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간타 나타뿟따가 죽은 뒤 그를 따르던 무리가 둘로 갈라져 다투게 된 일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리뿟따는 이런 다툼이 자신들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서로 다투지 않고 함께 외워 오래 보존하자고 수행자들에게 권합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조건에 기대어 있다는 가르침부터 바른 삶을 이루는 열 가지 요소까지, 세존의 가르침을 하나짜리 항목부터 열 가지 항목까지 숫자별로 정리해 설합니다. 몸을 쉬고 계시던 세존께서는 이 설법을 다 들으신 뒤 일어나 사리뿟따를 칭찬하십니다.
경은 ‘이와 같이 들었다’는 말로 시작해 부처님의 이동과 동행 규모, 도착지와 거처를 차례로 밝힙니다. 부처님께서는 약 오백 명의 수행자 공동체(상가)와 함께 말라족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빠와에 이르셨습니다. 그곳에서 머무신 곳은 대장장이의 아들 쭌다가 마련한 망고 동산입니다. 이 배경은 뒤에 빠와의 말라족이 새 회당으로 부처님과 수행자 공동체를 초대하고, 그 자리에서 사리뿟따가 함께 외울 가르침의 목록을 들려주게 되는 이야기의 출발점입니다.
묵상
한 가르침이 전해진 자리를 떠올릴 때, 말한 내용뿐 아니라 함께한 사람과 이동의 과정도 보이나요? 지금 기억나는 중요한 배움 하나에는 누가 함께 있었고 어떤 장소가 그 배움을 받아 주었나요?
쭌다의 망고 동산이라는 부처님의 거처가 제시된 다음, 이야기는 말라족 공동체가 새로 세운 웃바따까 회당으로 옮아갑니다. 이곳은 새로 지어졌고, 수행자,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 그 밖의 어떤 사람도 아직 머물거나 사용한 적이 없다고 세 갈래로 강조됩니다. 아무도 먼저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어지는 초대의 핵심 조건입니다. 말라족은 새 공동 공간의 첫 사용을 부처님께 청함으로써 회당의 시작을 부처님과 수행자 공동체의 모임에 연결하려 합니다.
묵상
새로운 공간이나 일을 시작할 때 첫 사용과 첫 행동에 특별한 의미를 둔 적이 있나요? 그 시작을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함께하고 싶은지 살펴보면,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어떻게 드러나나요?
말라족이 들은 소식은 경의 첫 배경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지만 관점이 다릅니다. 앞에서는 경을 전하는 이가 부처님의 여정을 밝혔고, 여기서는 지역 공동체가 그 도착을 전해 듣습니다. 소식에는 부처님과 함께한 오백 명가량의 큰 수행자 공동체(상가), 빠와에 이른 이동, 쭌다의 망고 동산이라는 현재 거처가 모두 포함됩니다. 이처럼 누가 누구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확인한 뒤에야 말라족은 찾아가 새 회당의 첫 사용을 청합니다.
묵상
중요한 소식을 들었을 때 일부만 듣고 서두르지 않고, 누가 누구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본 적이 있나요? 지금 마음을 움직이는 소식 하나에서 확실히 들은 사실과 아직 짐작인 부분은 무엇인가요?
도착 소식을 들은 말라족은 부처님께 직접 찾아가 절한 뒤 한쪽에 앉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요청부터 내놓지 않고 새 회당의 이름, 최근 완공되었다는 사실, 어느 누구도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는 조건을 먼저 아룁니다. 앞서 알려진 정보를 이제 말라족 자신의 말로 되짚는 까닭은 초대의 근거를 부처님 앞에 분명히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방문의 예절과 사실의 설명이 먼저 놓이고, 다음에 부처님께 첫 사용을 청하는 구체적 부탁이 이어집니다.
묵상
누군가에게 중요한 부탁을 할 때 요청만 앞세우지 않고 상황과 이유를 먼저 설명한 적이 있나요? 지금 전하고 싶은 부탁 하나가 있다면, 상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얼마나 차분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나요?
말라족은 회당을 사용하는 순서를 분명히 밝힙니다. 부처님이 먼저 사용하고, 그 뒤에 그들이 쓰겠다는 것입니다. 말라족은 이 일이 자신들에게 오래도록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리라고 바랍니다. 부처님은 말로 승낙하지 않고 침묵으로 청을 받아들이십니다. 이어서 말라족이 그 침묵을 승낙으로 알아듣고 회당을 준비합니다. 이 장면에서는 청을 하는 쪽의 바람, 부처님의 응답, 그 응답을 이해한 뒤의 행동이 차례로 이어집니다.
묵상
중요한 제안을 할 때 순서와 바라는 결과를 서로 분명히 확인하나요? 말이 없는 반응을 내 뜻대로 해석하지 않으면서도, 관계와 관습 속에서 동의를 알아차려야 했던 경험은 어떤 것이었나요?
말라족은 부처님의 침묵을 승낙으로 알아듣자 회당을 준비합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고 부처님을 오른편에 두고 돈 뒤 회당으로 갑니다. 그곳에 깔개를 깔고 앉을 자리를 마련하며 물항아리와 기름등을 갖춥니다. 준비를 마친 뒤 부처님께 돌아와 다시 절하고 한쪽에 섭니다. 청을 받아들였다는 말 한마디 뒤에, 함께 모일 공간을 실제로 갖추는 행동이 이어집니다. 앞에서 청한 ‘첫 사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말라족이 자신들의 몫을 하는 대목입니다.
묵상
누군가를 초대할 때 겉으로 보이는 자리뿐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필요로 할 물과 빛까지 살펴본 적이 있나요? 지금 맞이하려는 사람이나 일에 말보다 먼저 준비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말라족은 준비를 마쳤다는 말로 줄이지 않고 깔개, 자리, 물항아리, 기름등을 하나씩 다시 알립니다. 앞에서 갖춘 것들을 같은 순서로 보고한 뒤, 부처님이 적절한 때에 오시도록 청합니다. 그들이 회당을 준비했어도 부처님이 언제 움직일지는 대신 정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준비를 알리는 말과 방문 시각을 맡기는 말이 나란히 놓입니다. 두 번 나오는 “부처님”이라는 부름도 청하는 말의 흐름을 이어 줍니다.
묵상
내가 맡은 준비를 분명히 끝낸 뒤에도 상대의 시간까지 재촉하고 있지는 않나요? 준비 완료와 통제하려는 마음을 구별한다면, 지금 누구에게 결정할 여백을 조금 더 돌려줄 수 있을까요?
준비가 끝났다는 알림을 받은 부처님께서는 옷을 입고 음식을 받는 그릇과 겉옷을 챙겨 수행자 공동체와 함께 움직이십니다. 회당에 도착한 뒤에는 먼저 발을 씻고 안으로 들어가 중앙 기둥에 기대며 동쪽을 향해 앉으십니다. 중앙의 동향 자리는 뒤에 수행자 공동체가 서쪽 벽에서 동쪽을 향하고 말라족이 동쪽 벽에서 서쪽을 향해 모두 부처님을 앞에 두는 좌석 배치의 기준이 됩니다.
묵상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는 누가 어디에 앉고 서로 어느 방향을 보는지가 대화의 분위기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지금 참여하는 한 모임의 배치가 모두를 존중하고 목적에 집중하도록 돕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중앙 기둥 곁에서 동쪽을 향한 뒤 나머지 참석자들의 자리가 정해집니다. 수행자 공동체는 서쪽 벽에 기대어 동쪽을 향하고, 빠와의 말라족은 맞은편 동쪽 벽에 기대어 서쪽을 향합니다. 두 무리는 서로 다른 벽과 방향에 앉지만 “부처님을 바로 앞에 두었다”는 표현은 똑같이 붙습니다. 이렇게 자리를 나누어도 수행자 공동체와 집에 사는 사람들의 구분은 그대로 지켜지고, 어느 쪽도 중심을 등지지 않은 채 같은 가르침을 들을 수 있도록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묵상
서로 역할이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 차이를 없애지 않으면서도 같은 중심을 바라보게 할 수 있나요? 지금 속한 모임에서는 누구도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자리가 마련되어 있나요?
부처님께서 밤의 많은 시간 동안 가르침으로 말라족을 이끌고 격려하신 뒤, 늦은 시각임을 헤아려 그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밤늦도록 빠와의 말라족에게 가르침을 들려주시며 뜻을 보여 주고, 받아들이도록 이끌고, 북돋우고, 기쁘게 하셨다. 그러고는 말씀하셨다.
“와셋타들이여, 밤이 깊었다. 이제 그대들이 편한 때에 돌아가라.”
말라족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처님.”라고 답하고 일어나 절했다. 부처님을 오른편에 두고 돈 뒤 떠났다.
부처님은 밤의 많은 시간을 빠와의 말라족에게 가르침을 들려주는 데 쓰십니다. 경은 그 일이 내용을 보여 주고, 받아들이도록 이끌고, 북돋우고, 기쁘게 하는 네 움직임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밤이 깊자 부처님은 와셋타들이라고 그들을 부르며 돌아갈 때를 스스로 정하도록 하십니다. 말라족이 답하고 예를 갖추어 떠난 뒤에도 수행자들은 남습니다. 다음 장면에서는 부처님이 사리뿟따에게 그들을 위한 가르침을 맡기십니다.
묵상
좋은 대화라도 몸의 피로와 늦어진 시간을 헤아려 마칠 때를 정하고 있나요? 지금 계속 붙들고 있는 모임이나 일이 있다면, 충분히 나누었다는 신호와 안전하게 멈출 시점은 무엇인가요?
부처님께서 졸음 없이 고요히 앉아 있는 수행자 무리를 살피신 뒤, 등이 아파 몸을 펴야겠다고 말씀하시며 이어지는 가르침을 사리뿟따에게 맡기십니다.
말라족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처님께서는 말없이, 아주 말없이 앉은 수행자 무리를 둘러보시고 사리뿟따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뿟따여, 수행자들에게는 나른함과 졸음이 없다. 사리뿟따여, 생각나는 대로 수행자들에게 가르침을 들려주어라. 내 등이 아프니 몸을 좀 펴야겠다.”
사리뿟따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처님.”라고 답했다.
말라족이 떠난 뒤 부처님께서는 말없이 앉아 있는 수행자들을 둘러보십니다. 그들에게 나른함과 졸음이 없다고 사리뿟따에게 말씀하시고, 생각나는 대로 가르침을 들려주라고 하십니다. 이어 자신의 등이 아파 몸을 펴겠다고 밝히십니다. 말라족에게 하신 밤의 가르침은 여기서 끝나고, 다음 긴 목록은 사리뿟따가 수행자들에게 들려주는 말입니다. 이 대목은 부처님과 사리뿟따, 누가 가르침을 말하는지를 가르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묵상
등이 아프다고 말하고 잠시 몸을 펴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나요? 내가 맡은 일이 계속되어야 할 때, 몸의 불편함을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에게 잠시 부탁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런 부탁이 어렵다면 무엇이 걸리는지도 조용히 살펴볼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등이 아파 몸을 펴겠다고 말씀하신 뒤, 겉옷을 네 겹으로 접어 펴고 오른쪽으로 돌아누우십니다. 한 발을 다른 발 위에 포갠 자세를 경은 사자의 자세라고 부릅니다. 누운 뒤에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분명히 알며, 일어날 때를 마음에 두십니다. 앞에서 사리뿟따에게 가르침을 맡긴 말과 여기서 쉬는 행동이 이어집니다. 몸이 아프다는 사실과 쉬는 동안의 알아차림을 함께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묵상
쉴 때도 죄책감이나 다음 할 일에 쫓겨 몸을 제대로 눕히지 못하나요? 지금 필요한 휴식의 자세와 다시 일어날 때를 부드럽게 정해 둔다면, 몸과 마음은 어떻게 조금 더 안심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무렵, 자이나교 지도자 니간타 나타뿟따가 빠와에서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그 무렵 니간타 나타뿟따가 얼마 전에 빠와에서 죽었다.
Tena kho pana samayena nigaṇṭho nāṭaputto pāvāyaṁ adhunākālaṅkato ho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부처님이 쉬는 장면 다음에, 경은 같은 도시 빠와에서 니간타 나타뿟따가 얼마 전에 죽었다고 알립니다. 이 한 문장에는 그를 따르던 이들의 반응이나 공동체의 상태가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의 죽음 뒤 수행자들이 두 편으로 갈라져 다투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리뿟따는 이 일을 거론한 뒤, 가르침을 함께 외우고 다투지 말자고 권합니다. 여기서 죽음은 그 뒤 벌어진 논쟁을 이해하는 시간적 배경입니다.
묵상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기대던 모임에서 그 사람이 떠난 뒤 기준과 관계가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지금 함께하는 공동체에는 특정 개인이 없어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공통의 가르침이나 약속이 있나요?
지도자가 죽은 뒤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 자기 쪽 가르침과 수행이 옳다며 날카로운 말로 공격합니다.
그가 죽자 그의 수행자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 싸우고 다투었다. 그들은 말의 창으로 서로를 찔렀다.
“그대는 이 가르침과 수행 규범을 모른다. 나는 안다. 그대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대는 잘못 실천하고 나는 바르게 실천한다. 내 말은 앞뒤가 맞고 그대 말은 맞지 않는다. 먼저 할 말을 뒤에, 뒤에 할 말을 먼저 했다. 그대가 익혔다는 것도 뒤집혔고 그대의 주장은 논박당했다. 그대는 졌다. 자, 그대 주장을 구해 보라. 할 수 있다면 이 반박에서 빠져나와 보라.”
니간타 나타뿟따가 죽은 뒤 그의 수행자들은 두 편으로 갈라집니다. 경은 싸움과 다툼과 논쟁이 일어났다고 밝히고, 그들의 말을 서로 찌르는 창에 비유합니다. 인용된 말은 상대가 가르침을 모른다고 비웃는 데서 시작해, 자신의 실천과 말만 바르다고 주장하고, 발언 순서를 따지며, 상대의 주장이 논박당했다고 선언하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가르침을 함께 확인하는 말이 상대를 이기려는 말로 바뀐 모습이 사리뿟따가 다음에 가르침을 들려주는 계기가 됩니다.
묵상
의견이 다를 때 내용을 확인하기보다 상대의 무지나 패배를 증명하려는 말로 기울지는 않나요? 최근의 한 논쟁에서 이기려는 마음과 함께 이해하려는 마음은 각각 어떤 말투로 나타났나요?
자이나교 수행자들의 다툼이 마치 서로 죽이려는 것처럼 격렬해지자, 흰옷을 입은 재가 제자들도 그런 수행자와 가르침에 실망하게 됩니다.
그 수행자들 사이에는 마치 살육이라도 벌어지는 듯했다. 니간타 나타뿟따의 흰옷 입은 집에 사는 제자들마저 그들에게 싫증을 느끼고 마음이 떠나 실망했다. 가르침과 수행 규범은 제대로 설명되거나 전해지지 않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했다.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이가 전한 것도 아니었다. 기대던 중심이 무너지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서로를 찌르는 말이 오간 뒤, 경은 그 싸움이 살육처럼 보일 만큼 거세다고 말합니다. 영향은 당사자인 수행자들뿐 아니라 흰옷을 입은 집에 사는 제자들에게도 미칩니다. 그들은 싫증을 느끼고 마음이 떠나 실망합니다. 이어 가르침과 수행 규범이 제대로 설명되지도 전해지지도 않았고, 벗어남이나 고요함으로 이끌지도 못한다고 평가합니다. 기대던 중심이 무너지고 의지할 곳이 없다는 마지막 표현은 다음에 사리뿟따가 꺼낼 공동 암송의 필요성과 맞닿습니다.
묵상
공동체의 거친 논쟁이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신뢰까지 무너뜨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지금 속한 모임에서 갈등이 생길 때 사람을 붙드는 힘은 한 지도자인가요,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원칙과 실천인가요?
사리뿟따가 니간타가 죽은 뒤 일어난 분열과 재가 제자들의 실망을 정리해 말하고, 가르침이 잘못 전해지면 이런 일이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사리뿟따가 수행자들에게 말했다.
“벗들이여, 니간타 나타뿟따가 얼마 전 빠와에서 죽었다. 그가 죽자 그의 수행자들이 갈라져 두 편이 되었고 … 기대던 중심이 무너져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 벗들이여, 가르침과 수행 규범이 제대로 설명되거나 전해지지 않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이가 전한 것도 아니라면 이처럼 된다.”
부처님께 가르침을 맡은 사리뿟따는 숫자 목록에 앞서 니간타 나타뿟따 사후의 분열을 수행자들에게 들려줍니다.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부분은 줄였습니다. 사리뿟따는 이런 일이 제대로 설명되거나 전해지지 않고 벗어남과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는 가르침과 수행 규범에서 생긴다고 말합니다. 다음에는 자신들이 받은 가르침을 이와 대조합니다.
묵상
다른 공동체의 실패를 볼 때 우월감을 느끼는 데서 멈추나요, 아니면 우리에게도 같은 조건이 있는지 살피나요? 최근 본 갈등 하나가 내가 속한 모임의 설명과 전승 방식을 점검하게 하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사리뿟따는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부족함을 자신들이 받은 가르침과 대조합니다. 앞에서는 제대로 설명되지도 전해지지도 않았고, 벗어남이나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했으며,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이가 전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는 부처님이 가르침을 잘 설명하고 전하셨고, 그 가르침이 벗어남과 고요함으로 이끌며, 그것을 전하신 분이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셨다고 말합니다. 바로 다음에는 이 가르침을 함께 외워 오래 보존하자고 권합니다.
묵상
가르침의 가치를 유명한 사람의 말이라는 이유만으로 판단하나요, 아니면 실제로 놓임과 평온을 향하게 하는지 살피나요? 지금 신뢰하는 한 가르침은 이해와 실천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요?
사리뿟따는 수행자 공동체(상가)가 해야 할 일과 피해야 할 일을 함께 말합니다. 모두 함께 가르침을 외우고, 그 내용을 두고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적은 수행의 길이 오래 이어지고 많은 사람에게 이익과 행복을 주는 데 있습니다. 이 말은 세상을 아끼는 마음과, 신과 인간 모두에게 돌아갈 이익과 행복까지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뒤에 나오는 숫자별 가르침마다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공동으로 외우는 일은 긴 목록을 함께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묵상
중요한 원칙을 각자 다르게 기억해 다툼이 생기기 전에 함께 말과 뜻을 확인하는 자리가 있나요? 지금 속한 모임에서 오래 지켜야 할 한 문장을 함께 확인한다면 무엇을 고르고 싶나요?
사리뿟따는 부처님께서 잘 전하신 가르침 가운데 함께 외워서 수행의 길을 오래 지켜갈 내용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습니다.
“벗들이여, 부처님께서 잘 설명하고 전하신 가르침은 무엇인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고요함으로 이끄는,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분의 가르침 가운데 무엇을 모두 함께 외우고 다투지 말아야 하는가? 그래야 이 수행의 길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많은 사람에게 이익과 행복을 주며, 세상을 아끼는 마음으로 신과 인간에게도 이익과 행복을 줄 수 있다.”
사리뿟따는 함께 외우라는 권유 다음에 무엇을 외울지 묻습니다. 질문 속에는 부처님이 잘 설명하고 전하셨으며 벗어남과 고요함으로 이끄는 가르침이라는 조건이 다시 나옵니다. 모두 함께 외우고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행동, 수행의 길이 오래 이어져 많은 사람과 신과 인간에게 이익과 행복이 돌아가야 한다는 목적도 되풀이됩니다. 이제 한 가지씩 묶은 가르침부터 열 가지씩 묶은 가르침까지 차례로 나열할 준비가 됩니다.
묵상
많은 내용을 함께 보존해야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고르고 어떤 순서로 묶나요? 지금 배우는 주제 하나를 다른 사람과 정확히 나누기 위해, 목적과 선정 기준부터 한 문장으로 확인해 볼 수 있나요?
사리뿟따는 숫자별 목록을 시작하며 부처님을 알고 보는 분, 마음을 흐리는 것을 남김없이 없앤 분,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분이 바르게 설명하신 한 가지씩 묶은 가르침이 있다고 먼저 선언합니다. 이 말은 목록의 내용을 아직 밝히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에 모든 존재에 관한 두 문장이 각각 하나짜리 가르침으로 제시됩니다. 같은 형식의 선언과 마무리 문장은 뒤의 숫자 묶음에서도 되풀이되어 긴 암송의 단락을 구별해 줍니다.
묵상
복잡한 배움을 가장 작은 단위부터 시작하면 전체 구조가 어떻게 달라 보이나요? 지금 이해하려는 큰 주제에서 먼저 붙들 수 있는 하나의 공통 원리나 질문은 무엇인가요? 그것을 왜 먼저 고르나요?
“한 가지씩 묶은 가르침”이라는 물음에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관한 두 문장이 나옵니다. 하나는 먹을 것이 존재를 지탱한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조건이 빚어 내는 작용이 존재를 지탱한다는 말입니다. 두 문장은 각각 한 가지씩 말하는 가르침을 나란히 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상카라는 조건들이 함께 빚는 작용을 가리킵니다. 음식과 그 밖의 작용을 통해 생명이 유지된다는 관계를 살펴보게 합니다.
묵상
나를 홀로 유지되는 존재처럼 여기다가 음식과 관계, 환경과 습관에 기대고 있음을 알아차린 적이 있나요? 오늘 나를 지탱한 조건 가운데 당연하게 지나친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그 조건은 어떻게 이어졌나요?
사리뿟따는 한 가지씩 묶은 가르침을 들려준 뒤, 처음과 거의 같은 말로 그 단락을 닫습니다. “가르침이 있다”라는 시작과 “이것이 가르침이다”라는 마무리가 짝을 이룹니다. 부처님을 알고 보는 분, 마음을 흐리는 것을 없앤 분,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분이라고 다시 부르는 까닭에 말의 출처도 거듭 확인됩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먹을 것과 여러 조건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두 문장이 이 단락에 함께 묶입니다. 이어서 함께 외우고 다투지 말라는 말이 다시 나온 뒤, 두 가지씩 묶은 가르침으로 넘어갑니다.
묵상
배움을 시작할 때만 제목을 확인하고 끝에서는 무엇을 배웠는지 정리하지 않은 채 넘어가나요? 오늘 익힌 한 내용을 한 문장으로 짧게 말한다면 어떤 문장이 되나요? 무엇을 빼지 않아야 하나요?
“벗들이여, 알고 보시며 마음을 흐리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둘씩 묶은 가르침을 바르게 설명하셨다.”
