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여, 그러면 계의 맑음이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닙바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벗이여, 그러면 마음의 맑음이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벗이여, 그러면 견해의 맑음이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벗이여, 그러면 의심을 건너는 맑음이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Kiṁ nu kho, āvuso, sīlavisuddhi anupādāparinibbānan”ti? “No hidaṁ, āvuso”. “Kiṁ panāvuso, cittavisuddhi anupādāparinibbānan”ti? “No hidaṁ, āvuso”. “Kiṁ nu kho, āvuso, diṭṭhivisuddhi anupādāparinibbānan”ti? “No hidaṁ, āvuso”. “Kiṁ panāvuso, kaṅkhāvitaraṇavisuddhi anupādāparinibbānan”ti? “No hidaṁ, āvuso”.
맛지마 니까야 MN 24 라타위니따 숫따 (이어 타는 수레)
배경
사리뿟따의 물음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앞서는 “거룩한 삶이 이 맑음을 위한 것인가”를 물었다면, 이제는 “이 맑음 자체가 곧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인가”를 하나씩 확인합니다. 계, 마음, 견해, 의심을 건넘, 네 가지 맑음에 대해 모두 “그렇지 않다”는 답이 돌아옵니다. 이는 일곱 가지 맑음이 목적지인 고요히 꺼짐을 향한 디딤돌일 뿐, 그 자체가 목적지는 아니라는 점을 확인해 가는 과정입니다.
묵상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밟아 온 단계 하나하나를 목표 자체와 혼동하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지금 걷고 있는 어떤 과정을, 도착점이라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잠시 살펴보아도 좋아요.
“벗이여, 길과 길 아님을 아는 지견의 맑음이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닙바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벗이여, 실천의 지견의 맑음이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벗이여, 지견의 맑음이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벗이여, 이 일곱 가지와 달리 따로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Kiṁ nu kho, āvuso, maggāmaggañāṇadassanavisuddhi anupādāparinibbānan”ti? “No hidaṁ, āvuso”. “Kiṁ panāvuso, paṭipadāñāṇadassanavisuddhi anupādāparinibbānan”ti? “No hidaṁ, āvuso”. “Kiṁ nu kho, āvuso, ñāṇadassanavisuddhi anupādāparinibbānan”ti? “No hidaṁ, āvuso”. “Kiṁ panāvuso, aññatra imehi dhammehi anupādāparinibbānan”ti? “No hidaṁ, āvu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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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다섯 번째부터 일곱 번째 맑음(길과 길 아님을 아는 지견, 실천의 지견, 지견)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과 같은 부정이 이어져, 일곱 가지 맑음 전부가 완전한 고요히 꺼짐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결론이 완성됩니다. 마지막 물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다면 이 일곱 가지와 별개로 고요히 꺼짐이 따로 있는가”를 묻는데, 이 역시 부정됩니다. 맑음들이 고요히 꺼짐이 아니면서도, 고요히 꺼짐이 맑음들과 무관한 것도 아니라는 역설적인 자리에 다다릅니다.
묵상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답만으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요. 그런 답을 받고도 조금 더 물음을 이어가 본 경험이 있나요? 끝까지 캐묻지 않고 그냥 넘어간 적도 함께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벗이여, ‘계의 맑음이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닙바나)인가’라고 물으니 그대는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습니다.
‘마음의 맑음이…’라고 물어도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습니다.
‘견해의 맑음이…’ …
‘의심을 건너는 맑음이…’ …
‘길과 길 아님을 아는 지견의 맑음이…’ …
‘실천의 지견의 맑음이…’ …
‘지견의 맑음이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인가’라고 물어도 그대는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습니다.”
“‘Kiṁ nu kho, āvuso, sīlavisuddhi anupādāparinibbānan’ti iti puṭṭho samāno ‘no hidaṁ, āvuso’ti vadesi. ‘Kiṁ panāvuso, cittavisuddhi anupādāparinibbānan’ti iti puṭṭho samāno ‘no hidaṁ, āvuso’ti vadesi. ‘Kiṁ nu kho, āvuso, diṭṭhivisuddhi anupādāparinibbānan’ti …pe… kaṅkhāvitaraṇavisuddhi … maggāmaggañāṇadassanavisuddhi … paṭipadāñāṇadassanavisuddhi … ‘kiṁ nu kho, āvuso, ñāṇadassanavisuddhi anupādāparinibbānan’ti iti puṭṭho samāno ‘no hidaṁ, āvuso’ti vade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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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사리뿟따가 방금 전 되풀이된 “아니다”라는 답을 처음부터 다시 확인하기 시작합니다. 같은 질문과 같은 답이 되풀이되는 부분은 줄였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여덟 번째 물음까지 마저 확인한 뒤 핵심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묵상
한 번 캐물은 것으로 모자라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 가며 답을 구한 경험이 있나요? 그렇게까지 해서 얻은 답이, 처음의 짧은 답만으로 그쳤을 때와 얼마나 달랐을지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이 일곱 가지와 달리 따로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닙바나)이 있는가’라고 물어도 그대는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습니다.
