히는 이로서 자신을 괴롭히는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여기 어떤 사람은 옷을 입지 않고 관습을 따르지 않으며 손으로 핥아 먹는 등… 이렇게 여러 방식으로 몸을 태우고 괴롭히는 수행에 전념하며 지내니, 장자들이여, 이런 사람을 자신을 괴롭히는 이로서 자신을 괴롭히는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이라 하느니라.

Katamo ca, gahapatayo, puggalo attantapo attaparitāpanānuyogamanuyutto? Idha, gahapatayo, ekacco puggalo acelako hoti muttācāro hatthāpalekhano …pe… iti evarūpaṁ anekavihitaṁ kāyassa ātāpanaparitāpanānuyogamanuyutto viharati. Ayaṁ vuccati, gahapatayo, puggalo attantapo attaparitāpanānuyogamanuyutto.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네 부류 가운데 첫째, 자신을 괴롭히는 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설명됩니다. 원문은 옷을 입지 않고 손으로 핥아 먹는 등 극단적인 고행의 목록을 '…뻬…'로 줄이는데, 이 목록은 다른 여러 경에 온전히 실려 있는 유명한 고행자의 모습입니다. 부처님 당시 실제로 있었던 여러 극단적 자기 고행의 관습을 가리키며, 이런 고행이 몸을 태우고 괴롭히는 데 그친다고 짧게 정리됩니다.

묵상

몸을 힘들게 하는 것이 마음을 맑게 하는 길이라 여긴 적이 있나요? 그 둘이 정말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지 오늘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몸과 마음을 다르게 대하는 길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볼까요?

장자들이여, 그러면 남을 괴롭히는 이로서 남을 괴롭히는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여기 어떤 사람은 양 잡는 자, 돼지 잡는 자… 또는 그 밖에 어떤 잔인한 생업에 종사하는 자이니, 장자들이여, 이런 사람을 남을 괴롭히는 이로서 남을 괴롭히는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이라 하느니라.

Katamo ca, gahapatayo, puggalo parantapo paraparitāpanānuyogamanuyutto? Idha, gahapatayo, ekacco puggalo orabbhiko hoti sūkariko …pe… ye vā panaññepi keci kurūrakammantā. Ayaṁ vuccati, gahapatayo, puggalo parantapo paraparitāpanānuyogamanuyutto.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둘째 부류인 남을 괴롭히는 이가 설명되는데, 앞서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자와 달리 이번에는 생업 자체가 다른 생명을 해치는 일인 사람들을 예로 듭니다. 양이나 돼지를 잡는 일부터 그 밖의 잔인한 생업까지 원문은 목록의 앞뒤만 남기고 가운데를 줄였습니다. 수행이 아니라 직업이 이 부류를 정의한다는 점이 첫째 부류와 다른 점이며, 셋째 부류에서는 이 둘이 한 사람 안에서 겹칩니다.

묵상

누군가를 해치는 일이 생계와 얽혀 있을 때, 그 일을 그만두기가 왜 더 어려울까요? 지금 내가 하는 일 가운데 다시 살펴보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작은 부분부터 바꾸어 볼 수 있을까요?

장자들이여, 그러면 자신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 이로서 자신과 남을 괴롭히는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여기 어떤 사람은 관정을 받은 끄샤뜨리야 왕이나… 그 종들과 심부름꾼과 일꾼들은 매와 두려움에 시달려 눈물 젖은 얼굴로 울면서 일을 하니, 장자들이여, 이런 사람을 자신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 이라 하느니라.

Katamo ca, gahapatayo, puggalo attantapo ca attaparitāpanānuyogamanuyutto parantapo ca paraparitāpanānuyogamanuyutto? Idha, gahapatayo, ekacco puggalo rājā vā hoti khattiyo muddhāvasitto …pe… tepi daṇḍatajjitā bhayatajjitā assumukhā rudamānā parikammāni karonti. Ayaṁ vuccati, gahapatayo, puggalo attantapo ca attaparitāpanānuyogamanuyutto parantapo ca paraparitāpanānuyogamanuyutto.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셋째 부류로 제시되는 인물은 다름 아닌 왕입니다. 자신은 제사를 위해 스스로 고행에 가까운 절제를 행하면서, 동시에 그 제사를 준비하는 종들과 일꾼들을 매와 두려움으로 몰아붙여 눈물로 일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기 고행과 타인 학대가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이 모습은 종교적 헌신이 다른 이의 고통을 가릴 수 있음을 보여 주며, 지위가 높을수록 그 그늘도 커질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묵상

누군가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 주변 사람에게는 가혹했던 경우를 본 적이 있나요? 그 둘이 실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고 느껴지나요? 그 뿌리가 무엇일지 오늘 한번 짚어 볼 수 있을까요?