Atthi kho, āvus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dve dhammā sammadakkhāt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한 가지씩 묶은 가르침을 마친 사리뿟따는 둘씩 묶은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부처님을 알고 보는 분, 마음을 흐리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라고 부른 뒤, 그분이 이 가르침을 바르게 설명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직 각 쌍의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부터 서로 보완하거나 대조되는 두 가지씩 이어집니다. 선언과 목록과 마무리를 반복하는 형식은 많은 가르침을 함께 외우는 데 쓰입니다.
묵상
어떤 문제를 한쪽 면만 보고 성급히 판단한 적이 있나요? 지금 떠오르는 일 하나에서 함께 보아야 할 두 측면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직 보이지 않는 쪽이 있어도 괜찮을까요?
이름과 형상에서부터 좋은 벗에 이르기까지, 존재를 이루는 조건과 해롭거나 이로운 태도를 일곱 쌍으로 나란히 제시합니다.
“둘씩 묶은 가르침은 무엇인가?
마음의 작용과 몸의 모습. 알지 못함과 계속 존재하려는 목마름(딴하). 계속 존재한다는 생각과 완전히 없어진다는 생각.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그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음. 잘못을 부끄러워함과 그 결과를 두려워함. 타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음과 나쁜 벗을 사귐. 타이름을 잘 받아들임과 좋은 벗을 사귐이다.”
Katame dve? Nāmañca rūpañca. Avijjā ca bhavataṇhā ca. Bhavadiṭṭhi ca vibhavadiṭṭhi ca. Ahirikañca anottappañca. Hirī ca ottappañca. Dovacassatā ca pāpamittatā ca. Sovacassatā ca kalyāṇamittatā ca.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처음 일곱 쌍은 존재와 생각에 관한 말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옮아갑니다. 마음의 작용과 몸의 모습, 알지 못함과 계속 존재하려는 목마름, 계속 존재한다는 생각과 완전히 없어진다는 생각이 앞에 옵니다. 이어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그 결과를 두려워하는 마음의 유무가 대조됩니다. 마지막 두 쌍은 타이름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가까이 지내는 벗을 연결합니다.
묵상
충고라는 말을 들을 때 몸과 마음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반응은 무엇인가요? 조심하는 마음·조언을 받아들이는 태도·좋은 벗이라는 세 표현 가운데 편안하거나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나요?
계율을 어기는 것과 깊은 집중(자나)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능숙함부터, 곧음과 인내와 친절과 환대에 이르기까지 여덟 쌍을 열거합니다.
“규칙을 어긴 일을 아는 솜씨와 어긴 뒤 바로잡는 솜씨. 깊은 명상 상태에 드는 솜씨와 거기서 나오는 솜씨. 세상을 이루는 요소를 아는 솜씨와 주의를 기울이는 솜씨. 감각이 닿는 자리를 아는 솜씨와 조건 따라 일어남을 아는 솜씨.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아는 솜씨. 곧음과 잘못을 부끄러워함. 참을성과 온화함. 다정함과 손님을 맞는 마음이다.”
Āpattikusalatā ca āpattivuṭṭhānakusalatā ca. Samāpattikusalatā ca samāpattivuṭṭhānakusalatā ca. Dhātukusalatā ca manasikārakusalatā ca. Āyatanakusalatā ca paṭiccasamuppādakusalatā ca. Ṭhānakusalatā ca aṭṭhānakusalatā ca. Ajjavañca lajjavañca. Khanti ca soraccañca. Sākhalyañca paṭisanthāro ca.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여덟 쌍의 앞부분은 상황을 알고 그에 맞게 움직이는 솜씨를 다룹니다. 규칙을 어긴 일을 아는 것과 바로잡는 일, 깊은 명상 상태에 드는 것과 나오는 일이 짝을 이룹니다. 세상을 이루는 요소를 아는 일은 주의를 기울이는 일과, 감각이 닿는 자리를 아는 일은 조건 따라 일어남을 아는 일과 함께 놓입니다.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가려 아는 뒤에는 곧음과 부끄러움, 참을성과 온화함, 다정함과 손님을 맞는 마음이 이어집니다. 알아야 할 것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함께 나열됩니다.
묵상
무엇에 들어가는 능력만 익히고 안전하게 나오는 법은 소홀히 한 적이 있나요? 지식의 정확함과 사람을 대하는 온화함 가운데 지금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면, 다른 쪽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요?
남을 해치지 않음과 맑음, 알아차림이 없는 것과 있는 것, 감각의 문과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서의 방일함과 절제를 다섯 쌍으로 밝힙니다.
“해치지 않음과 깨끗한 행실. 알아차림을 잊음과 무엇을 하는지 분명히 알지 못함. 알아차림과 무엇을 하는지 분명히 앎. 눈과 귀 같은 감각의 문을 지키지 않음과 먹는 양을 모름. 감각의 문을 지킴과 먹는 양을 앎이다.”
Avihiṁsā ca soceyyañca. Muṭṭhassaccañca asampajaññañca. Sati ca sampajaññañca. Indriyesu aguttadvāratā ca bhojane amattaññutā ca. Indriyesu guttadvāratā ca bhojane mattaññutā ca.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다섯 쌍 가운데 첫째는 남을 해치지 않는 일과 깨끗한 행실을 함께 놓습니다. 다음 두 쌍은 알아차림을 잊고 지금 하는 일을 분명히 모르는 상태와, 알아차리며 분명히 아는 상태를 대조합니다. 마지막 두 쌍은 눈과 귀 같은 감각의 문을 지키는 일과 먹는 양을 아는 일을 짝짓습니다.
묵상
감각의 즐거움에 빠져 무엇을 얼마나 받아들이는지 놓친 순간이 있었나요? 오늘 보고 듣고 먹는 일 가운데 하나를 골라, 마음챙김과 분명한 앎으로 적당한 선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스스로 돌아보는 힘과 꾸준히 닦는 힘, 마음챙김과 마음이 한곳에 모임(사마디)의 힘, 그리고 고요함과 통찰, 노력과 흩어지지 않는 마음을 다섯 쌍으로 제시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는 힘과 닦아 가는 힘. 알아차리는 힘과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힘(사마디). 고요함과 꿰뚫어 봄. 고요해지는 실마리와 힘을 내는 실마리. 힘씀과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이다.”
Paṭisaṅkhānabalañca bhāvanābalañca. Satibalañca samādhibalañca. Samatho ca vipassanā ca. Samathanimittañca paggahanimittañca. Paggaho ca avikkhepo ca.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이 다섯 쌍은 마음을 닦을 때 함께 살필 두 측면을 제시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는 힘과 닦아 가는 힘, 알아차리는 힘과 마음을 모으는 힘이 앞에 옵니다. 이어 고요함과 꿰뚫어 봄이 짝을 이루고, 고요해지는 실마리와 힘을 내는 실마리도 나란히 놓입니다. 마지막에는 힘씀과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이 이어집니다. 이 각각의 짝을 빠뜨리지 않고 함께 외우는 목록입니다.
묵상
요즘 마음은 가라앉힐 필요가 더 큰가요, 힘을 북돋울 필요가 더 큰가요? 성찰과 실천, 마음챙김과 집중, 고요와 통찰 가운데 균형을 되찾게 할 한 쌍을 오늘 어떻게 적용해 볼까요?
윤리적인 행실과 바른 견해가 함께 무너지거나 함께 이루어지는 경우, 그리고 각각이 맑아지는 경우를 세 쌍으로 대조합니다.
“행실이 무너짐과 세상을 보는 눈이 흐려짐. 행실을 잘 갖춤과 세상을 보는 눈이 바로 섬. 행실이 맑아짐과 세상을 보는 눈이 맑아짐이다.”
Sīlavipatti ca diṭṭhivipatti ca. Sīlasampadā ca diṭṭhisampadā ca. Sīlavisuddhi ca diṭṭhivisuddhi ca.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사리뿟따는 행실과 세상을 보는 눈을 세 번 짝지어 말합니다. 먼저 두 가지가 무너진 상태, 이어 두 가지를 잘 갖춘 상태, 끝으로 두 가지가 맑아진 상태입니다. 어떻게 행동하는가와 무엇을 참되게 보는가를 함께 살피도록 두 단어를 매번 반복합니다. 세상을 보는 눈만 바로잡았다고 하면서 행동을 놓치거나,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살피고 이해를 놓치지 않게 하는 배열입니다.
묵상
옳다고 아는 것과 실제 행동 사이에 틈이 벌어진 경험이 있나요? 지금 바로잡고 싶은 한 가지에서 견해와 행동을 함께 살핀다면, 이해를 고칠 일과 행동을 바꿀 일은 각각 무엇인가요?
바른 견해가 맑아진 데 맞춘 노력으로부터, 앎과 풀려남, 소멸에 대한 앎과 다시 생겨나지 않음에 대한 앎에 이르기까지 다섯 쌍을 밝힙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맑아짐과 그에 맞게 힘씀. 마음을 깊이 일깨우는 일을 보고 느끼는 절박함과 그에 맞게 지혜롭게 힘씀. 이로운 마음을 기르는 데 만족하지 않음과 힘쓰는 일을 포기하지 않음. 참되게 앎과 풀려남(위뭇띠). 다했음을 아는 지혜와 다시 생기지 않음을 아는 지혜다.”
Diṭṭhivisuddhi kho pana yathā diṭṭhissa ca padhānaṁ. Saṁvego ca saṁvejanīyesu ṭhānesu saṁviggassa ca yoniso padhānaṁ. Asantuṭṭhitā ca kusalesu dhammesu appaṭivānitā ca padhānasmiṁ. Vijjā ca vimutti ca. Khayeñāṇaṁ anuppādeñāṇa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다섯 쌍은 맑아진 세상을 보는 눈에 맞게 힘쓰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마음을 깊이 일깨우는 일을 보고 절박함이 생겼다면, 그에 맞게 지혜롭게 힘써야 한다는 쌍이 뒤따릅니다. 이로운 마음에 만족하지 않는 것과 힘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함께 놓입니다. 이어 참되게 아는 일과 풀려남, 다했음을 아는 지혜와 다시 생기지 않음을 아는 지혜가 마지막 두 쌍을 이룹니다. 여기서 앎은 자신의 상태를 분명히 보는 일과 연결됩니다.
묵상
마음을 크게 흔들거나 정신이 번쩍 들게 한 자리를 떠올릴 때 불안·선명함·무덤덤함 가운데 어떤 반응이 오나요? 안전하게 느껴지면 몸에 남은 한 반응만 살펴볼까요, 떠오르지 않거나 원하지 않으면 건너뛸까요?
사리뿟따는 앞서 열거한 모든 짝이 부처님께서 둘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라고 결론짓습니다.
“벗들이여, 이것이 알고 보시며 마음을 흐리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둘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다.”
Ime kho, āvus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dve dhammā sammadakkhāt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사리뿟따는 둘씩 묶은 긴 가르침을 시작할 때와 거의 같은 문장으로 마칩니다. 처음의 “가르침이 있다”가 여기서는 “이것이 가르침이다”로 바뀝니다. 마음과 몸에서 시작해 다함과 다시 생기지 않음을 아는 지혜까지 서로 다른 내용이 이어졌지만, 모두 둘씩 묶어 바르게 설명된 가르침입니다. 이 마무리 뒤에는 다시 함께 외우고 다투지 말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그런 다음 셋씩 묶은 다음 가르침으로 넘어갑니다.
묵상
여러 항목을 배운 뒤 처음의 큰 틀로 돌아가 전체를 묶어 본 적이 있나요? 방금 살핀 짝들 가운데 지금 삶을 가장 정확히 비추는 한 쌍은 무엇이며, 두 요소를 함께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둘씩 묶은 목록을 마친 뒤 사리뿟따는 셋씩 묶은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부처님을 알고 보는 분, 마음을 흐리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라고 다시 부릅니다. 가르침을 자신의 새 주장으로 제시하지 않고 부처님이 바르게 설명한 것으로 밝히는 선언입니다. 이 문장에는 세 가지 내용이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에 함께 외우라는 말이 다시 나온 뒤, 해로운 마음의 뿌리와 이로운 마음의 뿌리처럼 셋으로 이루어진 가르침들이 시작됩니다.
묵상
한 가지 문제를 둘로만 나눌 때 보이지 않던 세 번째 가능성을 발견한 적이 있나요? 지금 살피는 경험을 세 측면으로 나누어 본다면 무엇이며, 그중 자주 빠뜨리는 하나는 무엇인가요?
셋씩 묶은 목록의 시작에도 함께 외우라는 권유와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이라는 목적이 되풀이됩니다.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부분은 줄였습니다. 생략된 부분에는 다투지 않음, 수행의 길이 오래 이어짐,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 세상을 아끼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숫자가 바뀌어도 가르침을 함께 보존하려는 행동과 목적은 같다는 점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묵상
“함께 외우라”는 말과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이라는 끝말 사이가 줄어 있어요. 중요한 말을 되풀이할 때 내가 쉽게 빼먹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함께 나누는 말이라면 어떤 부분을 다시 또렷하게 확인하고 싶나요?
욕심·성냄·어리석음이라는 해로운 뿌리와 그 반대인 이로운 뿌리를 밝히고, 몸·말·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와 좋은 행위를 대조합니다.
“셋씩 묶은 가르침은 무엇인가?
해로운 마음의 세 뿌리는 지나친 욕심, 미움, 어리석음이다. 이로운 마음의 세 뿌리는 욕심 없음, 미움 없음, 어리석음 없음이다. 나쁜 행동 세 가지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저지르는 나쁜 행동이다. 좋은 행동 세 가지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하는 좋은 행동이다.”
셋씩 묶은 목록은 마음의 뿌리와 몸·말·마음으로 하는 행동을 대조하며 시작합니다. 지나친 욕심, 미움, 어리석음은 해로운 뿌리 셋이고 그것들이 없음은 이로운 뿌리 셋입니다. 이어 나쁜 행동과 좋은 행동을 각각 몸, 말, 마음의 세 갈래로 나눕니다. 이렇게 나란히 놓인 목록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말하고 생각하는지 살필 수 있습니다.
묵상
욕심·미움·어리석음과 그 반대의 여섯 이름을 들을 때 가까움·거리감·모르겠음 중 무엇이 나타나나요? 안전하게 느껴지는 한 단어가 몸에 남긴 반응만 살펴볼까요, 아무것도 고르지 않거나 질문을 건너뛸까요?
감각적 욕망·악의·해치려는 생각과 의도와 인식을, 벗어남·호의·해치지 않음이라는 방향으로 각각 바꾸어 대조합니다.
“해로운 생각 세 가지는 감각의 즐거움을 좇는 생각, 미워하는 생각, 해치려는 생각이다. 이로운 생각 세 가지는 감각의 즐거움에서 벗어나려는 생각, 미워하지 않는 생각, 해치지 않는 생각이다.
해로운 뜻 세 가지는 감각의 즐거움을 좇는 뜻, 미워하는 뜻, 해치려는 뜻이다. 이로운 뜻 세 가지는 감각의 즐거움에서 벗어나려는 뜻, 미워하지 않는 뜻, 해치지 않는 뜻이다.
해롭게 알아보는 방식 세 가지는 감각의 즐거움을 좇음, 미워함, 해침이다. 이롭게 알아보는 방식 세 가지는 감각의 즐거움에서 벗어남, 미워하지 않음, 해치지 않음이다.”
같은 세 방향이 생각, 뜻, 알아보는 방식이라는 세 묶음에 거듭 나타납니다. 각 묶음마다 감각의 즐거움을 좇음·미워함·해침을 해로운 것으로, 거기서 벗어남·미워하지 않음·해치지 않음을 이로운 것으로 말합니다. 생각과 뜻과 알아보는 방식은 서로 다른 마음의 움직임이어서 같은 틀로 거듭 나타납니다.
묵상
불편한 대상을 만났을 때 생각·뜻·알아보는 방식이 같은 해로운 방향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알아차리나요? 오늘 한 순간에 벗어나려는 마음·호의·해치지 않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어디서 시작할까요?
해롭고 이로운 마음 요소를 대조한 뒤, 감각 세계·물질 세계·비물질 세계·소멸이라는 존재 영역과 낮음·중간·수승함이라는 세 단계를 제시합니다.
“해로운 요소 세 가지는 감각의 즐거움을 좇음, 미워함, 해침이다. 이로운 요소 세 가지는 그 즐거움에서 벗어남, 미워하지 않음, 해치지 않음이다.
또 다른 세 요소는 감각의 즐거움에 얽힌 영역, 형상이 있는 영역, 형상이 없는 영역이다. 또 다른 세 요소는 형상이 있는 영역, 형상이 없는 영역, 그침의 영역이다. 또 다른 세 요소는 낮은 것, 중간 것, 높은 것이다.”
앞에서는 생각과 뜻과 알아보는 방식이 해로운지 이로운지 나누었습니다. 이제 같은 세 방향을 요소의 목록으로 다시 밝힙니다. 다음 두 목록에는 감각의 즐거움에 얽힌 영역, 형상이 있는 영역, 형상이 없는 영역, 그침의 영역이 서로 다른 조합으로 놓입니다. 마지막 목록은 낮음과 중간과 높음이라는 구분입니다.
묵상
감각·형상이 있음·형상이 없음·그침·낮음·중간·높음이라는 말을 차례로 들을 때 어느 말에서 가까움·거리감·모르겠음이 나타나나요? 안전하게 느껴지는 한 단어가 몸에 남기는 반응만 볼까요, 아무것도 고르지 않거나 건너뛸까요?
감각·존재·존재하지 않음을 향한 갈망(딴하)과 감각·물질·비물질·소멸을 향한 갈망을 나누고, 나라는 견해·의심·규범과 의례에 대한 집착이라는 세 매임을 열거합니다.
“목마름 세 가지는 감각의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 계속 존재하려는 것, 존재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또 다른 세 목마름은 감각의 즐거움에 얽힌 영역, 형상이 있는 영역, 형상이 없는 영역을 향한다. 또 다른 세 목마름은 형상이 있는 영역, 형상이 없는 영역, 그침을 향한다.
마음을 묶어 두는 것(상요자나) 세 가지는 몸과 마음을 단단한 ‘나’라고 보는 생각, 의심, 규칙과 의식을 잘못 붙드는 것이다.”
사리뿟따는 목마름의 대상을 세 차례 다른 조합으로 나눕니다. 첫째는 감각의 즐거움, 계속 존재함, 존재하지 않음입니다. 다음 두 목록은 감각의 즐거움에 얽힌 영역과 형상이 있거나 없는 영역, 그침까지 포함합니다. 그 뒤에는 마음을 묶어 두는 세 가지를 따로 말합니다. 몸과 마음을 단단한 나라고 보는 생각, 의심, 규칙과 의식을 잘못 붙드는 일입니다.
묵상
무엇을 바라거나 피하고 싶을 때 그 대상이 분명히 보이나요? 감각의 즐거움, 계속 존재함, 존재하지 않음 가운데 어느 말이 지금의 마음에 가까운지 굳이 고르지 않아도 됩니다. 안전하게 살필 수 있는 한 바람이 있다면 무엇을 향하는지만 보아도 될까요?
마음에 스며들어 괴롭히는 세 가지 흘러드는 것과 세 존재 영역, 세 가지 추구를 밝히고, 자신을 남보다 낫다·같다·못하다고 견주는 세 방식을 제시합니다.
“마음을 흐리며 스며드는 것(아사와) 세 가지는 감각의 즐거움에 대한 것, 계속 존재함에 대한 것, 알지 못함에 대한 것이다. 삶의 세 영역은 감각의 즐거움이 있는 삶, 형상이 있는 삶, 형상이 없는 삶이다. 찾는 것 세 가지는 감각의 즐거움, 계속 존재함, 수행의 삶이다. 스스로를 비교하는 세 방식은 ‘나는 더 낫다’, ‘나는 같다’, ‘나는 더 못하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먼저 마음을 흐리며 스며드는 세 가지를 감각의 즐거움, 계속 존재함, 알지 못함에 따라 나눕니다. 그다음에는 삶의 세 영역과 사람이 찾는 세 가지를 각각 따로 제시합니다. 마지막은 남과 비교해 “나는 더 낫다”, “나는 같다”, “나는 더 못하다”라고 여기는 세 방식입니다. 비교의 방향이 달라도 마지막 세 방식은 모두 나를 다른 사람과 견주는 말입니다.
묵상
자신을 남보다 낫거나 못하다고 보는 두 생각이 사실 같은 비교 습관에서 나온다는 점을 알아차리나요? 오늘 한 번이라도 비교 없이 경험과 행동 자체를 살펴보려면 어떤 질문을 던질까요?
과거·미래·현재라는 세 시간과, 자기 존재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과정, 즐거움·괴로움·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그리고 세 가지 괴로움의 성격을 열거합니다.
“시간 세 가지는 과거, 미래, 현재다. 또 나라고 붙드는 몸과 마음, 그것이 생겨남, 그것이 그침이라는 세 끝이 있다. 느낌 세 가지는 즐거움, 괴로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이다. 괴로움 세 가지는 아픔 자체의 괴로움, 조건에 매여 있는 괴로움, 변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과거·미래·현재의 세 시간 뒤에, 나라고 붙드는 몸과 마음 및 그것의 생겨남과 그침이 나옵니다. 이어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그 어느 쪽도 아닌 느낌을 나눕니다. 마지막으로 아픔 자체, 조건에 매여 있음, 변함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을 따로 꼽습니다. 특히 느낌이 괴롭지 않다고 해서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라는 셋째 느낌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묵상
지금 느끼는 불편을 직접적인 고통·조건에 매인 압박·좋아하던 것이 변한 아쉬움 옆에 차례로 놓아 보면 어느 설명이 가까운가요? 이름을 붙였을 때 붙잡거나 피하려는 반응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그릇됨·바름·아직 정해지지 않음이라는 세 부류와, 과거·미래·현재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세 가지 어두움을 밝힙니다.
“세 무리는 잘못된 길로 굳어진 무리, 바른 길로 굳어진 무리, 아직 어느 쪽인지 정해지지 않은 무리다.
어둠 세 가지는 과거에 대해 의심하고 망설이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 미래에 대해 의심하고 망설이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 현재에 대해 의심하고 망설이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첫 목록은 잘못된 길로 굳어진 무리, 바른 길로 굳어진 무리, 아직 어느 쪽인지 정해지지 않은 무리를 나눕니다. 둘째 목록에서 “어둠”은 과거·미래·현재에 관한 의심과 망설임입니다. 세 시간마다 의심하고, 망설이고,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한다는 네 움직임이 반복됩니다. 원문은 세 시간이 각각 어둠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묵상
과거·미래·현재 가운데 어느 시간에 관한 의심이 가장 또렷한가요? 그 의심을 당장 없애거나 결론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과 아직 모르는 것을 한 가지씩 구별하면 마음의 움직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볼까요?
