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세타여, 이 네 가지 계급이 있으니, 왕족,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 평민, 천민이다.”
1. Catuvaṇṇasuddhi Cattārome, vāseṭṭha, vaṇṇā— khattiyā, brāhmaṇā, vessā, suddā.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부처님의 반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회에 실제로 있는 네 계급, 곧 왕족·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평민·천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논의를 시작하십니다. 계급 안에서 무엇이 사람을 가르는지를 되묻는 방식입니다.
묵상
어떤 구분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과, 그 구분이 사람의 가치를 정한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이야기일 수 있어요. 지금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구분 가운데, 이 둘을 구별해서 다시 생각해 볼 만한 것이 있을까요?
“바세타여, 왕족 가운데도 어떤 이는 살아있는 것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며,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하고, 이간하는 말을 하고, 거친 말을 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며, 탐냄이 많고, 악의를 품고, 삿된 견해를 지닌다.”
Khattiyopi kho, vāseṭṭha, idhekacco pāṇātipātī hoti adinnādāyī kāmesumicchācārī musāvādī pisuṇavāco pharusavāco samphappalāpī abhijjhālu byāpannacitto micchādiṭṭhī.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왕족부터 시작해 열 가지 해로운 행위, 곧 살생·도둑질·삿된 음행·거짓말·이간질·거친 말·쓸데없는 말·탐냄·악의·삿된 견해를 하는 이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자리입니다. 이 열 가지는 불교 전통에서 ‘열 가지 해로운 행위’로 잘 알려진 목록과 같습니다. 몸·말·마음 셋으로 나눈 순서를 그대로 따릅니다.
묵상
어느 집단에나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그 집단 전체를 판단할 때 얼마나 고려하고 있나요? 지금 떠오르는 집단이 있다면 잠시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그 판단이 공평했는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이런 것들은 해로우며 허물이 있고 익히지 말아야 하며 성자답지 못하니, 어두운 행위로서 어두운 결과를 낳아 지혜로운 이들의 나무람을 받으며, 왕족 가운데도 이런 이가 있다.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 가운데도, 평민 가운데도, 천민 가운데도 마찬가지다.”
Iti kho, vāseṭṭha, yeme dhammā akusalā akusalasaṅkhātā sāvajjā sāvajjasaṅkhātā asevitabbā asevitabbasaṅkhātā naalamariyā naalamariyasaṅkhātā kaṇhā kaṇhavipākā viññugarahitā, khattiyepi te idhekacce sandissanti. …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이 열 가지 해로운 행위는 왕족·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평민·천민, 네 계급 모두에 고루 나타납니다.
묵상
어떤 행동이 “해롭다”고 판단할 때, 그 기준을 지금 나는 얼마나 분명히 알고 있나요? 그 기준이 어디서 왔는지, 스스로 정한 것인지 아니면 물려받은 것인지도 잠시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그러나 바세타여, 왕족 가운데도 어떤 이는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을 갖지 않으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고, 거친 말을 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며,
탐냄이 없고, 악의가 없고, 바른 견해를 지닌다.”
Khattiyopi kho, vāseṭṭha, idhekacco pāṇātipātā paṭivirato hoti, adinnādānā paṭivirato, kāmesumicchācārā paṭivirato, musāvādā paṭivirato, pisuṇāya vācāya paṭivirato, pharusāya vācāya paṭivirato, samphappalāpā paṭivirato, anabhijjhālu abyāpannacitto, sammādiṭṭhī.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앞서 나열된 열 가지 해로운 행위를 하지 않는 이, 곧 좋은 행위를 하는 이가 왕족 가운데도 있다고 밝힙니다. 나쁜 행위도 좋은 행위도 신분과 무관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함께 보아야 어느 한쪽만으로 판단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묵상
나쁜 행위만이 아니라 좋은 행위도 특정 집단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기준을 다시 살펴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이런 것들은 이로우며 허물이 없고 익힐 만하며 성자다우니, 밝은 행위로서 밝은 결과를 낳아 지혜로운 이들의 칭찬을 받나니, 왕족 가운데도 이런 이가 있다.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 가운데도, 평민 가운데도, 천민 가운데도 마찬가지다.”
