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깔리까 숫따(조각)

Sakalikasutta

상윳따 니까야 SN 4.13

나무 조각에 발을 다친 부처님이 몸의 통증을 알아차리며 견디고, 누움을 조롱한 마라에게 화살 비유로 답한다.

인용된 가르침 5구절

이 경을 5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발의 상처와 몸의 느낌을 견디다 1구절

발이 나무 조각에 베여 거센 몸의 느낌들이 일어나지만 마음챙기고 분명히 알며 견딥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라자가하의 맛다꿋치 사슴동산에 머무셨다. 그때 부처님의 발이 나무 조각에 베여 있었고, 부처님께 괴롭고 심하고 날카롭고 쓰라리며 불쾌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거센 몸의 느낌들이 일어났다. 부처님께서는 알아차리고 분명히 알며, 마음이 시달리지 않은 채 그 느낌들을 견디셨다.

Evaṁ me sutaṁ—ekaṁ samayaṁ bhagavā rājagahe viharati maddakucchismiṁ migadāye. Tena kho pana samayena bhagavato pādo sakalikāya khato hoti, bhusā sudaṁ bhagavato vedanā vattanti sārīrikā dukkhā tibbā kharā kaṭukā asātā amanāpā. Tā sudaṁ bhagavā sato sampajāno adhivāseti avihaññamāno.

상윳따 니까야 SN 4.13 사깔리까 숫따 (조각)

배경

경은 이렇게 전해 들었다는 말과 라자가하 맛다꿋치 사슴동산이라는 장소를 밝힌 뒤, 부처님의 발이 나무 조각에 베인 장면으로 들어갑니다. 원문은 몸의 느낌을 괴롭고·심하고·날카롭고·쓰라리고·불쾌하고·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겹쳐 적어 통증의 강도를 줄이지 않습니다. 그다음의 “알아차리고 분명히 알며 견디셨다”는 말은 그 느낌이 있는 동안 마음이 시달리지 않은 채 견딘 방식을 가리킵니다. 이 대목은 깨달은 이도 아픔을 느낀다는 것과, 그 아픔을 대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함께 보여 줍니다.

묵상

몸에서 날카롭거나 쓰라린 느낌이 있을 때, 그 느낌 자체와 그 때문에 이어지는 마음의 반응을 잠시 구별해 볼 수 있나요?

2 네 겹 가사 위에 사자처럼 눕다 1구절

마음챙김을 유지한 채 사자 자세로 눕자 마라가 무기력과 취기를 들먹이며 묻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겉옷을 네 겹으로 접어 펴고, 오른쪽 옆구리를 대어 사자 자세를 취하셨다. 발 위에 발을 포갠 채, 알아차리고 분명히 아셨다. 그러자 악한 마라가 부처님께 다가가 시로 말했다. “무기력해서 누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시에 취한 것인가? 그대에게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 않은가? 홀로 한적한 잠자리에서, 졸린 얼굴로 어찌 이처럼 잠자는가?”

Atha kho bhagavā catugguṇaṁ saṅghāṭiṁ paññapetvā dakkhiṇena passena sīhaseyyaṁ kappesi pāde pādaṁ accādhāya sato sampajāno. Atha kho māro pāpim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ṁ gāthāya ajjhabhāsi: “Mandiyā nu kho sesi udāhu kāveyyamatto, Atthā nu te sampacurā na santi; Eko vivitte sayanāsanamhi, Niddāmukho kimidaṁ soppase v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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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에서 몸의 느낌을 견딘 뒤, 부처님은 겉옷을 정확히 네 겹으로 접어 펴고 오른쪽 옆구리를 대어 사자 자세를 취합니다. 이어 발 위에 발을 포갠 채 마음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립니다. 이때 악한 마라가 나타나, 무기력 때문인지 시에 취했는지 두 선택지를 던진 뒤,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 않은지와 한적한 곳에서 왜 잠드는지를 묻습니다. 네 겹으로 접은 겉옷과 오른쪽으로 누운 사자 자세, 포갠 두 발, 마음챙김이 이 장면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이 대목은 누움 자체와 마라가 붙인 무기력이라는 해석을 구별하게 합니다.

묵상

몸을 쉬게 하면서도 마음챙김과 분명한 앎이 함께할 수 있다는 장면은 어떻게 들리나요? 자세와 그 자세에 붙는 판단이 같은 것인지 다시 보면 무엇이 보이나요?

3 무기력도 취기도 아닌 쉼 1구절

부처님은 마라의 두 선택지를 부정하고 목적을 이루어 슬픔을 여읜 쉼이라고 답합니다.

