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 문구와 사왓티 제따 숲이라는 장소가 먼저 나오고, 바라문 자누쏘니가 세존을 찾아가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아직 질문은 시작되지 않았고, 반갑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와 착석 및 발화 도입은 질문과 함께 이어집니다. 화자는 전승자에서 서술자로 옮겨 가며, 대화 상대는 수행자가 아니라 바라문입니다. 이 만남은 숲 생활의 어려움, 깨닫기 전 세존 자신의 경험, 깨달음의 과정과 깨달은 뒤에도 숲에 머무는 이유를 묻고 답하는 전체 설법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묵상
이 인용문에서 자누쏘니가 먼저 다가가 인사를 나눈 장면을 떠올리면 무엇이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서로 대화할 자리가 마련되는 과정에서 눈에 들어오는 점이 있나요?
자누쏘니는 인사를 마친 뒤 한쪽에 앉아 세존께 직접 말합니다. 그는 세존을 믿어 집을 떠나 출가한 훌륭한 이들을 주어로 놓고, 세존이 그들에게 선도자·큰 도움을 주는 분·격려하는 분이라는 세 역할을 듭니다. 이어 그 사람들이 세존의 본을 따른다는 결론을 붙입니다. 발화 도입의 콜론과 직접 인용을 같은 대목에 두었고, “고따마 존자여”라는 호칭과 믿음·출가라는 조건도 보존했습니다. 이 말이 숲 수행에 관한 질문을 여는 전제가 됩니다.
묵상
선도자·도움·격려의 세 역할을 다시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남고,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듯한가요? 누군가의 본을 따른다는 말에서 권위만이 아니라 도움과 격려가 함께 놓인 점, 그리고 단순한 지시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세존이 바라문의 말을 두 번 긍정한 뒤 출가한 이들에게 자신이 선도자·도움·격려가 되고 그들이 본을 따른다고 확인합니다.
“그러하니라, 바라문이여. 그러하니라, 바라문이여.
바라문이여, 나를 믿어 집을 떠나 출가한 훌륭한 이들에게 나는 선도자이고 큰 도움을 주는 이이며 격려하는 이니라.
그 사람들은 나의 본을 따르느니라.”
“Evametaṁ, brāhmaṇa, evametaṁ, brāhmaṇa. Ye te, brāhmaṇa, kulaputtā mamaṁ uddissa saddhā agārasmā anagāriyaṁ pabbajitā, ahaṁ tesaṁ pubbaṅgamo, ahaṁ tesaṁ bahukāro, ahaṁ tesaṁ samādapetā; mama ca pana sā janatā diṭṭhānugatiṁ āpajjatī”ti.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세존은 “그렇습니다, 바라문이여”를 같은 호격과 함께 두 번 말하고, 자누쏘니가 제시한 구조를 일인칭으로 확인합니다. 나를 믿어 출가한 이들에게 나는 선도자·도움·격려가 되고, 그 사람들은 나의 본을 따른다는 세 역할과 결론이 그대로 반복됩니다. 앞말의 “고따마 존자”가 세존의 답에서는 “나”로 바뀌지만 수량과 관계는 같습니다. 이 확인은 세존이 제자들에게 숲 생활을 권하면서 그 어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같은 길을 직접 거쳤다는 이어지는 증언의 바탕입니다.
묵상
이 대목의 “그렇습니다”를 두 번 말한 뒤 세 역할을 되풀이한 장면은 어떻게 들리며, 어떤 낱말이 오래 남나요? 세존이 남의 평가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일인칭으로 확인하는 말투는 어떻게 들리나요? 그 반복이 주는 무게도 느껴지나요?
자누쏘니가 집중 없는 이에게 외딴 숲·고독이 어렵다고 말하고 세존이 같은 내용을 두 번 긍정하여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고따마 존자여, 외딴 숲속 처소는 견디기 어렵고, 홀로 떨어져 지내기는 힘들며, 고독을 즐기기도 어려우니라.
집중을 얻지 못한 수행자에게 숲은 마음을 빼앗는 듯하니라.”
“그러하니라, 바라문이여. 그러하니라, 바라문이여.
바라문이여, 외딴 숲속 처소는 견디기 어렵고, 홀로 떨어져 지내기는 힘들며, 고독을 즐기기도 어려우니라.
집중을 얻지 못한 수행자에게 숲은 마음을 빼앗는 듯하니라.
자누쏘니는 외딴 숲속 처소, 홀로 떨어져 지냄, 고독을 즐김의 세 어려움을 들고, 집중을 얻지 못한 수행자에게 숲이 마음을 빼앗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세존은 “그렇습니다, 바라문이여”를 두 번 말한 뒤 세 어려움과 집중의 조건을 같은 순서로 되풀이합니다. 질문과 답을 한 대목에 두어 동의의 대상이 흐려지지 않게 했습니다. 숲을 무조건 평온한 장소로 꾸미지 않고, 집중이 없을 때는 마음이 흔들릴 수 있다는 현실을 두 화자가 함께 인정하는 출발점입니다.
묵상
숲과 고독이 어렵다는 말을 세존도 그대로 인정한 장면 가운데 지금 마음에 닿는 부분과 걸리는 부분이 각각 있나요? 평온해야 한다는 기대보다 현재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을 먼저 인정하는 태도는 어떻게 느껴지나요?
세존이 깨닫기 전 아직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숲·고독과 집중의 어려움을 자신도 생각했다고 회상합니다.
바라문이여, 나도 깨닫기 전, 아직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이렇게 생각하였느니라.
‘외딴 숲속 처소는 견디기 어렵고, 홀로 떨어져 지내기는 힘들며, 고독을 즐기기도 어렵다.
집중을 얻지 못한 수행자에게 숲은 마음을 빼앗는 듯하다.’
Mayhampi kho, brāhmaṇa, pubbeva sambodhā anabhisambuddhassa bodhisattasseva sato etadahosi: ‘durabhisambhavāni hi kh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dukkaraṁ pavivekaṁ, durabhiramaṁ ekatte, haranti maññe mano vanāni samādhiṁ alabhamānassa bhikkhuno’ti.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세존은 시간을 “깨닫기 전”으로 분명히 한정하고, 당시 자신을 “아직 깨닫지 못한 보살”이라고 말합니다. 그때의 생각은 자누쏘니와 방금 확인한 문장을 그대로 담습니다. 외딴 숲속 처소, 홀로 떨어져 지냄, 고독을 즐김이 어렵고, 집중을 얻지 못한 수행자에게 숲이 마음을 빼앗는 듯하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깨달은 뒤의 현재 상태를 과거에 투사하지 않는 회고입니다. 이후 열여섯 점검과 공포를 없애는 수행, 깊은 집중과 세 밝은 앎이 모두 이 깨닫기 전 시제 안에서 전개됩니다.
묵상
“깨닫기 전, 아직 깨닫지 못한 보살”이라는 시간 표시를 읽고 어떤 점이 가장 선명하며, 무엇이 아직 낯선가요? 완성된 모습만 보지 않고 그 이전의 어려움까지 밝힌 점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지금의 어려움을 곧 실패라고 단정하지 않을 여지도 보이나요?
첫 번째 자기 점검의 조건문입니다. 몸의 행위가 깨끗하지 않은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그 깨끗하지 않은 행위의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원인은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이 아니라 “몸의 행위가 깨끗하지 않음”으로 특정됩니다. 이 일반 조건 뒤에 보살 자신의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 이어집니다. 두려움을 겪는 모든 사람의 도덕성을 판정하는 보편 진단으로 넓혀서는 안 됩니다.
묵상
두려움의 조건을 먼저 자기 행위에서 점검한 장면을 경의 흐름 안에서 볼 때 무엇이 달라 보이나요? 두려움을 느꼈다는 이유로 자신을 탓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에 거리끼는 행동이 있는지만 구별해 볼 수 있을까요?
