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 네 깊은 집중 각각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한다고 선언합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첫째 깊은 집중(자나)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한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둘째 깊은 집중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한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셋째 깊은 집중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한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넷째 깊은 집중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한다.”
경의 첫 목록은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첫째 깊은 집중부터 평온과 알아차림이 맑은 넷째 깊은 집중까지를 차례로 듭니다. 네 문장마다 ‘기대어’와 ‘흘러드는 것이 다함’이라는 말이 되풀이됩니다. 깊은 집중에 드는 것 자체를 곧 흘러드는 것이 다함이라고 같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깊은 집중에 기대어 사라짐을 말한다고 밝힌 표현입니다. 뒤에서는 첫째와 넷째 깊은 집중을 자세히 풀어, 깊은 집중 안에서 경험의 구성 요소를 여러 관점으로 살핀 뒤 마음을 불사의 요소로 향하게 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네 깊은 집중은 그 관찰이 가능한 첫 묶음입니다.
묵상
네 깊은 집중 모두가 흘러드는 것이 다함에 “기대는 자리”로 제시된 점이 어떻게 들리나요? 어떤 상태에 이르렀는지 판단하기보다, 고요함과 자유를 같은 것으로 여겨 온 적이 있는지 차분히 살펴보세요.
부처님께서 무한 공간부터 비상비비상의 영역과 인식·느낌의 소멸까지 다섯 성취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합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무한 공간의 영역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한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무한 의식의 영역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한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한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인식이라고도 인식 아님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영역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한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인식과 느낌이 멎는 것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한다.”
둘째 목록은 물질을 넘어서는 네 영역과 인식과 느낌이 멎는 상태를 잇습니다. 공간이 무한하다는 무한 공간의 영역, 의식이 무한하다는 무한 의식의 영역, 아무것도 없다는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 인식이라고도 인식 아님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영역, 마지막으로 인식과 느낌이 멎는 상태입니다. 첫 목록과 마찬가지로 다섯 문장 모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한다”는 틀을 보존합니다. 경의 본문은 이 가운데 무한 공간과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을 자세히 풀고, 마지막 두 성취는 들어갔다 나온 수행자가 설명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구별합니다.
묵상
경험이 점점 미세해지는 다섯 성취를 한 줄의 서열로만 보고 있지는 않나요? 더 고요하고 미세한 상태를 좋은 것이라 서둘러 붙잡으려는 마음이 있는지 차분히 살펴보세요.
첫째 깊은 집중에 기대어 소멸을 말한 뜻을 묻고, 깊은 집중의 다섯 구성 요소를 그대로 있지 않음부터 나라고 할 것이 없음까지 열한 관점으로 봅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첫 번째 깊은 집중(자나)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을 말한다’고 했다. 무엇을 두고 그렇게 말했는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 … 첫 번째 깊은 집중에 들어 머문다.
그곳의 물질·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에 속한 것들을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병·종기·화살·재앙·질환·타자·부서짐·빈 것·나라고 할 것이 없음으로 본다.”
부처님은 첫 선언을 그대로 되짚은 뒤 “무엇을 두고 말했는가?”라고 질문하고 곧바로 답합니다. 수행자는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 첫 번째 깊은 집중에 듭니다. 그곳에서 나타나는 경험을 물질·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의 다섯 갈래로 빠짐없이 들고, 이를 열한 관점으로 봅니다. 그 열한 관점은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병·종기·화살·재앙·질환·타자·부서짐·빈 것·나라고 할 것이 없음입니다. 깊은 집중의 즐거움을 붙잡는 대신 깊은 집중 안의 경험도 조건 지어지고 자기 것이 아니라는 통찰의 대상으로 삼는 단계입니다.
묵상
평온한 경험도 그대로 있지 않고 내 것이 아니라고 살피는 일이 그 평온을 망치는 것처럼 느껴지나요? 열한 관점을 억지로 적용하기보다, 편안한 상태도 변한다는 한 가지 사실부터 천천히 살펴보세요.
깊은 집중의 현상에서 마음을 돌려 고요히 꺼짐으로 향하면 흘러드는 것이 다하고, 다하지 못해도 돌아오지 않는 결실에 이른다고 밝힙니다.
“그는 그 현상들로부터 마음을 돌린다. 마음을 돌려 불사의 요소로 향한다.
