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사왓티 동쪽 승원의 누각에서 사리뿟따부터 아난다까지 이름난 나이 든 수행자 제자들과 함께 머무십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왓티 동쪽 승원, 미가라의 어머니 누각에 머무셨다.
그곳에는 널리 이름난 나이 든 수행자 제자들인 사리뿟따·마하목갈라나·마하깟사빠·마하깟짜나·마하꼿티까·마하깝삐나·마하쭌다·아누룻다·레와따·아난다 님들과, 그 밖의 널리 이름난 나이 든 수행자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
Evaṁ me sutaṁ—ekaṁ samayaṁ bhagavā sāvatthiyaṁ viharati pubbārāme migāramātupāsāde sambahulehi abhiññātehi abhiññātehi therehi sāvakehi saddhiṁ—āyasmatā ca sāriputtena āyasmatā ca mahāmoggallānena āyasmatā ca mahākassapena āyasmatā ca mahākaccāyanena āyasmatā ca mahākoṭṭhikena āyasmatā ca mahākappinena āyasmatā ca mahācundena āyasmatā ca anuruddhena āyasmatā ca revatena āyasmatā ca ānandena, aññehi ca abhiññātehi abhiññātehi therehi sāvakehi saddhiṁ.
맛지마 니까야MN 118 아나빠낫사띠 숫따 (들숨날숨 알아차림)
배경
경은 사왓티 동쪽 승원에 있는 미가라의 어머니 누각을 장소로 밝힙니다. 이어 사리뿟따에서 아난다까지 열 분을 정해진 순서로 늘어놓고, 그 밖에도 이름난 나이 든 수행자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고 덧붙입니다. ‘널리 알려진’이라는 말이 되풀이되어 이 모임의 구성원이 이름난 나이 든 수행자들임을 강조합니다. 이 큰 공동체는 다음 대목에서 새 수행자들을 가르치고, 두 번의 보름달 모임을 지나 들숨날숨 알아차림의 가르침을 함께 듣는 주체가 됩니다.
묵상
열 사람의 이름이 한꺼번에 나오는 첫 장면에서 어떤 분위기가 느껴지나요? 여러 나이 든 수행자와 다른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 놓고, 배움이 공동체에서 이어지는 모습이 보이는지 느껴 볼 수 있을까요?
나이 든 수행자들이 열에서 마흔 명씩 새 수행자를 가르쳐 진전을 이루게 하고, 자자일 만월 밤에 수행자 공동체가 고요히 모입니다.
그때 나이 든 수행자들은 새 수행자들을 훈계하고 가르쳤습니다. 어떤 나이 든 수행자는 열 명, 어떤 이는 스물·서른·마흔 명을 가르쳤고, 새 수행자들은 이전보다 더 높은 특별한 성취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보름 포살일이자 자자일인 만월 밤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야외에서 수행자 공동체에 둘러싸여 앉아 계셨습니다.
첫 장면 뒤에는 나이 든 수행자와 새 수행자의 교육 관계가 나옵니다. 가르침을 받는 수는 열·스물·서른·마흔으로 늘어나지만, 결과는 모두 전보다 더 높은 특별한 성취를 아는 것으로 같습니다. 이어 시간은 보름 포살일이자 서로 허물을 말해 달라 청하는 자자일의 만월 밤으로 바뀝니다. 부처님은 야외에서 수행자 공동체에 둘러싸여 앉아 계십니다.
묵상
한 나이 든 수행자가 맡은 수는 달라도 새 수행자들이 전보다 나아졌다는 결과는 같다는 점이 어떻게 다가오나요? 배움에서 사람 수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조건이 있나요?
부처님께서 수행자 공동체의 실천에 만족하고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위해 더 힘쓰라 하시자 지방 수행자들이 사왓티로 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요한 수행자 공동체(상가)를 둘러보고 수행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이 실천에 만족한다. 수행자들이여, 내 마음도 이 실천에 만족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여,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며,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도록 더욱 힘을 일으켜라. 나는 여기 사왓티에서 넷째 달 꼬무디 만월까지 기다리겠다.”
