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부처님이 깨달음 후 처음 설하신 가르침. 중도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밝힌다.

인용된 가르침 36구절

이 경을 5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두 극단을 넘어선 중도 5구절

사슴동산의 설법 자리와 두 극단, 그리고 중도인 여덟 갈래 길

“한때 부처님께서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 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곳에서 그분은 음식을 얻어 살아가는 다섯 수행자에게 말씀하셨다. ‘수행자들이여, 집을 떠난 사람이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치우침이 있다.’”

Ekaṁ samayaṁ bhagavā bārāṇasiyaṁ viharati isipatane migadāye. Tatra kho bhagavā pañcavaggiye bhikkhū āmantesi: “Dveme, bhikkhave, antā pabbajitena na sevitabb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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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경은 가르침의 장소와 듣는 사람들을 먼저 밝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건네고, 음식을 얻어 살아가는 다섯 수행자가 그 말을 듣습니다. 이어 집을 떠난 사람이 가까이해서는 안 될 두 가지 치우침을 먼저 예고합니다. 아직 그 내용을 말하지 않은 채 다음 물음으로 이어지는 구성입니다. 가르침은 좋은 태도를 막연히 권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고, 어떤 길을 피해야 하는지 분명히 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묵상

두 쪽 가운데 하나만 택해야 한다고 느껴 마음이 지쳤던 일이 있다면, 어느 순간에 그 좁아진 선택을 알아차렸나요? “두 치우침”이라는 말에서 잠시 머무는 낱말은 무엇인가요?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하나는 감각의 즐거움에 빠져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다. 이는 수준이 낮고 거칠며,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따르는 방식이고, 거룩하지 않으며, 이로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데 매달리는 것이다. 이는 괴롭고, 거룩하지 않으며, 이로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Katame dve? Yo cāyaṁ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ṁhito, yo cāyaṁ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ṁh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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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먼저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가 피해야 할 두 가지 치우침이 무엇인지 묻고, 그 각각을 설명합니다. 감각의 즐거움에 빠져 매달리는 쪽과 자신을 괴롭히는 데 매달리는 쪽은 모습이 다르지만, 둘 다 거룩하지 않고 이로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뒤에서는 이 두 치우침을 피하는 가운데 길이 어디로 이끄는지 밝힙니다.

묵상

감각의 즐거움에만 매달리거나 자신을 거칠게 몰아붙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순간이 있었다면, 그때 몸과 마음에는 어떤 느낌이 있었나요? 두 치우침과 다른 방향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수행자들이여, 진리를 깨달은 이(따타가따)는 이 두 가지 치우침을 피하는 가운데 길(맛지마 빠띠빠다)을 온전히 깨달았다. 이 길은 보는 눈을 열고 앎(냐나)을 일으키며, 고요해짐과 직접 앎, 온전한 깨달음과 탐냄·성냄·어리석음이 꺼짐(닙바나)으로 이끈다.”

Ete kho,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ṁvatt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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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이어서 두 치우침을 피하는 길이 어디로 이끄는지 밝힙니다. 즐거움에만 매달리는 쪽과 자신을 괴롭히는 쪽은 모습이 다르지만, 이 경에서는 둘 다 이로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가운데 길은 두 치우침을 따르지 않는 길입니다. 따타가따는 이 대목에서 말하는 이, 곧 부처님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요히 꺼짐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꺼지는 것을 뜻합니다. 다음 대목에서는 이 길의 구체적인 내용을 여덟 갈래로 밝힙니다.

묵상

감각의 즐거움에만 매달리거나 자신을 거칠게 몰아붙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순간이 있었다면, 그때 몸과 마음에는 어떤 느낌이 있었나요? 두 치우침과 다른 방향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수행자들이여, 진리를 깨달은 이가 온전히 깨달은 가운데 길, 보는 눈을 열고 앎을 일으키며 고요해짐과 직접 앎, 온전한 깨달음과 꺼짐으로 이끄는 그 길은 무엇인가? 바로 거룩한 여덟 갈래의 길(아리야 앗탕기까 막가)이다. 그 여덟 가지는 다음과 같다.”

Katamā ca sā, bhikkhave,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ṁvattati?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id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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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길의 이름을 밝히는 대답이 뒤의 목록으로 이어집니다. 가운데 길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은 여덟 갈래의 목록으로 이어집니다. 이해하고 마음먹는 일에서 시작해 말과 몸으로 하는 일, 먹고사는 방식, 힘씀, 알아차림, 마음을 모으는 일까지 함께 다룹니다. 따라서 이 길을 생각만 바꾸는 일이나 한 가지 명상 방법으로 좁혀 읽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 문장은 이 길이 향하는 바를 다시 확인합니다.

묵상

여덟 항목을 천천히 읽을 때 지금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한 낱말은 무엇인가요? 그 낱말이 오늘의 말이나 행동 한 장면과 어떻게 맞닿아 보이나요?

