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가라 연못가에서 재가 신자들이 사리뿟따를 찾아가 오랜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짬빠의 각가라 연못가에 머무셨습니다.
짬빠의 여러 집에 사는 신자들이 사리뿟따 님에게 다가갔습니다.
다가가 사리뿟따 님에게 절하고 한쪽에 앉았습니다.
한쪽에 앉은 그들이 사리뿟따 님에게 말했습니다.
“사리뿟따 님, 저희가 부처님 앞에서 가르침 말씀을 들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리뿟따 님, 부처님 앞에서 가르침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경은 짬빠의 각가라 연못가라는 장소와 가르침 말씀을 먼저 청한 사람들을 분명히 밝히며 시작합니다. 집에 사는 신자들은 부처님께 곧장 가지 않고 사리뿟따 님을 찾아가 절하고 한쪽에 앉은 뒤 부탁합니다. ‘오래되었다’는 말은 부처님께 직접 들은 뒤로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면전에서’라는 뜻이므로 그들이 바란 것은 부처님이 직접 들려주는 가르침입니다. 청중의 간절한 요청이 뒤의 보시 문답이 열리는 조건이 됩니다.
묵상
한동안 듣지 못해 다시 듣고 싶어진 말이나 가르침이 있나요? 곧장 답을 얻으려 하기보다 누구에게 어떻게 청할지를 헤아린 적도 있나요? 이 집에 사는 신자들의 요청에서 간절함과 예의 가운데 어느 쪽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지 살펴보세요.
“벗들이여, 그렇다면 다음 포살일에 오십시오.
아마 부처님 앞에서 가르침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리뿟따 님.”
짬빠에서 집에 사는 신자들은 사리뿟따 님의 말을 받아들여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리뿟따 님에게 절하고 오른쪽으로 돌아 떠났습니다.
사리뿟따는 자신이 대신 가르침을 펴겠다고 하지 않고 다음 포살일에 다시 오도록 약속합니다. 이 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보장보다는 ‘아마 그럴 것’이라는 바람에 가깝습니다. 사리뿟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 뜻대로 정하지 않습니다. 집에 사는 신자들은 그 말을 받아들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고 그분을 오른쪽에 두고 도는 예를 갖추어 떠납니다. 요청이 즉시 충족되지 않아도 정해진 날을 기다리고 약속을 지키는 장면입니다. 뒤의 만남은 이 청과 응답 위에서 마련됩니다.
묵상
중요한 말을 듣기 위해 정해진 때를 기다려 본 적이 있나요? 확답이 아니라 “아마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만 받은 상황에서 이들은 약속을 받아들여요. 기다리는 동안 조급함과 신뢰가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요?
포살일에 모인 일행을 사리뿟따가 부처님께 인도하고, 똑같은 베풂이 서로 다른 결실을 맺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포살일이 되자 짬빠에서 집에 사는 신자들은 사리뿟따 님에게 다가갔습니다.
다가가 사리뿟따 님에게 절하고 한쪽에 섰습니다.
사리뿟따 님은 그들과 함께 부처님께 가서 절하고 한쪽에 앉았습니다.
한쪽에 앉은 사리뿟따 님이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어떤 사람이 똑같은 베풂을 해도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없고,
부처님, 다른 사람이 똑같은 베풂을 하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집에 사는 신자들은 약속한 포살일에 돌아오고, 사리뿟따는 그들을 데리고 부처님께 갑니다. 먼저 찾아온 사람들은 한쪽에 서고 사리뿟따가 절한 뒤 한쪽에 앉아 질문합니다. 질문은 베풂 물품의 차이를 묻지 않습니다. 이 말은 두 경우 모두 ‘바로 그와 같은, 똑같은’ 베풂임을 강조합니다. 조건이 같은 듯한 행위가 왜 한쪽에서는 큰 결실과 이익을 내지 못하고 다른 쪽에서는 내는지가 문제입니다. 이 대조가 뒤에서 물건보다 베푸는 마음의 방향을 일곱 단계로 살피게 합니다.
