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까 숫따

Nālakasutta

숫따니빠따 Snp 3.11

아시따 선인이 갓난 고따마의 앞날을 내다보고 울고, 훗날 조카 날라까가 부처님께 현자의 길을 묻는 경.

인용된 가르침 22구절

이 경을 22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신들의 잔치를 본 선인 1구절

낮 동안 머물던 선인이 하늘의 신들이 천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을 봅니다.

서른 신의 무리가 기쁨에 차 즐거워하고, 신들의 왕 삭까와 깨끗한 옷을 입은 신들이 천을 들고 한껏 기리는 것을 아시따 선인(이시)이 낮 동안 머물던 곳에서 보았다. 마음이 기쁘고 들뜬 신들을 보고, 공경을 표한 뒤 그곳에서 이렇게 말했다.

Ānandajāte tidasagaṇe patīte, Sakkañca indaṁ sucivasane ca deve; Dussaṁ gahetvā atiriva thomayante, Asito isi addasa divāvihāre. Disvāna deve muditamane udagge, Cittiṁ karitvāna idamavoca tattha;

숫따니빠따 Snp 3.11 날라까 숫따

배경

경은 선인의 눈으로 하늘의 잔치를 보며 시작합니다. 아시따 선인(이시)이 낮 동안 머물던 곳에서, 서른 신의 무리와 신들의 왕 삭까가 천을 들고 한껏 기뻐하는 모습을 봅니다. 사전은 ‘서른(tidasa)’을 서른셋 신들의 하늘을 시에서 줄여 부르는 이름으로 풉니다. 이 대목은 기쁨의 까닭을 아직 말하지 않고, 아시따가 입을 여는 데서 멈춥니다. 까닭은 다음 대목에서 신들이 직접 답합니다. 머리 게송은 하늘 전체의 기쁨에서 출발해 한 아기의 탄생으로 좁혀 들어가고, 이 기쁨의 크기가 뒤에 나올 아시따의 눈물과 맞섭니다. 번역자 주석은 아시따라는 이름이 ‘검은 이’를 뜻한다고 풉니다.

묵상

아시따는 신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먼저 보고, 까닭은 아직 몰라요. 요즘 주변의 누군가가 들떠 있거나 가라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까닭을 곧바로 짐작하지 않고 ‘무슨 일일까’ 하고 궁금해하는 데서 멈춰 볼 수 있을까요?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면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2 소름 돋는 기쁨의 까닭 1구절

아시따가 신들에게 그토록 기뻐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신들의 무리는 어찌하여 이토록 한껏 밝은 모습입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천을 들고 즐거워합니까? 아수라들과 싸움이 벌어져 신들이 이기고 아수라들이 졌던 그때에도 이처럼 소름 돋는 일은 없었습니다. 어떤 놀라운 일을 보았기에 신들이 이토록 기뻐합니까? 환성을 지르고 노래하고 악기를 타며 팔을 치고 춤을 춥니다. 메루 산 꼭대기에 사는 분들께 묻습니다. 여러분, 어서 제 의심을 떨쳐 주십시오.”

“Kiṁ devasaṅgho atiriva kalyarūpo, Dussaṁ gahetvā ramayatha kiṁ paṭicca. Yadāpi āsī asurehi saṅgamo, Jayo surānaṁ asurā parājitā; Tadāpi netādiso lomahaṁsano, Kimabbhutaṁ daṭṭhu marū pamoditā. Seḷenti gāyanti ca vādayanti ca, Bhujāni phoṭenti ca naccayanti ca; Pucchāmi vohaṁ merumuddhavāsine, Dhunātha me saṁsayaṁ khippa mārisā”.

숫따니빠따 Snp 3.11 날라까 숫따

배경

아시따의 물음은 세 게송에 걸칩니다. 먼저 신들이 왜 이토록 밝은 모습이냐고 묻고, 이어 아수라와의 싸움에서 이겼을 때조차 이런 일은 없었다고 견주며, 끝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늘어놓은 뒤 의심을 풀어 달라고 청합니다. 아수라는 신들과 맞서 싸우는 무리로, 니까야의 다른 경들에도 신들과 아수라의 싸움 이야기가 나옵니다. 논리의 중심은 견줌입니다. 신들이 크게 기뻐했을 승리보다 지금의 일이 더 크다는 것을 물음 안에서 먼저 세웁니다. ‘소름 돋는(lomahaṁsana)’이라는 낱말이 그 크기를 몸의 반응으로 보여 줍니다. 아시따는 짐작하지 않고 묻고, 그 물음이 다음 게송에서 탄생의 소식을 끌어냅니다.

묵상

큰 기쁨 앞에서 아시따는 의심을 숨기지 않고 물어요. 최근에 모르는 채로 두기보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일이 있었나요? 아직 묻지 못했다면 무엇이 그 물음을 막고 있는지 한번 살펴볼 수 있을까요? 모르겠다면 모르겠다는 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3 태어난 아기가 준 기쁨 1구절

신들은 이로움과 행복을 위해 사람의 세상에 태어난 아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답합니다.

“깨달음을 이룰 이(보디삿따), 견줄 데 없는 으뜸가는 보배가 사람의 세상에 이로움과 행복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사꺄족의 마을, 룸비니 지방에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며 한껏 밝은 모습입니다. 그분은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높은 으뜸가는 사람,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이며 모든 생명 가운데 가장 높습니다. 선인(이시)이라 불리는 숲에서 바퀴를 굴릴 것입니다. 짐승들을 누르는 힘센 사자가 포효하듯이.”

“So bodhisatto ratanavaro atulyo, Manussaloke hitasukhatthāya jāto; Sakyāna gāme janapade lumbineyye, Tenamha tuṭṭhā atiriva kalyarūpā. So sabbasattuttamo aggapuggalo, Narāsabho sabbapajānamuttamo; Vattessati cakkamisivhaye vane, Nadaṁva sīho balavā migābhibh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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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신들이 아시따의 물음에 답합니다. 첫 게송은 기쁨의 까닭을, 둘째 게송은 그 아기가 앞으로 할 일을 말합니다. 깨달음을 이룰 이(보디삿따)가 사람의 세상에 이로움과 행복을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 신들이 기뻐하는 이유이며, 태어난 곳은 사꺄족의 룸비니입니다. 보디삿따는 여기서 깨닫기 전의 고따마를 가리킵니다. ‘바퀴를 굴린다’는 말은 여기서 풀이 없이 나오고, 뒤에서 아시따가 ‘가르침의 바퀴’라고 밝힙니다. 이 경은 ‘선인이라 불리는 숲’의 이름을 따로 밝히지 않습니다. 다른 경(SN 56.11)이 첫 가르침을 편 곳을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로 전하므로 흔히 그곳으로 읽습니다. 사자의 포효는 두려움 없이 힘 있게 말하는 모습의 비유입니다.