‘이것은 평온하고 뛰어나다. 곧 모든 지어진 것의 고요, 모든 소유의 놓아 버림,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의 다함, 빛바램, 사라짐, 고요히 꺼짐(닙바나)이다.’
그곳에 굳게 서서 흘러드는 것의 다함에 이른다.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수행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으로 다섯 낮은 족쇄가 다해 그곳에 저절로 태어나 완전히 꺼져 고요해지며,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열한 관점으로 본 다음에는 그 현상들에서 마음을 돌립니다. 비어 있는 상태로 멈추지 않고 불사의 요소로 마음을 향하며, 그것을 모든 지어진 것의 고요·모든 소유의 놓아 버림·갈망의 다함·빛바램·사라짐·고요히 꺼짐이라는 여섯 표현으로 알아봅니다. 첫 결실은 그 자리에 굳게 서서 흘러드는 것의 다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직 완전히 이르지 못한 경우도 함께 밝힙니다. 그 수행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을 조건으로 다섯 낮은 족쇄가 다하면 그곳에 저절로 태어나 완전히 꺼져 고요해지고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묵상
경험에서 마음을 돌리는 것과 경험을 밀어내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부처님이 마음을 비워 두지 않고 평온·놓아 버림·고요히 꺼짐의 방향으로 향하게 한 그 순서를 한 번 더 천천히 살펴보세요.
활쏘는 이가 과녁으로 연습해 정확해지는 비유를 들고, 첫째 깊은 집중의 경험을 다시 열한 관점으로 살핍니다.
“수행자들이여, 활쏘는 사람이나 그 제자가 풀 인형이나 흙무더기를 과녁 삼아 연습하면, 훗날 멀리 쏘고 정확히 맞히며 큰 몸집을 꿰뚫는다.
그와 같이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 … 첫 번째 깊은 집중(자나)에 들어 머문다.
그곳의 물질·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에 속한 것들을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병·종기·화살·재앙·질환·타자·부서짐·빈 것·나라고 할 것이 없음으로 본다.”
Seyyathāpi, bhikkhave, issāso vā issāsantevāsī vā tiṇapurisarūpake vā mattikāpuñje vā yoggaṁ karitvā, so aparena samayena dūrepātī ca hoti akkhaṇavedhī ca mahato ca kāyassa padāletā; evamevaṁ kho, bhikkhave, bhikkhu vivicceva kāmehi …pe… paṭham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ṁ vedanāgataṁ saññāgataṁ saṅkhāragataṁ viññāṇagataṁ,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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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같은 첫 깊은 집중의 설명이 활쏘기 비유와 함께 반복됩니다. 활쏘는 사람이나 제자가 풀로 만든 사람 형상이나 흙무더기를 놓고 훈련하면, 시간이 지난 뒤 멀리 쏘고 정확히 맞히며 큰 몸집도 꿰뚫게 됩니다. 과녁 연습과 실제 솜씨 사이의 관계처럼, 수행자는 첫 깊은 집중에 들어 그 안의 다섯 경험 갈래를 열한 관점으로 거듭 봅니다. 비유의 초점은 깊은 집중이 꿰뚫어 보는 힘을 익히는 훈련의 토대라는 데 있습니다.
묵상
고요한 상태를 과녁 연습에 비유하면 깊은 집중의 역할이 어떻게 달라 보이나요? 멀리 쏘는 결과를 서둘러 바라기보다, 지금 반복해 볼 수 있는 정확한 관찰 하나를 잠시 차분히 생각해 보세요.
활쏘기 비유 뒤에도 현상에서 마음을 돌리고 고요히 꺼짐으로 향해 흘러드는 것이 다함이나 돌아오지 않는 결실에 이르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는 그 첫 깊은 집중(자나)의 현상들로부터 마음을 돌린다.
그 첫 깊은 집중의 현상들에서 마음을 돌려 불사의 요소로 향한다.