“나는 무기력해서 눕는 것도 아니며 시에 취해서 눕는 것도 아니다. 목적을 이루어 슬픔을 여의었기에, 홀로 한적한 잠자리에서 모든 생명을 가엾이 여기며 눕는다.”

“Na mandiyā sayāmi nāpi kāveyyamatto, Atthaṁ sameccāhamapetasoko; Eko vivitte sayanāsanamhi, Sayāmahaṁ sabbabhūtānukampī.

상윳따 니까야 SN 4.13 사깔리까 숫따 (조각)

배경

마라의 시에 대한 부처님의 첫 번째 답입니다. “무기력해서”와 “시에 취해서”를 각각 부정하고, 목적을 이루어 슬픔을 여의었다는 까닭을 밝힙니다. 마라가 한적한 곳에 홀로 누운 모습을 무기력으로 읽었지만, 부처님은 같은 장소와 자세를 모든 생명을 가엾이 여기는 쉼으로 다시 말합니다. 이때 “슬픔을 여의었다”는 말은 앞에서 기록한 발의 상처나 날카로운 몸의 느낌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에는 그런 말이 없으며, 답은 누움을 정신적 무기력이나 취기로 정한 마라의 해석을 물리칩니다.

묵상

몸이 쉬고 있다는 사실과 마음이 무기력하다는 판단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나요? 쉼 속에서도 다른 생명을 향한 부드러운 마음이 가능한가요?

4 화살을 지닌 이와 벗어난 이 1구절

가슴의 화살로 잠을 이루는 이들을 비유해 화살을 벗어난 자신이 쉬지 못할 까닭을 되묻습니다.

“가슴에 화살이 박혀 있고, 그 화살이 순간순간 심장을 꿰뚫는 이들도 그 화살을 지닌 채 이곳에서 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화살을 벗어난 내가 어찌 잠들지 못하겠는가?”

Yesampi sallaṁ urasi paviṭṭhaṁ, Muhuṁ muhuṁ hadayaṁ vedhamānaṁ; Tepīdha soppaṁ labhare sasallā, Tasmā ahaṁ na supe vītasallo.

상윳따 니까야 SN 4.13 사깔리까 숫따 (조각)

배경

부처님의 답이 다음 연에서 화살 비유로 이어집니다. 가슴에 박힌 화살이 순간순간 심장을 꿰뚫는 이들도 그 화살을 지닌 채 잠을 얻는데, 화살을 벗어난 자신이 어찌 자지 못하겠느냐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화살을 벗어났다”를 발의 상처나 몸의 통증이 사라졌다는 말로 읽으면 앞의 산문과 충돌합니다. 발은 베였고 거센 몸의 느낌들이 일어났다고 경이 이미 밝혔습니다. 이 비유는 그런 통증 속에서도 잠을 막는 또 다른 화살에 매이지 않았다는 대비를 만듭니다.

묵상

아픔이 있을 때 몸의 느낌과 그 위에서 되풀이되는 마음의 찌름이 따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나요?

5 불안 없는 쉼과 마라의 퇴장 1구절

깨어 있음과 잠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을 밝히고 모든 생명을 가엾이 여기며 눕자 마라가 사라집니다.

“깨어 있을 때에도 불안하지 않고, 잠드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밤과 낮이 나를 괴롭히지 않으며, 세상 어디에서도 쇠퇴를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을 가엾이 여기며 잠든다.” 그러자 악한 마라는 생각했다. ‘부처님께서 나를 아신다. 잘 가신 분께서 나를 아신다.’ 그는 괴롭고 낙담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Jaggaṁ na saṅke napi bhemi sottuṁ, Rattindivā nānutapanti māmaṁ; Hāniṁ na passāmi kuhiñci loke, Tasmā supe sabbabhūtānukampī”ti. Atha kho māro pāpimā “jānāti maṁ bhagavā, jānāti maṁ sugato”ti dukkhī dummano tatthevantaradhāyīti.

상윳따 니까야 SN 4.13 사깔리까 숫따 (조각)

배경

화살 비유 뒤의 마지막 연과 서술 결말입니다. 부처님은 깨어 있을 때도 불안하지 않고 잠드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밤과 낮 모두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세상 어디에서도 쇠퇴를 보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가 이 상태를 모든 생명을 가엾이 여기며 눕는 결론에 잇습니다. 이어 이야기는 마라의 모습으로 넘어가, 마라는 부처님과 잘 가신 분이 자신을 안다는 말을 두 번 되풀이한 뒤 괴롭고 낙담하여 사라집니다. 경의 실제 결말은 마라의 퇴장이며 몸의 통증이 사라졌다는 문장은 없습니다.

묵상

깨어 있음과 잠듦 중 어느 쪽에서 더 긴장이 느껴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