보살이 자신의 몸의 행위는 깨끗하며 그런 고귀한 이들 가운데 하나라고 확인해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몸의 행위가 깨끗하지 않은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의 몸의 행위는 깨끗하다.
몸의 행위가 깨끗한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몸의 행위가 깨끗함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aparisuddhakāyakammant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parisuddhakāyakammantohamasmi. Ye hi vo ariyā parisuddhakāyakammantā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parisuddhakāyakammat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먼저 “깨끗하지 않은 채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으로 자신의 조건을 구별하고, 이어 몸의 행위가 깨끗하다고 긍정합니다. 그런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도 하나라고 한 뒤, 내 안에서 그 깨끗함을 보았기 때문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말합니다. 부정·긍정·비교 집단·결과의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담담함은 두려움을 억지로 없앤 자기암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점검한 행위에 거리낌이 없다는 확인에서 생깁니다.
묵상
이 인용문에서 깨끗하지 않다는 부정과 깨끗하다는 긍정을 차례로 확인한 대목을 떠올리면 무엇이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막연히 괜찮다고 달래기보다 사실에 근거해 거리낌의 유무를 살피는 방식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말과 마음의 행위는 공식 반복 생략으로 제시하고, 깨끗하지 않은 생계가 두려움과 공포를 부르는 조건을 온전히 말합니다.
그때 바라문이여,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느니라.
‘말의 행위가 깨끗하지 않은 수행자나 바라문은 …
마음의 행위가 깨끗하지 않은 수행자나 바라문은 …
생계가 깨끗하지 않은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깨끗하지 않은 생계의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
두 번째부터 네 번째 점검이 한 묶음으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원문은 말의 행위가 깨끗하지 않음과 마음의 행위가 깨끗하지 않음 뒤에 각각 공식 생략 표시 “…pe…”를 둡니다. 한국어도 같은 두 자리에 같은 표시를 보존했습니다. 이어 생계가 깨끗하지 않은 이가 숲에 머물면 그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부른다는 조건을 온전히 적습니다. 생략된 두 점검은 앞의 몸의 행위와 같은 구조이며, 말·마음·생계라는 세 영역의 순서와 수량은 줄이지 않았습니다.
묵상
말·마음·생계의 세 영역을 차례로 점검하는 구조를 다시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남고,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듯한가요? 몸의 행동만이 아니라 말과 마음, 살아가는 방식까지 범위가 넓어지는 점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어느 영역이 가장 구체적으로 느껴지나요?
보살이 깨끗하지 않은 생계로 숲에 머물지 않으며 자신의 생계가 깨끗하다고 확인해 더욱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생계가 깨끗하지 않은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의 생계는 깨끗하다.
생계가 깨끗한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생계가 깨끗함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aparisuddhājīv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parisuddhājīvohamasmi. Ye hi vo ariyā parisuddhājīvā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parisuddhājīvat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깨끗하지 않은 생계로 숲에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하고, 자신의 생계는 깨끗하다고 긍정합니다. 이어 깨끗한 생계로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고, 내 안에서 그 깨끗함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말합니다. 앞의 몸의 행위와 같은 네 단계가 생계에 적용됩니다. 말과 마음의 점검은 공식 생략으로 압축되었지만, 이 생계의 대조와 결론은 원문에 직접 펼쳐진 범위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묵상
이 대목의 생계와 숲 수행의 담담함을 연결한 점검은 어떻게 들리며, 어떤 낱말이 오래 남나요? 지금의 생계 전체를 단정하지 않고, 마음에 거리낌을 주거나 덜어 주는 한 요소가 있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이 대목은 바라는 대상에 마음이 강하게 끌리는 상태와 욕심 없음의 대조 가운데 먼저 불편한 쪽의 조건을 밝힙니다. 깨닫기 전 보살은 욕심이 많고 감각적 욕망에 강하게 끌리는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바로 그 탐욕과 강한 끌림의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실을 허물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조건으로 특정합니다. 이어지는 자기 대조에서는 보살이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과 반대 덕목,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와 담담함을 확인합니다. 타인의 두려움을 평가하는 표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감각적 욕망을 공포의 조건으로 먼저 살핀 장면 가운데 지금 마음에 닿는 부분과 걸리는 부분이 각각 있나요? 욕망이 마음을 무겁게 할 때 몸이나 생각에서 먼저 드러나는 신호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보살이 불편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한 뒤 욕심이 없음을 확인하고,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욕심이 많고 감각적 욕망에 강하게 끌린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욕심이 없다.
욕심이 없는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욕심이 없음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abhijjhālu kāmesu tibbasārāg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anabhijjhālūhamasmi. Ye hi vo ariyā anabhijjhālū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anabhijjhālut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자신이 욕심이 많고 감각적 욕망에 강하게 끌린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먼저 부정하고, “욕심이 없다”라고 반대 상태를 긍정합니다. 이어 욕심이 없는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안에서 욕심이 없음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닫습니다.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라는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앞의 허물 조건과 짝을 이루지만,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덕목이 없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묵상
바라는 대상에 마음이 강하게 끌리는 상태와 욕심 없음의 대조를 읽고 어떤 점이 가장 선명하며, 무엇이 아직 낯선가요? 욕심이 잠시 잦아들 때 숲처럼 낯선 자리도 다르게 느껴질 가능성이 있나요?
이 대목은 악의·해치려는 생각과 사랑의 마음의 대조 가운데 먼저 불편한 쪽의 조건을 밝힙니다. 깨닫기 전 보살은 악의에 찬 마음과 해치려는 생각을 품은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바로 그 악의와 해치려는 생각의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실을 허물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조건으로 특정합니다. 이어지는 자기 대조에서는 보살이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과 반대 덕목,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와 담담함을 확인합니다. 타인의 두려움을 평가하는 표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악의와 해치려는 생각을 공포의 조건으로 먼저 살핀 장면을 경의 흐름 안에서 볼 때 무엇이 달라 보이나요? 악의나 해치려는 생각이 생길 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알아차릴 여지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보살이 불편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한 뒤 사랑의 마음을 확인하고,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악의에 찬 마음과 해치려는 생각을 품은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사랑의 마음을 지녔다.
사랑의 마음을 지닌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사랑의 마음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byāpannacitto paduṭṭhamanasaṅkapp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mettacittohamasmi. Ye hi vo ariyā mettacittā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mettacittat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자신이 악의에 찬 마음과 해치려는 생각을 품은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먼저 부정하고, “사랑의 마음을 지녔다”라고 반대 상태를 긍정합니다. 이어 사랑의 마음을 지닌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안에서 사랑의 마음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닫습니다.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라는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앞의 허물 조건과 짝을 이루지만,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덕목이 없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묵상
이 인용문에서 악의·해치려는 생각과 사랑의 마음의 대조를 떠올리면 무엇이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사랑의 마음을 억지 감정으로 만들지 않고, 해치지 않으려는 작은 방향으로 느껴 볼 수 있을까요?
이 대목은 혼침과 졸음에 사로잡힘과 거기서 벗어남의 대조 가운데 먼저 불편한 쪽의 조건을 밝힙니다. 깨닫기 전 보살은 혼침과 졸음에 사로잡힌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바로 혼침과 졸음에 사로잡힌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실을 허물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조건으로 특정합니다. 이어지는 자기 대조에서는 보살이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과 반대 덕목,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와 담담함을 확인합니다. 타인의 두려움을 평가하는 표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혼침과 졸음을 공포의 조건으로 먼저 살핀 장면을 다시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남고,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듯한가요? 몸과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을 때 단순한 피로와 수행을 흐리는 혼침을 구별할 단서가 있나요?
보살이 불편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한 뒤 혼침과 졸음에서 벗어남을 확인하고,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혼침과 졸음에 사로잡힌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혼침과 졸음에서 벗어났다.
