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 숫따

Soṇasutta

상윳따 니까야 SN 22.49

다섯 무더기를 두고 남보다 낫다·같다·못하다 재는 것이 곧 착각이라 짚는다.

인용된 가르침 12구절

이 경을 12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물질로 자신을 재는 세 비교 1구절

부처님께서 소나에게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는 물질을 근거로 우열과 같음을 재는 일을 밝히십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 다람쥐 먹이터에 머무셨다. 그때 집주인의 아들 소나가 부처님께 다가갔다. … 한쪽에 앉은 소나에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나여, 어떤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사마나)나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이든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물질을 두고 ‘나는 남보다 낫다’, ‘나는 남과 같다’, ‘나는 남보다 못하다’고 여긴다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vaṁ me sutaṁ—ekaṁ samayaṁ bhagavā rājagahe viharati veḷuvane kalandakanivāpe. Atha kho soṇo gahapatiputt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pe… ekamantaṁ nisinnaṁ kho soṇaṁ gahapatiputtaṁ bhagavā etadavoca: “Ye hi keci, soṇa,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aniccena rūpena dukkhena vipariṇāmadhammena ‘seyyohamasmī’ti vā samanupassanti; ‘sadisohamasmī’ti vā samanupassanti; ‘hīnohamasmī’ti vā samanupassanti; kimaññatra yathābhūtassa adassanā?

상윳따 니까야 SN 22.49 소나 숫따

배경

경의 도입에서 집주인의 아들 소나가 라자가하 대나무 숲의 부처님을 찾아오고, 부처님께서 그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소나가 다가가 한쪽에 앉자, 부처님께서 그에게 가르침을 말씀하십니다. 첫 논지는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물질을 근거로 자신을 남보다 낫다·같다·못하다고 보는 세 비교를 모두 나란히 둡니다. 이 구절은 그 셋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함”으로 묶는 질문입니다. 수행의 초점은 변하는 물질을 자기 값의 잣대로 삼는 봄 자체를 알아차리는 데 있습니다.

묵상

물질을 두고 “낫다·같다·못하다” 가운데 한 판단이 떠오른 순간이 있었나요? 그 판단이 기대는 몸의 모습이나 상태가 지금도 변하고 있음을 함께 볼 수 있을까요? 비교가 잠시 멎을 때 몸의 긴장이나 시선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2 느낌과 인식에 이어지는 비교 1구절

느낌에는 세 비교와 진실을 보지 못함이 온전히 반복되고, 인식에는 같은 정형이 생략 표시로 이어집니다.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느낌을 두고 ‘나는 남보다 낫다’, ‘나는 남과 같다’, ‘나는 남보다 못하다’고 여긴다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대로 있지 않은 인식을 두고도 …”

Aniccāya vedanāya dukkhāya vipariṇāmadhammāya ‘seyyohamasmī’ti vā samanupassanti; ‘sadisohamasmī’ti vā samanupassanti; ‘hīnohamasmī’ti vā samanupassanti; kimaññatra yathābhūtassa adassanā? Aniccāya saññāya …

상윳따 니까야 SN 22.49 소나 숫따

배경

물질에 이어, 느낌과 인식에도 같은 말씀이 이어집니다. 느낌에서는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변화의 성질, 낫다·같다·못하다의 세 긍정 비교,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함이라는 결론이 모두 나타납니다. 인식은 “그대로 있지 않은 인식을 두고 …”라고 줄여져 있으며, 그 생략부에는 앞과 같은 괴로움·변화의 성질, 세 비교,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함의 결론이 반복됩니다. 느낌이나 인식이 달라질 때마다, 그 바탕이 변하고 있음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묵상

느낌이 좋거나 나쁠 때 그것을 곧 자신의 우열로 바꾸어 읽는 순간이 있나요? “이 느낌은 변한다”는 사실과 “나는 낫다·같다·못하다”는 평가를 잠시 구별해 볼 수 있을까요? 평가를 보태기 전 느낌 자체는 어디에서 어떻게 드러나나요?