Iti kho, vāseṭṭha, yeme dhammā kusalā kusalasaṅkhātā anavajjā anavajjasaṅkhātā sevitabbā sevitabbasaṅkhātā alamariyā alamariyasaṅkhātā sukkā sukkavipākā viññuppasatthā, khattiyepi te idhekacce sandissanti. …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앞에서 나열된 좋은 행위에 대한 평가입니다. 앞서 나쁜 행위를 평가한 말과 같은 자리에서, 왕족과 마찬가지로 브라흐마나·평민·천민 가운데도 이런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밝은 행위·밝은 결과·칭찬”이라는 말은 앞서 나온 “어두운 행위·어두운 결과·나무람”을 그대로 뒤집은 것입니다. 나쁜 행위와 좋은 행위가 네 계급 모두에서 뒤섞여 나타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 둘이 “뒤섞여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어떤 행동을 “이롭다”고 판단할 때, 나는 어떤 기준을 쓰고 있나요? 그 기준이 나쁜 행동을 가르는 기준과 정확히 반대라는 것을 알아차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이렇게 네 계급 모두에서 어둡고 밝은 행위가 뒤섞여 나타나고, 지혜로운 이들의 나무람과 칭찬을 함께 받는데도,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들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브라흐마나야말로 가장 높은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낮다.
…
브라흐마나야말로 브라흐마의 친아들, 그 입에서 태어난 이, 브라흐마가 낳고 브라흐마가 지어내고 브라흐마의 상속자다.’
Imesu kho, vāseṭṭha, catūsu vaṇṇesu evaṁ ubhayavokiṇṇesu vattamānesu kaṇhasukkesu dhammesu viññugarahitesu ceva viññuppasatthesu ca yadettha brāhmaṇā evamāhaṁsu: ‘brāhmaṇova seṭṭho vaṇṇo, hīnā aññe vaṇṇā; … brāhmaṇāva brahmuno puttā orasā mukhato jātā brahmajā brahmanimmitā brahmadāyādā’ti.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앞서 확인한 사실, 곧 어둡고 밝은 행위가 네 계급 모두에 뒤섞여 있다는 관찰을 요약한 뒤, 그런데도 브라흐마나들이 여전히 앞서 인용된 네 가지 주장을 되풀이한다고 지적합니다.
묵상
사실이 이미 다르게 말하고 있는데도 예전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그런 모습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드나요? 나 자신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는지 돌아보아도 좋아요.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바세타여, 이 네 계급 가운데 누구든 흘러드는 것이 다하고 거룩한 삶을 완성하여 할 일을 다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참된 목적을 이루어 존재의 족쇄를 남김없이 끊고 바르게 알아 풀려난 수행자가 있다면, 그는 이치로써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 불리나니, 이치 아닌 것으로는 아니다.”
Taṁ tesaṁ viññū nānujānanti. Taṁ kissa hetu? Imesañhi, vāseṭṭha, catunnaṁ vaṇṇānaṁ yo hoti bhikkhu arahaṁ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ṁyojano sammadaññāvimutto, so nesaṁ aggamakkhāyati dhammeneva, no adhammena.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앞서 브라흐마나들이 내놓은 주장에 대해 부처님께서 내리시는 첫 번째 결론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그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 이유로 네 계급 어디서든 흘러드는 것이 다한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가 나올 수 있고 그가 ‘이치(담마)’로써 으뜸이 된다는 것을 듭니다. 여기서 ‘담마’는 사람이 수행을 통해 실제로 이루어 낸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며, 이 구별이 경 전체의 결론을 미리 보여 줍니다.
