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따 숫따(완성된 이들)

Arahantasutta

상윳따 니까야 SN 22.76

다섯 무더기를 꿰뚫어 알고 벗어난 이가 아라한이며 존재 가운데 으뜸이라 한다.

인용된 가르침 11구절

이 경을 11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몸의 변화를 보고 내 것이라는 생각을 놓다 1구절

부처님께서 물질의 그대로 있지 않음에서 괴로움과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차례로 밝히고 세 가지 동일시를 바른 지혜로 놓게 하십니다.

사왓티에서였다. “수행자들이여, 물질은 그대로 있지 않다. 그대로 있지 않은 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운 것은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는 이것이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Sāvatthinidānaṁ. “Rūpaṁ, bhikkhave, aniccaṁ. Yadaniccaṁ taṁ dukkhaṁ; yaṁ dukkhaṁ tadanattā; yadanattā t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ṁ yathābhūtaṁ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ṁ.

상윳따 니까야 SN 22.76 아라한따 숫따 (완성된 이들)

배경

사왓티라는 장소를 밝힌 뒤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을 직접 부르시며 가르침을 펴십니다. 첫 대상은 다섯 무더기 가운데 물질입니다. 물질이 늘 그대로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괴로움이라는 사실로, 다시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사실로 차례차례 이어집니다. 이어 “나의 것이 아니다·나는 이것이 아니다·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내 것으로 삼음·같은 것으로 여김·자아로 삼음이라는 세 부정을 같은 대상에 적용합니다. 마지막의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는 말은 변하는 물질을 그 성질대로 분명히 보라는 수행의 방향을 밝힙니다.

묵상

몸이나 눈앞의 물질을 두고 “나의 것·나·나의 자아” 가운데 가장 익숙하게 붙는 표현이 있나요? 그 대상이 지금도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놓으면 그 표현은 어떻게 들리나요?

2 느낌부터 의식까지 같은 관찰 1구절

느낌·인식·의지적 지어내는 작용에 같은 관찰이 생략되어 이어지고 의식에서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나라고 할 것이 없음과 세 부정이 완결됩니다.

“느낌도 … 인식도 … 지어내는 작용도 … 의식은 그대로 있지 않다. 그대로 있지 않은 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운 것은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는 이것이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Vedanā … saññā … saṅkhārā … viññāṇaṁ aniccaṁ. Yadaniccaṁ taṁ dukkhaṁ; yaṁ dukkhaṁ tadanattā; yadanattā t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ṁ yathābhūtaṁ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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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물질에 적용한 관찰이 나머지 네 무더기로 이어집니다.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에서는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부분을 줄였습니다. 의식에서는 그대로 있지 않음, 괴로움, 나라고 할 것이 없음, 세 가지 부정, 바른 지혜의 관찰을 다시 온전히 적었습니다. 따라서 물질·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 가운데 어느 하나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수행은 변하는 경험을 내 것·나·나의 자아로 굳혀 버리는 것을 바른 지혜로 살피는 데 있습니다.

묵상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 가운데 요즘 가장 쉽게 “나”라고 여기는 하나가 있나요? 그 경험이 일어나고 달라지는 모습을 잠시 구별해 보면, ‘내 것이 아니다’·‘나는 이것이 아니다’·‘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말이 지금 어떻게 다르게 들리나요?

3 얽매임에서 풀려나 할 일을 마쳤음을 알다 1구절

다섯 무더기에 대한 싫증에서 탐냄의 빛바램·풀려남·풀려났음을 알고 봄으로 나아가 완전히 깨달은 이를 으뜸이라 밝힙니다.

“수행자들이여, 이렇게 보는 배운 거룩한 제자는 물질에 싫증이 나고, 느낌에도 … 인식에도 … 지어내는 작용에도 … 의식에도 싫증이 난다. 싫증이 나 탐냄이 빛바래고, 빛바램으로 풀려나며, 풀려나면 ‘풀려났다’고 안다. 그는 ‘태어남은 다했고, 거룩한 삶은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일을 마쳤고, 다시 이런 존재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안다. 수행자들이여, 뭇 생명이 사는 곳이 있는 한, 존재의 가장 높은 자리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깨달은 이들(아라한)이 세상에서 으뜸이고 뛰어나다.”

