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들이여, 누구든지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고 많이 닦으면
그 안에 앎으로 이끄는 유익한 것들이 모두 담기나니,
마치 누구든지 마음으로 큰 바다를 떠올리면
그 안에 바다로 흘러드는 모든 시냇물이 담기는 것과 같으니라.
Yassa kassaci, bhikkhave, kāyagatāsati bhāvitā bahulīkatā, antogadhāvāssa kusalā dhammā ye keci vijjābhāgiyā. Seyyathāpi, bhikkhave, yassa kassaci mahāsamuddo cetasā phuṭo, antogadhāvāssa kunnadiyo yā kāci samuddaṅgamā; evameva kho, bhikkhave, yassa kassaci kāyagatāsati bhāvitā bahulīkatā, antogadhāvāssa kusalā dhammā ye keci vijjābhāgiyā.
맛지마 니까야 MN 119 몸에 대한 알아차림경 (Kāyagatāsatisutta) 배경
지금까지 살펴본 열 가지 수행법을 마친 뒤, 몸에 대한 알아차림 전체가 지니는 힘을 요약하는 대목입니다.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으면 그 안에 “앎으로 이끄는 유익한 것들”이 모두 담긴다고 하며, 이를 큰 바다에 비유합니다. 큰 바다를 마음에 떠올리면 그리로 흘러드는 모든 시냇물이 함께 떠올려지듯, 몸에 대한 알아차림 하나를 잘 닦으면 다른 여러 유익한 자질들이 저절로 그 안에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 여러 수행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다른 수행들을 담아내는 큰 그릇과 같음을 보여 줍니다.
묵상
한 가지를 꾸준히 챙기다 보니 다른 것들도 자연스레 따라왔던 경험이 있나요? 지금 몸에 대한 알아차림처럼, 하나만 붙들어도 여러 가지가 함께 따라올 수 있는 것이 내 삶에도 있을까요?
수행자들이여,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지 않고 많이 닦지 않으면
마라가 틈을 얻고 대상을 얻나니,
마치 어떤 사람이 무거운 돌덩이를 젖은 진흙 더미에 던지면
그 돌덩이가 진흙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지 않으면
마라가 틈을 얻고 대상을 얻느니라.
Yassa kassaci, bhikkhave, kāyagatāsati abhāvitā abahulīkatā, labhati tassa māro otāraṁ, labhati tassa māro ārammaṇaṁ.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garukaṁ silāguḷaṁ allamattikāpuñje pakkhipeyya.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api nu taṁ garukaṁ silāguḷaṁ allamattikāpuñje labhetha otāran”ti? “Evaṁ, bhante”. “Evameva kho, bhikkhave, yassa kassaci kāyagatāsati abhāvitā abahulīkatā, labhati tassa māro otāraṁ, labhati tassa māro ārammaṇaṁ.
맛지마 니까야 MN 119 몸에 대한 알아차림경 (Kāyagatāsatisutta) 배경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지 않았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세 가지 비유로 보여 주는 첫 번째 대목입니다. 무거운 돌덩이가 젖은 진흙 더미에 쉽게 파고들듯,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 없는 마음에는 마라, 곧 수행을 가로막는 힘이 쉽게 틈을 얻고 대상을 얻습니다. 세존께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물으시고 수행자들이 “그러합니다”라고 답하는 문답 형식은 뒤이은 두 비유(마른 나무의 불, 빈 물동이)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진흙이 무른 성질을 가리키듯, 여기서 무름은 마음이 알아차림 없이 쉽게 흔들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묵상
마음이 쉽게 흔들렸던 때를 떠올려 보면, 그때 몸이나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판단하지 않고 그저 그 차이만 가볍게 살펴볼 수 있을까요? 지금 답이 분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마치 마른 나무토막이 있어 어떤 사람이 마찰 막대를 가지고 와서
‘불을 피우고 열을 내리라’ 생각한다 하자.
‘그렇게 마찰 막대로 마른 나무토막을 비비면
불을 피우고 열을 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지 않으면
마라가 틈을 얻고 대상을 얻느니라.
Seyyathāpi, bhikkhave, sukkhaṁ kaṭṭhaṁ koḷāpaṁ; atha puriso āgaccheyya uttarāraṇiṁ ādāya: ‘aggiṁ abhinibbattessāmi, tejo pātukarissāmī’ti.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amuṁ sukkhaṁ kaṭṭhaṁ koḷāpaṁ uttarāraṇiṁ ādāya abhimanthento aggiṁ abhinibbatteyya, tejo pātukareyyā”ti? “Evaṁ, bhante”. “Evameva kho, bhikkhave, yassa kassaci kāyagatāsati abhāvitā abahulīkatā, labhati tassa māro otāraṁ, labhati tassa māro ārammaṇaṁ.
