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 첫머리입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셋을 다루는 모음에 든 경답게, 부처님이 수행자들을 부르며 ‘세 가지’를 내놓고 곧바로 ‘어떤 세 가지인가’ 하고 묻습니다. 데와두따는 ‘신(데와)’과 ‘심부름하는 이(두따)’가 합쳐진 말이어서 ‘신들의 전령’으로 옮겼습니다. 경은 세 전령의 이름을 목록으로 먼저 대지 않습니다. 뒤에서 야마왕이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의 모습을 차례로 들며 ‘보지 못했는가’ 하고 물을 때 하나씩 드러납니다. 야마왕은 그 모습을 보고 ‘나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를 묻고, 끝 게송은 전령이 사람을 ‘일깨운다’고 말합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세 천사’라 부르는 널리 알려진 말은 이 경과 이어지지만, 그 문장 그대로는 경에 없습니다(경 밖의 층위). 같은 이야기를 다섯 전령으로 전하는 경이 맛지마 니까야 130경입니다(다른 경의 층위).
묵상
‘신들의 전령’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나요?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없는 대로 다음 카드들에서 경이 내놓는 답을 천천히 만나 봐도 괜찮아요. 지금 떠오른 모습 하나를 알아 두기만 해도 충분할까요? 급히 답을 찾지 않아도 돼요.
“수행자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이 몸으로 나쁜 짓을 하고, 말로 나쁜 짓을 하고, 마음으로 나쁜 짓을 한다.
그는 몸으로 나쁜 짓을 하고, 말로 나쁜 짓을 하고, 마음으로 나쁜 짓을 한 뒤, 몸이 무너져 죽은 다음 괴로운 곳, 나쁜 곳, 아래로 떨어지는 곳, 지옥에 다시 태어난다.”
세 전령을 묻기 전에 깔리는 설정입니다. 앞 카드의 ‘어떤 세 가지인가’에 대한 답은 바로 나오지 않고, 이야기는 한 사람이 죽은 뒤 맞는 일로 넘어갑니다. 몸, 말, 마음 세 가지로 나쁜 짓을 한 것이 원인이고, 지옥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결과입니다. ‘몸이 무너져 죽은 다음’은 이 삶이 끝난 뒤를 가리키는 정형구이고, 괴로운 곳, 나쁜 곳, 아래로 떨어지는 곳, 지옥은 나쁜 태어남을 겹쳐 부르다가 마지막 낱말 ‘지옥’에서 멈춥니다. 몸, 말, 마음은 뒤에서 야마왕이 묻는 ‘좋은 일을 하겠다’는 다짐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이 경은 나쁜 짓과 좋은 일을 같은 세 자리에 놓고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묵상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세 자리 가운데 요즘 내가 가장 자주 살피게 되는 곳은 어디인가요? 한 곳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의 답이어도 괜찮아요. 한 곳만 가만히 떠올려 보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어느 자리든 괜찮아요.
“수행자들이여, 지옥지기들이 그의 두 팔을 붙잡아 야마왕 앞에 데려다 보이며 말한다.
‘임금님, 이 사람은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고,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사마나)를 공경하지 않고,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을 공경하지 않고, 집안의 어른을 받들지 않았습니다.
임금님께서 이 사람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지옥에 다시 태어난 사람이 야마왕 앞에 서는 장면입니다. 지옥지기(니라야빨라)들은 그의 잘못으로 다섯 가지를 듭니다. 어머니, 아버지,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 브라흐마나를 공경하지 않은 것과 집안의 어른을 받들지 않은 것입니다. 앞 카드의 몸과 말과 마음의 나쁜 짓이 여기서는 부모와 어른, 수행하는 이를 대하는 태도로 드러납니다. 지옥지기들은 벌을 청하지만, 야마왕은 다음 카드에서 벌을 내리기 전에 먼저 묻기 시작합니다. ‘임금님’으로 옮긴 데와(deva)는 왕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야마는 인도 전승에서 죽은 이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알려진 존재입니다(경 밖의 층위).
묵상
지옥지기들의 고발을 읽으면 마음에 어떤 느낌이 먼저 올라오나요? 가족이나 어른과의 일이 아프게 떠오른다면 이 장면은 건너뛰어도 괜찮아요. 이 장면은 읽는 사람을 심판하는 자리가 아니에요.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그대로 다음 카드로 가도 될까요?
야마왕의 심문이 시작됩니다. 왕은 벌을 정하기 전에 ‘첫째 전령을 보았는가’부터 묻고, 경은 그 물음을 캐묻고, 따지고, 다그친다는 세 동사로 적습니다. 그는 보지 못했다고 답합니다. 다음 카드에서 왕이 전령의 모습을 그려 보이자 그는 ‘보았다’고 답하므로, 여기서의 ‘보지 못했다’는 그 광경을 자기에게 온 전령으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전령은 ‘사람들 사이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전령이 무엇인지는 다음 카드에서 사람들 사이의 흔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보는 것과 알아보는 것의 거리가 이 문답이 짚는 자리이며, 같은 틀이 둘째와 셋째 전령에서 되풀이됩니다.
묵상
‘보지 못했습니다’라는 답이 다음 카드에서 ‘보았습니다’로 바뀌어요. 살면서 눈앞에 있었는데 내 일로 느끼지 못하고 지나간 장면이 떠오르나요? 떠오르지 않는다면 없다고 두어도 괜찮을까요? 이 물음에 맞는 답은 따로 없으니 천천히 생각해도 돼요.
