뿟따망사 숫따(아들의 살)

Puttamaṁsasutta

상윳따 니까야 SN 12.63

인용된 가르침 12구절

이 경을 5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네 가지 자양분 1구절

존재를 지탱하는 네 가지 자양분 - 먹는 것, 닿음, 의도, 의식을 나열합니다.

사왓티에 계실 때였다. ‘수행자들이여, 이미 태어난 살아 있는 것들을 지탱하고 태어나려는 것들을 돕는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먹는 자양분이 첫째요, 닿음이 둘째요, 마음의 의도가 셋째요, 의식이 넷째다.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그 네 가지 자양분이다.’

Sāvatthiyaṁ … “cattārome, bhikkhave, āhārā bhūtānaṁ vā sattānaṁ ṭhitiyā sambhavesīnaṁ vā anuggahāya. Katame cattāro? Kabaḷīkāro āhāro oḷāriko vā sukhumo vā, phasso dutiyo, manosañcetanā tatiyā, viññāṇaṁ catutthaṁ. Ime kho, bhikkhave, cattāro āhārā bhūtānaṁ vā sattānaṁ ṭhitiyā sambhavesīnaṁ vā anuggahāya.

상윳따 니까야 SN 12.63 뿟따망사 숫따 (아들의 살)

배경

부처님께서 사왓티에 계실 때 이 경을 여셨습니다. 뒤이어 나올 네 가지 강렬한 비유가 모두 여기서 시작합니다. “먹는 자양분”은 몸을 유지하는 밥과 반찬을, “닿음”은 감각기관과 대상이 만나는 것을, “마음의 의도”는 무엇을 하려는 의지 자체를, “의식”은 보고 듣고 아는 작용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이 넷은 순서대로 거칠고 눈에 잘 띄는 것에서 점점 미세한 것으로 나아갑니다. 이어지는 네 개의 비유는 이 순서를 그대로 따라가며, 각 자양분이 왜 위험한지 하나씩 보여 줍니다.

묵상

오늘 하루를 지탱해 온 것을 떠올려 보면 어떤가요? 먹은 음식만이 아니라, 누군가와 나눈 눈빛, 마음속에 품었던 의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알아차림 자체도 나를 지탱해 왔다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2 거친 음식 - 사막을 건너는 부부 3구절

물질적 음식에 대한 집착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극단적인 비유로 보여줍니다.

수행자들이여, 먹는 자양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비유하면, 어느 부부가 적은 양식을 지니고 광야 길에 들어섰다. 그들에게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아들이 하나 있었다. 광야를 가던 두 사람의 그 적은 양식은 차츰 다하여 없어져 가는데, 아직 건너지 못한 광야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Kathañca, bhikkhave, kabaḷīkāro āhāro daṭṭhabbo? Seyyathāpi, bhikkhave, dve jāyampatikā parittaṁ sambalaṁ ādāya kantāramaggaṁ paṭipajjeyyuṁ. Tesamassa ekaputtako piyo manāpo. Atha kho tesaṁ, bhikkhave, dvinnaṁ jāyampatikānaṁ kantāragatānaṁ yā parittā sambalamattā, sā parikkhayaṁ pariyādānaṁ gaccheyya. Siyā ca nesaṁ kantārāvaseso anatiṇṇ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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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네 가지 자양분 가운데 가장 거칠고 눈에 잘 띄는 먹는 자양분부터 비유가 시작됩니다. 부부와 외아들, 줄어드는 양식, 아직 남은 광야라는 네 요소가 나란히 놓이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의 무게를 미리 짐작하게 합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아들”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은 이 아이가 그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물질적 자양분에 대한 집착이 극한 상황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이려 하십니다.

묵상

가진 것이 자꾸 줄어드는데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고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 다급함 속에서 마음이 무엇을 붙잡고 싶어 하는지, 지금은 안전한 자리에서 가만히 떠올려 보셔도 좋습니다.

이에 부부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의 적은 양식은 다하여 없어졌고 아직 건너지 못한 광야는 남아 있다. 차라리 사랑스럽고 귀여운 이 외아들을 죽여 그 살을 말려 먹으며 남은 광야를 건너가는 것이 우리 셋이 다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부부는 외아들을 죽여 그 살을 먹으며 광야를 건너면서, 가슴을 치며 부르짖었다. ‘외아들아, 어디 있는가. 외아들아, 어디 있는가.’

