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가 적은 이의 가르침이지,
많은 이의 가르침이 아니다.
만족하는 이를 위한 것이지, 불만족하는 이를 위한 게 아니다.
홀로 떨어진 이를 위한 것이지, 무리를 즐기는 이를 위한 게 아니다.
정진하는 이를 위한 것이지, 게으른 이를 위한 게 아니다.
마음챙김을 세운 이를 위한 것이지, 잊은 이를 위한 게 아니다.
마음이 모인 이를 위한 것이지, 흩어진 이를 위한 게 아니다.
지혜로운 이를 위한 것이지, 지혜가 모자란 이를 위한 게 아니다.”
“appicch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mahicchassa; santuṭṭh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asantuṭṭhassa; pavivitt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saṅgaṇikārāmassa; āraddhavīriy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kusītassa; upaṭṭhitassati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muṭṭhassatissa; samāhit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asamāhitassa; paññavato ayaṁ dhammo, nāyaṁ dhammo duppaññassā”ti.
앙굿따라 니까야 AN 8.30 아누룻다의 큰 사유경 (Anuruddhamahāvitakkasutta) 배경
아누룻다의 마음에 처음 떠오른 일곱 판단입니다. 바라는 것이 적음, 만족, 홀로 떨어져 있음, 정진을 일으킴, 마음챙김을 세움, 마음이 모임, 지혜로움이 차례로 놓입니다. 각 항목은 “이 가르침은 이런 이를 위한 것이지, 그 반대인 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긍정과 부정의 짝을 끝까지 유지합니다. 따라서 일곱 덕목만 떼어 낸 표어가 아니라, 많은 바람·불만족·무리 즐김·게으름·잊음·흩어짐·지혜 부족이라는 반대 방향까지 함께 드러내는 사유입니다. 뒤에서 세존은 이 일곱을 그대로 인정한 뒤 여덟째를 더합니다.
묵상
긍정과 부정이 짝을 이루는 일곱 항목 가운데 지금 한 쌍만 천천히 읽는다면 어느 쌍을 고르고 싶나요?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는지 채점할 필요는 없어요. 고르기 어렵다면 첫 항목의 “바라는 것이 적음”과 “많음”이 어떻게 대비되는지만 살펴봐도 괜찮아요.
“수행자들이여, 여기 수행자는 어떤 옷이든 만족하고
그 만족을 칭찬하며, 옷 때문에
그릇되고 부적절한 구함에 빠지지 않느니라.
옷을 얻지 못해도 조바심 내지 않고,
얻어도 얽매이지 않고 홀리지 않고 빠지지 않으며
위험을 보고 벗어남을 알아 쓰느니라.
그 만족으로 자신을 높이거나 남을 깎아내리지 않느니라.
그 일에 능숙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수행자를, 수행자들이여,
오래되고 으뜸인 성인의 계보에 선 이라 하느니라.”
Idha, bhikkhave, bhikkhu santuṭṭho hoti itarītarena cīvarena, itarītaracīvarasantuṭṭhiyā ca vaṇṇavādī, na ca cīvarahetu anesanaṁ appatirūpaṁ āpajjati, aladdhā ca cīvaraṁ na paritassati, laddhā ca cīvaraṁ agadhito amucchito anajjhosanno ādīnavadassāvī nissaraṇapañño paribhuñjati; tāya ca pana itarītaracīvarasantuṭṭhiyā nevattānukkaṁseti, no paraṁ vambheti. Yo hi tattha dakkho analaso sampajāno patissato, ayaṁ vuccati, bhikkhave, bhikkhu porāṇe aggaññe ariyavaṁse ṭhito.
앙굿따라 니까야 AN 4.28 성인의 계보경 (Ariyavaṁsasutta) 배경
첫째 계보는 옷의 좋고 나쁨보다 옷을 대하는 전 과정을 다룹니다. 주어진 옷으로 만족하고 그 만족을 칭찬하되, 얻기 위해 부적절한 구함에 나서지 않고, 못 얻어도 조바심 내지 않으며, 얻은 뒤에도 갈망·도취·집착 없이 위험과 벗어남을 알고 씁니다. 여기에 만족을 이유로 자신을 높이거나 남을 낮추지 않는 두 부정이 붙습니다. 마지막의 능숙함·게으르지 않음·분명한 앎·마음챙김은 이 태도가 무관심이 아니라 세심한 훈련임을 보여 줍니다. 수행의 뜻은 소유의 양과 관계없이 얻기 전·사용할 때·비교할 때의 마음을 함께 돌보는 데 있습니다.