지방 수행자들은 부처님께서 바로 그곳 사왓티에서 그 만월까지 기다리신다는 말을 듣고, 뵈러 사왓티로 모였습니다.
부처님은 고요한 수행자 공동체를 둘러보고 수행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같은 실천에 자신도 만족하고 마음도 만족한다고 두 번 밝힌 뒤,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도록 더욱 힘쓰라고 권합니다. 부처님이 사왓티에서 넷째 달 꼬무디 만월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자 지방 수행자들은 그 말을 듣고 직접 뵙기 위해 사왓티로 모입니다.
묵상
“만족한다”는 말 뒤에 “더욱 힘을 일으켜라”가 이어지는 순서가 어떻게 들리나요? 지금까지의 노력을 인정하면서도 더 배우고 싶은 한 부분이 있나요?
나이 든 수행자들의 가르침이 더 활발해지고 새 수행자들이 진전한 뒤, 넷째 달 만월에 수행자 공동체가 다시 고요히 모입니다.
나이 든 수행자들은 새 수행자들을 더욱 훈계하고 가르쳤습니다. 어떤 나이 든 수행자는 열 명, 어떤 이는 스물·서른·마흔 명을 가르쳤고, 새 수행자들은 이전보다 더 높은 특별한 성취를 알게 되었습니다.
넷째 달 꼬무디 만월의 보름 포살일 밤, 부처님께서는 야외에서 수행자 공동체에 둘러싸여 앉아 계셨습니다.
지방 수행자들이 모인 뒤 나이 든 수행자들의 가르침은 이전보다 더욱 커집니다. 열·스물·서른·마흔이라는 네 수와 새 수행자들이 더 높은 성취를 안다는 결과가 첫 장면과 정확히 반복됩니다. 시간은 부처님이 기다리겠다고 한 넷째 달 꼬무디 만월로 이동하고, 부처님은 보름 포살일 밤 야외에서 수행자 공동체(상가)에 둘러싸여 앉아 계십니다.
묵상
같은 교육 장면이 “더욱”이라는 말과 함께 되풀이되는 점에서 무엇이 느껴지나요? 한 번의 설명보다 반복된 배움이 도움이 되었던 경험이 있나요? 첫 만월에서 둘째 만월로 시간이 흐른 사실만 알아보아도 충분해요.
부처님께서 수행자 공동체가 겨 없이 순수하고 알맹이에 굳게 서서 세상의 가장 높은 복밭이라고 밝히십니다.
부처님께서는 고요한 수행자 공동체를 둘러보고 수행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이 모임에는 겨가 없다. 수행자들이여, 이 모임은 겨에서 벗어나 순수하고 알맹이에 굳게 섰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는 이와 같고, 수행자들이여, 이 모임도 이와 같다. 이런 모임은 선물·환대·베풂을 받을 만하고 두 손 모아 인사받을 만하며, 세상의 가장 높은 복밭이다.”
부처님이 고요한 수행자 공동체를 둘러보고 수행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곡식의 겨와 알맹이를 빌려 수행자 공동체의 상태를 평가하는데, 겨가 없고 겨에서 벗어났다는 두 표현이 거듭 나오고, 순수하고 알맹이에 굳게 섰다는 말이 뒤따릅니다. 이어 선물과 환대와 베풂을 받을 만하고 두 손 모아 인사받을 만하다는 네 가지 평가에 이어, 세상의 가장 높은 복밭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평가는 뒤에서 이어지는 여러 성취와 수행에 근거합니다.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적은 베풂도 크게 열매 맺고, 세상에서 보기 드물어 양식을 메고 먼 길을 갈 가치가 있다고 하십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는 이와 같고, 수행자들이여, 이 모임도 이와 같다. 이런 모임에 조금 주면 많아지고, 많이 주면 더욱 많아진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는 이와 같고, 수행자들이여, 이 모임도 이와 같다. 이런 모임은 세상에서 보기 드물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는 이와 같고, 수행자들이여, 이 모임도 이와 같다. 양식을 메고 여러 유순을 가서라도 볼 만하다.”