“수행자들이여, 야마왕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사람아, 그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든이나 아흔이나 백 살이 되어 늙은 여자나 남자를 보지 못했는가? 서까래처럼 굽고 휘어져 지팡이에 기대어 떨며 걷고, 앓고, 젊음이 지나가고, 이가 부러지고, 머리가 세고 성기고 벗어지고, 살갗이 주름지고, 몸에 검버섯이 핀 사람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보았습니다, 나리.’”
왕이 첫째 전령의 모습을 그려 보입니다. 여든이나 아흔이나 백 살이 된 여자나 남자가 등이 굽고, 지팡이에 기대어 떨며 걷고, 이와 머리와 살갗이 변한 모습입니다. 왕은 이것을 따로 ‘첫째 전령’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앞 카드의 ‘첫째 전령을 보았는가’에 이어 이 모습을 물으므로, 늙은 사람이 첫째 전령의 자리에 놓입니다. 이번에는 그가 ‘보았다’고 답합니다. 경은 이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것이라고 해, 늙음을 누구의 둘레에나 있는 일로 놓습니다. 다음 카드에서 왕은 이 광경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를 묻습니다.
묵상
‘여든이나 아흔이나 백 살’이라는 말을 읽으며 떠오른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이 나 자신이어도, 가까운 어른이어도, 이미 곁을 떠난 분이어도 괜찮아요. 마음이 무거워진다면 오늘은 이 카드에서 멈추고, 그 느낌을 그대로 두어도 될까요?
나도 늙기 마련이니 좋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는 물음과 방심했다는 대답입니다.
수행자들이여, 야마왕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사람아, 분별이 있고 나이도 든 그대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가?
‘나도 늙기 마련이고 늙음을 넘어서지 못했다. 자, 나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좋은 일을 하겠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 못했습니다, 나리. 방심(빠마다)했습니다, 나리.”
Tamenaṁ, bhikkhave, yamo rājā evamāha: ‘ambho, purisa, tassa te viññussa sato mahallakassa na etadahosi— ahampi khomhi jarādhammo jaraṁ anatīto, handāhaṁ kalyāṇaṁ karomi, kāyena vācāya manasā’ti? So evamāha: ‘nāsakkhissaṁ, bhante. Pamādassaṁ, bhante’ti.
앙굿따라 니까야AN 3.36 데와두따 숫따 (신들의 전령)
배경
물음의 중심이 나오는 카드입니다. 왕은 늙은 사람을 보았다는 대답에 이어, 그것을 보고 ‘나도 늙기 마련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를 묻습니다. 그 생각은 세 걸음입니다. ‘나도 늙기 마련이다’는 본 것을 자기에게 견주고, ‘늙음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자기도 예외가 아님을 알고, ‘좋은 일을 하겠다’는 그 앎을 몸과 말과 마음의 행동으로 잇습니다. 왕은 그가 ‘분별이 있고 나이도 든’ 사람이었다고 짚습니다. 그는 하지 못했다며 까닭을 방심(빠마다)이라고 답합니다. 방심은 해야 할 일을 마음에서 놓아 버리는 것을 가리키며, 이 경 전체를 이끄는 낱말입니다. 같은 문답이 병든 사람과 죽은 사람에서 되풀이됩니다.
묵상
‘나도 늙기 마련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보통 어떻게 하나요? 바로 눈을 돌리나요, 잠시 머물러 보나요? 어느 쪽이어도 그렇구나 하고 알아보는 정도면 괜찮을까요? 정답을 고를 필요는 없고, 지금 떠오른 모습 그대로면 충분해요. 천천히 떠올려도 돼요.
판결이 시작됩니다. 왕은 좋은 일을 하지 않은 까닭을 ‘방심했기 때문에’라고 밝혀 원인과 결과를 이어 놓습니다. 앞 카드에서 그가 스스로 댄 까닭을 왕이 그대로 받아 판결의 근거로 삼는 짜임입니다. 이어 ‘그들’이 방심한 사람에게 걸맞게 그를 다룰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문은 ‘그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며, 뒤에서 형벌을 집행하는 이들은 지옥지기들입니다. ‘이보게, 사람아’라는 부름이 원문대로 두 번 나옵니다. 이 경에서 방심은 늙은 사람을 보고도 그것을 좋은 일로 이어 가지 못한 것을 가리킵니다.
묵상
‘방심했다’는 말이 나를 향한 지적처럼 들리나요, 이야기 속 사람의 일로 들리나요? 어느 쪽으로 들리든 그 느낌을 오늘 마음에 남겨 두는 정도로 괜찮을까요? 나를 탓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면,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여덟 무리를 하나씩 들어 그 행위가 그들의 것이 아님을 밝히고, 열매는 행한 이가 겪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대의 이 나쁜 행위는 어머니가 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한 것이 아니고, 형제가 한 것이 아니고, 자매가 한 것이 아니고, 벗과 동료가 한 것이 아니고, 친척과 피붙이가 한 것이 아니고, 신들이 한 것이 아니고,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사마나)와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이 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대가 이 나쁜 행위를 했으니, 그 열매는 그대 자신이 겪을 것이다.’