묵상
옷이나 물건을 얻지 못했을 때의 조바심과 얻은 뒤 놓지 못하는 마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익숙한가요? 만족한 뒤 그것을 자기 우월감으로 바꾸는 순간도 있나요? 지금은 한 장면만 떠올라도 괜찮아요.
가진 것이 없는 우리는
참으로 아주 행복하게 사느니라.
우리는 빛나는 하늘의 신들처럼
희열을 먹고 살리라.
Susukhaṁ vata jīvāma, yesaṁ no natthi kiñcanaṁ; Pītibhakkhā bhavissāma, devā ābhassarā yathā.
법구경 Dhammapada 200 배경
행복 품에 실린 세 게송이 나란히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 "참으로 우리는 아주 행복하게 사노라(susukhaṁ vata jīvāma)." 198번은 병든 이들 가운데서 병 없이, 199번은 탐하는 이들 가운데서 탐하지 않고, 그리고 200번이 이 게송입니다. 여기서 낏짜나(kiñcana)라는 낱말이 중요합니다. 단순히 재산이 아니라 "마음에 걸리는 것", "거추장스러운 것"이라는 뜻을 함께 담습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무소유를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걸릴 것이 없는 상태를 노래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우는지도 밝혀 둡니다 - 삐띠(pīti), 희열입니다. 없앤 자리를 텅 비워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양식으로 채운다는 점에서, 이 게송의 단순함은 결핍이 아니라 교체입니다.
묵상
가진 것이 적었던 시절이 오히려 홀가분했던 기억이 있나요? 그때 나를 먹여 살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은 그것이 어디로 갔을까요?
“그는 ‘이 인식의 장은 마을의 인식이 없어 비었다. 사람의 인식이 없어 비었다.
비지 않은 것은 숲의 인식에 의지한 하나됨이다’라고 아느니라.
이처럼 거기에 없는 것으로 그곳이 비었다고 보고, 남아 있는 것은 ‘이것은 있다’고 아느니라.
아난다여, 이것이 있는 그대로이고 뒤집히지 않았으며 청정한 공의 들어섬이니라.”
So ‘suññamidaṁ saññāgataṁ gāmasaññāyā’ti pajānāti, ‘suññamidaṁ saññāgataṁ manussasaññāyā’ti pajānāti, ‘atthi cevidaṁ asuññataṁ yadidaṁ—araññasaññaṁ paṭicca ekattan’ti. Iti yañhi kho tattha na hoti tena taṁ suññaṁ samanupassati, yaṁ pana tattha avasiṭṭhaṁ hoti taṁ ‘santamidaṁ atthī’ti pajānāti. Evampissa esā, ānanda, yathābhuccā avipallatthā parisuddhā suññatāvakkanti bhavati.
맛지마 니까야 MN 121 공에 대한 짧은 경 (Cūḷasuññatasutta) 배경
첫 숲 단계의 결론이며 이후 모든 단계에 반복될 판정 원리입니다. 마을 인식과 사람 인식은 각각 없어 비었다고 두 번 말하고, 숲 인식의 하나됨은 비지 않은 것으로 남깁니다. 이어 없는 것은 비었다고 보고 남은 것은 있다고 아는 두 방향을 함께 정식화합니다. “있는 그대로·뒤집히지 않음·청정함”은 없음만 과장하지도, 남은 조건을 지우지도 않는 앎을 수식합니다. 공은 무조건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현재 범위의 부재와 잔여를 동시에 아는 들어섬입니다.
묵상
“없는 것은 비었다고 보고 남은 것은 있다고 안다”는 두 방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익숙한가요? 지금 덜어 낼 것을 찾기 전에 이미 남아 있는 한 가지를 정확히 살펴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