“바르게 이해함(딧티), 바르게 마음먹음(상깝빠), 바르게 말함(와짜), 몸으로 하는 일을 바르게 함(깜만따), 먹고사는 일을 바르게 함(아지와), 바르게 힘씀(와야마), 바르게 알아차림(사띠), 마음을 바르게 모음(사마디).”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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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서 이름을 밝힌 길의 여덟 갈래를 하나씩 보여 줍니다. 가운데 길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은 여덟 갈래의 목록으로 이어집니다. 이해하고 마음먹는 일에서 시작해 말과 몸으로 하는 일, 먹고사는 방식, 힘씀, 알아차림, 마음을 모으는 일까지 함께 다룹니다. 따라서 이 길을 생각만 바꾸는 일이나 한 가지 명상 방법으로 좁혀 읽지 않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이 길이 향하는 바를 다시 확인합니다.

묵상

여덟 항목을 천천히 읽을 때 지금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한 낱말은 무엇인가요? 그 낱말이 오늘의 말이나 행동 한 장면과 어떻게 맞닿아 보이나요?

2 네 가지 진리의 내용 5구절

괴로움과 그 원인, 소멸, 소멸로 이끄는 길의 정확한 정의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깨달음에 이른 이(따타가따)가 온전히 깨달은 가운데 길이다. 이 길은 보는 눈을 열고 앎을 일으키며, 고요해짐과 직접 앎, 온전한 깨달음과 고요히 꺼짐(닙바나)으로 이끈다.”

Ayaṁ kho sā, bhikkhave,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ṁvatt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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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갈래를 모두 말한 뒤 가운데 길의 목적을 다시 확인합니다. 가운데 길의 목적을 확인한 뒤, 경은 첫째 진리인 괴로움의 내용을 밝힙니다. 태어남과 늙음, 병듦과 죽음뿐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 것과 함께하는 일,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일,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일도 들어갑니다. 마지막의 다섯 무더기는 몸과 마음을 이루는 것들을 묶어 부르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특히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무더기를 가리킵니다. 집착이라는 마음만을 괴로움이라고 바꾸어 읽거나 삶 전체에 대한 단순한 비관으로 끝내기보다, 뒤에서 이 괴로움에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함께 살펴야 합니다.

묵상

가운데 길의 목적 바로 뒤에 괴로움의 목록이 놓인 순서는 어떻게 느껴지나요? 만남과 헤어짐, 얻지 못함 가운데 어떤 말이 조용히 눈에 머무나요?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괴로움(둑카)에 대한 거룩한 진리(아리야 삿짜)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음도 괴로움이고, 병듦도 괴로움이고, 죽음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함께하는 것도 괴로움이고,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짧게 말하면, 집착의 대상이 되는 몸과 마음의 다섯 묶음(빤쭈빠다낙칸다)이 괴로움이다.”

Idaṁ kho pana, bhikkhave, dukkhaṁ ariyasaccaṁ—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byādhipi dukkho, maraṇampi dukkhaṁ,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ṁ na labhati tampi dukkhaṁ—saṅ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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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괴로움에 대한 진리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밝힙니다. 가운데 길의 목적을 확인한 뒤, 경은 첫째 진리인 괴로움의 내용을 밝힙니다. 태어남과 늙음, 병듦과 죽음뿐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 것과 함께하는 일,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일,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일도 들어갑니다. 마지막의 다섯 묶음은 몸과 마음을 이루는 것들을 묶어 부르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특히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묶음을 가리킵니다. 집착이라는 마음만을 괴로움이라고 바꾸어 읽거나 삶 전체에 대한 단순한 비관으로 끝내기보다, 뒤에서 이 괴로움에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함께 살펴야 합니다.

묵상

가운데 길의 목적 바로 뒤에 괴로움의 목록이 놓인 순서는 어떻게 느껴지나요? 읽을 수 있다면 만남과 헤어짐, 얻지 못함 가운데 어떤 말이 조용히 눈에 머무나요?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사무다야)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그것은 다시 태어남으로 이어지는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이다. 즐김과 탐냄이 함께하고,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찾는 갈망이다. 곧, 감각의 즐거움을 바라는 갈망(까마 딴하), 존재하려는 갈망(바와 딴하), 존재하지 않으려는 갈망(위바와 딴하)이다.”

Idaṁ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aṁ ariyasaccaṁ— yāyaṁ taṇhā ponob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ṁ—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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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갈망의 성격과 세 갈래를 밝힙니다. 첫째 진리 다음에는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과 그 원인이 멎는 일이 이어집니다. 갈망에는 다시 태어남으로 이어진다는 설명과 즐김·탐냄이 함께한다는 설명이 붙습니다. 감각의 즐거움을 바라는 것, 존재하려는 것, 존재하지 않으려는 것은 서로 구별되는 세 갈래입니다. 뒤의 멎음은 바로 그 갈망을 이어받습니다. 존재하지 않으려는 갈망을 현대인의 피로, 휴식의 바람, 힘든 마음과 곧바로 같은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묵상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과 그 대상을 잠시 나누어 바라볼 수 있었던 때가 있나요? 그때 그 마음이 무엇을 향해 있었는지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감각의 즐거움을 바라는 마음, 있고 싶은 마음, 없고 싶은 마음 가운데 지금 가장 익숙한 것은 무엇인가요?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멎음(니로다)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바로 그 갈망이 남김없이 사그라지고 멎는 것, 그 갈망을 버리는 것, 놓아 버리는 것, 그것에서 풀려나는 것, 더는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

Idaṁ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ṁ ariyasaccaṁ— yo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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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앞서 말한 그 갈망이 남김없이 멎는 일을 설명합니다. 첫째 진리 다음에는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과 그 원인이 멎는 일이 이어집니다. 갈망이 사그라지고 멎는 것, 버리는 것, 놓아 버리는 것, 풀려나는 것, 매달리지 않는 것이라는 다섯 표현은 같은 하나의 일을 여러 말로 풀어낸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말한 세 갈래의 갈망이 이렇게 멎습니다.