Taṁ kho pana te etaṁ pāpakammaṁ neva mātarā kataṁ, na pitarā kataṁ, na bhātarā kataṁ, na bhaginiyā kataṁ, na mittāmaccehi kataṁ, na ñātisālohitehi kataṁ, na devatāhi kataṁ, na samaṇabrāhmaṇehi kataṁ; atha kho tayāvetaṁ pāpakammaṁ kataṁ, tvaññevetassa vipākaṁ paṭisaṁvedissas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3.36 데와두따 숫따 (신들의 전령)
배경
첫째 전령 문답의 판결이 끝나는 대목입니다. 왕은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벗과 동료, 친척과 피붙이, 신들,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와 브라흐마나까지 여덟 무리를 하나씩 들어 ‘그들이 한 것이 아니다’라고 가려냅니다. 그리고 그 나쁜 행위는 그가 했고 그 열매(위빠까)도 그가 겪는다고 말합니다. 행위와 그 열매가 한 사람 안에서 이어지며, 가까운 이들과 신들도 그 몫을 대신 지지 않는다는 판결입니다. 이 말은 나쁜 짓을 하고 좋은 일을 미룬 이의 행위를 두고 합니다. 사별이나 병을 겪은 일을 읽는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말로 쓰이지 않습니다. 같은 판결이 둘째와 셋째 전령에서 되풀이됩니다.
묵상
판결은 어머니부터 신들까지 하나씩 짚은 뒤 ‘바로 그대가 했다’로 닫혀요. 이 말이 오늘은 어떻게 들리나요? 무겁게 들린다면 무겁다는 것만 알아 두어도 괜찮고, 잘 모르겠다는 답도 괜찮을까요? 이 카드에서 잠시 쉬어 가도 돼요. 그 무게를 혼자 판단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수행자들이여, 야마왕은 그에게 신들의 첫째 전령을 두고 캐묻고 따지고 다그친 뒤, 신들의 둘째 전령을 두고 캐묻고 따지고 다그친다.
‘이보게, 사람아, 그대는 사람들 사이에 나타난 신들의 둘째 전령을 보지 못했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보지 못했습니다, 나리.’”
둘째 전령의 심문이 시작됩니다. 원문은 ‘캐묻고 따지고 다그친 뒤’로 첫째 심문이 끝났음을 밝히고, 같은 세 동사를 다시 써서 둘째 심문을 엽니다. 물음과 ‘보지 못했습니다’라는 대답이 첫째 때와 같습니다. 늙은 사람을 보았다고 인정한 사람이 둘째 물음에는 다시 ‘보지 못했다’고 답합니다. 전령이 바뀔 때마다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이 되풀이되고, 경은 이 되풀이로 같은 일이 삶의 여러 모습 앞에서 일어남을 보여 줍니다. 둘째 전령이 무엇인지는 다음 카드에서 왕이 그려 보입니다.
묵상
같은 물음이 한 번 더 나오는 것을 읽으며 어떤 느낌이 드나요? 되풀이가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지루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괜찮을까요? 지금 느낌 하나만 알아봐도 충분하고, 아무 느낌이 없다면 그것도 그대로 두면 돼요. 되풀이 속에서 쉬어 가도 돼요.
“수행자들이여, 야마왕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사람아, 그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병들어 괴로워하며 몹시 앓는 여자나 남자를 보지 못했는가? 제 똥오줌 속에 쓰러져 누워, 남들이 일으켜 주고 남들이 눕혀 주는 사람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보았습니다, 나리.’”
왕이 둘째 전령의 모습을 그려 보입니다. 병들어 괴로워하며 몹시 앓는 여자나 남자가 제 똥오줌 속에 누워 있고, 남의 손에 일으켜지고 눕혀집니다. 첫째 때와 같이 ‘둘째 전령을 보았는가’에 이어 이 모습을 물으므로, 병든 사람이 둘째 전령의 자리에 놓입니다. 그는 보았다고 답합니다. 경은 병든 몸의 형편을 꾸미지 않고 적습니다. 경이 묻는 것은 이 모습을 본 사람의 마음이고, 병든 사람을 탓하는 말은 경에 없습니다. 이 광경은 다음 카드의 ‘나도 병들기 마련이다’로 이어집니다. 병든 이를 돌보았거나 지금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무겁게 읽힐 수 있으니, 힘들면 이 카드는 건너뛰어도 괜찮습니다.
묵상
아픈 사람을 곁에서 보았거나 내가 아팠던 기억이 있다면, 이 대목을 읽는 지금 어떤 마음이 드나요? 무겁다면 건너뛰고, 돌아오고 싶을 때 다시 읽어도 괜찮아요. 지금 올라온 느낌 하나만 알아봐도 될까요? 그 느낌을 바꾸려 하지 않아도 돼요.
나도 병들기 마련이니 좋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는 물음과 방심했다는 대답입니다.
수행자들이여, 야마왕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사람아, 분별이 있고 나이도 든 그대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가?
‘나도 병들기 마련이고 병을 넘어서지 못했다. 자, 나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좋은 일을 하겠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 못했습니다, 나리. 방심했습니다, 나리.”
Tamenaṁ, bhikkhave, yamo rājā evamāha: ‘ambho purisa, tassa te viññussa sato mahallakassa na etadahosi: “ahampi khomhi byādhidhammo byādhiṁ anatīto, handāhaṁ kalyāṇaṁ karomi kāyena vācāya manasā”’ti? So evamāha: ‘nāsakkhissaṁ, bhante. Pamādassaṁ, bhante’ti.
