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왓티 제따 숲에서 사리뿟따가 수행자들을 벗이라 부르고, 수행자들이 응답한 뒤 설법을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무셨습니다.
그곳에서 사리뿟따 님이 수행자들을 “벗들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수행자들은 “벗이여”라고 응답했고, 사리뿟따 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Evaṁ me sutaṁ—ekaṁ samayaṁ bhagavā sāvatthiyaṁ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Tatra kho āyasmā sāriputto bhikkhū āmantesi: “āvuso bhikkhave”ti. “Āvuso”ti kho te bhikkhū āyasmato sāriputtassa paccassosuṁ. Āyasmā sāriputto etadavoca:
맛지마 니까야MN 9 삼마딧티 숫따 (바른 견해)
배경
경은 부처님께서 머무신 곳을 밝힌 뒤, 말하는 이를 사리뿟따 님으로 분명히 바꿉니다. 사리뿟따 님이 수행자들을 “벗들이여”라고 부르자 수행자들도 “벗이여”라고 답하며, 이 호칭은 동료 수행자 사이의 문답임을 보여 줍니다. 첫 문장은 부처님께서 머무신 곳만 밝히며, 이어지는 말을 부처님의 직접 말씀으로 바꾸거나 부처님이 그 자리에 함께 계셨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이 관계가 이어지는 질문과 답의 바탕이 됩니다.
묵상
사리뿟따와 수행자들이 서로 “벗”이라 부르는 장면이 어떻게 느껴지나요? 가르치는 이와 듣는 이를 위아래로만 보지 않을 때 배움의 분위기가 달라지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사리뿟따가 바른 견해의 기준을 묻자 수행자들이 먼 곳에서도 와서 듣겠다며 직접 뜻을 밝혀 달라고 청합니다.
“벗들이여, ‘바른 견해, 바른 견해’라고 합니다. 벗들이여, 어떤 점에서 거룩한 제자를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르렀다고 합니까?”
“벗이여,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사리뿟따 님 앞에서 알기 위해 먼 곳에서도 오겠습니다. 사리뿟따 님께서 직접 뜻을 밝혀 주시면, 수행자들은 듣고 간직할 것입니다.”
사리뿟따는 먼저 ‘바른 견해’라는 말을 두 번 되풀이한 뒤 그 기준을 네 겹으로 묻습니다. 바른 견해를 지님, 견해가 곧음,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춤, 참된 가르침에 이름이 그 네 표현입니다. 수행자들은 답을 추측하지 않고 먼 곳에서도 와서 들을 만큼 그 뜻을 알고 싶다고 밝힙니다. 설명을 사리뿟따 자신에게 청하고 듣고 간직하겠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이 네 겹의 기준은 이후 각 묶음의 결론으로 반복됩니다.
묵상
바른 견해를 단지 한 생각이 아니라 견해의 곧음·확신·가르침에 이름과 함께 묻는 점이 어떻게 들리나요? 지금 가장 궁금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사리뿟따가 잘 들으라 한 뒤 선하지 않은 것과 선한 것, 그리고 각각의 뿌리를 아는 일을 첫 답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면 벗들이여, 듣고 잘 마음에 새기십시오. 내가 말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이 응답하자 사리뿟따 님이 말했습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선하지 않은 것과 그 뿌리, 선한 것과 그 뿌리를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청을 받은 사리뿟따는 듣기와 잘 마음에 새기기를 차례로 요청하고, 수행자들의 응답 뒤에 실제 답을 시작합니다. 첫 정의는 선하지 않은 것과 그 뿌리, 선한 것과 그 뿌리라는 네 갈래입니다. 선악을 가르는 데서 나아가 각각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함께 아는 것이 바른 견해의 첫 방식입니다. “벗”이라는 말이 네 번 나오는 것도 동료 사이의 문답임을 보여 줍니다. 다음 네 대목은 이 네 갈래를 하나씩 질문하고 답합니다.
묵상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만 구별할 때와 각각의 뿌리까지 함께 볼 때 무엇이 달라질까요? 지금 어떤 행동을 평가하기보다, 그 행동이 나온 마음의 뿌리를 모른 채 결론 내린 적이 있는지 조용히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몸의 셋·말의 넷·마음의 셋으로 이루어진 선하지 않은 열 가지 행위를 사리뿟따가 차례로 정의합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선하지 않은 것이며 그 뿌리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선한 것이며 그 뿌리는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생명을 죽임, 주지 않은 것을 가짐, 그릇된 성행위, 거짓말, 이간하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 남의 것을 탐냄, 악의, 그릇된 견해입니다. 벗들이여, 이것을 선하지 않은 것이라 합니다.”
네 갈래의 총론 뒤 첫 질문은 선하지 않은 것과 뿌리, 선한 것과 뿌리를 한꺼번에 다시 묻습니다. 답은 먼저 선하지 않은 열 항목을 몸의 세 행위, 말의 네 행위, 마음의 세 방향 순으로 놓습니다. 생명을 죽임부터 그릇된 견해까지 열 항목을 하나로 줄이지 않고 그대로 나열한 뒤, 마지막에는 “이것을 선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고 정리합니다. 선하지 않음은 구체적인 행위와 말과 마음의 방향을 가리키는 기준이며, 다음에는 그 세 뿌리가 이어집니다.
열 가지 행위의 목록 다음에는 그 목록을 낳는 세 뿌리가 나옵니다. 욕심·성냄·어리석음을 각각 선하지 않은 것의 뿌리라고 부릅니다. 뿌리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행동과 그 행동을 지탱하는 마음의 조건을 구별하게 합니다. 다음 대목은 열 항목을 반대 방향으로 제시해 선한 것을 밝히므로, 여기의 세 뿌리는 뒤의 욕심 없음·성냄 없음·어리석음 없음과 짝을 이룹니다.
묵상
욕심·성냄·어리석음 가운데 어떤 말이 행동보다 앞선 조건으로 가장 쉽게 느껴지나요? 한 반응의 바로 앞에서 무엇이 움직였는지만 가볍게 물어볼 수 있을까요?
