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디가 니까야 DN 11

인용된 가르침 36구절

이 경을 4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신통과 마음 읽기, 그리고 참된 기적 12구절

신통과 남의 마음을 아는 것이 왜 완전한 기적이 될 수 없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느니라. 한때 세존께서는 날란다의 빠와리까 망고 숲에 계셨느니라. 장자의 아들 께왓따가 다가와 절하고 한쪽에 앉아 이렇게 말씀드렸느니라. ‘세존이시여, 이 날란다는 부유하고 번창하며 사람이 많고 붐비니, 세존께 깊이 신심을 내고 있습니다. 부디 한 수행자에게 명하시어 사람을 뛰어넘는 신통의 기적을 보이게 하소서. 그리하면 이 날란다는 더욱더 신심을 내게 될 것입니다.’

Evaṁ me sutaṁ— ekaṁ samayaṁ bhagavā nāḷandāyaṁ viharati pāvārikambavane. Atha kho kevaṭṭo gahapatiputt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ṁ abhivādetvā ekamantaṁ nisīdi. Ekamantaṁ nisinno kho kevaṭṭo gahapatiputto bhagavantaṁ etadavoca: “ayaṁ, bhante, nāḷandā iddhā ceva phītā ca bahujanā ākiṇṇamanussā bhagavati abhippasannā. Sādhu, bhante, bhagavā ekaṁ bhikkhuṁ samādisatu, yo uttari manussadhammā iddhipāṭihāriyaṁ karissati; evāyaṁ nāḷandā bhiyyoso mattāya bhagavati abhippasīdissat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경의 첫 장면입니다. 장자의 아들 께왓따가 부유한 도시 날란다를 더 신심 있게 만들 방법으로, 한 수행자가 신통력을 보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원문의 "사람을 뛰어넘는 신통의 기적(uttari manussadhammā iddhipāṭihāriyaṁ)"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초인적 시범을 뜻합니다. 께왓따는 이것이 사람들의 신심을 더 굳게 만들 것이라 기대하지만, 경은 이 요청을 곧바로 들어주지 않고 세 번이나 되풀이하게 하면서 그 요청의 전제를 되짚어 보게 합니다. 이 장면은 뒤이어 나오는 "진짜 기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출발점이 됩니다.

묵상

화려한 능력이나 특별한 증거를 보면 믿음이 더 굳어질 거라 기대해 본 적 있나요? 돌아보면, 누군가를 정말로 신뢰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나요?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나 장면이 있다면 잠시 머물러 보아도 좋아요.

이렇게 말씀드리자 세존께서 께왓따에게 말씀하셨느니라. ‘께왓따여, 나는 수행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침을 설하지 않느니라 - ‘그대들은 흰옷 입은 재가자들 앞에서 사람을 뛰어넘는 신통의 기적을 보이라’ 이렇게는 설하지 않느니라.’

Evaṁ vutte, bhagavā kevaṭṭaṁ gahapatiputtaṁ etadavoca: “na kho ahaṁ, kevaṭṭa, bhikkhūnaṁ evaṁ dhammaṁ desemi: ‘etha tumhe, bhikkhave, gihīnaṁ odātavasanānaṁ uttari manussadhammā iddhipāṭihāriyaṁ karothā’”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께왓따의 청에 대한 세존의 첫 대답입니다. 신통의 기적을 재가자 앞에서 보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부정문으로 답하며, 요청을 곧바로 거절합니다. 이 대답은 경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 곧 신통이 가르침의 중심이 아니라는 입장을 처음으로 드러냅니다. 께왓따는 이 대답에 물러서지 않고 곧 다시 청하게 되는데, 그 반복은 뒤 카드에서 다룹니다. 세존이 딱 잘라 부정하는 말투를 쓴 것은 이 물음 자체를 아예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누군가 원하는 것을 곧바로 들어주지 않고 거절해 본 적 있나요? 지금 이 장면에서 세존의 대답이 매정하게 들리나요, 아니면 다른 뜻으로 읽히나요? 거절 뒤에 숨은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달라질 수 있어요.

께왓따 장자는 두 번째로도 세존께 말씀드렸느니라 - ‘세존이시여, 저는 감히 세존을 거스르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렇게 말씀드릴 뿐입니다 - … 그리하면 이 날란다는 더욱더 신심을 내게 될 것입니다.’ 세존께서도 두 번째로 께왓따 장자에게 말씀하셨느니라 - ‘께왓따여, 나는 수행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침을 설하지 않느니라 - ‘그대들은 흰옷 입은 재가자들 앞에서 신통의 기적을 보이라’ 이렇게는 설하지 않느니라.’

Dutiyampi kho kevaṭṭo gahapatiputto bhagavantaṁ etadavoca: “nāhaṁ, bhante, bhagavantaṁ dhaṁsemi; api ca evaṁ vadāmi:… evāyaṁ nāḷandā bhiyyoso mattāya bhagavati abhippasīdissatī’”ti. Dutiyampi kho bhagavā kevaṭṭaṁ gahapatiputtaṁ etadavoca: “na kho ahaṁ, kevaṭṭa, bhikkhūnaṁ evaṁ dhammaṁ desemi: ‘etha tumhe, bhikkhave, gihīnaṁ odātavasanānaṁ uttari manussadhammā iddhipāṭihāriyaṁ karothā’”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께왓따가 두 번째로 청하는 대목입니다. 그는 첫 번째와 똑같은 말로 다시 청하는데, 원문이 되풀이하는 날란다에 대한 설명은 앞 카드에 이미 나왔으므로 여기서는 줄이고 앞뒤의 새로운 표현("저는 감히 거스르려는 것이 아니라"는 겸손한 표현과, 세존의 되풀이된 거절)에 집중했습니다. 세존은 이번에도 첫 번째와 똑같은 말로 거절하십니다. 다음 카드에서 세 번째 청이 이어집니다.

묵상

한 번 거절당한 뒤에도 조심스러운 말투로 다시 청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진심을 더 잘 전달했던 경험이 있다면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지금 그런 청함이 필요한 자리가 있나요?

께왓따 장자는 세 번째로도 세존께 말씀드렸느니라 - ‘세존이시여, 저는 감히 세존을 거스르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렇게 말씀드릴 뿐입니다 - … 그리하면 이 날란다는 더욱더 신심을 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 이번에는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Tatiyampi kho kevaṭṭo gahapatiputto bhagavantaṁ etadavoca: “nāhaṁ, bhante, bhagavantaṁ dhaṁsemi; api ca evaṁ vadāmi:… Evāyaṁ nāḷandā bhiyyoso mattāya bhagavati abhippasīdissat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께왓따가 세 번째로 같은 말을 청하는 대목입니다. 이번에도 날란다에 대한 설명은 앞서와 같으므로 줄였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세존께서 이전 두 번처럼 거절을 되풀이하지 않고, 대신 신통이 아닌 다른 것을 설명하기로 마음을 돌리십니다. 세 번째 청에 이르러서야 대답이 달라진다는 것이, 께왓따의 거듭된 간절함과 세존이 결국 답을 내놓게 되는 전환점을 함께 보여 줍니다.

묵상

같은 부탁을 세 번이나 되풀이해야 했던 께왓따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떠올려 보면 어떤가요? 거절이 반복될 때 오히려 더 매달리게 되는 마음을 겪어 본 적이 있나요? 그 매달림이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께왓따여, 내가 몸소 깨달아 스스로 실현하여 세상에 알려 온 기적에 이 세 가지가 있느니라. 무엇이 셋인가? 신통의 기적과 마음을 알아내는 기적과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이니라.

