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빠니사 숫따(바탕)

Upanisasutta

상윳따 니까야 SN 12.23

괴로움이 믿음의 바탕이 되고, 믿음에서 기쁨·고요·마음 모음·있는 그대로의 앎을 지나 풀려남까지 차례로 받친다고 밝힌다.

인용된 가르침 15구절

이 경을 15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알고 보는 이에게 흘러드는 것이 다한다 1구절

흘러드는 것이 다하는 일은 다섯 무더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고 보는 이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사왓티에 머무셨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아는 이, 보는 이에게 흘러드는 것(아사와)이 다한다고 말한다. 알지 못하는 이, 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무엇을 아는 이, 무엇을 보는 이에게 흘러드는 것이 다하는가? ‘이것이 몸이고, 이것이 몸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몸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 이것이 인식이다 … 이것들이 지어내는 작용이다 … 이것이 의식이고,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 수행자들이여, 이렇게 아는 이, 이렇게 보는 이에게 흘러드는 것이 다한다.

Sāvatthiyaṁ viharati. “Jānato ahaṁ, bhikkhave, passato āsavānaṁ khayaṁ vadāmi, no ajānato no apassato. Kiñca, bhikkhave, jānato kiṁ passato āsavānaṁ khayo hoti? Iti rūpaṁ iti rūpassa samudayo iti rūpassa atthaṅgamo, iti vedanā …pe… iti saññā … iti saṅkhārā … iti viññāṇaṁ iti viññāṇassa samudayo iti viññāṇassa atthaṅgamoti. Evaṁ kho, bhikkhave, jānato evaṁ passato āsavānaṁ khayo hoti.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경은 사왓티에서 시작해 곧바로 하나의 주장을 세웁니다. 흘러드는 것(아사와)이 다하는 일을 아는 이, 보는 이에게 두고, 알지 못하는 이, 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두지 않습니다. 이어 스스로 ‘무엇을 아는 이인가’ 하고 묻고, 다섯 무더기마다 ‘이것이 그것이고, 일어남이고, 사라짐이다’라고 답합니다. 원문은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에서 ‘…pe…’로 같은 틀을 줄였고 번역도 같은 자리에 ‘…’를 두었습니다. 의식에서 틀이 온전히 다시 나오므로 앞의 셋도 같은 틀로 읽습니다. 여기서 알 것은 각 무더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입니다.

묵상

알고 보는 일을 시험처럼 느끼는 날도 있을 수 있어요. 지금 몸이나 느낌 가운데 하나를 골라, 그것이 일어나던 때와 가라앉던 때를 떠올릴 수 있나요?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없다는 답도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까요?

2 다했음을 아는 앎의 바탕 1구절

다했음을 아는 앎의 바탕은 풀려남, 풀려남의 바탕은 탐냄이 빛바램이라고 거슬러 오릅니다.

수행자들이여, 다했음을 아는 앎에도 바탕(우빠니사)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다했음을 아는 앎의 바탕은 무엇인가? ‘풀려남’이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풀려남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풀려남의 바탕은 무엇인가? ‘탐냄이 빛바램’이라고 말해야 한다.

Yampissa taṁ, bhikkhave, khayasmiṁ khaye ñāṇaṁ, tampi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Kā ca, bhikkhave, khaye ñāṇassa upanisā? ‘Vimuttī’tissa vacanīyaṁ. Vimutti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Kā ca, bhikkhave, vimuttiyā upanisā? ‘Virāgo’tissa vacanīyaṁ.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앞 대목에서 흘러드는 것이 다한다고 말한 뒤, 경은 그렇게 다했음을 아는 앎에도 바탕(우빠니사)이 있다고 말합니다. 같은 세 걸음이 되풀이됩니다. ‘바탕이 있다고 말하고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선언, ‘그 바탕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이것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답입니다. 이 카드에서는 다했음을 아는 앎의 바탕이 풀려남이고, 풀려남의 바탕이 탐냄이 빛바램입니다. 결과에서 출발해 그것을 받치는 조건으로 한 칸씩 물러나는 방향이며, 앎은 조건 없이 나타나는 것으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묵상

끝에 있는 앎이 앞의 조건에 기대어 있다고 읽으니 어떤 느낌이 드나요? 지금 풀려남이나 탐냄이 빛바램을 확인하려 하기보다, 이 순서를 그냥 한 번 따라 읽어 보는 정도로도 괜찮을까요? 잘 와닿지 않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답이에요.