선한 것의 답은 앞의 열 항목과 정확히 같은 순서를 유지하면서 방향을 바꿉니다. 처음 일곱 항목에는 ‘삼감’이라는 말이 각각 붙고, 마음의 셋은 남의 것을 탐내지 않음·악의 없음·바른 견해로 제시됩니다. 그래서 선함은 행동과 말을 멈추는 일곱 선택과 마음의 세 방향을 함께 포함합니다. 앞의 목록과 견주어 보면 무엇이 사라졌는지뿐 아니라 어떤 방향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지가 드러나며, 다음에는 그 선한 방향의 세 뿌리가 이어집니다.
묵상
일곱 가지 삼감과 마음의 세 방향 가운데 지금 구별하기 쉬운 하나가 있나요? 어떤 행동을 멈추는 것과 마음이 탐내지 않거나 해치지 않는 것 사이에 느껴지는 차이가 있는지 물어볼 수 있을까요?
선하지 않은 세 뿌리와 열 가지 선한 행위를 밝힌 뒤, 첫 묶음의 마지막 정의가 나옵니다. 욕심 없음·성냄 없음·어리석음 없음은 모두 선한 것의 뿌리라는 같은 말로 불립니다. 세 이름의 부정 접두사는 선한 뿌리가 욕심·성냄·어리석음이 약해지거나 없는 방향임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선택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묵상
욕심 없음·성냄 없음·어리석음 없음 가운데 힘주어 만들지 않아도 잠시 드러났던 방향이 있나요? 세 항목이 앞의 세 뿌리와 어떻게 반대가 되는지만 느껴 볼 수 있을까요?
선악과 두 뿌리를 아는 거룩한 제자가 세 잠재 성향과 모름을 버려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선하지 않은 것과 그 뿌리, 선한 것과 그 뿌리를 알면, 욕심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며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습니다.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켜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첫 묶음의 정의들을 안다는 조건은 구체적인 버림과 결과로 이어집니다. 욕심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림,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침,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음이 서로 다른 세 동작입니다. 이어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킨다는 말과,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낸다는 결과가 이어집니다. 마지막에는 바른 견해의 네 겹 기준이 다시 확인됩니다. 뿌리와 결과를 실제로 아는 데까지 바른 견해의 뜻이 이어집니다.
묵상
욕심을 버림·반감을 물리침·“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을 뿌리 뽑음이 다른 동사로 놓인 점이 보이나요? 세 표현 가운데 의미가 가장 분명하거나 가장 낯선 하나만 골라 느껴 볼 수 있을까요?
수행자들이 또 다른 방법을 묻자 사리뿟따가 자양분·일어남·소멸·소멸의 길을 아는 것으로 답합니다.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사리뿟따의 말에 기뻐하고 동의한 뒤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르는 다른 방법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자양분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선악 묶음을 마친 수행자들은 사리뿟따의 설명을 기뻐하고 동의한 뒤 같은 기준을 만족하는 다른 방법을 묻습니다. 사리뿟따는 있다고 답하고 존재를 유지시키는 자양분을 대상·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의 네 측면으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자양분은 먹는 것만이 아니라 다음 대목의 접촉·마음의 의도·의식까지 포함하는 넓은 조건입니다.
묵상
먹는 것만 떠올리던 자양분이 접촉과 의도와 의식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예고가 어떻게 들리나요? 나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조건을 음식 이외에서 하나 떠올릴 수 있는지만 물어볼까요?
태어난 존재를 유지하고 태어나려는 존재를 돕는 덩어리 음식·접촉·마음의 의도·의식 네 자양분을 밝힙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자양분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태어난 존재들을 유지하고 태어나려는 존재들을 돕는 네 자양분이 있습니다. 어떤 넷입니까?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 음식이 첫째, 접촉이 둘째, 마음의 의도가 셋째, 의식이 넷째입니다.”
자양분의 네 측면을 선언한 뒤 사리뿟따는 같은 네 항목을 질문하고 먼저 대상 자체를 풉니다. 네 자양분의 기능은 이미 태어난 존재의 유지와 태어나려는 존재의 도움이라는 두 방향입니다. 목록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 음식, 접촉, 마음의 의도, 의식의 순서입니다. 덩어리 음식만 물질적인 음식이고 나머지 셋은 경험과 의도가 지속되는 조건입니다. 다음 대목은 이 네 자양분 전체에 공통된 일어남과 멎음의 조건을 갈망으로 밝힙니다.
묵상
덩어리 음식·접촉·마음의 의도·의식 가운데 “자양분”이라는 말과 가장 낯설게 붙는 것은 무엇인가요? 어떤 접촉이나 의도가 반복될 때 마음이 계속 이어지는 경험이 있는지만 가볍게 느껴 볼까요?
네 자양분의 목록 뒤에는 그것들이 생기고 멎는 공통 조건이 나옵니다. 갈망이 일어나면 자양분이 일어나고, 갈망이 사라지면 자양분도 사라진다는 짝을 이룹니다. 이어 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거룩한 여덟 갈래 길이라고 밝히고, 바른 견해에서 바른 마음이 한곳에 모임까지 여덟 가지를 처음으로 빠짐없이 적습니다. 이 온전한 첫 목록은 뒤에서 줄여 쓸 때도 무엇이 생략되었는지 알아보는 기준이 됩니다.
묵상
자양분 자체를 없애라는 말보다 갈망의 일어남과 멎음을 조건으로 짚는 방식이 어떻게 들리나요? 어떤 경험을 계속 먹이는 갈망이 있는지, 없다면 여덟 길의 한 이름만 익숙하게 느껴지는지 물어볼까요?
자양분의 네 측면을 아는 거룩한 제자가 잠재 성향과 모름을 버리고 괴로움을 끝내는 결론입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자양분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며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습니다.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켜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자양분 묶음도 정의와 함께 그것을 아는 조건과 해방의 결과를 연결합니다. 대상·일어남·멎음·길을 모두 아는 거룩한 제자는 욕심의 잠재 성향을 버리고,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며,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습니다.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키는 것,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내는 것, 바른 견해의 네 기준도 앞의 결론과 같은 순서로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이 되풀이는 어떤 주제를 알든 같은 풀려남으로 이어짐을 보여 줍니다.
묵상
먹는 것과 접촉과 의도와 의식을 한 묶음으로 안다는 말이 괴로움의 끝과 연결되는 흐름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천천히 읽히나요?
