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냄 없음·성냄 없음·어리석음 없음이 해치지 않는 행위와 행복으로 이어짐을 같은 기준으로 확인합니다.
“깔라마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욕심 없음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이롭습니다, 스승님.”
“깔라마들이여, 욕심 없는 사람이 욕심에 눌리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생명을 죽이지 않고, 남이 주지 않은 것을 가져가지 않고, 남의 아내와 관계를 맺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남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에게 이로움과 행복이 되는가?”
“그렇습니다, 스승님.”
Taṁ kiṁ maññatha, kālāmā, alobho purisassa ajjhattaṁ uppajjamāno uppajjati hitāya vā ahitāya vā”ti? “Hitāya, bhante”. “Aluddho panāyaṁ, kālāmā, purisapuggalo lobhena anabhibhūto apariyādinnacitto neva pāṇaṁ hanati, na adinnaṁ ādiyati, na paradāraṁ gacchati, na musā bhaṇati, na parampi tathattāya samādapeti, yaṁ sa hoti dīgharattaṁ hitāya sukhāyā”ti. “Evaṁ, bhante”.
앙굿따라 니까야 AN 3.65 께사뭇띠 숫따 (깔라마경)
배경
이제 같은 물음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옵니다. 첫 사례는 욕심 없음입니다. 깔라마 사람들은 욕심 없음이 일어나면 이롭다고 답하고, 욕심에 눌리지 않은 사람은 앞에서 본 다섯 가지 행위를 하지 않으며 그 결과 오랫동안 이로움과 행복을 얻는다는 데 동의합니다. 같은 행위의 목록이 이번에는 ‘하지 않음’으로 나오므로 앞의 욕심 문답과 짝을 이룹니다.
묵상
무언가를 붙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 마음에 끌려가지 않아서 나도 남도 다치지 않고 지나간 순간이 있었나요? 그때 무엇이 나를 붙잡아 주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깔라마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냄 없음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때 …
어리석음 없음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때 …
그것은 이로움과 행복이 되는가?”
“그렇습니다, 스승님.”
“Taṁ kiṁ maññatha, kālāmā, adoso purisassa ajjhattaṁ uppajjamāno uppajjati …pe… amoho purisassa ajjhattaṁ uppajjamāno uppajjati …pe… hitāya sukhāyā”ti. “Evaṁ, bhante”.
앙굿따라 니까야 AN 3.65 께사뭇띠 숫따 (깔라마경)
배경
성냄 없음과 어리석음 없음의 문답은 경에서 욕심 없음의 문답과 같은 내용이 이어진다는 표시(‘…’)로 줄여 적혀 있습니다. 인용의 ‘…’ 두 곳이 그 자리입니다. 줄어든 자리에는 앞과 같은 물음과 대답이 들어갑니다. 성냄이나 어리석음에 눌리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죽이지 않고, 남이 주지 않은 것을 가져가지 않고, 남의 아내와 관계를 맺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남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끝의 물음은 어리석음 없음 문답을 맺는 물음이고, 깔라마 사람들은 그렇다고 답합니다.
묵상
화가 나지 않았거나 상황을 조금 더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내 선택이 달라진 일이 있었나요? 반응이 누그러진 순간이나 사실 하나를 더 알게 된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깔라마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들은 바람직한가, 바람직하지 않은가?” “바람직합니다, 스승님.”
“허물이 있는가, 없는가?” “허물이 없습니다, 스승님.”
“지혜로운 이들에게 비난받는가, 칭찬받는가?” “칭찬받습니다, 스승님.”
“온전히 받아들여 행하면 이로움과 행복으로 이어지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 일을 그대들은 어떻게 보는가?”
“온전히 받아들여 행하면 이로움과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스승님. 저희는 그렇게 봅니다.”
“Taṁ kiṁ maññatha, kālāmā, ime dhammā kusalā vā akusalā vā”ti? “Kusalā, bhante”. “Sāvajjā vā anavajjā vā”ti? “Anavajjā, bhante”. “Viññugarahitā vā viññuppasatthā vā”ti? “Viññuppasatthā, bhante”. “Samattā samādinnā hitāya sukhāya saṁvattanti no vā? Kathaṁ vā ettha hotī”ti? “Samattā, bhante, samādinnā hitāya sukhāya saṁvattanti. Evaṁ no ettha hotī”ti.