맛지마 니까야 MN 119 몸에 대한 알아차림경 (Kāyagatāsatisutta) 배경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지 않았을 때의 두 번째 비유입니다. 마른 나무토막은 마찰 막대로 비비면 쉽게 불이 붙습니다. 앞선 진흙의 비유가 무른 것에 쉽게 파고드는 모습이었다면, 이 비유는 마른 것에 쉽게 불이 붙는 모습으로 같은 뜻을 다시 보여 줍니다.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 없을 때 마음은 이 마른 나무처럼 자극에 쉽게 반응하고 휩쓸립니다. 수행자들이 “그렇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은 이 비유가 누구나 아는 당연한 사실임을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묵상
무언가에 쉽게 불이 붙듯 마음이 확 타올랐던 순간이 있었나요? 그 순간 몸의 감각으로 잠시 주의를 돌렸다면 무엇이 달라졌을지, 지금 가볍게 상상만 해 보아도 괜찮아요. 실제로 해내지 못했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마치 빈 물동이가 받침대 위에 놓여 있는데
어떤 사람이 물을 지고 와서 붓는다 하자.
‘그 사람이 물동이에 물을 부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지 않으면
마라가 틈을 얻고 대상을 얻느니라.
Seyyathāpi, bhikkhave, udakamaṇiko ritto tuccho ādhāre ṭhapito; atha puriso āgaccheyya udakabhāraṁ ādāya.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labhetha udakassa nikkhepanan”ti? “Evaṁ, bhante”. “Evameva kho, bhikkhave, yassa kassaci kāyagatāsati abhāvitā abahulīkatā, labhati tassa māro otāraṁ, labhati tassa māro ārammaṇaṁ.
맛지마 니까야 MN 119 몸에 대한 알아차림경 (Kāyagatāsatisutta) 배경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지 않았을 때의 세 번째 비유입니다. 빈 물동이에는 누구나 쉽게 물을 부을 수 있듯,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 없는 마음에는 무엇이든 쉽게 흘러들어 옵니다. 진흙에 파고드는 돌, 마른 나무에 붙는 불, 빈 그릇에 채워지는 물이라는 세 비유가 나란히 놓여, 알아차림 없는 마음이 얼마나 쉽게 틈을 내주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확인시켜 줍니다. 다음 대목부터는 이 세 비유가 정반대로 뒤집혀, 알아차림을 닦았을 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묵상
빈 그릇처럼 마음이 텅 비어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여지던 때가 있었나요? 지금 그 그릇에 알아차림이라는 것을 조금 담아 둔다면, 다음에는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한 번에 다 채우지 않아도 괜찮아요.
수행자들이여,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고 많이 닦으면
마라가 틈을 얻지 못하고 대상을 얻지 못하나니,
마치 어떤 사람이 가벼운 실뭉치를 온통 단단한 재질로 된
빗장 판자에 던진다 하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으면
마라가 틈을 얻지 못하고 대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Yassa kassaci, bhikkhave, kāyagatāsati bhāvitā bahulīkatā, na tassa labhati māro otāraṁ, na tassa labhati māro ārammaṇaṁ.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lahukaṁ suttaguḷaṁ sabbasāramaye aggaḷaphalake pakkhipeyya.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taṁ lahukaṁ suttaguḷaṁ sabbasāramaye aggaḷaphalake labhetha otāran”ti? “No hetaṁ, bhante”. “Evameva kho, bhikkhave, yassa kassaci kāyagatāsati bhāvitā bahulīkatā, na tassa labhati māro otāraṁ, na tassa labhati māro ārammaṇaṁ.
맛지마 니까야 MN 119 몸에 대한 알아차림경 (Kāyagatāsatisutta) 배경
이번에는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았을 때의 모습을 앞선 세 비유와 정반대로 보여 줍니다. 가벼운 실뭉치는 온통 단단한 나무로 된 빗장 판자에 부딪혀도 파고들지 못합니다. 앞서 무른 진흙에 쉽게 파고들던 돌의 비유와 짝을 이루어, 알아차림을 닦은 마음이 얼마나 단단하게 자극을 받아넘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수행자들이 “아닙니다”라고 답하는 것은 실뭉치가 단단한 판자를 뚫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묵상
무언가에 부딪혀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순간을 떠올려 볼 수 있나요? 그때 마음이 단단했던 것은 애써 버틴 것이었나요, 아니면 자연스럽게 그러했나요? 둘 다여도 괜찮고, 잘 모르겠어도 괜찮아요.