…
그곳에 굳게 서서 흘러드는 것의 다함에 이른다.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수행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으로 다섯 낮은 족쇄가 다해 그곳에 저절로 태어나 완전히 꺼져 고요해지며,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So tehi dhammehi cittaṁ paṭivāpeti. So tehi dhammehi cittaṁ paṭivāpetvā amatāya dhātuyā cittaṁ upasaṁharati: … So tattha ṭhito āsavānaṁ khayaṁ pāpuṇāti. No ce āsavānaṁ khayaṁ pāpuṇāti, teneva dhammarāgena tāya dhammanandiyā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rikkhayā opapātiko hoti tattha parinibbāyī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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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활쏘기 비유가 더해져도 통찰 뒤의 순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첫 깊은 집중의 현상들을 열한 관점으로 본 수행자는 그 현상에서 마음을 돌리고 불사의 요소로 향합니다. 가운데 줄임표는 앞에서 온전히 읽은 모든 지어진 것의 고요·모든 소유의 놓아 버림·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의 다함·빛바램·사라짐·고요히 꺼짐(닙바나)이라는 여섯 표현만 줄입니다. 그 뒤의 두 결실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바로 흘러드는 것의 다함에 이르거나, 그렇지 못하면 그 수행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으로 다섯 낮은 족쇄가 다해 저절로 태어난 곳에서 완전히 꺼져 고요해지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되풀이되는 설명은 활쏘기 비유가 이 모든 풀려남의 과정과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묵상
같은 풀려남 과정이 비유 뒤에 다시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평온한 상태에 머물다가도 그 평온에서마저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오늘 내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차분히 살펴보세요.
부처님은 첫 깊은 집중을 두 차례 설명한 뒤, 처음의 말을 다시 들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 말합니다. 첫 깊은 집중에 들어 경험을 열한 관점으로 보고, 마음을 돌려 불사를 향하며, 흘러드는 것의 다함 또는 돌아오지 않는 결실에 이르는 과정 전체를 ‘기대어’라는 말이 가리킵니다. 둘째와 셋째 깊은 집중에서도 같은 관찰과 마음의 전환이 똑같이 되풀이됩니다.
묵상
둘째와 셋째 깊은 집중의 설명이 짧게 줄어들면 무엇이 그대로 이어진다고 느껴지나요? 깊은 집중의 이름만 바뀐다고 보지 말고, 앞에서 다졌던 관찰과 마음의 방향이 거기에도 그대로 있는지 살펴보세요.
넷째 깊은 집중에 기대어 소멸을 말한 뜻을 묻고, 평온으로 맑은 깊은 집중과 그 다섯 경험 갈래를 열한 관점으로 봅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네 번째 깊은 집중(자나)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의 다함을 말한다’고 했다. 무엇을 두고 그렇게 말했는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행복과 괴로움을 버리고 앞서 기쁨과 슬픔이 사라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정으로 알아차림이 맑은 네 번째 깊은 집중에 들어 머문다.
그곳의 물질·느낌·인식·형성·의식에 속한 것들을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병·종기·화살·재앙·질환·타자·부서짐·공·나라고 할 것이 없음으로 본다.”
네 번째 깊은 집중의 설명도 선언을 되짚고 그 근거를 묻는 문답으로 시작합니다. 수행자는 행복과 괴로움을 버리고, 그보다 앞서 기쁨과 슬픔이 사라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상태에 듭니다. 이 깊은 집중의 특징은 평온으로 인한 알아차림의 맑음입니다. 그러나 평온하고 맑은 경험도 관찰 밖에 두지 않습니다. 그곳의 물질·느낌·인식·형성·의식에 속한 것을 첫 깊은 집중과 똑같은 열한 관점으로 봅니다. 더 미세한 깊은 집중일수록 영원하거나 자아에 가까워진다고 보지 않고, 그대로 있지 않음에서 나라고 할 것이 없음까지 같은 통찰을 그대로 적용합니다.
묵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온을 만나면 오래 붙잡고 싶어지나요? 평온으로 알아차림이 맑아진 바로 그 자리에서 평온 자체도 변하고 내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넷째 깊은 집중의 현상에서 마음을 돌려 불사의 요소로 향하고 흘러드는 것이 다함 또는 돌아오지 않는 결실을 밝힙니다.
“그는 그 네 번째 깊은 집중(자나)의 현상들로부터 마음을 돌린다.