묵상
겉으로는 같은 행동인데 그 뜻과 결과가 다르게 느껴진 경험이 있나요? 이 질문은 먼저 물건의 크기나 받는 사람의 차이를 들지 않아요. 같은 베풂 안에서 무엇을 더 살펴보아야 할지 잠시 궁금해해도 좋습니다.
부처님께서 같은 베풂의 결실이 다를 수 있다고 확인하자 사리뿟따가 그 원인과 조건을 거듭 묻습니다.
“사리뿟따여, 어떤 사람이 똑같은 베풂을 해도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없을 수 있고,
사리뿟따여, 다른 사람이 똑같은 베풂을 하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을 수 있다.”
“부처님, 똑같은 베풂이 한 사람에게는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없는 원인과 조건은 무엇입니까?
부처님, 다른 사람에게는 있는 원인과 조건은 무엇입니까?”
“Siyā, sāriputta, idhekaccassa tādisaṁyeva dānaṁ dinnaṁ na mahapphalaṁ hoti na mahānisaṁsaṁ; siyā pana, sāriputta, idhekaccassa tādisaṁyeva dānaṁ dinnaṁ mahapphalaṁ hoti mahānisaṁsan”ti. “Ko nu kho, bhante, hetu ko paccayo yena midhekaccassa tādisaṁyeva dānaṁ dinnaṁ na mahapphalaṁ hoti na mahānisaṁsaṁ; ko nu kho, bhante, hetu ko paccayo yena midhekaccassa tādisaṁyeva dānaṁ dinnaṁ mahapphalaṁ hoti mahānisaṁsan”ti?
앙굿따라 니까야AN 7.52 다나마합팔라 숫따 (큰 결실을 맺는 베풂)
배경
부처님은 사리뿟따가 제시한 두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되짚어 확인합니다. 사리뿟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원인과 조건(헤뚜와 빳짜야)을 함께 묻습니다. 첫 질문이 현상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면 둘째 질문은 차이가 생기는 까닭을 요구합니다. 두 경우 모두 ‘똑같은 베풂’이라는 조건을 유지하므로 뒤의 설명은 베풂의 외형을 바꾸는 방식으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묻고 답한 덕분에, 이어지는 일곱 가지 마음가짐은 같은 행위의 결실을 갈라놓는 조건으로 드러납니다.
묵상
어떤 차이를 발견했을 때 “그럴 수 있다”는 확인만으로 멈추나요, 원인과 조건까지 묻나요? 같은 행동을 다르게 만드는 조건이 무엇일지 질문 자체를 잠시 붙들어 보세요.
되돌아올 몫을 기대하고 마음을 매어 저장하듯 주는 첫 동기와 아홉 가지 베풀 것을 문답으로 제시합니다.
“사리뿟따여, 어떤 사람은 기대하며, 마음을 거기에 매고, 쌓아 둘 것을 바라며,
‘죽은 뒤 이것을 누리겠다’고 생각하여 베푼다.
그는 수행자나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에게 음식·마실 것·옷·탈것·화환·향·바르는 것·침구·거처·등불을 준다.
사리뿟따여, 어떤 사람이 이런 베풂을 하겠는가?”
“그렇습니다, 부처님.”
첫 번째 사람은 네 가지 생각으로 베풂에 마음을 묶습니다. 첫째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태도이고, 둘째는 마음이 베풂에 매인 상태이며, 셋째는 쌓아 둔 몫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넷째 생각은 그 기대를 ‘죽은 뒤 내가 누릴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이어 음식부터 등불까지 열 묶음의 물품과 수행자·브라흐마나라는 받는 이가 제시됩니다. 부처님이 실제로 이렇게 주는 사람이 있는지 묻고 사리뿟따가 긍정하므로, 베풂 자체는 인정되지만 동기의 방향은 아직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향합니다.
묵상
무언가를 준 뒤 보이지 않는 장부에 내 몫을 적어 둔 듯 기다린 적이 있나요? 다만 주는 마음이 어디에 매여 있었는지 조용히 알아차려 보세요.