3 탐냄이 빛바램과 싫증의 바탕 1구절

탐냄이 빛바램의 바탕은 싫증, 싫증의 바탕은 있는 그대로 알고 봄입니다.

수행자들이여, 탐냄이 빛바램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탐냄이 빛바램의 바탕은 무엇인가? ‘싫증’이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싫증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싫증의 바탕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라고 말해야 한다.

Virāga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Kā ca, bhikkhave, virāgassa upanisā? ‘Nibbidā’tissa vacanīyaṁ. Nibbida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Kā ca, bhikkhave, nibbidāya upanisā? ‘Yathābhūtañāṇadassanan’tissa vacanīyaṁ.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앞 카드에서 풀려남의 바탕으로 나온 탐냄이 빛바램(위라가)을 같은 틀로 이어 묻습니다. 탐냄이 빛바램의 바탕은 싫증(닙비다)이고, 싫증의 바탕은 있는 그대로 알고 봄(야타부따냐나닷사나)입니다. 이 사슬에서 싫증과 탐냄이 빛바램은 앎과 봄 다음에 오는 것으로 배열되어 있어, 억지로 싫어하려는 마음을 세우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묵상

무언가를 알고 보고 난 뒤에 저절로 시들해졌던 경험이 있나요? 아니면 시들해지라고 스스로 몰아붙이다 지친 경험이 있나요? 이 순서에서는 앎과 봄이 먼저 오는데, 지금의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가만히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4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의 바탕 1구절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의 바탕은 마음이 한곳에 모임이라고 답합니다.

수행자들이여, 있는 그대로 알고 봄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의 바탕은 무엇인가? ‘마음이 한곳에 모임(사마디)’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마음이 한곳에 모임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Yathābhūtañāṇadassana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Kā ca, bhikkhave, yathābhūtañāṇadassanassa upanisā? ‘Samādhī’tissa vacanīyaṁ. Samādhi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거슬러 오르는 사슬이 이어집니다. 앞 카드의 답을 받아,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의 바탕은 마음이 한곳에 모임(사마디)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마음이 한곳에 모임에도 바탕이 있다고 말하며, 다음 물음을 미리 불러냅니다. 마음이 한곳에 모임은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을 받치는 조건으로 놓이고, 그 자체에도 바탕이 있다고 말해집니다. 사슬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 물음으로 넘어갑니다.

묵상

마음이 한곳에 모인 때, 그 마음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떠올릴 수 있나요? 모인 상태 자체를 붙잡고 싶었는지, 거기서 무언가가 더 분명해졌는지 가만히 물어볼 수 있을까요? 모인 적이 없다는 대답도 괜찮아요.

5 마음이 한곳에 모임과 행복의 바탕 1구절

마음이 한곳에 모임의 바탕은 행복, 행복의 바탕은 고요입니다.

수행자들이여, 마음이 한곳에 모임의 바탕은 무엇인가? ‘행복’이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행복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행복의 바탕은 무엇인가? ‘고요’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고요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Kā ca, bhikkhave, samādhissa upanisā? ‘Sukhan’tissa vacanīyaṁ. Sukha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Kā ca, bhikkhave, sukhassa upanisā? ‘Passaddhī’tissa vacanīyaṁ. Passaddhi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앞 카드가 던진 물음에 답합니다. 마음이 한곳에 모임의 바탕은 행복이고, 행복의 바탕은 고요(빳삿디)입니다. 행복(수카)과 고요는 이 사슬에서 서로 다른 고리로 나란히 놓입니다. 고요가 먼저 있고 그것이 행복의 바탕이며, 행복이 마음이 한곳에 모임의 바탕입니다. 어느 고리도 앞 고리 없이 따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묵상

마음이 모이지 않아 답답한 날에는 모으려는 노력과 별개로 몸이나 마음에 조금이라도 고요한 데가 있는지 살필 수 있나요? 고요가 어디에도 없다고 느껴지면, 그 느낌도 있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까요?