…
그곳에 굳게 서서 흘러드는 것의 다함에 이른다.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수행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으로 다섯 낮은 족쇄가 다해 그곳에 저절로 태어나 완전히 꺼져 고요해지며,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So tehi dhammehi cittaṁ paṭivāpeti. … So tattha ṭhito āsavānaṁ khayaṁ pāpuṇāti. No ce āsavānaṁ khayaṁ pāpuṇāti, teneva dhammarāgena tāya dhammanandiyā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rikkhayā opapātiko hoti tattha parinibbāyī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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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깊은 집중의 경험을 열한 관점으로 본 뒤에도 첫 깊은 집중과 같은 전환이 이어집니다. 수행자가 그 현상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에는, 불사의 요소로 마음을 향하고 이를 모든 지어진 것의 고요·모든 소유의 놓아 버림·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의 다함·빛바램·사라짐·고요히 꺼짐(닙바나)으로 보는 대목이 같은 말로 이어집니다. 그 뒤의 두 결실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 자리에 굳게 서면 흘러드는 것의 다함에 이르고, 아직 이르지 못해도 그 수행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으로 다섯 낮은 족쇄가 다하면 저절로 태어난 곳에서 완전히 꺼져 고요해집니다. 네 번째 깊은 집중의 평온도 같은 돌이킴과 방향 전환을 거치는 토대입니다.
묵상
아주 평온한 경험에서도 마음을 돌려야 한다는 말이 아쉽게 느껴지나요? 경험의 고요와 모든 지어진 것의 고요가 같은지, 부처님이 불사를 별도의 방향으로 가리킨 까닭을 살펴보세요.
활쏘기 연습의 비유와 공식 생략으로 넷째 깊은 집중의 관찰과 결실을 되짚고 처음의 선언을 확정합니다.
“수행자들이여, 활쏘는 사람이나 그 제자가 풀 인형이나 흙무더기를 과녁 삼아 연습하면, 훗날 멀리 쏘고 정확히 맞히며 큰 몸집을 꿰뚫는다.
그와 같이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행복을 버려 … 네 번째 깊은 집중(자나)에 들어 머문다.
그곳의 물질·느낌에 속한 것을 …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네 번째 깊은 집중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의 다함을 말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Seyyathāpi, bhikkhave, issāso vā issāsantevāsī vā tiṇapurisarūpake vā mattikāpuñje vā yoggaṁ karitvā, so aparena samayena dūrepātī ca hoti akkhaṇavedhī ca mahato ca kāyassa padāletā; evamevaṁ kho, bhikkhave,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pe…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ṁ vedanāgataṁ …pe…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Catutthampāhaṁ, bhikkhave, jhānaṁ nissāya āsavānaṁ khayaṁ vadāmī’ti, iti yaṁ taṁ vuttaṁ, idametaṁ paṭicca vutt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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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네 번째 깊은 집중에도 활쏘기 비유가 붙습니다. 과녁을 두고 연습한 사람이 멀리 쏘고 정확히 맞히며 큰 몸집을 꿰뚫듯, 수행자는 네 번째 깊은 집중에 들어 관찰을 익힙니다. 짧게 줄인 대목에는 행복을 버린 뒤 네 번째 깊은 집중에 드는 나머지 설명과, 물질·느낌에 이어 인식·형성·의식까지 같은 열한 관점으로 보고 마음을 돌려 불사를 향하는 과정, 그리고 흘러드는 것이 다하는 첫 결실과 돌아오지 않는 이가 되는 둘째 결실까지 들어 있습니다.
묵상
상세한 설명 뒤에 생략된 대목을 만나면 결과만 남은 것처럼 읽히나요? 앞에서 온전히 펼친 관찰과 마음의 전환을 함께 되살려, 활쏘기 연습이 무엇을 익히는 비유인지 다시 살펴보세요.
무한 공간의 영역에 기대어 소멸을 말한 뜻을 묻고, 그곳의 느낌·인식·지어내는 작용·의식을 열한 관점으로 봅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무한 공간의 영역이라는 깊은 집중(자나)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의 다함을 말한다’고 했다. 무엇을 두고 그렇게 말했는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물질 인식을 완전히 넘고 저항 인식이 사라지며 다양성 인식에 주의하지 않아, ‘공간은 무한하다’며 무한 공간의 영역에 들어 머문다.
그곳의 느낌·인식·형성·의식에 속한 것들을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병·종기·화살·재앙·질환·타자·부서짐·공·나라고 할 것이 없음으로 본다.”
형체 없는 세계의 첫 성취인 무한 공간의 영역도 먼저 말하고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자세히 설명됩니다. 수행자는 모든 물질 인식을 넘어가고 저항 인식이 사라지며 다양성 인식에 주의하지 않습니다. 이어 “공간은 무한하다”고 알아 무한 공간의 영역에 들어 머뭅니다. 물질에 속한 것은 목록에서 빠지지만 느낌·인식·형성·의식의 네 경험 갈래는 남습니다. 수행자는 이 네 갈래를 첫 깊은 집중과 같은 열한 관점으로 봅니다. 물질을 넘어선 미세한 성취도 여전히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공·나라고 할 것이 없음으로 꿰뚫어 볼 경험임을 밝힙니다.