수행자들의 반복 질문에 사리뿟따가 괴로움·일어남·소멸·소멸의 길을 아는 바른 견해로 답합니다.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사리뿟따의 말에 기뻐하고 동의한 뒤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르는 다른 방법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괴로움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자양분 묶음 뒤 수행자들은 다시 설명을 기뻐하고 동의하며 같은 질문을 합니다. 사리뿟따의 셋째 답은 괴로움과 그 일어남, 멎음, 멎음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네 진리입니다. 이 대목은 뒤에서 조건 따라 일어나는 고리마다 되풀이될 네 측면의 기본 틀을 세우며, 다음 네 대목이 괴로움부터 길까지 하나씩 정의합니다.
태어남·늙음·죽음과 슬픔에서 절망까지, 싫은 것과 만남·좋은 것과 헤어짐·뜻대로 되지 않음·다섯 집착 무더기를 밝힙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이고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음도 괴로우며, 죽음도 괴로움입니다. 슬픔·울부짖음·육체적 괴로움·정신적 괴로움·절망도 괴로움이고, 싫은 것과 만남, 좋은 것과 헤어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도 괴로움입니다. 요컨대 움켜쥐는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입니다. 벗들이여, 이것을 괴로움이라 합니다.”
네 진리의 첫 정의는 괴로움의 범위를 단계적으로 넓힙니다. 태어남·늙음·죽음 뒤에 슬픔·울부짖음·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의 다섯 경험이 오고, 싫은 것과 만남·좋은 것과 헤어짐·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의 세 관계가 이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이를 요약해 움켜쥐는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이라고 묶습니다. 어느 한 감정만 괴로움의 전부로 만들지 않고 삶의 조건과 경험과 움켜쥠을 함께 봅니다. 다음 답은 이 괴로움이 일어나는 조건을 갈망으로 밝힙니다.
묵상
긴 목록 가운데 지금 읽기 힘들거나 가까이 느껴지는 항목이 있나요? 지금 가장 가까이 느껴지는 경험이 있다면, 그것부터 가만히 바라볼 수 있을까요?
괴로움의 목록 다음에는 그 일어남을 설명하는 하나의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과 세 갈래가 나옵니다. 이 갈망은 다시 존재하게 하고, 즐김과 탐냄을 동반하며, 이곳저곳에서 즐기는 성질을 지닙니다. 이어 감각적 쾌락·존재·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망이 차례로 나옵니다. 좋아하는 것을 더 원하는 마음과 계속 존재하려는 방향, 존재하지 않으려는 방향이 모두 같은 갈망에 속합니다. 다음 대목은 “바로 그 갈망”이 남김없이 사라지는 일을 멎음이라고 말합니다.
묵상
감각적 쾌락·존재·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세 갈망 가운데 뜻이 가장 낯선 것은 무엇인가요? 계속되기를 바람과 사라지기를 바람이 모두 붙듦일 수 있는지만 물어볼까요?
일어남을 낳는 세 갈망(딴하) 뒤에는 괴로움의 멎음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바로 그 갈망”이 남김없이 식어 사라짐을 가리킵니다. 내어 줌·놓아 버림·해방·기대지 않음은 그 사라짐을 네 가지로 풀어낸 말입니다. 괴로움을 일으키던 갈망과 기대가 힘을 잃고 가라앉습니다. 다음에는 이 멎음으로 이끄는 실천의 길이 이어집니다.
묵상
내어 줌·놓아 버림·해방·기대지 않음 가운데 같은 방향을 조금 다르게 보여 주는 말이 있나요? 네 말 중 지금 가장 부드럽게 들리는 하나만 골라 느껴 볼 수 있을까요?
네 진리의 넷째 답은 멎음으로 이끄는 실천의 길을 묻고 거룩한 여덟 갈래 길이라고 답합니다. 바른 견해와 바른 마음이 한곳에 모임 사이에 있는 바른 의도·말·행위·생계·노력·알아차림 여섯 항목은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부분이라 줄여 적었습니다. 그 전체 범위는 자양분 묶음에서 이미 여덟 항목으로 온전히 나온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이 길이 괴로움의 멎음으로 이끄는 길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묵상
바른 견해에서 바른 마음이 한곳에 모임까지의 길이 괴로움을 직접 비난하거나 밀쳐 내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 어떻게 들리나요? 이미 익숙하거나 지금 궁금한 한 갈래가 있는지만 물어볼 수 있을까요?
괴로움의 네 측면을 아는 거룩한 제자가 세 잠재 성향과 모름을 버리고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괴로움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며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습니다.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켜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괴로움·일어남·멎음·길의 정의를 마친 뒤 첫 두 묶음과 같은 해방의 결론이 온전히 반복됩니다. 네 진리를 아는 조건에서 욕심·반감·“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세 잠재 성향을 각각 버리고 물리치고 뿌리 뽑습니다. 모름을 버림과 참된 앎을 일으킴,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냄, 바른 견해의 네 기준이 차례로 이어집니다. 이 결론 뒤부터 사리뿟따는 늙음과 죽음에서 모름까지 조건의 고리를 거꾸로 짚으며, 각 고리에도 같은 네 측면의 틀을 적용합니다.
묵상
네 진리가 다시 잠재 성향과 모름의 버림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어느 연결이 가장 또렷하거나 낯선가요?
수행자들의 반복 질문에 사리뿟따가 늙음과 죽음·일어남·소멸·소멸의 길을 아는 것으로 답합니다.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사리뿟따의 말에 기뻐하고 동의한 뒤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르는 다른 방법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늙음과 죽음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네 진리를 들은 수행자들은 사리뿟따의 말에 기뻐하고 동의한 뒤, 같은 바른 견해에 이르는 다른 설명이 있는지 다시 묻습니다. 여기서도 기쁨과 동의를 표하고 다시 묻는 모습, 바른 견해의 네 기준이 모두 나타납니다. 사리뿟따는 “있습니다”라고 답하고, 늙음과 죽음과 그 일어남, 멎음, 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아는 것이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밝힙니다.