혼침과 졸음에서 벗어난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혼침과 졸음에서 벗어남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thinamiddhapariyuṭṭhit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vigatathinamiddhohamasmi. Ye hi vo ariyā vigatathinamiddhā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vigatathinamiddhat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자신이 혼침과 졸음에 사로잡힌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먼저 부정하고, “혼침과 졸음에서 벗어났다”라고 반대 상태를 긍정합니다. 이어 혼침과 졸음에서 벗어난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안에서 혼침과 졸음에서 벗어남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닫습니다.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라는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앞의 허물 조건과 짝을 이루지만,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덕목이 없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묵상
이 대목의 혼침과 졸음에 사로잡힘과 거기서 벗어남의 대조는 어떻게 들리며, 어떤 낱말이 오래 남나요? 충분히 쉬는 일과 혼침에서 깨어나는 일을 서로 반대라고 여기지 않고 구별해 볼 수 있을까요?
이 대목은 들뜨고 가라앉지 않은 마음과 가라앉은 마음의 대조 가운데 먼저 불편한 쪽의 조건을 밝힙니다. 깨닫기 전 보살은 들뜨고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바로 들뜨고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실을 허물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조건으로 특정합니다. 이어지는 자기 대조에서는 보살이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과 반대 덕목,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와 담담함을 확인합니다. 타인의 두려움을 평가하는 표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들뜸과 가라앉지 않음을 공포의 조건으로 먼저 살핀 장면 가운데 지금 마음에 닿는 부분과 걸리는 부분이 각각 있나요? 마음이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닐 때 그 움직임을 탓하지 않고 먼저 알아볼 수 있을까요?
보살이 불편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한 뒤 가라앉은 마음을 확인하고,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들뜨고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음이 가라앉은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가라앉은 마음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uddhato avūpasantacitt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vūpasantacittohamasmi. Ye hi vo ariyā vūpasantacittā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vūpasantacittat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자신이 들뜨고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먼저 부정하고, “마음이 가라앉았다”라고 반대 상태를 긍정합니다. 이어 마음이 가라앉은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안에서 가라앉은 마음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닫습니다.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라는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앞의 허물 조건과 짝을 이루지만,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덕목이 없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묵상
들뜨고 가라앉지 않은 마음과 가라앉은 마음의 대조를 읽고 어떤 점이 가장 선명하며, 무엇이 아직 낯선가요? 가라앉은 마음이 억눌림이 아니라 흔들림이 잦아든 상태라면 어떤 차이가 느껴지나요?
이 대목은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함과 의심을 건넘의 대조 가운데 먼저 불편한 쪽의 조건을 밝힙니다. 깨닫기 전 보살은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바로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실을 허물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조건으로 특정합니다. 이어지는 자기 대조에서는 보살이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과 반대 덕목,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와 담담함을 확인합니다. 타인의 두려움을 평가하는 표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의심과 망설임을 공포의 조건으로 먼저 살핀 장면을 경의 흐름 안에서 볼 때 무엇이 달라 보이나요? 확인할 수 있는 질문과 끝없이 맴도는 의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보살이 불편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한 뒤 의심을 건넜음을 확인하고,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의심을 건넜다.
의심을 건넌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의심을 건넘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kaṅkhī vicikicchī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tiṇṇavicikicchohamasmi. Ye hi vo ariyā tiṇṇavicikicchā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tiṇṇavicikicchat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자신이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먼저 부정하고, “의심을 건넜다”라고 반대 상태를 긍정합니다. 이어 의심을 건넌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안에서 의심을 건넘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닫습니다.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라는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앞의 허물 조건과 짝을 이루지만,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덕목이 없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묵상
이 인용문에서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함과 의심을 건넘의 대조를 떠올리면 무엇이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의심을 건넜다는 말을 모든 답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방향이 분명해진 상태로 읽으면 어떻게 느껴지나요?
이 대목은 자기 찬양·남 폄하와 두 행동을 하지 않음의 대조 가운데 먼저 불편한 쪽의 조건을 밝힙니다. 깨닫기 전 보살은 자신을 치켜세우고 남을 깎아내리는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바로 자신을 치켜세우고 남을 깎아내리는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실을 허물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조건으로 특정합니다. 이어지는 자기 대조에서는 보살이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과 반대 덕목,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와 담담함을 확인합니다. 타인의 두려움을 평가하는 표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자기를 높이고 남을 낮춤을 공포의 조건으로 먼저 살핀 장면을 다시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남고,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듯한가요?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이 남을 낮추는 말로 이어지는 순간이 있는지 판단 없이 알아볼 수 있을까요?
보살이 불편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한 뒤 자기를 높이지도 남을 낮추지도 않음을 확인하고,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치켜세우고 남을 깎아내리는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자신을 치켜세우지도 남을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자신을 치켜세우거나 남을 깎아내리지 않는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자기를 높이지도 남을 낮추지도 않음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attukkaṁsako paravambhī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anattukkaṁsako aparavambhīhamasmi. Ye hi vo ariyā anattukkaṁsakā aparavambhī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anattukkaṁsakataṁ aparavambhit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자신이 자신을 치켜세우고 남을 깎아내리는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먼저 부정하고, “자신을 치켜세우지도 남을 깎아내리지도 않는다”라고 반대 상태를 긍정합니다. 이어 자신을 치켜세우거나 남을 깎아내리지 않는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안에서 자기를 높이지도 남을 낮추지도 않음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닫습니다.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라는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앞의 허물 조건과 짝을 이루지만,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덕목이 없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묵상
이 대목의 자기 찬양·남 폄하와 두 행동을 하지 않음의 대조는 어떻게 들리며, 어떤 낱말이 오래 남나요? 자신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도 남을 낮추지 않는 자리는 어떤 균형으로 느껴지나요?
이 대목은 몸을 떨며 겁이 많음과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남의 대조 가운데 먼저 불편한 쪽의 조건을 밝힙니다. 깨닫기 전 보살은 몸을 떨며 겁이 많은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바로 몸을 떨며 겁이 많은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실을 허물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조건으로 특정합니다. 이어지는 자기 대조에서는 보살이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과 반대 덕목,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와 담담함을 확인합니다. 타인의 두려움을 평가하는 표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몸을 떨며 겁냄을 공포의 조건으로 먼저 살핀 장면 가운데 지금 마음에 닿는 부분과 걸리는 부분이 각각 있나요? 두려움이 몸에 먼저 나타날 때 그 반응을 잘못이라고 정하지 않고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보살이 불편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한 뒤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남을 확인하고,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몸을 떨며 겁이 많은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난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남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chambhī bhīrukajātik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vigatalomahaṁsohamasmi. Ye hi vo ariyā vigatalomahaṁsā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vigatalomahaṁsat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자신이 몸을 떨며 겁이 많은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먼저 부정하고,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라고 반대 상태를 긍정합니다. 이어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난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안에서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남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닫습니다.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라는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앞의 허물 조건과 짝을 이루지만,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덕목이 없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묵상
몸을 떨며 겁이 많음과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남의 대조를 읽고 어떤 점이 가장 선명하며, 무엇이 아직 낯선가요? 겁이 전혀 없어야 한다고 몰아붙이기보다, 몸의 놀람이 가라앉는 변화를 기다릴 여지가 있나요?
이 대목은 세속적 이득·존경·명성을 바람과 바라는 것이 적음의 대조 가운데 먼저 불편한 쪽의 조건을 밝힙니다. 깨닫기 전 보살은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바라는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바로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바라는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실을 허물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조건으로 특정합니다. 이어지는 자기 대조에서는 보살이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과 반대 덕목,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와 담담함을 확인합니다. 타인의 두려움을 평가하는 표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이득·존경·명성을 바람을 공포의 조건으로 먼저 살핀 장면을 경의 흐름 안에서 볼 때 무엇이 달라 보이나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고요한 자리를 흔들 때 무엇을 잃고 얻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보살이 불편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한 뒤 바라는 것이 적음을 확인하고,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바라는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바라는 것이 적다.