앞서 받을 만한 가치에 이어 같은 도입문이 세 번 반복됩니다. 첫째는 적은 베풂이 많아지고 많은 베풂이 더욱 많아진다는 두 단계, 둘째는 세상에서 보기 드물다는 희소성, 셋째는 길 양식을 메고 여러 유순을 걸어서라도 볼 가치입니다. “이 수행자 공동체”와 “이 모임”이라는 말이 매번 다시 나옵니다. 이 세 설명은 이런 성취와 수행을 갖춘 공동체를 만나는 값어치가 얼마나 큰지 보여 줍니다.
묵상
조금 준 것이 많아지고, 보기 드물며, 먼 길을 갈 만하다는 세 설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가까이 들리나요? 무언가를 실제로 내놓으라는 요구는 아니에요. 귀하게 여기는 공동체의 성질 하나를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수행자 공동체 안에 해야 할 일을 마친 완전히 깨달은 이와 다섯 낮은 족쇄를 다해 돌아오지 않는 수행자들이 있음을 밝히십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흘러드는 것을 다하고 거룩한 삶을 완성했으며,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참된 목적에 이르렀고 존재의 족쇄를 다해 바른 완전한 앎으로 풀려난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 수행자들이 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이런 수행자들도 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다섯 낮은 족쇄를 다해 저절로 태어나 그곳에서 고요히 꺼짐에 들고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 수행자들이 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이런 수행자들도 있다.”
모임의 알맹이를 밝히는 첫 두 성취입니다.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는 흘러드는 것을 다함부터 바른 완전한 앎으로 풀려남까지 여덟 가지 모습으로 설명됩니다. 다음 수행자들은 다섯 낮은 족쇄가 사라지고 저절로 태어나 그곳에서 완전히 고요히 꺼지며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 네 가지로, 돌아오지 않는 이의 성취를 이룹니다. 각 목록 뒤에는 “이 수행자 공동체(상가)에는 이런 수행자들도 있다”가 따로 반복됩니다. 완전한 풀려남과 돌아오지 않음은 서로 다른 성취입니다.
묵상
“짐을 내려놓음”과 “돌아오지 않음”은 서로 다른 성취를 가리키지만 어느 표현이 지금 더 또렷하게 들리나요?
세 족쇄를 다하고 탐냄·성냄·어리석음이 옅어진 한 번만 돌아오는 이와 깨달음이 확정된 흐름에 든 이들이 수행자 공동체에 있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상가)에는 세 족쇄를 다하고 탐냄·성냄·어리석음이 옅어져 한 번 돌아오는 이가 된 수행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 한 번만 돌아와 괴로움을 끝낼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이런 수행자들도 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세 족쇄를 다해 흐름에 든 이가 된 수행자들이 있다. 그들은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고 깨달음이 확정되어 그곳으로 향한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이런 수행자들도 있다.”
성취는 한 번만 돌아오는 이와 흐름에 든 이로 이어집니다. 한 번만 돌아오는 이는 세 족쇄가 사라진 데에 더해 탐냄·성냄·어리석음이 옅어지고, 이 세상에 한 번만 돌아와 괴로움을 끝낸다는 조건을 가집니다. 흐름에 든 이도 세 족쇄를 다하지만,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깨달음으로 나아갑니다. 두 무리 모두 뒤에 같은 확인 문장이 붙습니다. “세 족쇄”라는 말은 같아도, 탐냄·성냄·어리석음이 옅어지는 정도와 한 번만 돌아오는지 여부가 두 성취를 구별합니다.