Evaṁ passaṁ,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 saññāyapi … saṅkhāresupi …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Nibbindaṁ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ṁ vimuttamiti ñāṇaṁ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ṁ brahmacariyaṁ, kataṁ karaṇīyaṁ, nāparaṁ itthattāyā’ti pajānāti. Yāvatā, bhikkhave, sattāvāsā, yāvatā bhavaggaṁ, ete aggā, ete seṭṭhā lokasmiṁ yadidaṁ arahanto”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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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의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나라고 할 것이 없음 관찰이 이 가르침의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배운 거룩한 제자는 물질·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 모두에 싫증이 나고, 싫증에서 탐냄의 빛바램, 풀려남, 풀려났다는 앎이 순서대로 일어납니다. 이어 태어남을 다함·거룩한 삶의 완성·해야 할 일의 마침·다시 이런 존재로 돌아오지 않음이라는 네 선언으로 가르침이 마무리됩니다. 마지막으로 뭇 생명이 사는 모든 곳에서 존재의 꼭대기까지 두루 가리켜, 완전히 깨달은 이가 그 가운데 으뜸이라고 밝힙니다. 이는 매혹과 집착이 풀리는 원인과 결과를 보여 줍니다.

묵상

싫증·탐냄의 빛바램·풀려남·앎이라는 순서에서 지금 가장 오래 머물러 읽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자신의 성취를 판단하지 않고 그 말이 앞뒤와 어떻게 이어지는지만 살필 수 있나요?

4 갈망과 자만과 미혹이 사라진 행복 1구절

부처님께서 이어지는 첫 게송에서 갈망 없음·나는 있다는 자만의 단절·미혹의 그물 파괴를 완전히 깨달은 이의 행복과 묶으십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 잘 가신 스승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완전히 깨달은 이들(아라한)은 참으로 행복하니, 그들에게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은 없다. ‘나는 있다’라는 자만은 완전히 잘렸고, 어리석음의 그물은 찢어졌다.

Idamavoca bhagavā. Idaṁ vatvāna sugato athāparaṁ etadavoca satthā: “Sukhino vata arahanto, taṇhā tesaṁ na vijjati; Asmimāno samucchinno, mohajālaṁ padālit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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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의 가르침이 끝난 뒤 부처님께서 이어 노래로 말씀하십니다. 여덟 수의 노래 가운데 첫 연은 완전히 깨달은 이의 행복을 세 가지 벗어남과 연결합니다. 갈망은 없고, “나는 있다”라는 자만은 완전히 잘렸으며, 어리석음의 그물은 찢어졌습니다. 갈망·자만·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가 욕구·나라는 생각·그릇된 앎을 가리키며, 첫 행의 행복은 그 셋이 사라진 결과로 놓입니다. 무엇을 더 소유해서 얻는 행복보다 붙잡고 재고 흐리게 하던 것이 사라진 자유를 칭찬하는 노래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더 얻어서 편해진 때와 붙잡던 생각 하나가 느슨해져 편해진 때는 어떻게 달랐나요? 갈망·“나는 있다”라는 자만·어리석음의 그물 가운데 지금 경험과 가장 가까이 들리는 말이 있나요? 무엇이 떠오르든, 그 말을 붙잡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해요.

5 흔들리지 않고 맑으며 세상에 물들지 않음 1구절

완전히 깨달은 이가 흔들리지 않음에 이르고 마음이 맑으며 세상에 물들지 않고 흘러드는 것이 없다고 찬탄합니다.

그들은 흔들리지 않음에 이르렀고, 그들의 마음은 흐리지 않다. 세상에 물들지 않은 그들은 브라흐마와 같은 이들이 되어 흘러드는 것이 없다.

Anejaṁ te anuppattā, cittaṁ tesaṁ anāvilaṁ; Loke anupalittā te, brahmabhūtā anāsav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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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첫 노래가 사라진 세 조건을 말했다면 둘째 노래는 그 자유의 모습을 네 구절로 펼칩니다. 완전히 깨달은 이들(아라한)은 흔들리지 않음에 이르렀고 마음이 흐리지 않으며 세상에 물들지 않고 흘러드는 것이 없습니다. 브라흐마와 같은 이가 되었다는 말은 시적 표현이며, 바로 뒤의 흘러드는 것이 없다는 말과 한 구절을 이룹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은, 세상 속에서 마음을 흐리는 것에 휩쓸리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수행의 방향은 감각을 없애는 무감각보다 마음을 흐리는 달라붙음이 줄어드는 데 있습니다.