앙굿따라 니까야AN 3.36 데와두따 숫따 (신들의 전령)
배경
둘째 전령에 대한 같은 물음입니다. 첫째 때의 문장이 그대로 되풀이되고, ‘늙기 마련이다’와 ‘늙음을 넘어서지 못했다’ 자리에 ‘병들기 마련이다’와 ‘병을 넘어서지 못했다’가 들어섭니다. 본 것을 자기에게 견주고, 자기도 예외가 아님을 알고, 그 앎을 좋은 일로 잇는 세 걸음도 같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하지 못했다고 하며 ‘나리’를 두 번 불러 까닭을 방심이라고 답합니다. 병든 사람을 보는 일이 자기도 병들 수 있다는 앎으로, 다시 좋은 일로 이어지는지를 경은 거듭 묻습니다.
묵상
‘나도 병들기 마련이다’라는 말이 두렵게 들리나요, 담담하게 들리나요? 어느 쪽이어도 괜찮으니, 지금의 느낌을 그대로 두고 보는 정도면 어떨까요? 지금 아픈 몸으로 이 카드를 읽고 있다면, 여기서 쉬어 가도 돼요. 읽을 수 있는 만큼만 읽어도 괜찮아요.
둘째 전령 문답의 판결 앞부분입니다. 첫째 판결과 같은 두 문장이 낱말 하나 바뀌지 않고 되풀이됩니다. 왕은 좋은 일을 하지 않은 까닭을 방심 하나로 짚고, ‘그들’이 방심한 사람에게 걸맞게 그를 다룰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령이 늙은 사람에서 병든 사람으로 바뀌어도 판결의 까닭은 바뀌지 않습니다. 병든 이를 보고도 ‘나도 그렇다’는 생각을 좋은 일로 잇지 못한 것을 경은 다시 방심이라 부릅니다. ‘이보게, 사람아’라는 부름도 원문대로 두 번 나옵니다. 왕은 벌을 정하기 전에 그 까닭부터 말합니다.
묵상
같은 말이 다시 나오니 어떤 낱말에서 눈이 멈추나요? 멈춘 곳이 없다면 없다고 해도 괜찮아요. 있다면 그 낱말 하나만 마음에 두어 봐도 될까요? 왜 거기서 멈췄는지까지 알 필요는 없고, 멈췄다는 것만 알아 두면 충분해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읽어도 돼요.
‘그런데 그대의 이 나쁜 행위는 어머니가 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한 것이 아니고, 형제가 한 것이 아니고, 자매가 한 것이 아니고, 벗과 동료가 한 것이 아니고, 친척과 피붙이가 한 것이 아니고, 신들이 한 것이 아니고,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사마나)와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이 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대가 이 나쁜 행위를 했으니, 그 열매는 그대 자신이 겪을 것이다.’
Taṁ kho pana te etaṁ pāpakammaṁ neva mātarā kataṁ, na pitarā kataṁ, na bhātarā kataṁ, na bhaginiyā kataṁ, na mittāmaccehi kataṁ, na ñātisālohitehi kataṁ, na devatāhi kataṁ, na samaṇabrāhmaṇehi kataṁ; atha kho tayāvetaṁ pāpakammaṁ kataṁ. Tvaññevetassa vipākaṁ paṭisaṁvedissas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3.36 데와두따 숫따 (신들의 전령)
배경
둘째 전령 문답의 판결 뒷부분입니다. 첫째 판결과 같이 여덟 무리를 하나씩 들어 ‘그들이 한 것이 아니다’라고 가려낸 뒤, 그 행위는 그가 했고 열매도 그가 겪는다고 말합니다. 전령은 병든 사람으로 바뀌었지만 판결의 문장은 그대로입니다. 이 판결이 겨누는 것은 병든 이를 보고도 좋은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의 나쁜 행위입니다. 병을 앓는 사람이나 그 곁을 지키는 사람의 탓을 묻는 말은 이 판결에 없습니다. 행위와 그 열매를 한 사람에게 이어 놓는 이 문장은 셋째 전령에서 한 번 더 나옵니다.
묵상
이 문장은 어떤 날에는 책임을 짚는 말로, 어떤 날에는 혼자 짊어지라는 말로 들릴 수 있어요. 오늘 내게는 어떻게 들리나요? 어느 쪽이어도, 잘 모르겠어도 괜찮을까요? 답을 서두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두고 다음 카드로 넘어가도 돼요. 어느 쪽으로 들려도 괜찮아요.
“수행자들이여, 야마왕은 그에게 신들의 둘째 전령을 두고 캐묻고 따지고 다그친 뒤, 신들의 셋째 전령을 두고 캐묻고 따지고 다그친다.
‘이보게, 사람아, 그대는 사람들 사이에 나타난 신들의 셋째 전령을 보지 못했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보지 못했습니다, 나리.’”
셋째 전령의 심문이 시작됩니다. 둘째 심문을 마친 왕이 같은 세 동사로 셋째 물음에 들어가고, 물음과 대답의 틀이 앞의 둘과 같습니다. 그는 늙은 사람과 병든 사람을 보았다고 두 번 인정한 뒤에도 셋째 물음에는 다시 ‘보지 못했다’고 답합니다. 첫째, 둘째, 셋째로 세는 틀이 여기서 마지막 칸에 이릅니다. 셋째 전령이 무엇인지는 다음 카드에서 왕이 그려 보입니다. 세 번 되풀이되는 ‘보지 못했다’는 눈앞의 일을 자기 일로 알아보는 것이 쉽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물음과 대답은 둘째 때와 낱말까지 같고, 서수만 바뀝니다.