1. Iddhipāṭihāriya “Tīṇi kho imāni, kevaṭṭa, pāṭihāriyāni mayā sayaṁ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itāni. Katamāni tīṇi? Iddhipāṭihāriyaṁ, ādesanāpāṭihāriyaṁ, anusāsanīpāṭihāriyaṁ.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세 번째 청을 받은 세존께서 마침내 답을 내놓기 시작하는 대목입니다. 원문에는 이 앞에 "하나, 신통의 기적"이라는 편집자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는 뒤에 이어질 세 항목의 첫째를 미리 알리는 표시입니다. 세존은 신통을 곧바로 보이는 대신, 자신이 인정하는 "기적"에 세 가지가 있다고 재정의합니다 - 신통의 기적, 남의 마음을 아는 기적, 그리고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입니다. 이 셋 가운데 앞의 둘은 뒤에서 곧 그 한계가 드러나고, 셋째만이 참된 기적으로 남게 됩니다.

묵상

"기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나요?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삶을 바꾼 것이 화려한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누군가 건넨 말 한마디였는지 돌아보아도 좋아요. 그 말 한마디를 지금 다시 떠올려 보아도 괜찮아요.

께왓따여, 무엇이 신통의 기적인가? 여기 수행자가 여러 가지 신통변화를 부리나니 - 하나였다가 여럿이 되고, 여럿이었다가 하나가 되며, 나타났다 사라지고, 담과 성벽과 산을 허공처럼 걸림 없이 지나가며, 땅속을 물처럼 오르내리고, 물 위를 땅처럼 걸어가며, 하늘을 새처럼 가부좌한 채 날아가고, 저리도 큰 위력을 지닌 해와 달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몸으로 범천의 세계까지 자유로이 다다르느니라.

Katamañca, kevaṭṭa, iddhipāṭihāriyaṁ? Idha, kevaṭṭa, bhikkhu anekavihitaṁ iddhividhaṁ paccanubhoti—ekopi hutvā bahudhā hoti, bahudhāpi hutvā eko hoti; āvibhāvaṁ tirobhāvaṁ tirokuṭṭaṁ tiropākāraṁ tiropabbataṁ asajjamāno gacchati seyyathāpi ākāse; pathaviyāpi ummujjanimujjaṁ karoti seyyathāpi udake; udakepi abhijjamāne gacchati seyyathāpi pathaviyaṁ; ākāsepi pallaṅkena kamati seyyathāpi pakkhī sakuṇo; imepi candimasūriye evaṁ mahiddhike evaṁ mahānubhāve pāṇinā parāmasati parimajjati; yāva brahmalokāpi kāyena vasaṁ vatte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세존께서 스스로 정의하신 첫째 기적, 신통의 기적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몸을 여럿으로 나누거나 합치고, 물체를 통과하고, 물과 땅을 뒤바꾸어 다니고, 해와 달을 만지는 등 초인적인 능력의 목록이 나열됩니다. 이 목록은 다른 경들에도 되풀이해 나오는 신통력의 정형구로, 수행으로 얻어지는 능력 가운데 하나로 설명되는 것들입니다. 다만 이 경의 흐름에서는 이 능력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뒤이어 이 능력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그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도입부로 쓰입니다.

묵상

몸을 나누고 물 위를 걷는 것 같은 능력을 실제로 본다면 얼마나 놀라울지 상상해 본 적 있나요? 그런 놀라움이 지나간 뒤에도 남는 것은 무엇일지 궁금해해도 괜찮아요. 놀라움과 믿음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도 함께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믿음 있고 신심 있는 어떤 이가 그 수행자가 이런 신통변화를 부리는 것을 보고, 믿음 없는 다른 이에게 이렇게 알리느니라. ‘참으로 놀랍고 참으로 신기하구나, 수행자의 저 큰 신통력과 큰 위력이여! 내가 그 수행자가 이런 일들을 몸소 부리는 것을 직접 보았노라!’

Tamenaṁ aññataro saddho pasanno passati taṁ bhikkhuṁ anekavihitaṁ iddhividhaṁ paccanubhontaṁ—ekopi hutvā bahudhā hontaṁ, bahudhāpi hutvā eko hontaṁ; āvibhāvaṁ tirobhāvaṁ; tirokuṭṭaṁ tiropākāraṁ tiropabbataṁ asajjamānaṁ gacchantaṁ seyyathāpi ākāse; pathaviyāpi ummujjanimujjaṁ karontaṁ seyyathāpi udake; udakepi abhijjamāne gacchantaṁ seyyathāpi pathaviyaṁ; ākāsepi pallaṅkena kamantaṁ seyyathāpi pakkhī sakuṇo; imepi candimasūriye evaṁ mahiddhike evaṁ mahānubhāve pāṇinā parāmasantaṁ parimajjantaṁ yāva brahmalokāpi kāyena vasaṁ vattentaṁ. Tamenaṁ so saddho pasanno aññatarassa assaddhassa appasannassa āroceti: ‘acchariyaṁ vata bho, abbhutaṁ vata bho, samaṇassa mahiddhikatā mahānubhāvatā. Amāhaṁ bhikkhuṁ addasaṁ anekavihitaṁ iddhividhaṁ paccanubhontaṁ—ekopi hutvā bahudhā hontaṁ, bahudhāpi hutvā eko hontaṁ …pe… yāva brahmalokāpi kāyena vasaṁ vattentan’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신통을 본 사람의 반응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그 광경에 감탄하여 믿음 없는 사람에게 자랑삼아 전합니다. 이 장면은 신통이 보는 사람에게 놀라움과 감탄은 줄 수 있어도, 아직 그 자체로 가르침이나 깨달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음 대목에서 믿음 없는 사람이 이 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이어지며, 그 반응이 세존께서 신통을 경계하시는 이유로 연결됩니다.

묵상

누군가 놀라운 것을 보고 흥분해서 전할 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항상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던가요? 놀라움을 전하는 것과 믿음이 생기는 것은 같은 일일까요, 다른 일일까요? 지금 떠오르는 경험이 있다면 잠시 머물러 보아도 좋아요.

믿음 없는 그 사람은 믿음 있는 이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니라 - ‘여보게, 간다리라는 주문이 있다네. 그 수행자는 그 주문으로 그런 신통변화를 부리는 것이라네.’ 께왓따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믿음 없는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께왓따여, 나는 신통의 기적에서 이런 위험을 보기에, 신통의 기적을 몹시 꺼리고 부끄러워하며 싫어하느니라.

Tamenaṁ so assaddho appasanno taṁ saddhaṁ pasannaṁ evaṁ vadeyya: ‘atthi kho, bho, gandhārī nāma vijjā. Tāya so bhikkhu anekavihitaṁ iddhividhaṁ paccanubhoti—ekopi hutvā bahudhā hoti, bahudhāpi hutvā eko hoti …pe… yāva brahmalokāpi kāyena vasaṁ vattetī’ti. Taṁ kiṁ maññasi, kevaṭṭa, api nu so assaddho appasanno taṁ saddhaṁ pasannaṁ evaṁ vadeyyā”ti? “Vadeyya, bhante”ti. “Imaṁ kho ahaṁ, kevaṭṭa, iddhipāṭihāriye ādīnavaṁ sampassamāno iddhipāṭihāriyena aṭṭīyāmi harāyāmi jigucchām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신통을 본 믿음 없는 사람이 그것을 도리어 의심하는 장면입니다. "간다리"는 저잣거리에 알려진 주문이나 술법의 이름으로, 믿음 없는 사람은 수행자의 신통을 수행의 결실이 아니라 그런 술법 하나로 치부해 버립니다. 세존은 께왓따의 동의를 받아 낸 뒤, 바로 이 위험 때문에 신통의 기적을 몹시 꺼리고 부끄러워하며 싫어한다고 직접 밝히십니다. 아무리 놀라운 능력이라도 보는 사람이 술수로 의심해 버리면 믿음을 굳히기는커녕 오히려 헛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세존이 신통을 경계하시는 이유입니다.