Atha kho tesaṁ, bhikkhave, dvinnaṁ jāyampatikānaṁ evamassa: ‘amhākaṁ kho yā parittā sambalamattā sā parikkhīṇā pariyādiṇṇā. Atthi cāyaṁ kantārāvaseso anittiṇṇo. Yannūna mayaṁ imaṁ ekaputtakaṁ piyaṁ manāpaṁ vadhitvā vallūrañca soṇḍikañca karitvā puttamaṁsāni khādantā evaṁ taṁ kantārāvasesaṁ nitthareyyāma, mā sabbeva tayo vinassimhā’ti. Atha kho te, bhikkhave, dve jāyampatikā taṁ ekaputtakaṁ piyaṁ manāpaṁ vadhitvā vallūrañca soṇḍikañca karitvā puttamaṁsāni khādantā evaṁ taṁ kantārāvasesaṁ nitthareyyuṁ. Te puttamaṁsāni ceva khādeyyuṁ, ure ca paṭipiseyyuṁ: ‘kahaṁ, ekaputtaka, kahaṁ, ekaputtak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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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서의 설정이 여기서 결말을 맺습니다. 부부의 속마음(‘차라리…나을 것이다’)과 실제 행동(아들을 죽여 그 살을 먹으며 건넘), 그리고 그 뒤에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이 차례로 이어집니다. “외아들아, 어디 있는가”라는 부르짖음이 두 번 되풀이되는 것은 그 슬픔의 크기를 보여 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장면으로 물질적 자양분, 즉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소중한 것마저 수단으로 삼게 만들 수 있음을 보이십니다.

묵상

이 장면이 힘들게 느껴진다면 잠시 멈추어도 괜찮습니다. 다만 무언가에 쫓기듯 급할 때, 정작 소중한 것을 방편으로 여기게 된 적이 있으신가요? 그럴 때의 마음을 지금 돌아보면 무엇이 보이시나요?

수행자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이 그 음식을 즐기려고, 취하려고, 꾸미려고, 치장하려고 먹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오직 이 광야를 건너기 위해서만 그 음식을 먹지 않았겠는가? “그러하옵니다, 부처님.”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이 먹는 자양분을 보아야 한다. 먹는 자양분을 완전히 알면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도 완전히 알게 되고, 그것을 알면 거룩한 제자가 다시 이 세상에 올 매임이 없어진다.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api nu te davāya vā āhāraṁ āhāreyyuṁ, madāya vā āhāraṁ āhāreyyuṁ, maṇḍanāya vā āhāraṁ āhāreyyuṁ, vibhūsanāya vā āhāraṁ āhāreyyun”ti? “No hetaṁ, bhante”. “Nanu te, bhikkhave, yāvadeva kantārassa nittharaṇatthāya āhāraṁ āhāreyyun”ti? “Evaṁ, bhante”. “‘Evameva khvāhaṁ, bhikkhave, kabaḷīkāro āhāro daṭṭhabbo’ti vadāmi. Kabaḷīkāre, bhikkhave, āhāre pariññāte pañca kāmaguṇiko rāgo pariññāto hoti. Pañca kāmaguṇike rāge pariññāte natthi taṁ saṁyojanaṁ yena saṁyojanena saṁyutto ariyasāvako puna imaṁ lokaṁ āgacchey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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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선 참혹한 두 장면이 여기서 뜻을 얻습니다. 부부가 아들의 살을 먹은 것은 오직 살아 건너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먹는 자양분 전체에 적용하시며, 먹는 자양분을 있는 그대로(오직 생존을 위한 것으로) 완전히 알면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 곧 눈에 보이는 것, 소리, 냄새, 맛, 몸의 감촉에 대한 탐냄도 함께 이해되어 옅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완전히 이해되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만드는 매임이 사라진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오늘 무언가를 먹거나 가지려 할 때, 정말 필요해서인지 아니면 마음을 달래려는 것인지 잠깐 살펴보면 어떨까요?

3 닿음 - 가죽 벗겨진 소 2구절

감각 접촉이 어디서든 피할 수 없이 느낌을 일으킨다는 것을, 가죽 벗겨진 소의 비유로 보여줍니다.

수행자들이여, 닿음의 자양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비유하면, 가죽이 벗겨진 소가 있어 벽에 기대어 서면 벽에 사는 생물들이 파먹고, 나무에 기대어 서면 나무에 사는 생물들이 파먹고, 물에 들어가 서면 물에 사는 생물들이 파먹고, 허공에 서면 허공에 사는 생물들이 파먹는다. 수행자들이여, 그 가죽 벗겨진 소가 어디에 기대어 서든 그곳에 의지해 사는 생물들이 그 소를 파먹는다.