묵상
세 번째로 같은 물음이 나오니 다음 답을 미리 알 것 같나요? 예상이 맞든 틀리든 그냥 읽어 보는 것도 괜찮아요. 읽기 힘들다면 다음 카드로 넘어가도 돼요. 지금 마음에 남은 느낌 하나는 무엇일까요? 없다면 없다고 해도 돼요. 천천히 읽어 가도 괜찮아요.
왕이 셋째 전령의 모습을 그려 보입니다. 죽은 지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지나 몸이 부풀고, 검푸르게 변하고, 곪은 여자나 남자입니다. 앞의 둘과 같이 ‘셋째 전령을 보았는가’에 이어 이 모습을 물으므로, 죽은 사람이 셋째 전령의 자리에 놓입니다. 이로써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의 세 전령이 다 나옵니다. 경은 죽은 몸이 변해 가는 모습을 숨기지 않고 적고, 그것을 본 사람이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다음 카드에서 묻습니다. 이 묘사는 가까운 이를 잃은 사람에게 그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읽기 힘들면 이 카드는 건너뛰어도 괜찮습니다.
묵상
‘죽은 지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라는 말에서 떠오른 사람이나 장면이 있나요? 있다면 그 마음을 서둘러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슬픔이 올라오면 슬픔 그대로 두어도 돼요. 읽기 힘들면 이 카드는 건너뛰고, 나중에 돌아와도 될까요? 그 마음에 정해진 기한은 없어요.
나도 죽기 마련이니 좋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는 물음과 방심했다는 대답입니다.
수행자들이여, 야마왕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사람아, 분별이 있고 나이도 든 그대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가?
‘나도 죽기 마련이고 죽음을 넘어서지 못했다. 자, 나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좋은 일을 하겠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 못했습니다, 나리. 방심했습니다, 나리.”
Tamenaṁ, bhikkhave, yamo rājā evamāha: ‘ambho purisa, tassa te viññussa sato mahallakassa na etadahosi— ahampi khomhi maraṇadhammo maraṇaṁ anatīto, handāhaṁ kalyāṇaṁ karomi kāyena vācāya manasā’ti? So evamāha: ‘nāsakkhissaṁ, bhante. Pamādassaṁ, bhante’ti.
앙굿따라 니까야AN 3.36 데와두따 숫따 (신들의 전령)
배경
셋째 전령에 대한 같은 물음입니다. ‘늙기 마련이다’, ‘병들기 마련이다’에 이어 ‘죽기 마련이다’가 놓이면서 세 물음이 늙음, 병듦, 죽음으로 채워집니다. 원문은 이번에도 ‘분별이 있고 나이도 든 그대’라고 불러 앞의 두 물음과 낱말을 맞춥니다. 경은 죽음을 떠올린 다음 할 일을 ‘몸과 말과 마음으로 좋은 일을 하겠다’로 잇습니다. 죽음을 아는 일이 지금의 행동으로 이어지는지를 묻는 자리입니다. 그는 세 번째로 하지 못했다고 하며 까닭을 방심이라고 답하고, 이 대답 다음에 셋째 판결이 이어집니다.
묵상
‘나도 죽기 마련이다’라는 문장 뒤에 경은 ‘좋은 일을 하겠다’를 붙여요. 지금 떠오르는 작은 좋은 일이 하나 있나요? 없다면 없다고 두어도 괜찮아요.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처럼 아주 작은 것이어도 충분해요. 생각만 해 보는 것도 괜찮아요.
셋째 전령 문답의 판결 앞부분입니다. 첫째와 둘째에서 나온 두 문장이 세 번째로 그대로 나옵니다.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이라는 세 전령을 모두 보았다고 인정한 사람에게 왕은 같은 까닭, 방심을 듭니다. 세 번의 판결이 같은 말로 짚는 까닭은 전령을 보고도 좋은 일로 잇지 않은 방심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여기서도 밝히지 않으며, 다음 카드들에서 형벌을 집행하는 것은 지옥지기들입니다. ‘이보게, 사람아’라는 부름은 이번에도 두 번입니다. 세 번의 판결은 행위와 그 까닭을 그 사람 자신에게 묻는 틀로 짜여 있습니다.
묵상
세 번 되풀이된 ‘방심’이라는 말 가운데, 내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어디인가요? 아무 데도 머물지 않았다면 그것도 하나의 답일까요? 지금은 모르겠다고 해도 돼요. 하나도 걸리는 낱말이 없어도 괜찮아요. 마음 가는 대로 천천히 읽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그대의 이 나쁜 행위는 어머니가 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한 것이 아니고, 형제가 한 것이 아니고, 자매가 한 것이 아니고, 벗과 동료가 한 것이 아니고, 친척과 피붙이가 한 것이 아니고, 신들이 한 것이 아니고,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사마나)와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이 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대가 이 나쁜 행위를 했으니, 그 열매는 그대 자신이 겪을 것이다.’
