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중독 - 끝없는 스크롤

화면에서 눈을 떼기 어려운 이유를,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구조로 보는 법

“수행자들이여, 낚시꾼이 미끼를 꿴 낚싯바늘을 깊은 물웅덩이에 던진다고 하자. 미끼를 본 어떤 물고기가 그것을 삼킬 것이니라. 수행자들이여, 그렇게 바늘을 삼킨 물고기는 불운에 빠지고 재난에도 빠져 낚시꾼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처지가 되느니라. 이와 같이 수행자들이여, 세상에는 중생들에게 불운이 되고 생명 있는 것들에게 죽음이 되는 여섯 가지 낚싯바늘이 있느니라.

“Seyyathāpi, bhikkhave, bāḷisiko āmisagatabaḷisaṁ gambhīre udakarahade pakkhipeyya. Tamenaṁ aññataro āmisacakkhu maccho gileyya. Evañhi so, bhikkhave, maccho gilitabaḷiso bāḷisikassa anayaṁ āpanno byasanaṁ āpanno yathākāmakaraṇīyo bāḷisikassa. Evameva kho, bhikkhave, chayime baḷisā lokasmiṁ anayāya sattānaṁ vadhāya pāṇinaṁ.

상윳따 니까야 SN 35.230 낚시꾼 비유경 (Bāḷisikopamasutta)

배경

경은 수행자들에게 깊은 물웅덩이의 낚시 장면을 제시한 뒤, 물고기의 처지를 세상에 있는 여섯 낚싯바늘에 연결합니다. 첫 세 대목에서 낚시꾼은 미끼가 꿰인 바늘을 던지고, 미끼를 본 물고기는 그것을 삼키며, 그 결과 불운과 재난에 빠져 낚시꾼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처지가 됩니다. 이어 “이와 같이”가 비유의 적용을 열고, 여섯이라는 수량과 중생의 불운·생명 있는 것의 죽음을 함께 밝힙니다. 이 대목은 눈앞의 미끼와 그것을 삼킨 뒤의 결과를 한 장면에 놓아, 다음 질문과 감각별 설명을 준비합니다.

묵상

“미끼를 꿴 낚싯바늘”이라는 한 장면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미끼인가요, 그 안의 바늘인가요? 오늘 마음이 끌린 대상 하나를 떠올려도 좋고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 대상을 좋다 나쁘다 판단하기 전에, 끌림과 뒤따를 결과를 함께 볼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사왓티에서였느니라. “수행자들이여, 이 여섯 접촉 영역은 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고 보호되지 않고 단속되지 않으면 괴로움을 실어 오느니라. 그 여섯이란 무엇인가? 수행자들이여, 눈의 접촉 영역은 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고 보호되지 않고 단속되지 않으면 괴로움을 실어 오느니라. …

Sāvatthinidānaṁ. “Chayime, bhikkhave, phassāyatanā adantā aguttā arakkhitā asaṁvutā dukkhādhivāhā honti. Katame cha? Cakkhu, bhikkhave, phassāyatanaṁ adantaṁ aguttaṁ arakkhitaṁ asaṁvutaṁ dukkhādhivāhaṁ hoti …pe…

상윳따 니까야 SN 35.94 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음경 (Adantaaguttasutta)

배경

사왓티라는 장소를 밝힌 뒤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을 부르며 설법을 여십니다. phassāyatana는 감각기관만 따로 가리키기보다 접촉이 일어나는 영역이며, 그 수는 여섯입니다. adanta·agutta·arakkhita·asaṁvuta는 길들지 않음·지켜지지 않음·보호되지 않음·단속되지 않음이라는 네 상태를 차례로 놓고, 그 결과를 괴로움을 실어 옴이라 합니다. “그 여섯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눈의 첫 답을 붙였고, 눈 뒤의 생략 표지는 혀로 넘어가기 전에도 같은 병렬 문형이 이어짐을 알립니다. 감각 자체를 없애라는 선언이 아니라 접촉을 만나는 방식의 조건을 구체화하는 도입입니다.

묵상

“괴로움을 실어 온다”는 표현을 읽을 때, 대상 자체와 그것을 만난 뒤 이어지는 반응은 어떻게 구별되나요? 오늘 눈·귀·코·혀·몸·마음 가운데 한 문에서 접촉 뒤 곧바로 따라온 반응을 판단 없이 살펴볼 수 있나요? 분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수행자들이여, 무엇이 욕망의 근원인가? 수행자들이여, 접촉이 욕망의 근원이니라.

Katamo ca, bhikkhave, kāmānaṁ nidānasambhavo? Phasso, bhikkhave, kāmānaṁ nidānasambhavo.

앙굿따라 니까야 AN 6.63 꿰뚫음경 (Nibbedhikasutta)

배경

부처님은 욕망을 여섯 항목으로 낱낱이 해부하시면서, 그 근원을 묻고 한 단어로 답하십니다. 접촉입니다. 욕망은 마음속에서 아무 이유 없이 솟아오르지 않고, 감각기관과 대상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이 한 줄이 실질적인 이유는 개입 지점을 바꾸어 주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이미 일어난 뒤에 그것과 싸우는 것은 늦고 힘이 많이 듭니다. 접촉은 그보다 앞에 있고, 접촉은 대개 조건의 문제입니다. 손이 닿는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소리가 나도록 설정되어 있는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무엇이 눈에 들어오는지. 이것은 참을성을 더 짜내라는 요구가 아니라, 참을성이 필요한 상황을 몇 번이나 만드는지 살펴보라는 제안에 가깝습니다.

묵상

오늘 화면을 열었던 순간들 앞에는 대개 어떤 접촉이 있었나요? 손이 닿는 거리, 눈에 띄는 자리, 울리는 알림 가운데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붙잡기 어렵고 재빠르며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내려앉는 마음, 그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 좋으니, 길들여진 마음은 행복을 가져오느니라.

Dunniggahassa lahuno, yatthakāmanipātino; Cittassa damatho sādhu, cittaṁ dantaṁ sukhāvahaṁ.

법구경 Dhammapada 35

배경

이 게송에서 마음을 묘사하는 세 단어를 눈여겨볼 만합니다. 붙잡기 어렵고, 재빠르고,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내려앉습니다. 화면을 넘기고 또 넘기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곧 이 세 단어입니다. 다만 이 문장은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에 나왔습니다. 마음이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성질은 기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이고, 지금의 환경은 그 성질을 발견해 크게 키워 놓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얻는 것이 있습니다.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을 요즘 사람이라 특별히 못난 것으로 여길 이유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마음을 나무라는 대신 "길들이는 것이 좋다"고 하십니다. 길들임은 짐승을 벌하는 일이 아니라 오래 함께 지내며 알아가는 일에 가깝습니다.

묵상

마음이 어디로 내려앉는지 그저 지켜보기만 한 시간이 오늘 있었나요?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는 대신, 그 성질을 그냥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