수행자 공동체에는 네 알아차림의 확립과 바른 노력·성취의 바탕·기능·힘·깨달음 요소·고귀한 길을 닦는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을 닦는 데 전념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이런 수행자들도 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네 가지 바른 노력을 닦는 데 전념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
성취의 네 바탕에 …
다섯 기능에 …
다섯 힘에 …
일곱 깨달음 요소에 …
거룩한 여덟 갈래 길을 닦는 데 전념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이런 수행자들도 있다.”
성취 단계 뒤에는 실제로 닦는 수행 체계가 나옵니다.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부터 거룩한 여덟 갈래 길까지, 네 가지 바른 노력·성취의 네 바탕·다섯 기능·다섯 힘·일곱 깨달음 요소가 차례로 이어지며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부분은 줄였습니다. 수량은 4·4·4·5·5·7·8의 순서이며, 모두 같은 수행자 공동체에서 함께 닦이는 여러 훈련입니다.
자애·연민·함께 기뻐함·평온·아름답지 않음·그대로 있지 않음을 알아보는 인식과 들숨날숨 알아차림에 전념하는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자애 닦기에 전념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
연민 닦기에 …
함께 기뻐함 닦기에 …
평온 닦기에 …
아름답지 않음 닦기에 …
그대로 있지 않음을 알아보는 인식 닦기에 전념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이런 수행자들도 있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자 공동체에는 들숨날숨 알아차림 닦기에 전념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수행 목록은 자애·연민·함께 기뻐함·평온의 네 한없는 마음, 아름답지 않음, 그대로 있지 않음을 알아보는 인식으로 이어지며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부분은 줄였습니다. 그 뒤 들숨날숨 알아차림이 독립된 마지막 수행으로 나옵니다. 이 마지막 수행이 이제 큰 결실에서 참된 앎과 풀려남까지 이어지는 경의 중심 설명으로 펼쳐집니다.
묵상
여섯 수행과 들숨날숨 알아차림이 같은 수행자 공동체 안에 나란히 있다는 점이 어떻게 들리나요? 자애·평온·그대로 있지 않음·호흡 가운데 이미 의미가 닿는 말 하나가 있는지만 느껴 볼 수 있을까요?
들숨날숨 알아차림이 네 알아차림의 확립과 일곱 깨달음 요소를 차례로 원만하게 해 참된 앎과 풀려남으로 이어집니다.
“수행자들이여, 들숨날숨 알아차림을 닦고 많이 수행하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다.
수행자들이여, 들숨날숨 알아차림을 닦고 많이 수행하면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 원만해진다.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을 닦고 많이 수행하면 일곱 깨달음 요소가 원만해지고, 일곱 깨달음 요소를 닦고 많이 수행하면 참된 앎과 풀려남이 원만해진다.”
이 대목은 경 후반 전체를 이끄는 흐름을 미리 보여 줍니다.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고 많이 수행하면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 온전해지고, 그 넷을 닦으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가 온전해지며, 그 일곱을 닦으면 참된 앎과 풀려남이 온전해집니다. 하나의 수행이 다음 수행으로 이어지며 중간 단계를 하나도 건너뛰지 않습니다. 호흡이라는 작고 구체적인 행위가 풀려남이라는 가장 큰 결실까지 곧장 이어집니다.
묵상
호흡 하나에서 시작한 길이 네 확립과 일곱 요소를 거쳐 참된 앎과 풀려남으로 이어지는 지도가 어떻게 느껴지나요? 지금은 첫 단계인 호흡과 알아차림만 가까이 느껴지는지 살펴볼까요?
숲·나무 밑·빈집에 앉아 몸을 곧게 하고 알아차림을 세운 뒤, 긴 들숨날숨과 짧은 들숨날숨을 각각 압니다.
“수행자들이여, 들숨날숨 알아차림을 어떻게 닦고 많이 수행해야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는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숲이나 나무 밑이나 빈집으로 가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몸을 곧게 세우고 앞에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그는 알아차리며 들이쉬고, 알아차리며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 ‘길게 들이쉰다’고 알고, 길게 내쉬면 ‘길게 내쉰다’고 안다. 짧게 들이쉬면 ‘짧게 들이쉰다’고 알고, 짧게 내쉬면 ‘짧게 내쉰다’고 안다.”