부처님은 첫 동기를 줄이지 않고 다시 반복한 뒤 그 결과를 말합니다. 이 사람도 베풂의 결실로 네 하늘왕을 섬기는 신들의 무리에 태어나므로, 기대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결과도 없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삶을 지탱하는 행위·위력·영광·지배력이 소진되면 ‘돌아오는 이’가 되어 이 존재 상태로 되돌아옵니다. 질문에 나온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없음’은 그 결실이 소진되고 귀환으로 끝나는 한계를 가리킵니다.
묵상
좋은 결과가 생기는 것과 그 결과가 오래가지 않는 것은 어떻게 다르게 들리나요? 얻는 결실만 보지 않고 그것이 다한 뒤의 방향까지 본다면, 베풂의 동기를 살피는 기준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되 보시 자체가 좋은 일이라는 생각으로 주는 두 번째 동기를 밝힙니다.
“그러나 사리뿟따여, 어떤 사람은 기대하지 않고, 마음을 거기에 매지 않고,
쌓아 둘 것을 바라지 않으며, ‘죽은 뒤 이것을 누리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베푼다.
다만 ‘베풂은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베푼다. …”
Idha pana, sāriputta, ekacco na heva kho sāpekho dānaṁ deti, na patibaddhacitto dānaṁ deti, na sannidhipekho dānaṁ deti, na ‘imaṁ pecca paribhuñjissāmī’ti dānaṁ deti; api ca kho ‘sāhu dānan’ti dānaṁ deti …pe….
앙굿따라 니까야AN 7.52 다나마합팔라 숫따 (큰 결실을 맺는 베풂)
배경
두 번째 동기는 첫 동기의 네 요소를 모두 부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마음을 준 것에 묶지 않고, 저장한 몫을 바라지 않으며, 죽은 뒤 자신이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베풂은 좋은 것이다’라는 판단으로 줍니다. 경은 이렇게 일곱 동기를 같은 틀에서 비교합니다.
묵상
보답 때문이 아니라 “주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배웠기에 준 경험이 있나요? 그 판단은 기대보다 한 걸음 놓여 있지만 여전히 하나의 이유예요. 지금 그 이유를 높이거나 낮추지 말고 어떤 마음인지 살펴보세요.
조상 대대로 이어 온 관습이라는 셋째 동기와 자신은 요리하지만 상대는 못 한다는 넷째 동기를 차례로 제시합니다.
“‘베풂은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예전에 주고 행했으니, 내가 이 오랜 가문의 전통을 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베푼다. …
그렇게 가문의 전통 때문에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요리하지만 이들은 요리하지 못한다. 요리하는 내가 요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베푼다. …”
Napi ‘sāhu dānan’ti dānaṁ deti; api ca kho ‘dinnapubbaṁ katapubbaṁ pitupitāmahehi na arahāmi porāṇaṁ kulavaṁsaṁ hāpetun’ti dānaṁ deti …pe…. Napi ‘dinnapubbaṁ katapubbaṁ pitupitāmahehi na arahāmi porāṇaṁ kulavaṁsaṁ hāpetun’ti dānaṁ deti; api ca kho ‘ahaṁ pacāmi, ime na pacanti, nārahāmi pacanto apacantānaṁ dānaṁ adātun’ti dānaṁ deti …pe….
앙굿따라 니까야AN 7.52 다나마합팔라 숫따 (큰 결실을 맺는 베풂)
배경
셋째와 넷째 동기는 앞의 이유를 각각 부정한 뒤 새 이유를 세웁니다. 셋째 동기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어 온 오래된 가문의 전통을 쇠퇴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다음에는 그 전통조차 동기가 아니며, 자신은 음식을 마련할 수 있지만 상대는 그러지 못한다는 차이를 보고 주지 않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경은 전통의 계승과 생활 조건의 형평을 서로 다른 동기로 세어 지나갑니다.
묵상
나눔을 이어 오게 한 힘이 집안의 관습이었던 적이 있나요, 내가 가진 것과 상대가 갖지 못한 것의 차이였던 적이 있나요? 두 이유를 한데 섞지 않고 각각 바라보면 마음의 결이 어떻게 다르게 보이나요?