묵상

무언가에 매달린 마음을 놓아 버렸을 때, 그 자리에는 어떤 느낌이 남았나요? 그때의 느낌을 지금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놓아 버리는 것”과 “매달리지 않는 것” 가운데 지금 더 마음에 닿는 표현은 무엇인가요?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실천의 길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바로 거룩한 여덟 갈래의 길이다. 그 여덟 가지는 다음과 같다. 바르게 이해함, 바르게 마음먹음, 바르게 말함, 몸으로 하는 일을 바르게 함, 먹고사는 일을 바르게 함, 바르게 힘씀, 바르게 알아차림, 마음을 바르게 모음.”

Idaṁ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ṁ—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idaṁ—sammādiṭṭhi …pe… sammāsamād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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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진리는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실천의 길을 밝힙니다. 그것은 앞에서 가운데 길이라고 소개한 바로 그 여덟 갈래의 길이고, 새로 더한 것은 없습니다. 이 반복은 괴로움에 대한 설명과 실제로 걸어야 하는 길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뒤에서는 이 길을 아는 일과 닦는 일, 닦았음을 확인하는 일을 구별합니다.

묵상

여덟 갈래를 다시 읽을 때 처음과 다르게 눈에 들어오는 낱말이 있나요? 가장 부족한 부분을 평가하기보다, 오늘의 말이나 선택과 조용히 이어지는 한 표현이 있다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3 각 진리에서 해야 할 일 12구절

네 진리를 각각 알고, 버리고, 실현하고, 닦는 세 전환의 앎

“‘이것이 괴로움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빤냐)가 생겨났고, 밝은 앎(윗자)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Idaṁ dukkhaṁ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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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가운데 먼저 진리의 내용을 아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에 관한 앎은 세 차례로 나뉩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진리임을 아는 일,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할 일을 아는 일, 그렇게 알았음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세 차례마다 보는 눈, 앎, 지혜, 밝은 앎, 빛이 생겼다는 다섯 표현이 되풀이됩니다. 이 반복에서 달라지는 것은 괴로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괴로움에 대해 해야 할 일은 속속들이 알기입니다. 완성을 말하는 이 문장은 가르침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상태를 당장 이루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이 자신의 앎을 밝히는 문장입니다.

묵상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문장을 읽을 때, 없애려는 마음과 알아보려는 마음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여기서 오래 남는 한 표현은 무엇인가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ṁ ariyasaccaṁ pariññeyyan’ti me, bhikkhave, pubbe …pe… udapā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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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가운데 그 진리에 대해 해야 할 일을 아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에 관한 앎은 세 차례로 나뉩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진리임을 아는 일,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할 일을 아는 일, 그렇게 알았음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세 차례마다 보는 눈, 앎, 지혜, 밝은 앎, 빛이 생겼다는 다섯 표현이 되풀이됩니다. 이 반복에서 달라지는 것은 괴로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괴로움에 대해 해야 할 일은 속속들이 알기입니다. 완성을 말하는 문장도 말하는 이 자신의 앎을 밝히는 문장입니다.

묵상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말을 읽을 때, 없애려는 마음과 알아보려는 마음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보는 눈, 앎, 지혜 가운데 지금 가장 마음에 닿는 말은 무엇인가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을 속속들이 알았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ṁ ariyasaccaṁ pariññā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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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가운데 그 일을 마쳤음을 확인하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에 관한 앎은 세 차례로 나뉩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진리임을 아는 일,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할 일을 아는 일, 그렇게 알았음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세 차례마다 보는 눈, 앎, 지혜, 밝은 앎, 빛이 생겼다는 다섯 표현이 되풀이됩니다. 이 반복에서 달라지는 것은 괴로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괴로움에 대해 해야 할 일은 속속들이 알기입니다. 완성을 말하는 문장도 말하는 이 자신의 앎을 밝히는 문장입니다.

묵상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문장을 읽을 때, 없애려는 마음과 알아보려는 마음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오늘 마음에 남는 표현은 무엇인가요?