묵상

‘사람의 세상에 이로움과 행복을 위해 태어났다’는 말을 읽고 나서 마음에 먼저 떠오른 것은 무엇인가요? 누군가의 이로움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말이 낯설거나 멀게 느껴지면 그 느낌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그런 느낌이 어디에서 오는지 잠시 살펴볼 수 있을까요?

4 아기를 보러 간 선인 1구절

아시따가 숫도다나의 집을 찾아 사꺄족이 보여 준 아기를 봅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는 서둘러 내려와 그때 숫도다나의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 앉아 사꺄족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어디 있습니까? 나도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사꺄족은 타오르는 황금 같고, 솜씨 좋은 이가 화덕 어귀에서 다듬어 낸 듯, 영광으로 눈부시며 비길 데 없는 빛깔을 지닌 아들을 아시따라 불리는 이에게 보여 주었다.

Taṁ saddaṁ sutvā turitamavasarī so, Suddhodanassa tada bhavanaṁ upāvisi; Nisajja tattha idamavocāsi sakye, “Kuhiṁ kumāro ahamapi daṭṭhukāmo”. Tato kumāraṁ jalitamiva suvaṇṇaṁ, Ukkāmukheva sukusalasampahaṭṭhaṁ; Daddallamānaṁ siriyā anomavaṇṇaṁ, Dassesu puttaṁ asitavhayassa saky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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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신들의 대답을 들은 아시따가 곧바로 움직입니다. 서둘러 내려와 숫도다나의 집을 찾아 아이를 보고 싶다고 청하고, 사꺄족은 아이를 내어 보입니다. 원문은 이 부분을 짧은 동작으로 이어 아이를 소개합니다. 번역자 주석은 이 경이 왕의 궁전(pāsāda) 대신 소박한 말인 집(bhavana)을 쓰고, 왕실을 드러내는 말이 거의 없다고 짚습니다. 아이의 모습은 불에 달구어 다듬은 황금의 비유로 그려집니다. 이 비유는 아이가 눈부시게 보였다는 것을 전할 뿐, 아이가 어떤 이가 될지는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그 판단은 아시따가 아이를 품에 안은 뒤에 나옵니다. 아시따가 사꺄족에게 건네는 말은 높임말로 옮겼습니다.

묵상

아시따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아이를 보러 갔어요. 요즘 마음이 먼저 향하는데도 미뤄 둔 만남이나 일이 있나요? 있다면 무엇이 걸음을 붙잡고 있는지 한 가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지금 움직이고 싶지 않다면 그 마음도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5 눈부신 아기와 보이지 않는 손 1구절

아기의 빛과 허공에 받쳐 든 양산을 보며 아시따가 큰 기쁨을 얻습니다.

아이가 불꽃처럼 타오르고, 하늘을 가는 별들의 으뜸처럼 맑고, 비 그친 철, 구름을 벗어나 빛나는 해와 같은 것을 보고 기쁨이 솟아 큰 희열을 얻었다. 살이 많고 천 개의 테를 두른 양산을 신들이 허공에 받쳐 들었고, 황금 자루의 야크 꼬리 부채가 오가며 흔들렸으나 부채와 양산을 든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Disvā kumāraṁ sikhimiva pajjalantaṁ, Tārāsabhaṁva nabhasigamaṁ visuddhaṁ; Suriyaṁ tapantaṁ saradarivabbhamuttaṁ, Ānandajāto vipulamalattha pītiṁ. Anekasākhañca sahassamaṇḍalaṁ, Chattaṁ marū dhārayumantalikkhe; Suvaṇṇadaṇḍā vītipatanti cāmarā, Na dissare cāmarachattagāhak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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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아이를 본 아시따의 기쁨과, 그 둘레의 하늘 모습을 함께 그린 두 게송입니다. 아이는 불꽃, 별들의 으뜸, 해의 세 비유로 그려지고 모두 밝음과 맑음을 말합니다. ‘별들의 으뜸(tārāsabha)’은 달을 가리키는 말로 읽히며, 영어 번역도 달로 옮깁니다. ‘비 그친 철’로 옮긴 ‘사라다(sarada)’를 보디·노먼은 ‘가을’로 옮기지만, 번역자 주석(수자또)은 비가 그친 뒤의 맑은 철이라고 풉니다. 둘째 게송의 양산과 야크 꼬리 부채는 높은 이를 모실 때 쓰는 물건입니다. 원문은 신들이 받쳐 들었고 든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고 말해, 하늘이 이 아이를 받드는 장면을 만듭니다. 이 기쁨은 다음 장면에서 눈물로 바뀝니다.

묵상

눈부신 아이를 보고 아시따는 기쁨이 솟았다고 해요. 요즘 눈에 들어와 마음을 환하게 한 작은 장면이 있었나요? 떠오르는 장면이 없다면 오늘 하루 가운데 조금 가벼웠던 순간 하나를 찾아볼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도 그대로 괜찮아요.

6 아기를 안은 선인의 외침 1구절

아시따가 아기를 받아 안고 두 발 가진 이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소리 높여 말합니다.

엉킨 머리를 틀어 올린 깐하시리라는 선인(이시)이 옅은 빛 담요 위의 황금 장신구 같은 아이를, 머리 위에 흰 양산이 받쳐진 아이를 보고 마음이 들뜨고 흐뭇하여 받아 안았다. 사꺄족의 으뜸인 아이를 받아 안고, 몸의 표식과 신성한 구절(만따)에 통달한, 알고자 하는 그는 맑은 마음으로 소리 높여 말했다. “이분은 더없이 높다. 두 발 가진 이들 가운데 으뜸이다.”