옛 성현을 본뜨는 이유를 내려놓고, 주는 동안 마음이 맑아지고 만족과 기쁨이 생기기 때문에 베푸는 여섯째 동기입니다.
“앗타까·와마까·와마데와·웻사밋따·야마닷기·앙기라사·바라드와자·와셋타·깟사빠·바구 같은 옛 성현들이 큰 제사를 행했듯이
‘나도 베풀고 나누리라’고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베풀면 내 마음이 맑아지고 만족과 기쁨이 생긴다’고 생각하여 베푼다. …”
Napi ‘yathā tesaṁ pubbakānaṁ isīnaṁ tāni mahāyaññāni ahesuṁ, seyyathidaṁ— aṭṭhakassa vāmakassa vāmadevassa vessāmittassa yamadaggino aṅgīrasassa bhāradvājassa vāseṭṭhassa kassapassa bhaguno, evaṁ me ayaṁ dānasaṁvibhāgo bhavissatī’ti dānaṁ deti; api ca kho ‘imaṁ me dānaṁ dadato cittaṁ pasīdati, attamanatā somanassaṁ upajāyatī’ti dānaṁ deti …pe….
앙굿따라 니까야AN 7.52 다나마합팔라 숫따 (큰 결실을 맺는 베풂)
배경
여섯째 동기는 앞의 열 성현과 큰 제사를 그대로 되풀이한 뒤 그것이 자신의 이유는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새 이유는 베푸는 바로 그때 마음이 맑아지고 만족과 기쁨이 생긴다는 경험입니다. 외부의 보답이나 관습과 본보기를 넘어 주는 행위가 현재 마음에 주는 좋은 느낌을 향하지만, 경은 이 기쁨도 마지막 동기와 구별합니다. 베풂의 즐거움은 인정되지만 아직 주는 까닭으로 붙들려 있습니다.
묵상
나눌 때 마음이 맑아지고 기뻐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그 기쁨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다시 그 느낌을 얻으려고 주는 것은 어디에서 갈릴까요? 답을 정하지 말고 두 가능성을 나란히 놓아 보세요.
기분이 좋아지는 것까지 동기로 삼지 않고 보시 자체를 마음의 장식과 자산으로 삼는 마지막 동기를 문답으로 확인합니다.
“‘이렇게 베풀면 내 마음이 맑아지고 만족과 기쁨이 생긴다’고 생각해서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마음의 장식이요 마음의 자산으로서 베푼다.
그는 수행자나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에게 음식·마실 것·옷·탈것·화환·향·바르는 것·침구·거처·등불을 준다.
사리뿟따여, 어떤 사람이 이런 베풂을 하겠는가?”
“그렇습니다, 부처님.”
Napi ‘imaṁ me dānaṁ dadato cittaṁ pasīdati, attamanatā somanassaṁ upajāyatī’ti dānaṁ deti; api ca kho cittālaṅkāracittaparikkhāraṁ dānaṁ deti. So taṁ dānaṁ deti samaṇassa vā brāhmaṇassa vā annaṁ pānaṁ vatthaṁ yānaṁ mālāgandhavilepanaṁ seyyāvasathapadīpeyyaṁ. Taṁ kiṁ maññasi, sāriputta, dadeyya idhekacco evarūpaṁ dānan”ti? “Evaṁ, bhante”.
앙굿따라 니까야AN 7.52 다나마합팔라 숫따 (큰 결실을 맺는 베풂)
배경
마지막 사람은 베풀 때 생기는 맑음·만족·기쁨조차 주는 이유로 삼지 않습니다.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장식’이자 마음을 갖추고 받쳐 주는 ‘자산’으로서 베풉니다. 베풂은 마음을 다듬고 갖추는 실천 자체가 됩니다. 이어 첫 동기 때와 똑같은 수행자·브라흐마나와 아홉 베풂 물품이 다시 온전히 제시되고, 부처님의 질문과 사리뿟따의 긍정도 반복됩니다. 물건과 받는 이는 같아도 베풂을 놓는 마음의 자리가 달라졌음이 선명해집니다.