묵상

누군가의 진심 어린 행동을 보고도 "수를 쓴 것 아닐까" 하고 의심해 본 적이 있나요? 반대로 내가 진심으로 한 일이 그렇게 의심받는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의심과 진심 사이에서 무엇이 더 오래 남는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께왓따여, 무엇이 남의 마음을 알아내는 기적인가? 여기 수행자가 다른 사람의 마음도, 마음의 상태도, 생각도, 헤아림도 알아내어 이렇게 말하나니 - ‘그대의 뜻은 이러하고, 이러하며, 그대의 마음은 이러하다.’

2. Ādesanāpāṭihāriya Katamañca, kevaṭṭa, ādesanāpāṭihāriyaṁ? Idha, kevaṭṭa, bhikkhu parasattānaṁ parapuggalānaṁ cittampi ādisati, cetasikampi ādisati, vitakkitampi ādisati, vicāritampi ādisati: ‘evampi te mano, itthampi te mano, itipi te cittan’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세존께서 정의하시는 둘째 기적, 남의 마음을 알아내는 기적입니다. 앞서 신통의 기적이 몸으로 부리는 재주였다면,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 헤아림까지 읽어 말로 짚어 내는 능력입니다. 구조는 앞의 신통 항목과 나란하니, 능력을 정의한 뒤 그것을 본 사람의 반응이 곧이어 나오고, 그 반응에서 이 기적의 한계가 드러나게 됩니다. 원문은 "마음도, 마음의 상태도, 생각도, 헤아림도"라는 네 낱말을 나란히 두어, 읽어 내는 대상이 겉생각 하나에 그치지 않음을 보입니다.

묵상

누군가 내 마음을 정확히 읽어 낸다면 반가울까요, 아니면 불편할까요? 마음을 읽히는 것과 마음이 이해받는 것은 같은 것일지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지금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믿음 있는 어떤 이가 그 수행자가 이렇게 남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을 보고, 믿음 없는 다른 이에게 이렇게 알리느니라.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구나, 수행자의 저 큰 신통력이여! 내가 그 수행자가 ‘그대의 뜻은 이러하고, 그대의 마음은 이러하다’ 이렇게 남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을 직접 보았노라!’

Tamenaṁ aññataro saddho pasanno passati taṁ bhikkhuṁ parasattānaṁ parapuggalānaṁ cittampi ādisantaṁ, cetasikampi ādisantaṁ, vitakkitampi ādisantaṁ, vicāritampi ādisantaṁ: ‘evampi te mano, itthampi te mano, itipi te cittan’ti. Tamenaṁ so saddho pasanno aññatarassa assaddhassa appasannassa āroceti: ‘acchariyaṁ vata bho, abbhutaṁ vata bho, samaṇassa mahiddhikatā mahānubhāvatā. Amāhaṁ bhikkhuṁ addasaṁ parasattānaṁ parapuggalānaṁ cittampi ādisantaṁ, cetasikampi ādisantaṁ, vitakkitampi ādisantaṁ, vicāritampi ādisantaṁ: “evampi te mano, itthampi te mano, itipi te cittan”’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남의 마음을 읽어 내는 것을 본 사람의 반응이 앞의 신통 대목과 같은 틀로 되풀이됩니다. 믿음 있는 이는 감탄하여 전하고, 이 감탄이 다음 대목에서 믿음 없는 사람에 의해 다시 의심받게 됩니다. 같은 구조가 두 번째 기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이 경이 신통뿐 아니라 마음을 읽는 능력조차 같은 이유로 완전한 기적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묵상

똑같이 놀라운 일도 두 번째로 들으면 처음만큼 놀랍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 익숙해짐은 무엇을 말해 준다고 생각하나요? 놀라움이 옅어진 자리에 무엇이 대신 남는지도 살펴보아도 좋아요.

믿음 없는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니라 - ‘여보게, 마니까라는 주문이 있다네. 그 수행자는 그 주문으로 남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이라네.’ 께왓따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믿음 없는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께왓따여, 나는 남의 마음을 알아내는 기적에서 이런 위험을 보기에, 그 기적을 몹시 꺼리고 부끄러워하며 싫어하느니라.

Tamenaṁ so assaddho appasanno taṁ saddhaṁ pasannaṁ evaṁ vadeyya: ‘atthi kho, bho, maṇikā nāma vijjā; tāya so bhikkhu parasattānaṁ parapuggalānaṁ cittampi ādisati, cetasikampi ādisati, vitakkitampi ādisati, vicāritampi ādisati: “evampi te mano, itthampi te mano, itipi te cittan”’ti. Taṁ kiṁ maññasi, kevaṭṭa, api nu so assaddho appasanno taṁ saddhaṁ pasannaṁ evaṁ vadeyyā”ti? “Vadeyya, bhante”ti. “Imaṁ kho ahaṁ, kevaṭṭa, ādesanāpāṭihāriye ādīnavaṁ sampassamāno ādesanāpāṭihāriyena aṭṭīyāmi harāyāmi jigucchām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둘째 기적도 첫째와 똑같은 결말을 맞습니다. 이번에는 "마니까"라는 주문의 이름이 등장하여, 믿음 없는 사람은 마음을 읽어 내는 능력마저 술법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세존은 다시 께왓따의 동의를 확인한 뒤, 같은 이유로 이 기적 또한 몹시 꺼리고 부끄러워하며 싫어한다고 밝히십니다. 신통과 마음 읽기, 이 두 가지 기적이 나란히 같은 위험 때문에 기각되면서, 경은 이제 셋째 기적으로 눈을 돌릴 준비를 합니다.

묵상

겉으로 보기에 신비하고 놀라운 것일수록, 그것을 의심하는 마음도 함께 커지는 것 같지 않나요? 정말 믿을 만한 것은 오히려 평범해 보일 때가 있는지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 하나를 떠올려 보아도 괜찮아요.

께왓따여, 무엇이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인가? 여기 수행자가 이렇게 가르쳐 이끄나니 -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는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마음에 새기고 저렇게는 마음에 새기지 말라. 이것은 버리고 저것을 이루어 머물라.’ 께왓따여, 이것을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이라 하느니라.

3. Anusāsanīpāṭihāriya Katamañca, kevaṭṭa, anusāsanīpāṭihāriyaṁ? Idha, kevaṭṭa, bhikkhu evamanusāsati: ‘evaṁ vitakketha, mā evaṁ vitakkayittha, evaṁ manasikarotha, mā evaṁ manasākattha, idaṁ pajahatha, idaṁ upasampajja viharathā’ti. Idaṁ vuccati, kevaṭṭa, anusāsanīpāṭihāriyaṁ.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셋째 기적,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이 정의되는 대목입니다. 앞의 둘이 초능력적인 시범이었던 것과 달리, 이것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생각하지 말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이룰지 구체적으로 일러 주는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신통이나 마음 읽기와 달리 이 기적은 술법으로 의심받을 여지가 없습니다 - 누구나 그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의만으로는 짧아 보이지만, 뒤이어 이 가르침이 실제로 어떤 길을 거쳐 사람을 이끄는지 아주 길게 펼쳐집니다.

묵상

누군가 신기한 능력을 보여줄 때와, 누군가 진심으로 "이렇게 해보라"고 일러 줄 때, 어느 쪽이 실제로 삶을 바꾸던가요? 지금 떠오르는 조언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 조언을 누가, 어떤 말투로 건넸는지도 함께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2 가르침으로 이끄는 것이 참된 기적이다 3구절

계행에서 선정과 지혜에 이르는 전 수행 과정이 왜 참된 기적인지 설명합니다.

