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지기들은 그를 다시 큰 지옥에 던져 넣느니라.
수행자들이여, 예전에 야마왕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느니라 -
‘세상에서 악한 행위를 짓는 이들은 이토록 다양한 형벌을 받는구나.
아, 나도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여래께서 세상에 나타나신다면.
내가 그 세존을 가까이 모시고, 가르침을 들어 알아들을 수 있다면.’
Tamenaṁ, bhikkhave, nirayapālā puna mahāniraye pakkhipanti. Bhūtapubbaṁ, bhikkhave, yamassa rañño etadahosi: ‘ye kira, bho, loke pāpakāni akusalāni kammāni karonti te evarūpā vividhā kammakāraṇā karīyanti. Aho vatāhaṁ manussattaṁ labheyyaṁ. Tathāgato ca loke uppajjeyya arahaṁ sammāsambuddho. Tañcāhaṁ bhagavantaṁ payirupāseyyaṁ. So ca me bhagavā dhammaṁ deseyya. Tassa cāhaṁ bhagavato dhammaṁ ājāneyyan’ti.
맛지마 니까야 MN 130 천사경 (Devadūtasutta) 배경
길게 이어진 지옥의 형벌들이 큰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뜻밖에도 이 모든 형벌을 관장하던 야마왕 자신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그는 이런 형벌을 보면서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도 인간으로 태어나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듣고 싶다는 소망을 품습니다. 심판자인 야마왕조차 이런 바람을 품는다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귀한 기회인지를 거꾸로 비추어 보여 줍니다.
묵상
지금 가르침이나 좋은 말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야마왕조차 부러워할 만한 기회라면 어떻게 느껴지나요? 오늘 우연히 들은 말 한마디가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그 말을 다시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수행자들이여, 나는 이것을 다른 수행자나 바라문에게서 들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내가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달은 것만을 말하느니라.
Taṁ kho panāhaṁ, bhikkhave, nāññassa samaṇassa vā brāhmaṇassa vā sutvā vadāmi, api ca yadeva sāmaṁ ñātaṁ sāmaṁ diṭṭhaṁ sāmaṁ viditaṁ tadevāhaṁ vadāmī”ti.
맛지마 니까야 MN 130 천사경 (Devadūtasutta) 배경
지금까지 들려준 이야기 전체에 대해 세존께서 그 출처를 직접 밝히는 대목입니다. 태어남부터 지옥의 형벌, 야마왕의 속마음까지 이르는 이 길고 상세한 이야기가 전해 들은 소문이나 다른 종교인의 가르침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세존 자신이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달은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 이는 이 이야기 전체의 무게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해 주는 문장입니다.
묵상
누군가에게 들은 말과 내가 직접 겪어 안 것은 무게가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지금 내가 스스로 겪어서 알게 된 것 가운데, 남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것을 누구에게 전하고 싶나요?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뒤, 스승께서는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느니라 -
‘천사들에게 일깨워졌으나 방일한 이들은,
오랫동안 슬퍼하리니, 고달픈 처지로 가는 사람들이니라.
그러나 천사들에게 일깨워져, 여기서 고요하고 참된 사람들은,
결코 성스러운 이치에 방일하지 않느니라.’
Idamavoca bhagavā. Idaṁ vatvāna sugato athāparaṁ etadavoca satthā: “Coditā devadūtehi, ye pamajjanti māṇavā; Te dīgharattaṁ socanti, hīnakāyūpagā narā. Ye ca kho devadūtehi, santo sappurisā idha; Coditā nappamajjanti, ariyadhamme kudācanaṁ.
맛지마 니까야 MN 130 천사경 (Devadūtasutta) 배경
산문으로 된 긴 이야기를 마친 뒤, 세존께서 게송으로 그 뜻을 요약하는 대목입니다. 앞서 다룬 다섯 천사(태어남·늙음·병듦·벌·죽음)를 이 게송은 짧게 "천사들"로 되짚으며, 그것에 일깨워지고도 방일한 이와 방일하지 않는 이, 이 둘을 대비합니다. "오랫동안 슬퍼한다"는 표현은 지옥의 형벌을 다시 묘사하지 않고도 그 결과를 압축해 전하며, 방일하지 않는 이들은 "고요하고 참된 사람(santo sappurisā)"이라 불립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결국 이 두 갈래 길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음이 여기서 정리됩니다.
묵상
지금 나에게 온 신호를 알아채고 방일하지 않기로 한다면, 오늘 무엇을 다르게 해 볼 수 있을까요? 거창한 결심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아주 작은 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지금 떠오르는 그 하나는 무엇인가요?
‘붙듦 속에서 두려움을 보고, 태어남과 죽음이 생겨나는 것을 보아,
붙들지 않아 해탈하나니, 태어남과 죽음이 다하는 데서이니라.
그들은 안온함에 이르러 행복하며, 지금 여기서 완전히 고요해지느니라.
모든 원한과 두려움을 넘어서고, 모든 괴로움을 벗어났느니라.’
Upādāne bhayaṁ disvā, jātimaraṇasambhave; Anupādā vimuccanti, jātimaraṇasaṅkhaye. Te khemappattā sukhino, diṭṭhadhammābhinibbutā; Sabbaverabhayātītā, sabbadukkhaṁ upaccagun”ti.
맛지마 니까야 MN 130 천사경 (Devadūtasutta) 배경
긴 이야기 전체를 마무리하는 게송의 결론부입니다. 앞서 방일하지 않는 이들을 말한 데 이어, 이제 그들이 어떻게 벗어나는지를 밝힙니다. "붙듦(upādāna)" 속에서 두려움을 본다는 것은 태어남과 죽음이 되풀이되는 원인이 다름 아닌 붙듦에 있음을 본다는 뜻이며, 그 붙들지 않음이 곧 해탈로 이어집니다. 마지막 구절 "지금 여기서 완전히 고요해진다(diṭṭhadhammābhinibbutā)"는 표현은 이 평온이 죽은 뒤에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묵상
지금 붙들고 있는 것에서 두려움의 뿌리를 본 적이 있나요? 완전히 놓아야 한다는 부담 없이, 오늘은 그 붙듦을 그저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지금 이 순간에도 고요함이 가능하다는 말이 위안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