3 지어내는 작용과 의식에 이어지는 비교 1구절

지어내는 작용과 의식에도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변화의 성질과 세 비교,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함이 반복됩니다.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지어내는 작용을 두고 ‘나는 남보다 낫다’, ‘나는 남과 같다’, ‘나는 남보다 못하다’고 여긴다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의식을 두고 ‘나는 남보다 낫다’, ‘나는 남과 같다’, ‘나는 남보다 못하다’고 여긴다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aniccehi saṅkhārehi dukkhehi vipariṇāmadhammehi ‘seyyohamasmī’ti vā samanupassanti; ‘sadisohamasmī’ti vā samanupassanti; ‘hīnohamasmī’ti vā samanupassanti; kimaññatra yathābhūtassa adassanā? Aniccena viññāṇena dukkhena vipariṇāmadhammena ‘seyyohamasmī’ti vā samanupassanti; ‘sadisohamasmī’ti vā samanupassanti; ‘hīnohamasmī’ti vā samanupassanti; kimaññatra yathābhūtassa adassan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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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내는 작용과 의식을 두고도 같은 비교가 되풀이됩니다.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이 둘을 두고 ‘나는 남보다 낫다, 같다, 못하다’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다섯 무더기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이 비교에서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의지나 또렷한 의식처럼 안에서 느껴지는 작용도 변하는 다섯 무더기의 하나일 뿐, 자신을 평가하는 고정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묵상

떠오른 의도나 또렷한 의식을 자신의 우열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은 순간이 있나요? 그 작용도 변하기 마련이라는 구절을 함께 놓아 보면 비교의 확실함이 어떻게 보이나요? 그 판단이 느슨해질 때 다음 생각이나 말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4 물질로 우열을 여기지 않는 봄 1구절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는 물질을 두고 세 비교를 모두 하지 않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 밝힙니다.

“그러나 소나여, 어떤 수행자나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이든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물질을 두고 ‘나는 남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고, ‘나는 남과 같다’고 여기지 않고, ‘나는 남보다 못하다’고도 여기지 않는다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Ye ca kho keci, soṇa,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aniccena rūpena dukkhena vipariṇāmadhammena ‘seyyohamasmī’tipi na samanupassanti; ‘sadisohamasmī’tipi na samanupassanti; ‘hīnohamasmī’tipi na samanupassanti; kimaññatra yathābhūtassa dassan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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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온 말과 반대로, 이번에는 부정하는 문장이 이어집니다. 대상은 여전히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물질이고, 세 비교의 순서도 낫다·같다·못하다로 같습니다. 달라지는 것은 각 문장 끝에 붙은 “여기지 않는다”는 부정입니다. 그 결과 마지막 문장은 “있는 그대로 봄”을 뜻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대목은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하라는 조언도, 더 낮게 평가하라는 조언도 아닙니다. 수행의 방향은 변화하는 물질을 근거로 세 비교 어느 쪽도 만들지 않는 봄입니다.

묵상

물질을 근거로 한 세 비교를 하나도 만들지 않는다는 문장이 어떻게 들리나요? “낫다”만 놓고 “못하다”는 남겨 두고 있지는 않은지 한 판단을 살펴볼 수 있을까요? 세 부정을 차례로 읽을 때 몸에서 느껴지는 차이도 있나요?

5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에서 비교하지 않기 1구절

느낌과 인식과 지어내는 작용에도 세 비교의 부정과 있는 그대로 보는 정형이 생략 표시로 반복됩니다.

“그대로 있지 않은 느낌을 두고도 … 그대로 있지 않은 인식을 두고도 … 그대로 있지 않은 지어내는 작용을 두고도 …”

Aniccāya vedanāya … aniccāya saññāya … aniccehi saṅkhāreh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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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에 이어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에도 같은 형식이 반복됩니다. 세 가지 모두에 괴로움과 변화의 성질, 낫다·같다·못하다라고 여기지 않는 세 부정, 그리고 있는 그대로 봄이라는 결론이 똑같이 이어집니다.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비교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묵상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 가운데 비교의 근거로 가장 자주 붙드는 하나가 있나요? 그 경험이 변하는 동안 “낫다·같다·못하다”를 모두 더하지 않는 순간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그때 몸이나 마음에서 먼저 달라지는 한 반응도 보이나요?