Disvā jaṭī kaṇhasirivhayo isi, Suvaṇṇanikkhaṁ viya paṇḍukambale; Setañca chattaṁ dhariyanta muddhani, Udaggacitto sumano paṭiggahe. Paṭiggahetvā pana sakyapuṅgavaṁ, Jigīsako lakkhaṇamantapāragū; Pasannacitto giramabbhudīrayi, “Anuttarāyaṁ dvipadānamutt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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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아시따가 아이를 품에 안고 첫 판단을 입 밖에 냅니다. 깐하시리(검은 빛남)라는 이름은 아시따(검은 이)와 뜻이 통하고 장면이 끊김 없이 이어지므로, 같은 선인을 달리 부른 이름으로 읽힙니다. ‘몸의 표식(lakkhaṇa)’과 ‘신성한 구절(manta)’에 통달했다는 설명은 그가 아이의 표식을 읽을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신성한 구절은 브라흐마나들이 외워 전하던 구절이고, 몸의 표식으로 사람의 앞날을 읽는 일도 그 전통의 학문이었습니다. 이 배경은 경 밖의 설명입니다. 번역자 주석은 다른 경(DN 14)에서도 깨닫기 전의 위빳시를 브라흐마나들이 살핀다고 짚습니다. 아시따가 외친 “두 발 가진 이들 가운데 으뜸”은 앞서 신들이 한 평가를 사람의 입으로 다시 확인하는 대목입니다.

묵상

아시따는 아이를 안자마자 ‘으뜸’이라고 소리 높여 말했어요. 누군가를 처음 만나 마음에 와닿았던 순간이 있나요? 그때 바로 말로 꺼냈는지, 마음에만 두었는지를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떠오르는 장면이 없다면 이 물음은 건너뛰어도 괜찮아요.

7 기쁨 속의 눈물 1구절

아시따가 자신이 떠나갈 일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자 사꺄족이 아이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그러다 자신이 떠나갈 일을 떠올리며 기운을 잃고 눈물을 흘렸다. 우는 선인(이시)을 보고 사꺄족이 말했다. “설마 아이에게 무슨 위험이 닥치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Athattano gamanamanussaranto, Akalyarūpo gaḷayati assukāni; Disvāna sakyā isimavocuṁ rudantaṁ, “No ce kumāre bhavissati antarā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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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한가운데서 장면이 바뀝니다. 같은 아시따가 눈물을 흘리고, 사꺄족은 그 눈물을 아이에게 닥칠 불길한 일의 표시로 읽습니다. ‘기운을 잃은(akalyarūpa)’이라는 낱말은 신들이 ‘한껏 밝은 모습(kalyarūpa)’이던 첫 물음과 짝을 이룹니다. ‘자신이 떠나갈 일(gamana)’은 이 게송에서 풀리지 않고, 뒤에서 아시따가 그 전에 자신이 죽는다고 말할 때 죽음을 가리켰음이 드러납니다. 원문은 눈물의 까닭을 미뤄 두고 사꺄족의 짐작부터 들려줍니다. 같은 눈물을 두고 보는 이마다 다르게 읽는 장면이며, 이어지는 아시따의 대답이 그 짐작을 바로잡습니다.

묵상

기쁜 자리에서 갑자기 눈물이 나는 일이 있어요. 그런 순간에 곁의 사람은 까닭을 짐작해서 걱정하기도 하죠. 요즘 말로 풀지 못한 눈물이나 한숨이 있었나요? 까닭을 모르겠다면 모르는 대로,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은 채로 두어도 괜찮아요.

8 이 아이는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1구절

아시따가 사꺄족을 안심시키고 아이가 가르침의 바퀴를 굴릴 것이라 예언합니다.

선인(이시)은 낙심한 사꺄족을 보고 말했다. “나는 이 아이에게 해로운 일이 있으리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 아이에게 위험이 닥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아이는 하찮은 이가 아니니, 마음을 밝게 가지십시오. 이 아이는 온전한 깨달음의 꼭대기에 닿을 것입니다. 지극히 맑게 보는 그는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위해 가엾이 여기며 가르침(담마)의 바퀴를 굴릴 것입니다. 그의 거룩한 삶(브라흐마짜리야)은 널리 퍼질 것입니다.”

Disvāna sakye isimavoca akalye, “Nāhaṁ kumāre ahitamanussarāmi; Na cāpimassa bhavissati antarāyo, Na orakāyaṁ adhimānasā bhavātha. Sambodhiyaggaṁ phusissatāyaṁ kumāro, So dhammacakkaṁ paramavisuddhadassī; Vattessatāyaṁ bahujanahitānukampī, Vitthārikassa bhavissati brahmacariy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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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따가 사꺄족의 걱정에 답합니다. 첫 게송은 아이에게 해로운 일이 없으리라는 말이고, 둘째 게송은 아이가 장차 할 일의 예언입니다. 앞서 신들이 ‘바퀴를 굴린다’고만 한 말이 여기서 ‘가르침(담마)의 바퀴’로 풀립니다. 거룩한 삶(브라흐마짜리야)은 그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삶의 길입니다. 첫 게송 마지막 줄의 ‘na orakāyaṁ’은 ‘orako ayaṁ(이 아이는 하찮은 이)’이 붙은 꼴로 읽었습니다. 같은 경의 ‘anuttarāyaṁ(anuttaro ayaṁ)’, ‘phusissatāyaṁ(phusissati ayaṁ)’도 같은 짜임입니다. 영어 번역은 이 줄을 ‘조금도 걱정 말고 마음을 놓으라’로 옮겨 풀이가 갈립니다. 예언의 끝은 많은 사람의 이로움과 널리 퍼질 삶의 길입니다.

묵상

아시따는 낙심한 사꺄족에게 마음을 밝게 가지라고 말해요. 요즘 걱정을 내려놓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나만 잠시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그 일을 떠올릴 때 몸에서 먼저 굳는 곳이 있는지 살펴보고, 아무 느낌이 없다면 없다는 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9 듣지 못할 가르침을 아쉬워하다 1구절

아시따가 눈물의 까닭을 밝힙니다. 아이가 펼 가르침을 듣지 못하고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남은 내 목숨은 길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나는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견줄 데 없는 짐을 진 분의 가르침을 나는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괴롭고, 불행에 빠져 아파합니다.”