앙굿따라 니까야 AN 3.65 께사뭇띠 숫따 (깔라마경)
배경
욕심·성냄·어리석음이 없는 상태에도 같은 네 가지 물음이 던져집니다. 여기서 ‘이것들’은 바로 앞에서 살핀 욕심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을 가리킵니다. 물음의 순서는 앞과 같고 대답만 모두 반대가 됩니다. 깔라마 사람들은 이것들이 바람직하고, 허물이 없고, 지혜로운 이들에게 칭찬받으며, 온전히 받아들여 행하면 이로움과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차례로 답합니다.
묵상
좋은 뜻으로 시작한 행동이 실제로 나와 남에게 이로움과 행복으로 이어졌는지 되돌아본 적이 있나요? 바람직한지, 허물이 없는지, 지혜로운 이들이 칭찬할지, 해 보면 이로움으로 이어지는지 가운데 내가 가장 자주 건너뛰는 물음은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깔라마들이여, 내가 앞서 이렇게 말했다. “자, 깔라마들이여,
전해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이어져 왔다고 해서, 소문이라고 해서, 경전에 들어 있다고 해서,
논리가 뒷받침한다고 해서, 추론했다고 해서, 이리저리 헤아려 그럴듯하다고 해서, 곰곰 따져 보고 어떤 견해에 수긍이 간다고 해서,
말하는 이가 유능해 보인다고 해서, ‘이 수행자는 우리 스승이다’라고 해서 받아들이지 마라.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스스로 알게 될 때에는 …”
“Iti kho, kālāmā, yaṁ taṁ avocumhā: ‘etha tumhe, kālāmā. Mā anussavena, mā paramparāya, mā itikirāya, mā piṭakasampadānena, mā takkahetu, mā nayahetu, mā ākāraparivitakkena, mā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mā bhabbarūpatāya, mā samaṇo no garūti. Yadā tumhe, kālāmā, attanāva jāneyyātha— …
앙굿따라 니까야 AN 3.65 께사뭇띠 숫따 (깔라마경)
배경
욕심·성냄·어리석음이 없는 상태가 이로움과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데 깔라마 사람들이 동의하자, 부처님은 ‘그러므로’라고 받으며 처음에 한 말을 다시 인용합니다. 해로운 쪽의 문답을 마친 뒤에도 같은 방식으로 인용했으니, 이번이 두 번째 인용입니다. 열 가지 이유의 목록은 처음과 같은 순서로 나옵니다. 끝에 ‘스스로 알게 될 때에는’이라는 조건이 시작되고, 무엇을 알게 되는지는 이어지는 말에 나옵니다.
묵상
내가 좋아하는 주장에는 검증을 느슨하게 하고 싫어하는 주장에는 엄격하게 한 적이 있나요? 같은 물음을 양쪽에 똑같이 던진다면 어떤 점을 새로 확인하게 될까요?
“… ‘이것들은 바람직하고, 허물이 없고, 지혜로운 이들에게 칭찬받는다. 온전히 받아들여 행하면 이로움과 행복으로 이어진다’라고 알면, 깔라마들이여, 그때 그것들을 받아들여 지니고 살아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ime dhammā kusalā, ime dhammā anavajjā, ime dhammā viññuppasatthā, ime dhammā samattā samādinnā hitāya sukhāya saṁvattantīti, atha tumhe, kālāmā, upasampajja vihareyyāthā’ti, iti yaṁ taṁ vuttaṁ idametaṁ paṭicca vuttaṁ.
앙굿따라 니까야 AN 3.65 께사뭇띠 숫따 (깔라마경)
배경
부처님이 다시 인용한 처음의 말이 끝나는 대목입니다. 앞에서 시작한 조건이 이로운 네 가지로 채워지고, 할 일은 받아들여 지니고 사는 것으로 정해집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열 가지 이유에 기대지 말라던 처음의 말을 한 까닭이 방금 함께 확인한 욕심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의 문답에 있다고 밝힙니다. 해로운 쪽을 인용할 때는 결론이 버림이었으므로, 여기까지 오면 버릴 것과 지닐 것이 같은 기준으로 가려집니다.
묵상
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꾸준히 이어 가기 어려운 작은 실천이 있나요? 그 실천이 자리 잡도록 시간이나 환경에서 하나만 바꾼다면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