6 고요와 희열의 바탕 1구절

고요의 바탕은 희열, 희열의 바탕은 기쁨입니다.

수행자들이여, 고요의 바탕은 무엇인가? ‘희열’이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희열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희열의 바탕은 무엇인가? ‘기쁨’이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기쁨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Kā ca, bhikkhave, passaddhiyā upanisā? ‘Pītī’tissa vacanīyaṁ. Pīti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Kā ca, bhikkhave, pītiyā upanisā? ‘Pāmojjan’tissa vacanīyaṁ. Pāmojja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고요의 바탕은 희열(삐띠)이고, 희열의 바탕은 기쁨(빠모짜)입니다. 같은 물음과 답이 두 번 되풀이되며, 한 칸 물러날 때마다 앞 카드의 답이 다음 물음의 주어가 됩니다. 기쁨은 희열 앞에 서고, 희열은 고요 앞에 섭니다. 이 카드까지 오면 거슬러 오르는 사슬은 마음이 한곳에 모임에서 기쁨까지 닿았고, 이제 기쁨의 바탕을 묻는 일만 남습니다. 다른 경인 쩨따나까라니야 숫따(AN 10.2)에는 기쁨에서 희열, 고요, 행복으로 나아가는 같은 낱말들이 순방향으로 나옵니다.

묵상

기쁨이 먼저 있고 그 뒤에 몸이 설레는 듯한 희열이 오고 그 뒤에 고요가 온다는 순서를, 가까운 경험에서 한 번 찾아볼 수 있나요? 찾아지지 않는다면 이 순서가 지금 내게 낯설다는 사실만 알아차려도 괜찮을까요?

7 기쁨의 바탕은 믿음 1구절

기쁨의 바탕은 믿음이라고 답하고, 믿음에도 바탕이 있다고 말합니다.

수행자들이여, 기쁨의 바탕은 무엇인가? ‘믿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믿음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Kā ca, bhikkhave, pāmojjassa upanisā? ‘Saddhā’tissa vacanīyaṁ. Saddha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기쁨의 바탕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경은 믿음(삿다)이라고 답합니다. 거슬러 오르는 사슬이 기쁨에서 믿음으로 한 칸 더 물러납니다. 이어서 믿음에도 바탕이 있다는 선언이 곧바로 따라 나와, 사슬은 믿음에서 멈추지 않고 다음 카드로 넘어갑니다. 묻는 문장은 앞 카드의 마지막 답인 기쁨을 주어로 삼습니다. 믿음이 무엇을 향한 믿음인지는 이 카드의 원문에 적혀 있지 않으며, 해설도 그것을 정해 쓰지 않습니다.

묵상

믿음이 기쁨의 바탕이라는 말을 읽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나요? 누군가를, 어떤 가르침을, 혹은 나 자신을 조금 믿어 보았을 때 마음이 가벼워진 순간이 있었는지 가만히 물어볼 수 있을까요? 믿음이 흔들리는 시기라면 그 사실도 그대로 인정해도 괜찮아요.

8 믿음의 바탕은 괴로움 1구절

믿음의 바탕은 괴로움, 괴로움의 바탕은 태어남이라고 거슬러 오릅니다.

수행자들이여, 믿음의 바탕은 무엇인가? ‘괴로움’이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괴로움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괴로움의 바탕은 무엇인가? ‘태어남’이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태어남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Kā ca, bhikkhave, saddhāya upanisā? ‘Dukkhan’tissa vacanīyaṁ. Dukkha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Kā ca, bhikkhave, dukkhassa upanisā? ‘Jātī’tissa vacanīyaṁ. Jāti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믿음의 바탕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경은 괴로움(둑카)이라고 답합니다. 풀려남 쪽에서 거슬러 올라온 사슬이 여기서 괴로움에 닿습니다. 이어 괴로움의 바탕은 태어남(자띠)이라고 합니다. 원문은 둘 사이를 ‘바탕’이라는 한 낱말로만 잇고 원인을 설명하는 문장을 덧붙이지 않으며, 괴로움을 겪는 사람을 탓하는 문장도 없습니다. 물음과 답의 틀은 앞 구간과 같고, 바뀐 것은 물음의 주어가 믿음으로 옮겨 간 점입니다.