묵상
늙음과 죽음을 피해야 할 낱말로만 두지 않고, 무엇에서 일어나며 어떻게 멎는지까지 함께 묻는 구성이 어떻게 들리나요? 지금 떠오르는 느낌이 있다면 그것만 가만히 알아차려 볼 수 있을까요?
늙음을 노쇠·이 부러짐·머리 셈·피부 주름·수명 쇠퇴·감각 기능 쇠퇴까지 일곱 표현으로 정의합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늙음과 죽음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여러 존재가 저마다 속한 존재 부류에서 겪는 늙음, 노쇠, 이가 부러짐, 머리가 셈, 피부가 주름짐, 수명이 쇠퇴함, 감각 기능이 쇠퇴함을 말합니다. 벗들이여, 이것을 늙음이라 합니다.”
네 측면을 선언한 뒤 먼저 늙음을 풉니다. 여러 존재가 저마다 속한 삶의 자리에서 겪는 늙음·노쇠·이가 부러짐·머리가 셈·피부가 주름짐·수명이 쇠퇴함·감각 기능이 쇠퇴함이라는 일곱 가지로 늙음을 설명합니다. 마지막 감각 기능의 쇠퇴는 몸이 늙으며 보고 듣는 힘도 함께 약해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늙음을 한 순간이나 외모 하나로 줄이지 않고 몸과 수명과 감각 기능에 걸친 변화로 정의합니다. 다음 대목은 죽음의 더 긴 목록을 별도로 묻고 답합니다.
묵상
일곱 표현 가운데 늙음을 단순한 나이 숫자와 다르게 느끼게 하는 말이 있나요? 몸의 변화를 좋다 나쁘다로 가르지 않고, 지금 가만히 바라볼 수 있을까요?
죽음을 떠남·사라짐·무더기의 해체·시신이 놓임·생명 기능의 끊어짐 등으로 정의한 뒤 늙음과 죽음으로 묶습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죽음입니까?
여러 존재가 저마다 속한 존재 부류에서 떠남, 사라짐, 무너짐, 없어짐, 죽음, 숨이 끊어짐, 목숨을 마침, 무더기의 해체, 시신이 놓임, 생명 기능의 끊어짐을 말합니다. 벗들이여, 이것을 죽음이라 합니다.
이것이 늙음이고 이것이 죽음이니, 벗들이여, 이것을 늙음과 죽음이라 합니다.”
늙음의 정의와 구별해 죽음을 다시 묻습니다. 여러 존재가 저마다 속한 삶의 자리에서 겪는 일로, 떠남·사라짐·무너짐·없어짐·죽음·목숨을 마침·무더기의 해체·시신이 놓임·생명 기능의 끊어짐까지 아홉 가지로 죽음을 설명합니다. 시신이 놓이는 것까지 포함해 몸이 다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짚습니다. 늙음과 죽음을 각각 정의한 뒤 하나로 묶었고, 죽음을 권하거나 미화하는 뜻은 없습니다.
묵상
늙음과 죽음을 각각 정의한 뒤 하나로 묶는 순서가 어떻게 다가오나요? 떠남·사라짐·무너짐 같은 말 가운데 지금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이 있나요?
태어남에 기대어 일어나는 늙음과 죽음을 네 측면으로 아는 일이 해방의 정형과 괴로움의 끝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늙음과 죽음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늙음과 죽음을 각각 정의하고 태어남을 그 조건으로 밝힌 뒤, 사리뿟따는 이 네 측면을 아는 거룩한 제자의 결과를 말합니다.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합니다. 그 사이에는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고,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을 뿌리 뽑고,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키는 과정이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형태로 들어 있습니다.
묵상
늙음과 죽음을 아는 데는 일어남과 멎음과 그 길을 함께 보는 것도 들어가요. 늙음·죽음·일어남·멎음·길 가운데 지금 가장 마음에 닿는 것은 무엇인가요?
공식 생략된 반복 질문에 사리뿟따가 태어남·일어남·소멸·소멸의 길을 아는 것으로 답합니다.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 다시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는 또 다른 방법도 …”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태어남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태어남을 여섯 표현으로 정의하고 존재의 일어남·소멸 및 고귀한 여덟 갈래 길과 연결합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태어남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여러 존재가 저마다 속한 존재 부류에서 겪는 태어남, 생겨남, 잉태, 출생, 무더기의 나타남, 감각 영역의 획득을 말합니다. 벗들이여, 이것을 태어남이라 합니다.
존재의 일어남에서 태어남의 일어남이 있고, 존재의 멎음에서 태어남의 멎음이 있습니다. 그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 곧 바른 견해 … 바른 집중입니다.”
태어남은 여러 존재가 저마다 속한 삶의 자리에서 겪는 일로, 생겨남·잉태·출생·무더기의 나타남·감각 영역의 획득까지 여섯 가지로 설명됩니다. 존재가 생기면 태어남도 생기고, 존재가 멎으면 태어남도 멎습니다. 이는 태어남을 경험을 이루는 무더기와 감각 영역이 드러나는 과정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묵상
태어남을 무더기의 나타남과 감각 영역의 획득까지 포함해 설명하는 점이 어떻게 들리나요? 여섯 표현 가운데 이해되는 하나와 낯선 하나가 있는지만 느껴 볼 수 있을까요?
태어남의 여섯 표현과 존재라는 조건을 네 측면으로 아는 일이 생략된 해방의 정형 뒤 괴로움의 끝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태어남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태어남을 생겨남·잉태·출생·무더기의 나타남·감각 영역의 획득까지 여섯 표현으로 밝히고, 존재에 따른 일어남과 멎음을 설명한 뒤 결과가 이어집니다. 이 대목은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림과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냄을 직접 말합니다. 탐냄의 잠재 성향과 함께 반감의 잠재 성향,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버리고, 모름을 버려 참된 앎을 일으킵니다. 바른 견해를 이루는 네 기준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묵상
태어남에 무더기의 나타남과 감각 영역의 획득까지 포함된다는 설명에서 익숙한 뜻과 다른 부분이 있나요?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 다시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는 또 다른 방법도 …”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존재와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감각적 욕망·물질·비물질의 세 영역에서의 존재를 밝히고 집착을 일어남과 소멸의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존재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세 가지 존재가 있습니다. 곧 감각적 욕망의 영역에 속한 존재, 물질 영역에 속한 존재, 비물질 영역에 속한 존재입니다.