Mamañca āyu na ciramidhāvaseso, Athantarā me bhavissati kālakiriyā; Sohaṁ na sossaṁ asamadhurassa dhammaṁ, Tenamhi aṭṭo byasanaṅgato aghāv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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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까닭이 아시따의 입으로 밝혀집니다. 아이가 깨달음을 이루어 가르침을 펼 때까지 자신의 목숨이 이어지지 않으니, 그 가르침을 듣지 못하리라는 슬픔입니다. ‘견줄 데 없는 짐을 진 분(asamadhura)’은 번역자 주석에 따르면 길을 처음 닦는 이로서 누구보다 큰 짐을 진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같은 말이 바로 다음 게송에서 다시 나옵니다. ‘그래서(tena)’라는 말이 괴로움의 까닭을 앞의 세 줄, 곧 남은 목숨이 짧아 그 가르침을 듣지 못한다는 사실에 묶습니다. 아이의 안위를 걱정한 사꺄족의 짐작과는 다른 까닭입니다. 경은 이 슬픔을 줄이거나 나무라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둡니다.

묵상

듣고 싶었던 말을 끝내 듣지 못하게 되는 일은 누구에게나 아플 수 있어요. 아시따처럼 아쉬움이 남은 일이 떠오르나요? 지금 그 마음을 달래려 하지 않고, 아쉬운 채로 있다는 것만 알아차려도 괜찮을까요? 떠오르는 것이 없으면 건너뛰어도 좋아요.

10 조카에게 남긴 말 1구절

아시따가 조카 날라까에게 붓다라는 소리를 들으면 가서 묻고 따르라고 일러 둡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그는 사꺄족에게 큰 기쁨을 안겨 준 뒤 궁의 안채를 나섰다. 그는 조카를 몸소 가엾이 여겨 견줄 데 없는 짐을 진 분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일렀다. “‘붓다’라는 소리를 다른 이에게서 듣거든, 온전한 깨달음에 이르러 가르침의 길을 열어 보이는 이라 하거든, 그곳에 가서 그의 가르침을 자세히 여쭙고 그 부처님 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라.”

So sākiyānaṁ vipulaṁ janetvā pītiṁ, Antepuramhā niggamā brahmacārī; So bhāgineyyaṁ sayaṁ anukampamāno, Samādapesi asamadhurassa dhamme. “Buddhoti ghosaṁ yada parato suṇāsi, Sambodhipatto vivarati dhammamaggaṁ; Gantvāna tattha samayaṁ paripucchamāno, Carassu tasmiṁ bhagavati brahmacariy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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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게송이 아시따에게서 조카 날라까로 넘어가는 대목입니다. 첫 게송은 아시따가 궁을 떠나며 조카에게 그 가르침을 따르라고 일러 두는 서술이고, 둘째 게송은 조카에게 한 말을 그대로 옮깁니다. 날라까는 붓다의 출현을 다른 이의 입을 통해(parato) 먼저 듣게 됩니다. 둘째 줄을 번역자 주석은 ‘붓다(깨달은 이)’라는 말의 짧은 정의로 읽습니다. 셋째 줄의 ‘사마야(samaya)’는 ‘가르침·주장’이라는 사전 풀이를 따라 옮겼고, 보디·노먼의 영어 번역도 같습니다. 번역자 주석(수자또)은 이것을 ‘깨달음의 체득(abhisamaya)’을 줄인 말로 봅니다. 아시따가 조카에게 맡긴 일은 소식을 들으면 찾아가 묻고, 그 곁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묵상

아시따는 조카에게 소식을 들으면 직접 가서 물어보라고 일렀어요. 최근에 남에게서 전해 들은 말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던 적이 있나요? 지금은 확인할 힘이 없다면 그냥 두고 쉬어도 괜찮은지, 스스로에게 한 번 조용히 물어볼 수 있을까요? 모르겠다면 그대로 두어도 돼요.

11 기다림 끝의 물음 1구절

날라까가 아시따의 가르침을 따라 기다리다 승리자를 찾아가 믿음을 내고 묻습니다.

뜻이 이롭고 한결같은 그분, 앞날을 지극히 맑게 보는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은 날라까는 좋은 일을 많이 쌓아 온 이로서 감각 기능을 지키며 승리자를 기다리며 지냈다. 으뜸가는 승리자가 바퀴를 굴린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선인(이시)들의 우두머리를 보고 맑은 믿음을 냈다. 아시따라 불린 이가 일러 둔 가르침이 이루어진 때에 가장 뛰어난 현자(무니)에게 현자의 길(모네이야) 가운데 으뜸을 물었다. 머리 게송이 끝났다.

Tenānusiṭṭho hitamanena tādinā, Anāgate paramavisuddhadassinā; So nālako upacitapuññasañcayo, Jinaṁ patikkhaṁ parivasi rakkhitindriyo. Sutvāna ghosaṁ jinavaracakkavattane, Gantvāna disvā isinisabhaṁ pasanno; Moneyyaseṭṭhaṁ munipavaraṁ apucchi, Samāgate asitāvhayassa sāsaneti. Vatthugāthā niṭṭhi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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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게송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첫 게송에서 날라까는 아시따의 가르침을 받고 감각 기능을 지키며 기다리고, 둘째 게송에서 승리자(지나)가 바퀴를 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믿음을 내어 묻습니다. ‘현자(muni)’는 이 경이 그리는 사람이고, ‘현자의 길(moneyya)’은 현자다움을 가리키며 뒤의 문답 전체가 이것을 풉니다. 번역자 주석은 ‘앞날을 지극히 맑게 보는’이라는 꾸밈말이 앞에서는 아이를, 여기서는 아시따를 꾸민다고 짚습니다. 둘째 게송 마지막 줄 ‘samāgate … sāsane’는 ‘가르침이 이루어진 때에’로 읽어, 아시따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이어지는 문답의 첫마디와 이었습니다. 영어 번역은 ‘가르침의 때가 왔다’로 옮깁니다. 끝줄은 경을 엮은 이가 붙인 표시로, 머리 게송과 문답을 나눕니다.