묵상

믿음이 괴로움을 바탕으로 한다는 말이 지금의 나에게 어떻게 들리나요? 힘든 시간을 지나며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졌던 순간이 있었다면, 그 마음을 어떻게 불러 볼 수 있을까요? 아직 말로 하기 어렵다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9 태어남과 존재의 바탕 1구절

태어남의 바탕은 존재, 존재의 바탕은 움켜쥠입니다.

수행자들이여, 태어남의 바탕은 무엇인가?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존재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존재의 바탕은 무엇인가? ‘움켜쥠’이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움켜쥠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Kā ca, bhikkhave, jātiyā upanisā? ‘Bhavo’tissa vacanīyaṁ. Bhava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Kā ca, bhikkhave, bhavassa upanisā? ‘Upādānan’tissa vacanīyaṁ. Upādāna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태어남(자띠)의 바탕은 존재(바와)이고, 존재의 바탕은 움켜쥠(우빠다나)입니다. 여기서도 한 칸 물러날 때마다 결과가 바탕으로 바뀌는 같은 틀이 흔들림 없이 이어집니다. 낯선 낱말이 늘어나는 구간이지만 읽는 순서는 앞 카드와 같습니다. 태어남과 존재, 존재와 움켜쥠 사이도 원문은 ‘바탕’이라는 한 낱말로만 잇고, 각 낱말의 풀이는 이 경 안에서 하지 않습니다.

묵상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다고 느낄 때 몸의 어느 부분이 먼저 굳어지나요? 내려놓으라고 재촉하지 않고 그저 어디에 힘이 들어가 있는지만 살필 수 있을까요? 지금은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느낌이라면 그 느낌도 괜찮아요.

10 움켜쥠의 바탕은 목마름 1구절

움켜쥠의 바탕은 목마름이라고 답합니다.

수행자들이여, 움켜쥠의 바탕은 무엇인가? ‘목마름(딴하)’이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목마름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Kā ca, bhikkhave, upādānassa upanisā? ‘Taṇhā’tissa vacanīyaṁ. Taṇhampāhaṁ, bhikkhave, saupanisaṁ vadāmi, no anupanisaṁ.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움켜쥠의 바탕은 목마름(딴하)이라고 합니다. 딴하는 본래 갈증을 가리키는 말이고, 여기서는 무언가를 향해 마르는 듯 당기는 힘을 이릅니다. 이 카드까지 거슬러 오르던 사슬은 믿음에서 괴로움, 태어남, 존재, 움켜쥠, 목마름까지 닿았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다시 목마름에도 바탕이 있다고 선언하며 다음 물음을 이어 갑니다. 원문에서 목마름은 사슬의 한 고리 이름으로 놓일 뿐, 그것을 가진 사람을 나무라는 문장은 없습니다.

묵상

마른 듯 당기는 마음이 올라올 때, 그 당김은 몸에서 어떤 감각으로 느껴지나요? 그것을 없애려 하기보다 먼저 이름만 붙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은 그런 당김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것도 그대로 두어도 돼요.

11 목마름에서 모름까지 거슬러 오름 1구절

목마름에서 느낌·닿음·여섯 감각 영역·이름과 모양·의식·지어내는 작용을 지나 모름에 닿습니다.

수행자들이여, 목마름의 바탕은 무엇인가? ‘느낌’이라고 말해야 한다 … ‘닿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 ‘여섯 감각 영역’이라고 말해야 한다 … ‘이름과 모양’이라고 말해야 한다 … ‘의식’이라고 말해야 한다 … ‘지어내는 작용’이라고 말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지어내는 작용에도 바탕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바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지어내는 작용의 바탕은 무엇인가? ‘모름’이라고 말해야 한다.