“‘이것이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Idaṁ dukkhasamudayaṁ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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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가운데 먼저 진리의 내용을 아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서도 진리의 내용, 해야 할 일, 마친 일이라는 세 차례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나타내는 말은 속속들이 알기에서 버리기로 바뀝니다. 앞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갈망이라고 밝혔으므로, 버리라는 것은 진리가 틀렸다고 부정하거나 괴로움을 겪는 사람을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버리는 대상은 진리가 가리키는 바로 그 원인입니다. 보는 눈부터 빛까지의 다섯 표현은 그대로 반복되지만, 원인을 아는 일과 그 원인을 버린 일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묵상

어떤 반응이 되풀이될 때 그 반응 자체보다 그 앞의 원인을 잠깐 본 적이 있나요? “이것이다”, “버려야 한다”, “버렸다”라는 세 표현의 차이는 어떻게 들리나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의 원인은 버려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samudayaṁ ariyasaccaṁ pahātabban’ti me, bhikkhave, pubbe …pe… udapā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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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가운데 그 진리에 대해 해야 할 일을 아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서도 진리의 내용, 해야 할 일, 마친 일이라는 세 차례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나타내는 말은 속속들이 알기에서 버리기로 바뀝니다. 앞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갈망이라고 밝혔으므로, 버리라는 것은 진리가 틀렸다고 부정하거나 괴로움을 겪는 사람을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버리는 대상은 진리가 가리키는 바로 그 원인입니다. 보는 눈부터 빛까지의 다섯 표현은 그대로 반복되지만, 원인을 아는 일과 그 원인을 버린 일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묵상

어떤 반응이 되풀이될 때 그 반응 자체보다 그 앞의 원인을 잠깐 본 적이 있나요? “이것이다”, “버려야 한다”, “버렸다”라는 세 표현의 차이는 어떻게 들리나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의 원인을 버렸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samudayaṁ ariyasaccaṁ pahīn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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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가운데 그 일을 마쳤음을 확인하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서도 진리의 내용, 해야 할 일, 마친 일이라는 세 차례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나타내는 말은 속속들이 알기에서 버리기로 바뀝니다. 앞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갈망이라고 밝혔으므로, 버리라는 것은 진리가 틀렸다고 부정하거나 괴로움을 겪는 사람을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버리는 대상은 진리가 가리키는 바로 그 원인입니다. 보는 눈부터 빛까지의 다섯 표현은 그대로 반복되지만, 원인을 아는 일과 그 원인을 버린 일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묵상

어떤 반응이 되풀이될 때 그 반응 자체보다 그 앞의 원인을 잠깐 본 적이 있나요? “이것이다”, “버려야 한다”, “버렸다”라는 세 표현의 차이는 어떻게 들리나요?

“‘이것이 괴로움의 멎음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Idaṁ dukkhanirodhaṁ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세 차례 가운데 먼저 진리의 내용을 아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이 멎는 일에서는 몸소 겪어 안다는 말이 중심에 놓입니다. 멎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일, 그것을 몸소 알아야 한다는 일을 아는 것, 몸소 알았다고 확인하는 것은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이 경은 앞에서 멎음을 바로 그 갈망이 남김없이 사그라지고 멎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경험도 그 앞의 정의와 연결해 읽어야 합니다. 보는 눈·앎·지혜·밝은 앎·빛이라는 다섯 표현은 이 세 차례에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이 구별을 읽는 일이 특별한 경험이나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는 시험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묵상

“멎음을 안다”와 “멎음을 몸소 겪어 안다”는 두 표현을 나란히 읽을 때 어떤 차이가 느껴지나요? 두 표현 가운데 지금 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의 멎음은 몸소 겪어 알아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nirodhaṁ ariyasaccaṁ sacchikātabban’ti me, bhikkhave, pubbe …pe…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세 차례 가운데 그 진리에 대해 해야 할 일을 아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이 멎는 일에서는 몸소 겪어 안다는 말이 중심에 놓입니다. 멎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일, 그것을 몸소 알아야 한다는 일을 아는 것, 몸소 알았다고 확인하는 것은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이 경은 앞에서 멎음을 바로 그 갈망이 남김없이 사그라지고 멎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경험도 그 앞의 정의와 연결해 읽어야 합니다. 보는 눈·앎·지혜·밝은 앎·빛이라는 다섯 표현은 이 세 차례에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이 구별을 읽는 일이 특별한 경험이나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는 시험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묵상

“멎음을 안다”와 “멎음을 몸소 겪어 안다”는 두 표현을 나란히 읽을 때 어떤 차이가 느껴지나요? 두 표현 가운데 지금 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의 멎음을 몸소 겪어 알았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nirodhaṁ ariyasaccaṁ sacchika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세 차례 가운데 그 일을 마쳤음을 확인하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이 멎는 일에서는 몸소 겪어 안다는 말이 중심에 놓입니다. 멎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일, 그것을 몸소 알아야 한다는 일을 아는 것, 몸소 알았다고 확인하는 것은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이 경은 앞에서 멎음을 바로 그 갈망이 남김없이 사그라지고 멎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경험도 그 앞의 정의와 연결해 읽어야 합니다. 눈·앎·지혜·밝은 앎·빛이 생겨났다는 말이 이 세 차례에 똑같이 되풀이됩니다. 이 구별을 읽는 일이 특별한 경험이나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는 시험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묵상