6 의식으로도 비교하지 않는 봄 1구절

의식의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변화 성질을 보고 낫다·같다·못하다 세 비교를 모두 부정합니다.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의식을 두고 ‘나는 남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고, ‘나는 남과 같다’고 여기지 않고, ‘나는 남보다 못하다’고도 여기지 않는다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aniccena viññāṇena dukkhena vipariṇāmadhammena ‘seyyohamasmī’tipi na samanupassanti; ‘sadisohamasmī’tipi na samanupassanti; ‘hīnohamasmī’tipi na samanupassanti; kimaññatra yathābhūtassa dassan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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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서도 같은 문장이 온전한 형태로 나타나 닫힙니다. 의식에도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변화의 성질이 모두 붙고, 낫다·같다·못하다의 순서를 그대로 둔 채 각 비교를 “여기지 않는다”고 세 번 부정합니다. 결론은 있는 그대로 봄입니다. 앞서 줄인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 자리에도 이 온전한 형식이 똑같이 적용됩니다. 수행에서는 알고 있다는 감각이나 의식의 선명함까지 자기의 지위로 굳히지 않습니다. 변하는 의식 위에 비교하는 자기를 세우지 않는 봄을 밝힙니다.

묵상

의식이 선명하거나 흐릴 때 곧바로 자신이 남보다 낫거나 못하다고 결론 내리나요? “여기지 않는다”는 세 부정을 차례로 읽으면 어느 비교가 가장 오래 남아 있나요? 세 판단이 멎은 한순간의 의식은 어떤 모습으로 느껴지나요?

7 변하고 괴로운 몸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1구절

부처님과 소나의 문답이 물질의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변화와 세 가지 자아 동일시의 부정을 차례로 확인합니다.

“소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늘 그대로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 “그대로 있지 않은 것은 괴로운가, 즐거운가?” “괴롭습니다, 부처님.”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것을 ‘이것은 나의 것, 이것이 나, 이것이 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Taṁ kiṁ maññasi, soṇa, rūpaṁ niccaṁ vā aniccaṁ vā”ti? “Aniccaṁ, bhante”. “Yaṁ panāniccaṁ dukkhaṁ vā taṁ sukhaṁ vā”ti? “Dukkhaṁ, bhante”. “Yaṁ panāniccaṁ dukkhaṁ vipariṇāmadhammaṁ kallaṁ nu taṁ samanupassitu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ṁ, bh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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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에 관한 두 논지 뒤, 부처님께서는 소나와의 문답으로 물질의 성질을 단계마다 확인하십니다. 먼저 늘 그대로 있음과 그렇지 않음 가운데 그렇지 않음을, 이어 괴로움과 즐거움 가운데 괴로움을 답하게 합니다. 그 둘에 변하기 마련이라는 성질을 더한 뒤, “나의 것·나·나의 자아”라는 내 것으로 삼음·같은 것으로 여김·변하지 않는 무엇으로 삼음이라는 세 문장이 합당한지 묻고 소나는 모두 아니라고 답합니다. 세 질문은 각각 소나의 대답과 바로 맞물려 하나의 추론을 이룹니다. 수행은 그 성질을 근거로 세 가지 자아 주장이 합당하지 않음을 차례로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묵상

물질을 두고 “나의 것·나·나의 자아”라는 세 표현 중 가장 익숙한 하나가 있나요? 그대로 있지 않음과 괴로움이라는 앞선 두 답을 함께 놓으면 그 표현은 어떻게 달리 들리나요? 세 표현을 하나씩 떼어 읽을 때 몸의 반응도 달라지나요?