묵상

날라까는 기다리며 감각을 지켰다고 해요. 기다림이 길어질 때 마음이 어디로 먼저 흩어지는지 알아차린 적이 있나요? 지금 기다리고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시간에 하고 있는 작은 행동 하나만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떠오르지 않으면 그대로 괜찮아요.

12 현자의 길을 묻다 1구절

날라까가 아시따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고 부처님께 현자의 길을 묻습니다.

“아시따의 이 말이 사실 그대로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고따마 님, 모든 것의 저편에 이르신 분께 여쭙니다. 집 없는 삶에 들어 음식을 얻으러 다니며 살기를 바라는 이에게, 현자(무니)시여, 제 물음에 답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현자의 길(모네이야), 그 으뜸가는 경지를.”

“Aññātametaṁ vacanaṁ, Asitassa yathātathaṁ; Taṁ taṁ gotama pucchāmi, Sabbadhammāna pāraguṁ. Anagāriyupetassa, Bhikkhācariyaṁ jigīsato; Muni pabrūhi me puṭṭho, Moneyyaṁ uttamaṁ pad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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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이 열립니다. 날라까의 첫마디는 아시따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았다는 확인이고, 이어 부처님께 물음을 올립니다. ‘모든 것의 저편에 이르신 분(sabbadhammāna pāragu)’은 부처님을 부르는 말입니다. 물음은 집 없는 삶에 들어 음식을 얻으러 다니며 살고자 하는 이에게 필요한 ‘현자의 길’, 그 으뜸가는 경지(pada)입니다. 주석서와 보디 번역은 이 ‘pada’를 수행의 길(paṭipadā)로 풀지만, 번역자 주석(수자또)은 경 끝에서 말하는 현자의 경지와 이어진다고 봅니다. 여기서는 낱말 그대로 ‘경지’로 옮겼습니다. 대답은 마을에서의 몸가짐에서 시작해 마지막에 그 경지를 말하므로, 물음과 대답의 처음과 끝이 맞물립니다.

묵상

날라까는 자기가 어떤 삶을 바라는지 밝히고 나서 물었어요. 지금 마음에 품은 물음이 있다면 그것을 한 문장으로 적어 볼 수 있을까요? 아직 문장이 되지 않는다면 모르겠다는 상태 그대로 두는 것도 하나의 답이에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13 욕을 듣든 절을 받든 같은 마음으로 1구절

마을에서 욕을 듣든 절을 받든 똑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마음이 성내어 어지러워지지 않도록 지키라고 일러 줍니다.

“현자의 길(모네이야)을 그대에게 일러 주겠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해내기 어렵고 이루기 힘든 길이다. 자, 그대에게 설명하겠다. 마음을 다잡아라, 굳세어라. 마을에서는 욕을 듣든 절을 받든 똑같은 마음으로 대하라. 마음이 성내어 어지러워지지 않도록 지키고 고요히, 우쭐대지 않고 다녀라.”

“Moneyyaṁ te upaññissaṁ, (iti bhagavā) Dukkaraṁ durabhisambhavaṁ; Handa te naṁ pavakkhāmi, Santhambhassu daḷho bhava. Samānabhāgaṁ kubbetha, Gāme akkuṭṭhavanditaṁ; Manopadosaṁ rakkheyya, Santo anuṇṇato care.

숫따니빠따 Snp 3.11 날라까 숫따

배경

부처님의 대답이 시작됩니다. 첫마디는 현자의 길이 해내기 어렵다는 경고이고, 곧바로 마을에서 지낼 때의 마음가짐으로 들어갑니다. 욕을 듣는 일과 절을 받는 일을 한 줄에 묶어 ‘똑같은 마음(samānabhāga)’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이어 마음의 성냄(manopadosa)을 지키고, 고요하고 우쭐대지 않게 다니라고 합니다. 성내지 않음은 욕을, 우쭐대지 않음은 절을 받는 쪽과 짝지어 읽을 수 있습니다. 괄호 안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경을 외워 전한 이가 화자를 밝혀 둔 표시입니다. 이 대목이 닦게 하는 것은 남의 말에 따라 마음이 오르내리지 않는 일입니다.

묵상

욕을 들을 때와 칭찬을 들을 때, 마음이 어느 쪽으로 더 크게 기우는지 알아차린 적이 있나요? 오늘 들은 말 한마디를 떠올려, 그때 몸이 어땠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떠오르는 말이 없거나 다시 떠올리기 힘들다면 이 물음은 건너뛰어도 괜찮아요.

14 솟아오르는 것을 대하는 법 1구절

불꽃처럼 솟아오르는 갖가지 것 앞에서 꾐과 감각의 즐거움을 멀리하고 살아 있는 것에 적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숲에 번진 불길의 불꽃처럼 갖가지 것이 솟아오른다. 여인들이 현자(무니)를 꾀어내려 한다. 그들이 그대를 꾀어내지 못하게 하라. 성관계를 멀리하고 높고 낮은 감각의 즐거움을 버려라. 움직이는 것이든 가만히 있는 것이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적대하지도, 들러붙지도 말라.”

Uccāvacā niccharanti, Dāye aggisikhūpamā; Nāriyo muniṁ palobhenti, Tā su taṁ mā palobhayuṁ. Virato methunā dhammā, Hitvā kāme paropare; Aviruddho asāratto, Pāṇesu tasathāvare.

숫따니빠따 Snp 3.11 날라까 숫따

배경

부처님은 길에서 마주칠 것들로 말을 잇습니다. 첫 게송은 숲에 번진 불길에서 불꽃이 갖가지로 솟듯, 갖가지 것이 솟아오른다고 말합니다. ‘갖가지(uccāvaca)’는 글자로는 ‘높고 낮은’이지만, 번역자 주석은 좋고 나쁨을 가르지 않는 ‘여러 가지’의 뜻으로 읽습니다. 이어 여인들의 꾐을 말하는데, 이 말은 집을 떠나 길을 닦으려는 남성 수행자 날라까에게 한 당부입니다. 둘째 게송은 성관계와 감각의 즐거움을 떠나고, 살아 있는 것에 적대하지도 들러붙지도 말라고 합니다. 미움과 매임을 함께 내려놓으라는 짝이 이 대목의 축입니다. 집을 떠난 수행자의 계율이라는 배경은 경 밖의 설명입니다.