Kā ca, bhikkhave, taṇhāya upanisā? ‘Vedanā’tissa vacanīyaṁ …pe… ‘phasso’tissa vacanīyaṁ … ‘saḷāyatanan’tissa vacanīyaṁ … ‘nāmarūpan’tissa vacanīyaṁ … ‘viññāṇan’tissa vacanīyaṁ … ‘saṅkhārā’tissa vacanīyaṁ. Saṅkhārepāhaṁ, bhikkhave, saupanise vadāmi, no anupanise. Kā ca, bhikkhave, saṅkhārānaṁ upanisā? ‘Avijjā’tissa vacanīyaṁ.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목마름의 바탕을 묻는 이 카드에서 원문이 다시 줄입니다. 느낌, 닿음, 여섯 감각 영역, 이름과 모양, 의식에 대한 답은 앞의 틀(바탕이 있다, 바탕은 무엇인가)을 펼치지 않고 ‘…pe…’와 ‘…’로 줄여 두었고, 번역도 같은 자리에 ‘…’를 두었습니다. 각 줄임 자리에는 앞 카드와 같은 선언과 물음이 들어 있다고 읽습니다. 지어내는 작용부터는 다시 선언과 물음과 답이 온전히 나오며, 마지막 답이 모름입니다. 거슬러 오르는 사슬의 끝이 모름이라는 것이 이 카드에서 처음 말해집니다.

묵상

사슬을 거꾸로 따라 내려가 끝에서 모름을 만났을 때, 그 말이 어떻게 들렸나요? 모름을 사슬의 한 고리 이름으로만 읽는다면 느낌이 달라질까요? 모름이라는 말이 아프게 와닿는다면 그 점도 조용히 인정해도 괜찮아요.

12 모름에서 괴로움까지 내려옴 1구절

모름에서 괴로움까지, 각 고리가 앞 고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슬을 내려오며 잇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이렇게 지어내는 작용은 모름을 바탕으로 하고, 의식은 지어내는 작용을 바탕으로 하고, 이름과 모양은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여섯 감각 영역은 이름과 모양을 바탕으로 하고, 닿음은 여섯 감각 영역을 바탕으로 하고, 느낌은 닿음을 바탕으로 하고, 목마름은 느낌을 바탕으로 하고, 움켜쥠은 목마름을 바탕으로 하고, 존재는 움켜쥠을 바탕으로 하고, 태어남은 존재를 바탕으로 하고, 괴로움은 태어남을 바탕으로 하고,

Iti kho, bhikkhave, avijjūpanisā saṅkhārā, saṅkhārūpanisaṁ viññāṇaṁ, viññāṇūpanisaṁ nāmarūpaṁ, nāmarūpūpanisaṁ saḷāyatanaṁ, saḷāyatanūpaniso phasso, phassūpanisā vedanā, vedanūpanisā taṇhā, taṇhūpanisaṁ upādānaṁ, upādānūpaniso bhavo, bhavūpanisā jāti, jātūpanisaṁ dukkhaṁ,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앞서 다했음을 아는 앎에서 모름까지 거슬러 올랐던 사슬을 이제 모름에서 순서대로 내려오며 읽습니다. 첫 줄의 ‘이렇게’가 지금까지의 물음과 답을 한데 묶고, 이후 줄은 ‘A는 B를 바탕으로 한다’는 틀로만 이어집니다. 모름에서 지어내는 작용, 의식, 이름과 모양, 여섯 감각 영역, 닿음, 느낌, 목마름, 움켜쥠, 존재, 태어남을 지나 괴로움에 이릅니다. 원문은 이 카드의 마지막 줄을 쉼표로 닫으며, 문장은 다음 카드로 이어집니다. 고리마다 ‘바탕’이라는 같은 낱말이 쓰여 앞 고리가 다음 고리를 받치는 관계가 한결같이 읽힙니다.

묵상

사슬이 괴로움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 줄로 이어진다는 점을 잠시 기억해 둘 수 있나요? 지금 힘든 일을 지나고 있다면, 이 문장을 읽는 일이 버거울 수 있어요. 그럴 때는 여기서 멈추고 숨을 고르는 선택도 있을까요?