장자들이여, 그러면 자신도 괴롭히지 않고 남도 괴롭히지도 않는 이로서 자신과 남을 괴롭히지 않는 데 전념하여 지금 여기에서 바라는 것이 없고 꺼지고 서늘해져 행복을 경험하며 범천처럼 지내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Katamo ca, gahapatayo, puggalo nevattantapo nāttaparitāpanānuyogamanuyutto na parantapo na paraparitāpanānuyogamanuyutto; so anattantapo aparantapo diṭṭheva dhamme nicchāto nibbuto sītībhūto sukhappaṭisaṁvedī brahmabhūtena attanā vihara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앞선 세 부류와 똑같은 질문 형식으로, 이번에는 넷째 부류인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앞의 세 부류처럼 짧게 끝나지 않고, 다음 대목에서 여래가 세상에 나타나 계행을 갖추고 선정을 닦아 마침내 번뇌를 다하기까지의 온 과정으로 길게 펼쳐집니다. 이는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삶이 그만큼 온전한 수행의 결실임을 보여 주며, 이 경의 마지막 큰 단락으로 이어지는 문턱이 됩니다.

묵상

괴롭히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삶이 있다면, 그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내가 그런 삶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작은 실천은 무엇일까요? 거창한 결심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하나만 떠올려 볼까요?

8 점진적인 길과 세 가지 밝은 앎 7구절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넷째 사람이 누구인지, 여래가 세상에 나타나 계행에서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온 길로 답하십니다.

장자들이여, 이 넷째 사람이란 누구인가? 여기 여래가 세상에 나타나 아라한이며 완전히 깨달은 분이 되느니라…

Idha, gahapatayo, tathāgato loke uppajjati arahaṁ sammāsambuddho … pe…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넷째 부류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이 마침내 시작됩니다. 원문은 여래가 세상에 나타나신다는 짧은 문장 뒤에 '…뻬…'라는 생략 표시를 두어, 가르침을 들은 이가 믿음을 얻어 출가하고 계행과 감각의 단속과 절제된 식사와 깨어 있음과 알아차림과 홀로 있음을 차례로 갖추는 긴 이야기 전체를 건너뜁니다. 이 정형구는 여러 경에서 이미 자세히 설해진 것이라 여기서는 도착점만 가리키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묵상

긴 이야기를 다 듣지 않아도 그 결말을 짐작할 수 있을 때가 있나요? 지금 내가 이미 알고 있어서 굳이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 생략이 오히려 신뢰의 표시일 수 있어요.

그는 마음을 오염시키고 지혜를 약하게 하는 이 다섯 장애를 버리고,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것들에서 벗어나 생각을 일으키고 이어 가며 떠남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들어 머무느니라. 생각의 일으킴과 이어 감이 가라앉아 … 두 번째 선정에 들어 머물고, 희열이 사그라들어 … 세 번째 선정에 들어 머물며, 행복도 버리고 … 네 번째 선정에 들어 머무느니라.

so ime pañca nīvaraṇe pahāya cetaso upakkilese paññāya dubbalīkaraṇe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ṁ savicāraṁ vivekajaṁ pītisukhaṁ paṭham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Vitakkavicārānaṁ vūpasamā ajjhattaṁ sampasādanaṁ cetaso ekodibhāvaṁ avitakkaṁ avicāraṁ samādhijaṁ pītisukhaṁ dutiyaṁ jhānaṁ …pe… tatiyaṁ jhānaṁ …pe…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생략된 긴 이야기 끝에 이야기가 다시 이어져, 다섯 장애를 버린 마음이 네 단계의 선정으로 깊어지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문구는 가나까 목갈라나경(MN 107)을 비롯한 여러 경에서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은 표준 정형구로, 원문 역시 첫 번째 선정만 온전히 풀어 쓰고 나머지는 '…뻬…'와 '…'로 도착점만 표시합니다. 생각이 가라앉고 기쁨이 사그라들고 마침내 행복마저 내려놓는 이 흐름이 다음 대목의 세 가지 밝은 앎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됩니다.

묵상

생각이 가라앉고 기쁨이 사그라들고 마침내 행복마저 내려놓는 흐름을 실제로 겪어 본 적이 있나요? 그 흐름이 잃음이 아니라 더 깊어짐이라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오늘 그 결을 잠깐이라도 느껴 볼 수 있을까요?

그는 이렇게 삼매에 든 마음이 깨끗하고 밝고 흠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다루기 쉽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게 되었을 때, 지난 삶을 기억하는 앎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니, 한 생, 두 생…이렇게 모습과 자세한 내용을 갖추어 여러 지난 삶을 기억하느니라.