“멎음을 안다”와 “멎음을 몸소 겪어 안다”는 두 표현을 나란히 읽을 때 어떤 차이가 느껴지나요? 두 표현 가운데 지금 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것이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실천의 길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Id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세 차례 가운데 먼저 진리의 내용을 아는 문장입니다. 마지막으로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길에도 같은 세 차례가 적용됩니다. 이 길이 무엇인지 알고, 닦아야 한다는 일을 알고, 닦았음을 확인하는 순서입니다. 길은 앞서 나온 여덟 갈래의 실천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닦는다는 것은 그 실천을 익히고 발전시키는 뜻입니다. 이로써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기, 원인은 버리기, 멎음은 몸소 겪어 알기, 길은 닦기라는 서로 다른 일이 갖추어집니다. 같은 말이 되풀이된다고 해서 네 진리에 해당하는 일을 모두 똑같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묵상

길을 “안다”, “닦아야 한다”, “닦았다”는 세 표현을 읽을 때 각각의 무게가 어떻게 다르게 들리나요? 여덟 갈래 가운데 오늘 한 번 기억해 두고 싶은 낱말은 무엇인가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길, 곧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길은 닦아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ṁ bhāvetabban’ti me, bhikkhave, pubbe …pe…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세 차례 가운데 그 진리에 대해 해야 할 일을 아는 문장입니다. 마지막으로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길에도 같은 세 차례가 적용됩니다. 이 길이 무엇인지 알고, 닦아야 한다는 일을 알고, 닦았음을 확인하는 순서입니다. 길은 앞서 나온 여덟 갈래의 실천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닦는다는 것은 그 실천을 익히고 발전시키는 뜻입니다. 이로써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기, 원인은 버리기, 멎음은 몸소 겪어 알기, 길은 닦기라는 서로 다른 일이 갖추어집니다. 같은 말이 되풀이된다고 해서 네 진리에 해당하는 일을 모두 똑같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묵상

길을 “안다”, “닦아야 한다”, “닦았다”는 세 표현을 읽을 때 각각의 무게가 어떻게 다르게 들리나요? 여덟 갈래 가운데 오늘 한 번 기억해 두고 싶은 낱말은 무엇인가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길, 곧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길을 닦았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ṁ bhāvi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세 차례 가운데 그 일을 마쳤음을 확인하는 문장입니다. 마지막으로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길에도 같은 세 차례가 적용됩니다. 이 길이 무엇인지 알고, 닦아야 한다는 일을 알고, 닦았음을 확인하는 순서입니다. 길은 앞서 나온 여덟 갈래의 실천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닦는다는 것은 그 실천을 익히고 발전시키는 뜻입니다. 이로써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기, 원인은 버리기, 멎음은 몸소 겪어 알기, 길은 닦기라는 서로 다른 일이 갖추어집니다. 같은 말이 되풀이된다고 해서 네 진리에 해당하는 일을 모두 똑같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묵상

길을 “안다”, “닦아야 한다”, “닦았다”는 세 표현을 읽을 때 각각의 무게가 어떻게 다르게 들리나요? 여덟 갈래 가운데 오늘 한 번 기억해 두고 싶은 낱말은 무엇인가요?

4 깨달음의 확인과 첫 이해 4구절

열두 양상의 완성과 부처님의 선언, 꼰단냐에게 생긴 진리를 보는 눈

“수행자들이여, 나는 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이렇게 세 차례에 걸친 열두 가지 모두에서, 조금의 흐림도 없이 있는 그대로 알고 보기 전까지는, 수행자들이여, 신들(데와)과 마라와 브라흐마가 있는 이 세상에서,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들(사마나)과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들(브라흐마나)을 비롯한 신들과 사람들 앞에서, ‘더없이 높고 바른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밝히지 않았다.”

Yāvakīvañca me, bhikkhave, imesu catūsu ariyasaccesu evaṁ tiparivaṭṭaṁ dvādasākāraṁ yathābhūtaṁ ñāṇadassanaṁ na suvisuddhaṁ ahosi, neva tāvāhaṁ,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ṁ sammāsambodhiṁ abhisambuddho’ti paccaññāsiṁ.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이 문장은 깨달았다고 밝히기 전의 조건을 설명합니다. 네 진리에 각각 세 차례의 앎이 있으므로 모두 열두 가지가 됩니다. 이어지는 두 문장은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일이 맑아지기 전과 뒤를 대비합니다. 앞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밝히지 않았고, 뒤에서는 밝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두 문장의 신들과 사람들은 같은 세상을 가리킵니다.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들은 브라흐마나를,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들은 사마나를 풀어 쓴 말입니다. 이 대목은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하기 위한 확인을 설명하며,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시간표를 제시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묵상

같은 열두 가지를 두고 “밝히지 않았다”와 “밝혔다”가 갈리는 대목에서 두 문장 사이의 멈춤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이 두 문장이 신중함에 관해 무엇을 묻게 하나요?