사리뿟따는 깨달은 스승에게 감추어 지켜야 할 것이 세 영역에서 없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몸으로 하는 일을 먼저 말합니다. 몸으로 하는 일이 깨끗하다는 말, 나쁜 행동이 없다는 말, 남이 알지 못하게 숨겨야 할 일도 없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말과 마음에 대해서도 뒤이어 같은 형식으로 말합니다.
묵상
몸의 행위가 맑다는 말과 숨길 행위가 없다는 말은 어떻게 서로 이어지나요? 투명한 행동을 떠올릴 때 몸에 나타나는 반응만 살펴볼까요?
앞에서 몸으로 하는 일에 관해 밝힌 뒤, 여기서는 말과 마음을 같은 형식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말로 하는 일이 깨끗하고 나쁜 말이 없으며 숨길 말도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마음으로 하는 일이 깨끗하고 나쁜 마음의 행동이 없으며 숨길 일도 없다고 합니다. 원문에는 “벗들이여”라는 부름이 두 번 나옵니다. 몸과 말과 마음, 세 영역이 모두 같은 틀로 되풀이됩니다.
묵상
말과 마음의 맑음을 각각 따로 밝힌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의 깨끗함’과 ‘마음의 깨끗함’이라는 두 표현은 각각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나요?
사리뿟따는 욕망·미움·어리석음을 먼저 마음을 차지하는 것으로, 다음에는 불로 다시 부릅니다. 한 카드에 같은 세 가지가 두 비유로 나타나는 셈입니다. 마지막에는 이름이 다른 세 불이 새 목록으로 나옵니다. 제물을 받을 만한 이, 집안을 꾸리는 이, 베풂을 받을 만한 이의 불입니다. 앞의 세 불과 뒤의 세 불은 같은 이름을 쓰지만 가리키는 대상이 다릅니다.
묵상
욕심·성냄·어리석음을 세 불로 떠올릴 때 지금 마음에 열기나 답답함이 느껴지는 곳이 있나요? 공경하고 돌보는 불을 떠올리면 느낌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어느 쪽에도 반응이 없다면 그 고요함을 잠시 알아차릴 수 있나요?
물질적 형상, 의지의 작용, 배우는 이의 단계, 원로 수행자의 종류, 공덕을 짓는 바탕이 되는 행위를 각각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물질의 모습은 세 갈래다. 보이고 부딪힘이 있는 것, 보이지 않지만 부딪힘이 있는 것, 보이지도 부딪힘도 없는 것이다. 의도로 지어 내는 것 세 갈래는 좋은 결실을 낳는 것, 좋지 않은 결실을 낳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사람 세 부류는 배우는 사람, 더 배울 것이 없는 사람, 그 어느 쪽도 아닌 사람이다. 수행 공동체의 어른 세 부류는 나이로 어른인 사람, 가르침에 깊은 사람, 공동체가 어른으로 인정한 사람이다. 좋은 결실을 쌓는 세 바탕은 베풂, 바른 행실, 마음 닦기다.”
다섯 목록이 한 카드에 모입니다. 물질의 모습은 보이는지와 부딪힘이 있는지로 나뉘며, “부딪힘”은 눈에 보이는지와 다른 기준입니다. 의도로 지어 내는 것은 좋은 결실, 좋지 않은 결실, 흔들리지 않는 것과 관련된 세 갈래로 나옵니다. 이어 배우는 사람·더 배울 것이 없는 사람·그 어느 쪽도 아닌 사람을 구별합니다. 수행 공동체의 어른도 나이, 가르침, 공동체의 인정이라는 서로 다른 까닭으로 불립니다. 마지막은 베풂, 바른 행실, 마음 닦기라는 좋은 결실의 세 바탕입니다.
묵상
누군가의 성숙을 나이나 공식 지위로 판단했던 장면이 떠오르나요? 베풂·바른 행실·마음 닦기라는 세 바탕을 들을 때 친숙하거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한 가지를 선택해 보고 싶은가요, 아니면 차이를 더 바라보고 싶은가요?
비난받을 근거를 직접 봄·들음·의심스러움으로 나누고, 이미 눈앞에 드러난 쾌락을 바라며 그에 지배받는 첫째 감각적 존재의 출생 방식을 밝힙니다.
“누군가를 문제 삼을 세 근거는 직접 본 것, 들은 것, 의심되는 것이다.
감각의 즐거움을 누리며 태어나는 세 가지 삶이 있다. 벗들이여, 어떤 존재들은 지금 눈앞의 즐거움을 원하고 그것에 끌려 산다. 인간과 일부 신, 일부 낮은 세계의 존재가 그렇다. 이것이 첫째 삶이다.”
Tīṇi codanāvatthūni—diṭṭhena, sutena, parisaṅkāya. Tisso kāmūpapattiyo—santāvuso sattā paccupaṭṭhitakāmā, te paccupaṭṭhitesu kāmesu vasaṁ vattenti, seyyathāpi manussā ekacce ca devā ekacce ca vinipātikā. Ayaṁ paṭhamā kāmūpapat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먼저 누군가를 문제 삼는 근거를 직접 본 것, 들은 것, 의심되는 것으로 나눕니다. 다음에는 감각의 즐거움을 누리며 태어나는 세 삶 가운데 첫째만 펼칩니다. 지금 눈앞에 나타난 즐거움을 원하는 존재들이 있고, 그 즐거움에 끌려 산다고 말합니다. 인간과 일부 신, 일부 낮은 세계의 존재가 예로 듭니다. “일부”는 신과 낮은 세계의 존재 모두에 붙으며 모든 존재를 같은 처지로 묶지 않습니다. 나머지 두 삶은 뒤 카드에서 이어집니다.
묵상
누군가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하려 할 때, 직접 본 것과 들은 것과 의심되는 것을 구별할 수 있나요? 오늘 떠오르는 한 판단에서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짐작인지 차분히 나누어 보면 말하는 방식이 달라질까요?
스스로 만들어 낸 쾌락과 남이 만들어 준 쾌락을 각각 바라며 그 지배를 받는 둘째와 셋째 감각적 존재의 출생 방식을 구별합니다.
“벗들이여, 스스로 만들어 낸 즐거움을 원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거듭 즐거움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끌려 산다. 만들기를 즐기는 신들이 그러하다. 이것이 둘째로 감각의 즐거움을 누리며 태어나는 삶이다.
벗들이여, 남이 만들어 낸 즐거움을 원하는 존재들도 있다. 그들은 남이 만들어 낸 즐거움에 끌려 산다. 남이 만든 것을 다스리는 신들이 그러하다. 이것이 셋째로 감각의 즐거움을 누리며 태어나는 삶이다.”
둘째와 셋째는 즐거움을 누가 만들어 냈는지에 따라 나뉩니다. 둘째는 스스로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존재들의 삶입니다. 그들은 거듭 즐거움을 만들어 내고 그것에 끌려 삽니다. 만들기를 즐기는 신들이 그 예입니다. 셋째는 남이 만들어 낸 즐거움을 바라는 존재들의 삶입니다. 그들은 남이 만든 즐거움에 끌려 삽니다. 남이 만든 것을 다스리는 신들이 그 예입니다.
묵상
스스로 마련한 즐거움과 다른 이가 마련한 즐거움이라는 두 말을 들을 때 느낌이 다르게 나타나나요? 몸에 먼저 닿는 한 반응만 살펴볼까요?
브라흐마 무리, 빛으로 채워진 하늘(광음천), 맑은 빛의 하늘(변정천)에 사는 존재들의 즐거움을 각각 스스로 만들어 냄, 감탄으로 드러냄, 고요히 누림이라는 세 방식으로 구별합니다.
“즐거움을 누리며 태어나는 삶은 세 가지다. 벗들이여, 어떤 존재들은 즐거움을 거듭 일으키며 산다. 브라흐마의 무리에 사는 신들이 그러하다. 이것이 첫째다.
벗들이여, 어떤 존재들은 즐거움에 적셔지고, 깊이 스며들고, 가득 차고, 온몸에 퍼져 때때로 ‘아, 즐겁다! 아, 즐겁다!’ 하고 외친다. 빛나는 신들(아밧사라)이 그러하다. 이것이 둘째다.
벗들이여, 어떤 존재들은 즐거움에 적셔지고, 깊이 스며들고, 가득 차고, 온몸에 퍼져 고요히 만족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두루 아름다운 신들(수바낀하)이 그러하다. 이것이 셋째다.”
즐거움을 누리며 태어나는 삶을 세 갈래로 나눕니다. 첫째는 즐거움을 거듭 일으키며 사는 브라흐마 무리의 신들입니다. 둘째와 셋째에는 즐거움에 적셔지고 깊이 스며들고 가득 차고 온몸에 퍼진다는 네 표현이 똑같이 나옵니다. 둘째의 빛나는 신들은 때때로 “아, 즐겁다”라고 외치고, 셋째의 두루 아름다운 신들은 고요히 만족하며 즐거움을 느낍니다. 각 무리에게 즐거움이 나타나는 방식을 구별한 목록입니다.
묵상
즐거움을 억지로 만들어 내거나 넘치게 표현하거나 고요히 누리는 순간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요? 지금의 기쁨을 붙잡거나 과장하지 않고 충분히 알아차리며 만족할 수 있나요? 몸에서는 어떻게 느껴지나요?
수행의 단계에 따른 지혜와, 사유·배움·직접 닦음에서 생겨나는 지혜를 밝히고, 배움·고요한 홀로 있음·지혜를 무기로 삼는 것과 최종적인 앎에 이르는 세 가지 능력을 설명합니다.
“지혜에는 배우는 이의 지혜, 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지혜, 어느 쪽도 아닌 이의 지혜가 있다. 또 스스로 생각해 얻는 지혜, 남에게 들어 배우는 지혜, 마음을 닦아 얻는 지혜가 있다. 세 무기는 배움, 떨어져 홀로 있음, 지혜다. 세 가지 앎의 힘은 ‘아직 모르는 것을 알겠다’는 힘, 알아 가는 힘, 이미 알아 마친 이의 힘이다.”
지혜를 먼저 사람의 배움 상태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누고, 다시 지혜가 생겨나는 길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눕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남에게 들으며, 마음을 닦는 길입니다. 그다음 배움·떨어져 홀로 있음·지혜를 세 무기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세 힘은 아직 모르는 것을 알려는 뜻, 알아 가는 일, 이미 알아 마친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배운 정도, 지혜가 생기는 길, 실천의 도구, 알아 가는 힘까지 지혜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비춥니다.
묵상
지혜를 생각만으로 얻으려 하나요, 들은 말만 쌓나요, 직접 닦아 확인하나요? 아직 알지 못한 것을 알겠다는 뜻에서 출발해 삶에서 확인할 한 가지는 무엇이며 어떤 고요가 필요할까요?
육신의 눈, 신성한 눈(천안), 지혜의 눈이라는 세 가지 눈과, 높은 윤리·높은 마음·높은 지혜를 닦는 세 가지 훈련, 그리고 비할 데 없는 성취와 세 가지 마음이 한곳에 모임(사마디)을 밝힙니다.
“세 눈은 보통 눈, 보통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신의 눈(디바 짜꾸), 지혜의 눈이다. 세 배움은 더 높은 행실, 더 높은 마음, 더 높은 지혜를 배우는 일이다. 세 닦음은 몸, 마음, 지혜를 닦는 일이다. 비할 데 없는 셋은 봄, 실천, 풀려남에서 비할 데 없음이다.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세 방식은 마음을 대상에 놓고 계속 살피는 것, 처음 놓는 일은 없이 계속 살피기만 하는 것, 놓지도 살피지도 않는 것이다.”
다섯 목록이 나란히 놓입니다. 보통 눈, 보통 눈을 넘어 보는 눈, 지혜의 눈을 구별한 뒤 행실·마음·지혜의 더 높은 배움과 몸·마음·지혜의 닦음을 말합니다. 봄·실천·풀려남에서 비할 데 없음도 별도 목록입니다. 마지막에는 마음을 대상에 처음 놓는 일과 계속 살피는 일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마음 모음의 세 방식을 나눕니다. 두 작용이 모두 있는 경우, 계속 살피는 일만 남은 경우, 둘 다 없는 경우를 빠뜨리지 않고 구별합니다.
묵상
지식으로 이해할 때와 경험을 지혜로 꿰뚫어 본다고 느낄 때 몸과 마음은 어떻게 다른가요? 몸·마음·지혜의 훈련을 차례로 떠올리면 어느 말에서 관심이 머무나요? 지금 해 보고 싶은 작은 관찰이 있나요, 아직 없다면 무엇이 궁금한가요?
비어 있음, 특징 없음, 바람 없음이라는 세 가지 풀려남의 마음이 한곳에 모임(사마디)과, 몸·말·마음이 맑고 성자다운 행실을 갖추는 것, 그리고 향상과 퇴보와 방편을 알아차리는 능숙함을 밝힙니다.
“또 마음을 모으는 세 방식은 텅 비어 있음을 향한 것, 붙들 모습이 없는 것, 바라는 방향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깨끗함 세 가지는 몸과 말과 마음의 깨끗함이다. 현명한 이의 세 행실은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세 솜씨는 나아지는 길을 앎, 그르치는 길을 앎, 알맞은 방법을 앎이다.”
앞에서 마음을 대상에 놓고 살피는 두 작용으로 마음 모음을 나눈 뒤, 여기서는 다른 세 방식이 나옵니다. 텅 비어 있음, 붙들 모습이 없음, 바라는 방향을 세우지 않음입니다. 이어 몸·말·마음의 깨끗함과 현명한 이의 몸·말·마음 행실을 각각 셉니다. 마지막 세 솜씨는 나아지는 길, 그르치는 길, 알맞은 방법을 아는 일입니다. 원문은 이 네 목록을 나란히 둘 뿐, 한 목록이 다음 목록을 반드시 낳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묵상
텅 비어 있음·붙들 표지가 없음·바라는 방향을 세우지 않음과 몸·말·마음의 맑음, 나아지는 길·그르치는 길·알맞은 방법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느 표현에서 관심이 머무나요? 한 표현이 숨과 자세에 남긴 반응만 살펴볼까요, 잘 모르겠다면 그대로 건너뛸까요?
건강함·젊음·살아 있음에 취해 우쭐해지는 세 가지 도취와, 자신·세상·가르침을 기준으로 삼는 방식, 그리고 과거·미래·현재를 주제로 삼는 대화를 제시합니다.
“세 가지 취함은 건강에 취함, 젊음에 취함, 살아 있음에 취함이다. 일을 이끄는 세 기준은 자기 자신, 세상, 가르침이다.
대화의 세 주제는 과거를 두고 ‘그때는 이러했다’고 말하는 것, 미래를 두고 ‘앞으로는 이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현재를 두고 ‘지금은 이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건강, 젊음, 살아 있음에 취하는 마음을 세 가지로 셉니다. 다음에는 일을 이끄는 기준이 자신인지, 세상인지, 가르침인지 구분합니다. 대화의 주제로는 과거, 미래, 현재를 각각 들며, “그때는 이러했다”, “앞으로는 이럴 것이다”, “지금은 이렇다”라는 말까지 붙입니다. 세 목록은 같은 시간표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만들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고 어떤 기준으로 움직이며 어느 때의 일을 말하는지 각각 따로 살피게 합니다.
묵상
건강하거나 젊거나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겨 함부로 행동한 적이 있나요? 지금 하는 일을 이끄는 기준은 나 자신인가요, 세상인가요, 가르침인가요? 지금 하려는 말을 과거의 기억·미래의 예상·현재의 관찰로 구별하면 무엇이 더 정직해질까요?
전생을 기억하는 앎, 존재들이 죽고 다시 태어남을 보는 앎, 흘러드는 것이 다한 앎이라는 세 가지 앎과, 하늘 세계의 머묾·브라흐마의 머묾·성자의 머묾, 그리고 신통의 기적·마음을 읽는 기적·가르침의 기적을 밝힙니다.
“세 가지 참된 앎은 지난 삶을 기억하는 앎, 존재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일을 아는 앎, 마음을 흐리며 스며드는 것이 다했음을 아는 앎이다. 세 가지 머묾은 신처럼 머묾, 브라흐마처럼 머묾, 고귀한 이처럼 머묾이다. 세 가지 놀라운 보여 줌은 특별한 능력을 보여 줌, 남의 마음을 알아 드러냄, 가르쳐 이끎이다.”
참되게 아는 세 가지는 지난 삶을 기억하고, 존재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알며, 마음을 흐리며 스며드는 것이 다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어 신처럼, 브라흐마처럼, 고귀한 이처럼 머무는 세 방식을 나열합니다. 마지막은 특별한 능력을 보여 주고, 남의 마음을 알아 드러내고, 가르쳐 이끄는 세 보여 줌입니다. 참된 앎, 머묾, 보여 줌이라는 세 종류의 목록이 이어지지만, 각각에 이르는 방법이나 순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묵상
지난 삶을 기억한다는 말, 존재들이 다시 태어나는 일을 안다는 말, 마음을 흐리는 것이 다함을 안다는 말 가운데 어느 대목이 낯선가요? 지금 이해할 수 있는 범위와 아직 물음으로 남는 범위를 구별해 보면 무엇이 보이나요?
사리뿟따가 지금까지 열거한 모든 세 항목이 부처님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뒤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라고 결론짓습니다.
“벗들이여, 이것이 알고 보시며 마음을 흐리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바르게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셋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다.”
Ime kho, āvus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tayo dhammā sammadakkhāt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긴 세 항목 목록은 시작과 거의 같은 선언으로 닫힙니다. “가르침이 있다”라는 첫말이 이제 “이것이 가르침이다”로 바뀌어, 앞에서 말한 모든 세 항목 묶음을 가리킵니다. 마음의 해로운 뿌리부터 참된 앎과 가르쳐 이끄는 보여 줌까지 내용은 넓지만, 사리뿟따는 이를 부처님께서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으로 다시 묶습니다. 다음에는 함께 외우고 다투지 말라는 말이 다시 나온 뒤, 네 가지씩 묶은 목록으로 넘어갑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마무리 말은 세 가지로 묶은 부분이 끝났음을 알려 줍니다.
묵상
많은 세 항목 가운데 지금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몸·말·마음의 선택을 바꾸게 하려면 오늘 어떤 실천과 연결해야 할까요?
세 항목 목록이 끝난 뒤 사리뿟따는 넷씩 묶은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부처님을 알고 보는 분, 마음을 흐리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라고 부르며, 그분께서 네 항목의 가르침을 바르게 설명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함께 외우고 다투지 말라는 말이 다시 나온 뒤에야, 몸·느낌·마음·일어나는 것들을 살피는 네 가지 알아차림의 자리가 첫 목록으로 제시됩니다.
묵상
어떤 실천을 한두 측면만 붙들고 나머지를 빠뜨린 적이 있나요? 지금 배우는 주제를 네 갈래로 펼쳐 본다면 무엇이 들어가며, 그중 가장 자주 놓치는 항목은 무엇인가요? 네 항목은 어떻게 연결되나요?
넷씩 묶인 가르침을 함께 외워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이루자는 뜻이 담긴 후렴 부분입니다.
“그 가르침도 모두 함께 외우고 서로 다투지 말아야 한다. … 신과 인간에게 이익과 행복이 되도록 해야 한다.”
Tattha sabbeheva saṅgāyitabbaṁ, na vivaditabbaṁ …pe…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네 가지로 묶은 목록을 선언한 뒤에도 함께 외우고 다투지 말라는 권고가 이어집니다. 첫머리에는 모두 함께 외우고 다투지 말라는 두 실천이 온전히 남아 있고, 마지막에는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이라는 목적이 제시됩니다. 그 사이에는 수행의 길을 오래 지속시키고 많은 사람에게 이익과 행복을 주며 세상을 연민한다는 뜻이 이어집니다. 네 가지씩 펼쳐지는 긴 분류를 익힐 때도 정확한 기억과 화합, 넓은 이익이라는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묵상
함께 배우는 자리에서 내용을 정확히 하려는 열정이 상대를 이기려는 마음으로 바뀐 적이 있나요? 견해 차이를 다루면서도 공동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말과 태도는 무엇일까요? 먼저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네 가지 마음챙김 확립으로 몸·느낌·마음·현상을 부지런하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세상에 대한 갈망과 낙담 없이 관찰하는 수행을 밝힙니다.
“넷씩 묶은 가르침은 무엇인가? 네 가지 알아차림의 자리(사띠빳타나)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몸에서 몸을 살피며 지낸다. 힘써 깨어 있고 분명히 알며 알아차려, 세상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괴로운 마음을 걷어 낸다. 느낌에서 느낌을 살피고 … 마음에서 마음을 살피고 … 일어나는 것들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살피며 지낸다. 힘써 깨어 있고 분명히 알며 알아차려, 세상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괴로운 마음을 걷어 낸다.”
넷씩 묶은 첫 목록은 몸, 느낌, 마음, 일어나는 것들을 차례로 살피는 알아차림의 네 자리입니다. 원문은 몸을 살필 때 힘써 깨어 있고 분명히 알며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괴로운 마음을 걷어 낸다고 온전히 말합니다. 느낌과 마음, 지금 일어나는 일을 살필 때도 같은 태도가 이어집니다. 네 대상 가운데 하나만 익숙해지면 나머지도 같은 눈으로 보게 됩니다.
묵상
몸과 느낌과 마음과 지금 일어나는 일 가운데, 지금 가장 분명하게 살필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 대상을 잠시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네 가지 바른 노력 가운데 아직 생기지 않은 해로운 상태가 생기지 않도록 막는 노력과, 이미 생긴 해로운 상태를 버리는 앞의 두 노력을 밝힙니다.
“바르게 힘쓰는 방법은 네 가지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아직 생기지 않은 해로운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열의를 내고, 애쓰고, 힘을 일으키고, 마음을 북돋우고, 힘쓴다. 이미 생긴 해로운 마음을 버리기 위해서도 열의를 내고, 애쓰고, 힘을 일으키고, 마음을 북돋우고, 힘쓴다.”
바르게 힘쓰는 네 방법 가운데 앞의 둘은 해로운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지 않도록, 이미 생긴 것은 버리도록 힘씁니다. 두 경우에 원문은 열의를 내고, 애쓰고, 힘을 일으키고, 마음을 북돋우고, 힘쓴다는 다섯 동사를 빠짐없이 반복합니다. 첫 방법과 둘째 방법은 해로운 마음이 아직 없는지 이미 있는지에 따라 목적이 다릅니다. 앞에서 살핀 알아차림에 이어, 여기서는 어떤 마음을 기르고 멈출지에 관한 실제 힘씀을 말합니다.