묵상
물질 인식을 넘어 무한한 공간을 경험하면 더 이상 살필 것이 없다고 느껴질까요? 그곳에도 느낌·인식·형성·의식이 남는다는 구분을 읽으며, 미세함과 풀려남을 같게 보고 있지는 않은지 함께 살펴보세요.
무한 공간의 영역에 속한 현상에서 마음을 돌리고 불사로 향해 흘러드는 것이 다함 또는 돌아오지 않는 결실에 이릅니다.
“그는 그 무한 공간의 영역에 속한 현상들로부터 마음을 돌린다.
그 무한 공간의 현상들에서 마음을 돌려 불사의 요소로 향한다.
‘이것은 평온하고 뛰어나다. 곧 모든 지어진 것의 고요, 모든 소유의 놓아 버림,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의 다함, 빛바램, 사라짐, 고요히 꺼짐(닙바나)이다.’
…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으로 다섯 낮은 족쇄가 다해 그곳에 저절로 태어나 완전히 꺼져 고요해지며,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무한 공간의 영역에 속한 네 경험 갈래를 열한 관점으로 본 뒤에는 네 깊은 집중에서와 같은 풀려남의 전환이 이어집니다. 수행자는 그 현상들에서 마음을 돌려 불사의 요소로 향하고, 불사를 모든 지어진 것의 고요·모든 소유의 놓아 버림·갈망의 다함·빛바램·사라짐·고요히 꺼짐으로 알아봅니다. 아직 완전히 이르지 못해도 그 가르침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으로 다섯 낮은 족쇄가 다하면 그곳에 저절로 태어나 완전히 꺼져 고요해지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묵상
무한한 공간이라는 넓은 경험에서도 다시 마음을 돌려야 한다는 점이 어떻게 느껴지나요? 넓음에 머무는 것과 모든 소유를 놓아 고요히 꺼짐으로 향하는 것의 차이를 함께 다시 차분히 살펴보세요.
활쏘기 비유와 공식 생략으로 무한 공간의 관찰·결실을 반복하고, 그 영역에 기대어 소멸을 말한 뜻을 확정합니다.
“수행자들이여, 궁수나 제자가 풀 인형이나 흙무더기를 과녁 삼아 연습하면, 훗날 멀리 쏘고 명중하며 큰 몸집을 꿰뚫는다.
그와 같이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모든 물질 인식을 넘고 저항 인식이 사라지며 다양성 인식에 주의하지 않아, ‘공간은 무한하다’며 무한 공간 영역에 들어 머문다.
그곳의 느낌·인식에 속한 것을 …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무한 공간 영역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의 다함을 말한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무한 공간의 설명도 활쏘기 비유로 한 번 더 반복됩니다. 풀 인형이나 흙무더기를 과녁 삼아 익힌 솜씨가 멀리 쏘고 정확히 맞혀 큰 것을 꿰뚫는 힘이 되듯, 수행자는 무한 공간의 영역에서 관찰을 익힙니다. 이어 무한 공간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의 다함을 말한 선언이 바로 이 전체 과정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넓은 공간의 성취보다 그것을 꿰뚫는 훈련이 비유의 중심입니다.
묵상
무한 공간의 성취를 활쏘기 연습대와 나란히 놓으면 무엇이 달라 보이나요? 특별한 경험을 소유하는 일보다 그 경험의 성품을 정확히 보고 놓는 힘이 강조되는지 다시 짚어 보세요.
무한 의식의 영역은 공식 생략한 뒤,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들어 그곳의 네 경험 갈래를 열한 관점으로 봅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무한 의식의 영역에 기대어 …
수행자들이여, ‘나는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의 다함을 말한다’고 했다. 무엇을 두고 그렇게 말했는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무한 의식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아무것도 없다’며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들어 머문다.
그곳의 느낌·인식·형성·의식에 속한 것들을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병·종기·화살·재앙·질환·타자·부서짐·공·나라고 할 것이 없음으로 본다.”