13 괴로움에서 다했음을 아는 앎까지 1구절

괴로움을 바탕으로 믿음이 서고, 기쁨에서 풀려남을 지나 다했음을 아는 앎에 이릅니다.

믿음은 괴로움을 바탕으로 하고, 기쁨은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희열은 기쁨을 바탕으로 하고, 고요는 희열을 바탕으로 하고, 행복은 고요를 바탕으로 하고, 마음이 한곳에 모임은 행복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은 마음이 한곳에 모임을 바탕으로 하고, 싫증은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을 바탕으로 하고, 탐냄이 빛바램은 싫증을 바탕으로 하고, 풀려남은 탐냄이 빛바램을 바탕으로 하고, 다했음을 아는 앎은 풀려남을 바탕으로 한다.

dukkhūpanisā saddhā, saddhūpanisaṁ pāmojjaṁ, pāmojjūpanisā pīti, pītūpanisā passaddhi, passaddhūpanisaṁ sukhaṁ, sukhūpaniso samādhi, samādhūpanisaṁ yathābhūtañāṇadassanaṁ, yathābhūtañāṇadassanūpanisā nibbidā, nibbidūpaniso virāgo, virāgūpanisā vimutti, vimuttūpanisaṁ khaye ñāṇaṁ.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앞 카드의 문장이 쉼표로 이어져 이 카드에서 끝납니다. 괴로움을 바탕으로 믿음이 있고, 거기서 기쁨, 희열, 고요, 행복, 마음이 한곳에 모임, 있는 그대로 알고 봄, 싫증, 탐냄이 빛바램, 풀려남을 지나 다했음을 아는 앎에 이릅니다. 모름에서 괴로움까지 내려온 사슬이 같은 문장 안에서 괴로움을 바탕으로 한 믿음으로 이어지며, 풀려남 쪽 고리들이 차례로 따라옵니다. 기쁨 이후의 고리는 다른 경인 쩨따나까라니야 숫따(AN 10.2)에서도 같은 차례로 나옵니다.

묵상

괴로움이 믿음의 바탕으로 놓이는 자리를 읽으며 어떤 마음이 드나요? 괴로움이 믿음 앞의 한 고리로 놓였다는 문장을 천천히 읽어도 괜찮을까요? 아직 믿을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 상태도 그대로 두어도 돼요.

14 빗물이 바다를 채우는 비유 1구절

산에 내린 비가 골짜기와 웅덩이와 강을 차례로 채워 바다에 이르는 비유입니다.

수행자들이여, 비유하면 높은 산 위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 그 물은 낮은 곳을 따라 흘러 산의 골짜기와 틈과 갈래를 채운다. 산의 골짜기와 틈과 갈래가 가득 차면 작은 웅덩이를 채운다. 작은 웅덩이가 가득 차면 큰 웅덩이를 채운다. 큰 웅덩이가 가득 차면 작은 강을 채운다. 작은 강이 가득 차면 큰 강을 채운다. 큰 강이 가득 차면 큰 바다를 채운다.

Seyyathāpi, bhikkhave, uparipabbate thullaphusitake deve vassante taṁ udakaṁ yathāninnaṁ pavattamānaṁ pabbatakandarapadarasākhā paripūreti. Pabbatakandarapadarasākhāparipūrā kusobbhe paripūrenti. Kusobbhā paripūrā mahāsobbhe paripūrenti. Mahāsobbhā paripūrā kunnadiyo paripūrenti. Kunnadiyo paripūrā mahānadiyo paripūrenti. Mahānadiyo paripūrā mahāsamuddaṁ paripūrenti.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사슬 설명 뒤에 붙은 비유입니다. 비의 물이 낮은 곳을 따라 흘러 골짜기와 틈과 갈래를 채우고, 그것이 작은 웅덩이를, 이어 큰 웅덩이와 작은 강과 큰 강을 채워 마침내 큰 바다에 이릅니다. 단계마다 ‘가득 차면 다음을 채운다’는 같은 문장이 되풀이됩니다. 앞 카드들의 ‘A는 B를 바탕으로 한다’가 한 칸씩 이어지는 구조를 물이 한 칸씩 넘쳐 아래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원문은 물의 단계와 사슬의 고리를 하나씩 짝짓지 않으며, 비유를 받는 문장은 다음 카드의 ‘그와 같이’로 시작합니다.