묵상
어떤 사람을 가장 존경할 만하다고 느낄 때, 그 존경은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는가에서 오나요, 아니면 그 사람이 실제로 이루어 낸 것에서 오나요? 지금 떠오르는 사람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 지금 여기서도 다음 생에서도 그러하다. 이것을 이렇게도 알아야 하나니,
어떻게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은지를.”
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Tadamināpetaṁ, vāseṭṭha, pariyāyena veditabbaṁ, yathā dhammov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앞서 나온 결론, ‘이치로써 으뜸이 된다’는 말을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다’는 말로 다시 못 박습니다. 이 말은 경 전체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되며 이 경의 중심 주제를 이루는 말입니다. ‘이렇게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이 결론을 뒷받침하는 실제 사례가 뒤이어 나올 것을 알립니다.
묵상
같은 결론이 다른 방식으로 다시 증명되는 것을 볼 때, 처음 한 번 들었을 때와 어떻게 다르게 다가오나요? 그 차이가 나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지도 잠시 천천히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은 수행자 고따마가 이웃한 사꺄족 가문에서 집을 떠났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꺄족은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을 따르는 처지이니, 사꺄족은 빠세나디 왕에게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 맞이하며 합장하고 예의를 갖춘다.
바세타여, 사꺄족이 빠세나디 왕에게 갖추는 이 예의를, 빠세나디 왕은 오히려 깨달음에 이른 이(따타가따)에게 갖춘다. ‘수행자 고따마는 좋은 가문에서 났고 나는 나쁜 가문에서 났다.’라고 여겨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Jānāti kho, vāseṭṭha, rājā pasenadi kosalo: ‘samaṇo gotamo anantarā sakyakulā pabbajito’ti. Sakyā kho pana, vāseṭṭha, rañño pasenadissa kosalassa anuyuttā bhavanti. Karonti kho, vāseṭṭha, sakyā raññe pasenadimhi kosale nipaccakāraṁ abhivādanaṁ paccuṭṭhānaṁ añjalikammaṁ sāmīcikammaṁ. Iti kho, vāseṭṭha, yaṁ karonti sakyā raññe pasenadimhi kosale nipaccakāraṁ abhivādanaṁ paccuṭṭhānaṁ añjalikammaṁ sāmīcikammaṁ, karoti taṁ rājā pasenadi kosalo tathāgate nipaccakāraṁ abhivādanaṁ paccuṭṭhānaṁ añjalikammaṁ sāmīcikammaṁ, na naṁ ‘sujāto samaṇo gotamo, dujjātohamasmi.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이치가 태생을 넘어선다는 두 번째 실례로 빠세나디 왕의 일화가 제시됩니다. 사꺄족은 꼬살라국에 종속된 처지라 빠세나디 왕에게 신하로서 예를 갖추는데, 그 빠세나디 왕이 도리어 사꺄족 출신인 부처님께 같은 예를 갖춘다는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왕이 부처님을 그렇게 대우하는 진짜 이유는 이어지는 대목에서 밝혀지는데, 앞의 말은 그 이유가 아니라고 곧이어 부정됩니다.
묵상
지위나 신분이 더 높은 사람이 오히려 다른 이유로 누군가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그때 그 예는 무엇 때문이라고 느껴졌는지, 왜 인상 깊었는지도 헤아려 보아도 좋아요.
‘수행자 고따마는 힘이 세고 나는 약하다, 수행자 고따마는 잘생겼고 나는 못생겼다, 수행자 고따마는 권세가 있고 나는 보잘것없다’고 이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빠세나디 왕은 오직 이치를 존중하고 이치를 중히 여기고 이치를 받들고 이치를 공경하여, 그렇게 깨달음에 이른 이(따타가따)에게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 맞이하며 합장하고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바세타여, 이것으로도 이렇게 알아야 하나니, 어떻게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은지를.”