마치 물기 있는 생나무가 있어 어떤 사람이 마찰 막대를 가지고 와서
‘불을 피우고 열을 내리라’ 생각한다 하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물기 있는 생나무를 마른 땅에서
마찰 막대로 비벼서는 불을 피우고 열을 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으면
마라가 틈을 얻지 못하고 대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Seyyathāpi, bhikkhave, allaṁ kaṭṭhaṁ sasnehaṁ; atha puriso āgaccheyya uttarāraṇiṁ ādāya: ‘aggiṁ abhinibbattessāmi, tejo pātukarissāmī’ti.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amuṁ allaṁ kaṭṭhaṁ sasnehaṁ uttarāraṇiṁ ādāya abhimanthento aggiṁ abhinibbatteyya, tejo pātukareyyā”ti? “No hetaṁ, bhante”. “Evameva kho, bhikkhave, yassa kassaci kāyagatāsati bhāvitā bahulīkatā, na tassa labhati māro otāraṁ, na tassa labhati māro ārammaṇaṁ.
맛지마 니까야 MN 119 몸에 대한 알아차림경 (Kāyagatāsatisutta) 배경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았을 때의 두 번째 비유로, 앞서 마른 나무에 쉽게 불이 붙던 것과 짝을 이룹니다. 물기 있는 생나무는 아무리 마찰 막대로 비벼도 불이 붙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을 닦은 마음은 이 생나무처럼 자극이 와도 쉽게 타오르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라앉습니다. 마른 나무와 생나무라는 대조는 같은 자극이라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짐을 보여 줍니다.
묵상
쉽게 타오르지 않고 가라앉힐 수 있었던 감정이 있었나요? 그때 몸에 어떤 감각이 있었는지, 지금 천천히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그런 순간이 떠오르지 않아도 이 물음만 마음에 담아 두어도 좋아요.
마치 물동이가 가득 차서 까마귀도 마실 만큼
물이 넘실대며 받침대 위에 놓여 있는데
어떤 사람이 물을 지고 와서 붓는다 하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으면
마라가 틈을 얻지 못하고 대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Seyyathāpi, bhikkhave, udakamaṇiko pūro udakassa samatittiko kākapeyyo ādhāre ṭhapito; atha puriso āgaccheyya udakabhāraṁ ādāya.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labhetha udakassa nikkhepanan”ti? “No hetaṁ, bhante”. “Evameva kho, bhikkhave, yassa kassaci kāyagatāsati bhāvitā bahulīkatā, na tassa labhati māro otāraṁ, na tassa labhati māro ārammaṇaṁ.
맛지마 니까야 MN 119 몸에 대한 알아차림경 (Kāyagatāsatisutta) 배경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았을 때의 세 번째 비유로, 앞서 빈 물동이에 쉽게 물이 채워지던 것과 짝을 이룹니다. 이미 가득 찬 물동이에는 더 이상 물을 부을 수 없듯, 알아차림으로 이미 채워진 마음에는 새로운 것이 함부로 밀고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이로써 알아차림이 없을 때와 있을 때를 각각 세 비유로 대조해 보여 주는 여섯 개의 비유가 마무리되며, 다음 대목부터는 알아차림을 닦았을 때 실제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로 넘어갑니다.
묵상
이미 가득 차 있어서 더는 흔들리지 않았던 마음의 순간이 있었나요? 무엇이 그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지, 지금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지금은 텅 비어 있다고 느껴져도 괜찮아요.
수행자들이여,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고 많이 닦으면
곧바른 앎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을 기울이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증명할 힘을 얻나니,
마치 물동이가 가득 차서 까마귀도 마실 만큼 놓여 있을 때
힘센 사람이 어느 쪽으로 기울여도 물이 쏟아지듯,
이와 같이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으면
마음을 기울이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증명할 힘을 얻느니라.
Yassa kassaci, bhikkhave, kāyagatāsati bhāvitā bahulīkatā, so yassa yassa abhiññāsacchikaraṇīyassa dhammassa cittaṁ abhininnāmeti abhiññāsacchikiriyāya, tatra tatreva sakkhibhabbataṁ pāpuṇāti sati satiāyatane. Seyyathāpi, bhikkhave, udakamaṇiko pūro udakassa samatittiko kākapeyyo ādhāre ṭhapito. Tamenaṁ balavā puriso yato yato āviñcheyya, āgaccheyya udakan”ti? “Evaṁ, bhante”. “Evameva kho, bhikkhave, yassa kassaci kāyagatāsati bhāvitā bahulīkatā so, yassa yassa abhiññāsacchikaraṇīyassa dhammassa cittaṁ abhininnāmeti abhiññāsacchikiriyāya, tatra tatreva sakkhibhabbataṁ pāpuṇāti sati satiāyatane.