묵상

물이 한 칸이 가득 차야 다음 칸으로 넘쳐 흐르는 모습을 그려 보면 어떤 감각이 드나요? 지금 내 안에서 아직 채워지는 중인 칸이 있다면, 서둘러 넘기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까요? 채워지는 칸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답도 좋아요.

15 그와 같이, 사슬 전체 1구절

빗물 비유를 받아, 모름에서 다했음을 아는 앎까지 사슬 전체를 한 문장으로 다시 말합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들이여, 지어내는 작용은 모름을 바탕으로 하고, 의식은 지어내는 작용을 바탕으로 하고, 이름과 모양은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여섯 감각 영역은 이름과 모양을 바탕으로 하고, 닿음은 여섯 감각 영역을 바탕으로 하고, 느낌은 닿음을 바탕으로 하고, 목마름은 느낌을 바탕으로 하고, 움켜쥠은 목마름을 바탕으로 하고, 존재는 움켜쥠을 바탕으로 하고, 태어남은 존재를 바탕으로 하고, 괴로움은 태어남을 바탕으로 하고, 믿음은 괴로움을 바탕으로 하고, 기쁨은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희열은 기쁨을 바탕으로 하고, 고요는 희열을 바탕으로 하고, 행복은 고요를 바탕으로 하고, 마음이 한곳에 모임은 행복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은 마음이 한곳에 모임을 바탕으로 하고, 싫증은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을 바탕으로 하고, 탐냄이 빛바램은 싫증을 바탕으로 하고, 풀려남은 탐냄이 빛바램을 바탕으로 하고, 다했음을 아는 앎은 풀려남을 바탕으로 한다.”

Evameva kho, bhikkhave, avijjūpanisā saṅkhārā, saṅkhārūpanisaṁ viññāṇaṁ, viññāṇūpanisaṁ nāmarūpaṁ, nāmarūpūpanisaṁ saḷāyatanaṁ, saḷāyatanūpaniso phasso, phassūpanisā vedanā, vedanūpanisā taṇhā, taṇhūpanisaṁ upādānaṁ, upādānūpaniso bhavo, bhavūpanisā jāti, jātūpanisaṁ dukkhaṁ, dukkhūpanisā saddhā, saddhūpanisaṁ pāmojjaṁ, pāmojjūpanisā pīti, pītūpanisā passaddhi, passaddhūpanisaṁ sukhaṁ, sukhūpaniso samādhi, samādhūpanisaṁ yathābhūtañāṇadassanaṁ, yathābhūtañāṇadassanūpanisā nibbidā, nibbidūpaniso virāgo, virāgūpanisā vimutti, vimuttūpanisaṁ khaye ñāṇan”ti.

상윳따 니까야 SN 12.23 우빠니사 숫따 (바탕)

배경

비유를 받는 문장입니다. 첫머리의 ‘그와 같이’가 앞의 빗물 비유를 이 문장 전체에 맞춥니다. 문장은 모름에서 시작해 괴로움을 지나 다했음을 아는 앎에 이르는 스물세 가지를 한 줄로 이어 말합니다. 앞의 두 카드에 나뉘어 있던 ‘A는 B를 바탕으로 한다’가 한 문장으로 다시 나옵니다. 마지막 낱말 뒤의 따옴표는 경 첫머리에서 열린 인용을 닫습니다. 비의 물이 마침내 바다에 이르듯, 모름에서 시작한 고리들이 한 칸씩 채워 다했음을 아는 앎에 이른다고 그려집니다.

묵상

비가 내려 바다를 채우기까지 아주 긴 길이 필요하다는 점을 떠올리면, 지금의 내 자리를 서둘러 판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드나요? 이 긴 사슬 가운데 지금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낱말이 있다면 어느 것인가요? 잘 모르겠다면 그냥 읽은 것만으로도 충분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