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남의 요소가 여섯임을 밝히고, 자애의 마음의 풀려남을 일곱 방식으로 닦았지만 악의가 남는다는 주장을 제시합니다.
“수행자들이여, 벗어남의 요소 여섯이 있다.
어떤 여섯인가?
수행자들이여, 여기 한 수행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나는 자애의 마음의 풀려남을 닦고 거듭 닦아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익혀 잘 성취했습니다.
그런데도 악의가 내 마음을 사로잡아 머뭅니다.’”
“Chayimā, bhikkhave, nissāraṇīyā dhātuyo. Katamā cha? Idha, bhikkhave, bhikkhu evaṁ vadeyya: ‘mettā hi kho me cetovimutti bhāvitā bahulīkatā yānīkatā vatthukatā anuṭṭhitā paricitā susamāraddhā; atha ca pana me byāpādo cittaṁ pariyādāya tiṭṭhat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6.13 닛사라니야 숫따 (벗어남)
배경
부처님께서는 벗어남으로 이끄는 여섯 가지 길을 말씀하십니다. 첫째 사례에서 한 수행자는 자애의 마음을 풀려나도록 충분히 닦았다고 말하면서도, 악의가 여전히 자기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털어놓습니다. 이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자애를 제대로 닦았다면 악의가 함께 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묵상
자애를 닦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악의가 마음을 사로잡는 경험이 있나요? 그 사실을 실패의 증거로 단정하기보다, 지금 자애라고 부르는 마음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조용히 살펴볼 수 있어요.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나 상황이 있다면, 그 마음을 어떻게 대하고 싶나요?
부처님을 잘못 전하지 말라는 교정과 불가능의 판정 뒤, 자애의 마음의 풀려남을 악의에서 벗어남으로 확정합니다.
그에게 이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자님.
그런 말은 마십시오. 부처님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전함은 좋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그러실 리 없습니다.
벗이여, 자애의 마음의 풀려남을 닦고 거듭 닦아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익혀 잘 성취했는데도
악의가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벗이여, 악의에서 벗어남은
자애의 마음의 풀려남입니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mettāya cetovimuttiyā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atha ca panassa byāpādo cittaṁ pariyādāya ṭha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ñhetaṁ, āvuso, byāpādassa yadidaṁ mettācetovimutt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6.13 닛사라니야 숫따 (벗어남)
배경
이런 말에 다른 수행자는 단호히 반박합니다. 자애의 마음을 제대로 닦았는데도 악의가 남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렇게 전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전하는 셈이라고 말합니다. 악의에서 벗어남은 다름 아닌 자애의 마음이 풀려난 상태 그 자체입니다.
묵상
악의가 누그러졌던 때를 떠올리면 자애로운 바람이나 태도가 함께 있었나요? 자애와 악의가 마음 안에서 각각 어떤 몸의 느낌과 말의 충동을 만드는지 구별해 볼 수 있나요?
같은 교정과 불가능의 판정을 온전히 되풀이하고, 연민의 마음의 풀려남을 해침에서 벗어남으로 밝힙니다.
그에게 이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자님.
그런 말은 마십시오. 부처님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전함은 좋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그러실 리 없습니다.
벗이여, 연민의 마음의 풀려남을 닦고 거듭 닦아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익혀 잘 성취했는데도
해침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벗이여, 해침에서 벗어남은
연민의 마음의 풀려남입니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karuṇāya cetovimuttiyā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atha ca panassa vihesā cittaṁ pariyādāya ṭha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ñhetaṁ, āvuso, vihesāya yadidaṁ karuṇācetovimutt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6.13 닛사라니야 숫따 (벗어남)
배경
이 말에도 같은 반박이 이어집니다. 연민의 마음을 제대로 닦았는데 해치려는 마음이 남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해침에서 벗어남이 바로 연민의 마음이 풀려난 상태입니다.
묵상
해치고 싶은 충동이 줄어들었을 때 상대의 괴로움을 새롭게 본 경험이 있나요? 안전한 거리를 지키면서도 해침을 보태지 않는 선택이 무엇일지 생각해 볼 수 있나요?
함께 기뻐하는 마음의 풀려남을 일곱 방식으로 닦았다고 하면서도 불만이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셋째 주장을 전합니다.
“수행자들이여, 여기 한 수행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나는 함께 기뻐하는 마음의 풀려남을 닦고 거듭 닦아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익혀 잘 성취했습니다.