바라는 것이 적은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바라는 것이 적음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lābhasakkārasilokaṁ nikāmayamān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appicchohamasmi. Ye hi vo ariyā appicchā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appicchat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자신이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바라는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먼저 부정하고, “바라는 것이 적다”라고 반대 상태를 긍정합니다. 이어 바라는 것이 적은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안에서 바라는 것이 적음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닫습니다.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라는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앞의 허물 조건과 짝을 이루지만,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덕목이 없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묵상
이 인용문에서 세속적 이득·존경·명성을 바람과 바라는 것이 적음의 대조를 떠올리면 무엇이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바라는 것이 적다는 말을 포기가 아니라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리는 태도로 읽으면 어떤가요?
이 대목은 게으르고 정진이 약함과 정진을 일으킴의 대조 가운데 먼저 불편한 쪽의 조건을 밝힙니다. 깨닫기 전 보살은 게으르고 정진이 약한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바로 게으르고 정진이 약한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실을 허물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조건으로 특정합니다. 이어지는 자기 대조에서는 보살이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과 반대 덕목,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와 담담함을 확인합니다. 타인의 두려움을 평가하는 표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게으름과 약한 정진을 공포의 조건으로 먼저 살핀 장면을 다시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남고,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듯한가요? 쉬어야 할 때와 힘을 내지 않아 흐려질 때를 몸의 신호로 구별할 수 있을까요?
보살이 불편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한 뒤 정진을 일으킴을 확인하고,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게으르고 정진이 약한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정진을 일으켰다.
정진을 일으킨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정진을 일으킴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kusīto hīnavīriy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āraddhavīriyohamasmi. Ye hi vo ariyā āraddhavīriyā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āraddhavīriyat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자신이 게으르고 정진이 약한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먼저 부정하고, “정진을 일으켰다”라고 반대 상태를 긍정합니다. 이어 정진을 일으킨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안에서 정진을 일으킴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닫습니다.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라는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앞의 허물 조건과 짝을 이루지만,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덕목이 없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묵상
이 대목의 게으르고 정진이 약함과 정진을 일으킴의 대조는 어떻게 들리며, 어떤 낱말이 오래 남나요? 정진을 일으킨다는 말이 자신을 몰아붙임보다 다시 방향을 잡는 힘이라면 어떻게 다가오나요?
이 대목은 알아차림과 분명히 앎을 잃음, 그리고 알아차림을 확립함의 대조 가운데 먼저 불편한 쪽의 조건을 밝힙니다. 깨닫기 전 보살은 알아차림을 잃고 분명히 알지 못하는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바로 알아차림을 잃고 분명히 알지 못하는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실을 허물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조건으로 특정합니다. 이어지는 자기 대조에서는 보살이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과 반대 덕목,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와 담담함을 확인합니다. 타인의 두려움을 평가하는 표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알아차림을 잃음을 공포의 조건으로 먼저 살핀 장면 가운데 지금 마음에 닿는 부분과 걸리는 부분이 각각 있나요? 지금 하는 일을 잊고 자동으로 반응할 때 되돌아오게 하는 작은 신호가 있나요?
보살이 불편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한 뒤 알아차림을 확립함을 확인하고,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알아차림을 잃고 분명히 알지 못하는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알아차림을 확립했다.
알아차림을 확립한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알아차림을 확립함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muṭṭhassati asampajān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upaṭṭhitassatihamasmi. Ye hi vo ariyā upaṭṭhitassatī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upaṭṭhitassatit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자신이 알아차림을 잃고 분명히 알지 못하는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먼저 부정하고, “알아차림을 확립했다”라고 반대 상태를 긍정합니다. 이어 알아차림을 확립한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안에서 알아차림을 확립함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닫습니다.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라는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앞의 허물 조건과 짝을 이루지만,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덕목이 없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묵상
알아차림과 분명히 앎을 잃음, 그리고 알아차림을 확립함의 대조를 읽고 어떤 점이 가장 선명하며, 무엇이 아직 낯선가요? 분명히 앎은 부정형에만 나오고 긍정형은 알아차림 확립만 말하는 차이도 눈에 들어오나요?
이 대목은 집중되지 않아 흩어진 마음과 집중을 갖춘 마음의 대조 가운데 먼저 불편한 쪽의 조건을 밝힙니다. 깨닫기 전 보살은 집중되지 않아 마음이 흩어진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바로 집중되지 않아 마음이 흩어진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실을 허물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조건으로 특정합니다. 이어지는 자기 대조에서는 보살이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과 반대 덕목,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와 담담함을 확인합니다. 타인의 두려움을 평가하는 표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집중되지 않은 흩어진 마음을 공포의 조건으로 먼저 살핀 장면을 경의 흐름 안에서 볼 때 무엇이 달라 보이나요? 마음이 흩어진 사실을 실패로 만들지 않고 흩어지는 방향부터 알아볼 수 있을까요?
보살이 불편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한 뒤 집중을 갖춤을 확인하고,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집중되지 않아 마음이 흩어진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집중을 갖추었다.
집중을 갖춘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집중을 갖춤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asamāhito vibbhantacitt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samādhisampannohamasmi. Ye hi vo ariyā samādhisampannā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samādhisampad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자신이 집중되지 않아 마음이 흩어진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먼저 부정하고, “집중을 갖추었다”라고 반대 상태를 긍정합니다. 이어 집중을 갖춘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안에서 집중을 갖춤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닫습니다.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라는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앞의 허물 조건과 짝을 이루지만,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덕목이 없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묵상
이 인용문에서 집중되지 않아 흩어진 마음과 집중을 갖춘 마음의 대조를 떠올리면 무엇이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집중을 갖춘다는 말을 힘으로 붙잡기보다 한곳에 안정된 상태로 읽으면 어떻게 느껴지나요?
이 대목은 지혜가 없고 어리석음과 지혜를 갖춤의 대조 가운데 먼저 불편한 쪽의 조건을 밝힙니다. 깨닫기 전 보살은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수행자나 바라문이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문다면, 바로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허물 때문에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숲 자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실을 허물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인 마음과 행위의 상태를 조건으로 특정합니다. 이어지는 자기 대조에서는 보살이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부정과 반대 덕목,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와 담담함을 확인합니다. 타인의 두려움을 평가하는 표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지혜 없음과 어리석음을 공포의 조건으로 먼저 살핀 장면을 다시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남고,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듯한가요? 모르는 것을 감추는 태도와 배우려는 태도 사이에서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나요?
보살이 불편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고 부정한 뒤 지혜를 갖춤을 확인하고, 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담담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지혜를 갖추었다.
지혜를 갖춘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내가 하나다.’
바라문이여, 내 안에서 지혜를 갖춤을 보았기에 나는 숲에 머무는 일에 더욱 담담해졌느니라.
Na kho panāhaṁ duppañño eḷamūgo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paññāsampannohamasmi. Ye hi vo ariyā paññāsampannā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ṁ aññataro’ti. Etamahaṁ, brāhmaṇa, paññāsampadaṁ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ṁ araññe vihārāya.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자신이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먼저 부정하고, “지혜를 갖추었다”라고 반대 상태를 긍정합니다. 이어 지혜를 갖춘 채 숲에 머무는 고귀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하나라고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안에서 지혜를 갖춤을 보았기에 숲 생활에 더욱 담담해졌다고 닫습니다. 부정·긍정·고귀한 이들과의 관계·담담함이라는 네 단계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앞의 허물 조건과 짝을 이루지만,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덕목이 없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묵상
이 대목의 지혜가 없고 어리석음과 지혜를 갖춤의 대조는 어떻게 들리며, 어떤 낱말이 오래 남나요? 지혜를 갖추었다는 확인을 우월감보다 무엇이 이롭고 해로운지 분별하는 바탕으로 볼 수 있을까요?