Kathañca, bhikkhave, phassāhāro daṭṭhabbo? Seyyathāpi, bhikkhave, gāvī niccammā kuṭṭañce nissāya tiṭṭheyya. Ye kuṭṭanissitā pāṇā te naṁ khādeyyuṁ. Rukkhañce nissāya tiṭṭheyya, ye rukkhanissitā pāṇā te naṁ khādeyyuṁ. Udakañce nissāya tiṭṭheyya, ye udakanissitā pāṇā te naṁ khādeyyuṁ. Ākāsañce nissāya tiṭṭheyya, ye ākāsanissitā pāṇā te naṁ khādeyyuṁ. Yaṁ yadeva hi sā, bhikkhave, gāvī niccammā nissāya tiṭṭheyya, ye tannissitā pāṇā te naṁ khādeyyu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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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두 번째 비유, 닿음의 자양분으로 넘어갑니다. 가죽이 벗겨진 소는 어느 쪽으로 몸을 돌려도 그곳에 사는 생물에게 뜯어 먹히는데, 벽·나무·물·허공이라는 네 방향이 빠짐없이 나열되어 있는 것은 피할 곳이 어디에도 없음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닿음”이란 눈·귀·코·혀·몸·마음이라는 여섯 감각기관이 대상과 만나는 순간을 뜻합니다. 이 비유는 감각기관이 대상에 노출되는 순간 그 자리에서 곧바로 반응(느낌)이 일어난다는 것을 몸으로 느껴지게 보여 줍니다.

묵상

몸이 어딘가에 닿을 때, 그 느낌에 곧바로 좋다 싫다는 마음이 따라붙는 것을 알아차린 적이 있으신가요? 그 둘 사이에 아주 짧은 틈이라도 있는지, 오늘 한 번쯤 가만히 살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이 닿음의 자양분을 보아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닿음의 자양분을 완전히 알면 세 가지 느낌을 완전히 알게 되고, 세 가지 느낌을 완전히 알면 거룩한 제자에게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진다.

Evameva khvāhaṁ, bhikkhave, ‘phassāhāro daṭṭhabbo’ti vadāmi. Phasse, bhikkhave, āhāre pariññāte tisso vedanā pariññātā honti. Tīsu vedanāsu pariññātāsu ariyasāvakassa natthi kiñci uttarikaraṇīyanti vadā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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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가죽 벗겨진 소의 비유가 뜻하는 바가 여기서 밝혀집니다. 세 가지 느낌이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가리키며, 닿음이 일어나는 곳마다 이 셋 가운데 하나가 반드시 따라온다는 것이 앞 비유의 요점입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는 표현은 이 경 전체에서 되풀이되는 결론 문구로, 흘러드는 것이 다한 이가 더 이상 닦을 것이 남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닿음을 완전히 이해하면 그로부터 일어나는 느낌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묵상

지금 이 순간 몸과 마음에 어떤 느낌이 있는지, 좋다 싫다는 판단 없이 그냥 알아차려 볼 수 있을까요? 오늘은 시도해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 보면 어떨까요?

4 의도 - 숯불 구덩이로 끌려가는 사람 2구절

마음의 의도가 위험 앞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숯불 구덩이의 비유로 보여줍니다.

수행자들이여, 마음의 의도라는 자양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비유하면, 사람 키보다 깊은 숯불 구덩이가 있어 불꽃도 연기도 없이 이글거리는 숯으로 가득했다. 그때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바라지 않으며 즐거움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한 사람이 다가오는데, 힘센 두 사람이 그의 두 팔을 붙잡아 그 숯불 구덩이 쪽으로 끌고 가려 한다. 수행자들이여, 그때 그 사람의 의도는 멀리 있고, 바람도 멀리 있고, 지향도 멀리 있으리라.

Kathañca, bhikkhave, manosañcetanāhāro daṭṭhabbo? Seyyathāpi, bhikkhave, aṅgārakāsu sādhikaporisā puṇṇā aṅgārānaṁ vītaccikānaṁ vītadhūmānaṁ. Atha puriso āgaccheyya jīvitukāmo amaritukāmo sukhakāmo dukkhappaṭikūlo. Tamenaṁ dve balavanto purisā nānābāhāsu gahetvā taṁ aṅgārakāsuṁ upakaḍḍheyyuṁ. Atha kho, bhikkhave, tassa purisassa ārakāvassa cetanā ārakā patthanā ārakā paṇid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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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세 번째 비유, 마음의 의도로 넘어갑니다. 불꽃도 연기도 없이 이글거리기만 하는 숯불 구덩이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극심한 위험을 품은 것을 나타냅니다. 살고 싶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사람이 힘센 두 사람에게 끌려가는 장면에서, “의도가 멀리 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구덩이로부터 있는 힘껏 달아나려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의도, 곧 생각으로 짓는 행위는 이렇게 자신을 해칠 것으로부터 본능적으로 물러서려는 힘으로 먼저 그려집니다.

