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나바브라흐마나 숫따(브라흐마나 운나바)

Uṇṇābhabrāhmaṇasutta

상윳따 니까야 SN 51.15

열의로 열의를 버릴 수 있느냐는 물음에, 목적을 이루면 네 바탕이 가라앉는다고 답한다.

인용된 가르침 9구절

이 경을 9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열의를 내려놓기 위해 삶을 닦다 1구절

운나바 브라흐마나가 아난다 님에게 거룩한 삶의 목적을 묻고, 아난다 님이 열의를 버리기 위한 것이라고 답합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아난다 님은 꼬삼비의 고시따 승원에 머물렀다. 그때 운나바 브라흐마나가 아난다 님에게 다가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나눈 뒤, 한쪽에 앉은 운나바 브라흐마나가 아난다 님에게 여쭈었다. “아난다 님, 수행자 고따마의 곁에서 거룩한 삶을 닦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브라흐마나여, 부처님의 곁에서 거룩한 삶을 닦는 것은 열의를 버리기 위해서다.”

Evaṁ me sutaṁ—ekaṁ samayaṁ āyasmā ānando kosambiyaṁ viharati ghositārāme. Atha kho uṇṇābho brāhmaṇo yenāyasmā ānand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āyasmatā ānandena saddhiṁ sammodi. Sammodanīyaṁ kathaṁ sāraṇīyaṁ vītisāretvā ekamantaṁ nisīdi. Ekamantaṁ nisinno kho uṇṇābho brāhmaṇo āyasmantaṁ ānandaṁ etadavoca: “kimatthiyaṁ nu kho, bho ānanda, samaṇe gotame brahmacariyaṁ vussatī”ti? “Chandappahānatthaṁ kho, brāhmaṇa, bhagavati brahmacariyaṁ vussatī”ti.

상윳따 니까야 SN 51.15 운나바브라흐마나 숫따 (브라흐마나 운나바)

배경

경의 도입과 첫 문답입니다. 전승자는 아난다 님이 꼬삼비 고시따 승원에 머문 때를 밝히고, 운나바 브라흐마나가 인사를 마친 뒤 물었다고 전합니다. 브라흐마나는 “아난다 님”이라 부르며 묻고, 아난다는 “브라흐마나여”라 부르며 답합니다. ‘열의’라는 말은 이 경 전체에서 같은 낱말로 이어지며, 뒤에서 열의에 바탕을 둔 길이 다시 나옵니다. 이 첫 답은 거룩한 삶의 목적을 열의를 버리는 데 두고, 다음 문답은 그 목적에 이르는 길을 묻습니다.

묵상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첫 질문을 읽을 때, 지금 하고 있는 한 가지 일의 목적이 떠오르나요? 지금 그 일을 어디로 향해 시작했는지 살펴볼 수 있나요?

2 그 열의를 버리는 길과 실천 1구절

브라흐마나가 그 열의를 버리는 길과 실천이 있는지 확인하고, 이어 그것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아난다 님, 그러면 이 열의를 버리는 길이 있고 그 실천이 있습니까?” “브라흐마나여, 이 열의를 버리는 길이 있고 그 실천이 있다.” “아난다 님, 그러면 이 열의를 버리는 길은 무엇이고 그 실천은 무엇입니까?”

“Atthi pana, bho ānanda, maggo atthi paṭipadā etassa chandassa pahānāyā”ti? “Atthi kho, brāhmaṇa, maggo, atthi paṭipadā etassa chandassa pahānāyā”ti. “Katamo pana, bho ānanda, maggo katamā paṭipadā etassa chandassa pahānāyā”ti?

상윳따 니까야 SN 51.15 운나바브라흐마나 숫따 (브라흐마나 운나바)

배경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은 먼저 길과 그 실천이 있는지를 묻고, 아난다는 둘 다 있다고 답합니다. 브라흐마나는 곧바로 그 길과 실천이 무엇인지 다시 묻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열의’는 앞서 함께 이야기한 바로 그 열의를 가리킵니다. 이 문답은 목적만 밝힌 첫 대답에서, 실제로 닦아야 할 길을 밝힐 다음 대답으로 넘어갑니다.