“그러나 수행자들이여, 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이렇게 세 차례에 걸친 열두 가지 모두에서, 조금의 흐림도 없이 있는 그대로 알고 보게 되었을 때, 수행자들이여, 나는 신들과 마라와 브라흐마가 있는 이 세상에서,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들과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들을 비롯한 신들과 사람들 앞에서, ‘더없이 높고 바른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 앎과 봄이 생겨났다.”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ūsu ariyasaccesu evaṁ tiparivaṭṭaṁ dvādasākāraṁ yathābhūtaṁ ñāṇadassanaṁ suvisuddhaṁ ahosi, athāhaṁ,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ṁ sammāsambodhiṁ abhisambuddho’ti paccaññāsiṁ. Ñāṇañca pana me dassanaṁ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앞서 아직 밝히지 않았다고 한 것과 달리, 이 문장은 깨달았다고 밝힌 때를 설명합니다. 네 진리에 각각 세 차례의 앎이 있으므로 모두 열두 가지가 됩니다. 이어지는 두 문장은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일이 맑아지기 전과 뒤를 대비합니다. 앞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밝히지 않았고, 뒤에서는 밝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두 문장의 신들과 사람들은 같은 세상을 가리킵니다.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들은 브라흐마나를,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들은 사마나를 풀어 쓴 말입니다. 이 대목은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하기 위한 확인을 설명하며,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시간표를 제시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묵상

같은 열두 가지를 두고 “밝히지 않았다”와 “밝혔다”가 갈리는 대목에서 두 문장 사이의 멈춤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이 두 문장이 신중함에 관해 무엇을 묻게 하나요?

“‘내가 얻은 풀려남(위뭇띠)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번이 마지막 태어남이다.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akuppā me 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 dāni punabbhavo’”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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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이 문장은 가르침을 말한 이 자신에게 생긴 앎을 드러냅니다. 네 가지 진리를 모두 알고 본 뒤, 그는 자신의 풀려남이 흔들리지 않으며 이것이 마지막 삶이고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 선언은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확인입니다.

묵상

“흔들리지 않는 풀려남”, “마지막 태어남”, “다시 태어남은 없다”는 세 말을 하나씩 읽을 때 어떤 느낌이 드나요? 이 세 말 가운데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섯 수행자는 마음이 흡족해져 그분의 말씀을 기뻐했다. 이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꼰단냐 님에게 먼지도 때도 없는, 진리를 보는 눈(담마짝쿠)이 생겨났다. ‘생겨나는 성질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 모두 멎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pañcavaggiyā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ṁ abhinandunti. Imas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ṁ bhaññamāne āyasmato koṇḍaññassa virajaṁ vītamalaṁ dhammacakkhuṁ udapādi: “yaṁ kiñci samudayadhammaṁ sabbaṁ taṁ nirodhadhamman”t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말씀이 끝난 뒤 듣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이 이어집니다. 가르침을 말하는 이의 풀려남에 대한 앎과 듣는 이에게 생긴 이해가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풀려남, 마지막 태어남, 다시 태어남이 없음은 앞서 말한 이 자신의 앎입니다. 그 뒤에 다섯 수행자는 말씀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보는 눈이 생긴 사람으로 따로 이름을 밝힌 이는 꼰단냐입니다. 다섯 사람이 기뻐한 일과 꼰단냐에게 생긴 일을 하나의 성취로 합치지 않아야 합니다. 생겨나는 것과 멎는 것을 짝지은 문장은 그에게 열린 이해의 내용을 드러냅니다.

묵상

다섯 수행자가 기뻐한 장면과 꼰단냐에게 진리를 보는 눈이 생긴 장면은 어떻게 다르게 다가오나요? 오늘 일어났다가 달라지거나 사라진 경험 하나가 있었다면 무엇이었나요?

5 하늘로 이어진 가르침의 울림 10구절

진리의 바퀴가 굴러간 소식이 신들의 세계를 차례로 거쳐 퍼지는 결말

“그분께서 가르침의 바퀴(담마짝까)를 굴리시자, 땅에 사는 신들이 소리 높여 알렸다. ‘그분께서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 동산에서, 견줄 데 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셨다.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도,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도, 신도, 마라도, 브라흐마도, 세상의 그 누구도 이 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

Pavattite ca pana bhagavatā dhammacakke bhummā devā saddamanussāvesuṁ: “etaṁ bhagavatā bārāṇasiyaṁ isipatane migadāye anuttaraṁ dhammacakkaṁ pavattitaṁ appaṭivattiyaṁ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땅에 사는 신들이 먼저 외치는 대목입니다. 꼰단냐의 이해 다음에는 가르침의 울림을 신들이 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땅에 사는 신들이 외치고, 그 소리를 들은 다음 무리가 같은 말을 잇습니다. 가르침을 펼치는 일을 바퀴를 굴리는 것에 빗대고, 세상의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고 반복해 말합니다.

묵상

경이 땅에 사는 신들이 가르침의 소식을 외쳐 전했다고 서술하는 장면이 낯설게 느껴지나요, 익숙하게 느껴지나요? “되돌릴 수 없다”는 표현은 이 장면에서 어떤 울림으로 남나요?