보살은 사람들이 특별한 날로 여기는 밤을 한 달의 열나흗날·보름날·여드렛날 세 가지로 셉니다. 그런 밤에 두렵고 털이 곤두서는 동산 사당·숲 사당·나무 사당이라는 세 종류의 처소에 머물겠다고 생각합니다. 목적은 두려움을 부정하거나 자극을 찾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두려움과 공포를 볼 수 있으리라”라고 직접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이 선택은 아직 깨닫기 전 자신의 수행 경험이며, 모든 독자에게 위험한 장소로 가라고 요구하는 일반 처방이 아닙니다.
묵상
세 밤과 세 종류의 두려운 처소를 구체적으로 고른 장면 가운데 지금 마음에 닿는 부분과 걸리는 부분이 각각 있나요? 안전을 해치며 따라 해야 한다고 읽지 않고, 피하고 싶은 경험을 알아차리려는 의도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보살이 세 밤과 세 처소에 실제로 머물며 사슴·공작·바람의 세 소리를 듣고 이것이 공포인지 스스로 묻습니다.
그 뒤 바라문이여, 나는 사람들이 특별한 날로 여기는 밤에 그렇게 하였느니라.
한 달의 열나흗날과 보름날과 여드렛날에,
두렵고 털이 곤두서는 동산 사당·숲 사당·나무 사당 같은 처소에 머물렀느니라.
바라문이여, 그곳에 머물 때 사슴이 오거나 공작이 나뭇가지를 떨어뜨리거나 바람이 낙엽을 흔들었느니라.
그때 바라문이여,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느니라.
‘이것이 바로 다가오는 그 두려움과 공포인가?’
보살은 앞서 정한 열나흗날·보름날·여드렛날에 동산·숲·나무 사당 같은 처소에 실제로 머뭅니다. 그곳에서 사슴이 오거나 공작이 나뭇가지를 떨어뜨리거나 바람이 낙엽을 흔드는 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는 즉시 위험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이것이 바로 다가오는 그 두려움과 공포인가?”라고 묻습니다. 원인은 동물이나 바람의 움직임이고, 마음의 반응을 질문으로 확인하는 순서입니다. 작은 소리를 공포의 증거로 과장하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경계 반응을 죄나 실패로 만들지 않습니다.
묵상
사슴·공작·바람의 소리를 듣고 먼저 질문한 장면을 읽고 어떤 점이 가장 선명하며, 무엇이 아직 낯선가요? 놀람이 생겼을 때 사실과 예상이 같은지 바로 결론 내리지 않고 구별할 여지가 있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보살이 공포가 오는 자세를 바꾸지 않겠다고 정하고, 걸을 때 오면 서거나 앉거나 눕지 않은 채 걷다가 없앱니다.
그때 바라문이여,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느니라.
‘나는 왜 언제나 두려움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머무는가?
두려움과 공포가 어떤 상태의 나에게 오든, 바로 그 상태 그대로 그것을 없애 보리라.’
바라문이여, 내가 걷고 있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왔느니라.
바라문이여, 나는 걷는 채로 그것을 없앨 때까지 서지도 앉지도 눕지도 않았느니라.
Tassa mayhaṁ, brāhmaṇa, etadahosi: ‘kiṁ nu kho ahaṁ aññadatthu bhayapaṭikaṅkhī viharāmi? Yannūnāhaṁ yathābhūtaṁ yathābhūtassa me taṁ bhayabheravaṁ āgacchati, tathābhūtaṁ tathābhūtova taṁ bhayabheravaṁ paṭivineyyan’ti. Tassa mayhaṁ, brāhmaṇa, caṅkamantassa taṁ bhayabheravaṁ āgacchati. So kho ahaṁ, brāhmaṇa, neva tāva tiṭṭhāmi na nisīdāmi na nipajjāmi, yāva caṅkamantova taṁ bhayabheravaṁ paṭivinemi.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보살은 왜 늘 두려움이 오기만을 기다리느냐고 자신에게 묻고, 공포가 어떤 상태의 자신에게 오든 바로 그 상태 그대로 없애겠다고 정합니다. 첫 적용은 걷기입니다. 걸을 때 공포가 오자 서기·앉기·눕기의 세 자세로 바꾸지 않고, 걷는 채로 공포를 없앨 때까지 머뭅니다. 질문·결심·공포의 발생·세 부정·소멸이 같은 대목에 있습니다. 이는 위험한 상황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며, 외부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현실과 구별되는 깨닫기 전 보살 자신의 수행 방식입니다.
묵상
걷는 채로 공포를 없앨 때까지 세 다른 자세로 바꾸지 않은 장면을 경의 흐름 안에서 볼 때 무엇이 달라 보이나요? 실제 위험에서는 안전을 우선하면서도, 안전한 자리에서 불편함을 즉시 피하려는 반응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바라문이여, 내가 서 있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왔느니라.
바라문이여, 나는 선 채로 그것을 없앨 때까지 걷지도 앉지도 눕지도 않았느니라.
Tassa mayhaṁ, brāhmaṇa, ṭhitassa taṁ bhayabheravaṁ āgacchati. So kho ahaṁ, brāhmaṇa, neva tāva caṅkamāmi na nisīdāmi na nipajjāmi. Yāva ṭhitova taṁ bhayabheravaṁ paṭivinemi.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두 번째 자세는 서기입니다. 보살이 서 있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오며, 그는 걷기·앉기·눕기의 세 다른 자세로 바꾸지 않습니다. 선 채로 그것을 없앨 때까지 머문다는 조건이 문장을 닫습니다. 앞의 걷기와 구조는 같지만 현재 자세와 금지되는 세 자세의 목록이 달라집니다. 이 반복은 “그 자세 그대로”라는 원칙을 네 몸 자세에 빠짐없이 적용합니다. 외부의 실제 위협이나 신체적 한계를 무시하라는 뜻으로 넓히지 않고, 안전한 수행 상황에서 반응을 피하지 않은 경험으로 한정합니다.
묵상
이 인용문에서 선 자세에서 걷기·앉기·눕기를 모두 미룬 장면을 떠올리면 무엇이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자세를 흉내 내기보다 불편함이 생겼을 때 즉시 다른 상태로 달아나려는 마음이 있는지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바라문이여, 내가 앉아 있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왔느니라.
바라문이여, 나는 앉은 채로 그것을 없앨 때까지 눕지도 서지도 걷지도 않았느니라.
Tassa mayhaṁ, brāhmaṇa, nisinnassa taṁ bhayabheravaṁ āgacchati. So kho ahaṁ, brāhmaṇa, neva tāva nipajjāmi na tiṭṭhāmi na caṅkamāmi, yāva nisinnova taṁ bhayabheravaṁ paṭivinemi.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세 번째 자세는 앉기입니다. 보살이 앉아 있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오며, 눕기·서기·걷기의 세 자세로 바꾸지 않은 채 앉아서 그것을 없앱니다. 빠알리의 부정 목록 순서를 한국어에서도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걷기와 서기의 적용을 줄여 말하지 않고, 공포의 발생과 세 부정과 소멸 조건을 다시 온전히 옮겼습니다. 이 반복은 공포를 느끼는 사람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강요하는 지침이 아닙니다. 실제 위험이나 건강 문제에서는 안전한 이동과 도움 요청이 먼저일 수 있습니다.
묵상
앉은 채로 눕기·서기·걷기를 미룬 장면을 다시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남고,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듯한가요? 공포를 없애야 한다고 몰아붙이지 않고, 안전한 순간에 몸과 마음이 바꾸려는 방향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바라문이여, 내가 누워 있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왔느니라.
바라문이여, 나는 누운 채로 그것을 없앨 때까지 앉지도 서지도 걷지도 않았느니라.