큰 결실과 큰 이익을 내는 방법을 묻고 답하는 대목입니다. 답은 장소·자세·알아차림의 준비에서 시작합니다. 숲·나무 밑·빈집이라는 세 장소, 가부좌, 곧은 몸, 앞에 확립한 알아차림이 정해진 순서로 나옵니다. 그 뒤 들숨과 날숨 모두에 “알아차리며”가 붙고, 첫 두 단계에서는 길고 짧은 숨을 각각 그 길이대로 안다고 합니다. 아직 숨을 바꾸라는 말은 없으며, 있는 그대로의 숨의 성질을 분명히 아는 일만 있습니다. 질문의 ‘닦고 많이 수행함’은 이 구체적 답으로 곧바로 이어집니다.
묵상
지금 숨이 길거나 짧다는 느낌이 또렷한가요? 들숨과 날숨 중 한쪽의 길이가 알아차려지는지, 잘 모르겠다면 모른다는 상태가 어떤지만 가볍게 느껴 볼 수 있을까요?
길고 짧음을 아는 두 단계 뒤에는 “익힌다”는 말로 표현된 두 훈련이 이어집니다. 셋째는 온몸을 경험하는 들숨과 날숨이고, 넷째는 몸의 지어내는 작용을 가라앉히는 두 방향입니다. 여기서 들숨만 온몸을 느끼고 날숨만 가라앉힌다고 나누지 않으며, 각 단계가 들이쉼과 내쉼의 완전한 한 쌍입니다. 첫 네 단계는 숨의 길이를 아는 데서 몸 전체와 숨에 얽힌 작용이 고요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다음에는 희열과 행복으로 초점이 옮겨 갑니다.
묵상
“온몸을 경험함”과 “몸의 지어내는 작용을 가라앉힘” 가운데 지금 더 이해되는 말은 어느 쪽인가요? 한 번의 숨에서 몸의 한 부분이라도 느껴지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
둘째 네 단계는 희열과 행복을 각각 경험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어 마음의 지어내는 작용을 경험하고 가라앉히는 두 단계가 나옵니다. 네 단계 모두 “익힌다”로 닫히고, 들숨과 날숨을 하나씩 되풀이합니다. 희열과 행복을 붙잡으라는 지시도, 지금 그런 느낌이 없으면 실패라는 판단도 아닙니다. 호흡과 함께 느낌과 마음에 영향을 주는 작용을 분명히 경험하고 고요해지는 방향을 훈련하는 연속이며, 다음 네 단계에서는 마음 자체를 경험하고 다룹니다.
묵상
호흡과 함께 마음에 영향을 주는 느낌이나 움직임 하나가 느껴지나요? 있다면 붙잡지 않고, 없다면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두는 것이 가능한지 물어볼 수 있을까요?
셋째 네 단계의 대상은 마음입니다. 먼저 마음을 경험하고, 이어 기쁘게 함·집중시킴·해방시킴의 세 작용이 같은 순서로 나옵니다. 네 단계 각각에 들이쉬고 내쉬는 두 문장이 모두 있으며, 어느 방향도 빠지지 않습니다. 마음을 안다는 첫 단계가 이후 세 작용의 바탕이 되고, 북돋음에서 모음과 풀어 줌으로 움직입니다. “해방”은 호흡 속에서 마음을 풀어 주며 익히는 단계이며, 뒤에 나오는 참된 앎과 풀려남의 결론과는 다릅니다.
묵상
마음을 경험함·기쁘게 함·집중시킴·해방시킴 가운데 지금 뜻이 가장 가까운 것은 무엇인가요? 현재 마음의 상태를 먼저 알아보는 일만 가능한지 조용히 물어볼 수 있을까요?
