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욕망에 대하여

억누르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지켜보는 법

욕망을 바라는 사람에게 그 바람이 이루어지면,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 그는 참으로 기뻐하느니라. 그러나 감각의 즐거움을 바라며 욕구가 일어난 그 사람에게서 그 즐거움들이 사라져 갈 때, 그는 화살에 꿰뚫린 듯 아파하느니라.

Kāmaṁ kāmayamānassa, tassa ce taṁ samijjhati; Addhā pītimano hoti, laddhā macco yadicchati. Tassa ce kāmayānassa, chandajātassa jantuno; Te kāmā parihāyanti, sallaviddhova ruppati.

숫따니빠따 Snp 4.1 감각적 욕망 경 (Kāmasutta)

배경

부처님은 욕망을 나쁘다고 먼저 규정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욕망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두 줄로 그려 보이십니다.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면 "참으로 기뻐한다"고 인정하십니다. 이 기쁨은 진짜입니다. 그런데 같은 사람에게서 "그 즐거움들이 사라져 갈 때"는 "화살에 꿰뚫린 듯 아파한다"고 하십니다. 주목할 것은 두 문장의 주어가 같다는 점입니다. 기뻐한 사람과 아파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즉 괴로움은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새로 생기는 벌이 아니라, 기쁨이 일어난 그 자리에서 이어지는 뒷면입니다. 성적 욕망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경은 욕망을 품은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그 사람이 이미 겪어 알고 있는 순서를 그대로 되짚어 줄 뿐입니다.

묵상

강하게 원했던 것을 얻었던 순간을 떠올려 볼까요? 그 기쁨은 얼마나 오래 머물렀나요? 기쁨이 옅어질 때 찾아온 허전함을, 기쁨과 별개의 사건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나요?

수행자들이여, 그러나 이것들은 욕망이 아니니, 성자의 율에서는 이것들을 감각의 자극이라 부르느니라. 사람의 욕망은 마음이 일으킨 탐냄이니,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욕망인 것이 아니니라. 사람의 욕망은 마음이 일으킨 탐냄이니,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그저 그대로 있을 뿐이요, 지혜로운 이는 여기서 그 욕구를 다스리느니라.

Api ca kho, bhikkhave, nete kāmā kāmaguṇā nāmete ariyassa vinaye vuccanti-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Nete kāmā yāni citrāni loke;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Tiṭṭhanti citrāni tatheva loke; Athettha dhīrā vinayanti chandanti.

앙굿따라 니까야 AN 6.63 꿰뚫음경 (Nibbedhikasutta)

배경

이 구절은 성적 욕망을 다룰 때 가장 먼저 놓여야 할 자리를 정해 줍니다. 부처님은 눈에 보이는 대상 쪽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그저 그대로 있을 뿐"이라고 하십니다. 아름다운 것이 더럽거나 위험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본 사람이 잘못한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욕망이라 부르시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마음이 일으킨 탐냄", 곧 그 대상을 향해 마음이 일으키는 움직임입니다. 이 구분이 실질적인 이유는, 대상을 없애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이쪽,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지점뿐입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은 자기혐오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묵상

어떤 대상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을 때, 그 대상을 탓하거나 자신을 탓하는 것 말고 세 번째 선택지를 떠올려 본 적이 있나요? 대상은 그대로 두고 내 마음의 움직임만 조용히 지켜본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대왕이여, 알고 보시는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오라, 수행자들이여. 감각의 문을 지키며 지내라. 눈으로 형상을 보고 표상을 붙잡지 말며, 세세한 특징도 붙잡지 말라. 눈의 감각 기능을 단속하지 않고 지낼 때 탐욕과 근심이라는 해롭고 선하지 않은 것들이 밀려들 수 있으니 단속을 위해 실천하라. 눈의 감각 기능을 지키고, 그 단속을 갖추어라.’”

“Vuttaṁ kho etaṁ, mahārāj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etha tumhe, bhikkhave, indriyesu guttadvārā viharatha. Cakkhunā rūpaṁ disvā mā nimittaggāhino ahuvattha, mānubyañjanaggāhino. Yatvādhikaraṇamenaṁ cakkhundriyaṁ asaṁvutaṁ viharantaṁ abhijjhādomanassā pāpakā akusalā dhammā anvāssaveyyuṁ, tassa saṁvarāya paṭipajjatha. Rakkhatha cakkhundriyaṁ; cakkhundriye saṁvaraṁ āpajjatha.

상윳따 니까야 SN 35.127 바라드와자경 (Bhāradvājasutta)

배경

바라드와자 존자는 세 번째 답도 세존의 말씀으로 소개하고, 안쪽 직접 발화에서 수행자들을 부릅니다. 먼저 감각의 문을 지키라는 총칙을 세운 뒤 눈과 형상을 온전히 설명합니다. 형상을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본 뒤 nimitta인 표상과 anubyañjana인 세세한 특징을 붙잡지 말라는 두 부정입니다. 눈을 단속하지 않을 때 탐욕과 근심이라는 해롭고 선하지 않은 것들이 밀려들 수 있다는 조건과 결과 때문에, 단속을 위해 실천하고 눈의 감각 기능을 지키며 단속을 갖추라는 세 동작이 이어집니다. 억지로 보지 않는 훈련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묵상

형상을 보는 일과 그 표상·세세한 특징을 붙잡는 일을 경은 구분합니다. 무언가를 본 뒤 주의가 어느 세부에 오래 머무는지 가볍게 살펴볼 수 있나요? 눈을 피하거나 반응을 즉시 멈춰야 할 필요는 없어요. 두 순간의 차이가 보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욕망에서 슬픔이 생기고, 욕망에서 두려움이 생기느니라. 욕망에서 온전히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두려움이 또 어디 있으랴.

Kāmato jāyatī soko, kāmato jāyatī bhayaṁ; Kāmato vippamuttassa, natthi soko kuto b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15

배경

이 게송은 사랑하는 것에서 슬픔이 생긴다는 앞뒤 게송들과 한 묶음으로 놓여 있습니다. 부처님은 여기서 슬픔과 두려움을 나란히 두십니다. 성적 욕망을 겪을 때 사람이 실제로 느끼는 것도 이 둘입니다. 얻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잃을까 하는 두려움, 상대가 나를 그만큼 원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을 때의 슬픔. 부처님은 이것을 도덕의 문제로 다루지 않고 인과의 문제로 다루십니다. 두려움은 성격이 약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강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 붙듦의 크기만큼 정확히 생깁니다. 그래서 두려움의 크기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얼마나 쥐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눈금이 됩니다.

묵상

지금 마음에 있는 두려움 하나를 떠올려 보면, 그것은 무엇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인가요? 그 두려움의 크기가 곧 내가 그것을 쥐고 있는 힘의 크기라면, 지금 나는 무엇을 가장 세게 쥐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