Tassa mayhaṁ, brāhmaṇa, nipannassa taṁ bhayabheravaṁ āgacchati. So kho ahaṁ, brāhmaṇa, neva tāva nisīdāmi na tiṭṭhāmi na caṅkamāmi, yāva nipannova taṁ bhayabheravaṁ paṭivinemi.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네 번째 자세는 눕기입니다. 보살이 누워 있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오며, 앉기·서기·걷기의 세 자세로 바꾸지 않고 누운 채로 그것을 없앱니다. 이로써 걷기·서기·앉기·눕기의 네 자세가 모두 완성됩니다. 각 적용에는 현재 자세 하나, 바꾸지 않은 다른 자세 셋, 공포가 없어질 때까지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누운 채”를 생략해 단순한 버팀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 경험은 깨닫기 전 보살의 수행 기록이며, 공황이나 외상 반응에 전문적 도움을 받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묵상
이 대목의 누운 자세까지 이어진 네 번째 적용은 어떻게 들리며, 어떤 낱말이 오래 남나요? 네 자세의 반복에서 억지 인내보다 일관된 관찰이라는 면이 보이는지, 부담 없이 느껴 볼 수 있을까요?
세존은 실제 밤을 낮이라 여기고 실제 낮을 밤이라 여기는 두 가지 뒤바뀜을 먼저 들고, 그런 수행자와 바라문이 미혹에 빠져 머문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자신은 실제 밤이면 밤, 실제 낮이면 낮이라고 압니다. 부정적 두 대조와 긍정적 두 대조가 같은 순서로 맞물립니다. 이 말은 공포를 없앤 경험을 현실 부정이나 감각의 혼란으로 오해하지 않게 합니다. 세존은 두려운 밤을 낮이라고 상상해 견딘 것이 아니라, 밤임을 그대로 아는 가운데 수행했다고 밝힙니다.
묵상
밤을 밤으로, 낮을 낮으로 안다는 단순한 대조 가운데 지금 마음에 닿는 부분과 걸리는 부분이 각각 있나요? 불편한 현실을 다른 이름으로 덮지 않고 사실 그대로 알아차리는 태도는 어떻게 느껴지나요?
세존이 많은 사람과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미혹될 성질이 없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말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반복합니다.
바라문이여, 어떤 이를 두고 바르게 말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미혹될 성질이 없는 존재가 세상에 나타났다.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가엾이 여기며,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다.’ 그것은 바로 나를 두고 바르게 하는 말이니라.
‘미혹될 성질이 없는 존재가 세상에 나타났다.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가엾이 여기며,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다.’
세존은 “어떤 이를 두고 바르게 말한다면”이라는 도입 뒤 긴 선언을 제시합니다. 미혹될 성질이 없는 존재가 세상에 나타났고, 목적은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 세상에 대한 연민,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그것이 자신을 두고 하는 바른 말이라고 한 뒤 같은 선언을 다시 온전히 반복합니다. 첫 선언은 조건문의 인용이고 둘째는 적용된 결론이므로 두 번 모두 보존했습니다. 이 대목부터 화자는 깨닫기 전 경험을 넘어 깨달은 세존의 현재적 의미를 함께 밝힙니다.
묵상
같은 긴 선언을 조건과 결론에서 두 번 들려준 장면을 읽고 어떤 점이 가장 선명하며, 무엇이 아직 낯선가요? 개인의 평온이 많은 존재의 이익과 행복이라는 방향과 함께 놓인 점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정진·알아차림·고요한 몸·하나 된 마음을 갖춘 보살이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상태에서 벗어나 첫 번째 깊은 집중에 듭니다.
바라문이여, 나에게 굽히지 않는 정진이 일어났고 알아차림은 굳게 서서 흐려지지 않았으며, 몸은 고요하고 긴장이 풀렸고 마음은 집중되어 하나가 되었느니라.
바라문이여, 나는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상태에서 벗어나, 생각을 일으키고 이어 가며 고요에서 난 희열과 행복이 있는 첫 번째 깊은 집중에 들어 머물렀느니라.
깨닫기 전 보살의 수행은 공포를 없앤 뒤 깊은 집중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정진은 일어나 굽히지 않고, 알아차림은 굳게 서서 흐려지지 않으며, 몸은 고요하고 긴장이 풀리고, 마음은 집중되어 하나가 됩니다. 그 바탕에서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상태를 떠나 생각을 일으키고 이어 가며, 고요에서 난 기쁨과 행복이 있는 첫 번째 깊은 집중에 들어 머뭅니다. 준비의 네 묶음과 첫 단계의 조건·마음 작용·기쁨·행복을 모두 보존했습니다.
묵상
정진·알아차림·몸의 고요·마음의 통일이 첫 단계 앞에 놓인 구조를 경의 흐름 안에서 볼 때 무엇이 달라 보이나요? 한 요소만 억지로 만들기보다 여러 조건이 함께 무르익는 과정으로 읽히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생각의 작용이 잦아든 두 번째 단계에서 기쁨이 잦아들고 평온·알아차림·분명히 앎·행복이 있는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갑니다.
생각을 일으키고 이어 감이 잦아들자, 내적 확신과 마음의 통일이 있고 생각의 작용 없이 집중에서 난 희열과 행복이 있는 두 번째 깊은 집중에 들어 머물렀느니라.
희열이 사라지자 평정하게 머물며 알아차리고 분명히 알아 몸으로 행복을 느꼈느니라.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알아차리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하는 세 번째 깊은 집중에 들어 머물렀느니라.
Vitakkavicārānaṁ vūpasamā ajjhattaṁ sampasādanaṁ cetaso ekodibhāvaṁ avitakkaṁ avicāraṁ samādhijaṁ pītisukhaṁ du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āsiṁ.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āsiṁ,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ṁvedesiṁ; yaṁ taṁ ariyā ācikkhanti: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āsiṁ.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두 번째 깊은 집중에서는 생각을 일으키고 이어 가는 작용이 잦아지고, 내적 확신과 마음의 통일, 집중에서 난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세 번째에서는 그 기쁨도 사라져 평온하게 머물며 알아차리고 분명히 알아 몸으로 행복을 느낍니다. 고귀한 이들의 “평온하고 알아차리며 행복하게 머문다”는 선언도 보존했습니다. 두 단계는 각각 완결된 문장이며 한국어 인용을 합쳐도 규격 안입니다. 생각의 고요에서 기쁨의 고요로 이어지는 연속 변화라 한 대목으로 묶었습니다.
묵상
이 인용문에서 생각의 작용이 잦아든 뒤 기쁨도 잦아들어 평온으로 옮겨 가는 두 단계를 떠올리면 무엇이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강한 고양감이 줄어드는 일을 상실로만 보지 않을 때 어떤 변화가 보이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즐거움과 괴로움을 넘어 평온과 알아차림이 깨끗해진 마음을 과거 삶을 기억하는 첫 밝은 앎으로 기울입니다.
행복과 괴로움을 버리고 앞서 기쁨과 슬픔도 사라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정과 알아차림이 깨끗한 네 번째 깊은 집중에 들어 머물렀느니라.
그렇게 집중된 마음이 깨끗하고 밝으며 흠과 오염이 없고 유연하고 쓸 만하며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게 되자, 나는 과거 삶을 기억하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였느니라. 여러 과거 삶을 기억하였느니라.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ṁ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ṁ upekkhāsatipārisuddhiṁ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āsiṁ. So evaṁ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pubbenivāsānussatiñāṇāya cittaṁ abhininnāmesiṁ. So anekavihitaṁ pubbenivāsaṁ anussarāmi,
맛지마 니까야MN 4 두려움과 공포경 (Bhayabheravasutta)
배경
네 번째 깊은 집중에서는 행복과 괴로움, 앞선 기쁨과 슬픔이 사라지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가운데 평온과 알아차림이 깨끗합니다. 이어 그렇게 집중된 마음은 깨끗함·밝음·흠 없음·오염에서 벗어남·유연함·쓸 만함·굳건함·흔들리지 않음의 여덟 성질을 갖춥니다. 보살은 그 마음을 과거 삶을 기억하는 앎으로 기울입니다. 두 문장은 네 번째 단계가 첫 번째 밝은 앎의 도구로 바로 전환되는 한 흐름이어서 함께 두되, 깊은 집중 자체와 앎을 같은 성취로 합치지는 않았습니다.