묵상
아직 생기지 않은 해로움과 이미 생긴 해로움이라는 두 표현을 들을 때 마음이 서로 다르게 반응하나요? 한 문장이 숨과 자세에 남긴 반응만 볼까요?
네 가지 바른 힘씀 가운데 뒤의 둘은 이로운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머물고 잊히지 않으며 자라고 넓어지고 닦여 완성되도록 합니다. 두 경우 모두 열의를 내고 애쓰고 힘을 일으키고 마음을 북돋우며 힘쓴다는 다섯 동사가 되풀이됩니다. 앞서 말한 두 방법까지 합치면 해로운 것의 예방과 버림, 이로운 것의 일으킴과 가꿈이라는 네 갈래가 됩니다. 이미 생긴 좋은 마음은 한 번 떠올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꾸준히 돌보아야 오래갑니다.
묵상
좋은 마음을 잠깐 일으킨 뒤 저절로 계속되기를 기대하지 않나요? 이미 생긴 이로운 습관 하나를 잊지 않고 유지하며 넓혀 완성하려면 어떤 반복과 점검이 필요할까요? 언제 확인할까요?
열의·마음·힘씀·탐구라는 네 가지 성취의 바탕에서 생겨나는 집중과 적극적인 노력을 함께 갖춘 수행을 밝힙니다.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네 바탕(잇디빠다)이 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열의에서 생긴 마음 모음과 힘쓰는 작용을 갖춘 첫 바탕을 닦는다. 마음에서 생긴 마음 모음과 힘쓰는 작용을 갖춘 바탕을 닦는다. 꾸준히 힘씀에서 생긴 마음 모음과 힘쓰는 작용을 갖춘 바탕을 닦는다. 살펴봄에서 생긴 마음 모음과 힘쓰는 작용을 갖춘 바탕을 닦는다.”
감각적 쾌락과 해로운 상태에서 떨어져 있음으로 인해 드는 첫째 깊은 집중(자나)과, 생각을 일으키고 살피는 두 작용이 가라앉아 마음이 하나로 모인 둘째 깊은 집중을 밝힙니다.
“깊이 몰입하는 단계(자나)는 네 가지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감각의 즐거움과 해로운 마음에서 떨어져 마음을 대상에 놓고 계속 살피며, 떨어져 있음에서 생긴 큰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첫째 단계에 들어 머문다. 마음을 대상에 놓고 살피는 두 작용이 가라앉으면, 속으로 맑아지고 마음이 하나가 된다. 두 작용 없이 마음 모음에서 생긴 큰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둘째 단계에 들어 머문다.”
네 가지 깊은 몰입 가운데 첫째와 둘째를 살펴봅니다. 첫째는 감각의 즐거움과 해로운 마음에서 떨어져 마음을 대상에 놓고 계속 살피는 두 작용이 있는 상태입니다. 큰 기쁨과 즐거움은 떨어져 있음에서 생깁니다. 둘째에서는 두 작용이 가라앉고 속으로 맑아지며 마음이 하나로 모입니다. 큰 기쁨과 즐거움은 남아 있지만 이번에는 마음 모음에서 생깁니다. 원문은 두 단계에서 무엇이 가라앉고 무엇이 남으며 즐거움이 어디에서 생기는지를 구별합니다.
묵상
집중하려 할 때 대상을 붙들고 계속 확인하는 말이 마음속에서 움직이나요? 그 작용이 자연히 고요해져도 대상을 놓치지 않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무엇이 그 고요를 도왔나요? 다시 시도할 수 있나요?
기쁨이 사라져 담담해지는 셋째 깊은 집중과, 즐거움과 괴로움을 모두 내려놓아 평정과 마음챙김이 맑아지는 넷째 깊은 집중을 밝힙니다.
“큰 기쁨이 가라앉으면 치우치지 않고, 알아차리고 분명히 알며, 몸으로 즐거움을 느낀다. 고귀한 이들이 ‘치우치지 않고 알아차리며 즐겁게 머문다’고 말하는 셋째 단계에 들어 머문다. 즐거움과 아픔을 버리고, 그보다 앞서 기쁜 마음과 괴로운 마음도 사라지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고 치우치지 않음과 알아차림이 맑은 넷째 단계에 들어 머문다.”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ṁvedeti, yaṁ taṁ ariyā ācikkhanti: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ṁ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ṁ upekkhāsatipārisuddhiṁ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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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셋째 몰입에서는 큰 기쁨이 가라앉지만 몸으로 느끼는 즐거움은 남습니다. 수행자는 치우치지 않고 알아차리며 분명히 압니다. 고귀한 이들은 이 상태를 ‘치우치지 않고 알아차리며 즐겁게 머문다’고 부릅니다. 넷째에서는 즐거움과 아픔을 버리고, 그보다 앞서 기쁜 마음과 괴로운 마음도 사라집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가운데 치우치지 않음과 알아차림이 맑습니다. 셋째와 넷째에서 느낌과 마음이 각각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필 수 있습니다.
묵상
강한 기쁨이 사라질 때 좋은 상태가 끝났다고 붙잡지는 않나요? 즐겁거나 괴로운 쪽으로 기울지 않으면서도 또렷이 알아차리는 평정은 무관심과 어떻게 다른가요? 몸과 마음에서 어떤 차이가 나나요?
마음이 한곳에 모임(사마디) 닦음이 현생의 행복, 지식과 봄, 마음챙김과 분명한 앎, 흘러드는 것이 다함이라는 네 갈래 결과로 이어짐을 밝힙니다.
“마음을 모으는 닦음은 네 가지 결과로 이어진다. 벗들이여, 닦고 자주 익히면 이 삶에서 즐겁게 머무는 데 이르는 마음 모음이 있다. 벗들이여, 닦고 자주 익히면 알고 보는 힘을 얻는 데 이르는 마음 모음이 있다. 벗들이여, 닦고 자주 익히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에 이르는 마음 모음이 있다. 벗들이여, 닦고 자주 익히면 마음을 흐리며 스며드는 것이 다하는 데 이르는 마음 모음이 있다.”
사리뿟따는 마음을 모으는 닦음이 닦고 자주 익힐 때 네 가지 결과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이 삶에서 즐겁게 머무는 것, 알고 보는 힘을 얻는 것,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 마음을 흐리며 스며드는 것이 다함입니다. 네 결과마다 “벗들이여”라는 부름과 “닦고 자주 익히면”이라는 조건이 되풀이됩니다. 여기에는 아직 각 결과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질문과 답을 통해 각 방법이 차례로 밝혀집니다.
묵상
집중을 떠올릴 때 편안함·특별한 앎·또렷한 알아차림·흘러드는 것이 다함 가운데 어느 말에 마음이 머무나요? 각 말을 떠올릴 때 기대와 몸의 감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잠시 비교해 볼 수 있나요?
현생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마음이 한곳에 모임(사마디) 닦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감각적 즐거움에서 떨어져 첫째 깊은 집중부터 넷째 깊은 집중까지 차례로 들어 머무는 수행이라고 답합니다.
“벗들이여, 닦고 자주 익히면 이 삶에서 즐겁게 머무는 데 이르는 마음 모음은 무엇인가? 벗들이여, 수행자는 감각의 즐거움과 해로운 마음에서 떨어져 마음을 대상에 놓고 … 넷째 깊은 몰입의 단계에 들어 머문다. 벗들이여, 이것이 닦고 자주 익히면 이 삶에서 즐겁게 머무는 데 이르는 마음 모음이다.”
앞서 말한 첫 결과인 “이 삶에서 즐겁게 머묾”에 이르는 방법을 묻고 답합니다. 수행자는 감각의 즐거움과 해로운 마음에서 떨어져 첫 몰입에 든 뒤, 같은 과정을 거쳐 넷째 몰입까지 나아갑니다. 마지막에는 이것이 닦고 자주 익히면 현재의 삶에서 즐겁게 머무는 데 이르는 마음 모음이라고 다시 밝힙니다.
묵상
즐겁게 머물기 위해 더 많은 자극을 찾나요, 자극에서 잠시 떨어져 마음을 고요히 하나로 모으나요? 오늘 짧은 시간이라도 감각의 즐거움을 찾아다니지 않고 머물 공간을 만들 수 있나요? 언제가 좋을까요?
지식과 봄으로 이어지는 마음이 한곳에 모임(사마디) 닦음을 묻고, 밤이든 낮이든 늘 빛에 대한 인식에 마음을 두어 밝고 열린 마음을 기르는 수행이라고 답합니다.
“벗들이여, 닦고 자주 익히면 알고 보는 힘을 얻는 데 이르는 마음 모음은 무엇인가? 벗들이여, 수행자는 빛을 알아보는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낮이라는 인식을 세운다. 낮에 그러하듯 밤에도, 밤에 그러하듯 낮에도 그렇게 한다. 이처럼 마음을 열어 가리지 않고 밝게 빛나는 마음을 닦는다. 벗들이여, 이것이 알고 보는 힘을 얻는 데 이르는 마음 모음이다.”
이번에는 알고 보는 힘을 얻는 마음 모음을 묻습니다. 답은 빛을 알아보는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낮이라는 인식을 세우는 것입니다. 낮에 그러하듯 밤에도, 밤에 그러하듯 낮에도 한다는 두 방향의 표현이 빠짐없이 이어집니다. 마음을 열어 가리지 않고 밝게 빛나는 마음을 닦는다는 말이 그 뒤에 놓입니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닦고 자주 익힌 마음 모음이 알고 보는 힘을 얻는 데 이른다고 질문의 목적을 다시 받습니다. 낮과 밤을 바꾸어 말한 반복에 뜻이 있습니다.
묵상
낮과 밤을 바꾸어 말하면서 같은 마음을 닦는 대목이 이어져요. ‘낮에 그러하듯 밤에도’와 ‘밤에 그러하듯 낮에도’는 어떤 점을 거듭 강조할까요? 그 반복을 읽을 때 빛나는 마음이라는 말은 어떻게 들리나요?
마음챙김(사띠)과 분명한 앎으로 이어지는 마음이 한곳에 모임(사마디) 닦음을 묻고, 느낌과 인식과 생각이 일어나고 머물다 사라지는 과정을 그때그때 아는 수행이라고 답합니다.
“벗들이여, 닦고 자주 익히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에 이르는 마음 모음은 무엇인가? 벗들이여, 수행자는 느낌이 생길 때 알고, 머물 때 알고, 사라질 때 안다. 대상을 알아보는 마음이 생길 때 알고, 머물 때 알고, 사라질 때 안다. 생각이 생길 때 알고, 머물 때 알고, 사라질 때 안다. 벗들이여, 이것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에 이르는 마음 모음이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에 이르는 방법은 느낌, 대상을 알아보는 마음, 생각의 움직임을 보는 것입니다. 각 대상이 생길 때, 머물 때, 사라질 때를 안다는 말이 세 번 되풀이됩니다. 원문은 어느 하나의 대상을 붙잡아 두라고 하거나, 셋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변화의 시작과 머묾과 끝을 각각 아는 것이 여기서 다루는 실제 내용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닦고 자주 익히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에 이른다고 끝맺습니다.
묵상
느낌이나 생각이 생긴 순간은 알지만 사라지는 순간은 놓치지 않나요? 오늘 하나의 느낌을 골라 생김과 머묾과 사라짐을 끝까지 지켜본다면, 영원할 듯한 반응이 어떻게 다르게 보일까요? 붙잡음은 줄어드나요?
흘러드는 것이 다함으로 이어지는 마음이 한곳에 모임(사마디) 닦음을 묻고, 몸과 느낌과 인식과 의도적 형성과 의식이라는 다섯 무더기가 생기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행이라고 답합니다.
“벗들이여, 닦고 자주 익히면 마음을 흐리며 스며드는 것이 다하는 데 이르는 마음 모음은 무엇인가? 벗들이여, 수행자는 내 것이라 붙잡기 쉬운 몸과 마음의 다섯 무더기가 생기고 사라짐을 살핀다. ‘이것이 몸의 모습이고, 이것이 생겨남이며, 이것이 사라짐이다. 느낌은 … 알아봄은 … 빚어 내는 작용은 … 이것이 의식이고, 이것이 의식의 생겨남이며, 이것이 사라짐이다.’ 벗들이여, 이것이 닦고 자주 익히면 마음을 흐리며 스며드는 것이 다하는 데 이르는 마음 모음이다.”
마음을 흐리며 스며드는 것이 다하는 데 이르는 방법은 내 것이라 붙잡기 쉬운 몸과 마음의 다섯 무더기가 생기고 사라지는 모습을 살피는 것입니다. 몸의 모습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기는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모두 밝힙니다. 느낌, 알아봄, 빚어 내는 작용에서도 같은 틀로 보고, 마지막 의식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기는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다시 봅니다.
묵상
몸이나 느낌이나 생각을 곧바로 ‘나’라고 여기기 전에 그것이 어떻게 생겨 머물다 사라지는지 본 적이 있나요? 지금 강하게 붙드는 경험 하나의 발생 조건과 사라짐을 추적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한없이 넓혀 가는 네 가지 마음가짐을 열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동서남북 모든 방향과 모든 존재, 온 세상에 넓고 크게, 원한과 미움 없이 가득 채우는 수행을 설명합니다.
“끝없이 넓히는 네 마음(아빠만냐)이 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따뜻한 마음(멧따)을 첫째 방향에 펼친다. 둘째, 셋째, 넷째 방향에도 그렇게 한다. 위와 아래와 가로로, 모든 곳과 온 세계에 그 마음을 넓고 크고 끝없이, 미움이나 해치려는 마음 없이 펼치며 머문다. 아픔을 함께하는 마음(까루나)을 …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무디따)을 …”
끝없이 넓히는 네 마음 가운데 따뜻한 마음의 펼침이 먼저 온전히 나옵니다. 첫째부터 넷째 방향으로 넓힌 뒤 위와 아래와 가로로, 모든 곳과 온 세계로 펼칩니다. 그 마음은 넓고 크고 끝이 없으며 미움과 해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어 아픔을 함께하는 마음과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도 같은 방식으로 네 방향과 온 세계에 펼쳐집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넷째 마음인 치우치지 않음을 다시 다룹니다.
묵상
따뜻한 마음을 네 방향에서 온 세계로 펼치고, 미움이나 해치려는 마음 없이 머문다고 해요. ‘모든 곳과 온 세계’라는 넓이는 따뜻한 마음의 범위를 어떻게 바꾸나요? 뒤이어 이름만 놓인 아픔을 함께하는 마음과 함께 기뻐하는 마음은 이 문장과 어떤 관계로 읽히나요?
앞서 아픔을 함께하는 마음과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은 줄여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넷째인 치우치지 않는 마음을 펼치는 문장이 온전히 나옵니다. 첫째부터 넷째 방향으로, 다시 위와 아래와 가로로 범위를 넓혀 온 세계에 이릅니다. 마음의 크기를 넓고 크고 끝없다고 말하며, 미움이나 해치려는 마음이 없다고 밝힙니다. 앞서 나온 따뜻한 마음을 펼치는 말과 같은 틀로, 네 가지 마음 가운데 마지막인 치우치지 않는 마음을 말합니다.
묵상
치우치지 않는 마음은 네 방향을 거쳐 위와 아래, 가로로도 펼쳐져 온 세계에 이릅니다. 이 길게 넓어지는 순서를 따라가면 ‘치우치지 않음’은 어떤 태도로 다가오나요? 끝에서 미움과 해치려는 마음이 없다고 덧붙인 까닭도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몸의 형상을 넘어서는 세 조건을 갖추어 끝없는 허공의 경지에 들어 머물고, 그 경지마저 완전히 넘어서 끝없는 의식의 경지에 들어 머무는 수행을 밝힙니다.
“형상 없는 네 머묾(아루빠)이 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형상을 알아보는 마음을 완전히 넘고, 부딪힘을 알아보는 마음이 사라지고, 서로 다른 것을 알아보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공간은 끝이 없다’고 여기며 끝없는 공간의 영역에 들어 머문다. 그 영역을 완전히 넘어 ‘의식은 끝이 없다’고 여기며 끝없는 의식의 영역에 들어 머문다.”
네 무형 상태의 첫째와 둘째가 제시됩니다. 첫째에 들어가기 전에는 형상을 알아보는 마음을 완전히 넘는 것, 부딪힘을 알아보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 서로 다른 것을 알아보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라는 세 조건이 각각 나옵니다. 이어 “공간은 끝이 없다”고 하며 끝없는 공간의 영역에 들어 머뭅니다. 둘째에서는 끝없는 공간의 영역을 완전히 넘고 “의식은 끝이 없다”고 하며 끝없는 의식의 영역에 들어 머뭅니다. 두 단계 모두 영역을 말한 뒤 그곳에 들어 머문다는 동작으로 끝납니다.
묵상
첫째로 공간이 끝없다고 여기며 머물고, 그 영역을 완전히 넘은 뒤 의식이 끝없다고 여기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공간’에서 ‘의식’으로 옮겨 가는 순서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요? 앞에 놓인 세 조건은 이 전환을 어떻게 준비하나요?
네 무형 상태의 셋째와 넷째가 이어집니다. 셋째에서는 앞서 제시된 끝없는 의식의 영역을 완전히 넘습니다. 이어 “아무것도 없다”고 하며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들어 머뭅니다. 넷째에서는 다시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을 완전히 넘고, 인식도 아니고 비인식도 아닌 영역에 들어 머뭅니다. 두 단계 모두 앞의 상태를 완전히 넘어서야 다음 상태에 들 수 있습니다. 넷째 상태는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네 가지 무형 상태를 마칩니다.
묵상
끝없는 의식을 지나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는 상태에 들고, 거기서도 다시 나아갑니다. 앞 상태를 완전히 넘는다는 말이 두 번 이어질 때 두 상태는 어떻게 구별되나요? 마지막 상태의 이름을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요?
기댈 수 있는 네 가지 방법을 담은 이 짧은 목록은 씀·견딤·피함·떨쳐 냄이라는 서로 다른 네 동작을 나란히 놓습니다. 네 동작 모두 앞에 “헤아린 뒤”라는 같은 조건이 각각 붙으며, 어느 하나도 생각 없이 행하는 반응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문장은 무엇을 쓰고 무엇을 견디며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떨쳐 내는지 구체적인 사례 없이, 어떤 대상에는 쓸 수 있고 어떤 대상에는 견디거나 피하거나 떨쳐 내는 대응이 있음을 구분합니다.
묵상
헤아린 뒤 쓰고, 견디고, 피하고, 떨쳐 낸다는 네 동작이 나옵니다. 네 경우 모두 헤아림이 먼저 놓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같은 일을 무조건 반복하는 것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응답하는 것은 어떻게 구별되나요?
옷을 구하거나 입을 때 집착과 무리한 요구를 버리고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되, 그 일로 자신을 내세우거나 남을 낮추지 않고 꾸준히 실천하는 오래된 전통을 설명합니다.
“고귀한 이들의 오래된 삶의 방식(아리야왕사)은 네 가지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어떤 옷이든 만족하며 그런 만족을 칭찬한다. 옷을 얻으려고 부당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 얻지 못해도 안달하지 않고, 얻으면 달라붙거나 도취되거나 빠지지 않은 채 그 한계를 알고 벗어날 길을 알며 사용한다. 옷에 만족한다고 자신을 치켜세우거나 남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벗들이여, 이렇게 능숙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오래되고 으뜸가는 그 삶의 방식에 서 있다.”
Cattāro ariyavaṁsā. Idhāvuso, bhikkhu santuṭṭho hoti itarītarena cīvarena, itarītaracīvarasantuṭṭhiyā ca vaṇṇavādī, na ca cīvarahetu anesanaṁ appatirūpaṁ āpajjati; aladdhā ca cīvaraṁ na paritassati, laddhā ca cīvaraṁ agadhito amucchito anajjhāpanno ādīnavadassāvī nissaraṇapañño paribhuñjati; tāya ca pana itarītaracīvarasantuṭṭhiyā nevattānukkaṁseti na paraṁ vambheti. Yo hi tattha dakkho analaso sampajāno paṭissato, ayaṁ vuccatāvuso: ‘bhikkhu porāṇe aggaññe ariyavaṁse ṭhito’.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고귀한 이들의 오래된 삶의 방식 네 가지 가운데 첫째는 옷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어떤 옷이든 만족하고 그 만족을 좋게 말하지만, 옷을 얻기 위해 부당한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얻지 못했을 때 안달하지 않고, 얻었을 때도 달라붙거나 도취되거나 빠지지 않은 채 한계와 벗어날 길을 보며 사용합니다. 이런 만족을 이유로 자신을 높이거나 남을 낮추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능숙함, 게으르지 않음, 분명한 앎, 알아차림을 갖춘 이가 그 오래된 방식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묵상
지금 입고 있는 옷 한 벌을 떠올리면 얻기 전과 사용 중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만족을 말하면서 자신을 높이거나 남을 낮추는 마음이 섞일 때도 있나요? 그런 마음이 없다면 옷이 몸을 돕는 방식만 살펴보아도 좋습니다.
얻은 음식을 무리하게 구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만족하되, 그 일로 자신을 높이거나 남을 깎아내리지 않는 두 번째 전통을 설명합니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는 얻어 온 어떤 음식이든 만족하며 그런 만족을 칭찬한다. 음식을 얻으려고 부당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 얻지 못해도 안달하지 않고, 얻으면 달라붙거나 도취되거나 빠지지 않은 채 그 한계를 알고 벗어날 길을 알며 먹는다. 음식에 만족한다고 자신을 치켜세우거나 남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벗들이여, 이렇게 능숙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오래되고 으뜸가는 그 삶의 방식에 서 있다.”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 santuṭṭho hoti itarītarena piṇḍapātena, itarītarapiṇḍapātasantuṭṭhiyā ca vaṇṇavādī, na ca piṇḍapātahetu anesanaṁ appatirūpaṁ āpajjati; aladdhā ca piṇḍapātaṁ na paritassati, laddhā ca piṇḍapātaṁ agadhito amucchito anajjhāpanno ādīnavadassāvī nissaraṇapañño paribhuñjati; tāya ca pana itarītarapiṇḍapātasantuṭṭhiyā nevattānukkaṁseti na paraṁ vambheti. Yo hi tattha dakkho analaso sampajāno paṭissato, ayaṁ vuccatāvuso: ‘bhikkhu porāṇe aggaññe ariyavaṁse ṭhito’.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둘째 방식은 얻어 온 음식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 만족하고 그 만족을 좋게 말하며, 음식을 얻으려고 부당한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받지 못해도 안달하지 않고, 받은 뒤에는 달라붙거나 도취되거나 빠지지 않은 채 그 한계와 벗어날 길을 보며 먹습니다. 만족을 핑계로 자신을 치켜세우거나 남을 깎지 않는다는 조건도 앞의 옷 이야기와 같습니다. 능숙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분명히 알고 알아차린다는 마지막 말까지 같은 구조로 되풀이됩니다.