묵상

길이 있는지 묻고, 있다고 들은 뒤 그 길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순서를 읽을 때 어떤 차이가 느껴지나요? 지금 한 가지 목적을 향해 가는 길이 있는지만 확인하고 싶은지, 아니면 구체적인 실천까지 알고 싶은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3 열의를 놓는 길을 떠받치는 네 가지 바탕 1구절

아난다 님이 네 가지 성취의 바탕을 열의·힘씀·마음·탐구 순서로 들고, 이것이 열의를 버리는 길이자 실천이라고 답합니다.

“브라흐마나여, 여기 수행자는 열의에서 오는 집중과 적극적인 노력을 갖춘 성취의 바탕을 닦는다. 힘씀에서 오는 집중 … 마음에서 오는 집중 … 탐구에서 오는 집중과 적극적인 노력을 갖춘 성취의 바탕을 닦는다. 브라흐마나여, 이것이 그 열의를 버리는 길이며 이것이 그 실천이다.”

“Idha, brāhmaṇa, bhikkhu chandasamādhip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ṁ iddhipādaṁ bhāveti, vīriyasamādhi …pe… cittasamādhi … vīmaṁsāsamādhip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ṁ iddhipādaṁ bhāveti—ayaṁ kho, brāhmaṇa, maggo ayaṁ paṭipadā etassa chandassa pahānāyā”ti.

상윳따 니까야 SN 51.15 운나바브라흐마나 숫따 (브라흐마나 운나바)

배경

브라흐마나의 “무엇인가?”에 대한 아난다의 직접 답입니다. 네 항목은 열의·힘씀·마음·탐구의 순서이며, 시작과 끝에 “브라흐마나여”라는 부름이 한 번씩 나옵니다. 목적에서 버린다고 한 바로 그 열의가 여기서 첫 성취 바탕의 열의로 다시 나옵니다. 네 바탕을 닦는 일이 바로 그 열의를 버리는 길이자 실천이라고 답합니다.

묵상

같은 ‘열의’가 버릴 목적과 길의 첫 바탕에 함께 놓인 대목을 읽을 때, 모순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나요? 열의·힘씀·마음·탐구 네 이름 가운데 무엇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4 열의로 열의를 버릴 수 없다는 이의와 되물음 1구절

브라흐마나가 끝이 있음과 열의로 열의를 버릴 수 없다는 이의를 말하자, 아난다 님이 정원에 가려던 열의가 도착 뒤 가라앉는지 되묻습니다.

“아난다 님, 그렇다면 그것은 끝이 있는 것이며 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열의로 열의를 버리겠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브라흐마나여, 내가 이 점을 그대에게 되묻겠다. 그대에게 맞는 대로 대답해라. 브라흐마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에게 전에 ‘정원에 가겠다’는 열의가 있었는가? 그대가 정원에 이르렀을 때 그에 따른 열의는 가라앉았는가?” “그렇습니다, 아난다 님.”

“Evaṁ sante, bho ānanda, santakaṁ hoti no asantakaṁ. Chandeneva chandaṁ pajahissatīti—netaṁ ṭhānaṁ vijjati”. “Tena hi, brāhmaṇa, taññevettha paṭipucchissāmi. Yathā te khameyya tathā taṁ byākareyyāsi. Taṁ kiṁ maññasi, brāhmaṇa, ahosi te pubbe chando ‘ārāmaṁ gamissāmī’ti? Tassa te ārāmagatassa yo tajjo chando so paṭippassaddho”ti? “Evaṁ, bho”.