묵상

마음이 흐려졌다고 느낄 때 대상 자체와 거기에 달라붙은 반응을 구별할 수 있나요? 최근에 상황은 그대로였지만 반응이 조금 덜 흔들렸던 순간이 있었나요?

6 다섯 무더기를 알고 일곱 가지 바른 가르침에 머묾 1구절

다섯 무더기를 완전히 알고 일곱 가지 바른 가르침을 활동 영역으로 삼는 이들을 부처님의 참된 아들들이라 찬탄합니다.

다섯 무더기를 완전히 알고, 일곱 가지 바른 가르침을 활동 영역으로 삼는 칭송할 만한 참된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슴에서 난 아들들이다.

Pañcakkhandhe pariññāya, satta saddhammagocarā; Pasaṁsiyā sappurisā, puttā buddhassa oras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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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게송은 완전히 깨달은 이들이 무엇을 알고 어떻게 사는지를 말합니다. 먼저 물질·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이라는 다섯 무더기를 완전히 안다고 하고, 이어 일곱 가지 바른 가르침을 그들의 활동 영역이라 합니다. 일곱 가지 바른 가르침은 이름이 하나씩 나오지 않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덕목을 가리킵니다. 삽뿌리사는 참된 사람, 오라사는 가슴에서 난 아들이라는 뜻으로, 부처님과의 관계를 가르침을 온전히 이룬 친밀한 사이로 비유해 말합니다. 수행의 결실을 개인적 지위보다 완전한 앎과 참된 덕목 안의 삶으로 보여 줍니다.

묵상

다섯 무더기를 하나의 고정된 나보다 살펴볼 경험의 다섯 갈래로 읽으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물질·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 가운데 오늘 변화가 가장 또렷했던 하나가 있나요?

7 일곱 보배와 세 가지 배움을 갖춤 1구절

일곱 보배를 갖추고 세 가지 배움에서 익힌 큰 영웅들이 두려움과 공포를 버렸다고 찬탄합니다.

일곱 보배를 갖추고, 세 가지 배움에서 잘 배운 큰 영웅들은 두루 다니며 두려움과 공포를 버렸다.

Sattaratanasampannā, Tīsu sikkhāsu sikkhitā; Anuvicaranti mahāvīrā, Pahīnabhayabherav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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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게송은 일곱 가지 보배와 세 가지 배움을 함께 말합니다. 일곱 보배와 세 가지 배움은 이름이 하나씩 나오지 않지만, 두려움 없이 두루 다니는 삶을 뒷받침하는 덕목들입니다. “큰 영웅”은 두려움과 공포를 버린 이들을 가리키며, 아누위짜란띠는 그런 이들이 두루 살아감을 나타냅니다. 수행의 의미는 닦은 덕성과 배움이 삶 전체를 지탱하는 방향에 있습니다.

묵상

두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없다고 밀어내는 것과 배움에 기대어 흔들리지 않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최근 두려움 속에서도 지켜진 한 태도나 배움이 있었나요?

8 열 요소를 갖춘 위대한 이들 1구절

열 가지 요소를 갖추고 마음이 깊이 모인 위대한 이들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며 갈망 없는 이들이라 합니다.

열 가지 요소를 갖춘 위대한 이들은 마음이 깊이 모였다.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니, 그들에게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은 없다.

Dasahaṅgehi sampannā, mahānāgā samāhitā; Ete kho seṭṭhā lokasmiṁ, taṇhā tesaṁ na vijj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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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노래는 열 가지 요소, 위대한 이들, 마음이 한곳에 모임이라는 세 가지를 함께 말합니다. 위대한 이들이라는 말은 완전히 깨달은 이를 가리키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마지막 두 줄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의 뜻을 밝힙니다. 갈망이 사라진 자유가 바로 그 뛰어남입니다.

묵상

마음이 흩어질 때 더 많이 붙잡으려는 반응과 갈망을 덜 보태는 반응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최근 잠시라도 마음이 한곳에 모였던 순간에는 무엇을 더 얻으려는 마음이 있었나요?

