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거룩한 제자는 몸의 아픔을 겪되 두 번째 화살을 더하지 않고 느낌의 성질과 벗어남을 압니다.
“수행자들이여, 배운 거룩한 제자는 괴로운 느낌에 닿아도 슬퍼하거나 지치거나 한탄하거나 가슴을 치고 울부짖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몸의 느낌 하나를 겪고 마음의 느낌은 겪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화살을 맞아도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은 이와 같다. 수행자들이여, 그는 한 화살만 겪는다. 수행자들이여, 이처럼 그는 슬퍼하거나 지치거나 한탄하거나 가슴을 치고 울부짖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고 몸의 느낌 하나를 겪고 마음의 느낌은 겪지 않는다.”
Sutavā ca kho, bhikkhave, ariyasāvako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ḷiṁ kandati, na sammohaṁ āpajjati. So ekaṁ vedanaṁ vedayati— kāyikaṁ, na cetasikaṁ. Seyyathāpi, bhikkhave, purisaṁ sallena vijjheyya. Tamenaṁ dutiyena sallena anuvedhaṁ na vijjheyya. Evañhi so, bhikkhave, puriso ekasallena vedanaṁ vedayati. Evameva kho,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ḷiṁ kandati, na sammohaṁ āpajjati. So ekaṁ vedanaṁ vedayati— kāyikaṁ, na cetasikaṁ.
상윳따 니까야 SN 36.6 살라 숫따 (화살)
배경
앞서 나온 보통 사람과 달리, 배운 거룩한 제자도 괴로운 느낌에 닿지만 슬픔에서 혼란까지의 여섯 반응을 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몸의 느낌 하나만 겪고 마음의 느낌은 겪지 않는다는 말이 비유 앞뒤에 두 번 나오며,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아 한 화살만 겪는 사람에 견줍니다. 이 하나와 둘의 차이에서 ‘화살’이라는 경의 제목이 나옵니다. 현대적 적용에서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도움 없이 고통을 견디라는 지침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묵상
아픔을 없앨 수 없는 순간에도 그 위에 자신을 비난하는 생각까지 더하지 않을 여지가 있나요? 몸에서 느껴지는 것과 마음이 말하는 것을 잠시 따로 이름 붙여 보는 일이 지금 안전하고 가능할까요?
“그는 괴로운 느낌에 닿아도 그것에 맞서지 않는다. 괴로운 느낌에 맞서지 않는 그에게 성냄의 잠재 성향이 자리 잡지 않는다. 그는 괴로운 느낌에 닿아도 감각적 즐거움을 반기지 않는다. 왜인가?
수행자들이여, 배운 거룩한 제자는 감각적 즐거움 말고도 괴로운 느낌에서 벗어날 길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반기지 않는 그에게 즐거운 느낌을 향한 탐냄의 잠재 성향이 자리 잡지 않는다.”
Tassāyeva kho pana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paṭighavā na hoti. Tamenaṁ dukkhāya vedanāya appaṭighavantaṁ, yo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o, so nānuseti. So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kāmasukhaṁ nābhinandati. Taṁ kissa hetu? Pajānāti hi so,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aññatra kāmasukhā dukkhāya vedanāya nissaraṇaṁ. Tassa kāmasukhaṁ nābhinandato yo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o, so nānuseti.
상윳따 니까야 SN 36.6 살라 숫따 (화살)
배경
한 화살의 비유 뒤에는 앞서 나온 원인과 결과를 다시 짚습니다. 배운 거룩한 제자는 괴로운 느낌에 맞서지 않으므로 성냄의 잠재 성향이 자리 잡지 않고, 감각적 즐거움을 반기지 않으므로 즐거운 느낌을 향한 탐냄의 잠재 성향도 자리 잡지 않습니다. 전환의 이유는 감각적 즐거움 말고도 괴로운 느낌에서 벗어날 길을 안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벗어남을 아는 앎이 이 두 반응의 고리를 끊습니다.
묵상
괴로움을 밀어내거나 반대되는 즐거움으로 덮는 것 말고 내가 알고 있는 안전한 돌봄은 무엇인가요? 지금 가능한 것이 없다면 없다고 알아차려도 될까요?
“그는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그래서 덤덤한 느낌을 향한 알지 못함의 잠재 성향이 자리 잡지 않는다.
그는 즐거운 느낌을 겪어도 풀려난 채 겪고, 괴로운 느낌을 겪어도 풀려난 채 겪으며, 덤덤한 느낌을 겪어도 풀려난 채 겪는다.”
So tāsaṁ vedanānaṁ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ṁ 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ṁ pajānāti. Tassa tāsaṁ vedanānaṁ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ṁ pajānato, yo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so nānuseti. So sukhañce vedanaṁ vedayati, visaññutto naṁ vedayati. Dukkhañce vedanaṁ vedayati, visaññutto naṁ vedayati. Adukkhamasukhañce vedanaṁ vedayati, visaññutto naṁ vedayati.
상윳따 니까야 SN 36.6 살라 숫따 (화살)
배경
앞에서 알지 못했다고 한 느낌의 다섯 측면을 이제 있는 그대로 안다고 되풀이합니다. 느낌의 일어남·사라짐·달콤함·위험·벗어남을 알기 때문에 덤덤한 느낌을 향한 알지 못함의 잠재 성향이 자리 잡지 않습니다. 이어 즐거운 느낌·괴로운 느낌·덤덤한 느낌을 각각 겪어도 모두 풀려난 채 겪는다고 세 번 나누어 말합니다. 세 종류의 느낌은 그대로 있어도, 그 느낌과 얽매임은 서로 분리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묵상
즐거움·괴로움·덤덤함 가운데 하나를 느끼면서도 그것이 곧 나 전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는 순간이 있나요? 느낌을 밀어내거나 붙들지 않고 변화를 알아차리는 일이 지금 가능할까요? 어렵다면 한 번의 변화만 기억해도 괜찮을까요?
“수행자들이여, 그를 태어남·늙음·죽음과 슬픔·울부짖음·아픔·근심·절망에서 풀려나고, 괴로움에서 풀려난 배운 거룩한 제자라고 나는 말한다.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과 배운 거룩한 제자 사이의 차이와 구별과 다름이다.”
Ayaṁ vuccati,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visaññutto jātiyā jarāya 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visaññutto dukkhasmā’ti vadāmi. Ayaṁ kho, bhikkhave, viseso, ayaṁ adhippayāso, idaṁ nānākaraṇaṁ sutavato ariyasāvakassa assutavatā puthujjanenāti.
상윳따 니까야 SN 36.6 살라 숫따 (화살)
배경
산문 가르침의 결론은 배운 거룩한 제자가 태어남·늙음·죽음과 슬픔·울부짖음·아픔·근심·절망에서 풀려났고, 괴로움에서 풀려났다고 부처님께서 말하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어 첫 질문의 세 표현을 그대로 받아 차이·구별·다름을 각각 확인합니다. 둘을 가르는 기준은 얽매인 채 겪는가, 풀려난 채 겪는가입니다. 처음의 물음과 긴 산문 답변이 여기에서 닫히고 다음 시로 넘어갑니다.
묵상
같은 일을 겪어도 반응 방식에 따라 괴로움과의 관계가 달라졌던 경험이 있나요? 얽매였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순간도 배움의 일부로 보면서, 그때 무엇이 달라졌는지 살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