상윳따 니까야 SN 51.15 운나바브라흐마나 숫따 (브라흐마나 운나바)

배경

네 바탕의 답을 들은 브라흐마나는 먼저 “끝이 있는 것이며 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이어 바로 열의로 열의를 버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아난다는 이의를 곧장 논박하지 않고 되묻겠다고 하며, 답하는 방식은 브라흐마나에게 맡깁니다. 첫 질문은 정원에 가려던 열의와 정원에 도착한 뒤 그에 따른 열의가 가라앉는지를 짝지으며, 브라흐마나는 “그렇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질문 속 ‘열의’는 앞의 목적과 길에서 쓰인 바로 그 열의입니다. 이 첫 예는 어떤 목적을 향하던 열의가 목적을 이룬 뒤에도 계속 남아야 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묵상

“열의로 열의를 버릴 수 없다”는 이의와 정원에 도착한 뒤 열의가 가라앉았다는 답 가운데 어느 쪽이 먼저 와닿나요? 최근 목적 하나를 이룬 뒤 그곳으로 향하던 마음이 잦아든 적이 있나요?

5 정원에 이르면 쏟던 힘도 가려던 마음도 잦아든다 1구절

아난다 님이 정원에 가려던 힘씀과 마음이 도착 뒤 각각 가라앉는지 묻고, 브라흐마나가 두 번 긍정합니다.

“그대에게 전에 ‘정원에 가겠다’는 힘씀이 있었는가? 그대가 정원에 이르렀을 때 그에 따른 힘씀은 가라앉았는가?” “그렇습니다, 아난다 님.” “그대에게 전에 ‘정원에 가겠다’는 마음이 있었는가? 그대가 정원에 이르렀을 때 그에 따른 마음은 가라앉았는가?” “그렇습니다, 아난다 님.”

“Ahosi te pubbe vīriyaṁ ‘ārāmaṁ gamissāmī’ti? Tassa te ārāmagatassa yaṁ tajjaṁ vīriyaṁ taṁ paṭippassaddhan”ti? “Evaṁ, bho”. “Ahosi te pubbe cittaṁ ‘ārāmaṁ gamissāmī’ti? Tassa te ārāmagatassa yaṁ tajjaṁ cittaṁ taṁ paṭippassaddhan”ti? “Evaṁ, bho”.

상윳따 니까야 SN 51.15 운나바브라흐마나 숫따 (브라흐마나 운나바)

배경

열의에 관한 첫 예에 이어, 아난다는 같은 정원 도착의 물음을 힘씀과 마음에 차례로 적용합니다. 각 물음은 전에 정원에 가려는 것이 있었는지, 도착한 뒤 그에 따른 것이 가라앉았는지를 묻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은 두 번 다 “그렇습니다, 아난다 님”이라고 답합니다. 이 반복은 목적을 향한 움직임이 열의·힘씀·마음에 함께 있으며, 목적지에 이른 뒤에는 각각 그에 따른 작용이 가라앉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묵상

정원에 가려는 힘씀과 마음이 도착 뒤 가라앉는다는 두 문답을 읽을 때, 어떤 일의 전후가 떠오르나요? 힘을 내던 움직임과 그곳을 향하던 마음이 같은 때에 잦아들었나요, 서로 달랐나요?

6 탐구의 가라앉음에서 완전히 깨달은 이의 열의로 1구절

정원에 가려던 탐구가 도착 뒤 가라앉는다는 마지막 예를 확인하고,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려는 열의가 성취 뒤 가라앉는 데 적용합니다.

“그대에게 전에 ‘정원에 가겠다’는 탐구가 있었는가? 그대가 정원에 이르렀을 때 그에 따른 탐구는 가라앉았는가?” “그렇습니다, 아난다 님.” “이와 같이 브라흐마나여, 그 수행자는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로서 흘러드는 것이 다하고, 거룩한 삶을 마치고, 할 일을 다하고, 짐을 내려놓고, 자기 목적에 이르고, 존재의 결박을 완전히 끊고, 바른 앎으로 풀려났다. 그에게 전에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려는 열의가 있었으나,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면 그에 따른 열의가 가라앉는다.”