집착의 일어남에서 존재의 일어남이 있고, 집착의 멎음에서 존재의 멎음이 있습니다. 그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 곧 바른 견해 … 바른 집중입니다.”
존재는 감각적 욕망의 영역·물질 영역·비물질 영역,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집착이 생기면 존재도 생기고, 집착이 멎으면 존재도 멎습니다.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입니다. 존재를 막연한 실재로 고정하지 않고, 세 영역과 집착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일어나고 멎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묵상
감각적 욕망·물질·비물질이라는 세 영역에 속한 존재가 한 묶음으로 놓인 점에서 무엇이 보이나요?
감각적 욕망·물질·비물질의 세 영역에서 이어지는 존재와 집착이라는 조건을 아는 일이 잠재 성향의 버림과 괴로움의 끝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존재와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사리뿟따는 존재를 감각적 욕망의 영역, 물질 영역, 비물질 영역에 속한 존재로 구별하고 집착을 그 조건으로 제시한 뒤, 이 전체를 아는 결과를 말합니다.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합니다. 그 사이에는 반감과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다루고,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키는 과정이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형태로 들어 있습니다.
묵상
감각적 욕망·물질·비물질이라는 세 영역보다 그것들을 일으키는 집착이라는 조건이 더 선명하게 들리나요? 지금 내 삶에서 붙드는 마음이 어떤 존재 방식으로 이어지는지 가만히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 다시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는 또 다른 방법도 …”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집착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존재의 결론 다음에 수행자들은 다시 질문하고, 사리뿟따는 집착과 그 일어남·멎음·길을 아는 일을 바른 견해의 또 다른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이어지는 정의에서는 감각적 쾌락·견해·계율과 의례·자아 주장이라는 네 집착을 구별하고,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을 집착의 조건으로 밝힙니다.
묵상
집착이 감각적 쾌락뿐 아니라 견해·계율과 의례·자아 주장에도 미칠 수 있다는 예고가 어떤 차이를 만드나요?
“벗들이여, 무엇이 집착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네 가지 집착이 있습니다. 곧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 자아 주장에 대한 집착입니다.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의 일어남에서 집착의 일어남이 있고, 갈망의 멎음에서 집착의 멎음이 있습니다. 그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 곧 바른 견해 … 바른 집중입니다.”
집착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 자아 주장에 대한 집착입니다. 집착은 감각 대상만이 아니라 생각과 규범과 자아에 대한 붙듦까지도 포함합니다.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이 생기면 집착도 생기고, 갈망이 멎으면 집착도 멎습니다. 갈망이 붙듦으로 굳는 조건을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묵상
감각적 쾌락·견해·계율과 의례·자아 주장 가운데 “집착”이라는 말이 예상 밖으로 붙는 대상이 있나요? 갈망이 한 생각이나 규범을 붙드는 순간이 있는지만 가볍게 물어볼까요?
네 가지 집착과 그것을 일으키는 갈망을 네 측면으로 아는 일이 해방의 정형과 괴로움의 끝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집착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감각적 쾌락·견해·계율과 의례·자아 주장이라는 네 집착과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의 조건 관계를 밝힌 뒤, 사리뿟따는 그것을 아는 거룩한 제자의 결과를 말합니다. 탐냄의 잠재 성향을 버림과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냄은 직접 제시됩니다.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고, 자아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고,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킵니다. 바른 견해를 이루는 네 기준은 결론에 그대로 남습니다.
묵상
감각 대상보다 견해나 자아 주장에 대한 집착이 더 알아보기 어렵게 느껴지나요? 갈망이 붙듦으로 굳어지는 한 순간이 있는지, 없다면 네 범주의 차이만 남겨 보아도 충분해요.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 다시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는 또 다른 방법도 …”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여섯 갈망 무리가 있습니다. 곧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에 나타나는 것에 대한 갈망입니다.
느낌의 일어남에서 갈망의 일어남이 있고, 느낌의 멎음에서 갈망의 멎음이 있습니다. 그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 곧 바른 견해 … 바른 집중입니다.”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은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에 나타나는 것, 이렇게 여섯 대상에 따라 나뉩니다. 마지막은 마음에 나타나는 것에 대한 갈망을 가리킵니다. 느낌이 생기면 갈망도 생기고, 느낌이 멎으면 갈망도 멎으며, 그 길은 바른 견해부터 바른 집중까지 이어지는 여덟 갈래 길입니다. 이는 감각 대상 자체보다 접촉 뒤 생긴 느낌이 더 원하거나 밀쳐 내는 갈망의 가까운 조건임을 보여 줍니다.
묵상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에 나타나는 것 가운데 느낌에서 갈망으로 넘어가는 흐름이 비교적 쉽게 보이는 대상이 있나요? 한 접촉 뒤 “더”나 “싫어”가 붙는 순간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여섯 감각 대상에 대한 갈망과 느낌이라는 조건을 아는 일이 잠재 성향의 버림과 괴로움의 끝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을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에 대한 여섯 방향으로 나누고 느낌을 그 조건으로 밝힌 뒤, 이를 아는 결과가 이어집니다. 직접 남은 것은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림과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냄입니다.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고, 자아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고,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킵니다. 바른 견해를 이루는 네 기준은 그대로 제시됩니다.
묵상
갈망이 대상에서 곧장 생긴다고 보기보다 느낌을 조건으로 일어난다는 설명이 어떤 여지를 열어 주나요? 둘 사이에 작은 간격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 다시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는 또 다른 방법도 …”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느낌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의 결론 뒤 수행자들은 다시 바른 견해의 다른 설명을 묻고, 사리뿟따는 느낌과 그 일어남·멎음·길을 아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이어지는 정의는 눈에서 마음까지 여섯 접촉에서 생긴 느낌을 나누며, 접촉을 느낌의 일어남과 멎음을 좌우하는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묵상
느낌을 좋고 나쁜 개인적 평가로만 보지 않고 여섯 접촉에서 생기는 것으로 묻는 방식이 어떻게 들리나요?
“벗들이여, 무엇이 느낌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여섯 느낌 무리가 있습니다. 곧 눈·귀·코·혀·몸·마음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입니다.