묵상

억지로 끌려가듯 원치 않는 상황에 놓였을 때, 마음이 자꾸 다른 곳으로 달아나려 했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때 그 마음이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지, 지금은 안전한 자리에서 천천히 떠올려 보셔도 좋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이 숯불 구덩이에 떨어지면 그로 말미암아 죽음을 맞거나 죽을 만큼 괴로우리라’고 그에게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이 마음의 의도라는 자양분을 보아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을 완전히 알면 세 가지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을 완전히 알게 되고, 세 가지 갈망을 완전히 알면 거룩한 제자에게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진다.

Taṁ kissa hetu? Evañhi, bhikkhave, tassa purisassa hoti: ‘imañcāhaṁ aṅgārakāsuṁ papatissāmi, tatonidānaṁ maraṇaṁ vā nigacchāmi maraṇamattaṁ vā dukkhan’ti. Evameva khvāhaṁ, bhikkhave, ‘manosañcetanāhāro daṭṭhabbo’ti vadāmi. Manosañcetanāya, bhikkhave, āhāre pariññāte tisso taṇhā pariññātā honti. Tīsu taṇhāsu pariññātāsu ariyasāvakassa natthi kiñci uttarikaraṇīyanti vadā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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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에서 멀리 달아나려던 그 사람의 속마음이 여기서 밝혀집니다. 구덩이에 떨어지면 죽거나 죽을 만큼 괴로우리라는 생각이 바로 그 회피의 원인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마음의 의도 전체에 적용하시며, 세 가지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 곧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 존재하지 않으려는 갈망도 함께 이해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마음의 의도라는 자양분의 뿌리에 갈망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묵상

위험을 느낄 때 마음이 저절로 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려 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 마음이 무엇을 붙잡고 싶어서, 또는 무엇을 피하고 싶어서 그러는지, 오늘은 판단 없이 가만히 살펴보면 어떨까요?

5 의식 - 창 삼백 자루에 찔리는 죄인 4구절

의식이라는 자양분이 지고 있는 무게를, 하루 종일 창에 찔리는 죄인의 비유로 보여줍니다.

수행자들이여, 의식이라는 자양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비유하면, 사람들이 도둑질하다 붙잡힌 죄인을 왕에게 데려가 “대왕이시여, 이 자는 죄를 지은 도둑입니다. 원하시는 대로 벌하소서”라고 아뢰면, 왕은 이렇게 말했다. ‘가서 이 사람을 아침에 창 백 자루로 찔러라.’ 이에 사람들은 아침에 그를 창 백 자루로 찔렀다.

Kathañca, bhikkhave, viññāṇāhāro daṭṭhabbo? Seyyathāpi, bhikkhave, coraṁ āgucāriṁ gahetvā rañño dasseyyuṁ: ‘ayaṁ te, deva, coro āgucārī, imassa yaṁ icchasi taṁ daṇḍaṁ paṇehī’ti. Tamenaṁ rājā evaṁ vadeyya: ‘gacchatha, bho, imaṁ purisaṁ pubbaṇhasamayaṁ sattisatena hanathā’ti. Tamenaṁ pubbaṇhasamayaṁ sattisatena haneyyu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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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이자 마지막 비유, 의식의 자양분으로 넘어갑니다. 도둑질하다 붙잡힌 죄인이 왕 앞에 끌려가 형벌을 선고받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아침에 창 백 자루로 찌른다는 형벌이 처음 나오고, 뒤이어 한낮과 저녁에도 똑같은 형벌이 되풀이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되풀이를 통해 의식이라는 자양분이 짊어지는 무게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쌓여 간다는 것을 보이려 하십니다.

묵상

하루 동안 작은 부담이 여러 번 쌓이면 처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진 적이 있으신가요? 그럴 때 그 무게를 한꺼번에 다 짊어지려 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몫만 살펴보면 조금 가벼워질까요?

그러자 왕은 한낮에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떠한가?’ “대왕이시여,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왕은 다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서 그 사람을 한낮에 창 백 자루로 찔러라.’ 이에 사람들은 한낮에 그를 창 백 자루로 찔렀다.