열여섯 단계의 마지막 네 방향은 그대로 있지 않음·빛바램·사라짐·놓아 버림입니다. 그대로 있지 않음을 보는 관찰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붙잡지 않는 봄이고, 빛바램과 사라짐은 갈망과 조건 지어진 경험이 사그라드는 방향을 가리킵니다. 놓아 버림은 마지막에 오며 앞의 세 관찰과 같은 들숨·날숨의 한 쌍으로 적힙니다. 몸·느낌·마음에 관한 앞의 열두 단계가 조건 지어진 것의 변화와 놓임을 관찰하는 네 단계로 이어집니다.
묵상
그대로 있지 않음·빛바램·사라짐·놓아 버림 가운데 한 번의 숨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말이 있나요?
자세와 열여섯 단계를 모두 말한 뒤 “이와 같이”라는 결론이 처음의 질문에 답합니다. 같은 들숨날숨 알아차림을 닦고 많이 수행하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다는 관계가 다시 확인됩니다. 열여섯 단계를 꾸준히 닦고 반복하는 것이 두 결과의 조건입니다. 그 뒤 네 대목은 네 단계씩을 몸·느낌·마음·마음에 나타나는 것의 관찰과 각각 연결합니다.
묵상
열여섯 단계를 다 말한 뒤 다시 “어떻게?”라고 묻는 방식이 어떻게 느껴지나요? 호흡 수행이 다른 알아차림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한 한 지점이 있는지만 느껴 볼 수 있을까요?
첫 네 호흡 조건에서 몸을 관찰하며, 들숨날숨이 몸 가운데 한 몸이기 때문이라고 밝히십니다.
“수행자들이여, 들숨날숨 알아차림을 어떻게 닦고 많이 수행해야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 원만해지는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
수행자들이여, 그때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탐냄과 불만을 버리고 머문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들숨날숨을 몸들 가운데 한 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여, 그때 수행자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탐냄과 불만을 버리고 머문다.”
들숨날숨 알아차림이 네 확립을 어떻게 원만하게 하는지 묻고 답하는 대목입니다. 답의 긴 숨·짧은 숨·온몸 경험·몸의 지어내는 작용 가라앉힘은 앞에서 이미 들숨과 날숨 모두에 나온 단계들이며,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부분은 줄였습니다. 같은 문장 안에서 몸을 관찰하며 열심·분명한 앎·알아차림을 갖추고 세상의 탐냄과 불만을 버립니다. 부처님은 들숨날숨이 몸들 가운데 한 몸이라고 이유를 밝힌 뒤 같은 결과를 반복합니다.
묵상
들숨날숨이 “몸 가운데 한 몸”이라는 설명은 어떻게 들리나요? 한 번의 들숨이나 날숨이 몸에서 일어나는 한 작용으로 느껴지는지 가볍게 물어볼 수 있을까요?
둘째 네 호흡 조건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들숨날숨에 잘 마음을 기울이는 일을 느낌 가운데 하나로 밝히십니다.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
수행자들이여, 그때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탐냄과 불만을 버리고 머문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들숨날숨에 잘 마음을 기울이는 일을 느낌들 가운데 한 느낌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여, 그때 수행자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탐냄과 불만을 버리고 머문다.”
이 대목은 들숨과 날숨을 살피는 여덟 가지 익힘 뒤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수행자는 느낌에서 느낌을 지켜보며 열심히,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으로 세상에 대한 탐냄과 불만을 버립니다. 부처님은 들숨날숨에 잘 마음을 기울이는 일도 느낌 가운데 하나라고 말씀하시며, 같은 길을 다시 한 번 짚어 주십니다.
묵상
숨에 “잘 마음을 기울이는 일”도 느낌과 연결된다는 설명이 낯설게 들리나요? 주의를 기울일 때 생기는 편안함이나 긴장 같은 감각이 있는지 가볍게 느껴 볼 수 있을까요?