다시, 께왓따여, 여기 여래가 세상에 태어나나니, 공양받아 마땅하고 바르게 깨달은 이이니라… 께왓따여, 이렇게 수행자는 계행을 갖추게 되나니… 첫 번째 선정을 이루어 머무느니라. 께왓따여, 이것도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이라 하나니…

Puna caparaṁ, kevaṭṭa, idha tathāgato loke uppajjati arahaṁ sammāsambuddho …pe… Evaṁ kho, kevaṭṭa, bhikkhu sīlasampanno hoti …pe… paṭham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Idampi vuccati, kevaṭṭa, anusāsanīpāṭihāriyaṁ …pe…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을 실제로 어떻게 펼치는지 보이는 대목입니다. 원문은 여래의 출현에서 계행을 갖추는 과정, 감각의 문을 지키는 수행을 거쳐 첫째 선정에 이르는 전 과정을 줄임표로 압축해 놓았는데, 이는 다른 경(사문과경 등)에 이미 온전히 나오는 잘 알려진 정형구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 자체의 관심은 그 세부 내용의 반복이 아니라, 이 전 과정 하나하나가 다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에 해당한다고 거듭 선언하는 데 있습니다. 원문의 생략 표시는 편집자가 이미 다른 곳에 있는 내용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줄인 것이며, 없는 내용을 지어 채우지 않았습니다.

묵상

계행을 갖추고 마음을 다잡아 가는 그 오랜 과정 하나하나가 "기적"이라 불린다면, 지금 나의 작은 습관 하나도 그런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요? 거창한 결과보다 그 과정 자체를 바라보면 어떻게 다르게 보이나요?

둘째 선정을… 셋째 선정을… 넷째 선정을 이루어 머무느니라. 께왓따여, 이것도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이라 하나니…

dutiyaṁ jhānaṁ …pe… tatiyaṁ jhānaṁ …pe…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Idampi vuccati, kevaṭṭa, anusāsanīpāṭihāriyaṁ …pe…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네 가지 선정, 곧 마음을 고요히 모아 가는 네 단계를 차례로 지나는 대목입니다. 원문은 각 선정의 세부 내용을 이미 다른 곳에서 다룬 대로 생략하고, 둘째·셋째 선정은 이름만, 넷째 선정만 "이루어 머무느니라"까지 온전히 적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하나에도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이라는 이름이 똑같이 되풀이해 붙습니다. 선정이라는, 화려하지 않은 내면의 성취조차 이 경에서는 신통이나 마음 읽기보다 더 참된 기적으로 대접받습니다.

묵상

마음이 차츰 고요해지는 것을 스스로 느껴 본 적이 있나요? 그 고요함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다 해도, 그것이 덜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오늘 하루 중 잠깐이라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면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지혜와 봄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하나니… 이것도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이라 하나니… ‘다시는 이러한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꿰뚫어 아나니… 이것도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이라 하느니라. 께왓따여, 이 셋이 내가 몸소 깨달아 스스로 실현하여 알려 온 기적이니라.

ñāṇadassanāya cittaṁ abhinīharati abhininnāmeti …pe… idampi vuccati, kevaṭṭa, anusāsanīpāṭihāriyaṁ …pe… nāparaṁ itthattāyāti pajānāti …pe… idampi vuccati, kevaṭṭa, anusāsanīpāṭihāriyaṁ. Imāni kho, kevaṭṭa, tīṇi pāṭihāriyāni mayā sayaṁ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itān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선정을 발판으로 지혜와 봄으로 마음을 돌려, 마침내 "다시는 이러한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꿰뚫어 아는 데까지 이르는 대목입니다. 이 마지막 앎은 다른 경들에서 번뇌가 다한 이의 앎으로 설명되는 정형구이며, 여기서도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 대목을 끝으로 세존은 처음에 약속한 대로 세 가지 기적을 정리해 다시 선언하십니다 - 신통, 마음 읽기, 그리고 이 길고 긴 수행의 전 과정인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입니다. 셋 중 이것만이 뒤에서도 다시 부정되지 않고 살아남습니다.

묵상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아차린 순간이 살면서 있었나요? 크든 작든, 그런 앎이 찾아온 순간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그 앎이 찾아오기까지 무엇을 지나왔는지도 함께 헤아려 보아도 괜찮아요.

3 땅·물·불·바람이 그치는 곳을 신들에게 묻고 다니다 14구절

한 비구가 신들의 세계를 오르내리며 답을 찾다가 결국 부처님께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께왓따여, 옛적에 이 수행자 승가 가운데 한 수행자에게 이런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느니라 - ‘이 네 가지 큰 요소, 곧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의 요소는 어디서 남김없이 그치는가?’

4. Bhūtanirodhesakabhikkhuvatthu Bhūtapubbaṁ, kevaṭṭa, imasmiññeva bhikkhusaṅghe aññatarassa bhikkhuno evaṁ cetaso parivitakko udapādi: ‘kattha nu kho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가르침으로 이끄는 기적을 다 설명한 세존께서 화제를 바꾸어, 옛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기 시작하는 대목입니다. 어떤 수행자가 땅·물·불·바람이라는 네 가지 큰 요소가 "남김없이 그치는(aparisesā nirujjhanti)"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합니다. 이 물음은 뒤이어 그 수행자가 신들의 세계를 차례로 오르내리며 답을 찾아다니는 긴 여정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앞서 다룬 "참된 기적"의 주제와 이어져, 아무리 높은 신이라도 답할 수 없는 것을 결국 누가 답해 주는지를 보여 주게 됩니다.

묵상

풀리지 않는 물음 하나를 붙들고 여기저기 물으러 다녀 본 적이 있나요? 그 답을 결국 어디서, 혹은 누구에게서 찾았는지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아직 풀리지 않은 물음이 지금 남아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러자 께왓따여, 그 수행자는 어떤 집중에 들었는데, 마음이 고요히 모이자 신들에게 이르는 길이 나타났느니라. 그는 네 대왕천의 신들에게 다가가 물었느니라 - ‘벗들이여, 이 네 가지 큰 요소는 어디서 남김없이 그치는가?’ 네 대왕천의 신들이 답하였느니라 - ‘수행자여, 우리도 알지 못하오. 다만 우리보다 뛰어나고 훌륭하신 사대천왕이 계시니, 그분들은 아실 것이오.’

Atha kho so, kevaṭṭa, bhikkhu tathārūpaṁ samādhiṁ samāpajji, yathāsamāhite citte devayāniyo maggo pāturahosi. Atha kho so, kevaṭṭa, bhikkhu yena cātumahārājikā de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cātumahārājike deve etadavoca: ‘kattha nu kho, āvuso,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Evaṁ vutte, kevaṭṭa, cātumahārājikā devā taṁ bhikkhuṁ etadavocuṁ: ‘mayampi kho, bhikkhu, na jānāma: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Atthi kho, bhikkhu, cattāro mahārājāno amhehi abhikkantatarā ca paṇītatarā ca. Te kho etaṁ jāneyyuṁ: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수행자가 답을 찾아 신들의 세계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첫 장면입니다. 그는 삼매의 힘으로 신들에게 이르는 길을 얻어, 가장 낮은 하늘인 네 대왕천의 신들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들도 답을 모른 채, 자신들보다 "뛰어나고 훌륭한(abhikkantatarā ca paṇītatarā ca)" 이가 알 것이라며 더 위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이 물음-모름-위로 미루기의 틀은 이 뒤로 하늘의 위계를 오를 때마다 그대로 되풀이되며, 그 되풀이 자체가 이 이야기의 요점이 됩니다.