접촉의 일어남에서 느낌의 일어남이 있고, 접촉의 멎음에서 느낌의 멎음이 있습니다. 그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 곧 바른 견해 … 바른 집중입니다.”
느낌은 눈·귀·코·혀·몸·마음의 접촉에서 생긴 것으로 여섯 가지로 구별됩니다. 각 느낌이 어떤 접촉에서 생겨났는지를 함께 밝힙니다. 접촉이 생기면 느낌도 생기고, 접촉이 멎으면 느낌도 멎습니다. 느낌을 내 성격이나 의지로 고정하기 전에, 그 느낌이 어떤 접촉에서 생겼는지 먼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묵상
눈·귀·코·혀·몸·마음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 가운데 지금 가장 알아보기 쉬운 것은 무엇인가요? 느낌 바로 앞에 어떤 만남이 있었는지만 가볍게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여섯 접촉에서 생긴 느낌과 그 조건 관계를 아는 일이 생략된 해방의 정형 뒤 괴로움의 끝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느낌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사리뿟따는 눈·귀·코·혀·몸·마음에서 생기는 여섯 가지 느낌과, 그 느낌이 일어나고 멎는 조건을 아는 결과를 말합니다. 이를 알면 탐냄에 끌리는 성향과 반감에 끌리는 성향을 버리고, ‘나는 있다’는 생각과 자만의 성향을 뿌리 뽑으며,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켜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이 네 가지를 아는 것이 바른 견해의 기준입니다.
묵상
느낌이 접촉에 기대어 일어난다면, 느낌을 곧바로 나 자신이나 영구한 상태라고 보는 습관은 조금 달라질 수 있을까요? 접촉과 느낌의 순서만 구별되어도 충분해요.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 다시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는 또 다른 방법도 …”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접촉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느낌의 결론 뒤 수행자들은 다시 기뻐하며 동의하고, 바른 견해에 이르는 다른 방법을 묻습니다. 사리뿟따는 “있습니다”라고 답한 뒤 접촉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아는 일을 제시합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 눈·귀·코·혀·몸·마음의 여섯 접촉을 밝히고, 여섯 감각 영역이 생기면 접촉도 생기고 감각 영역이 멎으면 접촉도 멎는다고 말합니다.
묵상
접촉은 눈·귀·코·혀·몸·마음에서 만남이 일어나는 여섯 가지로 펼쳐져요. 이 가운데 지금 가장 쉽게 떠오르는 만남은 무엇인가요?
눈에서 마음까지 여섯 접촉을 밝히고 여섯 감각 영역을 그 일어남과 소멸의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접촉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여섯 접촉 무리가 있습니다. 곧 눈·귀·코·혀·몸·마음의 접촉입니다.
여섯 감각 영역의 일어남에서 접촉의 일어남이 있고, 여섯 감각 영역의 멎음에서 접촉의 멎음이 있습니다. 그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 곧 바른 견해 … 바른 집중입니다.”
눈에서 마음까지 여섯 접촉과 여섯 감각 영역이라는 조건을 아는 일이 해방의 정형과 괴로움의 끝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접촉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눈·귀·코·혀·몸·마음의 여섯 접촉을 밝히고 여섯 감각 영역을 그 조건으로 제시한 뒤, 사리뿟따는 이를 아는 거룩한 제자를 말합니다. 탐냄에 끌리는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반감에 끌리는 성향을 물리치고, ‘나는 있다’는 생각과 자만의 성향을 뿌리 뽑으며,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킵니다. 바른 견해를 이루는 네 기준은 결론에서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묵상
접촉을 여섯 감각 영역에 따른 서로 다른 만남으로 보면 경험이 어떻게 달라 보이나요? 어느 문을 닫거나 자극을 피하도록 요구하는 뜻은 아니에요.
공식 생략된 반복 질문에 사리뿟따가 여섯 감각 영역·일어남·소멸·소멸의 길을 아는 것으로 답합니다.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 다시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는 또 다른 방법도 …”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여섯 감각 영역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여섯 감각 영역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여섯 감각 영역이 있습니다. 곧 눈·귀·코·혀·몸·마음의 영역입니다.
정신과 물질의 일어남에서 여섯 감각 영역의 일어남이 있고, 정신과 물질의 멎음에서 여섯 감각 영역의 멎음이 있습니다. 그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 곧 바른 견해 … 바른 집중입니다.”
여섯 감각 영역은 눈·귀·코·혀·몸·마음의 영역으로 정확히 여섯 가지입니다. 앞서 다룬 접촉이 일어나는 여섯 바탕을 따로 밝힌 것이며, 대상의 종류와 감각 기능을 하나로 뒤섞지 않습니다. 정신과 물질이 생기면 여섯 감각 영역도 생기고, 정신과 물질이 사라지면 여섯 감각 영역도 사라집니다. 감각의 문들도 정신과 물질이라는 조건에 기대어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묵상
눈·귀·코·혀·몸·마음이 경험의 여섯 감각 영역으로 나란히 놓인 점이 어떻게 들리나요? 지금 한 영역이 작동하는 데 정신과 몸의 조건이 함께 필요한지 가볍게 느껴 볼 수 있을까요?
눈·귀·코·혀·몸·마음의 영역과 정신과 물질이라는 조건을 아는 일이 괴로움의 끝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여섯 감각 영역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여섯 감각 영역을 눈·귀·코·혀·몸·마음으로 빠짐없이 밝히고 정신과 물질을 그 조건으로 설명한 뒤, 이 네 측면을 아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대로 남는 것은 탐냄에 끌리는 성향을 버림과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냄, 두 가지입니다. 가운데 줄인 부분에는 반감에 끌리는 성향을 물리치고, 자아 견해와 자만의 성향을 버리며, 모름을 버려 참된 앎을 일으키는 과정이 들어갑니다. 바른 견해의 네 기준은 결론에서 모두 되풀이됩니다.