Atha rājā majjhanhikasamayaṁ evaṁ vadeyya: ‘ambho, kathaṁ so puriso’ti? ‘Tatheva, deva, jīvatī’ti. Tamenaṁ rājā evaṁ vadeyya: ‘gacchatha, bho, taṁ purisaṁ majjhanhikasamayaṁ sattisatena hanathā’ti. Tamenaṁ majjhanhikasamayaṁ sattisatena haneyyu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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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아침에 이어 한낮에도 같은 형벌이 되풀이되는 대목입니다.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라는 대답과 왕의 명령이 아침과 거의 같은 말로 되풀이됩니다. 이렇게 그대로 되풀이함으로써 이 사람이 겪는 고통이 한 차례로 끝나지 않고 하루에 걸쳐 쌓여 간다는 것을 독자가 직접 느끼게 합니다. 저녁에 한 차례가 더 남아 있습니다.

묵상

몇 번이고 같은 어려움이 되풀이될 때, ‘아직 견디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을 말해 주는 것 같으신가요? 그 견딤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까요?

그러자 왕은 저녁에 이렇게 물으리라. ‘그 사람이 어떠한가?’ “대왕이시여, 여전히 살아 있나이다.” 왕은 다시 이렇게 말하리라. ‘가서 그 사람을 저녁에 창 백 자루로 찔러라.’ 이에 사람들은 저녁에 그를 창 백 자루로 찔렀다.

Atha rājā sāyanhasamayaṁ evaṁ vadeyya: ‘ambho, kathaṁ so puriso’ti? ‘Tatheva, deva, jīvatī’ti. Tamenaṁ rājā evaṁ vadeyya: ‘gacchatha, bho, taṁ purisaṁ sāyanhasamayaṁ sattisatena hanathā’ti. Tamenaṁ sāyanhasamayaṁ sattisatena haneyyu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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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아침, 한낮에 이어 저녁까지 같은 형벌이 세 번째로 되풀이되며 비유의 형벌 장면이 완결됩니다. 이로써 그 사람은 하루 동안 창 백 자루씩 세 차례, 도합 삼백 자루에 찔린 것이 됩니다. 세 번을 그대로 되풀이해 보여 준 것은 이어지는 대목에서 나올 “창 삼백 자루”라는 총량을 독자가 직접 세어 실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죄인은 뒤에서 의식이라는 자양분이 실제로 짊어지는 무게를 헤아리는 잣대로 다시 등장합니다.

묵상

하루 종일 힘든 일이 이어질 때, 그 하나하나의 무게를 다 헤아려 본 적이 있으신가요?

수행자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이 하루에 창 삼백 자루로 찔린다면 그로 인해 괴로움과 근심을 겪지 않겠는가? “부처님, 창 한 자루에 찔려도 괴로움과 근심을 겪을 터인데 하물며 창 삼백 자루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이 의식이라는 자양분을 보아야 한다. 의식을 완전히 알면 정신과 물질을 완전히 알게 되고, 그것을 알면 거룩한 제자에게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진다.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divasaṁ tīhi sattisatehi haññamāno tatonidānaṁ dukkhaṁ domanassaṁ paṭisaṁvediyethā”ti? “Ekissāpi, bhante, sattiyā haññamāno tatonidānaṁ dukkhaṁ domanassaṁ paṭisaṁvediyetha; ko pana vādo tīhi sattisatehi haññamāno”ti. “Evameva khvāhaṁ, bhikkhave, viññāṇāhāro daṭṭhabboti vadāmi. Viññāṇe, bhikkhave, āhāre pariññāte nāmarūpaṁ pariññātaṁ hoti, nāmarūpe pariññāte ariyasāvakassa natthi kiñci uttarikaraṇīyanti vadām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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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세 차례의 형벌이 쌓여 이룬 결론을 밝히는, 이 경의 마지막 편입니다. 창 한 자루만으로도 괴로운데 삼백 자루라면 말할 것도 없다는 대답은, 앞서 세 번 되풀이해 보여 준 형벌의 무게를 숫자로 확인시켜 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의식이라는 자양분에 적용하시며, 의식을 완전히 알면 정신과 물질(몸과 마음의 결합체) 전체를 완전히 알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한 설명이 모두 끝납니다.

묵상

쌓여만 가는 것 같던 괴로움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뿌리가 무엇인지 조금 더 잘 보이지 않을까요? 몸과 마음이 어떻게 얽혀 그 무게를 만들어 내는지, 오늘은 서두르지 않고 살펴보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