8 느낌부터 의식까지 되풀이된 문답 1구절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에 같은 문답이 생략되고, 의식의 영원함과 그대로 있지 않음을 묻고 답하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느낌은 늘 그대로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 … “인식은 … 지어내는 작용은 … 의식은 늘 그대로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

“Vedanā niccā vā aniccā vā”ti? “Aniccā, bhante” … “saññā … saṅkhārā … viññāṇaṁ niccaṁ vā aniccaṁ vā”ti? “Aniccaṁ, bh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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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문답의 형식이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으로 이동합니다. 느낌은 늘 그대로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과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라는 답까지 적힌 뒤 …가 옵니다. 이 생략은 느낌의 괴로움 여부와 세 자아 주장에 대한 질문·부정 답을 포함합니다. 인식과 지어내는 작용의 …에는 이 전체 문답이 각각 반복됩니다. 의식에서는 늘 그대로 있음과 그렇지 않음의 질문·답이 다시 온전히 나타나며, 나머지 질문은 다음 대목으로 이어집니다. 세 생략부는 느낌의 남은 두 문답, 인식의 전체 문답, 지어내는 작용의 전체 문답을 차례로 가리킵니다. 부처님은 다섯 무더기 모두에 같은 질문을 빠짐없이 던지십니다.

묵상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에 같은 질문이 되풀이될 때 어느 항목에서 답이 가장 낯설게 들리나요? 그 하나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금의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질문이 반복될수록 달라지는 반응이 있는지도 살필 수 있을까요?

9 의식을 자아로 삼는 일의 부정 1구절

의식이 괴롭고 변하기 마련임을 확인하고 나의 것·나·나의 자아라는 세 주장이 합당하지 않다고 답합니다.

“그대로 있지 않은 것은 괴로운가, 즐거운가?” “괴롭습니다, 부처님.” “그대로 있지 않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것을 ‘이것은 나의 것, 이것이 나, 이것이 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Yaṁ panāniccaṁ dukkhaṁ vā taṁ sukhaṁ vā”ti? “Dukkhaṁ, bhante”. “Yaṁ panāniccaṁ dukkhaṁ vipariṇāmadhammaṁ kallaṁ nu taṁ samanupassitu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ṁ, bh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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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서 의식은 그대로 있지 않다는 문답이 끝났고, 여기서는 그 의식에 관한 남은 두 문답이 이어집니다. 부처님께서 그대로 있지 않은 것이 괴로운지 즐거운지 묻자 소나는 괴롭다고 답합니다. 이어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변화의 세 성질을 지닌 것을 “나의 것·나·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일이 합당한지 묻고, 소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이 세 문장은 이 의식을 가리키며, 앞서 물질에 적용한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의식이 변하지 않고 계속된다는 기대를 돌아보고, “나의 것·나·나의 자아”라는 생각을 하나씩 놓아 볼 수 있습니다.

묵상

의식이 계속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는 기대가 있나요? “나의 것·나·나의 자아” 가운데 지금 의식에 가장 강하게 붙는 한 표현을 살펴보면 무엇이 보이나요? 그 표현이 잠시 느슨해질 때 생각의 흐름에는 어떤 변화가 있나요?

10 모든 물질을 바른 지혜로 보기 1구절

과거부터 미래, 안부터 밖, 거침부터 미세함, 열등함부터 뛰어남, 멂부터 가까움까지 모든 물질을 봅니다.

“그러므로 소나여,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물질이든, 안이거나 밖이거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열등하거나 뛰어나거나, 멀거나 가까이 있거나, 모든 물질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Tasmātiha, soṇa, yaṁ kiñci rūpaṁ atītānāgatapaccuppannaṁ ajjhattaṁ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ṁ vā sukhumaṁ vā hīnaṁ vā paṇītaṁ vā yaṁ dūre santike vā, sabbaṁ rūp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ṁ yathābhūtaṁ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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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의 결론은 “그러므로”로 시작해, 모든 물질을 보는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과거·미래·현재, 안·밖, 거침·미세함, 열등·뛰어남, 멂·가까움에 걸친 모든 물질에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세 가지를 적용해,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합니다. 어느 때, 어느 자리, 어떤 성질의 물질도 자아의 예외로 남기지 않는 수행입니다.