묵상
여섯 감각 영역이 정신과 물질에 기대어 일어난다면, 감각을 변하지 않는 내 소유로 보는 느낌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 다시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는 또 다른 방법도 …”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정신과 물질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여섯 감각 영역에 대한 답 뒤 수행자들은 다시 기뻐하며 동의하고, 바른 견해에 이르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묻습니다. 사리뿟따는 정신과 물질,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아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이어 정신을 느낌·인식·의도·접촉·마음 기울임으로, 물질을 네 큰 요소와 거기서 비롯된 물질로 나누고, 의식을 전체의 조건으로 밝힙니다.
느낌·인식·의도·접촉·마음 기울임을 정신으로, 네 큰 요소와 거기서 비롯된 물질을 물질로 정의합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정신과 물질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느낌·인식·의도·접촉·마음 기울임이 있습니다. 벗들이여, 이것을 정신이라 합니다. 네 큰 요소와 네 큰 요소에서 비롯된 물질이 있습니다. 벗들이여, 이것을 물질이라 합니다.
이것이 정신이고 이것이 물질이니, 벗들이여, 이것을 정신과 물질이라 합니다.”
정신과 물질의 정의는 두 가지를 먼저 따로 풉니다. 정신은 느낌·인식·의도·접촉·마음 기울임의 다섯 가지이고, 물질은 네 가지 큰 요소와 그 요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이고 이것이 물질”이라고 다시 가리킨 뒤 하나로 묶습니다. 다음 대목은 이 전체가 의식에 따라 일어나고 멎는다고 밝힙니다.
묵상
느낌·인식·의도·접촉·마음 기울임의 다섯 정신 항목 가운데 지금 가장 쉽게 알아차려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정신의 다섯 항목과 물질의 바탕, 의식이라는 조건을 아는 일이 잠재 성향의 버림과 괴로움의 끝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정신과 물질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정신은 느낌·인식·의도·접촉·마음 기울임의 다섯 가지로, 물질은 네 가지 큰 요소와 거기서 비롯된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의식이 그 조건이 됩니다. 이를 알면 탐냄에 끌리는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가운데 줄인 부분에는 반감에 끌리는 성향을 물리치고 ‘나는 있다’는 생각과 자만의 성향을 뿌리 뽑으며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키는 과정이 들어갑니다.
묵상
느낌·인식·의도·접촉·마음 기울임과 물질의 바탕이 의식과 관계 맺는 설명에서 어느 연결이 가장 낯선가요? 지금 이 순간, 정신의 움직임과 몸의 감각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만 한번 느껴 보아도 괜찮아요.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 다시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는 또 다른 방법도 …”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의식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정신과 물질에 대한 답을 들은 수행자들은 바른 견해를 설명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다시 묻고, 사리뿟따는 의식을 아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이어지는 설명은 의식을 눈·귀·코·혀·몸·마음에 따른 여섯 무리로 나누고, 지어내는 작용을 의식이 일어나고 멎는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묵상
의식을 하나의 변하지 않는 주체로 두지 않고 여섯 감각에 따른 무리로 묻는 방식이 어떻게 들리나요?
눈에서 마음까지 여섯 의식을 밝히고 의지로 지어내는 작용을 의식의 일어남과 소멸의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의식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여섯 의식 무리가 있습니다. 곧 눈·귀·코·혀·몸·마음의 의식입니다.
지어내는 작용의 일어남에서 의식의 일어남이 있고, 지어내는 작용의 멎음에서 의식의 멎음이 있습니다. 그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 곧 바른 견해 … 바른 집중입니다.”
의식은 하나가 아니라 눈·귀·코·혀·몸·마음에 따른 여섯 무리로 나뉩니다. 지어내는 작용이 일어나면 의식이 일어나고, 지어내는 작용이 멎으면 의식도 멎습니다. 그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이며, 바른 견해 다음에는 바른 의도·말·행위·생계·노력·알아차림이 차례로 이어집니다. 의식도 홀로 생기지 않고 앞선 지어내는 작용에 기대어 일어납니다.
묵상
눈·귀·코·혀·몸·마음의 의식이 하나가 아니라 여섯 무리로 나뉜 점이 어떻게 들리나요? 보는 앎과 듣는 앎이 각각 다른 조건에서 나타난다는 한 차이만 느껴 볼 수 있을까요?
여섯 감각에 따른 의식과 의지로 지어내는 작용이라는 조건을 아는 일이 생략된 해방의 정형을 거쳐 괴로움의 끝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의식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눈·귀·코·혀·몸·마음에 따른 여섯 의식과 그 조건인 지어내는 작용을 아는 수행자는 탐냄에 끌리는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가운데 줄인 부분에는 반감에 끌리는 성향을 물리치고, ‘나는 있다’는 생각과 자만의 성향을 뿌리 뽑으며,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키는 과정이 들어갑니다.
묵상
보는 의식과 듣는 의식이 각각 다른 조건에 기대고, 그 배후에 지어내는 작용이 놓인다는 설명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오늘 보고 듣는 앎이 서로 다른 순간, 다른 조건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떠올려 볼 수 있나요?
공식 생략된 반복 질문에 사리뿟따가 의지로 지어내는 작용의 네 측면을 아는 것으로 답합니다.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 다시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는 또 다른 방법도 …”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지어내는 작용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의식에 대한 답을 들은 수행자들은 다시 묻고, 사리뿟따는 지어내는 작용과 그 일어남·멎음·길을 아는 것을 또 다른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이어지는 설명은 지어내는 작용을 몸·말·마음의 셋으로 나누고, 모름이 일어나면 이 셋이 일어나고 모름이 멎으면 이 셋도 멎는다고 밝힙니다.
몸·말·마음의 세 의지로 지어내는 작용을 밝히고 모름을 그 일어남과 소멸의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지어내는 작용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세 가지 지어내는 작용이 있습니다. 곧 몸의 지어내는 작용, 말의 지어내는 작용, 마음의 지어내는 작용입니다.
모름의 일어남에서 지어내는 작용의 일어남이 있고, 모름의 멎음에서 지어내는 작용의 멎음이 있습니다. 그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 곧 바른 견해 … 바른 집중입니다.”
몸·말·마음의 의지로 지어내는 작용과 모름이라는 조건을 아는 일이 생략 없이 제시된 해방의 정형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지어내는 작용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며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습니다.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켜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거룩한 제자가 지어내는 작용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멎으며 멎음으로 이끄는 길이 무엇인지 알면, 탐냄에 끌리는 성향과 반감에 끌리는 성향,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성향을 뿌리까지 버립니다.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켜 지금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이것이 바른 견해를 지니고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는 모습입니다.