Taṁ kho pana te etaṁ pāpakammaṁ neva mātarā kataṁ, na pitarā kataṁ, na bhātarā kataṁ, na bhaginiyā kataṁ, na mittāmaccehi kataṁ, na ñātisālohitehi kataṁ, na devatāhi kataṁ, na samaṇabrāhmaṇehi kataṁ; atha kho tayāvetaṁ pāpakammaṁ kataṁ. Tvaññevetassa vipākaṁ paṭisaṁvedissas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3.36 데와두따 숫따 (신들의 전령)
배경
셋째 전령 문답의 판결 뒷부분이며, 세 번 되풀이된 판결이 여기서 끝납니다. 여덟 무리를 하나씩 들어 가려낸 뒤 그 행위와 열매를 행한 사람에게 돌리는 문장이 마지막으로 나옵니다. 행위와 그 열매가 한 사람 안에서 이어진다는 것이 세 판결이 거듭 말한 내용입니다. 이 판결이 겨누는 것은 죽은 이를 보고도 좋은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의 나쁜 행위입니다. 가까운 이를 잃은 일이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읽는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말은 이 판결에 없습니다. 다음 카드에서 왕은 입을 다물고 지옥지기들이 나섭니다.
묵상
세 번째로 이 문장을 읽고 나니 처음과 느낌이 같은가요, 달라졌나요? 달라졌다면 어디가 달라졌는지 한 가지만 떠올려 봐도 괜찮을까요? 느낌 하나면 충분하고, 같다면 같은 대로 두어도 돼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마음 가는 대로 읽어도 돼요.
“수행자들이여, 야마왕은 그에게 신들의 셋째 전령을 두고 캐묻고 따지고 다그친 뒤 입을 다문다.
수행자들이여, 지옥지기들은 그에게 ‘다섯 가지로 묶기’라는 형벌을 가한다.
달군 쇠못을 한 손에 박고, 다른 손에 박고, 한 발에 박고, 다른 발에 박고, 가슴 한가운데에 박는다.
그는 거기서 아프고 날카롭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겪는다. 그러나 그 나쁜 행위가 다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세 번의 문답이 끝나고 왕이 입을 다물자 지옥지기들이 나섭니다. 여기서부터 경은 형벌을 차례로 적습니다. 첫 형벌은 두 손과 두 발과 가슴 한가운데, 다섯 곳에 달군 쇠못을 박는 것이고 이름이 ‘다섯 가지로 묶기’입니다. 원문은 ‘달군 쇠못을 … 박는다’를 다섯 번 되풀이하고, 한국어는 쇠못을 한 번 쓰고 박는 동작을 다섯 번 옮겼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형벌마다 붙는 후렴입니다. 후렴은 형벌의 길이를 그 나쁜 행위가 다하는 때까지로 정해 두어, 이 벌을 끝없는 벌로 그리지 않습니다. 잔혹한 묘사가 이어지니 힘들면 건너뛰어도 괜찮습니다.
묵상
읽는 동안 몸 어디가 긴장되었나요? 어깨나 가슴, 손끝 같은 곳이 굳었다면 숨을 한 번 천천히 내쉬어도 괜찮아요. 이 대목은 건너뛰어도 돼요. 달라진 것이 없다면 없다고 해도 될까요? 어느 쪽이어도 괜찮아요. 몸이 편해지는 만큼만 천천히 읽어도 돼요.
“수행자들이여, 지옥지기들은 그를 눕혀 놓고 도끼로 깎아 낸다.
그는 거기서 아프고 날카롭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겪는다. 그러나 그 나쁜 행위가 다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지옥지기들은 그의 발을 위로 머리를 아래로 해 붙잡아 자귀로 깎아 낸다 …
수행자들이여, 지옥지기들은 그를 수레에 매어 불붙고 타오르며 빛나는 땅 위를 앞뒤로 몰고 다닌다 …
수행자들이여, 지옥지기들은 그를 불붙고 타오르며 빛나는 큰 숯불 산에 오르게도 하고 내리게도 한다 …”
형벌이 이어집니다. 눕혀 놓고 도끼로 깎는 형벌, 거꾸로 붙잡아 자귀로 깎는 형벌, 수레에 매어 불붙은 땅 위를 앞뒤로 모는 형벌, 숯불 산을 오르내리게 하는 형벌, 네 가지입니다. 원문은 첫째 형벌(도끼) 뒤에만 후렴을 다 적고, 나머지 세 형벌은 끝에 반복 생략 표시를 붙여 줄였습니다. 줄인 자리에는 같은 후렴이 들어가는 것으로 읽으며, 한국어도 같은 세 자리에 ‘…’를 두었습니다. ‘불붙고 타오르며 빛나는’은 원문의 세 낱말을 하나씩 옮긴 것입니다. 이 형벌들도 후렴대로 그 행위가 다하는 때까지로 그려집니다. 힘든 대목이어서 건너뛰어도 괜찮습니다.
묵상
여기서는 형벌이 빠르게 이어져요. 읽다가 마음이 먼저 멈춘 곳이 있나요? 멈췄다면 거기까지만 읽고 쉬어도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았다면 그것도 하나의 답일까요? 여기서 멈추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에요. 몸과 마음이 편한 만큼만 읽어도 괜찮아요.
“수행자들이여, 지옥지기들은 그의 발을 위로 머리를 아래로 해 붙잡아, 불붙고 타오르며 빛나는 달군 구리 솥에 던져 넣는다. (…)
그는 거기서 끓는 거품 속에 삶기며, 한 번은 위로 가고, 한 번은 아래로 가고, 한 번은 옆으로 간다.