묵상

누구에게 물어도 "나는 모른다, 저 사람은 알 것이다"는 대답만 돌아온 적이 있나요? 그럴 때 어디까지 물으러 다니고, 어디서 멈추게 되던가요? 그 물음을 아직 붙들고 있다면 지금은 어디쯤 와 있나요?

그 수행자는 사대천왕에게 다가가 물었느니라 - ‘벗들이여, 이 네 가지 큰 요소는 어디서 남김없이 그치는가?’ 사대천왕이 답하였느니라 - ‘수행자여, 우리도 알지 못하오. 다만 우리보다 뛰어나고 훌륭한 서른셋 하늘의 신들이 있으니, 그들은 이를 알 것이오.’

Atha kho so, kevaṭṭa, bhikkhu yena cattāro mahārājān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cattāro mahārāje etadavoca: ‘kattha nu kho, āvuso,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Evaṁ vutte, kevaṭṭa, cattāro mahārājāno taṁ bhikkhuṁ etadavocuṁ: ‘mayampi kho, bhikkhu, na jānāma: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Atthi kho, bhikkhu, tāvatiṁsā nāma devā amhehi abhikkantatarā ca paṇītatarā ca. Te kho etaṁ jāneyyuṁ: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수행자가 네 대왕천의 신들에 이어, 이번에는 사대천왕 자신들을 찾아가는 대목입니다. 앞서 그 신하격인 신들이 몰랐던 것처럼 사대천왕도 알지 못하며, 자신들보다 뛰어난 서른셋 하늘의 신들을 가리킵니다. 물음과 대답의 문장은 앞 카드와 토씨까지 똑같이 되풀이되는데, 이는 이 경 자체가 이런 반복을 통해 위계를 하나씩 오르는 구조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읽힙니다. 이 되풀이는 다음 카드의 서른셋 하늘, 그다음 카드의 삭까에 이르기까지 같은 틀로 이어집니다.

묵상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같은 대답만 돌아온다면, 그것이 알려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계속 위로만 찾아 올라가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답을 찾는 것 사이에서 지금 나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요?

그 수행자는 서른셋 하늘의 신들에게 다가가 물었느니라 - ‘벗들이여, 이 네 가지 큰 요소는 어디서 남김없이 그치는가?’ 서른셋 하늘의 신들이 답하였느니라 - ‘수행자여, 우리도 알지 못하오. 다만 우리보다 뛰어나고 훌륭한 신들의 왕 삭까가 있으니, 그가 이를 알 것이오.’

Atha kho so, kevaṭṭa, bhikkhu yena tāvatiṁsā de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tāvatiṁse deve etadavoca: ‘kattha nu kho, āvuso,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Evaṁ vutte, kevaṭṭa, tāvatiṁsā devā taṁ bhikkhuṁ etadavocuṁ: ‘mayampi kho, bhikkhu, na jānāma: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Atthi kho, bhikkhu, sakko nāma devānamindo amhehi abhikkantataro ca paṇītataro ca. So kho etaṁ jāneyya: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다시 한 단계 위, 서른셋 하늘의 신들을 찾아가지만 대답은 똑같습니다. 이번에 가리키는 이는 "신들의 왕 삭까(sakko devānamindo)"로, 이 하늘 세계 전체를 다스린다고 여겨지는 존재입니다. 같은 물음과 같은 모름이 세 번째로 되풀이되면서, 지위가 아무리 높아져도 답에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다음 카드에서는 마침내 그 삭까를 직접 찾아가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묵상

더 높은 자리, 더 대단한 이름을 가진 존재라면 답을 알 것이라는 기대가 이번에도 무너집니다. 그런 기대가 무너질 때, 다음에는 어디로 눈을 돌리게 되나요? 지금 그 답을 찾고 있다면 어디쯤에 있나요?

그 수행자는 신들의 왕 삭까에게 다가가 물었느니라 - ‘벗이여, 이 네 가지 큰 요소는 어디서 남김없이 그치는가?’ 삭까가 답하였느니라 - ‘수행자여, 나 또한 알지 못하오. 다만 나보다 뛰어나고 훌륭한 야마천의 신들이 있으니…’

Atha kho so, kevaṭṭa, bhikkhu yena sakko devānamind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sakkaṁ devānamindaṁ etadavoca: ‘kattha nu kho, āvuso,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Evaṁ vutte, kevaṭṭa, sakko devānamindo taṁ bhikkhuṁ etadavoca: ‘ahampi kho, bhikkhu, na jānāmi: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신들의 왕 삭까에게 마침내 이르지만, 그조차 답을 모릅니다. 앞서 신들의 무리는 "우리는(mayampi)"이라는 말로 함께 모른다고 답했는데, 삭까는 홀로 "나는(ahampi)"이라는 말로 답합니다. 이는 삭까가 무리가 아니라 단독으로 존재하는 신들의 왕이기 때문이며, 이 미묘한 말투 차이를 원문 그대로 살렸습니다. 다음 카드에서는 삭까보다도 위에 있다는 야마천부터 시작해 여러 하늘이 한꺼번에 압축되어 이어집니다.

묵상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도 결국 모른다고 답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나에게 어떤 위안이나 깨달음을 주나요? 답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솔직함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수행자여, 야마천이라는 신들이 있으니… 수야마라는 천자가 있으니… 도솔천이라는 신들이 있으니… 산뚜싯따라는 천자가 있으니… 화락천이라는 신들이 있으니… 수님미따라는 천자가 있으니… 타화자재천이라는 신들이 있으니… 와사왓띠라는 천자가 우리보다 뛰어나고 훌륭하니, 그가 알 것이오.’

Atthi kho, bhikkhu, yāmā nāma devā …pe… suyāmo nāma devaputto … tusitā nāma devā … santussito nāma devaputto … nimmānaratī nāma devā … sunimmito nāma devaputto … paranimmitavasavattī nāma devā … vasavattī nāma devaputto amhehi abhikkantataro ca paṇītataro ca. So kho etaṁ jāneyya: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야마천에서 타화자재천에 이르는 여러 하늘을 잇달아 오르는 대목입니다. 원문 자체가 이 구간을 "…pe…" 표시로 크게 줄여 놓았는데, 이는 앞서 나온 것과 같은 물음-모름-위로 미루기의 틀이 각 하늘마다 이름만 바뀌어 되풀이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카드도 원문이 이미 압축한 그대로, 하늘의 이름만 이어 옮겼습니다. 삭까가 야마천을 가리킨 뒤로 여섯 하늘을 더 거쳐 마침내 타화자재천의 와사왓띠 천자에 이르는 것으로, 신들의 위계가 얼마나 겹겹이 높은지를 보여 줍니다.

묵상

한 사람에게 물어 다음 사람을, 또 그다음 사람을 소개받으며 점점 더 멀리 가 본 적이 있나요? 그렇게 계속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끝이 있을 거라 믿게 되나요? 그 믿음이 흔들렸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나요?

그 수행자는 와사왓띠 천자에게 다가가 물었느니라 - ‘벗이여, 이 네 가지 큰 요소는 어디서 남김없이 그치는가?’ 와사왓띠 천자가 답하였느니라 - ‘수행자여, 나 또한 알지 못하오. 다만 나보다 뛰어나고 훌륭한 범천의 무리가 있으니, 그들은 알 것이오.’