무한 의식의 영역에 관한 설명은 앞서와 같은 내용이라 짧게 지나가고, 곧바로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을 풉니다. 부처님은 다시 처음 선언을 인용하고 무엇을 두고 한 말인지 묻습니다. 수행자는 무한 의식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아무것도 없다”고 알아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들어 머뭅니다. 그곳에도 느낌·인식·형성·의식에 속한 네 갈래가 남으며, 이를 그대로 있지 않음에서 나라고 할 것이 없음까지 열한 관점으로 봅니다.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성취의 이름을 아무 경험도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지 않게 하는 구분입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은 없지만 관찰할 조건 지어진 경험은 남아 있습니다.
묵상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모든 경험의 완전한 사라짐처럼 들리나요? 그 영역에도 네 경험 갈래가 남는다는 설명을 읽으며, 성취의 이름과 실제 관찰 대상을 서두르지 말고 구별해 보세요.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속한 현상에서 마음을 돌리고 불사로 향해 흘러드는 것이 다함 또는 돌아오지 않는 결실에 이릅니다.
“그는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속한 현상들로부터 마음을 돌린다.
…
‘이것은 평온하고 뛰어나다. 곧 모든 지어진 것의 고요, 모든 소유의 놓아 버림,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의 다함, 빛바램, 멎음, 고요히 꺼짐(닙바나)이다.’
…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수행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으로 다섯 낮은 족쇄가 다해 그곳에 저절로 태어나 완전히 꺼져 고요해지며,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서도 열한 관점의 관찰은 현상에서 마음을 돌리는 단계로 이어집니다. 마음을 돌린 수행자는 불사의 요소로 향해, 불사를 평온하고 뛰어난 모든 지어진 것의 고요·모든 소유의 놓아 버림·갈망의 다함·빛바램·사라짐·고요히 꺼짐으로 봅니다. 이르지 못할 경우에도 그 수행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으로 다섯 낮은 족쇄가 다해 저절로 태어난 곳에서 완전히 꺼져 고요해지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음과 모든 소유의 놓아 버림은 마음의 전환으로 구별됩니다.
묵상
아무것도 없음의 경험과 모든 소유의 놓아 버림은 같은 상태처럼 보이나요? 부처님이 아무것도 없음에서 다시 마음을 돌려 놓아 버림으로 향하게 하는 문장의 흐름을 한 문장씩 따라가 보세요.
활쏘는 이의 연습과 숙련을 다시 비유하고, 무한 의식을 넘어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드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수행자들이여, 활쏘는 사람이나 그 제자가 풀 인형이나 흙무더기를 과녁 삼아 연습하면, 훗날 멀리 쏘고 정확히 맞히며 큰 몸집을 꿰뚫는다.
그와 같이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무한 의식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아무것도 없다’며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들어 머문다.”
Seyyathāpi, bhikkhave, issāso vā issāsantevāsī vā tiṇapurisarūpake vā mattikāpuñje vā yoggaṁ karitvā, so aparena samayena dūrepātī ca hoti akkhaṇavedhī ca mahato ca kāyassa padāletā; evamevaṁ kho, bhikkhave, bhikkhu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ṁ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앙굿따라 니까야AN 9.36 자나 숫따 (몰입)
배경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도 네 번째 활쏘기 비유가 붙습니다. 활쏘는 사람이나 제자는 풀 인형이나 흙무더기를 과녁으로 삼아 반복해서 연습하고, 뒤에는 멀리 쏘며 정확히 맞히고 큰 몸집도 꿰뚫습니다. 그와 같이 수행자는 무한 의식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아무것도 없다”고 알아 그 영역에 들어 머뭅니다. 비유와 성취에 드는 설명이 곧바로 이어져, 이 성취가 훈련의 자리임을 보여 줍니다. 다음 대목에서 그곳의 경험을 열한 관점으로 보고 불사를 향하듯, 성취에 드는 일은 정확한 관찰을 되풀이할 과녁입니다.
묵상
같은 활쏘기 비유가 네 번째 나올 때 반복이 지루하게 느껴지나요? 깊은 집중과 형체 없는 영역이 달라도 성취를 과녁 삼아 꿰뚫는 훈련은 같다는 점을 함께 짚어 보세요.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남은 네 경험 갈래를 열한 관점으로 보고, 그 현상에서 마음을 돌려 불사의 요소로 향합니다.
“그곳의 느낌·인식·형성·의식에 속한 것들을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병·종기·화살·재앙·질환·타자·부서짐·공·나라고 할 것이 없음으로 본다.
그는 그 현상들로부터 마음을 돌린다. 마음을 돌려 불사의 요소로 향한다.