그는 거기서 아프고 날카롭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겪는다. 그러나 그 나쁜 행위가 다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tamenaṁ, bhikkhave, nirayapālā uddhampādaṁ adhosiraṁ gahetvā tattāya lohakumbhiyā pakkhipanti, ādittāya sampajjalitāya sajotibhūtāya. (…) So tattha pheṇuddehakaṁ paccamāno sakimpi uddhaṁ gacchati, sakimpi adho gacchati, sakimpi tiriyaṁ gacchati. So tattha dukkhā tibbā kharā kaṭukā vedanā vediyati, na ca tāva kālaṁ karoti yāva na taṁ pāpakammaṁ byantīhoti.
앙굿따라 니까야AN 3.36 데와두따 숫따 (신들의 전령)
배경
형벌의 마지막은 달군 구리 솥입니다. 거꾸로 붙잡힌 그가 솥에 던져지고, 끓는 거품 속에서 위로, 아래로, 옆으로 떠밀립니다. 첫 문장 끝의 ‘(…)’는 원문 편집본의 표시입니다. 다른 판본 몇 가지는 이 자리에 ‘그는 거기서 끓는 거품 속에 삶긴다’는 문장을 더 두고, 이 정본은 그 자리를 괄호 속 줄임표로 남겼습니다. 한국어에도 같은 자리에 ‘(…)’를 두었습니다. 같은 후렴이 다시 붙어, 이 형벌도 그 행위가 다하는 때까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 다음에 지옥지기들은 그를 큰 지옥에 던집니다. 이 카드도 무겁다면 건너뛰어도 괜찮습니다.
묵상
후렴의 ‘그 나쁜 행위가 다하기 전에는’이라는 말은 이 벌에 끝이 있다고 말해요. 이 말을 읽고 마음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나요, 그대로인가요? 어느 쪽이어도 괜찮고, 떠오르는 것이 없어도 괜찮아요. 무겁다면 여기서 쉬어 가도 돼요. 천천히 읽어도 돼요.
“수행자들이여, 지옥지기들은 그를 큰 지옥에 던져 넣는다.
수행자들이여, 그 큰 지옥은 이러하다.
‘네 모서리에 네 문이 있고,
칸칸이 나뉘어 반듯하게 재어 놓았다.
쇠 담이 둘레를 두르고,
쇠로 위를 덮었다.
그 바닥은 쇠로 되어 있고,
불길에 휩싸여 이글거린다.
사방 백 요자나를
늘 뒤덮고 있다.’”
형벌의 나열이 끝나고 그가 큰 지옥에 던져집니다. 경은 큰 지옥을 게송으로 그립니다. 네 모서리와 네 문이 있고, 칸칸이 나뉘어 있으며, 쇠 담이 두르고 쇠가 위를 덮었고, 쇠로 된 바닥이 불길로 이글거리며 사방 백 요자나를 뒤덮는다고 합니다. 요자나는 옛 인도에서 쓰던 거리 단위입니다(사전 풀이의 층위). 이 게송은 앞의 판결에서 말한 ‘그 열매는 그대 자신이 겪을 것이다’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같은 큰 지옥의 모습은 맛지마 니까야 130경에도 나오고, 그 경은 이 뒤의 일을 더 적습니다(다른 경의 층위). 다음 카드에서 장면은 야마왕의 바람으로 바뀝니다.
묵상
‘네 모서리에 네 문’, ‘쇠 담’ 같은 말을 읽으며 답답함이 느껴졌나요? 답답하다면 잠시 내려놓고 다음 카드로 넘어가도 괜찮아요. 아무 느낌이 없다면 그대로 두어도 될까요? 떠오르는 장면이 없어도 괜찮아요. 몸과 마음이 편한 만큼만 읽어도 괜찮아요.
야마왕이 사람으로 태어나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알아듣고 싶다고 바란 적이 있다고 전합니다.
“수행자들이여, 예전에 야마왕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아, 세상에서 나쁜 행위를 하는 이들은 이렇게 갖가지 형벌을 받는다고 한다.
아,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고, 깨달음에 이른 이(따타가따),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 바르게 온전히 깨달은 분이 세상에 나타나, 내가 그 부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다면 좋겠다.
그 부처님이 내게 가르침(담마)을 일러 주시고, 내가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게 된다면 좋겠다.’”
Bhūtapubbaṁ, bhikkhave, yamassa rañño etadahosi: ‘ye kira, bho, loke pāpakāni kammāni karonti te evarūpā vividhā kammakāraṇā karīyanti. Aho vatāhaṁ manussattaṁ labheyyaṁ, tathāgato ca loke uppajjeyya arahaṁ sammāsambuddho, tañcāhaṁ bhagavantaṁ payirupāseyyaṁ. So ca me bhagavā dhammaṁ deseyya, tassa cāhaṁ bhagavato dhammaṁ ājāneyyan’ti.