묵상
보답이나 좋은 기분을 바라지 않고 나눈 적이 있나요? 그런 나눔이 마음을 다듬는 실천 자체가 되는 순간을 느껴 본 적이 있나요? “마음의 장식”과 “마음의 자산” 가운데 어느 표현이 더 와닿는지, 그 까닭을 천천히 살펴보세요.
“사리뿟따여, 그 사람은 기대하며 베풀지 않고,
마음을 거기에 매어 베풀지 않으며,
쌓아 둘 것을 바라며 베풀지 않고,
‘죽은 뒤 이것을 누리리라’고 생각하여 베풀지 않는다.”
“Tatra, sāriputta, yvāyaṁ na heva sāpekho dānaṁ deti; na patibaddhacitto dānaṁ deti; na sannidhipekho dānaṁ deti; na ‘imaṁ pecca paribhuñjissāmī’ti dānaṁ deti;
앙굿따라 니까야AN 7.52 다나마합팔라 숫따 (큰 결실을 맺는 베풂)
배경
부처님은 마지막 베푸는 이의 동기를 결과와 곧바로 연결하지 않고, 앞서 지나온 이유들을 처음부터 하나씩 다시 점검합니다. 먼저 기대·매임·저장이라는 세 태도를 하나씩 따로 부정합니다. 이어 ‘죽은 뒤 이것을 누리리라’는 구체적인 기대도 따로 부정합니다. 기대하지 않음, 마음을 매지 않음, 쌓아 두지 않음, 다음의 몫을 바라지 않음은 서로 다른 모습의 기대입니다. 마음의 장식으로 주는 베풂은 미래의 자기 몫을 준비하는 행위와 분명히 갈립니다.
묵상
기대하지 않음, 마음을 매지 않음, 쌓아 두려 하지 않음, 다음의 내 몫을 바라지 않음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요? 네 가지 가운데 지금 가장 이해하기 어렵거나 가장 선명한 하나만 골라 보세요.
베풂이 좋다는 판단, 가문의 관습, 자신과 상대의 음식 형편이라는 세 이유가 마지막 동기는 아니라고 밝힙니다.
“‘베풂은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베풀지도 않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예전에 주고 행했으니 내가 오랜 가문의 전통을 끊는 것은 옳지 않다’고 베풀지도 않으며,
‘나는 요리하지만 이들은 요리하지 못하니, 요리하는 내가 요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베풀지도 않는다.”
napi ‘sāhu dānan’ti dānaṁ deti; napi ‘dinnapubbaṁ katapubbaṁ pitupitāmahehi na arahāmi porāṇaṁ kulavaṁsaṁ hāpetun’ti dānaṁ deti; napi ‘ahaṁ pacāmi, ime na pacanti, nārahāmi pacanto apacantānaṁ dānaṁ adātun’ti dānaṁ deti;
앙굿따라 니까야AN 7.52 다나마합팔라 숫따 (큰 결실을 맺는 베풂)
배경
첫 네 기대를 부정한 뒤, 부처님은 두 번째부터 네 번째 동기도 하나씩 제외합니다. ‘베풂은 좋은 것’이라는 도덕적 판단,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어 온 오랜 가문의 관습, 그리고 자신은 요리하지만 상대는 그러지 못한다는 생활 조건의 차이입니다. 세 이유는 모두 베풂을 실제로 일으킬 수 있고 앞에서 각각 한 단계로 인정되었지만, 마지막 베푸는 이의 직접적인 동기는 아닙니다. 경은 좋은 이유들을 나쁜 것으로 몰아내지 않으면서도, 관습이나 해야 한다는 생각, 비교에서 나온 베풂과 마음 자체를 갖추는 베풂을 구별합니다.
묵상
좋은 일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해 왔기 때문에, 내가 더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는 마음은 각각 어떤 힘을 지니나요? 세 이유를 부정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서로 다른 출발점으로 구별해 보세요.