셋째 네 호흡 조건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알아차림을 잊고 분명히 알지 못하면 들숨날숨 알아차림이 아니라고 밝히십니다.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
수행자들이여, 그때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탐냄과 불만을 버리고 머문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알아차림을 잊고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에게 들숨날숨 알아차림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여, 그때 수행자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탐냄과 불만을 버리고 머문다.”
마지막 네 호흡 조건에서 마음에 나타나는 것들을 관찰하며, 탐냄과 불만의 버림을 지혜로 보고 평온히 지켜봅니다.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
수행자들이여, 그때 마음에 나타나는 것들에서 그것들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탐냄과 불만을 버리고 머문다.
그는 탐냄과 불만의 버림을 지혜로 보고, 그것을 잘 평정히 지켜본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여, 그때 수행자는 마음에 나타나는 것들에서 그것들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탐냄과 불만을 버리고 머문다.”
몸 관찰 중 알아차림이 굳게 서고 흐려지지 않을 때 알아차림의 깨달음 요소를 일으켜 닦고 완성합니다.
“수행자들이여,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을 어떻게 닦고 많이 수행해야 일곱 깨달음 요소가 원만해지는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탐냄과 불만을 버리고 머물 때 그의 알아차림은 굳게 서고 흐려지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알아차림이 굳게 서고 흐려지지 않은 그때 알아차림의 깨달음 요소가 일어난다. 그는 그 요소를 닦고, 그 요소는 닦음의 완성에 이른다.”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 어떻게 일곱 깨달음 요소를 이루는지 묻고, 첫 요소부터 답합니다. 수행자가 열심히,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갖추어 몸을 관찰하며 탐냄과 불만을 내려놓으면 알아차림이 굳게 서고 흐려지지 않습니다. 그 흐려지지 않는 알아차림에서 알아차림의 깨달음 요소가 일어나고, 수행자는 그것을 닦아 완성에 이르게 합니다.
묵상
알아차림이 “굳게 서고 흐려지지 않음”에서 시작·닦음·완성으로 이어지는 점이 보이나요? 잠깐이라도 주의가 머문 순간이 어떤 느낌인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알아차리며 현상을 지혜로 가려보고 철저히 살피면 가려보기 요소가 완성되고 꺾이지 않는 힘씀이 일어납니다.
“그는 이처럼 알아차리며 머물러 그 현상을 지혜로 가려보고 탐구하고 철저히 살핀다.
수행자들이여, 그때 가르침을 가려보는 깨달음 요소가 일어난다. 그는 그 요소를 닦고, 그 요소는 닦음의 완성에 이른다.
그렇게 현상을 지혜로 가려보고 탐구하고 철저히 살피면 힘씀이 일어나 꺾이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그때 힘씀의 깨달음 요소가 일어난다. 그는 그 요소를 닦고, 그 요소는 닦음의 완성에 이른다.”
수행자는 굳게 선 알아차림 속에서 일어난 현상을 지혜로 가려보고 탐구하고 철저히 살피니, 이것이 둘째 깨달음 요소인 ‘가르침을 가려봄’이 일어나고 닦이고 완성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같은 탐구가 이어지면 힘씀이 일어나 꺾이지 않고, 셋째 깨달음 요소인 ‘힘씀’도 같은 길을 거쳐 완성됩니다. 알아차림에서 살핌으로, 살핌에서 힘씀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분명하니, 힘씀은 근거 없이 억지로 내는 힘이 아닙니다.
묵상
알아차림 뒤에 지혜로 가려보고, 그 살핌에서 힘씀이 일어나는 순서가 어떻게 들리나요? 주의 깊게 본 뒤 자연히 힘이 생겼던 작은 경험이 있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힘씀이 일어난 이에게 감각적 욕망에 기대지 않은 기쁨이 생기고, 기쁨 찬 마음에서 몸과 마음의 고요가 이어집니다.
“힘씀이 일어난 이에게 감각적 욕망에 기대지 않은 기쁨이 생긴다.
