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들이여, 두 부류의 지혜로운 이가 있느니라.
어떤 둘인가?
잘못을 잘못으로 보는 이와,
잘못을 고백하는 이의 말을
가르침에 맞게 받아들이는 이이니라.
수행자들이여, 이들이 두 부류의 지혜로운 이이니라.”
Dveme, bhikkhave, paṇḍitā. Katame dve? Yo ca accayaṁ accayato passati, yo ca accayaṁ desentassa yathādhammaṁ paṭiggaṇhāti. Ime kho, bhikkhave, dve paṇḍitā”ti.
앙굿따라 니까야 AN 2.21 어리석은 자 품 (Bālavagga) 배경
경의 둘째이자 마지막 절로, 앞의 어리석은 두 사람을 같은 문장 구조로 정확히 뒤집습니다. ‘두’는 다시 세 번, ‘수행자들이여’와 ‘지혜로운 이’는 각각 두 번 나옵니다. 첫 기준에서는 잘못을 잘못으로 보고, 둘째에서는 잘못을 고백하는 이의 말을 가르침에 맞게 받아들입니다. 앞 절의 두 부정이 모두 사라진 것이 핵심입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모든 주장에 동의하거나 곧바로 관계를 회복하라는 뜻을 더하지 않으며, 원문이 한정한 대로 고백에 가르침에 맞게 응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두 역할을 함께 놓음으로써 잘못을 말하는 쪽과 듣는 쪽의 지혜를 나란히 밝힙니다.
묵상
“잘못을 잘못으로 본다”와 “고백하는 이의 말을 가르침에 맞게 받아들인다” 가운데, 지금 더 또렷한 쪽은 어느 것인가요? 곧바로 용서하거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요. 떠오르는 장면이 없거나 버겁다면 건너뛰어도 괜찮아요. 한쪽을 채점하지 않고 두 역할의 차이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이것은 해로운 몸의 행위요
괴로움을 낳고 괴로움을 과보로 하는 것이다’라고 알면,
라훌라야, 그러한 몸의 행위를
스승이나 지혜로운 이나 함께 수행하는 이에게
고백하고 드러내고 밝혀야 하느니라.
고백하고 드러내고 밝힌 뒤에는
앞으로 삼가야 하느니라.
Akusalaṁ idaṁ kāyakammaṁ dukkhudrayaṁ dukkhavipākanti, evarūpaṁ te, rāhula, kāyakammaṁ satthari vā viññūsu vā sabrahmacārīsu desetabbaṁ, vivaritabbaṁ, uttānīkātabbaṁ; desetvā vivaritvā uttānīkatvā āyatiṁ saṁvaraṁ āpajjitabbaṁ.
맛지마 니까야 MN 61 라훌라 교계경 (Ambalaṭṭhikarāhulovādasutta) 배경
부처님이 어린 아들 라훌라에게 행위를 거울처럼 되비추어 보는 법을 가르치신 경전입니다. 부처님은 행위를 하기 전과 하는 중과 한 뒤, 세 번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이 대목은 그중 마지막, 이미 저질러진 뒤에 대한 지침입니다. 여기서 처방은 세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 고백하고(desetabbaṁ), 드러내고(vivaritabbaṁ), 밝히는 것(uttānīkātabbaṁ). 셋 다 감추어 둔 것을 밖으로 꺼내는 동작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딱 하나가 더 붙습니다. 앞으로 삼가는 것입니다. 목록에 없는 것이 오히려 눈에 띕니다. 자책하라는 말도, 벌하라는 말도, 곱씹으라는 말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후회의 에너지를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흐르게 두셨습니다. 뒤이어 부처님은 잘못이 없음을 확인한 경우에는 "기쁨과 즐거움 속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묵상
지난 잘못 하나를 아직 혼자 안고 있나요? 그것을 밖으로 꺼내 놓지 못하게 막는 것은 상대의 반응인가요, 아니면 내가 지키고 싶은 어떤 모습인가요?
지은 악업을 선업으로 덮는 이는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이 세상을 비추느니라.
Yassa pāpaṁ kataṁ kammaṁ, kusalena pidhīyati; Somaṁ lokaṁ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법구경 Dhammapada 173 배경
법구경 주석은 이 게송을 앙굴리말라와 연결합니다. 수많은 사람을 해친 뒤 부처님을 만나 출가한 사람입니다. 앞 게송인 172번도 같은 구조입니다 - "전에는 방일했으나 뒤에 방일하지 않는 이는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이 세상을 비춘다." 두 게송이 함께 말하는 것은 과거가 지워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름을 벗어난 달이라는 비유가 정확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달이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구름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빛이 나오고 있을 뿐입니다. 삐디야띠(pidhīyati), "덮인다"는 동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없어진다고 하지 않고 덮인다고 합니다. 후회에 붙잡힌 사람이 흔히 요구하는 것은 과거의 삭제인데, 이 게송이 주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지금 무엇을 쌓느냐입니다.
묵상
돌이킬 수 없는 일 하나가 마음에 남아 있나요? 그것을 지우려는 노력과 지금 다른 것을 쌓는 노력 중, 지난 몇 년간 나는 어느 쪽에 더 많은 힘을 썼나요?
슬퍼하고 탄식한다고 하여
여기서 얻어지는 이익은 조금도 없느니라.
그가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알면
적들이 기뻐할 뿐이니라.
Na socanāya paridevanāya, Atthodha labbhā api appakopi; Socantamenaṁ dukhitaṁ viditvā, Paccatthikā attamanā bhavanti.
앙굿따라 니까야 AN 5.48 얻을 수 없는 것 경 (Alabbhanīyaṭhānasutta) 배경
부처님은 세상 누구도 얻을 수 없는 다섯 가지를 드십니다 - 늙는 것이 늙지 않기를, 병드는 것이 병들지 않기를, 죽는 것이 죽지 않기를, 다하는 것이 다하지 않기를, 사라지는 것이 사라지지 않기를. 그리고 이 게송으로 마무리하십니다. 냉정하게 들리지만, 이어지는 두 게송이 균형을 잡아 줍니다. "기도든 주문이든 좋은 말이든 베풂이든, 그것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힘써 나아가라(yathā yathā yattha labhetha atthaṁ, tathā tathā tattha parakkameyya)."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로서도 남으로서도 얻을 수 없는 일임을 안다면, 슬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체념이 먼저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 본 뒤에 오는 받아들임입니다.
묵상
지금 나를 붙들고 있는 후회는 아직 손쓸 수 있는 일인가요, 아니면 이미 끝난 일인가요? 만약 손쓸 수 있는 일이라면, 슬퍼하는 시간과 손쓰는 시간 중 어느 쪽이 더 길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