그런데도 불만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머뭅니다.’”
Idha pana, bhikkhave, bhikkhu evaṁ vadeyya: ‘muditā hi kho me cetovimutti bhāvitā bahulīkatā yānīkatā vatthukatā anuṭṭhitā paricitā susamāraddhā; atha ca pana me arati cittaṁ pariyādāya tiṭṭhat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6.13 닛사라니야 숫따 (벗어남)
배경
셋째 사례는 함께 기뻐하는 마음과 불만을 맞세웁니다. 한 수행자는 남의 좋은 일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충분히 닦았다고 말하면서도, 불만이 여전히 자기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말합니다. 남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과 마음에 들지 않아 밀어내는 불만은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묵상
다른 사람의 좋은 소식을 들을 때 기쁨과 함께 불만이나 비교가 스친 적이 있나요? 둘 중 하나만 옳다고 꾸미지 말고, 각각의 반응이 마음을 넓히는지 좁히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함께 기뻐함과 불만의 양립을 부정하고, 함께 기뻐하는 마음의 풀려남을 불만에서 벗어남으로 확정합니다.
그에게 이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자님.
그런 말은 마십시오. 부처님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전함은 좋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그러실 리 없습니다.
벗이여, 함께 기뻐하는 마음의 풀려남을 닦고 거듭 닦아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익혀 잘 성취했는데도
불만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벗이여, 불만에서 벗어남은
함께 기뻐하는 마음의 풀려남입니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muditāya cetovimuttiyā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atha ca panassa arati cittaṁ pariyādāya ṭha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ñhetaṁ, āvuso, aratiyā yadidaṁ muditācetovimutt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6.13 닛사라니야 숫따 (벗어남)
배경
이 말에도 같은 반박이 이어집니다.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제대로 닦았는데 불만이 남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불만에서 벗어남이 바로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 풀려난 상태입니다.
묵상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한 뒤 내 불만이 잠시 가벼워진 경험이 있나요? 오늘 들은 작은 좋은 소식 하나에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있는 그대로 살펴볼 수 있을까요? 오늘 들은 좋은 소식이 없다면, 어제 들은 소식을 떠올려 보아도 괜찮아요.
평정과 욕망의 양립을 부정하는 교정을 되풀이하고, 평정의 마음의 풀려남을 욕망에서 벗어남으로 밝힙니다.
그에게 이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자님.
그런 말은 마십시오. 부처님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전함은 좋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그러실 리 없습니다.
벗이여, 평정의 마음의 풀려남을 닦고 거듭 닦아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익혀 잘 성취했는데도
욕망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벗이여, 욕망에서 벗어남은
평정의 마음의 풀려남입니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upekkhāya cetovimuttiyā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atha ca panassa rāgo cittaṁ pariyādāya ṭha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ñhetaṁ, āvuso, rāgassa yadidaṁ upekkhācetovimutt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6.13 닛사라니야 숫따 (벗어남)
배경
이 말에도 같은 반박이 이어집니다. 평정의 마음을 제대로 닦았는데 욕망이 남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욕망에서 벗어남이 바로 평정의 마음이 풀려난 상태입니다.
묵상
강하게 원하던 일이 뜻대로 되거나 되지 않았을 때, 욕망을 따라 흔들리는 마음과 조금 떨어져 보는 마음을 모두 경험한 적이 있나요? 결과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에요. 그때 마음이 어느 쪽으로 더 기울었는지 돌이켜 볼 수 있을까요?
표상 없는 마음의 풀려남을 일곱 방식으로 닦았다고 하면서도 의식이 표상을 따른다는 다섯째 주장을 전합니다.
“수행자들이여, 여기 한 수행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나는 모습 없는 마음의 풀려남을 닦고 거듭 닦아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익혀 잘 성취했습니다.
그런데도 내게는 모습을 따라가는 의식이 있습니다.’”
Idha pana, bhikkhave, bhikkhu evaṁ vadeyya: ‘animittā hi kho me cetovimutti bhāvitā bahulīkatā yānīkatā vatthukatā anuṭṭhitā paricitā susamāraddhā; atha ca pana me nimittānusāri viññāṇaṁ hot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6.13 닛사라니야 숫따 (벗어남)
배경
다섯째 사례는 모습 없는 마음의 풀려남을 다룹니다. 한 수행자는 이 마음의 풀려남을 충분히 닦았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의식이 여전히 어떤 모습을 따라간다고 말합니다. 모습 없는 풀려남을 제대로 닦았다면 의식이 겉모습에 붙잡히지 않아야 하므로, 이 말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묵상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한 뒤 의식이 계속 그 이미지와 해석을 따라간 적이 있나요? 지금 알아차리는 것과 거기에 붙인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잠시 구별해 볼 수 있을까요?