묵상

모든 물질을 가르는 목록 가운데 과거·미래·현재, 안·밖, 거침·미세함 중 지금 눈에 들어오는 한 쌍이 있나요? 그 범위의 물질에 세 가지 부정하는 말을 붙여 읽을 때 어떤 반응이 드나요? 다른 한 쌍으로 옮겨 읽으면 그 반응도 달라지나요?

11 느낌부터 모든 의식까지 바르게 보기 1구절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에 같은 관찰이 생략되고, 모든 의식의 전체 범위와 세 부정이 온전히 제시됩니다.

“어떤 느낌이든 … 어떤 인식이든 … 어떤 지어내는 작용이든 …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의식이든, 안이거나 밖이거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열등하거나 뛰어나거나, 멀거나 가까이 있거나, 모든 의식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Yā kāci vedanā … yā kāci saññā … ye keci saṅkhārā … yaṁ kiñci viññāṇaṁ atītānāgatapaccuppannaṁ ajjhattaṁ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ṁ vā sukhumaṁ vā hīnaṁ vā paṇītaṁ vā yaṁ dūre santike vā, sabbaṁ viññāṇ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ṁ yathābhūtaṁ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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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에 대해 본 관찰이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에도 똑같이 되풀이됩니다. 이 네 가지에도 과거·미래·현재, 안·밖, 거침·미세함, 열등·뛰어남, 멂·가까움에 걸친 모든 경우와 세 가지 부정, 바른 지혜로 보는 관찰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 모두에도 같은 관찰이 빠짐없이 적용됩니다.

묵상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 가운데 “나의 것”이라고 가장 단단히 붙드는 하나가 있나요? 그것도 과거부터 현재, 안에서 밖, 멀고 가까움까지 변하는 범위에 놓아 보면 세 가지 부정하는 말은 어떻게 들리나요? 세 표현 가운데 특히 머무는 하나가 있는지도 살필 수 있을까요?

12 마음이 더는 끌리지 않고 풀려났음을 알다 1구절

배운 거룩한 제자가 다섯 무더기에 싫증이 나고 욕심의 빛바램과 풀려남을 거쳐 풀려났음을 압니다.

“소나여, 이와 같이 보는 배운 거룩한 제자는 물질에도, 느낌에도, 인식에도, 지어내는 작용에도, 의식에도 싫증이 난다. 싫증이 나면 탐냄이 빛바래고, 탐냄이 빛바래면 풀려난다. 풀려나면 ‘풀려났다’는 앎이 생긴다. 그는 ‘태어남은 다했고, 거룩한 삶은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일을 마쳤고, 다시 이런 존재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안다.”

Evaṁ passaṁ, soṇa,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ṅ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Nibbindaṁ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ṁ vimuttamiti ñāṇaṁ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ṁ brahmacariyaṁ, kataṁ karaṇīyaṁ, nāparaṁ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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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지막 대목은 앞서 “있는 그대로 보는” 관찰이 가져오는 순서를 밝힙니다. 이와 같이 보는 배운 거룩한 제자는 물질·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의 다섯 무더기 모두에 싫증이 납니다. 이어 싫증에서 탐냄의 빛바램으로, 탐냄의 빛바램에서 풀려남으로 차례로 나아갑니다. 풀려난 뒤에는 “풀려났다”는 앎이 생기고, 태어남을 다함·거룩한 삶의 완성·해야 할 일의 마침·다시 이런 존재로 돌아오지 않음을 아는 네 가지 선언으로 닫힙니다. 수행은 바른 봄에서 풀려남까지 이어지는 원인과 결과를 경전 그대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묵상

“싫증·탐냄의 빛바램·풀려남·앎”이라는 순서에서 지금 가장 오래 머물러 읽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성취 여부를 재기보다 그 말이 앞뒤와 어떻게 이어지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순서를 천천히 읽을 때 호흡이나 주의에는 어떤 변화가 있나요? 답하지 않아도 괜찮고, 이 대목을 천천히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