앙굿따라 니까야AN 3.36 데와두따 숫따 (신들의 전령)
배경
장면이 바뀝니다. 부처님은 예전에 야마왕에게 든 생각을 전합니다. 왕은 나쁜 행위를 한 이들이 갖가지 형벌을 받는다고 떠올린 뒤 다섯 가지를 바랍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 깨달음에 이른 이가 세상에 나타나기, 그분을 가까이 모시기, 그분이 가르침을 일러 주기, 그 가르침을 알아듣기입니다. 형벌을 내리는 자리에 있는 왕의 생각이 사람으로 태어나 가르침을 듣는 쪽으로 향합니다. 경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조건의 맨 앞에 놓습니다. ‘받는다고 한다’는 원문의 전해 들은 말투(끼라)를 옮긴 것입니다. 왕이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경에 없습니다.
묵상
야마왕의 바람은 ‘가르침을 알아듣고 싶다’였어요. 지금 내가 알아듣고 싶은 말은 어떤 것인가요? 아직 모르겠다면 모른다고 두어도 괜찮을까요? 아직 답이 없어도 괜찮아요. 한 문장으로만 답해도 충분해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생각해 봐도 괜찮아요.
“수행자들이여, 나는 이 말을 집을 떠나 길을 닦는 다른 이(사마나)나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에게 듣고서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자들이여, 오히려 내가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달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Taṁ kho panāhaṁ, bhikkhave, na aññassa samaṇassa vā brāhmaṇassa vā sutvā evaṁ vadāmi, api ca kho, bhikkhave, yadeva me sāmaṁ ñātaṁ sāmaṁ diṭṭhaṁ sāmaṁ viditaṁ tadevāhaṁ vadāmīti.
앙굿따라 니까야AN 3.36 데와두따 숫따 (신들의 전령)
배경
앞 카드의 야마왕 이야기를 부처님이 어디서 알았는지 밝히는 문장입니다. ‘이 말’은 바로 앞에 전한 야마왕의 생각을 받습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다른 수행자나 브라흐마나에게 들은 것으로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달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가 세 번 되풀이되어 전해 들은 지식과 직접 안 것을 가릅니다. 부름말 ‘수행자들이여’도 원문대로 두 번입니다. 스스로 보고 아는 일은 이 경의 앞부분에서 야마왕이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을 두고 거듭 묻던 것이기도 합니다.
묵상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았다’는 말을 읽으며, 내가 남에게 들어서만 알고 있는 것 하나가 떠오르나요?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도 괜찮아요. 확인하고 싶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 하나만 알아 두어도 될까요?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신들의 전령이 일깨울 때
방심하는 이들,
낮은 몸으로 태어나는 그 사람들은
오래도록 슬퍼한다.
그러나 신들의 전령이 일깨울 때
여기서 착하고 참된 사람들은
거룩한 가르침에
결코 방심하지 않는다.”
Coditā devadūtehi, ye pamajjanti māṇavā; Te dīgharattaṁ socanti, hīnakāyūpagā narā. Ye ca kho devadūtehi, santo sappurisā idha; Coditā nappamajjanti, ariyadhamme kudācanaṁ.
앙굿따라 니까야AN 3.36 데와두따 숫따 (신들의 전령)
배경
경을 맺는 게송 가운데 앞의 두 수입니다. 첫 수는 신들의 전령이 일깨울 때 방심하는 이들이 낮은 몸으로 태어나 오래도록 슬퍼한다고 하고, 둘째 수는 ‘그러나’로 돌아서 같은 일깨움 앞에서 착하고 참된 사람들은 거룩한 가르침에 결코 방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두 갈래는 같은 일깨움에서 갈라지고, 갈림의 기준은 방심입니다. 산문에서 야마왕이 세 번 물은 것이 게송에서 두 갈래로 모입니다. ‘낮은 몸으로 태어난’은 ‘낮은(히나)’, ‘몸 또는 무리(까야)’, ‘가는(우빠가)’이 합쳐진 낱말을 옮긴 것으로, 낮은 존재로 태어남을 가리킵니다. ‘착하고 참된’의 첫 낱말(산또)은 ‘고요한’으로도 읽힙니다.
묵상
전령이 일깨울 때 ‘방심하지 않는다’는 말이 지금의 나에게는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것 하나를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작은 것이어도 충분하고, 오늘은 그냥 읽기만 해도 돼요. 천천히 생각해 봐도 괜찮아요.
경을 맺는 게송의 뒤 두 수입니다. 앞 게송의 착하고 참된 사람들이 어디에 이르는지를 말합니다. 그들은 태어남과 죽음이 생겨나는 바탕인 움켜쥠(우빠다나)에서 두려움을 보고, 움켜쥐지 않아 풀려나며, 그 풀려남은 태어남과 죽음이 다한 데서 이루어집니다. 이어 그들은 방심하지 않고 행복하며, 지금 이 삶에서 온전히 고요히 꺼졌고, 모든 원한과 두려움과 괴로움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전령으로 알아본 일이 움켜쥠을 내려놓는 데까지 이어지며 경이 끝납니다. ‘고요히 꺼졌다’로 옮긴 낱말(아비닙부따)은 고요히 꺼짐(닙바나)과 같은 뿌리의 말입니다. 다른 판본 몇 가지와 영어 번역은 ‘방심하지 않고’ 자리를 ‘안전한 곳에 이르러’로 읽으며, 이 카드는 정본의 독법을 따랐습니다.
묵상
‘움켜쥐지 않아 풀려난다’는 말에서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 하나가 떠오르나요? 놓으라는 요구가 아니니, 쥐고 있다는 것만 알아차려도 괜찮을까요?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그것도 답이에요. 쥐고 있는 것이 소중한 것이어도 괜찮아요. 천천히 읽어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