묵상

이 게송은 집을 떠난 수행자에게 한 당부여서, 읽는 사람의 삶을 재는 잣대로 쓰지 않아도 돼요. 다만 ‘갖가지 것이 솟아오른다’는 말에서, 요즘 내 마음에 솟아오르는 것 하나를 이름 붙이지 않고 알아차려 볼 수 있을까요?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15 나에게 견주어 보라 1구절

저들도 나와 같다는 견줌에서 해치지 말라는 가르침이 나오고, 바람을 버려 구렁을 건너라고 합니다.

“‘내가 그러하듯 저들도 그러하고, 저들이 그러하듯 나도 그러하다.’ 자신을 견주어 보아 죽이지 말고 죽이게 하지도 말라. 여느 사람이 매달리는 것을 향한 바람과 탐냄을 버리고, 눈 밝은 이는 길을 걸어 이 구렁(나라까)을 건너야 한다.”

Yathā ahaṁ tathā ete, Yathā ete tathā ahaṁ; Attānaṁ upamaṁ katvā, Na haneyya na ghātaye. Hitvā icchañca lobhañca, Yattha satto puthujjano; Cakkhumā paṭipajjeyya, Tareyya narakaṁ imaṁ.

숫따니빠따 Snp 3.11 날라까 숫따

배경

앞 게송이 살아 있는 것에 적대하지 말라고 했다면, 이 게송은 그 바탕을 자기 자신과의 견줌에 둡니다. ‘내가 그러하듯 저들도 그러하다’는 두 줄이 죽이지도 죽이게 하지도 말라는 말을 받칩니다. 둘째 게송의 ‘여느 사람이 매달리는 것’을 번역자 주석은 같은 구절의 다른 용례에 비추어 감각의 즐거움으로 읽습니다. ‘구렁’으로 옮긴 ‘나라까(naraka)’는 다른 경에서 지옥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이(imaṁ)’라는 지시어와 ‘건넌다’는 동사가 함께 있어 지금 눈앞에 놓인 깊은 구렁으로 읽었습니다. 번역자 주석도 같은 판단이고, 보디는 ‘불지옥’, 노먼은 ‘지옥’으로 옮깁니다. 해치지 않음과 바람을 버림이 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저들도 나와 같다’는 말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있나요? 그 사람도 나처럼 아프고 두려워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금 어떤 느낌으로 닿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아무 느낌이 없다면 없다는 것도 하나의 대답이에요. 떠오르는 얼굴이 없어도 괜찮아요.

16 숲속 나무 밑의 하루 1구절

적게 바라고 음식을 얻은 뒤 숲의 나무 밑에서 깊은 집중을 닦는 현자의 하루를 그립니다.

“배를 다 채우지 않고 음식을 알맞게 먹으며, 바람을 적게 갖고 탐내지 않아야 한다. 늘 바람에 굶주리지 않는 그는 바라는 것이 없고, 불이 꺼지듯 고요한 이(닙부따)가 된다. 음식을 얻으러 다닌 뒤 숲으로 가서 나무 밑에 이르러 현자(무니)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 깊은 집중(자나)에 힘쓰는 슬기로운 그는 숲에서 즐거워해야 한다. 나무 밑에서 깊은 집중을 닦으며 스스로를 기쁘게 해야 한다.”

Ūnūdaro mitāhāro, Appicchassa alolupo; Sadā icchāya nicchāto, Aniccho hoti nibbuto. Sa piṇḍacāraṁ caritvā, Vanantamabhihāraye; Upaṭṭhito rukkhamūlasmiṁ, Āsanūpagato muni. Sa jhānapasuto dhīro, Vanante ramito siyā; Jhāyetha rukkhamūlasmiṁ, Attānamabhitosayaṁ.

숫따니빠따 Snp 3.11 날라까 숫따

배경

대답이 현자의 하루로 넘어갑니다. 첫 게송은 먹는 양과 바람의 크기를 다루고, 그렇게 바라는 것이 없는 이를 ‘불이 꺼지듯 고요한 이(닙부따)’라고 부릅니다. 둘째 게송은 음식을 얻은 뒤 숲의 나무 밑에 앉는 순서이고, 셋째 게송은 거기서 깊은 집중(자나)을 닦으며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모습입니다. 첫 게송 셋째 줄의 ‘늘(sadā)’ 자리에 몇몇 판본은 ‘sa ve(그는 참으로)’를 두고 번역자 주석도 그 독법을 권하지만, 여기서는 원문의 ‘sadā’를 따랐습니다. 먹는 것, 머무는 곳, 마음 모음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바람을 줄이는 일이 고요해지는 일의 앞자리에 놓입니다.

묵상

‘바람을 적게 갖는다’는 말에서, 오늘 내가 가장 많이 바란 것은 무엇이었나요? 그 바람을 없애려 하기보다 이름만 붙여 볼 수 있을까요? 이름을 붙인 뒤 마음이 조금 고요해지는 느낌이 있다면 그것을, 없다면 없는 대로 알아차려도 괜찮아요.

17 얻어도 못 얻어도 좋은 일 1구절

마을에서 음식을 구할 때 서두르거나 떠보지 않고, 얻든 못 얻든 한결같이 나무로 돌아옵니다.

“그런 다음 밤이 끝날 무렵 마을로 가야 한다. 부르는 말도, 마을에서 가져다주는 것도 반기지 말라. 현자(무니)는 마을에 이르러 집들 사이를 서둘러 다니지 말라. 먹을 것을 구하는 말은 끊고 넌지시 떠보는 말을 하지 말라. ‘얻었으면 잘된 일, 얻지 못했어도 괜찮은 일.’ 어느 쪽이든 한결같은 그는 나무로 돌아온다.”