Balavā samaṇo gotamo, dubbalohamasmi. Pāsādiko samaṇo gotamo, dubbaṇṇohamasmi. Mahesakkho samaṇo gotamo, appesakkhohamasmī’ti. Atha kho naṁ dhammaṁyeva sakkaronto dhammaṁ garuṁ karonto dhammaṁ mānento dhammaṁ pūjento dhammaṁ apacāyamāno evaṁ rājā pasenadi kosalo tathāgate nipaccakāraṁ karoti, abhivādanaṁ paccuṭṭhānaṁ añjalikammaṁ sāmīcikammaṁ. Imināpi kho etaṁ, vāseṭṭha, pariyāyena veditabbaṁ, yathā dhammova seṭṭho janetasmiṁ,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ca.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앞에서 인용된 왕의 생각을 부처님께서 직접 부정하십니다. 왕이 부처님께 예를 갖추는 것은 힘·외모·권세 같은 세속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치 그 자체를 존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의 사례에 이어 이치가 태생을 넘어선다는 두 번째 실례로 제시된 것이며, 두 사례 모두 ‘이치야말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다’는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됩니다.
묵상
누군가를 존중할 때, 그 사람이 가진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키는 원칙이나 삶의 태도 때문이었던 적이 있나요? 그 존중은 조건 때문이었던 존중과 어떻게 달랐는지 천천히 견주어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그대들은 서로 다른 태생, 다른 이름, 다른 가문,
다른 집안에서 집을 떠났다. ‘그대들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그대들은 ‘저희는 사꺄의 아들을 따르는 수행자입니다’라고 밝힌다.”
Tumhe khvattha, vāseṭṭha, nānājaccā nānānāmā nānāgottā nānākulā agārasmā anagāriyaṁ pabbajitā. ‘Ke tumhe’ti—puṭṭhā samānā ‘samaṇā sakyaputtiyāmhā’ti—paṭijānātha.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부처님께서 이제 바세타와 바라드와자 두 사람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십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태생과 가문 출신이면서도 똑같이 ‘사꺄의 아들을 따르는 수행자’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앞서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들의 계급 주장과 견주어 보면, 이는 함께 따르는 스승과 길로 정체성을 삼는 방식입니다.
묵상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믿음이나 목표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나요? 그때 태생이나 배경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하게 느껴졌는지, 지금 돌아보면 어떤지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누구든 깨달음에 이른 이(따타가따)에 대한 믿음이 뿌리내리고 굳게 서서 확고하며 어떤 수행자나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이나 신이나 마라나 브라흐마 이 세상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이라면,
그는 이렇게 말해도 마땅하다. ‘나는 부처님의 친아들, 그 입에서 태어난 이,
이치가 낳고 이치가 지어내고 이치의 상속자다.’”
Yassa kho panassa, vāseṭṭha, tathāgate saddhā niviṭṭhā mūlajātā patiṭṭhitā daḷhā asaṁhāriyā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ṁ, tassetaṁ kallaṁ vacanāya: ‘bhagavatomhi putto oraso mukhato jāto dhammajo dhammanimmito dhammadāyādo’ti.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앞서 확인한 공통의 이름에 이어, 깨달음에 이른 이(따타가따)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갖춘 이라면 ‘나는 부처님의 친아들, 이치가 낳은 이’라고 스스로 말해도 된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들이 ‘브라흐마의 친아들’이라 자처한 것과 정확히 같은 틀을 빌려, 믿음과 이치가 참된 혈통을 이룬다고 내세우는 것이며,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 근거가 되는 깨달음에 이른 이의 다른 이름들이 밝혀집니다.