Atha kho so, kevaṭṭa, bhikkhu yena vasavattī devaputt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vasavattiṁ devaputtaṁ etadavoca: ‘kattha nu kho, āvuso,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Evaṁ vutte, kevaṭṭa, vasavattī devaputto taṁ bhikkhuṁ etadavoca: ‘ahampi kho, bhikkhu, na jānāmi: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Atthi kho, bhikkhu, brahmakāyikā nāma devā amhehi abhikkantatarā ca paṇītatarā ca. Te kho etaṁ jāneyyuṁ: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타화자재천의 와사왓띠 천자를 실제로 찾아가는 장면으로, 앞 카드에서 줄였던 서술이 다시 온전한 문장으로 돌아옵니다. 이 천자는 앞서 삭까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ahampi)"이라는 홀로된 말투로 답하며, 자신보다 위에 있는 "범천의 무리(brahmakāyikā devā)"를 가리킵니다. 이 지점부터는 신들의 세계를 벗어나 범천의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가 되며, 수행자의 여정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층위로 들어섭니다.

묵상

믿고 찾아간 곳에서마저 "나도 모른다"는 답을 들었을 때,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과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순간의 차이를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지금 그 힘이 어디서 오는지도 함께 살펴보아도 괜찮아요.

그러자 그 수행자는 어떤 집중에 들었는데, 마음이 고요히 모이자 범천에 이르는 길이 나타났느니라. 그는 범천의 무리에게 다가가 물었느니라 - ‘벗들이여, 이 네 가지 큰 요소는 어디서 남김없이 그치는가?’ 범천의 무리가 답하였느니라 - ‘수행자여, 우리도 알지 못하오.’

Atha kho so, kevaṭṭa, bhikkhu tathārūpaṁ samādhiṁ samāpajji, yathāsamāhite citte brahmayāniyo maggo pāturahosi. Atha kho so, kevaṭṭa, bhikkhu yena brahmakāyikā de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rahmakāyike deve etadavoca: ‘kattha nu kho, āvuso,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Evaṁ vutte, kevaṭṭa, brahmakāyikā devā taṁ bhikkhuṁ etadavocuṁ: ‘mayampi kho, bhikkhu, na jānāma: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수행자가 다시 삼매의 힘으로 이번에는 범천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얻어 올라가는 대목입니다. 신들의 하늘을 다 거쳤음에도 답을 얻지 못한 그는 이제 신들보다 한층 높다고 여겨지는 범천의 세계로 향합니다. 그러나 범천의 무리조차 "우리도 알지 못하오"라는 같은 대답을 되풀이하니, 하늘의 위계를 아무리 오른다 해도 답에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묵상

더 높은 곳, 더 대단한 사람에게 가면 답을 알 것이라 믿었던 기대가 무너진 적이 있나요? 그 순간 어디로 마음을 돌리게 되던가요? 지금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고 싶나요?

‘다만 범천, 대범천, 정복하는 이, 다스리는 이, 짓는 이, 만드는 이, 이미 있었고 앞으로 있을 것들의 아버지가 계시니, 그가 우리보다 뛰어나고 훌륭하시오. 그분은 아실 것이오.’ ‘벗들이여, 그렇다면 그 대범천은 지금 어디 계시오?’ ‘수행자여, 우리도 범천이 어디 계신지 알지 못하오. 다만 이런 조짐이 있으니 - 빛이 생겨나고 광채가 나타나면, 범천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Atthi kho, bhikkhu,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ṁ amhehi abhikkantataro ca paṇītataro ca. So kho etaṁ jāneyya: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Kahaṁ panāvuso, etarahi so mahābrahmā’ti? ‘Mayampi kho, bhikkhu, na jānāma, yattha vā brahmā yena vā brahmā yahiṁ vā brahmā; api ca, bhikkhu, yathā nimittā dissanti, āloko sañjāyati, obhāso pātubhavati, brahmā pātubhavissati, brahmuno hetaṁ pubbanimittaṁ pātubhāvāya, yadidaṁ āloko sañjāyati, obhāso pātubhavat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범천의 무리가 자신들보다 위에 있는 대범천을 여러 존칭으로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정복하는 이", "다스리는 이", "짓는 이", "만드는 이", "이미 있었고 앞으로 있을 것들의 아버지"라는 이 호칭들은 당대에 창조주로 여겨지던 신을 가리키는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그 대범천이 지금 어디 있는지 되묻자, 범천의 무리조차 정확한 위치는 모른 채 "빛과 광채가 나타나면 곧 나타나신다"는 조짐만을 말해 줍니다. 창조주로 떠받들어지는 이조차 아랫것들에게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이 은근히 드러납니다.

묵상

모든 것을 만들고 다스린다고 여겨지는 존재라도, 정작 그 실체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크고 대단해 보이는 이름 뒤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해 본 적 있나요?

얼마 지나지 않아 대범천이 나타났느니라. 수행자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느니라 - ‘벗이여, 이 네 가지 큰 요소는 어디서 남김없이 그치는가?’ 대범천이 답하였느니라 - ‘수행자여, 나는 범천이요, 대범천이요, 정복하는 이요, 다스리는 이요, 짓는 이요, 만드는 이요, 이미 있었고 앞으로 있을 것들의 아버지로다.’

Atha kho so, kevaṭṭa, mahābrahmā nacirasseva pāturahosi. Atha kho so, kevaṭṭa, bhikkhu yena so mahābrahm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taṁ mahābrahmānaṁ etadavoca: ‘kattha nu kho, āvuso,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Evaṁ vutte, kevaṭṭa, so mahābrahmā taṁ bhikkhuṁ etadavoca: ‘ahamasmi, bhikkhu,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n’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마침내 대범천이 직접 나타나는 대목입니다. 수행자가 곧바로 본래의 물음을 던지자, 대범천은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자신의 위대한 이름들을 늘어놓습니다. 이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확인시키는 말이며, 뒤이어 이 어긋남이 두 번 더 되풀이됩니다. 창조주로 여겨지는 존재조차 구체적인 물음 앞에서 이름과 위엄만 내세운다는 것이, 이 이야기가 은근히 겨누는 지점입니다.

묵상

구체적인 질문에 지위나 명성으로만 답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나요? 그럴 때 정말 알고 싶었던 것에는 다가갈 수 있었나요? 그런 자리에서 나는 다시 물었나요, 아니면 그냥 물러섰나요?

수행자는 두 번째로도 대범천에게 말하였느니라 - ‘벗이여, 저는 그대가 범천이요 대범천인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 이 네 가지 큰 요소는 어디서 남김없이 그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범천은 두 번째로도 같은 말로 답하였느니라 - ‘수행자여, 나는 범천이요, 대범천이요… 이미 있었고 앞으로 있을 것들의 아버지로다.’

Dutiyampi kho so, kevaṭṭa, bhikkhu taṁ mahābrahmānaṁ etadavoca: ‘na khohaṁ taṁ, āvuso, evaṁ pucchāmi: “tvamasi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n”ti. Evañca kho ahaṁ taṁ, āvuso, pucchāmi: “kattha nu kho, āvuso,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Dutiyampi kho so, kevaṭṭa, mahābrahmā taṁ bhikkhuṁ etadavoca: ‘ahamasmi, bhikkhu,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n’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수행자가 자신의 물음이 지위 확인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히는 대목입니다. "저는 그대가 범천인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오해를 바로잡고, 본래의 물음을 다시 또렷이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대범천은 이번에도 똑같은 이름의 목록으로 답하니, 원문에서도 이 대답을 앞서와 같은 말로 되풀이해 적습니다. 같은 어긋남이 두 번째로 되풀이되면서, 이 답변 밖에 없다는 것이 대범천 자신의 한계임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묵상

오해를 바로잡아 다시 물었는데도 같은 대답만 돌아온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럴 때 한 번 더 시도해 보나요, 아니면 다른 길을 찾게 되나요? 지금 그런 상황이 있다면 어느 쪽에 가까운가요?