So evaṁ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pubbenivāsānussatiñāṇāya cittaṁ abhininnāmeti. So anekavihitaṁ pubbenivāsaṁ anussarati seyyathidaṁ—ekampi jātiṁ dvepi jātiyo …pe… iti sākāraṁ sauddesaṁ anekavihitaṁ pubbenivāsaṁ anussara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선정을 마친 마음이 세 가지 밝은 앎 가운데 첫째로 나아가는 대목입니다. 깨끗하고 밝고 흠 없다는 여덟 가지 수식어로 삼매에 든 마음의 상태를 그린 뒤, 그 마음을 지난 삶에 대한 기억으로 돌립니다. 한 생, 두 생으로 시작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까지 이어지는 이 기억은 원문에서 '…뻬…'로 줄여져 있으며, 다음 구절에서는 둘째 밝은 앎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지금의 나를 만든 오래전 경험 하나를 떠올려 본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그 기억이 지금 나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요? 붙잡지 않고 그저 살펴보는 마음으로 대해 볼 수 있을까요?

그는 이렇게 삼매에 든 마음으로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앎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니,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어 가고 태어나는 것을 보아 천하고 고귀하며 아름답고 추하며 좋은 곳과 나쁜 곳으로… 업에 따라 나아가는 중생들을 그대로 아느니라.

So evaṁ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sattānaṁ cutūpapātañāṇāya cittaṁ abhininnāmeti. So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ati cavamāne upapajjamāne hīne paṇīte suvaṇṇe dubbaṇṇe, sugate duggate …pe… yathākammūpage satte pajānā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둘째 밝은 앎으로, 신성한 눈을 통해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모습을 보는 앎입니다. 좋고 나쁨, 아름답고 추함 같은 여러 대비를 나열한 뒤 원문은 '…뻬…'로 나머지를 줄이고, 결론으로 중생이 자신의 업에 따라 나아간다는 것을 안다고 맺습니다. 이는 앞서 다섯째 주제, 곧 존재의 소멸에서 판단을 유보했던 물음에 대해 이제 직접 본 자만이 답할 수 있음을 보여 주며, 다음 구절에서 셋째이자 마지막 밝은 앎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앞으로의 나에게 어떤 씨앗이 될지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그 상상이 오늘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씨앗 하나를 오늘 다르게 심어 볼 수 있을까요?

그는 이렇게 삼매에 든 마음으로 번뇌를 다하는 앎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니,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번뇌를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아느니라.

So evaṁ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āsavānaṁ khayañāṇāya cittaṁ abhininnāmeti. So ‘idaṁ dukkhan’ti yathābhūtaṁ pajānāti …pe… ‘ayaṁ āsav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ṁ pajānā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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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이자 마지막 밝은 앎으로, 네 가지 진리의 정형구가 괴로움에 대해서도 번뇌에 대해서도 각각 되풀이됩니다. 원문은 이 잘 알려진 정형구를 '…뻬…'로 크게 줄이는데, 이는 사성제가 다른 여러 경에서 이미 자세히 설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앎이야말로 확실한 가르침 전체가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지점이며, 다음 구절에서 이 앎이 실제로 낳는 결실, 곧 해탈이 이어집니다.

묵상

괴로움의 원인을 있는 그대로 본 순간이 있었다면, 그 봄이 무엇을 바꾸어 놓았나요? 지금 내가 있는 그대로 보고 싶은 것 하나는 무엇인가요?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이루어질 수 있어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에게 감각적 욕망의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하고, 존재하려는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하고, 무명의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하니,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앎이 있어 ‘태어남은 다하고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으며 할 일을 다 마쳐 다시는 이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아느니라.

Tassa evaṁ jānato evaṁ passato kāmāsavāpi cittaṁ vimuccati, bhavāsavāpi cittaṁ vimuccati, avijjāsavāpi cittaṁ vimuccati. Vimuttasmiṁ vimuttamiti ñāṇaṁ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ṁ brahmacariyaṁ, kataṁ karaṇīyaṁ, nāparaṁ itthattāyā’ti pajānā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번뇌가 다하는 앎의 결실이 마침내 완성됩니다. 감각적 욕망·존재하려는 갈망·무명이라는 세 가지 번뇌에서 마음이 풀려나고, 풀려났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이 마지막 앎이 곧 아라한과입니다. 확실한 가르침의 다섯 주제, 네 부류의 사람, 점진적인 길이라는 이 경의 모든 논증이 이 한 문장으로 수렴되니, 다음 구절에서 이 사람이 마침내 넷째 부류로 불리는 것으로 이 긴 대답이 마무리됩니다.