9 마지막 몸과 남에게 기대지 않는 앎 1구절

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앎이 일어나 마지막 몸임을 알고 거룩한 삶의 정수에서 남에게 기대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앎이 일어났으니, “이 몸은 마지막이다.” 거룩한 삶의 정수에 관하여 그들은 남에게 기대지 않는다.

Asekhañāṇamuppannaṁ, antimoyaṁ samussayo; Yo sāro brahmacariyassa, tasmiṁ aparapaccay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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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게송은 완전히 깨달은 이의 앎을 직접 말합니다. 아세카는 배움을 마쳐 더 배울 것이 없는 이를 가리키고, 그에게 “이 몸은 마지막이다”라는 앎이 일어납니다. 이어 거룩한 삶의 정수에 관해 아빠라빳쩌야, 곧 남에게 기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몸이 마지막이라는 앎과 거룩한 삶의 핵심을, 다른 이의 보증에 기대어 추측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수행의 결실은 스스로 분명히 아는 데 있습니다.

묵상

남의 확인을 받아야만 안심되는 일과 스스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 다른가요? 지금 경험에서 다른 사람의 보증 없이도 알 수 있는 작은 변화 하나가 있나요?

10 견줌에 흔들리지 않고 거듭됨에서 풀려남 1구절

완전히 깨달은 이들이 비교의 견줌에 흔들리지 않고 거듭되는 존재에서 풀려나 길들여진 이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들은 견줌에 흔들리지 않고, 거듭되는 존재에서 완전히 풀려났으며, 길들여진 이의 자리에 이르러 세상에서 승리한 이들이다.

Vidhāsu na vikampanti, vippamuttā punabbhavā; Dantabhūmimanuppattā, te loke vijitāvino.

상윳따 니까야 SN 22.76 아라한따 숫따 (완성된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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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게송은 흔들리지 않음과 풀려남을 함께 말합니다. 위다는 자신을 낫다·같다·못하다고 재는 견줌을 가리키며, 완전히 깨달은 이들(아라한)은 그 견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어 거듭되는 존재에서 완전히 풀려났고, 길들여진 이의 자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마지막의 “세상에서 승리한 이들”은 견줌의 사라짐, 거듭됨에서의 해방, 스스로 길들여진 자리를 뜻합니다. 수행의 방향도 비교가 더는 마음을 흔들지 않는 자유에 놓입니다.

묵상

자신을 남보다 낫다·같다·못하다고 재는 가운데 요즘 가장 자주 나타나는 견줌이 있나요? 그 판단이 잠시 멎었을 때 마음이나 몸의 흔들림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11 어느 방향에도 즐김 없이 외치는 사자후 1구절

위와 옆과 아래 어디에도 즐김이 없는 이들이 깨달은 이들은 세상에서 위없다고 사자후를 외칩니다.

위와 옆과 아래 어디에도 그들의 즐김은 없다. 그들은 사자후를 외친다. “깨달은 이들이 세상에서 위없다!”

Uddhaṁ tiriyaṁ apācīnaṁ, nandī tesaṁ na vijjati; Nadanti te sīhanādaṁ, buddhā loke anuttarā”ti.

상윳따 니까야 SN 22.76 아라한따 숫따 (완성된 이들)

배경

마지막 게송은 위와 옆과 아래, 이 세 방향 어디에도 완전히 깨달은 이들(아라한)의 즐김이 없다고 밝힙니다. 난디는 대상을 반기며 붙드는 즐김이고, 첫 게송의 갈망 없음과 호응합니다. 그 자유를 바탕으로 그들은 “깨달은 이들이 세상에서 위없다”라고 사자후를 외칩니다. “깨달은 이들”이라는 외침으로 완전히 깨달은 이를 기리는 노래를 마칩니다. 사자후는 어느 방향의 대상에도 달라붙지 않는 해방을 확신 있게 선언하는 시적 마침입니다.

묵상

마음이 어떤 대상을 반기며 오래 붙잡으려 할 때 그 즐김은 몸에서 어떻게 드러나나요? 위·옆·아래라는 넓은 범위를 떠올리면 지금 유난히 붙드는 한 방향이나 대상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