수행자는 세 번째로도 대범천에게 말하였느니라 - ‘벗이여, 저는 그대가 범천이요 대범천인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 이 네 가지 큰 요소는 어디서 남김없이 그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Tatiyampi kho so, kevaṭṭa, bhikkhu taṁ mahābrahmānaṁ etadavoca: ‘na khohaṁ taṁ, āvuso, evaṁ pucchāmi: “tvamasi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n”ti. Evañca kho ahaṁ taṁ, āvuso, pucchāmi: “kattha nu kho, āvuso,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같은 물음을 세 번째로 되풀이하는 대목입니다. 이 셋이라는 반복은 이 경의 첫머리, 께왓따가 세 번 청했던 것과 짝을 이룹니다. 다만 이번에는 세 번째에도 대범천이 곧바로 답을 바꾸지 않고, 대신 뒤이은 대목에서 수행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 은밀히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세 번째 반복이 이번에는 대답의 전환이 아니라 장면의 전환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다릅니다. 경 전체에 걸쳐 셋이라는 수가 되풀이해 등장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 물러서지 않는 끈질김이 결국 다른 국면을 열어 준다는 점을 보여 주는 짜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로 같은 것을 되물어야 했던 적이 있나요? 그 끈질김이 결국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몇 번째 물음에서 비로소 다른 대답을 듣게 되었나요?

대범천은 그 수행자의 팔을 잡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였느니라 - ‘수행자여, 이 범천의 무리는 나를 두고 ‘범천이 모르는 것은 없다’고 여기고 있소. 그래서 나는 그들 앞에서 답하지 못한 것이오. 수행자여, 실은 나 또한 이 네 가지 큰 요소가 어디서 그치는지 알지 못하오. 그대가 세존을 지나쳐 바깥에서 답을 찾으려 한 것이야말로 그대의 잘못이요 허물이오. 그대는 가서 바로 그 세존께 이 물음을 여쭈시오.’

Atha kho so, kevaṭṭa, mahābrahmā taṁ bhikkhuṁ bāhāyaṁ gahetvā ekamantaṁ apanetvā taṁ bhikkhuṁ etadavoca: ‘ime kho maṁ, bhikkhu, brahmakāyikā devā evaṁ jānanti, “natthi kiñci brahmuno aññātaṁ, natthi kiñci brahmuno adiṭṭhaṁ, natthi kiñci brahmuno aviditaṁ, natthi kiñci brahmuno asacchikatan”ti. Tasmāhaṁ tesaṁ sammukhā na byākāsiṁ. Ahampi kho, bhikkhu, na jānāmi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Tasmātiha, bhikkhu, tuyhevetaṁ dukkaṭaṁ, tuyhevetaṁ aparaddhaṁ, yaṁ tvaṁ taṁ bhagavantaṁ atidhāvitvā bahiddhā pariyeṭṭhiṁ āpajjasi imassa pañhassa veyyākaraṇāya. Gaccha tvaṁ, bhikkhu, tameva bhagavantaṁ upasaṅkamitvā imaṁ pañhaṁ puccha, yathā ca te bhagavā byākaroti, tathā naṁ dhāreyyās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대범천이 부하 신들 앞에서는 지킬 수 없었던 체면을 벗고, 수행자를 따로 불러 진실을 털어놓는 대목입니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없다"고 떠받들어지고 있어 사람들 앞에서 모른다고 말할 수 없었을 뿐, 실제로는 이 물음의 답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애초에 세존을 두고 바깥에서 답을 찾아 헤맨 것 자체가 수행자의 잘못이었다고 지적하며, 세존께 직접 물으라고 돌려보냅니다. 신들의 위계를 다 오른 끝에 나온 결론이 "처음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라는 점이 이 이야기의 반전입니다.

묵상

누구도 대신 답해 줄 수 없는 물음을, 정작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멀리서만 찾아 헤맨 적이 있나요? 지금 나에게 그런 물음이 있다면, 어디로 돌아가 물어야 할까요? 체면 때문에 못 한 말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그러자 께왓따여, 그 수행자는 마치 힘센 사람이 굽힌 팔을 펴는 것처럼 순식간에 범천의 세계에서 사라져 내 앞에 나타났느니라. 그는 나에게 절하고 한쪽에 앉아 이렇게 말씀드렸느니라 -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큰 요소는 어디서 남김없이 그칩니까?’

Atha kho so, kevaṭṭa, bhikkhu—seyyathāpi nāma balavā puriso samiñjitaṁ vā bāhaṁ pasāreyya, pasāritaṁ vā bāhaṁ samiñjeyya; evameva brahmaloke antarahito mama purato pāturahosi. Atha kho so, kevaṭṭa, bhikkhu maṁ abhivādetvā ekamantaṁ nisīdi, ekamantaṁ nisinno kho, kevaṭṭa, so bhikkhu maṁ etadavoca: ‘kattha nu kho, bhante,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긴 여정 끝에 수행자가 마침내 세존 앞으로 돌아오는 대목입니다. 지금까지 이 이야기는 "께왓따여"로 시작해 그 수행자를 삼인칭으로 서술해 왔는데, 이 대목에서 "내 앞에(mama purato)"라는 말로 처음 화자가 드러나, 이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이가 다름 아닌 세존 자신이었음이 분명해집니다. 힘센 사람이 팔을 펴고 굽히는 것처럼 순식간이라는 비유는 신들의 신통력조차 이 정도로 빠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용구입니다. 수행자는 처음 품었던 물음을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다시 여쭙습니다.

묵상

멀리 돌아 결국 처음 물었어야 할 사람에게 되돌아온 경험이 있나요? 그 되돌아옴이 헛걸음이었다고 생각되나요, 아니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되나요? 지금 다시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다면 어디인가요?

4 의식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7구절

비구의 물음을 바로잡으며, 세존께서 직접 답을 밝히시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묻자 께왓따여, 나는 그 수행자에게 말하였느니라 - ‘수행자여, 옛적에 바다를 오가는 상인들이 물가를 살피는 새를 데리고 배로 바다에 나갔느니라. 물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면 그들은 그 새를 놓아 준다. 그 새는 동서남북, 위로, 이곳저곳으로 날아가느니라. 어디서든 물가를 보면 그대로 날아가 버리고, 어디서도 물가를 보지 못하면 다시 그 배로 돌아오느니라.’

4.1. Tīradassisakuṇupamā Evaṁ vutte, ahaṁ, kevaṭṭa, taṁ bhikkhuṁ etadavocaṁ— bhūtapubbaṁ, bhikkhu, sāmuddikā vāṇijā tīradassiṁ sakuṇaṁ gahetvā nāvāya samuddaṁ ajjhogāhanti. Te atīradakkhiniyā nāvāya tīradassiṁ sakuṇaṁ muñcanti. So gacchateva puratthimaṁ disaṁ, gacchati dakkhiṇaṁ disaṁ, gacchati pacchimaṁ disaṁ, gacchati uttaraṁ disaṁ, gacchati uddhaṁ disaṁ, gacchati anudisaṁ. Sace so samantā tīraṁ passati, tathāgatakova hoti. Sace pana so samantā tīraṁ na passati, tameva nāvaṁ paccāgaccha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세존께서 답 대신 비유 하나를 드는 대목입니다. 옛적 뱃사람들이 육지가 보이지 않는 먼바다에서 물가를 살피는 새를 놓아 주면, 새는 동서남북과 위, 이곳저곳으로 날아 물가를 찾다가 있으면 그리로 가고 없으면 배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뱃사람들이 먼바다에 나서면서도 미리 돌아올 방법을 마련해 둔 것처럼, 이 비유는 답을 찾는 여정 자체에 이미 돌아올 곳이 있다는 점을 넌지시 보여 줍니다. 이 비유가 실제로 수행자의 여정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다음 카드에서 이어집니다.