Tato ratyā vivasāne, Gāmantamabhihāraye; Avhānaṁ nābhinandeyya, Abhihārañca gāmato. Na munī gāmamāgamma, Kulesu sahasā care; Ghāsesanaṁ chinnakatho, Na vācaṁ payutaṁ bhaṇe. Alatthaṁ yadidaṁ sādhu, Nālatthaṁ kusalaṁ iti; Ubhayeneva so tādī, Rukkhaṁvupanivatt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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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밤을 보낸 현자가 새벽에 마을로 들어가는 대목입니다. 첫 게송은 부르는 말도 가져다주는 것도 반기지 말라고 합니다. 번역자 주석은 이 두 줄이 당시 자이나 수행자들의 규칙과 닮았다고 짚는데, 이는 경 밖의 비교입니다. 둘째 게송은 집들 사이를 서둘러 다니지 말라는 것이고, 번역자는 너무 빨리 걸으면 집에서 음식을 내올 틈이 없다는 평범한 뜻으로 읽습니다. 셋째 게송은 얻든 못 얻든 똑같이 받아들이고 나무로 돌아오는 모습입니다. ‘한결같은(tādī)’은 형편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먹을 것을 구하는 일에서도 그 한결같음을 닦게 합니다.

묵상

‘얻었으면 잘된 일, 얻지 못했어도 괜찮은 일’이라는 말이 오늘 나에게는 어떻게 들리나요? 바라던 일이 이뤄지지 않았던 최근의 일 하나를 떠올려, 그때 몸에서 먼저 반응한 곳이 어디였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그대로 괜찮아요.

18 작은 베풂과 열이 없는 이 1구절

작은 베풂도 주는 이도 얕보지 않으며, 흐름을 끊은 이에게는 달아오르는 열이 없다고 말합니다.

“음식 그릇을 손에 들고 다니며 말 못 하는 이가 아닌데도 말 못 하는 이처럼 여겨진다. 적은 베풂을 업신여기지 말고 주는 이를 깔보지 말라. 길을 닦는 이(사마나)가 밝힌 실천의 길은 참으로 갖가지다. 저편 언덕에 두 번 가지 않으며, 이것이 한 번뿐이라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뻗어 나가는 것이 없고 흐름을 끊은 수행자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버린 이에게 달아오르는 열은 없다.”

Sa pattapāṇi vicaranto, Amūgo mūgasammato; Appaṁ dānaṁ na hīḷeyya, Dātāraṁ nāvajāniyā. Uccāvacā hi paṭipadā, Samaṇena pakāsitā; Na pāraṁ diguṇaṁ yanti, Nayidaṁ ekaguṇaṁ mutaṁ. Yassa ca visatā natthi, Chinnasotassa bhikkhuno; Kiccākiccappahīnassa, Pariḷāho na vijj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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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게송은 음식을 받으러 다닐 때의 모습입니다. ‘말 못 하는 이가 아닌데도 말 못 하는 이처럼 여겨진다(amūgo mūgasammato)’는 말은 경 끝의 말수 이야기와 이어지며, 적은 베풂도 주는 이도 얕보지 말라고 이릅니다. 둘째 게송의 마지막 줄 ‘mutaṁ’은 뜻이 확정되지 않은 낱말입니다. 번역자 주석은 이 게송을 깨달은 이가 물러나지 않는다는 근거로 인용한 후대 논서(까타왓투)를 들어 ‘cutaṁ(물러남)’으로 고쳐 읽자고 하지만, 여기서는 원문 그대로 옮기고 뜻을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길을 닦는 이’를 번역자는 부처님으로 보고 노먼은 달리 봅니다. 셋째 게송은 흐름을 끊고 할 일과 안 할 일을 내려놓은 수행자에게 달아오르는 열이 없다고 맺습니다.

묵상

‘적은 베풂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에서 오늘 내가 받은 작은 것 하나를 떠올릴 수 있을까요? 누군가의 짧은 인사나 물 한 잔이어도 괜찮아요. 떠올랐다면 그때의 마음을 잠시 느껴 볼 수 있을까요?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런 날도 있다고 그대로 두어도 좋아요.

19 면도날처럼, 너무 생각하지도 말고 1구절

현자의 길을 다시 일러 주며 마음이 움츠러들지 않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도록 말합니다.

“현자의 길(모네이야)을 그대에게 일러 주겠다. 면도날의 날과 같아야 한다.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배를 다스려야 한다. 마음이 움츠러들지 않아야 하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비린내가 없고 매이지 않으며 거룩한 삶을 마지막 의지처로 삼아야 한다.”

Moneyyaṁ te upaññissaṁ, Khuradhārūpamo bhave; Jivhāya tālumāhacca, Udare saññato siyā. Alīnacitto ca siyā, Na cāpi bahu cintaye; Nirāmagandho asito, Brahmacariyaparāyaṇ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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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길을 일러 주겠다는 첫 줄이 대답 첫머리의 말을 되풀이하며 새 단락을 엽니다. 번역자 주석에 따르면 몇몇 판본(PTS·BJT)은 이 줄 뒤에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표시를 두지만, 이 원문에는 없습니다. ‘면도날과 같아야 한다’는 비유는 원문에서 풀이 없이 놓입니다. 영어 번역은 ‘면도날을 핥듯이’로 풀어 옮기지만, 원문에 ‘핥다’는 낱말은 없습니다. 이어 혀를 입천장에 붙이는 몸의 자세와 배를 다스리는 일이 나오고, 둘째 게송은 마음이 움츠러들지도 너무 많이 생각하지도 않는 사이를 말합니다. ‘비린내(āmagandha)’는 이 경에서 풀이되지 않아 뜻을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몸과 먹는 일과 마음을 함께 다스리게 하고, 끝 줄에서 거룩한 삶을 의지처로 세웁니다.

묵상

‘너무 많이 생각하지도 말라’는 말에서, 요즘 머릿속에서 자꾸 도는 생각은 무엇인가요? 그 생각을 없애려 하지 않고 지금 몇 번째 도는지만 세어 볼 수 있을까요? 세는 일이 어렵다면 숨을 한 번 내쉬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요.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면 그대로 두어도 좋아요.

20 홀로 있음의 길 1구절

홀로 앉고 길을 닦는 이들을 가까이 모시며, 슬기로운 이들의 말을 듣고 부끄러움과 믿음을 키우라고 합니다.

“홀로 앉는 일을 익히고 길을 닦는 이(사마나)들을 가까이 모시는 일도 익혀라. 홀로 있음이 현자의 길(모네이야)이라 일컬어진다. 그대가 홀로 즐거워한다면 그때 열 방향에 빛날 것이다. 슬기로운 이들, 깊은 집중(자나)을 닦는 이들, 감각의 즐거움을 버린 이들의 말을 듣고 나를 따르는 이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히리)과 믿음을 더욱 키워야 한다.”