맛지마 니까야 MN 119 몸에 대한 알아차림경 (Kāyagatāsatisutta) 배경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았을 때 얻는 또 다른 힘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곧바른 앎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란 뒤에 나올 신통·천이·타심·숙명·천안·번뇌의 다함 같은 높은 앎들을 가리키며, 마음을 기울이는 곳마다 스스로 증명할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물이 가득 찬 물동이는 어느 쪽으로 기울여도 물이 쏟아지듯, 알아차림으로 가득 찬 마음은 어느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든 그 결과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힘을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득 찬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모습을 그립니다.
묵상
이미 준비되어 있어서 마음만 기울이면 되었던 일이 있었나요? 지금 당장 큰 힘을 낼 수 없어도 괜찮아요. 조금씩 채워 가는 과정 자체를 지켜볼 수 있을까요?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마치 평평한 땅 위에 네모난 연못이 있어
둑으로 둘러싸이고 까마귀도 마실 만큼 물이 가득한데
힘센 사람이 어느 쪽 둑을 터도 물이 쏟아지듯,
이와 같이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으면
마음을 기울이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증명할 힘을 얻느니라.
Seyyathāpi, bhikkhave, same bhūmibhāge caturassā pokkharaṇī assa āḷibandhā pūrā udakassa samatittikā kākapeyyā. Tamenaṁ balavā puriso yato yato āḷiṁ muñceyya āgaccheyya udakan”ti? “Evaṁ, bhante”. “Evameva kho, bhikkhave, yassa kassaci kāyagatāsati bhāvitā bahulīkatā, so yassa yassa abhiññāsacchikaraṇīyassa dhammassa cittaṁ abhininnāmeti abhiññāsacchikiriyāya, tatra tatreva sakkhibhabbataṁ pāpuṇāti sati satiāyatane.
맛지마 니까야 MN 119 몸에 대한 알아차림경 (Kāyagatāsatisutta) 배경
앞선 물동이의 비유에 이어, 이번에는 네모난 연못의 비유로 같은 뜻을 다시 보여 줍니다. 둑으로 둘러싸여 물이 가득 찬 연못은 어느 쪽 둑을 터도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물동이보다 더 큰 규모의 비유로 옮겨 가며, 알아차림으로 채워진 마음이 지닌 힘이 한 방향에 그치지 않고 어느 쪽으로도 열릴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힘을 새로 만들어 내라는 요구가 아니라, 이미 갖추어진 것이 여러 갈래로 흘러나올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묵상
여러 방향으로 열릴 수 있었던 가능성을 지금 하나라도 떠올려 볼 수 있나요? 아직 열어 보지 않은 방향이 있다면, 서두르지 않고 언제 열어 볼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지금 당장 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마치 좋은 땅 네거리에 준마가 매인 수레가
채찍을 꽂은 채 서 있는데
능숙한 조련사가 올라타 왼손에 고삐를,
오른손에 채찍을 쥐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몰고 돌아오듯,
이와 같이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으면
마음을 기울이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증명할 힘을 얻느니라.
Seyyathāpi, bhikkhave, subhūmiyaṁ catumahāpathe ājaññaratho yutto assa ṭhito odhastapatodo; tamenaṁ dakkho yoggācariyo assadammasārathi abhiruhitvā vāmena hatthena rasmiyo gahetvā dakkhiṇena hatthena patodaṁ gahetvā yenicchakaṁ yadicchakaṁ sāreyyāpi paccāsāreyyāpi; evameva kho, bhikkhave, yassa kassaci kāyagatāsati bhāvitā bahulīkatā, so yassa yassa abhiññāsacchikaraṇīyassa dhammassa cittaṁ abhininnāmeti abhiññāsacchikiriyāya, tatra tatreva sakkhibhabbataṁ pāpuṇāti sati satiāyatane.
맛지마 니까야 MN 119 몸에 대한 알아차림경 (Kāyagatāsatisutta) 배경
곧바른 앎을 다루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비유로, 준비된 수레와 능숙한 조련사를 듭니다. 준마가 매인 수레가 이미 갖추어져 있어도 그것을 원하는 대로 모는 것은 능숙한 조련사의 몫이듯, 알아차림으로 마음이 갖추어져 있어도 그것을 원하는 방향으로 쓰는 데는 익힘이 필요합니다. 물동이와 연못의 비유가 이미 채워진 상태 자체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 비유는 그것을 다루는 능숙함까지 함께 보여 줍니다. 이로써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 여는 힘에 대한 설명이 마무리되고, 다음 대목부터는 이 수행이 가져오는 열 가지 이익이 하나씩 이어집니다.
묵상
이미 갖추어진 것을 능숙하게 다루기까지, 무엇을 더 익혀야 했던 경험이 있나요? 지금 당장 능숙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조금씩 다루는 법을 익혀 가는 중이라고 여겨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