수행자들이여, 그때 기쁨의 깨달음 요소가 일어난다. 그는 그 요소를 닦고, 그 요소는 닦음의 완성에 이른다.
기쁨으로 가득한 이의 몸도 고요해지고 마음도 고요해진다.
수행자들이여, 그때 고요의 깨달음 요소가 일어난다. 그는 그 요소를 닦고, 그 요소는 닦음의 완성에 이른다.”
꺾이지 않는 힘씀에서는 감각적 욕망에 기대지 않은 기쁨이 생깁니다. 이 기쁨이 넷째 깨달음 요소로 일어나고 닦이고 완성됩니다. 기쁨으로 가득한 마음에서는 몸과 마음이 함께 고요해지고, 이 고요가 다섯째 깨달음 요소의 바탕이 됩니다. 힘씀에서 곧바로 집중으로 건너뛰지 않고, 기쁨과 몸과 마음의 고요를 거쳐 갑니다.
묵상
힘씀 뒤에 기쁨이, 기쁨 뒤에 몸과 마음의 고요가 온다는 흐름이 어떻게 느껴지나요? 무언가에 힘쓴 뒤 몸이 조금 풀렸던 순간이 있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몸이 고요하고 행복한 이의 마음이 집중되며, 그 집중된 마음을 잘 평온히 지켜보아 마지막 두 요소가 완성됩니다.
“몸이 고요하고 행복한 이의 마음은 집중된다.
수행자들이여, 그때 집중의 깨달음 요소가 일어난다. 그는 그 요소를 닦고, 그 요소는 닦음의 완성에 이른다.
그는 그렇게 집중된 마음을 잘 평온히 지켜본다.
수행자들이여, 그때 평온의 깨달음 요소가 일어난다. 그는 그 요소를 닦고, 그 요소는 닦음의 완성에 이른다.”
고요한 몸에서 행복이 오고, 몸이 고요하고 행복한 이의 마음은 자연히 집중됩니다. 이것이 여섯째 집중의 깨달음 요소입니다. 이어 이미 집중된 마음을 잘 평온히 지켜보는 일이 일곱째 평온의 요소로 이어집니다. 평온은 집중된 마음을 붙잡지도 흔들지도 않고 보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에서 시작한 일곱 요소가 이렇게 차례로 이어져 한 순환을 이룹니다.
묵상
고요에서 집중이, 집중된 마음을 지켜보는 데서 평온이 이어지는 순서가 보이나요? 마음이 잠시 모였을 때 그것을 붙잡지 않고 바라본 경험이 있는지 물어볼 수 있을까요?
느낌·마음·마음에 나타나는 것의 관찰에서도 알아차림이 굳게 서고 첫 깨달음 요소가 완성됩니다.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할 때 …
마음에서 …
마음에 나타나는 것들에서 그것들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탐냄과 불만을 버리고 머물 때 알아차림이 굳게 서고 흐려지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그때 알아차림의 깨달음 요소가 일어나고, 그는 그 요소를 닦으며, 그 요소는 닦음의 완성에 이른다.”
마음에 나타나는 것을 관찰하는 데서도 알아차림 요소가 일어난 뒤, 가르침을 가려봄·힘씀·기쁨·고요·집중에 이르는 다섯 요소가 앞서와 같은 순서로 다시 이어집니다. 중간에 되풀이되는 문장은 줄였을 뿐, 새로 더해진 내용은 없습니다. 이어 집중된 마음을 잘 평온히 지켜보면 평온의 깨달음 요소가 일어나고 닦이고 완성되며,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을 닦고 많이 수행하면 일곱 요소가 모두 원만해진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됩니다.
묵상
같은 원인과 결과가 네 관찰 영역에서 되풀이된 뒤 평온과 원만함으로 닫히는 흐름이 어떻게 들리나요? 집중된 마음을 잘 평온히 지켜본다는 마지막 고리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느껴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