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간디야여, 마치 온몸에 상처가 헐고
진물이 흐르며 벌레에 파먹히는 나병 환자가,
손톱으로 상처의 아가리를 긁어 대며
숯불 구덩이에 몸을 쬐는 것과 같으니라.
마간디야여, 그 나병 환자가
상처의 아가리를 긁어 대며
숯불 구덩이에 몸을 쬐면 쬘수록,
그 상처의 아가리는 더욱 더러워지고
더욱 악취가 나며 더욱 곪아 가느니라.
그런데도 그에게는 상처의 아가리를 긁는 데서 오는
얼마간의 시원함과 얼마간의 만족이 있느니라.
마간디야여, 이와 같이 중생들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한 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에 파먹히고
감각적 욕망의 열병에 타들어 가면서
감각적 욕망을 거듭 즐기느니라.
Seyyathāpi, māgaṇḍiya, kuṭṭhī puriso arugatto pakkagatto kimīhi khajjamāno nakhehi vaṇamukhāni vippatacchamāno aṅgārakāsuyā kāyaṁ paritāpeti. Yathā yathā kho, māgaṇḍiya, asu kuṭṭhī puriso arugatto pakkagatto kimīhi khajjamāno nakhehi vaṇamukhāni vippatacchamāno aṅgārakāsuyā kāyaṁ paritāpeti tathā tathāssa tāni vaṇamukhāni asucitarāni ceva honti duggandhatarāni ca pūtikatarāni ca, hoti ceva kāci sātamattā assādamattā-yadidaṁ vaṇamukhānaṁ kaṇḍūvanahetu; evameva kho, māgaṇḍiya, sattā kāmesu avītarāgā kāmataṇhāhi khajjamānā kāmapariḷāhena ca pariḍayhamānā kāme paṭisevanti.
맛지마 니까야 MN 75 마간디야 경 (Māgandiyasutta) 배경
부처님이 마간디야라는 유행자에게 드신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겨누는 곳은 “의지가 약하다”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상처를 긁는 사람은 자신을 해치려고 긁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 정말로 시원하기 때문에 긁습니다. 부처님은 그 시원함이 가짜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얼마간의 시원함과 얼마간의 만족이 있다”고 분명히 인정하십니다. 문제는 그 시원함이 진짜라는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진짜이기 때문에 손이 갑니다. 그리고 긁을수록 상처는 깊어집니다. 경의 뒷부분에서 이 사람은 병이 나은 뒤 오히려 그 불을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 예전에 즐거움으로 느꼈던 것이, 감각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고통으로 느껴진 것입니다. 이 비유는 병을 앓는 사람을 낮추어 보려는 말이 아니라, 아픈 자리를 긁을 때의 몸의 경험을 빌려 온 것입니다.
묵상
그것을 할 때 정말로 좋았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굳이 부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것이 아무 위로도 주지 않았다면 애초에 붙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다만 이렇게 나누어 볼 수 있을까요 - 그 순간의 시원함은 얼마나 오래갔나요? 그리고 그 뒤에 남은 시간은 얼마나 길었나요? 두 길이를 나란히 놓아 보면 무엇이 보이나요?
뿌리가 상하지 않고 굳건히 남아 있으면
잘린 나무도 다시 자라나듯이,
갈애의 잠재된 성향이 뽑히지 않으면
이 괴로움은 거듭거듭 다시 생겨나느니라.
Yathāpi mūle anupaddave daḷhe, Chinnopi rukkho punareva rūhati; Evampi taṇhānusaye anūhate, Nibbattatī dukkhamidaṁ punappunaṁ.
법구경 Dhammapada 338 배경
다시 손을 댄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보다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라는 결론입니다. 이 게송은 그 결론을 막아섭니다. 나무를 베었는데 다시 자랐다면, 그것은 벤 사람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뿌리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재된 성향(아누사야)”이라고 옮긴 말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조건이 맞으면 올라오는 마음의 결을 가리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잘려 나가도 이 결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몇 달을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 무너집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사람의 결함이 아니라 뿌리의 문제로 설명하십니다. 잘라 내는 일과 뿌리를 다루는 일이 서로 다른 일이라는 것 -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크게 다릅니다.