벗이여, 그렇다면 이 말의 뜻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Kiṁ panāvuso, aññatra imehi dhammehi anupādāparinibbānan’ti iti puṭṭho samāno ‘no hidaṁ, āvuso’ti vadesi. Yathākathaṁ panāvuso, imassa bhāsitassa attho daṭṭhabbo”ti?
맛지마 니까야 MN 24 라타위니따 숫따 (이어 타는 수레)
배경
앞에서 확인한 일곱 가지 맑음에 이어, 여덟 번째로 ‘이 일곱 가지와 무관하게 고요히 꺼짐이 따로 있는가’라는 물음까지 되짚습니다. 여덟 번의 ‘아니다’를 모두 확인한 사리뿟따는 마침내 ‘그렇다면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물으며, 뒤에 이어질 뿐나 님의 설명을 이끌어 냅니다. 질문과 대답을 이렇게 촘촘히 되짚는 방식은 결론을 서둘러 내놓기보다 그 이유를 하나하나 다져 가는 이 경의 문답 방식을 보여 줍니다.
묵상
여러 번 되풀이해 확인한 끝에 던진 질문이, 정작 그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어떤 답이 나올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던 경험이 있나요? 그런 물음을 끝까지 밀고 나간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벗이여, 만약 부처님께서 계의 맑음을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닙바나)이라고 선언하신다면, 그것은 움켜쥠이 남아 있는 것을 움켜쥠이 남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셈이 됩니다.
…
길과 길 아님을 아는 앎과 봄의 맑음을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이라고 선언하신다 해도, 그것 역시 움켜쥠이 남아 있는 것을 움켜쥠이 남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셈이 됩니다.”
“Sīlavisuddhiñce, āvuso, bhagavā anupādāparinibbānaṁ paññapeyya, saupādānaṁyeva samānaṁ anupādāparinibbānaṁ paññapeyya. … Maggāmaggañāṇadassanavisuddhiñce, āvuso, bhagavā anupādāparinibbānaṁ paññapeyya, saupādānaṁyeva samānaṁ anupādāparinibbānaṁ paññapey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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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뿐나 님의 대답이 시작됩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어느 한 맑음을 곧 완전한 고요히 꺼짐이라고 선언하신다면, 아직 움켜쥠이 남아 있는 상태를 움켜쥠이 없는 상태라고 부르는 셈이 됩니다. 원문은 이 문장을 계, 마음, 견해, 의심을 건넘, 길과 길 아님을 아는 지견, 다섯 맑음 각각에 대해 맑음의 이름만 바꾸어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묵상
“이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지만, 목표에 이르는 과정과 무관하지도 않다”는 관계를 삶에서 겪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애매한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지금도 그런 것이 있는지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벗이여, 실천의 앎과 봄의 맑음을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이라고 선언하신다 해도, 그것 역시 움켜쥠이 남아 있는 것을 움켜쥠이 남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셈이 됩니다.
앎과 봄의 맑음을 그렇게 선언하신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벗이여, 만약 움켜쥠이 남지 않은 완전한 고요히 꺼짐이 이 일곱 가지와 달리 따로 있는 것이라면, 여느 사람도 완전한 고요히 꺼짐에 들 것입니다.
벗이여, 여느 사람에게는 바로 이 일곱 가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Paṭipadāñāṇadassanavisuddhiñce, āvuso, bhagavā anupādāparinibbānaṁ paññapeyya, saupādānaṁyeva samānaṁ anupādāparinibbānaṁ paññapeyya. Ñāṇadassanavisuddhiñce, āvuso, bhagavā anupādāparinibbānaṁ paññapeyya, saupādānaṁyeva samānaṁ anupādāparinibbānaṁ paññapeyya. Aññatra ce, āvuso, imehi dhammehi anupādāparinibbānaṁ abhavissa, puthujjano parinibbāyeyya. Puthujjano hi, āvuso, aññatra imehi dhamme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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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 절의 같은 논법이 실천의 앎과 봄의 맑음, 앎과 봄의 맑음까지 이어져 일곱 가지 맑음 전부에 대한 반박이 완성됩니다. 그 뒤 뿐나 님은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논증을 폅니다. 만약 완전한 고요히 꺼짐이 이 일곱 가지 맑음과 무관하게 따로 있는 것이라면, 아직 이 맑음들을 하나도 갖추지 못한 여느 사람조차 고요히 꺼짐에 들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느 사람에게는 바로 이 일곱 가지가 없으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로써 맑음은 고요히 꺼짐이 아니면서도 고요히 꺼짐과 무관하지 않다는 앞의 역설이 풀립니다.
묵상
지금 밟고 있는 단계를 건너뛰고 곧장 결과만 얻고 싶었던 적이 있나요? 그런 마음이 들 때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싶은가요? 건너뛰지 않고 끝까지 밟아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