“땅에 사는 신들의 외침을 듣고,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신이 다스리는 하늘(짜뚜마하라지까)에 사는 신들이 소리 높여 알렸다. ‘그분께서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 동산에서, 견줄 데 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셨다.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사마나)도,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도, 신도, 마라도, 브라흐마도, 세상의 그 누구도 이 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

Bhummānaṁ devānaṁ saddaṁ sutvā cātumahārājikā devā saddamanussāvesuṁ: “etaṁ bhagavatā bārāṇasiyaṁ isipatane migadāye anuttaraṁ dhammacakkaṁ pavattitaṁ, appaṭivattiyaṁ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땅의 신들이 외친 소리를 다음 하늘의 신들이 이어받습니다. 꼰단냐의 이해 다음에는 가르침의 울림을 신들이 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땅에 사는 신들이 외치고, 그 소리를 들은 다음 무리가 같은 말을 잇습니다. 짜뚜마하라지까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신이 다스리는 하늘입니다. 가르침을 펼치는 일을 바퀴를 굴리는 것에 빗대고, 세상의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고 되풀이해 말합니다.

묵상

경이 땅의 신들과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신이 다스리는 하늘의 신들이 같은 선언을 이어 외쳤다고 서술하는 장면이 낯설게 느껴지나요, 익숙하게 느껴지나요? “되돌릴 수 없다”는 표현은 이 장면에서 어떤 울림으로 남나요?

“그 하늘에 사는 신들의 외침을 듣고, 서른세 신의 하늘(따와띰사)에 사는 신들이 소리 높여 알렸다. ‘그분께서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 동산에서, 견줄 데 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셨다.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도,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도, 신도, 마라도, 브라흐마도, 세상의 그 누구도 이 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

Cātumahārājikānaṁ devānaṁ saddaṁ sutvā tāvatiṁsā devā …pe…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여기서 앞의 하늘은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신이 다스리는 하늘입니다. 서른세 신의 하늘이라는 이름이 그곳의 주민 수를 모두 센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선 무리의 외침을 듣고 다음 무리가 같은 선언을 전하는 흐름이 이어집니다. 신들의 이름은 달라지지만, 누가 가르침의 바퀴를 굴렸는지와 누구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같은 외침이 하늘을 타고 올라가며 되풀이됩니다.

묵상

앞선 외침을 듣고 같은 말을 이어 전하는 장면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여러 무리가 등장하는 가운데 “누구도 거꾸로 돌릴 수 없다”는 같은 말은 어떤 울림으로 남나요?

“그 하늘에 사는 신들의 외침을 듣고, 야마 하늘에 사는 신들이 소리 높여 알렸다. ‘그분께서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 동산에서, 견줄 데 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셨다.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도,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도, 신도, 마라도, 브라흐마도, 세상의 그 누구도 이 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

yāmā devā …pe…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서른세 신의 하늘에서 들려온 외침을 야마 하늘의 신들이 이어받습니다. 야마는 이 하늘의 이름입니다. 앞선 무리의 외침을 듣고 다음 무리가 같은 선언을 전하는 흐름이 이어집니다. 신들의 이름은 달라지지만, 누가 가르침의 바퀴를 굴렸는지와 누구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가르침의 울림이 하늘마다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묵상

앞선 외침을 듣고 같은 말을 이어 전하는 장면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여러 무리가 등장하는 가운데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는 같은 말은 어떤 울림으로 남나요?

“그 하늘에 사는 신들의 외침을 듣고, 만족하며 지내는 신들(뚜시따)이 소리 높여 알렸다. ‘그분께서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 동산에서, 견줄 데 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셨다.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사마나)도,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도, 신도, 마라도, 브라흐마도, 세상의 그 누구도 이 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

tusitā devā …pe…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야마 하늘에서 들려온 외침을 만족하며 지내는 신들이 이어받습니다. 앞선 무리의 외침을 듣고 다음 무리가 같은 선언을 전하는 흐름이 이어집니다. 신들의 이름은 달라지지만, 누가 가르침의 바퀴를 굴렸는지와 누구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가르침의 울림이 여러 하늘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묵상

앞선 외침을 듣고 같은 말을 이어 전하는 장면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여러 무리가 등장하는 가운데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는 같은 말은 어떤 울림으로 남나요?

“그 신들의 외침을 듣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을 즐기는 신들(님마나라띠)이 소리 높여 알렸다. ‘그분께서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 동산에서, 견줄 데 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셨다.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사마나)도,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도, 신도, 마라도, 브라흐마도, 세상의 그 누구도 이 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

nimmānaratī devā …pe…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만족하며 지내는 신들의 외침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을 즐기는 신들이 이어받습니다. 앞선 무리의 외침을 듣고 다음 무리가 같은 선언을 전하는 흐름이 이어집니다. 신들의 이름은 달라지지만, 누가 가르침의 바퀴를 굴렸는지와 누구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가르침의 울림이 여러 하늘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묵상

앞선 외침을 듣고 같은 말을 이어 전하는 장면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여러 무리가 등장하는 가운데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는 같은 말은 어떤 울림으로 남나요?

