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도 말을 아끼는 현자

알면서 알맞게 많이 말하는 이와, 알면서 스스로를 다스려 말을 아끼는 이를 함께 말합니다.

“길을 닦는 이(사마나)가 많이 말할 때 그 말은 알맞고 뜻에 닿아 있다. 그는 알고서 가르침을 펴고, 알고서 많이 말한다. 알면서도 스스로를 다스려 알면서도 많이 말하지 않는 이, 그 현자(무니)는 현자의 길(모네이야)에 걸맞고, 그 현자는 현자의 길에 이르렀다.”

Yaṁ samaṇo bahuṁ bhāsati, Upetaṁ atthasañhitaṁ; Jānaṁ so dhammaṁ deseti, Jānaṁ so bahu bhāsati. Yo ca jānaṁ saṁyatatto, Jānaṁ na bahu bhāsati; Sa munī monamarahati, Sa munī monamajjhagā”ti.

숫따니빠따 Snp 3.11 날라까 숫따

배경

물의 비유 바로 뒤에 놓인 두 게송이 균형을 잡습니다. 첫 게송은 길을 닦는 이가 많이 말하더라도 그 말이 알맞고 뜻에 닿아 있다면, 그것은 알고서 가르침을 펴는 일이라고 인정합니다. 둘째 게송은 알면서도 스스로를 다스려 많이 말하지 않는 이를 현자의 길에 이른 이로 꼽습니다. 앞의 비유를 말하지 말라는 명령으로만 읽으면 첫 게송과 부딪치므로, 두 게송을 함께 읽습니다. 두 게송에 되풀이되는 ‘알고서(jānaṁ)’가 기준이고, 잣대는 말의 양보다 앎과 스스로 다스림입니다. ‘길을 닦는 이’를 번역자(수자또)는 부처님으로 옮기지만 원문은 이름을 대지 않습니다. 경은 현자의 길에 이르렀다는 말로 날라까의 물음에 답하며 닫히고, 끝줄은 경을 엮은 이가 붙인 차례 표시입니다.

묵상

말을 많이 한 날과 말을 아낀 날, 오늘은 어느 쪽에 가까웠나요? 말을 한 뒤에 마음이 가벼웠는지 무거웠는지만 돌아볼 수 있을까요? 오늘 있었던 대화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건너뛰어도 괜찮아요. 어느 쪽이든 잘하고 못한 것을 가리지 않아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