묵상
네 번째 깊은 집중의 평온을 과거 삶을 기억하는 앎으로 기울인 전환을 다시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남고,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듯한가요? 고요함을 종착점으로 붙들기보다 무엇을 분명히 아는 바탕으로 삼는 구조는 어떻게 다가오나요?
한 번부터 십만 번과 여러 겁의 삶을 이름·가문·모습·음식·경험·수명 및 죽음과 재생의 세부와 함께 기억합니다.
한·두·세·네·다섯·열·스물·서른·마흔·쉰·백·천·십만 번의 삶과, 세계가 수축한 여러 겁·팽창한 여러 겁·수축하고 팽창한 여러 겁을 기억하였느니라.
‘그곳에서 이런 이름·가문·모습·음식·행복과 괴로움·수명을 지녔고 죽어 다른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도 이런 이름·가문·모습·음식·행복과 괴로움·수명을 지녔고 죽어 여기 태어났다.’ 이처럼 여러 과거 삶의 모습과 세부를 기억하였느니라.
과거 삶의 수량은 한·두·세·네·다섯, 열·스물·서른·마흔·쉰, 백·천·십만 번으로 늘어나고,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거나 둘 다 거친 여러 겁까지 이어집니다. 각 삶에서는 이름·가문·모습·음식·행복과 괴로움의 경험·수명의 끝을 기억하며, 그곳에서 죽어 다른 곳에 태어나고 다시 죽어 여기 태어난 흐름을 봅니다. 마지막의 “모습과 세부를 갖추어”도 보존했습니다. 긴 목록을 수량 없는 막연한 전생 기억으로 줄이지 않았습니다.
묵상
이 대목의 수량과 이름·가문·모습·음식·경험·수명을 세세히 기억한 장면은 어떻게 들리며, 어떤 낱말이 오래 남나요? 이 세계관에 대한 결론을 재촉하지 않고, 경이 첫 밝은 앎의 범위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제시하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과거 삶의 기억을 마친 뒤 세존은 그것을 밤의 첫 번째 시각에 얻은 첫 번째 밝은 앎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이어 무명이 사라짐/밝은 앎이 일어남, 어둠이 사라짐/빛이 일어남의 두 대칭쌍을 말합니다. 이는 부지런하고 열의를 내어 온 힘을 다해 머무는 이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덧붙입니다. 시각·앎의 순번·두 소멸과 두 발생·수행자의 세 성질을 모두 보존했습니다. 아직 최종 해탈은 아니며, 세 밝은 앎 가운데 첫 단계의 결산입니다.
묵상
첫 시각의 앎을 무명과 어둠의 사라짐, 밝은 앎과 빛의 일어남으로 말한 대목 가운데 지금 마음에 닿는 부분과 걸리는 부분이 각각 있나요? 무언가를 아는 일이 무엇을 덜어 내고 무엇을 밝히는지 함께 묻는 구조는 어떻게 느껴지나요?
첫 번째 밝은 앎 뒤 마음의 준비 문구가 다시 온전히 반복됩니다. 집중된 마음은 깨끗하고 밝으며 흠과 오염이 없고, 유연하고 쓸 만하며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그 마음을 존재들의 죽음과 태어남을 아는 앎으로 기울입니다. 앞에서는 자신의 여러 과거 삶을 기억했지만, 이제는 여러 존재가 죽고 태어나며 행위에 따라 가는 모습을 보는 방향으로 범위가 바뀝니다. 반복된 마음의 성질과 새 대상의 차이를 모두 보존했으며, 두 번째 앎의 실제 내용은 이어지는 긴 대목에서 펼쳐집니다.
묵상
같은 집중된 마음을 이번에는 존재들의 죽음과 태어남을 아는 데 기울인 장면을 읽고 어떤 점이 가장 선명하며, 무엇이 아직 낯선가요? 안정된 마음의 방향이 자기 기억에서 다른 존재의 흐름으로 넓어지는 점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신성한 눈으로 죽음과 태어남, 낮음과 높음, 아름다움과 추함, 좋은 곳과 나쁜 곳의 네 대조를 보고 두 결과를 구별합니다.
인간을 뛰어넘는 맑은 신성한 눈으로 존재들이 죽고 태어남, 낮고 높음·아름답고 추함·좋은 곳과 나쁜 곳·업을 따름을 보았느니라.
몸·말·마음의 악행, 고귀한 이 비난, 그릇된 견해와 그에 따른 행위로 죽은 뒤 좋지 않은 곳·나쁜 길·파멸처·지옥에 태어나는 이들과, 몸·말·마음의 선행, 고귀한 이를 비난하지 않음, 바른 견해와 그에 따른 행위로 죽은 뒤 좋은 곳·천상에 태어나는 이들을 보았느니라. 이처럼 …
세존은 인간을 뛰어넘는 맑은 신성한 눈으로 죽음/태어남·낮음/높음·아름다움/추함·좋은 곳/나쁜 곳의 네 대조와 업을 따름을 봅니다. 악한 쪽은 몸·말·마음의 악행, 고귀한 이 비난, 그릇된 견해와 그에 따른 행위, 죽은 뒤 좋지 않은 곳·나쁜 길·파멸처·지옥입니다. 선한 쪽은 세 선행, 비난하지 않음, 바른 견해와 그에 따른 행위, 좋은 곳·천상입니다. 마지막의 “이처럼” 뒤에는 첫 관찰이 그대로 반복되므로 한국어와 빠알리에서 같은 반복 범위만 일반 말줄임표로 줄였습니다. 새로운 목록이나 결과는 생략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피해나 처지를 보고 과거 행위를 추정하는 근거로 쓰지 않습니다.
묵상
두 행위 목록과 두 결과를 대칭으로 본 장면을 경의 흐름 안에서 볼 때 무엇이 달라 보이나요? 타인의 삶을 판정하지 않고, 몸·말·마음과 견해가 지금 내 선택에 어떤 방향을 주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존재들의 죽음과 태어남을 본 뒤, 세존은 그것을 밤의 가운데 시각에 얻은 두 번째 밝은 앎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무명이 사라지고 밝은 앎이 일어남,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일어남의 두 대칭쌍이 첫 결산과 똑같이 반복됩니다. 부지런하고 열의를 내어 온 힘을 다해 머무는 이에게 그러하다는 조건도 같습니다. 달라진 것은 첫/가운데라는 시각과 첫째/둘째라는 앎의 순번입니다. 반복을 일반 생략으로 줄이지 않고 직접 수록해 세 단계의 시간 순서를 보존했습니다.
묵상
이 인용문에서 가운데 시각에 같은 소멸과 발생의 문구가 다시 놓인 장면을 떠올리면 무엇이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반복 속에서 시간과 앎의 단계가 한 걸음 옮겨 간다는 점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세 번째로 마음의 준비 문구가 온전히 반복됩니다. 집중된 마음은 깨끗하고 밝으며 흠과 오염이 없고, 유연하고 쓸 만하며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과거 삶이나 다른 존재의 죽음과 태어남이 아니라 번뇌가 다함을 아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입니다. 같은 마음의 바탕 위에서 앎의 대상이 세 번째로 바뀝니다. 이는 최종 해탈로 이어지는 직접 도입이지만, 아직 괴로움과 번뇌에 관한 두 네 항목, 세 번의 풀림, 풀렸다는 앎과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선언이 남아 있습니다.