“그 신들의 외침을 듣고, 남이 만들어 낸 것을 마음대로 다루는 신들(빠라님미따와사왓띠)이 소리 높여 알렸다. ‘그분께서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 동산에서, 견줄 데 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셨다.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사마나)도,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도, 신도, 마라도, 브라흐마도, 세상의 그 누구도 이 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

paranimmitavasavattī devā …pe…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을 즐기는 신들의 외침을, 남이 만들어 낸 것을 다루는 신들이 이어받습니다. 앞선 무리의 외침을 듣고 다음 무리가 같은 선언을 전하는 흐름이 이어집니다. 신들의 이름은 달라지지만, 누가 가르침의 바퀴를 굴렸는지와 누구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가르침의 울림이 여러 하늘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묵상

앞선 외침을 듣고 같은 말을 이어 전하는 장면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여러 무리가 등장하는 가운데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는 같은 말은 어떤 울림으로 남나요?

“그 신들의 외침을 듣고, 브라흐마와 한 무리를 이루는 신들(브라흐마까이까)이 소리 높여 알렸다. ‘그분께서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 동산에서, 견줄 데 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셨다.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사마나)도,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도, 신도, 마라도, 브라흐마도, 세상의 그 누구도 이 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

brahmakāyikā devā saddamanussāvesuṁ: “etaṁ bhagavatā bārāṇasiyaṁ isipatane migadāye anuttaraṁ dhammacakkaṁ pavattitaṁ appaṭivattiyaṁ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남이 만들어 낸 것을 다루는 신들의 외침을 브라흐마와 한 무리를 이루는 신들이 이어받습니다. 앞선 무리의 외침을 듣고 다음 무리가 같은 선언을 전하는 흐름이 이어집니다. 신들의 이름은 달라지지만, 누가 가르침의 바퀴를 굴렸는지와 누구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가르침의 울림이 여러 하늘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묵상

앞선 외침을 듣고 같은 말을 이어 전하는 장면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여러 무리가 등장하는 가운데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는 같은 말은 어떤 울림으로 남나요?

“이렇게 그 순간에, 그 짧은 사이에, 바로 그때, 그 소리는 브라흐마의 세상까지 솟아올랐다. 이 만 개의 세계가 흔들리고, 크게 흔들리고, 떨렸다. 신들의 힘을 넘어서는, 헤아릴 수 없이 크고 찬란한 빛이 세상에 나타났다.”

Itiha tena khaṇena tena layena tena muhuttena yāva brahmalokā saddo abbhuggacchi. Ayañca dasasahassilokadhātu saṅkampi sampakampi sampavedhi, appamāṇo ca uḷāro obhāso loke pāturahosi atikkamma devānaṁ devānubhāvant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소리가 브라흐마의 세상에 닿고 흔들림과 빛이 나타나는 대목입니다. 신들의 선언은 브라흐마의 세상까지 이어지고, 세계가 흔들리며 큰 빛이 나타났습니다. 이 큰 장면 뒤에는 다시 꼰단냐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알아들었다는 감탄이 두 번 반복되고, 그 말에서 알아들은 꼰단냐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설명합니다. 신들의 외침에서 세계의 흔들림과 빛으로 장면이 넓어지면서, 가르침이 펼쳐진 순간의 크기를 드러냅니다. 한 사람의 이해에서 시작한 후반부가 여러 무리의 외침을 거쳐 다시 그 사람의 이름으로 돌아오면서 가르침의 처음과 끝이 이어집니다.

묵상

만 개 세계의 진동과 한 사람의 이름이 한 결말에 놓인 구성을 읽을 때 어느 쪽 장면이 더 오래 남나요? 두 번 되풀이된 “알아들었구나”는 어떻게 들리나요?

“그때 그분께서 마음에서 우러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꼰단냐가 참으로 알아들었구나! 아, 꼰단냐가 참으로 알아들었구나!’ 이렇게 하여 꼰단냐 님에게 ‘알아들은 꼰단냐(안냐시꼰단냐)’라는 이름이 생겼다.”

Atha kho bhagavā imaṁ udānaṁ udānesi: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ti. Iti hidaṁ āyasmato koṇḍaññassa “aññāsikoṇḍañño” tveva nāmaṁ ahosīt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 - 초전법륜경)

배경

마지막 장면은 꼰단냐에게 생긴 이름을 설명합니다. 신들의 외침은 브라흐마의 세상까지 퍼지고, 세상이 흔들리며 큰 빛이 나타났다고 경은 전합니다. 이 큰 장면 뒤에는 다시 꼰단냐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알아들었다는 감탄이 두 번 반복되고, 그 말에서 알아들은 꼰단냐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설명합니다. 신들의 외침에서 세계의 흔들림과 빛으로 장면이 넓어지면서, 가르침이 펼쳐진 순간의 크기를 드러냅니다. 한 사람의 이해에서 시작한 후반부가 여러 무리의 외침을 거쳐 다시 그 사람의 이름으로 돌아오면서 가르침의 처음과 끝이 이어집니다.

묵상

만 개 세계의 진동과 한 사람의 이름이 한 결말에 놓인 구성을 읽을 때 어느 쪽 장면이 더 오래 남나요? 두 번 되풀이된 “알아들었구나”는 어떻게 들리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