옛 성현을 본받는 동기와 베풂의 기쁨을 마지막으로 부정하고, 마음의 장식과 자산이라는 동기만을 확정합니다.
“옛 성현 앗타까·와마까·와마데와·웻사밋따·야마닷기·앙기라사·바라드와자·와셋타·깟사빠·바구의 큰 제사를 본떠
‘나도 이와 같이 베풀고 나누리라’고 주지도 않고,
‘이 베풂을 하면 내 마음이 맑아지고 만족과 기쁨이 생긴다’고 주지도 않습니다.
다만 마음의 장식이요 마음의 자산으로서 베풉니다.”
napi ‘yathā tesaṁ pubbakānaṁ isīnaṁ tāni mahāyaññāni ahesuṁ, seyyathidaṁ— aṭṭhakassa vāmakassa vāmadevassa vessāmittassa yamadaggino aṅgīrasassa bhāradvājassa vāseṭṭhassa kassapassa bhaguno, evaṁ me ayaṁ dānasaṁvibhāgo bhavissatī’ti dānaṁ deti; napi ‘imaṁ me dānaṁ dadato cittaṁ pasīdati, attamanatā somanassaṁ upajāyatī’ti dānaṁ deti; api ca kho cittālaṅkāracittaparikkhāraṁ dānaṁ deti.
앙굿따라 니까야AN 7.52 다나마합팔라 숫따 (큰 결실을 맺는 베풂)
배경
마지막 점검은 다섯째와 여섯째 동기를 부정하고 일곱째를 긍정합니다. 열 명의 옛 성현과 큰 제사를 빠짐없이 다시 말해 본보기의 힘을 제외하고, 베풀 때 생기는 마음의 맑음·만족·기쁨도 제외합니다. 그런 뒤 ‘다만’이라는 말로 마음의 장식과 마음의 자산이라는 이유만 남깁니다. 앞선 여섯 가지 이유가 모두 빠지고 마지막 하나만 남습니다. 마음의 장식과 자산은 경이 큰 결실로 이끄는 베풂의 핵심 조건으로 제시됩니다.
묵상
훌륭한 본보기를 따르는 마음과 나눌 때의 기쁨까지 이유에서 놓는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갖추는 일 자체”라는 방향을 성취 과제로 삼지 말고, 문장이 가리키는 차이만 느껴 보세요.
일곱째 동기의 결과는 첫째 동기의 결과와 같은 문장 뼈대를 사용하면서 두 곳이 달라집니다. 태어나는 곳은 사대왕천이 아니라 브라흐마 무리이며, 행위·위력·영광·지배력이 다한 뒤 ‘돌아오는 이’가 아니라 ‘돌아오지 않는 이’가 됩니다. 마지막 구절도 ‘이 존재 상태로 다시 오지 않는다’고 거듭 확인합니다. 두 결과 모두 생겨난 공덕의 소진을 말하지만, 하나는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고 다른 하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끝납니다. 경이 말한 크고 지속적인 결실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묵상
첫 결과의 “다시 돌아온다”와 여기의 “다시 오지 않는다”를 나란히 읽으면 무엇이 가장 크게 달라 보이나요? 세계관을 당장 받아들이거나 판단할 필요 없이, 경이 두 결말을 어떻게 대비하는지만 살펴보세요.
마지막 두 문장은 사리뿟따가 처음 물었던 표현을 거의 그대로 되돌려 줍니다. 첫 여섯 동기와 돌아옴의 결과가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없는’ 쪽의 원인과 조건을 보여 주고, 마음의 장식과 자산으로 하는 베풂과 돌아오지 않음의 결과가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는’ 쪽을 보여 줍니다. 두 경우에 준 것은 여전히 똑같은 베풂입니다. 베풀 때 마음이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이유로 삼는지에 따라 같은 행위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묵상
경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니 “똑같은 베풂”이라는 말이 이제 어떻게 들리나요? 줄 물건의 크기를 바꾸기 전에 주는 마음의 이유를 살핀다면, 오늘의 작은 나눔에서 새롭게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