묵상
다시 손을 댄 날, 그동안 쌓아 온 시간이 전부 사라졌다고 느끼셨나요? 나무를 한 번 벤 일이 사라지지는 않아요. 다만 뿌리가 남아 있었을 뿐이에요. 그 뿌리가 올라오는 날에는 대개 어떤 조건이 겹쳐 있었나요 - 잠이 모자랐거나, 혼자였거나, 무언가 크게 서운했거나. 그 조건들을 적어 두는 것부터 시작해 볼 수 있을까요?
빠하라다여, 마치 큰 바다가
차츰 기울고 차츰 굽어지고 차츰 깊어질 뿐
갑작스러운 벼랑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빠하라다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규범에서도
차츰 배우고 차츰 행하고 차츰 나아갈 뿐,
갑작스럽게 앎을 꿰뚫는 일은 없느니라.
Seyyathāpi, pahārāda, mahāsamuddo anupubbaninno anupubbapoṇo anupubbapabbhāro, na āyatakeneva papāto; evamevaṁ kho, pahārāda, imasmiṁ dhammavinaye anupubbasikkhā anupubbakiriyā anupubbapaṭipadā, na āyatakeneva aññāpaṭivedho.
앙굿따라 니까야 AN 8.19 빠하라다경 (Pahārādasutta) 배경
부처님이 아수라의 왕 빠하라다와 나누신 대화입니다. 바닷가에 서면 물은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아주 천천히 깊어집니다.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낭떠러지처럼 떨어지는 곳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도 그와 같다고 하십니다. “차츰 배우고 차츰 행하고 차츰 나아갈 뿐”입니다. 무언가를 끊으려는 사람은 대개 반대 방향으로 결심합니다 - 오늘부터 완전히, 단번에, 다시는. 그리고 그 절벽에서 한 번 미끄러지면 처음보다 더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고 느낍니다. 부처님이 그리신 지형에는 절벽이 없습니다. 오늘 한 뼘, 내일 한 뼘 깊어지는 바닥이 있을 뿐입니다.
묵상
“오늘부터 완전히”라는 결심을 몇 번이나 해 보셨나요? 그 결심이 실패했을 때 스스로에게 뭐라고 하셨나요? 절벽 대신 완만한 바닥을 상상해 본다면, 오늘 내디딜 수 있는 한 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주 작아도 괜찮아요 - 오히려 작아야 밟을 수 있어요.
수행자들이여, 아직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위없는 안온을 바라며 머무는,
배우는 자리의 수행자에게
바깥의 조건을 헤아려 볼 때,
좋은 벗을 두는 것만큼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을
나는 달리 보지 못하느니라.
수행자들이여, 좋은 벗을 둔 수행자는
해로운 것을 버리고 이로운 것을 닦느니라.
Sekhassa, bhikkhave, bhikkhuno appattamānasassa anuttaraṁ yogakkhemaṁ patthayamānassa viharato bāhiraṁ aṅganti karitvā nāññaṁ ekaṅgampi samanupassāmi yaṁ evaṁ bahūpakāraṁ yathayidaṁ, bhikkhave, kalyāṇamittatā. Kalyāṇamitto, bhikkhave, bhikkhu akusalaṁ pajahati, kusalaṁ bhāvetī”ti.
이띠붓따까 Iti 17 배우는 자리에 있는 이 경 (Dutiyasekhasutta) 배경
여기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대상은 이미 다 이룬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배우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무언가를 끊으려는 사람이 정확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런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바깥의 조건 가운데 “좋은 벗을 두는 것”보다 나은 것을 보지 못하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를 꼽으신 것이 아니라, 그만한 것이 달리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의 문제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혼자 견디는 힘을 더 키우는 것보다, 곁에 누구를 두느냐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중독을 끊는 자리에서 이 말은 특히 무겁습니다. 혼자 버티다 실패한 것은 사람이 약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지금 이 일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요? 아무도 모른다면, 그것은 부끄러움 때문일까요 아니면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일까요? 부처님도 이 일에는 곁에 있는 사람만 한 것이 없다고 하셨어요. 오늘 단 한 사람에게만 말해 본다면, 누구에게 말하시겠어요? 그리고 무엇이 그 말을 막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