“Ahosi te pubbe vīmaṁsā ‘ārāmaṁ gamissāmī’ti? Tassa te ārāmagatassa yā tajjā vīmaṁsā sā paṭippassaddhā”ti? “Evaṁ, bho”. “Evameva kho, brāhmaṇa, yo so bhikkhu arahaṁ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ṁyojano sammadaññāvimutto, tassa yo pubbe chando ahosi arahattappattiyā, arahattappatte yo tajjo chando so paṭippassaddho;

상윳따 니까야 SN 51.15 운나바브라흐마나 숫따 (브라흐마나 운나바)

배경

정원의 비유에서 네 번째로 물은 것이 탐구였고, 같은 긍정 답을 받은 뒤 아난다는 “이와 같이”라는 말로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 이야기로 이어 갑니다. 정원에 이르면 탐구가 가라앉듯,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면 그렇게 되려던 열의도 가라앉습니다. 완전히 깨달은 이를 설명하는 여덟 가지, 곧 완전히 깨달은 이·흘러드는 것이 다함·거룩한 삶을 마침·할 일을 다함·짐을 내려놓음·자기 목적에 이름·존재의 결박을 완전히 끊음·바른 앎으로 풀려남을 모두 짚습니다.

묵상

정원에 이른 뒤 탐구가,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된 뒤 그에 따른 열의가 가라앉는다는 두 장면은 목적과 과정의 관계를 어떻게 보여 주나요? 작은 목적 하나가 이루어진 뒤 더는 필요하지 않았던 움직임이 있었는지만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7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면 나머지 세 바탕도 가라앉다 1구절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려는 힘씀·마음·탐구도 성취 뒤 각각 가라앉는다고 밝히고, 끝이 있는지 다시 묻습니다.

“전에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가 되려는 힘씀이 있었으나,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면 그에 따른 힘씀이 가라앉는다. 전에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면 그에 따른 마음이 가라앉는다. 전에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려는 탐구가 있었으나,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면 그에 따른 탐구가 가라앉는다. 브라흐마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끝이 있는 것인가, 끝이 없는 것인가?”

yaṁ pubbe vīriyaṁ ahosi arahattappattiyā, arahattappatte yaṁ tajjaṁ vīriyaṁ taṁ paṭippassaddhaṁ; yaṁ pubbe cittaṁ ahosi arahattappattiyā, arahattappatte yaṁ tajjaṁ cittaṁ taṁ paṭippassaddhaṁ; yā pubbe vīmaṁsā ahosi arahattappattiyā, arahattappatte yā tajjā vīmaṁsā sā paṭippassaddhā. Taṁ kiṁ maññasi, brāhmaṇa, iti evaṁ sante, santakaṁ vā hoti no asantakaṁ vā”ti?

상윳따 니까야 SN 51.15 운나바브라흐마나 숫따 (브라흐마나 운나바)

배경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된 뒤 열의가 가라앉는다는 앞 대목에 이어, 힘씀·마음·탐구도 마찬가지로 차례로 놓입니다. 힘씀·마음·탐구도 전에는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려는 쪽으로 움직였지만, 실제로 이르면 그 움직임이 가라앉습니다. 열의까지 합하면 정원 비유의 네 가지와 수행 순서도 똑같습니다. 끝의 “브라흐마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아난다가 다시 청자를 부르는 말이며, 끝이 있는 것인지 끝이 없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목적을 이루고 나면 네 가지가 모두 가라앉는다는 사실이 이 질문의 바탕입니다.

묵상

열의에 이어 힘씀·마음·탐구도 목적을 이루면 가라앉는다는 반복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항목은 무엇인가요? 어떤 일 하나가 끝난 뒤에도 남은 움직임과 자연스럽게 잦아든 움직임을 구별해 볼 수 있을까요?

8 끝이 있다는 확인과 가르침의 네 비유 1구절

브라흐마나가 끝이 있음을 확인하고 아난다 님을 두 번 찬탄한 뒤, 가르침이 드러난 작용을 네 비유로 말합니다.