묵상

먼바다에서 길을 잃었을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어떤 안도감을 줄까요? 지금 나에게도 이곳저곳을 헤매다 돌아갈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그 자리가 사람일 수도, 익숙한 습관일 수도 있어요.

‘이와 같이 수행자여, 그대는 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 물음의 답을 찾아다녔으나 얻지 못하고, 결국 나에게로 다시 돌아왔느니라.’

Evameva kho tvaṁ, bhikkhu, yato yāva brahmalokā pariyesamāno imassa pañhassa veyyākaraṇaṁ nājjhagā, atha mamaññeva santike paccāgato.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비유를 실제 수행자의 이야기에 적용하는 대목입니다. 세존은 이 수행자가 신들의 세계를 아무리 멀리, 아무리 높이까지 날아 헤매어도 결국 답을 얻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 바로 앞서 든 새와 같다고 짚어 줍니다. 이 비유는 수행자를 나무라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 방향을 바꾸어 물음 자체를 다시 살펴볼 때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어집니다. 뒤이은 대목에서 세존은 수행자가 던진 물음의 형식 자체를 새로 바로잡아 주십니다.

묵상

이곳저곳을 다 찾아다녔지만 결국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야 했던 경험이 있나요? 그 헛걸음처럼 보이는 여정이 실은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나요? 지금 그 가르침을 다시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수행자여, 이 물음은 이렇게 물어서는 안 되나니 - ‘이 네 가지 큰 요소는 어디서 남김없이 그칩니까?’ 수행자여, 이 물음은 이렇게 물어야 하느니라 -

Na kho eso, bhikkhu, pañho evaṁ pucchitabbo: ‘kattha nu kho, bhante,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ṁ—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Evañca kho eso, bhikkhu, pañho pucchitabbo: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세존께서 수행자가 던진 물음의 형식 자체를 바로잡는 대목입니다. 처음의 물음은 땅·물·불·바람이라는 네 요소가 "그치는 장소"를 찾는 것이었는데, 세존은 그런 물음의 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뒤이어 올바른 물음의 형태가 게송으로 제시되는데, 그 물음은 장소를 묻는 대신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방식으로 바뀝니다. 이 전환이야말로 지금까지의 긴 여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진짜 답의 실마리입니다.

묵상

질문을 바꾸자 비로소 답이 보이기 시작한 경험이 있나요? 지금 붙들고 있는 물음이 있다면, 혹시 물음 자체를 다르게 던져 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물음을 바꾸는 것도 하나의 용기일 수 있어요.

‘어디서 물과 땅과 불과 바람이 발붙이지 못하며, 어디서 길고 짧음과 작고 큼과 곱고 미움이, 어디서 이름과 형색이 남김없이 그치는가?’

‘Kattha āpo ca pathavī, tejo vāyo na gādhati; Kattha dīghañca rassañca, aṇuṁ thūlaṁ subhāsubhaṁ; Kattha nāmañca rūpañca, asesaṁ uparujjhat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새로 던져야 할 물음이 게송으로 제시됩니다. 앞서의 산문 물음이 "네 가지 큰 요소"라는 물질적 구성 요소에 한정되어 있었다면, 이 게송은 물음의 범위를 훨씬 넓혀 길고 짧음, 작고 큼, 곱고 미움 같은 상대적 성질들과 "이름과 형색(nāmañca rūpañca)", 곧 정신과 물질 전체로 확장합니다. 장소를 묻던 물음이 이제 무엇이 이 모든 구분과 대립을 넘어서는가를 묻는 물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다음 대목의 게송에서 주어집니다.

묵상

길고 짧음, 곱고 미움처럼 서로 다르다고 여겨 온 것들이 사실은 같은 자리에서 그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지금 나를 가르는 어떤 비교가 있다면, 잠시 내려놓아 보아도 좋아요. 비교를 내려놓는 순간 무엇이 남는지도 살펴보아도 괜찮아요.

여기에 이런 답이 있느니라 - ‘의식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고 끝이 없으며 사방으로 빛나나니, 여기서 물과 땅과 불과 바람이 발붙이지 못하느니라.

Tatra veyyākaraṇaṁ bhavati: ‘Viññāṇaṁ anidassanaṁ, anantaṁ sabbatopabhaṁ; Ettha āpo ca pathavī, tejo vāyo na gādha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긴 여정의 끝에 나오는 답 자체이자, 이 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의식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고(viññāṇaṁ anidassanaṁ) 끝이 없으며 사방으로 빛난다"는 표현은 통상적인 여섯 감각의 의식과는 다른 층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고, 이 구절 하나를 두고도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이 카드에서는 그 답이 물질의 네 요소인 물·땅·불·바람이 "발붙이지 못하는" 자리라고 말하는 데까지만 다룹니다. 처음 수행자가 물었던 네 가지 큰 요소가 여기서 다시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어디에"가 아니라 "무엇에도 붙지 않는 것"으로 답이 주어집니다.

묵상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사방으로 빛난다"는 말은 언뜻 모순처럼 들리기도 해요. 지금 이 구절을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어떤 느낌이 남나요?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여기서 길고 짧음과 작고 큼과 곱고 미움이, 여기서 이름과 형색이 남김없이 그치나니, 의식이 그침으로써 바로 여기서 이 모든 것이 그치느니라.’

Ettha dīghañca rassañca, aṇuṁ thūlaṁ subhāsubhaṁ; Ettha nāmañca rūpañca, asesaṁ uparujjhati; Viññāṇassa nirodhena, etthetaṁ uparujjhat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게송의 마지막 부분으로, 길고 짧음·크고 작음·곱고 미움 같은 상대적인 성질들과 이름과 형색, 곧 정신과 물질 전체가 "남김없이 그친다"고 답합니다. 그리고 그 그침의 원인을 "의식이 그침으로써(viññāṇassa nirodhena)"라고 분명히 짚어 줍니다. 처음 수행자가 던진 물음, 곧 "네 요소가 그치는 장소"는 이렇게 장소가 아니라 의식의 그침이라는 사건으로 답해집니다. 이 게송을 끝으로 세존의 대답이 마무리되고, 다음 대목에서 이야기 전체가 닫힙니다.

묵상

무언가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기보다, 그것을 붙드는 마음 자체가 가라앉을 때 문제가 풀리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나요? 지금 당장 답을 다 알지 못해도, 이 물음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만으로 충분할 수 있어요.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장자의 아들 께왓따는 흡족하여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였느니라. 께왓따경은 이렇게 끝나니, 열한 번째이니라.

Idamavoca bhagavā. Attamano kevaṭṭo gahapatiputto bhagavato bhāsitaṁ abhinandīti.

디가 니까야 DN 11 께왓따경 (Kevaṭṭasutta)

배경

경 전체를 닫는 정형구입니다. 신통을 보여 달라는 청으로 시작해, 세 가지 기적의 정의를 거쳐, 신들의 세계를 오르내린 수행자의 이야기와 의식에 관한 게송에 이르기까지, 처음 께왓따가 품었던 물음과는 전혀 다른 곳에 이르러 경이 끝납니다. 께왓따가 "흡족하여 기뻐하였다"는 짧은 문장은 다른 많은 경들의 끝맺음과 같은 정형구이지만, 이 경에서는 특히 화려한 신통 대신 다른 것으로 만족하게 된 결말이라는 점에서 뜻이 깊습니다. "열한 번째"라는 표시는 이 경이 속한 품에서 께왓따경이 열한 번째 경임을 알리는 편집자의 기록입니다.

묵상

처음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얻고도 흡족했던 경험이 있나요? 무엇을 얻었기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는지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지금의 기대와 그때의 흡족함을 나란히 놓아 보아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