묵상
원하는 음식을 얻지 못했을 때와 좋아하는 음식을 앞에 두었을 때 몸과 마음의 첫 반응은 어떻게 다른가요? 다음 식사에서 배고픔·맛의 즐거움·충분함 가운데 어느 신호가 가장 또렷한지 알아보고 싶은가요, 아니면 평소처럼 먹고 싶나요?
머물 곳을 무리하게 구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만족하되, 그 일로 자신을 내세우거나 남을 낮추지 않고 꾸준히 실천하는 전통을 설명합니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는 어떤 거처든 만족하며 그런 만족을 칭찬한다. 거처를 얻으려고 부당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 얻지 못해도 안달하지 않고, 얻으면 달라붙거나 도취되거나 빠지지 않은 채 그 한계를 알고 벗어날 길을 알며 사용한다. 거처에 만족한다고 자신을 치켜세우거나 남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벗들이여, 이렇게 능숙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오래되고 으뜸가는 그 삶의 방식에 서 있다.”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 santuṭṭho hoti itarītarena senāsanena, itarītarasenāsanasantuṭṭhiyā ca vaṇṇavādī, na ca senāsanahetu anesanaṁ appatirūpaṁ āpajjati; aladdhā ca senāsanaṁ na paritassati, laddhā ca senāsanaṁ agadhito amucchito anajjhāpanno ādīnavadassāvī nissaraṇapañño paribhuñjati; tāya ca pana itarītarasenāsanasantuṭṭhiyā nevattānukkaṁseti na paraṁ vambheti. Yo hi tattha dakkho analaso sampajāno paṭissato, ayaṁ vuccatāvuso: ‘bhikkhu porāṇe aggaññe ariyavaṁse ṭh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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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셋째 방식은 머무는 곳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거처든 만족하고 그 만족을 좋게 말하지만, 더 나은 거처를 얻으려고 부당한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얻지 못해도 안달하지 않고, 얻으면 달라붙거나 도취되거나 빠지지 않은 채 그 한계와 벗어날 길을 보며 사용합니다. 만족을 자랑해 자신을 높이거나 남을 낮추지도 않습니다. 옷과 음식에 이어 거처에서도 같은 조건이 모두 반복됩니다. 마지막에는 능숙함과 게으르지 않음,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갖춘 이가 오래된 방식에 서 있다고 합니다.
묵상
지금 머무는 공간에서 편안함이나 불편함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곳은 어디인가요? 더 좋은 장소를 상상할 때 마음은 넓어지나요, 조급해지나요, 별 변화가 없나요? 무언가를 바꾸고 싶은지 그대로 머물고 싶은지도 열어 두고 살펴볼 수 있나요?
마음을 흐리는 것을 버리는 일과 마음을 닦는 일을 기꺼워하면서도 그 일로 자신을 칭찬하거나 남을 낮추지 않는 네 번째 성자의 전통을 설명합니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는 버리는 일을 즐기고 좋아하며, 마음을 닦는 일을 즐기고 좋아한다. 그러나 버리고 닦는 일을 좋아한다고 자신을 치켜세우거나 남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벗들이여, 이렇게 능숙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오래되고 으뜸가는 고귀한 이들의 삶의 방식에 서 있다.”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 pahānārāmo hoti pahānarato, bhāvanārāmo hoti bhāvanārato; tāya ca pana pahānārāmatāya pahānaratiyā bhāvanārāmatāya bhāvanāratiyā nevattānukkaṁseti na paraṁ vambheti. Yo hi tattha dakkho analaso sampajāno paṭissato ayaṁ vuccatāvuso: ‘bhikkhu porāṇe aggaññe ariyavaṁse ṭhito’.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앞의 세 방식은 옷·음식·거처에서 만족하는 태도를 다뤘습니다. 넷째는 버리는 일과 닦는 일을 즐기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좋아한다고 자신을 높이거나 남을 낮추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능숙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는 이가 오래된 방식에 서 있다고 반복합니다. 좋아하는 일 자체가 무엇인지와 그 일을 자랑거리로 삼지 않는 태도를 함께 말합니다.
묵상
좋아하는 습관이나 수행을 떠올릴 때 순수한 기쁨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이 각각 어떻게 느껴지나요? 어느 한쪽이 없을 수도 있어요. 버림과 마음 닦기 자체를 생각할 때 몸에서 가벼움이나 부담이 느껴지는 곳이 있나요?
네 가지 노력을 열면서, 눈으로 형상을 볼 때 전체 모습이나 세부 특징에 이끌리지 않고 절제를 닦아 눈의 기능을 지키고 절제를 이루는 수행을 설명합니다.
“힘쓰는 네 방법은 지킴, 버림, 기름, 보존이다. 벗들이여, 지키려고 힘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벗들이여, 수행자는 눈으로 형상을 볼 때 특징이나 세부 모습을 붙잡지 않는다. 눈을 지키지 않으면 지나친 욕심과 괴로운 마음을 비롯한 해로운 것들이 밀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을 지키려고 실천하고, 눈을 보호하며, 눈을 지키는 데 이른다.”
힘쓰는 네 방법을 지킴·버림·기름·보존으로 먼저 늘어놓고, 첫째인 지킴을 눈의 사례로 묻고 답합니다. 눈으로 형상을 볼 때 특징이나 세부 모습을 붙잡지 않습니다. 눈을 지키지 않으면 지나친 욕심과 괴로운 마음을 비롯한 해로운 것들이 밀려들 수 있다는 조건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눈을 지키려고 실천하고, 보호하며, 지키는 데 이른다고 동작을 세 번 말합니다. 본 뒤 무엇을 붙잡는지 살피는 내용입니다.
묵상
눈으로 형상을 보는 것과 그 특징을 붙잡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눈을 지키지 않으면 욕심과 괴로운 마음이 밀려들 수 있다는 설명을 읽으면, 보는 순간에 무엇을 지키려는지 더 분명해지나요?
마음으로 어떤 대상을 알 때도 전체 모습이나 세부 특징에 이끌리지 않고 절제를 닦아 마음의 기능을 지키고 절제를 이루는 수행으로 마무리합니다.
“마음으로 떠오른 것을 알 때도 특징이나 세부 모습을 붙잡지 않는다.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지나친 욕심과 괴로운 마음을 비롯한 해로운 것들이 밀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려고 실천하고, 마음을 보호하며, 마음을 지키는 데 이른다. 벗들이여, 이것이 지키려고 힘쓰는 일이다.”
여섯 감각 가운데 마지막인 마음의 경우가 온전히 나옵니다. 마음에 떠오른 것을 알 때 특징이나 세부 모습을 붙잡지 않는다는 말이 먼저입니다.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지나친 욕심과 괴로운 마음을 비롯한 해로운 것들이 밀려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마음을 지키려고 실천하고, 보호하며, 지키는 데 이르는 세 동작이 이어집니다. 끝의 “벗들이여”와 함께 이것이 지키려고 힘쓰는 일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앞의 눈에서 시작한 여섯 감각의 목록이 여기서 닫힙니다.
묵상
마음에 떠오른 생각 하나를 알아차린 뒤, 그 생각의 어떤 부분을 오래 붙잡았나요? 그 부분을 놓지 못했다고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잠시 멈춰 생각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
버리는 노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이나 악의, 해치려는 생각과 그 밖의 나쁜 상태를 그대로 두지 않고 곧바로 몰아내 없애는 수행이라고 답합니다.
“벗들이여, 버리려고 힘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자들이여, 여기서 수행자는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리고 몰아내며 끝내 없앤다. 이미 일어난 악의의 생각은 … 해치려는 생각은 … 그때그때 일어난 나쁘고 해로운 마음의 상태도 받아들이지 않고 버리고 몰아내며 끝내 없앤다. 벗들이여, 이것이 버리려고 힘쓰는 일이다.”
네 가지 힘씀 가운데 둘째는 이미 일어난 해로운 생각을 버리는 일입니다. 감각적 욕망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리고 몰아내며 끝내 없앤다는 설명이 온전히 나옵니다. 악의와 해치려는 생각은 생략표와 함께 같은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이어 그때그때 생기는 모든 나쁘고 해로운 마음의 상태에도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여기에는 질문하는 “벗들이여”와, 되풀이되는 말 속의 “수행자들이여”라는 두 부름말이 함께 쓰입니다.
묵상
감각적 욕망·악의·해침이라는 세 생각을 차례로 떠올리면 어느 말에서 마음이나 몸이 반응하나요? 그 반응을 계속 품고 싶은지 흘려보내고 싶은지, 아직 모르겠는지도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나요?
닦는 노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마음챙김부터 평정까지 이어지는 일곱 깨달음의 요소를 마음을 흐리는 것에서 멀어짐과 탐냄 없음과 소멸에 의지해 기르는 수행이라고 답합니다.
“벗들이여, 기르려고 힘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자들이여, 여기서 수행자는 홀로 떨어져 있음과 욕망의 사그라듦과 멈춤에 기대고 놓아 버림으로 무르익는, 알아차림이라는 깨달음의 요소를 기른다. 가르침을 살펴보는 요소를 … 힘쓰는 요소를 … 기쁨의 요소를 … 고요함의 요소를 … 집중의 요소를 …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라는 깨달음의 요소를 같은 바탕에서 기른다. 벗들이여, 이것이 기르려고 힘쓰는 일이다.”
셋째 힘씀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일곱 요소를 기르는 일입니다. 알아차림을 먼저 말하고, 가르침을 살펴봄·힘씀·기쁨·고요함·집중을 생략표와 함께 잇습니다. 마지막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을 말합니다. 처음과 마지막 요소에는 홀로 떨어져 있음, 욕망의 사그라듦, 멈춤에 기대고 놓아 버림으로 무르익는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가운데 요소에도 생략된 같은 조건이 이어집니다. 놓아 버림으로 향하게 기르는 일입니다.
묵상
일곱 깨달음 요소의 이름을 천천히 따라갈 때 어느 말에서 마음이 밝아지고 어느 말에서 잠시 멈추나요? 놓아 버림을 떠올리면 가벼움·불안·무덤덤함 가운데 어떤 느낌이 있나요? 아무 반응이 없어도 그 상태는 어떤가요?
지켜 나가는 노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해골이 된 시신, 벌레 먹은 시신, 검푸르게 변한 시신, 갈라진 시신, 부풀어 오른 시신이라는 다섯 가지 인식을 계속 마음에 지니는 수행이라고 답합니다.
“벗들이여, 보존하려고 힘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벗들이여, 수행자는 이미 생긴 좋은 집중의 대상, 곧 해골을 알아보는 마음, 벌레가 들끓는 시신을 알아보는 마음, 검푸르게 변한 시신을 알아보는 마음, 갈라진 시신을 알아보는 마음, 부풀어 오른 시신을 알아보는 마음을 지킨다. 벗들이여, 이것이 보존하려고 힘쓰는 일이다.”
넷째 힘씀은 이미 생긴 좋은 집중의 대상을 지키는 일입니다. 해골과 네 종류의 시신을 알아보는 마음이 그 대상으로 나옵니다. 벌레가 들끓거나 검푸르게 변하거나 갈라지거나 부풀어 오른 시신이 각각 나옵니다. 원문은 다섯 대상을 나란히 들며 시간에 따른 변화 순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몸이 썩어 가는 다섯 모습을 마음에 두고 지켜보는 집중입니다.
묵상
이미 생긴 집중의 대상을 지킨다는 설명 뒤에 해골과 네 모습의 시신이 차례로 나옵니다. 해골, 벌레가 들끓는 시신, 검푸르게 변한 시신, 갈라진 시신, 부풀어 오른 시신까지 다섯 모습을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이 몸도 언젠가 그렇게 변한다는 사실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나요?
서로 다른 두 묶음의 네 가지 앎을 잇달아 늘어놓습니다. 첫 묶음은 가르침에 대한 앎, 그에 따라 헤아리는 앎, 두루 아우르는 앎, 사람들이 함께 정한 표현에 대한 앎입니다. 둘째 묶음은 괴로움, 그것이 생겨남, 멈춤, 멈춤으로 이끄는 길에 대한 앎입니다. 두 묶음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므로 따로 구분해 읽습니다.
묵상
한 가지 불편을 괴로움·생겨나는 원인·멎을 가능성·그 길이라는 네 칸 옆에 놓아 보면 어느 칸이 가장 선명하고 어느 칸은 아직 흐릿한가요? 지금 더 보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아니면 네 칸 어느 곳에도 놓지 않고 쉬고 싶은가요?
깨달음의 흐름에 들도록 돕는 네 요소입니다. 참된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바른 가르침을 듣고, 깊이 헤아려 마음을 기울이고, 가르침에 맞게 실천합니다. 네 항목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배움과 숙고와 실천으로 이어지지만, 이 짧은 목록이 각 항목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묵상
좋은 사람·바른 배움·깊은 성찰·실제 행동을 차례로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곳과 잠시 멈추는 곳은 어디인가요? 가까이 가 보고 싶은 한 요소가 있나요, 아직 모르겠다면 무엇을 조금 더 살펴보고 싶은가요?
흐름에 든 이가 갖추는 네 요소를 열면서, 그 첫째로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자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분 등 부처의 아홉 가지 덕을 스스로 확인하여 갖는 흔들림 없는 믿음을 밝힙니다.
“흐름에 든 사람에게는 네 가지 특성이 있다. 벗들이여, 고귀한 제자는 부처를 직접 확인한 데서 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지닌다. ‘그분은 흘러드는 것이 다한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며,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셨고, 앎과 행실을 갖추셨고, 잘 가셨으며, 세상을 아신다. 길들일 사람을 이끄는 데 으뜸이시며, 신과 사람의 스승이시고, 깨달으신 분이시며, 존귀하신 분이다.’”
이미 흐름에 든 사람의 첫째 특성은 부처를 직접 확인하여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어 부처의 아홉 가지 덕을 칭찬합니다. 흘러드는 것이 다한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분, 앎과 행실을 갖춘 분, 잘 가신 분, 세상을 아시는 분, 사람을 이끄는 데 으뜸가는 분, 신과 사람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이 그 덕입니다.
묵상
어떤 스승을 믿을 때 명성이나 감정에 기대나요, 지혜와 행동과 가르침의 결실을 직접 살피나요? 부처의 아홉 덕 가운데 지금 내 수행의 방향을 가장 분명히 비추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 덕을 어떻게 따를까요?
흐름에 든 사람의 둘째 특성은 가르침에 대한 직접 확인에서 생긴 확신입니다. 부처께서 잘 설명하셨고,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으며, 때를 기다리지 않고, 와서 보라고 초대하고, 안으로 이끌며, 지혜로운 사람이 저마다 스스로 알아야 한다는 여섯 특징을 담았습니다. 이 여섯 특징은 가르침이 숨기는 것 없이 누구나 와서 확인할 수 있다는 성격을 보여 줍니다.
묵상
지금 직접 살펴보고 싶은 가르침이 하나 떠오르나요? 떠오른다면 그것을 듣기 전과 실천한 뒤 몸·말·마음의 작은 차이를 어떤 표지로 알아볼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시험하고 싶지 않다면 믿음이라는 말이 지금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나요?
거룩한 제자가, 바르게 실천하는 네 쌍 여덟 부류의 수행자 공동체(상가)야말로 온갖 공양과 존경을 받을 만한 으뜸가는 복밭이라고 확신함을 밝힙니다.
“고귀한 제자는 함께 수행하는 수행자 공동체(상가)를 직접 확인한 데서 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지닌다. ‘부처의 제자들은 훌륭하게, 곧게, 이치에 맞게, 바르게 실천한다. 그들은 네 쌍, 여덟 사람이다. 이 제자들의 모임은 예물과 손님 대접과 베풂과 합장을 받을 만하며, 세상에서 으뜸가는 좋은 결실의 밭이다.’”
셋째 특성은 부처의 제자들이 이루는 모임에 대한 확신입니다. 잘 실천하고 곧게 실천하고 이치에 맞게 실천하고 바르게 실천한다는 네 표현이 이어집니다. 네 쌍, 여덟 사람이 그 모임을 이룬다고 말하며, 이어 예물·손님 대접·베풂·합장을 받을 만하고 세상에서 으뜸가는 좋은 결실의 밭이라고 칭찬합니다. 모임의 규모보다 제자들의 수행과 받을 만한 대접을 함께 연결합니다.
묵상
어떤 공동체를 떠올릴 때 이름과 규모, 사람들의 실제 행실 가운데 무엇이 신뢰감에 가장 먼저 영향을 주나요? 곧고 합당한 실천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나요?
넷째 특성은 고귀한 이들이 아끼는 바른 행실입니다. 깨지지 않음, 틈나지 않음, 얼룩 없음, 흠 없음이 온전한 행실을 여러 각도에서 말합니다. 그 행실은 자유롭게 하고, 지혜로운 이들이 칭찬하며, 잘못 붙들리지 않고, 깊은 집중으로 이끈다고 이어집니다. 부처·가르침·제자들의 모임에 대한 확신 다음에, 이 행실에 대한 확신이 네 번째로 놓입니다.
묵상
윤리라는 말을 들을 때 남의 평가에 대한 긴장과 마음이 고요해지는 느낌 가운데 어느 쪽이 가까운가요? 몸·말·마음에서 작은 어긋남이 떠오를 수도,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지금 혼자 살피고 싶은지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지는 어떻게 느껴지나요?
네 갈래 목록 세 묶음이 이어집니다. 먼저 수행의 결실을 흐름에 듦, 한 번 돌아옴, 다시 돌아오지 않음, 흘러드는 것이 다함으로 나열합니다. 다음에는 땅·물·불·바람이라는 네 기본 성질을, 마지막에는 삶을 이어 가는 네 자양분을 나열합니다. 자양분의 첫째인 먹는 음식은 거칠거나 섬세할 수 있고, 다음은 닿음, 마음의 의도, 의식입니다. 세 묶음은 서로 다른 주제이므로 따로 구분해 읽습니다.
묵상
오늘 나를 유지한 것을 떠올릴 때 먹는 음식·닿음·마음의 의도·이어지는 의식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선명한가요? 한 항목에 머물 때 몸과 마음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덜하거나 더하고 싶은 것이 없어도 그 균형을 느껴 볼 수 있나요?
의식이 몸의 형상, 느낌, 인식, 의도적 형성이라는 무더기를 대상이자 발판으로 삼고 거기에 갈망이라는 물기를 받아 자라나는 네 가지 정착 방식을 밝힙니다.
“의식이 자리 잡는 네 곳이 있다. 벗들이여, 의식은 몸과 물질에 다가가 이를 대상으로, 이를 바탕으로 머문다. 즐기는 마음을 물처럼 받아 자라고, 뻗고, 커진다. 또는 느낌에 … 또는 알아보는 마음에 … 또는 여러 조건이 빚는 작용에 다가가 이를 대상으로, 이를 바탕으로 머문다. 즐기는 마음을 물처럼 받아 자라고, 뻗고, 커진다.”
의식이 자리 잡는 네 곳은 몸과 물질, 느낌, 알아보는 마음, 여러 조건이 빚는 작용입니다. 첫째와 넷째에는 의식이 대상에 다가가 이를 바탕으로 머문다는 문장이 온전히 나오고, 가운데 둘은 생략표로 이어집니다. 즐기는 마음이 물처럼 더해질 때 의식이 자라고 뻗고 커진다는 말이 되풀이됩니다. 다섯 무더기 가운데 의식을 제외한 네 곳이 대상이라는 구조는 보이지만, 이 문장만으로 의식을 홀로 떠 있는, 변하지 않는 무엇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묵상
몸과 물질·느낌·알아보는 마음·여러 조건이 빚는 작용이라는 네 머묾을 떠올릴 때 마음이 자연스럽게 오래 머무는 곳이 있나요? 즐김이 물처럼 더해진다는 비유는 몸에서 어떤 느낌을 일으키나요? 붙듦이 잠시 느슨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의식의 흐름은 어떻게 보이나요?
그릇된 판단이나 행동으로 이끄는 네 치우침을 늘어놓습니다. 좋아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어리석음, 두려움입니다. 앞의 두 마음은 서로 반대처럼 보여도 한쪽으로 기울게 하는 점은 같습니다. 어리석음은 사태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두려움은 아는 대로 행동하기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원문은 네 경우마다 같은 “그릇된 길로 간다”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특정 재판이나 결정 상황으로 한정하지 않고 삶의 여러 판단에 적용할 수 있는 목록으로 읽습니다.
묵상
최근의 판단 하나를 좋아하는 마음·미워하는 마음·어리석음·두려움이라는 네 말 옆에 조용히 놓아 보면 어느 말에서 마음이 반응하나요? 아무것도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같은 사실을 다른 사람의 자리에서 바라볼 때 느낌이나 확신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옷, 얻어 온 음식, 거처, 이런 존재나 저런 존재가 되려는 마음이 갈망을 일으키는 네 계기입니다. 같은 문장이 되풀이되는 나머지 세 경우는 줄여 적었습니다. 기본 생활에 필요한 물건에서도 갈망이 생길 수 있고, 어떤 존재가 되거나 계속되기를 바라는 데서도 생길 수 있습니다. 앞서 옷과 음식과 거처에 만족하는 삶의 방식을 말한 자리와도 맞닿습니다. 원문은 물건 자체를 나쁘다고 정하지 않습니다.
묵상
옷·음식·거처·되고 싶은 존재를 하나씩 떠올릴 때 필요와 목마름은 몸에서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지금 특별히 끌리는 항목이 있나요, 아니면 모두 평범하게 느껴지나요? 만족할 여지가 보인다면 어떤 감각으로 알아차리나요?
실천 과정이 괴로운지 즐거운지, 통찰이 더딘지 빠른지를 조합한 네 가지 실천과, 참지 못함·인내·길들임·고요라는 또 다른 네 가지 실천을 함께 밝힙니다.
“수행하는 네 길이 있다. 괴롭게 수행하고 깨닫는 데 더딘 길, 괴롭게 수행하고 깨닫는 데 빠른 길, 편안하게 수행하고 깨닫는 데 더딘 길, 편안하게 수행하고 깨닫는 데 빠른 길이다. 또 다른 네 길은 참지 못하는 길, 참고 견디는 길, 자신을 길들이는 길, 마음을 가라앉히는 길이다.”