“분명히 아난다 님, 그렇다면 끝이 있는 것이며 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합니다, 아난다 님! 훌륭합니다, 아난다 님! 아난다 님, 뒤집힌 것을 바로 세우고, 숨겨진 것을 열며, 길 잃은 이에게 길을 알려 주고, ‘눈 있는 이들이 형상을 보리라’ 하며 어둠 속에 등불을 밝힌 듯 아난다 님께서 여러 방식으로 가르침을 드러내셨습니다.”

“Addhā, bho ānanda, evaṁ sante, santakaṁ hoti no asantakaṁ. Abhikkantaṁ, bho ānanda, abhikkantaṁ, bho ānanda. Seyyathāpi, bho ānanda, nikkujjitaṁ vā ukkujjeyya, paṭicchannaṁ vā vivareyya, mūḷhassa vā maggaṁ ācikkheyya, andhakāre vā telapajjotaṁ dhāreyya: ‘cakkhumanto rūpāni dakkhantī’ti; evamevaṁ bhotā ānandena anekapariyāyena dhammo pakāsito.

상윳따 니까야 SN 51.15 운나바브라흐마나 숫따 (브라흐마나 운나바)

배경

아난다의 마지막 질문에 운나바 브라흐마나는 “분명히”라고 답하며, 끝이 있는 것이고 끝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배열을 그대로 확인합니다. 이어 “훌륭합니다”를 두 번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아난다 님이 가르침을 드러낸 주체로 다시 나옵니다. 가르침의 작용은 뒤집힌 것을 바로 세움·숨겨진 것을 엶·길 잃은 이에게 길을 알려 줌·눈 있는 이가 형상을 보도록 어둠에 등불을 밝힘의 네 비유로 이어집니다. 문답을 이해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칭찬입니다.

묵상

뒤집힌 것을 세우고, 숨겨진 것을 열고, 길을 알려 주고, 어둠에 등불을 밝힌다는 네 비유 가운데 지금 가장 또렷한 것은 무엇인가요? 어떤 설명을 들은 뒤 이해가 달라진 경험과 닿는 비유가 있는지 가볍게 살펴볼 수 있을까요?

9 세 가지 보배에 평생 귀의하다 1구절

운나바 브라흐마나가 고따마 님·가르침·수행자 공동체에 귀의하고, 평생 귀의한 재가 신자로 기억해 달라고 아난다 님에게 청합니다.

“아난다 님, 저는 고따마 님과 가르침과 수행자 공동체(상가)에 귀의합니다. 아난다 님께서는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귀의한 집에 사는 신도로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Esāhaṁ, bho ānanda, taṁ bhavantaṁ gotamaṁ saraṇaṁ gacchāmi dhammañca bhikkhusaṅghañca. Upāsakaṁ maṁ bhavaṁ ānando dhāretu ajjatagge pāṇupetaṁ saraṇaṁ gatan”ti.

상윳따 니까야 SN 51.15 운나바브라흐마나 숫따 (브라흐마나 운나바)

배경

네 비유로 아난다를 칭찬한 뒤, 운나바 브라흐마나는 자신의 선택을 밝힙니다. 귀의처는 고따마 님, 가르침, 수행자 공동체(상가) 셋입니다. 첫 “아난다 님”은 아난다를 부르는 말이고, 다음 “아난다 님께서는”은 자신을 집에 사는 신도로 기억해 달라는 부탁의 상대를 가리킵니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라는 말은 평생에 걸친 다짐입니다. 거룩한 삶의 목적을 묻던 브라흐마나는 이렇게 전체 문답을 들은 뒤 세 가지 보배에 평생 귀의하겠다고 스스로 밝히며 경을 닫습니다.

묵상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라는 긴 범위를 읽을 때, 지금 소중하게 여기며 오래 지키고 싶은 한 방향이 떠오르나요? 그 방향에 오늘 마음이 조금 기우는지, 아니면 아직 모르겠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