묵상
몸·말·마음의 지어내는 작용이 모름에 기대어 일어난다는 설명에서, 의도와 모름의 관계는 어떻게 느껴지나요?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 다시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는 또 다른 방법도 …”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모름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모름을 괴로움의 네 진리를 모르는 것으로 정의하고 흘러드는 것의 일어남·소멸 및 거룩한 길과 연결합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모름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괴로움·괴로움의 일어남·괴로움의 멎음·괴로움의 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벗들이여, 이것을 모름이라 합니다.
흘러드는 것이 일어나면 모름이 일어나고, 흘러드는 것이 멎으면 모름이 멎습니다. 그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 곧 바른 견해 … 바른 집중입니다.”
모름은 괴로움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네 가지를 각각 알지 못하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흘러드는 것이 일어나면 모름이 일어나고, 흘러드는 것이 멎으면 모름도 멎습니다. 그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입니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모름에 이르지만, 모름도 흘러드는 것이라는 조건에 기대어 있다는 것이 다시 밝혀집니다.
묵상
괴로움의 네 진리를 각각 모른다는 정의에서 어느 항목이 가장 구체적으로 들리나요?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구별하는 일이 막연한 자책과 어떻게 다른지만 느껴 볼 수 있을까요?
네 진리에 대한 무지와 흘러드는 것이라는 조건을 아는 일이 생략 없는 해방의 정형과 참된 앎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모름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며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습니다.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켜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괴로움과 그 일어남·멎음·길을 각각 알지 못하는 것이 모름이며, 흘러드는 것이 그 조건입니다. 이를 아는 수행자는 탐냄에 끌리는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반감에 끌리는 성향을 물리치며, ‘나는 있다’는 생각과 자만의 성향을 뿌리 뽑습니다.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켜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묵상
모름을 아는 결과에 다시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킨다”는 말이 이어지는 점은 어떻게 들리나요?
수행자들이 온전한 질문을 다시 하고 사리뿟따가 흘러드는 것·일어남·소멸·소멸의 길을 아는 것으로 답합니다.
“좋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사리뿟따의 말에 기뻐하고 동의한 뒤 물었습니다.
“벗이여, 거룩한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르는 다른 방법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흘러드는 것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수행자들은 다시 기뻐하며 사리뿟따에게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묻습니다. 사리뿟따는 흘러드는 것과 그 일어남, 멎음, 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그것으로도 바른 견해를 지니게 된다고 답합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감각적 욕망, 존재, 모름이라는 세 가지 흘러드는 것을 밝히고, 모름이 흘러드는 것을 일으키는 조건임을 보여 앞서 본 조건 관계를 반대 방향에서도 잇습니다.
감각적 욕망·존재·모름, 이 세 가지 흘러드는 것을 밝히고 모름을 흘러드는 것의 일어남과 소멸의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벗들이여, 무엇이 흘러드는 것이며 그 일어남과 멎음과 멎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세 가지 흘러드는 것이 있습니다. 곧 감각적 욕망에서 흘러드는 것, 존재에서 흘러드는 것, 모름에서 흘러드는 것입니다.
모름이 일어나면 흘러드는 것이 일어나고, 모름이 멎으면 흘러드는 것이 멎습니다. 그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 곧 바른 견해 … 바른 집중입니다.”
흘러드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감각적 욕망에서 흘러드는 것, 존재에서 흘러드는 것, 모름에서 흘러드는 것입니다. 모름이 일어나면 흘러드는 것이 일어나고, 모름이 멎으면 흘러드는 것도 멎습니다. 그 길은 거룩한 여덟 갈래 길입니다. 앞에서는 흘러드는 것이 모름의 조건이었는데 여기서는 모름이 흘러드는 것의 조건이 되어, 둘이 서로를 먹이는 관계로 드러납니다.
묵상
감각적 욕망·존재·모름이라는 세 가지 흘러드는 것 가운데 뜻이 가장 구체적인 하나가 있나요? 한 상태가 다른 상태를 되먹이는 경험이 있는지만 가볍게 떠올려 볼까요?
감각적 욕망·존재·모름의 흘러드는 것과 모름이 서로 조건이 되는 것을 아는 일이 생략 없는 해방의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처럼 흘러드는 것과 그 일어남·멎음·멎음으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냄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며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습니다.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켜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거룩한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감각적 욕망, 존재, 모름이라는 세 가지 흘러드는 것을 밝히고, 모름을 그 일어남과 멎음의 조건으로 보여 줍니다. 앞서는 흘러드는 것이 모름의 조건이었는데 여기서는 모름이 흘러드는 것의 조건이 되어, 둘이 서로 맞물려 있음이 드러납니다. 거룩한 제자는 이렇게 알아 탐냄과 반감,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하는 성향을 뿌리까지 버리고, 모름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켜 지금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묵상
모름과 흘러드는 것이 서로를 조건 짓는다고 할 때, 하나의 최초 원인을 찾기보다 되먹임의 고리를 본다는 점이 어떻게 다가오나요?
사리뿟따의 말이 끝나자 수행자들이 만족하며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경이 닫힙니다.
사리뿟따 님이 이렇게 말했다.
수행자들은 만족하여 사리뿟따 님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Idamavocāyasmā sāriputto. Attamanā te bhikkhū āyasmato sāriputtassa bhāsitaṁ abhinandunti.
맛지마 니까야MN 9 삼마딧티 숫따 (바른 견해)
배경
마지막 네 가지 측면과 풀려남의 결론을 다 전한 뒤, 이야기를 전하는 목소리가 돌아와 이 긴 가르침을 전한 이가 사리뿟따 님이었음을 밝히고, 수행자들이 만족하며 그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전합니다. 처음 ‘벗’이라는 부름으로 시작한 동료 수행자들 사이의 문답은 이렇게 만족과 기쁜 수용으로 끝납니다.
묵상
가르침의 끝에서 수행자들이 논쟁의 승패보다 만족과 기쁜 수용으로 응답하는 장면은 어떻게 느껴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