의식이 표상을 따를 가능성을 거듭 부정하고, 표상 없는 마음의 풀려남을 모든 표상에서 벗어남으로 확정합니다.
그에게 이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자님.
그런 말은 마십시오. 부처님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전함은 좋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그러실 리 없습니다.
벗이여, 모습 없는 마음의 풀려남을 닦고 거듭 닦아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익혀 잘 성취했는데도
의식이 모습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벗이여, 모든 모습에서 벗어남은
모습 없는 마음의 풀려남입니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animittāya cetovimuttiyā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atha ca panassa nimittānusāri viññāṇaṁ bhavi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ñhetaṁ, āvuso, sabbanimittānaṁ yadidaṁ animittācetovimutt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6.13 닛사라니야 숫따 (벗어남)
배경
이 말에도 같은 반박이 이어집니다. 모습 없는 마음의 풀려남을 제대로 닦았는데 의식이 모습을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모습에서 벗어남이 바로 모습 없는 마음의 풀려남입니다.
묵상
익숙한 이름이나 이미지가 잠시 느슨해졌을 때 대상을 새롭게 본 경험이 있나요? 한 대상을 바라볼 때 이미 붙여 둔 해석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해도 될까요? 오늘 본 것 하나를 떠올려 보는 정도로도 충분해요.
‘나는 있다’가 사라지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지만 의심과 망설임의 화살이 남는다는 여섯째 주장을 전합니다.
수행자들이여, 여기 한 수행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내게서 ‘나는 있다’가 사라졌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의심·망설임의 화살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머뭅니다.”
Idha pana bhikkhave, bhikkhu evaṁ vadeyya: ‘asmīti kho me vigataṁ, ayamahamasmīti ca na samanupassāmi; atha ca pana me vicikicchākathaṅkathāsallaṁ cittaṁ pariyādāya tiṭṭhat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6.13 닛사라니야 숫따 (벗어남)
배경
여섯째 사례는 앞의 다섯과 다르게 시작합니다. 한 수행자는 ‘나는 있다’는 생각이 사라졌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여기지도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의심과 망설임이 여전히 자기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말합니다. 자아를 세우는 생각이 정말 사라졌다면 그 자리를 꿰뚫는 의심의 화살도 남을 수 없습니다.
묵상
‘나는 원래 이런 사람’ 또는 ‘나는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느슨해졌는데도 무엇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해 망설인 경험이 있나요? 익숙한 자기 설명과 실제 의심이 각각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두 자아 규정과 의심의 화살이 양립할 수 없음을 밝히고, ‘나는 있다’라는 자만의 뿌리 뽑음을 여섯째 벗어남으로 맺습니다.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자님.
그런 말은 마십시오. 부처님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전함은 좋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리 없습니다.
벗이여, ‘나는 있다’가 사라지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여기지 않는데도 의심·망설임의 화살이 마음을
사로잡음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벗이여, 의심·망설임의 화살에서 벗어남은
‘나는 있다’라는 자만의 뿌리 뽑음입니다.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벗어남의 요소 여섯이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asmīti vigate ayamahamasmīti ca na samanupassato; atha ca panassa vicikicchākathaṅkathāsallaṁ cittaṁ pariyādāya ṭha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ñhetaṁ, āvuso, vicikicchākathaṅkathāsallassa yadidaṁ asmīti mānasamugghāto’ti. Imā kho, bhikkhave, cha nissāraṇīyā dhātuyo”ti.
앙굿따라 니까야AN 6.13 닛사라니야 숫따 (벗어남)
배경
이 말에도 같은 반박이 이어집니다. ‘나는 있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여기지 않는데 의심과 망설임이 남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의심에서 벗어남은 다름 아닌 ‘나는 있다’는 자만을 뿌리째 뽑아낸 상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여섯 가지 벗어남의 길을 마무리하십니다.
묵상
‘내가 옳아야 한다’는 자만과 결정을 맴도는 의심이 서로 힘을 주는 경험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나요? 그 둘이 만났을 때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이어졌는지만 떠올려 보아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