첫 네 길은 수행 과정이 괴로운지 편안한지와 깨닫는 데 더딘지 빠른지를 조합한 것입니다. 괴롭고 더딤, 괴롭고 빠름, 편안하고 더딤, 편안하고 빠름이 모두 나옵니다. 둘째 네 길은 참지 못함, 참고 견딤, 자신을 길들임, 마음을 가라앉힘입니다. 두 목록은 서로 다른 기준으로 네 갈래를 늘어놓으며, 각 항목이 시간 순서대로 다음 단계로 바뀐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묵상
어떤 배움의 과정이 힘들거나 더디게 느껴진 순간을 떠올릴 수 있나요? 과정의 편안함과 이해의 속도를 따로 바라보면 느낌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가르침의 네 발자국은 탐내지 않음, 악의를 품지 않음,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입니다. 앞의 둘은 탐냄과 악의가 없는 마음을 가리키고, 뒤의 둘은 알아차리고 한곳에 마음을 모으는 바른 방식입니다. 발자국이라는 비유는 이 네 항목이 가르침의 길에 놓인 특징임을 보여 줍니다. 이 짧은 목록은 각 항목의 자세한 수행법까지 풀이하지는 않습니다.
묵상
탐내지 않음과 악의 없음, 바른 알아차림과 집중을 함께 묶어 가르침의 발자국이라고 부르는 대목은 어떻게 들리나요? 배운 내용이 실제 말이나 행동에 남았던 때가 있다면 어떤 작은 변화였나요? 그 변화는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도 있었나요?
어떤 실천을 받아들일지 판단할 때 현재 겪는 괴로움이나 즐거움과 나중에 따라오는 괴로운 결과나 즐거운 결과를 네 가지 조합으로 나누어 살핍니다.
“실천을 받아들이는 네 방식이 있다. 벗들이여, 지금 괴롭고 나중에도 괴로운 결과를 맺는 실천이 있다. 지금 괴롭지만 나중에는 즐거운 결과를 맺는 실천이 있다. 지금 즐겁지만 나중에는 괴로운 결과를 맺는 실천이 있다. 지금 즐겁고 나중에도 즐거운 결과를 맺는 실천이 있다.”
현재의 느낌과 나중에 맺는 결과를 엇갈려 놓은 네 실천을 늘어놓습니다. 지금 괴롭고 나중에도 괴로운 경우, 지금 괴롭지만 나중에 즐거운 경우, 지금 즐겁지만 나중에 괴로운 경우, 지금도 나중에도 즐거운 경우입니다. 어느 한 경우를 항상 선택하라는 명령은 이 문장에 없습니다. 네 가지 모두 “실천을 받아들인다”는 공통 주제 아래 있습니다. 순간의 느낌과 뒤따를 결실을 구분해 보게 하는 배열입니다.
묵상
지금 앞에 놓인 한 선택을 떠올릴 때 현재의 편안함이나 불편함은 몸에서 어떻게 느껴지나요? 그 선택의 먼 결과를 상상하면 같은가요, 달라지나요? 어느 쪽도 고르지 않고 두 느낌을 나란히 두었을 때 새로 보이는 것이 있나요?
첫 묶음은 가르침을 바른 행실, 깊은 집중, 지혜, 놓여남이라는 네 큰 부분으로 나눕니다. 곧이어 힘씀, 알아차림, 깊은 집중, 지혜라는 네 가지 힘을 늘어놓습니다. 두 목록에 집중과 지혜가 함께 들어가지만, 첫 목록은 가르침의 묶음이고 둘째는 힘이라는 이름을 지닙니다. 놓여남에 이르는 구체적 방법은 이 목록에서 따로 말하지 않습니다.
묵상
가르침의 네 큰 묶음과 수행을 받치는 네 힘에 모두 깊은 집중과 지혜가 등장합니다. 같은 두 요소가 서로 다른 목록에 놓인 까닭을 어떻게 이해하나요? 나에게는 어느 목록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나요?
네 바탕은 지혜, 진실, 베풂, 고요함입니다. 이 네 가지는 삶에서 굳게 세워야 할 바탕으로 꼽힙니다. 짧은 목록이므로 어느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인지, 어떤 순서로 완성되는지는 이 문장에서 정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알고 살피는 면, 진실은 거짓이 없는 면, 베풂은 내어 주는 면, 고요함은 가라앉는 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중요한 결정을 하나 떠올리며 지혜·진실·베풂·고요함이라는 네 바탕을 차례로 대어 보면 어느 말에서 마음이 편안하거나 흔들리나요? 네 바탕을 함께 놓았을 때 결정은 어떻게 달라 보이나요?
행위(깜마)를 네 종류로 나누기 시작하는 문장입니다. 첫째는 어둡고 어두운 결과를 맺는 행위입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밝은 행위와 섞인 행위, 둘 다 아닌 행위가 나옵니다. 원문의 ‘어둡다’는 말은 행위와 결과를 짝지어 구분하는 표현이지만, 이 짧은 문장만으로 특정한 동기나 행동을 늘어놓지는 않습니다.
묵상
지금 떠오르는 한 행동의 동기와 예상되는 결실을 나란히 바라볼 수 있나요? 그 동기를 가만히 떠올려 볼 때 몸이나 마음에 반응이 있나요? 아무 행동도 떠오르지 않거나 판단하고 싶지 않다면 그 상태는 어떻게 느껴지나요?
행위의 네 갈래 가운데 남은 셋을 늘어놓습니다. 밝은 행위에는 밝은 결과, 어둡기도 밝기도 한 행위에는 그에 맞는 섞인 결과가 따른다고 합니다. 마지막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결과도 그러하며 행위가 끝나는 데 이르는 행위입니다. 앞서 말한 어두운 행위와 함께 네 갈래가 완성됩니다. 원문은 이 마지막 갈래를 어떤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묵상
행위가 좋은 결과를 낳는 것과 행위의 되풀이 자체가 끝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네 번째 갈래가 어둡지도 밝지도 않다고 한 말을 앞의 세 갈래와 견주어 읽으면, 결과보다 과정에서 무엇이 달라지나요?
같은 네 항목이 두 비유로 나옵니다. 감각적 욕망, 계속 존재하려는 마음, 견해, 제대로 알지 못함이 먼저는 사람을 휩쓰는 거센 흐름이고, 다음에는 사람을 매는 멍에입니다. 두 목록의 순서와 수량은 같습니다. 흐름과 멍에라는 말은 각각 휩쓸림과 묶임을 떠올리게 하지만, 원문은 이 자리에서 두 비유의 차이를 따로 풀이하지 않습니다. 견해와 제대로 알지 못함도 감각적 욕망과 함께 포함되어, 마음을 붙드는 조건이 넓게 묶입니다.
묵상
요즘 어떤 욕망·견해·모르는 상태가 거센 흐름처럼 마음을 끌고 가거나 멍에처럼 움직임을 제한했던 순간이 있나요? 있다면 그때 숨이나 어깨에 나타난 한 반응을 조용히 살펴볼 수 있나요?
앞서 말한 네 멍에에서 풀려나는 네 길이 정확히 대응합니다. 감각적 욕망, 계속 존재하려는 마음, 견해, 제대로 알지 못함의 멍에에서 각각 풀려남입니다. 다음 목록은 사람을 묶는 네 매듭입니다. 탐냄과 악의에 이어, 계율과 의식을 잘못 붙드는 태도, “이것만이 진실”이라는 고집이 나옵니다. 멍에에서 풀려나는 목록과 매듭의 목록은 이름과 방향이 다릅니다.
묵상
내 주장만 진실이라고 붙드는 순간이 있다면, 그 마음을 판단하지 않고 몸에서 먼저 나타나는 반응을 볼까요? 목이 닫히거나 가슴이 답답하거나 말이 빨라지는 신호가 보인다면 그것과 함께 잠시 머물 수 있나요?
두 묶음의 네 가지를 늘어놓습니다. 첫째는 감각적 즐거움, 견해, 계율과 의식, 나에 관한 주장을 붙잡는 네 경우입니다. 계율과 의식을 붙드는 경우가 문제로 분류됩니다. 둘째는 알, 어미 배, 습기, 저절로 나타남이라는 네 가지 태어남입니다. 이 분류는 고대 경전의 태어남에 관한 목록이며 현대 생물학의 분류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주제의 두 목록이 분명히 나뉘어 있습니다.
묵상
눈에 띄는 즐거운 대상보다 내 견해나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설명을 더 강하게 붙들고 있지는 않나요? 그 설명을 잠시 느슨하게 놓으면 어떤 여유가 생기나요? 그 여유 속에서 새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요?
잉태의 네 유형은 어머니 배 속에 들어감, 그 안에 머물러 있음, 밖으로 나옴이라는 세 단계에서 분명한 앎이 있는지를 따라 나뉩니다. 첫째는 세 단계 모두에서 분명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같은 부정이 세 번 반복되어 하나의 단계도 예외로 남기지 않습니다. 뒤에 이어질 둘째부터는 분명한 앎이 앞 단계부터 하나씩 늘어나며, 이 첫 유형이 그 비교의 기준이 됩니다.
묵상
어떤 일을 시작하고 지속하고 끝내는 세 단계 중 정신이 가장 흐려지는 때는 언제인가요? 그 한 단계에서 지금 알아차릴 수 있는 몸의 감각이나 마음의 신호는 무엇인가요? 그 신호를 억지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나요?
들어가는 순간만 분명히 아는 경우와, 들어가서 머무는 동안까지는 알지만 나올 때는 알지 못하는 경우를 서로 대조합니다.
“또 벗들이여, 어떤 이는 분명히 알아차리며 어머니 배 속에 들어가지만, 머물러 있을 때와 나올 때는 분명히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것이 둘째 잉태다.
또 벗들이여, 어떤 이는 들어갈 때와 머물러 있을 때는 분명히 알아차리지만, 나올 때는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셋째 잉태다.”
넷째 잉태는 들어감, 머물러 있음, 나옴의 세 단계 모두에서 분명한 앎이 있는 경우입니다. 첫째에서는 세 번 모두 부정이었고, 둘째와 셋째에서 긍정이 하나씩 늘었으며, 마지막에 세 번 모두 긍정으로 완성됩니다. 세 동작에 같은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어느 하나도 줄여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로써 잉태의 네 유형의 점층적 비교가 닫힙니다. 부정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점이 이 넷째 유형의 정확한 특징입니다.
묵상
요즘 하는 일 하나의 시작·지속·마무리를 모두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나요? 세 단계 중 쉽게 빠지는 하나를 골라, 그 시점을 알려 주는 구체적 신호를 찾아볼 수 있나요? 그 신호를 실제로 만났던 순간이 떠오르나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때 자기 의도만 작용하는 경우, 남의 의도만 작용하는 경우, 둘 다 작용하는 경우, 둘 다 작용하지 않는 경우를 대조합니다.
“몸을 얻는 네 경우가 있다. 벗들이여,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의도만 작용하고 남의 의도는 작용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남의 의도만 작용하고 자신의 의도는 작용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과 남의 의도가 모두 작용한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의도도 남의 의도도 작용하지 않는다.”
Cattāro attabhāvapaṭilābhā. Atthāvuso, attabhāvapaṭilābho, yasmiṁ attabhāvapaṭilābhe attasañcetanāyeva kamati, no parasañcetanā. Atthāvuso, attabhāvapaṭilābho, yasmiṁ attabhāvapaṭilābhe parasañcetanāyeva kamati, no attasañcetanā. Atthāvuso, attabhāvapaṭilābho, yasmiṁ attabhāvapaṭilābhe attasañcetanā ceva kamati parasañcetanā ca. Atthāvuso, attabhāvapaṭilābho, yasmiṁ attabhāvapaṭilābhe neva attasañcetanā kamati, no parasañcetan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몸을 얻는 데 자신의 의도와 남의 의도가 작용하는지를 두 축으로 나누어 네 경우를 말합니다. 자신만, 남만, 둘 다, 둘 다 아님이 차례로 나옵니다.
묵상
지금 생각하는 결과 하나를 내 의도만의 산물로 여기고 있나요? 내 선택과 다른 사람의 의도가 각각 어디까지 작용했는지, 혹은 둘 다 분명하게 작용하지 않았는지 차분히 나눌 수 있나요? 더 누락한 조건은 없나요?
베푸는 행위가 주는 사람에 의해서만, 받는 사람에 의해서만, 둘 다에 의해서, 또는 둘 다 아닌 경우에 어떻게 맑아지는지 네 가지로 밝힙니다.
“베풂이 깨끗해지는 네 경우가 있다. 벗들이여, 주는 사람 때문에 깨끗해지지만 받는 사람 때문에 그러지는 않은 베풂이 있다. 받는 사람 때문에 깨끗해지지만 주는 사람 때문에 그러지는 않은 베풂이 있다. 둘 중 누구 때문에도 깨끗해지지 않은 베풂이 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때문에 깨끗해지는 베풂이 있다.”
Catasso dakkhiṇāvisuddhiyo. Atthāvuso, dakkhiṇā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Atthāvuso, dakkhiṇā paṭiggāhakato visujjhati no dāyakato. Atthāvuso, dakkhiṇā neva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Atthāvuso, dakkhiṇā dāyakato ceva visujjhati paṭiggāhakato ca.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베풂이 깨끗해지는 데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중 누구 쪽이 관계하는지를 네 갈래로 나눕니다. 주는 사람 쪽만, 받는 사람 쪽만, 어느 쪽도 아님, 양쪽 모두입니다. 베풂이 누구로 인해 깨끗해지는가를 말합니다. 같은 네 갈래 나눔이 다음에 나오는 행동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베푸는 물건의 종류나 액수는 여기서 따로 말하지 않습니다.
묵상
무엇을 주거나 받을 때 한쪽의 좋은 의도만 보고 관계 전체를 좋다고 판단하나요? 지금 떠오르는 나눔 하나에서 주는 측과 받는 측이 각각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나눠 살펴볼 수 있나요?
사람들을 함께 묶는 네 바탕은 베풂, 다정한 말, 남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 남과 자신을 같이 대함입니다. 이어 거짓말, 사이를 갈라놓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을 고귀하지 않은 말로 듭니다. 고귀한 말은 이 네 말을 각각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과 자신을 같이 대함’은 단순한 공평함보다 더 넓게, 자신과 남을 같은 눈으로 보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묵상
누군가와 말을 나눈 최근 장면에서 베풂·따뜻한 말·이익되는 행동·나와 남을 같게 보는 마음 중 어떤 모습이 눈에 띄나요?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고, 그때 말을 건네기 직전의 숨·어깨·목소리 가운데 지금 기억나는 한 반응을 살펴볼 수 있나요? 떠오르지 않는다면 오늘 나눈 말 한마디를 다시 떠올려 봐도 좋아요.
보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알지도 못한 것을 했다고 말하는 네 가지 잘못된 말과, 하지 않았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네 가지 고귀한 말을 대조합니다.
“또 고귀하지 않은 네 가지 말이 있다.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듣지 않은 것을 들었다고, 감각으로 느끼지 않은 것을 느꼈다고, 알지 못한 것을 안다고 말한다. 또 고귀한 네 가지 말이 있다. 보지 않은 것을 보지 않았다고, 듣지 않은 것을 듣지 않았다고, 느끼지 않은 것을 느끼지 않았다고, 알지 못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본 것, 들은 것, 생각한 것, 안 것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네 가지 잘못된 말과, 그것을 했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네 가지 고귀한 말을 대조합니다.
“또 고귀하지 않은 네 가지 말이 있다.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들은 것을 듣지 않았다고, 감각으로 느낀 것을 느끼지 않았다고, 안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 고귀한 네 가지 말이 있다. 본 것을 보았다고, 들은 것을 들었다고, 느낀 것을 느꼈다고, 안 것을 안다고 말한다.”
앞서는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하거나 하지 않았다고 한 경우였다면, 여기서는 실제로 한 일을 말합니다. 본 것, 들은 것, 감각으로 느낀 것, 안 것을 각각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고귀하지 않습니다. 실제대로 했다고 말하면 고귀합니다. 여기서도 감각으로 느낀 것은 앞서와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묵상
이번에는 실제로 본 것과 들은 것, 감각으로 느낀 것과 안 것을 부인하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그대로 인정하는 말과 나란히 읽으면 앞서와 무엇이 뒤집혔나요? 두 대목이 함께 보여 주는 말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네 부류의 사람 가운데 첫 둘을 말합니다. 첫째는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고 그런 일에 계속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남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런 일에 계속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고통이 향하는 대상이 자신인지 남인지가 두 경우의 차이입니다. 원문은 한 번 고통을 주는 행위뿐 아니라 그 일을 지속해서 추구하는 모습을 함께 말합니다. 나머지 두 부류는 이어지는 대목에서 다룹니다.
묵상
지금은 무언가를 억지로 버티거나 누군가를 밀어붙이려 할 때 나타나는 작은 신호만 살펴볼까요? 턱·어깨·손 가운데 어디에서 그 긴장이 느껴지나요?
자신과 남 모두를 괴롭히는 사람과, 둘 다 괴롭히지 않아 지금 이 생에서 고요히 꺼진 행복을 누리는 사람을 대조합니다.
“벗들이여, 어떤 사람은 스스로와 남을 모두 고통스럽게 하고, 계속 두 쪽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에 매달린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지도 않고 그런 일에 매달리지도 않으며, 남을 고통스럽게 하지도 않고 그런 일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는 이 삶에서 목마른 바람이 사라지고 불이 꺼지듯 괴로움이 멎어(닙바나), 시원하고 행복을 느끼며 더없이 맑아진 자신으로 머문다.”
Idhāvuso, ekacco puggalo attantapo ca hoti attaparitāpanānuyogamanuyutto, parantapo ca paraparitāpanānuyogamanuyutto. Idhāvuso, ekacco puggalo neva attantapo hoti na attaparitāpanānuyogamanuyutto na parantapo na paraparitāpanānuyogamanuyutto. So anattantapo aparantapo diṭṭheva dhamme nicchāto nibbuto sītībhūto sukhappaṭisaṁvedī brahmabhūtena attanā vihara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셋째는 자신과 남을 모두 고통스럽게 하고 그 일을 계속하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둘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고 그런 일에도 매달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에는 이 삶에서 목마른 바람이 사라지고 불이 꺼지듯 괴로움이 멎어 시원하고 행복을 느끼며 머문다고 덧붙입니다. 불이 꺼지듯 고요해진다는 비유는 닙바나를 쉽게 보여 줍니다. 끝의 ‘더없이 맑아진 자신으로’라는 말은 영원한 자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
자신과 남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선택이라는 말을 들을 때, 지금 몸에서 먼저 느껴지는 반응은 무엇인가요? 편안함·의심·답답함 중 한 가지가 보인다면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고 잠시 머물러 볼 수 있나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남의 이익만을 위해, 둘 다를 위해, 또는 둘 다 아닌 채로 실천하는 네 가지 사람을 서로 대조합니다.
“또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벗들이여,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지만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렇지 않다.
벗들이여, 어떤 사람은 남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지 않다.
벗들이여, 어떤 사람은 자신과 남 모두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지 않는다.
벗들이여, 어떤 사람은 자신과 남 모두의 이익을 위해 실천한다.”
Aparepi cattāro puggalā. Idhāvuso, ekacco puggalo attahitāya paṭipanno hoti no parahitāya. Idhāvuso, ekacco puggalo parahitāya paṭipanno hoti no attahitāya. Idhāvuso, ekacco puggalo neva attahitāya paṭipanno hoti no parahitāya. Idhāvuso, ekacco puggalo attahitāya ceva paṭipanno hoti parahitāya ca.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두 축으로 놓고 네 가지 사람을 빠짐없이 배치합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과 남만을 위하는 사람이 먼저 대조됩니다. 그 뒤에 둘 모두를 위하지 않는 사람과 둘 다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때 분류의 기준은 이익을 바라는 마음보다 그 이익을 위해 실천하는지입니다. 자기 희생과 이기심의 두 극단을 넘어, 둘의 이익을 함께 살피는 실천이 넷째로 완성됩니다.
묵상
내 이익과 남의 이익이 겹칠 수 있는데도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지금 하는 일 하나에서 자신과 남에게 각각 실제로 이익이 되는 선택을 찾아볼 수 있나요? 그 선택을 실천으로 옮길 첫 행동은 무엇인가요?
어두운 처지와 밝은 처지에서 각각 어둠을 향해 가는 사람과 빛을 향해 가는 사람, 이 네 가지 경우를 빠짐없이 나눕니다.
“또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향하는 사람,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사람, 빛에서 어둠으로 향하는 사람, 빛에서 빛으로 향하는 사람이다.”
Aparepi cattāro puggalā—tamo tamaparāyano, tamo jotiparāyano, joti tamaparāyano, joti jotiparāyano.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현재의 처지를 어둠과 빛으로, 앞으로 향하는 결과를 다시 어둠과 빛으로 나눌 네 조합입니다. 어두운 출발이 어두운 결말을 필연적으로 만들지 않고, 밝은 출발도 밝은 결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변화와 빛에서 어둠으로 향하는 후퇴가 둘 다 가능합니다. 출발점으로 사람을 고정하지 않고, 지금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함께 보라는 분류입니다.
묵상
지금의 어려운 처지를 이유로 앞날도 어둡다고 단정하나요, 혹은 좋은 조건을 당연히 계속될 것으로 여기나요? 오늘 나의 방향을 조금 더 밝은 쪽으로 돌릴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가요?
네씩 묶은 가르침의 마지막 인물 분류입니다. 수행자를 흔들리지 않는 자, 흰 연꽃과 같은 자, 분홍 연꽃과 같은 자, 수행자 중에서도 가장 섬세한 자로 나눕니다. 흔들리지 않음과 연꽃처럼 피어남, 섬세함이라는 서로 다른 표현은 수행이 깊어 가는 여러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묵상
수행의 성숙을 하나의 척도로만 줄 세우고 있나요? 흔들리지 않음, 연꽃처럼 피어남, 섬세함이라는 서로 다른 표현 중 지금 내 실천을 돌아보게 하는 말은 무엇인가요? 그 말이 오늘의 한 행동을 어떻게 바꾸나요?
지금까지 열거한 네 가지씩 묶인 가르침들이 모두 알고 보시며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바르게 설명하신 것임을 확인합니다.
“벗들이여, 이것들이 알고 보시고 흘러드는 것이 다한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시며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께서 네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다.”
Ime kho, āvus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cattāro dhammā sammadakkhāt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네 개씩 묶어 설명한 긴 가르침을 마무리하는 말입니다. 알고 보시고 흘러드는 것이 다하셨으며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께서 이 목록을 바르게 설명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앞에서 네 개씩 묶어 말한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는 흘러드는 것이 다한 분을 가리킵니다.
묵상
많은 네 항목을 지나온 뒤, 자신에게 가장 뚜렷하게 남은 대조는 무엇인가요? 그 항목을 단지 외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늘의 판단이나 행동에 비추어 본다면 어떤 차이가 보이나요?