묵상
세 번째로 마음을 번뇌가 다함을 아는 데 기울인 장면을 다시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남고,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듯한가요? 마음의 안정이 단지 편안함에 머물지 않고 괴로움의 뿌리를 아는 방향으로 향하는 점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괴로움과 번뇌 각각에 대해 그것·일어남·소멸·소멸로 이끄는 길의 네 항목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나는 “이것은 괴로움”이라고 그대로 알았느니라.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라고 그대로 알았느니라.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그대로 알았느니라.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고 그대로 알았느니라.
나는 “이것들은 번뇌”라고 그대로 알았느니라. “이것은 번뇌의 일어남”이라고 그대로 알았느니라. “이것은 번뇌의 소멸”이라고 그대로 알았느니라. “이것은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고 그대로 알았느니라.
세존은 먼저 괴로움·괴로움의 일어남·괴로움의 소멸·그 소멸로 이끄는 길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이어 번뇌·번뇌의 일어남·번뇌의 소멸·그 소멸로 이끄는 길을 같은 구조로 압니다. 두 묶음은 각각 네 항목이며, 매 항목마다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았다”는 동사가 반복됩니다. 한국어도 두 목록을 일반 생략 없이 직접 옮겼습니다. 괴로움의 네 항목과 번뇌의 네 항목을 하나로 섞지 않고, 세 번째 밝은 앎에서 무엇을 알고 보았는지 여덟 관계로 보존했습니다.
묵상
이 대목의 괴로움과 번뇌를 각각 네 항목으로 있는 그대로 안다는 구조는 어떻게 들리며, 어떤 낱말이 오래 남나요? 소멸만 바라기보다 무엇이고 어떻게 일어나며 어떤 길이 이끄는지 함께 보는 방식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마음이 세 가지 번뇌에서 각각 풀리고 풀림을 알며, 태어남이 다하고 청정한 삶과 해야 할 일이 완성되었다고 밝힙니다.
이와 같이 알고 보자, 마음은 감각적 욕망의 번뇌에서 풀리고, 마음은 존재의 번뇌에서 풀리며, 마음은 무명의 번뇌에서 풀렸느니라.
풀려났을 때 “풀려났다”는 앎이 있었느니라.
나는 분명히 알았느니라.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일은 마쳤고, 이 상태로 다시 태어남은 없다.’
이와 같이 알고 보자 마음은 감각적 욕망의 번뇌·존재의 번뇌·무명의 번뇌에서 각각 풀립니다. 빠알리의 “마음이 풀렸다”가 세 관계마다 반복되므로 한국어도 “마음은 … 풀리고/풀리며/풀렸습니다”로 세 번 직접 보존했습니다. 이어 풀려났을 때 풀려났다는 앎이 있고, 태어남이 다함·청정한 삶의 완성·해야 할 일의 완수·이 상태로 다시 태어남이 없음의 네 선언을 분명히 압니다. 이는 깨닫기 전 회고 안에서 깨달음이 성취되는 지점이며, 이후 말은 깨달은 뒤의 관점입니다.
묵상
세 번의 풀림과 “풀려났다”는 앎, 네 완성 선언이 이어진 장면 가운데 지금 마음에 닿는 부분과 걸리는 부분이 각각 있나요? 변화 자체와 그 변화를 분명히 아는 일이 함께 놓인 점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번뇌에서 풀리고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선언 뒤, 세존은 이것을 밤의 마지막 시각에 얻은 세 번째 밝은 앎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무명이 사라지고 밝은 앎이 일어남,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일어남의 두 대칭쌍과 부지런함·열의·온 힘을 다함의 조건이 다시 반복됩니다. 첫 시각의 과거 삶 기억, 가운데 시각의 존재들의 죽음과 태어남, 마지막 시각의 번뇌 소멸이라는 세 순서가 완성됩니다. 이 지점까지가 깨닫기 전 보살의 회고이며, 뒤의 숲 생활은 깨달은 뒤 현재입니다.
묵상
밤의 첫·가운데·마지막 시각에 놓인 세 결산을 읽고 어떤 점이 가장 선명하며, 무엇이 아직 낯선가요? 긴 과정이 한 번의 도약이 아니라 시간과 단계의 순서로 제시되는 점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세존이 아직 탐욕·성냄·미혹 때문에 숲에 머문다는 추측을 부정하고 현재의 행복과 미래 사람에 대한 연민이라는 두 이유를 밝힙니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느니라.
‘수행자 고따마는 오늘날에도 탐욕과 성냄과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바라문이여,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되느니라.
바라문이여, 나는 두 가지 이로움을 보기 때문에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느니라.
현생에서 스스로 행복하게 머무는 일과 미래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는 일이니라.”
세존은 자누쏘니가 “오늘날에도 탐욕·성냄·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숲에 머무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음을 먼저 제시합니다. 곧바로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부정하고, 깨달은 뒤에도 외딴 숲속 처소에 머무는 두 이유를 셉니다. 하나는 현생에서 스스로 행복하게 머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는 일입니다. 깨닫기 전에는 공포를 만나고 세 밝은 앎을 얻는 수행의 장소였지만, 깨달은 뒤의 숲 생활은 결핍 때문이 아니라 행복과 연민이라는 시제 차이를 보존했습니다.
묵상
깨달은 뒤 숲에 머무는 이유를 현생의 행복과 미래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나눈 대목을 경의 흐름 안에서 볼 때 무엇이 달라 보이나요? 자신의 평온과 뒤에 올 사람을 향한 배려가 함께 가능한 관계로 놓인 점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자누쏘니가 미래 사람에 대한 연민을 인정하고 두 번 찬탄한 뒤 네 비유로 세존이 가르침을 밝혔다고 말합니다.
“고따마 존자는 완전한 분이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시니, 참으로 미래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십니다.
훌륭하십니다, 고따마 존자여! 훌륭하십니다, 고따마 존자여!
엎어진 것을 바로 세우고, 가려진 것을 드러내고,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리키고, 어둠에 등불을 들어 눈 있는 이가 형상을 보게 하듯, 고따마 존자는 여러 방법으로 가르침을 밝혀 주셨습니다.
세존의 답이 끝나자 화자는 다시 자누쏘니로 바뀝니다. 그는 바르게 깨달은 완전한 분인 고따마 존자가 미래 사람들을 참으로 가엾이 여긴다고 말하고, “훌륭하십니다”를 같은 호격과 함께 두 번 반복합니다. 이어 엎어진 것을 세움·가려진 것을 드러냄·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리킴·어둠에 등불을 듦의 네 비유로 가르침이 밝혀졌다고 찬탄합니다. 세존의 두 이유와 자누쏘니의 반응을 섞지 않았고, 두 번의 찬탄과 네 비유의 수량도 보존했습니다.
묵상
이 인용문에서 두 번의 찬탄과 네 비유로 응답한 자누쏘니의 말을 떠올리면 무엇이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네 비유 가운데 이 긴 설법을 들은 뒤 가장 잘 어울린다고 느껴지는 장면이 있나요?
찬탄을 마친 자누쏘니는 귀의 대상을 고따마 존자·가르침·수행자 승가의 셋으로 분명히 말합니다. 이어 시간 범위를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로 정하고, 귀의한 재가 신자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세존께 청합니다. 이 말은 세존의 직접 설법이 아니라 바라문 자누쏘니의 결단이며, 강요받은 명령이 아니라 들은 뒤 스스로 하는 요청입니다. 경은 숲의 공포에서 시작해 깨닫기 전 수행과 세 밝은 앎, 깨달은 뒤 숲 생활의 두 이유를 거쳐 질문자의 귀의로 닫힙니다.
묵상
세 대상을 밝히고 평생의 재가 신자로 기억해 달라고 청한 결말을 다시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남고,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듯한가요? 자누쏘니와 같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긴 대화에서 남은 한 문장만 알아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