묵상

완전히 자유로워진 순간을 직접 알아차린 경험이 있나요? 크든 작든, 무언가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던 때를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그 앎이 어떻게 왔는지도 함께 살펴볼까요?

장자들이여, 이런 사람을 자신도 괴롭히지 않고 남도 괴롭히지 않는 이로서 자신과 남을 괴롭히지 않는 데 전념하여 지금 여기에서 바라는 것이 없고 꺼지고 서늘해져 행복을 경험하며 범천처럼 지내는 사람이라 하느니라.

Ayaṁ vuccati, gahapatayo, puggalo nevattantapo nāttaparitāpanānuyogamanuyutto na parantapo na paraparitāpanānuyogamanuyutto; so anattantapo aparantapo diṭṭheva dhamme nicchāto nibbuto sītībhūto sukhappaṭisaṁvedī brahmabhūtena attanā viharatī”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네 부류의 사람 가운데 마지막,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이 마무리됩니다. 이 정의는 앞서 예고되었던 문장 그대로 되풀이되는데, 그 사이에 들어선 계행부터 번뇌의 소멸까지 이르는 온 여정이 이 짧은 결론의 실제 내용임이 이제 밝혀집니다. 짧게 예고되었던 말과 그 사이를 채운 긴 여정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이 경 전체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다음 대목에서 장자들이 이 모든 가르침에 응답하며 경이 마무리됩니다.

묵상

긴 여정 끝에 처음 들었던 말이 다르게 다가온 경험이 있나요? 오늘 이 이야기를 듣기 전과 후, 나에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 변화를 말로 옮겨 보면 어떤 문장이 될까요?

9 귀의하다 2구절

살라의 장자들이 세존의 가르침에 감사하며 귀의를 청하고 경이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살라의 바라문 장자들이 세존께 아뢰었으니 ‘훌륭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훌륭합니다. 엎어진 것을 바로 세우듯, 덮인 것을 열어 보이듯,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 어둠 속에 등불을 비추어 눈 있는 이들이 사물을 보게 하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이처럼 여러 방편으로 가르침을 밝혀 주셨습니다.’

Evaṁ vutte, sāleyyakā brāhmaṇagahapatikā bhagavantaṁ etadavocuṁ: “abhikkantaṁ, bho gotama, abhikkantaṁ, bho gotama. Seyyathāpi, bho gotama, nikkujjitaṁ vā ukkujjeyya, paṭicchannaṁ vā vivareyya, mūḷhassa vā maggaṁ ācikkheyya, andhakāre vā telapajjotaṁ dhāreyya ‘cakkhumanto rūpāni dakkhantī’ti; evamevaṁ bhotā gotamena anekapariyāyena dhammo pakāsito.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확실한 가르침을 다 들은 살라의 장자들이 감사와 찬탄을 드리는 대목으로 경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섭니다. 엎어진 것을 세우고 덮인 것을 열고 길을 가리키고 어둠에 등불을 비춘다는 네 가지 비유는 여러 경에서 똑같이 되풀이되는 관용구로, 처음에 믿을 스승이 없다고 고백했던 장자들이 이제 앞이 캄캄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스스로 보게 되었다는 것을 표현하며, 다음 구절에서 그 감사가 귀의의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누군가의 설명을 듣고 이제야 알겠다는 순간을 겪은 적이 있나요? 그 순간이 지금 나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요? 오늘 그 앎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빛이 되살아날 수 있어요.

‘저희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가르침과 수행자 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희를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소서.’

Ete mayaṁ bhavantaṁ gotamaṁ saraṇaṁ gacchāma dhammañca bhikkhusaṅghañca. Upāsake no bhavaṁ gotamo dhāretu ajjatagge pāṇupetaṁ saraṇaṁ gate”ti.

맛지마 니까야 MN 60 확실한 가르침경 (Apaṇṇakasutta)

배경

장자들이 세존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를 선언하며 경이 끝을 맺습니다. 믿을 만한 스승이 없다는 고백으로 시작된 경이, 다섯 가지 물음에서 손해 없는 자리를 배우고 네 부류의 사람과 점진적인 길까지 들은 뒤, 마침내 스스로 스승을 찾아 귀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이 경 전체가 처음의 빈자리를 채우는 하나의 긴 여정이었음이 이 마지막 문장에서 드러납니다.

묵상

오늘 대화에서 내가 새롭게 눈뜬 것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다음 걸음으로 이어 갈 수 있을까요? 거창한 다짐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하나만 떠올려 보면 오늘 하루가 어떻게 달라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