다섯씩 묶은 가르침을 여는 선언입니다. 앞 단락의 네씩 묶은 목록에서 다섯씩 묶은 목록으로 넘어왔습니다. 말하는 이는 사리뿟따이고, 가르침을 설명한 분으로는 알고 보시며 흘러드는 것이 다하고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를 듭니다. 이 문장에는 아직 다섯 항목의 구체적인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다섯 무더기부터 풀어냅니다.
묵상
배움의 새 단계를 열 때 앞서 배운 것과 이어지는 점을 확인하나요? 지금 살피려는 주제를 다섯 요소로 나누어 본다면 빠뜨리지 않고 확인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그 다섯 요소의 순서는 어떻게 정하고 싶은가요?
눈·귀·코·혀·몸으로 알아차리는 형상·소리·냄새·맛·촉감 가운데 마음에 들고 욕망을 일으키는 다섯 가지 감각 자극을 밝힙니다.
“다섯 감각 자극이 있습니다.
눈으로 아는 형상 가운데 좋고 원하며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즐거움과 연결되어 욕망을 일으키는 것, 귀로 아는 소리 … 코로 아는 냄새 … 혀로 아는 맛 … 몸으로 아는 촉감 가운데 좋고 원하며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즐거움과 연결되어 욕망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다섯 감각의 문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즐거운 대상이 있습니다. 눈의 형상과 몸의 촉감에서는 좋음, 원함, 마음에 듦, 사랑스러움, 감각적 즐거움과의 연결, 욕망을 일으킴이라는 여섯 특징이 전부 드러납니다. 소리·냄새·맛에도 같은 특징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섯 대상은 마음을 물들이고 끌어당기는 과정까지 함께 보여 줍니다.
묵상
오늘 눈·귀·코·혀·몸 중 어느 감각이 가장 쉽게 끌려가나요? 즐거운 대상을 밀어내지 않으면서, 좋아함이 욕망과 함께 커지는 순간을 어떤 몸의 신호로 알아차릴 수 있나요? 그 신호를 잠시 머물러 느껴볼 수 있나요?
삶이 향하는 곳은 다섯입니다. 지옥, 동물의 세계, 배고픔에 시달리는 존재들(뻬따)의 세계, 사람들, 신들입니다. 이는 다시 태어남을 말하는 경전의 세계관에서 나오는 다섯 갈래입니다. 뻬따는 배고픔에 늘 시달리는 존재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각 곳에 태어나는 원인이나 구체적인 모습은 말하지 않고, 다섯 이름만 보여 줍니다.
묵상
지금의 선택을 당장의 편안함으로만 판단하나요, 어떤 삶의 방향으로 이끄는지도 살펴보나요? 오늘 반복한 행동 하나가 아프고 어두운 방향과 안온하고 밝은 방향 중 어디로 향하는지 느껴지나요?
거처부터 가르침까지 다섯 가지 인색함, 마음을 가리는 다섯 장애, 낮은 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묶는 다섯 속박을 나열합니다.
“다섯 인색함은 거처, 가까이 지내는 집안, 이득, 칭찬, 가르침을 나누기 싫어하는 마음이다. 마음을 가리는 다섯 장애는 감각적 욕망, 악의, 나른함과 졸음, 들뜸과 후회, 의심이다. 아래쪽에 묶어 두는 다섯 속박은 몸과 마음을 나라고 보는 견해, 의심, 계율과 의식을 잘못 붙듦, 감각적 욕망, 악의다.”
다섯 가지씩 묶은 목록 세 개가 이어집니다. 인색함은 거처, 가까이 지내는 집안, 이득, 칭찬, 가르침을 남과 나누기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가리는 다섯 장애는 감각적 욕망, 악의, 나른함과 졸음, 들뜸과 후회, 의심입니다. 아래쪽에 묶어 두는 다섯 속박은 몸과 마음을 나라고 보는 견해, 의심, 계율과 의식을 잘못 붙듦, 감각적 욕망, 악의입니다. 의심·욕망·악의는 두 목록에 겹치지만, 목록마다 그 순서가 다릅니다.
묵상
나누기 싫은 마음, 지금의 수행을 가리는 상태, 오래 묶는 속박을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나요? 오늘 경험한 하나를 세 범주 가운데 어디에 놓을 수 있는지 살펴보면 어떤 대응이 더 분명해지나요?
형상 있는 세계와 형상 없는 세계에 다시 태어나려는 욕망, 자만, 들뜸, 모름 등 위쪽 다섯 속박과, 살생·도둑질·삿된 성관계·거짓말·취하게 하는 것을 삼가는 다섯 계학을 나열합니다.
“위쪽에 묶어 두는 다섯 속박은 형상이 있는 세계에 태어나려는 마음, 형상 없는 세계에 태어나려는 마음, 자만, 들뜸, 제대로 알지 못함이다. 지킬 다섯 가르침은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기, 주지 않은 것을 훔치지 않기, 잘못된 성행위를 하지 않기, 거짓말하지 않기, 술과 그 밖의 취하게 하는 것처럼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을 삼가기다.”
앞서 다룬 아래쪽 다섯 속박에 이어 위쪽 다섯 속박을 듭니다. 형상이 있는 세계와 형상 없는 세계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 마음, 자만, 들뜸, 제대로 알지 못함입니다. 이어 살아 있는 것을 죽임, 훔침, 잘못된 성행위, 거짓말, 마음을 흐리게 하는 취할 것을 삼가는 다섯 가르침이 나옵니다. 두 목록 모두 다섯 가지지만, 하나는 마음을 묶는 속박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지켜야 할 실천입니다. 원문은 술과 발효주를 포함해 부주의의 바탕이 되는 취할 것을 말합니다.
묵상
위쪽에 묶어 두는 다섯 마음 상태와 일상에서 지킬 다섯 가르침이 나란히 놓여요. 다시 태어나려는 바람·자만·들뜸과 살생·도둑질 등을 삼가는 행동은 서로 다른 층위를 어떻게 보여 주나요?
해로운 마음의 때를 다 없앤 수행자는 고의로 생명을 죽이는 일, 도둑질, 성행위, 알면서 거짓말하는 일, 재가자처럼 즐기려고 재물을 쌓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밝힙니다.
“벗들이여, 흘러드는 것이 다한 수행자는 고의로 살아 있는 것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고, 훔칠 마음으로 주지 않은 것을 가질 수 없으며, 성행위를 하거나 알면서 거짓말할 수 없다. 또 예전에 집에서 살 때처럼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려고 물건을 쌓아 둘 수 없다. 이것이 할 수 없는 다섯 일이다.”
흘러드는 것이 다한 수행자에게는 할 수 없는 다섯 일이 있습니다. 고의로 목숨을 빼앗기, 훔칠 마음으로 주지 않은 것을 갖기, 성행위, 알면서 거짓말하기, 집에서 살던 때처럼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려고 물건을 쌓아 두기입니다. 생명을 빼앗는 데는 고의가, 훔치는 데는 그 의도가, 거짓말에는 알면서 한다는 조건이 각각 붙습니다. 마지막은 물건을 쌓아 두는 일 전체를 금하는 말이 아닙니다. 앞의 다섯 가르침과 비슷해 보여도 이곳은 흘러드는 것이 다한 이에게 불가능한 일을 말합니다.
묵상
마음을 괴롭히는 때를 다 없앤 수행자에게 불가능하다는 다섯 일은 각각 어떤 모습인가요? 고의로 죽임, 훔칠 마음, 알면서 하는 거짓말처럼 원문이 붙인 조건을 읽으면 단순한 행위 이름만 늘어놓은 것과 어떻게 달라지나요?
친족·재물·건강·윤리·견해의 다섯 손실을 나눈 뒤, 그중 윤리와 견해의 손실만이 나쁜 곳에 다시 태어나는 원인이 됨을 밝힙니다.
“다섯 손실은 가족을 잃음, 재물을 잃음, 건강을 잃음, 바른 행실을 잃음, 바른 견해를 잃음이다. 벗들이여, 살아 있는 것들은 가족·재물·건강을 잃었다는 이유로 죽은 뒤 좋지 않은 곳, 나쁜 삶의 길, 추락하는 곳, 지옥에 태어나지 않는다. 바른 행실이나 바른 견해를 잃었기 때문에 그런 곳에 태어난다.”
다섯 손실을 가족·재물·건강·바른 행실·바른 견해로 나눕니다. 앞의 세 가지를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뒤 나쁜 곳에 태어나지는 않는다고 부정합니다. 반면 바른 행실이나 바른 견해를 잃은 것은 그런 향방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가족이나 건강의 상실을 도덕적 잘못으로 돌리지 않는 구별이 중요합니다. 나쁜 곳, 나쁜 삶의 길, 추락하는 곳, 지옥이라는 네 표현이 함께 쓰입니다.
묵상
가족과 재물, 건강을 잃은 까닭만으로 나쁜 곳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먼저 말해요. 이어 바른 행실이나 견해를 잃은 경우를 원인으로 들어요. 이 문장이 두 종류의 손실을 구별하는 방식은 무엇을 분명히 하나요?
앞서와 짝을 이루어 가족·재물·건강·바른 행실·바른 견해의 다섯 성취를 말합니다. 앞의 세 가지를 갖추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뒤 하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바른 행실이나 바른 견해를 갖춘 것이 그 향방의 원인입니다. 이는 죽은 뒤의 향방과 연결되는 까닭을 구분한 것입니다. 손실을 말한 목록과 성취를 말한 목록은 같은 다섯 가지를 반대 방향으로 짝지은 것입니다.
묵상
가족과 재물, 건강을 갖춘 까닭만으로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바른 행실이나 견해를 갖춘 경우를 원인으로 들어요. 앞서 다룬 손실에 관한 구절과 이 대목은 어떻게 서로 대응하나요? 두 목록이 가리키는 원인을 나누어 읽어 보세요.
바른 행실을 잃어서 겪는 다섯 손해 가운데 첫째와 둘째입니다. 첫째는 부주의 때문에 많은 재물을 잃는 것이고, 둘째는 나쁜 평판이 퍼지는 것입니다. 부주의는 첫째 결과에만 직접 이어지며, 둘째 평판은 그와 별도로 생겨납니다.
묵상
부주의함과 조심함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나요? 특정한 일을 잘했는지 평가하지 않고, 일을 미루거나 보살필 때 나타나는 숨·자세·시선 가운데 지금 기억나는 한 반응을 조용히 살펴볼 수 있나요? 떠오르지 않는다면, 최근에 무언가를 소홀히 했던 순간을 돌아봐도 좋아요.
셋째 손해는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자신감이 없고 주눅이 드는 것입니다. 왕족, 브라흐마나, 집에서 사는 사람, 수행자의 모임 어디에서나 그렇습니다. 넷째는 혼란스러운 채 죽는 것입니다. 이어서 두 손해를 각각 말합니다. 앞선 재물 손실과 평판에 이어 이 삶에서 모임에 들어갈 때와 죽을 때의 상태를 제시합니다. 모임에서의 주눅이 반드시 죽을 때의 혼란으로 이어진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묵상
어떤 모임에 들어갈 때 담대함이나 주눅이 느껴진 장면이 있나요? 지금은 문을 열고 들어갈 때의 발걸음, 시선, 어깨 중 하나에 나타난 작은 반응을 살펴볼 수 있나요?
바른 행실을 잃어 겪는 다섯째 손해는 죽은 뒤의 향방입니다. 좋지 않은 곳, 나쁜 삶의 길, 추락하는 곳, 지옥이라는 네 표현이 함께 나오며, 이어 다섯째 손해라고 결론짓습니다. 앞서 다룬 넷째는 죽을 때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이 대목은 죽은 뒤 어디에 태어나는지를 말합니다. 이 결과는 앞의 가족·재물·건강을 잃은 경우와도 달리 바른 행실의 상실에 연결됩니다.
묵상
행실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죽은 뒤 이르는 곳을 네 표현으로 나열하고, 이를 다섯째 손해라고 맺어요. 앞선 손해들은 이 삶에서 일어났는데 마지막 손해는 언제 일어나나요? 네 표현을 거듭 쓴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른 행실을 갖춘 이의 둘째와 셋째 이로움입니다. 둘째는 좋은 평판이 퍼지는 것이고, 셋째는 네 종류의 모임 어디에 가더라도 자신감 있고 주눅 들지 않는 것입니다. 왕족, 브라흐마나, 집에서 사는 사람, 수행자라는 네 모임이 차례로 나옵니다. 평판이 생겨서 자신감이 생긴다고 이 대목이 말하지는 않으므로, 서로 다른 두 이로움으로 읽습니다. 앞서 바른 행실을 잃은 이에게서 나쁜 평판과 주눅이 들었던 것과 정확히 짝을 이룹니다.
묵상
좋은 평판과 여러 모임에서 주눅 들지 않는 태도가 나란히 놓여요. 평판이 담대함을 낳는다고 하지는 않네요. 이 두 이로움은 바른 행실과 어떤 관계로 제시되나요? 네 모임을 차례로 읽으면 무엇이 눈에 띄나요?
넷째 이로움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 혼란스럽지 않은 채 죽는다는 것입니다. 앞의 바른 행실을 잃은 사람이 혼란스러운 채 죽는다는 넷째 손해와 짝을 이룹니다. 원문은 죽음의 때에 대한 짧은 문장과 넷째라는 결론을 되풀이합니다. 이 자리에 죽음 뒤의 향방은 아직 나오지 않으며, 그것은 이어지는 다섯째 이로움에서 다룹니다. 죽을 때 혼란이 없다는 뜻을 과장해 죽음 자체가 없거나 고통이 전혀 없다는 말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묵상
바른 행실을 갖춘 사람은 죽을 때 혼란스럽지 않다고 해요. 이 짧은 말에서 ‘혼란스럽지 않다’는 표현은 무엇과 대비될까요? 앞서 나온 이로움들과 나란히 놓고 읽을 때 어떤 자리가 보이나요?
다섯째 이로움은 바른 행실을 갖춘 사람이 죽은 뒤 좋은 곳인 하늘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앞의 바른 행실을 잃은 이가 나쁜 곳에 태어난다는 다섯째 손해와 짝을 이룹니다. 앞선 네 이로움은 재물·평판·모임에서의 태도·죽을 때의 상태였고, 마지막은 죽은 뒤의 향방입니다. 좋은 곳과 하늘 세계라는 두 표현이 함께 쓰입니다. 이 결과를 현재의 부나 높은 신분과 같은 뜻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구분했습니다.
묵상
마지막 이로움은 죽은 뒤 좋은 곳, 곧 하늘 세계에 태어나는 일이에요. 앞의 네 결과는 이 삶의 평판과 마지막 순간까지를 말하는데, 이 다섯째 결과는 시간의 범위를 어떻게 넓히나요?
다른 수행자를 나무라려는 이가 알맞은 때에, 사실대로, 부드럽게, 도움이 되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말하겠다는 다섯 다짐을 먼저 세워야 함을 밝힙니다.
“벗들이여,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는 수행자는 먼저 다섯 가지를 마음에 세워야 한다. ‘때에 맞게 말하고 때에 맞지 않을 때 말하지 않겠다. 사실대로 말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지 않겠다. 부드럽게 말하고 거칠게 말하지 않겠다. 이롭게 말하고 해롭게 말하지 않겠다. 따뜻한 마음으로 말하고 속에 미움을 품은 채 말하지 않겠다.’ 남을 바로잡으려는 수행자는 이 다섯 가지를 먼저 마음에 세워야 한다.”
Codakena, āvuso, bhikkhunā paraṁ codetukāmena pañca dhamme ajjhattaṁ upaṭṭhapetvā paro codetabbo. Kālena vakkhāmi no akālena, bhūtena vakkhāmi no abhūtena, saṇhena vakkhāmi no pharusena, atthasaṁhitena vakkhāmi no anatthasaṁhitena, mettacittena vakkhāmi no dosantarenāti. Codakena, āvuso, bhikkhunā paraṁ codetukāmena ime pañca dhamme ajjhattaṁ upaṭṭhapetvā paro codetabbo.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남의 허물을 지적하기 전에 말하는 이가 자신의 동기와 방식을 먼저 정돈하라는 다섯 기준입니다. 시기는 제때와 잘못된 때로, 내용은 진실과 거짓으로, 어투는 부드러움과 거침으로, 효과는 이익과 해로움으로, 동기는 자비와 숨은 증오로 짝을 이룹니다. 다섯 긍정을 하나씩 밝히고 반대하는 다섯 부정을 누락 없이 붙입니다. 책망의 정당한 내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전하는 때·말·마음까지 훈련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묵상
누군가의 잘못을 말하려는 순간, 내 말은 제때이며 진실하고 부드럽고 실제로 이득이 되나요? 자비로운 마음과 숨은 증오 중 어느 쪽에서 나온 말인지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나요?
명상을 지원하는 다섯 요소 가운데, 깨달음에 이른 이의 깨달음과 여러 덕목을 믿는 첫째 요소와 병이 적고 소화가 알맞아 명상에 적합한 둘째 요소를 밝힙니다.
“힘써 수행할 때 받쳐 주는 다섯 조건이 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부처의 깨달음을 믿는다. ‘그분은 흘러드는 것이 다한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시고,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셨으며, 앎과 행실을 갖추셨고, 잘 가셨으며, 세상을 아신다. 길들일 사람을 이끄는 데 으뜸이시고, 신과 사람의 스승이시며, 깨달으신 분이시며, 존귀하신 분이시다.’ 또 병이 적고 소화가 잘되어, 속이 너무 차거나 뜨겁지 않고 알맞아 힘써 수행할 수 있다.”
힘써 수행할 때 받쳐 주는 다섯 조건 가운데 앞의 둘입니다. 첫째는 부처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며, 부처의 여러 덕을 하나씩 칭찬합니다. 둘째는 건강입니다. 병이 적고 소화가 잘되며 속이 지나치게 차거나 뜨겁지 않아 힘써 수행하기에 알맞다는 뜻입니다. 힘써 수행한다는 것은 폭넓은 노력을 뜻합니다. 앎과 행실을 갖춘 분부터 신과 사람의 스승까지, 부처님의 덕을 차례로 칭찬합니다.
묵상
명상이 잘되지 않을 때 마음의 의지만 탓하고 몸의 상태는 무시하나요? 오늘 나의 믿음이 향하는 대상을 확인하고, 아픔·소화·온도 가운데 하나를 살펴 몸에 알맞은 방식으로 앉아 볼 수 있나요?
스승과 지혜로운 도반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해로운 상태는 버리고 이로운 상태는 기르는 데 꾸준히 힘쓰는 명상의 셋째·넷째 지원 요소를 밝힙니다.
“그는 왜곡되거나 속임수를 쓰지 않고, 스승이나 함께 수행하는 지혜로운 벗들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드러낸다.
그는 해로운 상태를 버리고 이로운 상태를 받아들이기 위해 힘씀을 일으켜 머문다. 그는 강하고 확고하게 힘쓰며, 이로운 상태를 기르는 일에 느슨해지지 않는다.”
명상을 받쳐 주는 셋째와 넷째 요소입니다. 셋째는 솔직함으로, 스승과 함께 수행하는 지혜로운 벗 앞에서 자신을 숨기거나 꾸미지 않는 태도입니다. 수행의 상태를 정확히 드러내야 적절한 지도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넷째는 일어난 힘씀으로, 해로운 상태를 버리고 이로운 상태를 기르는 두 방향을 모두 포함합니다. 강함과 확고함, 느슨해지지 않음이 반복의 지속성을 받쳐 줍니다. 솔직한 진단과 실제의 노력이 연결된 쌍입니다.
묵상
지금 내 상태를 스승이나 믿을 수 있는 벗에게 있는 그대로 말해 본 적이 있나요? 꾸미지 않고 드러낼 때와 숨기고 포장할 때, 그 뒤에 오는 힘씀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힘써 수행할 때 받쳐 주는 다섯째 조건은 지혜입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고, 고귀하며, 꿰뚫어 알고, 괴로움을 바르게 끝내는 데 이르는 지혜입니다. 이어지는 별개의 목록은 맑은 이들이 머무는 다섯 하늘입니다. 맑은 이들이 머무는 다섯 하늘의 이름은 아위하, 아탑파, 수다사, 수닷시, 아까니타입니다. 두 목록이 이어서 나오지만 지혜가 하늘의 한 종류라는 뜻은 아닙니다.
묵상
명상을 편안해지는 기술로만 여기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지혜와는 떼어 놓고 있나요? 지금 마음에 생긴 감각이나 생각 하나가 어떻게 일어나고 약해지는지 짧게 머물러 볼 수 있나요?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다섯 유형으로 나눕니다. 두 삶 사이에 괴로움의 불이 완전히 꺼지는 사람, 다음 삶에 닿아 그렇게 되는 사람, 따로 힘쓰지 않고 그렇게 되는 사람, 힘써서 그렇게 되는 사람, 위로 거슬러 올라가 아까니타에 이르는 사람입니다. 다섯 유형은 저마다 다른 때와 방식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상태에 이릅니다.
묵상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다섯 유형으로 나눈 까닭은 무엇일까요? 괴로움의 불이 완전히 꺼지는 때와 노력의 정도가 서로 다르게 묘사된다는 점을 읽으면, 다섯 이름이 어떻게 구별되나요?
스승을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며 믿지 못하면, 마음이 열의·전념·지속·힘씀 쪽으로 기울지 않는 첫째 마음의 메마름을 밝힙니다.
“다섯 가지 마음의 메마름이 있습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스승을 의심하고 망설이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벗들이여, 스승을 의심하고 망설이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그 수행자의 마음은 열의·전념·지속·힘씀으로 기울지 않습니다. 누구의 마음이 열의·전념·지속·힘씀으로 기울지 않는다면, 이것이 첫째 마음의 메마름입니다.”
Pañca cetokhilā. Idhāvuso, bhikkhu satthari kaṅkhati vicikicchati nādhimuccati na sampasīdati. Yo so, āvuso, bhikkhu satthari kaṅkhati vicikicchati nādhimuccati na sampasīdati, tassa cittaṁ na namati ātappāya anuyogāya sātaccāya padhānāya, yassa cittaṁ na namati ātappāya anuyogāya sātaccāya padhānāya, ayaṁ paṭhamo cetokhilo.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다섯 마음의 메마름 중 첫째는 스승에 대한 의심입니다. 의심, 망설임, 마음을 정하지 못함, 확신하지 못함이라는 네 상태가 먼저 나오고, 같은 네 상태를 다시 받아 결과를 밝힙니다. 그 수행자의 마음은 열의, 전념, 지속, 힘씀으로 기울지 않으며, 이 네 수행 방향도 두 번 온전히 되풀이됩니다. 의심은 실천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의 힘을 막는 메마름으로 작용합니다.