‘이것은 평온하고 뛰어나다. 곧 모든 지어진 것의 고요, 모든 소유의 놓아 버림,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의 다함, 빛바램, 멎음, 고요히 꺼짐(닙바나)이다.’”
비유 뒤의 반복에서는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남은 느낌·인식·형성·의식의 네 갈래를 열한 관점으로 보는 문장이 온전히 나옵니다. 그대로 있지 않음·괴로움·병·종기·화살·재앙·질환·타자·부서짐·공·나라고 할 것이 없음이라는 순서도 같습니다. 이어 그 현상들에서 마음을 돌려 불사의 요소로 향합니다. 불사는 평온하고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며, 모든 지어진 것의 고요·모든 소유의 놓아 버림·갈망의 다함·빛바램·사라짐·고요히 꺼짐이라는 여섯 표현으로 제시됩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에서 불사의 방향으로 실제로 넘어가는 대목이 바로 여기에 나옵니다.
묵상
열한 가지 관점이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이토록 미세한 경험에까지 적용된다는 점이 낯설게 느껴지나요? 그 경험마저 보고 마음을 돌리는 순서를 서두르지 말고 짚어 보세요.
불사를 향한 뒤 흘러드는 것이 다함과 돌아오지 않는 두 결실을 다시 밝히고, 아무것도 없음에 기대어 말한 뜻을 확정합니다.
“그곳에 굳게 서서 흘러드는 것의 다함에 이른다.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수행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으로 다섯 낮은 족쇄가 다해 그곳에 저절로 태어나 완전히 꺼져 고요해지며,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의 다함을 말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을 반복 설명한 마지막은 두 결실입니다. 불사의 요소로 마음을 향한 자가 그곳에 굳게 서면 흘러드는 것의 다함에 이릅니다. 아직 다함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수행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을 조건으로 다섯 낮은 족쇄가 다하면 저절로 태어난 곳에서 완전히 꺼져 고요해지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어 처음의 선언을 다시 들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기대어 흘러드는 것의 다함을 말한다는 표현은 관찰·돌이킴·불사를 향함·두 결실의 전체 과정을 뜻합니다.
묵상
첫 결실과 둘째 결실을 함께 제시한 데서 어떤 여지가 느껴지나요? 당장 완전한 다함에 이르지 못한 경우까지 말하면서도 다섯 낮은 족쇄의 다함을 놓치지 않은 점을 살펴보세요.
인식 있는 성취에서는 완전한 앎을 관통할 수 있고, 마지막 두 영역은 들어갔다 나온 숙련자가 설명해야 한다고 결론짓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인식이 있는 성취가 미치는 데까지 완전한 앎의 꿰뚫음이 미친다.
그리고 수행자들이여, 이 두 영역, 곧 인식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영역의 성취와 인식과 느낌이 멎는 성취에 관해서는, 수행자들이여, 성취에 능숙하고 성취에서 나옴에 능숙한 명상자들이 들어갔다 나온 뒤 올바르게 설명해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Iti kho, bhikkhave, yāvatā saññāsamāpatti tāvatā aññāpaṭivedho. Yāni ca kho imāni, bhikkhave, nissāya dve āyatanāni—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māpatti ca saññāvedayitanirodho ca, jhāyīhete, bhikkhave, samāpattikusalehi samāpattivuṭṭhānakusalehi samāpajjitvā vuṭṭhahitvā sammā akkhātabbānīti vadām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9.36 자나 숫따 (몰입)
배경
결론은 상세 설명이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서 멈춘 까닭을 구별합니다. 인식이 있는 성취가 미치는 데까지는 완전한 앎의 꿰뚫음이 미칩니다. 그러나 인식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영역의 성취와 인식과 느낌이 멎는 성취라는 마지막 두 영역은 같은 방식으로 그 안에서 관찰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성취에 드는 일과 그 성취에서 나오는 일에 능숙한 명상자가 실제로 들어갔다 나온 뒤 올바르게 설명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인식이 극도로 미세하거나 인식과 느낌이 멎은 성취를 개념만으로 단정하지 않고, 성취에 들고 나는 숙련에 근거해 말하도록 한 경계입니다.
묵상
마지막 두 영역을 앞의 성취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은 신중함이 어떻게 느껴지나요? 직접 들어갔다 나온 숙련을 요구한 말에서 경험과 추측의 경계를 다시 짚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