Ekāsanassa sikkhetha, Samaṇūpāsanassa ca; Ekattaṁ monamakkhātaṁ, Eko ce abhiramissasi; Atha bhāhisi dasadisā. Sutvā dhīrānaṁ nighosaṁ, Jhāyīnaṁ kāmacāginaṁ; Tato hiriñca saddhañca, Bhiyyo kubbetha māma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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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길이 ‘홀로 있음(ekatta)’으로 모입니다. 첫 게송은 홀로 앉는 일과 길을 닦는 이들을 가까이 모시는 일을 함께 익히라고 하고, 홀로 있음을 현자의 길이라 부릅니다. 홀로 즐거워하면 열 방향에 빛난다는 줄은 비유로 읽힙니다. 둘째 게송은 슬기로운 이들의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과 믿음을 키우라는 당부입니다. ‘말(nighosa)’을 주석서는 ‘명성’으로 풀고 보디·노먼도 이를 따르지만, 번역자 주석(수자또)은 ‘말, 가르침’으로 읽으며 여기서도 그렇게 옮겼습니다. 홀로 앉기와 길을 닦는 이들 곁에서 배우기가 한 게송에 함께 놓여, 홀로 있음 속에서도 배움의 끈을 잇게 합니다.

묵상

‘홀로 있음’과 ‘가까이 모심’이 한 게송에 함께 있어요. 오늘 혼자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 그 시간은 편안했나요, 아니면 외로웠나요? 혼자 있는 일이 지금은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 느낌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곁에 있어 준 사람이 있다면 그 얼굴도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21 작은 개울은 소리 내고 큰 바다는 소리 없이 간다 1구절

작은 개울은 소리 내며 흐르고 큰 바다는 소리 없이 가듯, 모자란 것은 소리를 내고 가득 찬 것은 고요하다고 말합니다.

“움푹 팬 곳과 갈라진 틈을 지나는 물줄기에서 이것을 알아보라. 작은 개울은 소리 내며 흘러가고 큰 바다는 소리 없이 간다. 모자란 것은 소리를 내고 가득 찬 것은 고요하다. 어리석은 이는 반쯤 찬 항아리 같고 현명한 이는 가득 찬 호수 같다.”

Taṁ nadīhi vijānātha, Sobbhesu padaresu ca; Saṇantā yanti kusobbhā, Tuṇhī yanti mahodadhī. Yadūnakaṁ taṁ saṇati, Yaṁ pūraṁ santameva taṁ; Aḍḍhakumbhūpamo bālo, Rahado pūrova paṇḍ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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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음을 말한 뒤 물의 비유가 나옵니다. 원문은 ‘이것(ta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밝히지 않지만, 바로 뒤의 게송이 말수를 다루므로 고요함과 말에 관한 비유로 읽힙니다. 첫 게송은 작은 개울과 큰 바다의 소리를 견주고, 둘째 게송은 이를 ‘모자란 것은 소리를 내고 가득 찬 것은 고요하다’는 한 줄로 모은 뒤 어리석은 이와 현명한 이를 반쯤 찬 항아리와 가득 찬 호수에 견줍니다. ‘큰 바다’로 옮긴 ‘mahodadhī’를 영어 번역은 ‘큰 강’으로 옮깁니다. 원문에 다른 독법은 없고 풀이가 다릅니다. 번역자 주석에 따르면 둘째 게송은 후대 문헌 ‘밀린다 왕의 물음(밀린다빤하)’에도 인용됩니다. 소리의 크기로 안이 찬 정도를 가늠하는 이 관찰이 다음 게송에서 말하는 이의 기준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모자란 것은 소리를 내고 가득 찬 것은 고요하다’는 말을 읽고 떠오르는 장면이 있나요? 오늘 소리 내어 한 말 가운데 하나를 떠올려, 그 말을 할 때 몸과 마음이 어땠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떠오르지 않거나 잘 모르겠다면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22 알고도 말을 아끼는 현자 1구절

알면서 알맞게 많이 말하는 이와, 알면서 스스로를 다스려 말을 아끼는 이를 함께 말합니다.

“길을 닦는 이(사마나)가 많이 말할 때 그 말은 알맞고 뜻에 닿아 있다. 그는 알고서 가르침을 펴고, 알고서 많이 말한다. 알면서도 스스로를 다스려 알면서도 많이 말하지 않는 이, 그 현자(무니)는 현자의 길(모네이야)에 걸맞고, 그 현자는 현자의 길에 이르렀다.”

Yaṁ samaṇo bahuṁ bhāsati, Upetaṁ atthasañhitaṁ; Jānaṁ so dhammaṁ deseti, Jānaṁ so bahu bhāsati. Yo ca jānaṁ saṁyatatto, Jānaṁ na bahu bhāsati; Sa munī monamarahati, Sa munī monamajjhag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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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비유 바로 뒤에 놓인 두 게송이 균형을 잡습니다. 첫 게송은 길을 닦는 이가 많이 말하더라도 그 말이 알맞고 뜻에 닿아 있다면, 그것은 알고서 가르침을 펴는 일이라고 인정합니다. 둘째 게송은 알면서도 스스로를 다스려 많이 말하지 않는 이를 현자의 길에 이른 이로 꼽습니다. 앞의 비유를 말하지 말라는 명령으로만 읽으면 첫 게송과 부딪치므로, 두 게송을 함께 읽습니다. 두 게송에 되풀이되는 ‘알고서(jānaṁ)’가 기준이고, 잣대는 말의 양보다 앎과 스스로 다스림입니다. ‘길을 닦는 이’를 번역자(수자또)는 부처님으로 옮기지만 원문은 이름을 대지 않습니다. 경은 현자의 길에 이르렀다는 말로 날라까의 물음에 답하며 닫히고, 끝줄은 경을 엮은 이가 붙인 차례 표시입니다.

묵상

말을 많이 한 날과 말을 아낀 날, 오늘은 어느 쪽에 가까웠나요? 말을 한 뒤에 마음이 가벼웠는지 무거웠는지만 돌아볼 수 있을까요? 오늘 있었던 대화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건너뛰어도 괜찮아요. 어느 쪽이든 잘하고 못한 것을 가리지 않아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