묵상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깊어졌던 순간이 있나요? 그 믿음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는지, 지금도 그 믿음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천천히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바세타여, ‘이치의 몸’이라는 것도,
‘브라흐마의 몸’이라는 것도, ‘이치가 된 이’라는 것도, ‘브라흐마가 된 이’라는 것도,
모두 깨달음에 이른 이(따타가따)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Taṁ kissa hetu? Tathāgatassa hetaṁ, vāseṭṭha, adhivacanaṁ ‘dhammakāyo’ itipi, ‘brahmakāyo’ itipi, ‘dhammabhūto’ itipi, ‘brahmabhūto’ itipi.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앞에서 ‘이치의 상속자’라 말해도 되는 까닭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깨달음에 이른 이(따타가따)를 가리키는 여러 별칭, 곧 ‘이치의 몸(담마까야)’, ‘브라흐마의 몸(브라흐마까야)’, ‘이치가 된 이’, ‘브라흐마가 된 이’가 나열되는데, 이는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들이 신성시하는 ‘브라흐마’라는 말조차 결국 깨달음에 이른 이 자신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흡수됨을 보여 줍니다. 이로써 두 수행자를 향한 부처님의 위로가 마무리되고, 뒤이어 세상이 어떻게 지금 모습에 이르렀는지를 밝히는 훨씬 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묵상
어떤 낱말이 원래 가리키던 것과는 다른 더 깊은 뜻으로 쓰이는 것을 알아차린 경험이 있나요? 그 낱말을 다시 볼 때 느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천천히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언젠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 세상이 수축하는 때가 있다. 세상이 수축할 때 뭇 삶은 대개 극광천에 태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먹으며,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며, 영광에 머물러 아주 오랜 세월을 그렇게 지낸다.”
Hoti kho so, vāseṭṭha, samayo yaṁ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ayaṁ loko saṁvaṭṭati. Saṁvaṭṭamāne loke yebhuyyena sattā ābhassarasaṁvattanikā honti. Te tattha honti manomayā pītibhakkhā sayaṁpabhā antalikkhacarā subhaṭṭhāyino ciraṁ dīghamaddhānaṁ tiṭṭhanti.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여기서부터 경의 두 번째 큰 부분, 곧 세상이 지금 모습에 이르기까지의 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계급 논쟁을 떠나 우주가 주기적으로 수축과 팽창을 되풀이한다는 배경을 먼저 놓습니다. 세상이 수축할 때 뭇 삶은 극광천(빛으로 가득한 하늘 세계)에 태어나, 아직 몸이 없이 마음으로만 이루어진 채 기쁨을 양식으로 삼으며 스스로 빛을 냅니다. 이 최초의 상태는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며 조금씩 무너져 갑니다.
묵상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몸과 배고픔과 갈라진 처지가, 사실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생겨난 것이라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잠시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바세타여, 또 언젠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 세상이 팽창하는 때가 있다. 세상이 팽창할 때 뭇 삶은 대개 극광천의 무리에서 죽어 이 세상으로 온다. 그들은 여기서도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먹으며,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며, 영광에 머물러 아주 오랜 세월을 그렇게 지낸다.”
Hoti kho so, vāseṭṭha, samayo yaṁ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ayaṁ loko vivaṭṭati. Vivaṭṭamāne loke yebhuyyena sattā ābhassarakāyā cavitvā itthattaṁ āgacchanti. Tedha honti manomayā pītibhakkhā sayaṁpabhā antalikkhacarā subhaṭṭhāyino ciraṁ dīghamaddhānaṁ tiṭṭhanti.
디가 니까야 DN 27 악간냐 숫따 (태초)
배경
앞서 나온 수축에 이어, 세상이 다시 팽창하는 국면입니다. 극광천에 머물던 뭇 삶이 이번에는 그 하늘에서 죽어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데, 아직은 몸이 없이 마음으로만 이루어진 최초의 상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앞의 수축 이야기와 거의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것은 수축과 팽창이 짝을 이루는 순환임을 보여 줍니다. 이 최초의 순수한 상태가 이어서 땅의 단맛을 맛보면서 서서히 무너져 가는 것이 이 경 후반부 전체의 줄거리입니다.
묵상
무언가 다시 시작될 때, 이전의 순수했던 상태를 그대로 지니고 출발했던 경험이 있나요? 그 상태가 그 뒤로 어떻게 변해 갔는지, 지금은 무엇이 남아 있는지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