가르침, 수행자 공동체, 훈련에 대한 의심과, 도반에게 화나고 원한을 품는 일 때문에 마음이 열의·전념·지속·힘씀 쪽으로 기울지 않는 나머지 네 가지 마음의 메마름을 밝힙니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는 가르침을 의심하고 망설인다. … 함께 수행하는 이들의 모임을 의심하고 망설인다. … 훈련을 의심하고 망설인다. … 또 함께 수행하는 이들에게 화가 나고 불만스럽고 마음이 상해 닫혀 있다. 그런 수행자의 마음은 열의·전념·지속·힘씀으로 기울지 않는다. 이렇게 기울지 않는 것이 다섯째 마음의 메마름이다.”
스승에 대한 의심으로 시작한 마음의 메마름은 가르침, 함께 수행하는 이들의 모임, 훈련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집니다. 이 셋은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부분을 줄여 짧게 담았습니다. 다섯째는 함께 수행하는 이들에게 화가 나고 불만스럽고 마음이 상해 닫히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마음이 열의, 전념, 지속, 힘씀으로 기울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이 상해 닫혀 있다는 것은 큰 원한보다는 작게 쌓인 서운함에 가깝습니다. 의심에서 비롯된 앞의 네 가지와 달리, 다섯째는 분노에서 비롯됩니다.
묵상
그 상태가 열의·전념·지속·힘씀으로 향하려는 마음을 닫게 하는지, 아니면 정당한 질문을 열어 주는지 지금 어떤 신호로 구분할 수 있나요?
다섯 마음의 족쇄 중 첫째가 시작됩니다. 대상은 감각적 즐거움입니다. 그것을 향한 탐냄, 바람, 좋아함, 목마름, 열기, 목마르게 원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여섯 표현을 차례로 듭니다. 이들은 첫째 족쇄의 상태를 여러 말로 드러냅니다. 이 갈망이 사라지지 않으면 마음은 그 대상에 계속 묶여 있습니다.
묵상
좋아하는 대상을 떠올릴 때 탐냄·애착·갈증·열병 중 지금 가장 분명한 느낌은 무엇인가요? 그 대상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고, 마음이 그곳에 묶이는 순간을 몸의 어느 부분에서 알아차릴 수 있나요?
다섯 마음의 족쇄 가운데 둘째부터 넷째는 이렇습니다. 둘째는 몸에 대한 탐냄, 셋째는 형상에 대한 탐냄, 넷째는 배불리 먹은 뒤 잠과 누움과 졸음의 즐거움에 빠져 지내는 일입니다. 이 세 경우에도 마음이 열의, 전념, 지속, 힘씀으로 기울지 않는다는 결과가 같이 이어집니다. 문제는 거기에 매달려 빠져 지내는 상태입니다.
묵상
몸을 돌보는 일과 몸에 대한 탐냄은 어떤 감각에서 다르게 느껴지나요? 오늘 먹고 누워 있는 즐거움이 회복을 돕는지, 아니면 힘씀을 피하려는 몰두로 흘러가는지 판단하지 않고 한 가지 신호만 살펴볼 수 있나요?
다섯째 마음의 족쇄는 수행을 포기하는 데서 생기지 않고, 수행을 특정하게 다시 태어나려는 대가로 붙드는 데서 생깁니다. 수행자는 어느 신들의 무리를 목표로 정하고, 계율·의례·고행·거룩한 삶이라는 네 수단을 그 목표에 연결합니다. “신이 되거나 신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이라는 바람은 거룩한 삶이 풀려남보다 존재의 획득을 향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겉으로 같은 계율과 수행이라도 무엇을 바라며 행하는지에 따라 마음을 풀거나 묶을 수 있습니다.
묵상
좋은 습관이나 수행을 어떤 신분·평판·미래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되는 순간이 있나요? 그런 순간이 떠오른다면 목표를 잘못이라고 판단하지 말고, 기대가 몸과 마음에 만드는 한 반응만 살펴볼 수 있나요? 떠오르지 않으면 지금은 그대로 지나가고 싶은가요?
신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며 거룩한 삶을 사는 수행자의 마음이 네 방향의 수행 쪽으로 기울지 않아 다섯째 족쇄가 됨을 밝힙니다.
“벗들이여, 어느 신들의 무리에 태어나기를 바라며 ‘이 계율이나 의례나 고행이나 거룩한 삶으로 내가 신이 되거나 신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그 수행자의 마음은 열의·전념·지속·힘씀으로 기울지 않는다.
누구의 마음이 열의·전념·지속·힘씀으로 기울지 않는다면, 이것이 다섯째 마음의 족쇄다.”
신들의 무리에 태어나려는 수행자의 서원을 그대로 다시 든 뒤, 그 지향이 낳는 결과를 밝힙니다. 계율·의례·고행·거룩한 삶이 존재를 얻으려는 바람에 매이면 마음은 열의, 전념, 지속, 힘씀으로 기울지 않습니다. 계율·의례·고행·거룩한 삶이라는 네 가지는 앞에서 한 번, 결과를 밝힐 때 다시 한 번 모두 나옵니다. 마지막에 이를 다섯째 마음의 족쇄라고 합니다. 수행의 겉모습보다 그것을 움직이는 목적이 마음을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묵상
어떤 일을 꾸준히 하면서도 결과에 대한 기대 때문에 오히려 열의나 지속성이 약해진 적이 있나요? 그 장면을 해결할 필요 없이, 기대를 잠시 내려놓는다는 말을 들을 때 숨·가슴·어깨 중 한 곳에 생기는 반응을 살펴볼 수 있나요?
“능력”이라는 한 이름 아래 서로 다른 세 가지 목록이 함께 놓입니다. 첫 다섯은 눈·귀·코·혀·몸이라는 감각의 문입니다. 둘째는 육체적 즐거움과 괴로움, 정신적 기쁨과 슬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정으로 느낌을 빠짐없이 담습니다. 셋째는 믿음·힘씀·알아차림·집중·지혜라는 수행의 힘입니다. 세 목록은 감각 기관과 느낌, 수행의 힘을 각각 나눈 것일 뿐, 앞의 목록에서 뒤의 목록이 생겨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묵상
지금 경험을 눈·귀 같은 감각의 문, 즐거움·괴로움 같은 느낌, 믿음·마음챙김 같은 수행 능력 가운데 어느 층위에서 보고 있나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층위 하나만 잠시 살펴보면 무엇이 보이나요?
마음이 감각적 즐거움 쪽으로는 향하지 않지만 벗어남 쪽으로는 향하고 맑아지고 자리 잡고 풀려나는, 첫째 벗어남의 요소를 대조하여 보여 줍니다.
“벗어나는 다섯 길이 있다. 벗들이여, 수행자가 감각적 즐거움에 마음을 둘 때, 마음은 그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맑아지거나 자리 잡거나 풀려나지 않는다. 감각적 즐거움을 떠나는 일에 마음을 둘 때에는 그쪽으로 나아가고 맑아지고 자리 잡고 풀려난다.”
Pañca nissaraṇiyā dhātuyo. Idhāvuso, bhikkhuno kāme manasikaroto kāmesu cittaṁ na pakkhandati na 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a vimuccati. Nekkhammaṁ kho panassa manasikaroto nekkhamme cittaṁ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vimucc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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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다섯 벗어남 가운데 첫째가 시작됩니다. 감각적 즐거움에 마음을 둘 때는 그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맑아지거나 자리 잡거나 풀려나지 않습니다. 감각적 즐거움을 떠나는 일에 마음을 둘 때는 네 움직임이 모두 일어납니다. 감각적 즐거움을 떠나는 일에 마음을 둘 때 이 네 움직임이 함께 일어납니다.
묵상
어떤 대상을 생각할 때 마음이 더 산란해지고, 무엇을 생각할 때 맑아지며 자리 잡는지 최근의 작은 장면에서 느낀 적이 있나요? 정답을 고르지 말고 두 대상을 떠올릴 때 생기는 몸의 반응 차이를 잠시 볼 수 있나요? 차이가 없다면 지금은 그대로 지나갈까요?
벗어남으로 향한 마음이 다섯 모습으로 잘 닦여, 감각적 즐거움에서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괴로움·열망과 느낌에서 풀려남을 밝힙니다.
“그 마음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잘 길러지고, 굳게 자리 잡아, 자유로워지고 감각적 즐거움과의 얽힘에서 풀려난다. 감각적 즐거움 때문에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과 괴로움과 속 타는 느낌에서도 풀려나, 그런 느낌을 더는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감각적 즐거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Tassa taṁ cittaṁ sugataṁ subhāvitaṁ suvuṭṭhitaṁ suvimuttaṁ visaṁyuttaṁ kāmehi. Ye ca kāmapaccayā uppajjanti āsavā vighātā pariḷāhā, mutto so tehi, na so taṁ vedanaṁ vedeti. Idamakkhātaṁ kāmānaṁ nissaraṇ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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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첫째 벗어남의 결과가 이어집니다. 마음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잘 길러지고, 굳게 자리 잡고, 자유로워지며, 감각적 즐거움과의 얽힘에서 풀려납니다. 이어 감각적 즐거움 때문에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괴로움·속 타는 느낌에서 풀려나 그런 느낌을 더는 느끼지 않습니다. 감각적 즐거움 때문에 생기던 괴로운 느낌에서도 풀려납니다.
묵상
붙잡던 대상에서 잠시 멀어졌을 때 마음이 맑아지거나 몸의 열감과 답답함이 가라앉은 경험이 있나요? 그런 경험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지 말고, 지금 이 문장을 들은 뒤 남아 있는 편안함이나 긴장 한 가지만 알아차릴 수 있나요? 아무 변화가 없다면 그대로 두고 싶은가요?
악의 쪽으로는 향하지 않는 마음이 선의 쪽으로는 네 방식으로 향하여, 악의 때문에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괴로움·열망과 느낌에서 벗어남을 밝힙니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가 악의에 마음을 둘 때 그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맑아지거나 자리 잡거나 풀려나지 않는다. 악의가 없는 마음에 둘 때에는 나아가고 맑아지고 자리 잡고 풀려난다. 그 마음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잘 길러지고, 굳게 자리 잡아, 자유로워지고 악의와의 얽힘에서 풀려난다. 악의 때문에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과 괴로움과 속 타는 느낌에서도 풀려나, 그런 느낌을 더는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악의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no byāpādaṁ manasikaroto byāpāde cittaṁ na pakkhandati na 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a vimuccati. Abyāpādaṁ kho panassa manasikaroto abyāpāde cittaṁ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vimuccati. Tassa taṁ cittaṁ sugataṁ subhāvitaṁ suvuṭṭhitaṁ suvimuttaṁ visaṁyuttaṁ byāpādena. Ye ca byāpādapaccayā uppajjanti āsavā vighātā pariḷāhā, mutto so tehi, na so taṁ vedanaṁ vedeti. Idamakkhātaṁ byāpādassa nissaraṇ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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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둘째 벗어남은 악의와 악의가 없는 마음의 대조입니다. 악의에 주의를 기울일 때 마음은 나아가거나 맑아지거나 자리 잡거나 풀려나지 않지만, 악의가 없는 마음에 둘 때에는 네 움직임이 모두 일어납니다. 그렇게 길러진 마음은 악의와의 얽힘에서 풀려나고, 악의 때문에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괴로움·속 타는 느낌에서도 풀려납니다. 여기서 악의 없음은 악의가 비어 있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묵상
누군가를 떠올릴 때 악의와 선의가 몸에 서로 다른 흔적을 남기나요? 상대를 용서하거나 좋아해야 한다고 몰아붙이지 말고, 두 마음이 숨의 깊이·턱의 긴장·가슴의 열감 가운데 하나를 어떻게 바꾸는지만 볼 수 있나요? 지금은 살펴보고 싶은가요, 아니면 건너뛰고 싶은가요?
해치려는 마음 쪽으로는 향하지 않고 해치지 않는 연민 쪽으로 향한 마음이, 해침 때문에 생기는 세 가지 고통과 느낌에서 풀려남을 밝힙니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가 해치려는 마음에 주의를 기울일 때 마음은 그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맑아지거나 자리 잡거나 풀려나지 않는다. 해치지 않는 마음에 주의를 기울일 때에는 나아가고 맑아지고 자리 잡고 풀려난다. 그 마음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잘 길러지고, 굳게 자리 잡아, 자유로워지고 해침과의 얽힘에서 풀려난다. 해침 때문에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과 괴로움과 속 타는 느낌에서도 풀려나, 그런 느낌을 더는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해침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no vihesaṁ manasikaroto vihesāya cittaṁ na pakkhandati na 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a vimuccati. Avihesaṁ kho panassa manasikaroto avihesāya cittaṁ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vimuccati. Tassa taṁ cittaṁ sugataṁ subhāvitaṁ suvuṭṭhitaṁ suvimuttaṁ visaṁyuttaṁ vihesāya. Ye ca vihesāpaccayā uppajjanti āsavā vighātā pariḷāhā, mutto so tehi, na so taṁ vedanaṁ vedeti. Idamakkhātaṁ vihesāya nissaraṇ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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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셋째 벗어남은 해침과 해치지 않음의 대조입니다. 해치려는 마음에는 나아가거나 맑아지거나 자리 잡거나 풀려나지 않지만, 해치지 않는 마음에는 네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그 결과 해침과의 얽힘, 해침 때문에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괴로움·속 타는 느낌에서 풀려납니다. 여기서 해치지 않음은 해치려는 마음이 비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묵상
말이나 행동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충동과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을 떠올리면 몸의 느낌이 어떻게 다른가요? 두 상태 가운데 하나가 손·목소리·호흡에 남긴 작은 신호만 알아차릴 수 있나요?
형상 쪽으로는 향하지 않는 마음이 형상 없는 쪽으로는 네 방식으로 향하여, 형상 때문에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괴로움·열망과 느낌에서 벗어남을 밝힙니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가 형상에 마음을 둘 때 마음은 그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맑아지거나 자리 잡거나 풀려나지 않는다. 형상 없는 것에 마음을 둘 때에는 나아가고 맑아지고 자리 잡고 풀려난다. 그 마음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잘 길러지고, 굳게 자리 잡아, 자유로워지고 형상과의 얽힘에서 풀려난다. 형상 때문에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과 괴로움과 속 타는 느낌에서도 풀려나, 그런 느낌을 더는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형상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no rūpe manasikaroto rūpesu cittaṁ na pakkhandati na 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a vimuccati. Arūpaṁ kho panassa manasikaroto arūpe cittaṁ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vimuccati. Tassa taṁ cittaṁ sugataṁ subhāvitaṁ suvuṭṭhitaṁ suvimuttaṁ visaṁyuttaṁ rūpehi. Ye ca rūpapaccayā uppajjanti āsavā vighātā pariḷāhā, mutto so tehi, na so taṁ vedanaṁ vedeti. Idamakkhātaṁ rūpānaṁ nissaraṇ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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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는 형상과 형상 없는 것의 대조입니다. 형상에 마음을 둘 때는 네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고, 형상 없는 것에 마음을 둘 때는 모두 일어납니다. 마음이 잘 길러져 형상과의 얽힘에서 풀려나면, 형상 때문에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괴로움·속 타는 느낌에서도 자유로워집니다. 이곳의 형상 없는 것은 명상에서 말하는 형상 없는 영역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형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대상의 차이만을 말합니다.
묵상
형상이나 겉모습에 마음이 사로잡힐 때와 그것을 내려놓을 때, 마음은 어떻게 다르게 움직이나요? 지금 떠오르는 모습이나 이미지 하나에서 그 느낌을 살펴볼 수 있나요?
‘나’라고 여기는 몸과 마음의 다발(개체성)에 마음을 두는 데로는 향하지 않지만, 그것이 사라지는 쪽으로는 네 가지 방식으로 향하고 다섯 가지 방식으로 잘 풀리는 마음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이 존재에 마음을 둘 때 마음은 그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맑아지거나 자리 잡거나 풀려나지 않는다. 그것이 멈추는 데 마음을 둘 때에는 나아가고 맑아지고 자리 잡고 풀려난다. 그 마음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잘 길러지고, 굳게 자리 잡아, 자유로워지고 그 존재와의 얽힘에서 풀려난다.”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no sakkāyaṁ manasikaroto sakkāye cittaṁ na pakkhandati na 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a vimuccati. Sakkāyanirodhaṁ kho panassa manasikaroto sakkāyanirodhe cittaṁ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vimuccati. Tassa taṁ cittaṁ sugataṁ subhāvitaṁ suvuṭṭhitaṁ suvimuttaṁ visaṁyuttaṁ sakkāyena.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다섯째 벗어남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이 존재와 그것이 멈추는 일의 대조입니다. 앞에 마음을 둘 때는 네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고, 뒤에 둘 때는 모두 일어납니다. 이어 마음이 잘 나아가고 길러지고 자리 잡아 자유로워지며, 이 존재와의 얽힘에서 풀려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이 존재란, 지금의 나를 이루는 몸과 마음을 가리킵니다.
묵상
“나”라는 설명을 단단히 붙들 때와 그 설명을 잠시 쉬게 할 때 몸과 마음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이름·역할·평가 가운데 하나를 잠시 내려놓는다는 말을 들을 때 나타나는 한 반응만 살펴볼 수 있나요?
‘나’라고 여기는 개체성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마음을 흐리는 것·괴로움·마음의 열병과, 그로 인한 느낌에서 풀려나는 것을 다섯째 벗어남의 요소로 완결합니다.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이 존재 때문에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과 괴로움과 속 타는 느낌에서 풀려나, 그런 느낌을 더는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그 존재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Ye ca sakkāyapaccayā uppajjanti āsavā vighātā pariḷāhā, mutto so tehi, na so taṁ vedanaṁ vedeti. Idamakkhātaṁ sakkāyassa nissaraṇa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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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이 존재 때문에 생기는 마음을 흐리는 것·괴로움·속 타는 느낌에서 풀려나고, 그런 느낌을 더는 느끼지 않는다고 결론짓습니다. 감각적 즐거움, 악의, 해침, 형상, 이 존재라는 다섯 가지에서 벗어나는 길이 여기서 마무리됩니다. 거기에 얽매이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데서 풀려납니다.
묵상
역할이나 평판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달아오르거나 괴로웠던 순간이 떠오르나요? 그 생각을 잠시 붙들지 않을 때 열감·압박·불안 가운데 하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만 살펴볼 수 있나요?
스승이나 수행 도반의 설법에서 그 뜻과 이치를 느끼면, 기쁨과 희열이 일어나고 몸이 고요해지며 행복이 생기고 마침내 마음이 한곳에 모이는 상태로 이어지는 첫째 풀려남의 기회를 밝힙니다.
“벗들이여, 스승이나 존경할 만한 함께 수행하는 사람이 가르침을 전할 때, 수행자는 그만큼 그 뜻과 가르침을 알아듣는다. 뜻과 가르침을 알아들은 이에게 기쁨이 생기고, 기뻐하는 이에게 더 큰 기쁨이 생긴다. 그렇게 기뻐하는 이의 몸은 고요해지고, 몸이 고요해진 이는 편안함을 느끼며, 편안한 이의 마음은 한곳에 모인다. 이것이 첫째 속박에서 풀려날 기회다.”
첫째 기회에서 가르침을 듣는 수행자는 뜻과 가르침을 알아듣습니다. 그때 기쁨이 생기고, 이어 더 큰 기쁨, 몸의 고요, 편안함, 마음이 한곳에 모임으로 이어집니다. 기쁨에는 두 단계가 있어, 처음 생기는 기쁨과 그로부터 더 커지는 기쁨으로 나뉩니다. 이 연결은 남의 말을 듣는 장면에서 시작하지만, 듣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이해와 몸과 마음의 변화가 이어집니다. 마지막에 이것을 첫째 속박에서 풀려날 기회라고 합니다.
묵상
어떤 설명의 뜻이 이해되며 마음이 밝아지고 몸까지 편안해졌던 순간이 있나요? 그 경험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여기지 말고, 이해·기쁨·몸의 고요·집중 가운데 지금 기억에 가장 가까운 한 단계만 살펴볼 수 있나요?
배운 가르침을 다른 이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소리 내어 외우며, 마음으로 생각하고 살피는 것이 각각 둘째·셋째·넷째 풀려남의 기회가 됨을 제시합니다.
“또 벗들이여, 스승이나 존경할 만한 함께 수행하는 사람이 가르침을 전하지 않더라도, 수행자는 듣고 배운 가르침을 다른 이에게 자세히 전한다. … 또는 듣고 배운 가르침을 자세히 소리 내어 되풀이한다. … 또는 듣고 배운 가르침을 마음속에서 거듭 생각하고 살피며 주의를 기울인다. …”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no na heva kho satthā dhammaṁ deseti aññataro vā garuṭṭhāniyo sabrahmacārī, api ca kho yathāsutaṁ yathāpariyattaṁ dhammaṁ vitthārena paresaṁ deseti …pe… api ca kho yathāsutaṁ yathāpariyattaṁ dhammaṁ vitthārena sajjhāyaṁ karoti …pe… api ca kho yathāsutaṁ yathāpariyattaṁ dhammaṁ cetasā anuvitakketi anuvicāreti manasānupekkhati …pe…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속박에서 풀려날 둘째부터 넷째 기회입니다. 스승이나 존경할 만한 사람이 직접 가르침을 전하지 않을 때에도 수행자는 듣고 배운 것을 다른 이에게 자세히 전할 수 있습니다. 또는 그것을 소리 내어 되풀이하거나 마음속으로 거듭 생각하고 살필 수 있습니다. 세 경우 모두 기쁨에서 마음이 한곳에 모이기까지 이어지는 같은 과정이 되풀이되므로 줄였습니다. 다른 이에게 설명하기, 소리로 되풀이하기, 마음으로 살피기가 서로 다른 세 기회입니다.
묵상
배운 내용을 다른 이에게 설명할 때, 소리 내어 되새길 때, 조용히 생각할 때 이해가 서로 다르게 깊어지나요? 지금 가장 부담 없이 시도하거나 떠올릴 수 있는 한 방식에서 마음과 몸이 보이는 반응은 무엇인가요?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데 쓰는 대상(마음을 모으는 표상)을 잘 붙잡고 마음에 새기고 지혜로 꿰뚫어 보는 만큼, 가르침의 뜻과 이치를 느끼게 되는 다섯째 기회의 조건을 밝힙니다.
“또 수행자는 집중할 때 마음에 두는 대상을 잘 붙잡고, 잘 마음에 두고, 잘 간직하며, 지혜로 잘 꿰뚫는다. 벗들이여, 그 대상을 그렇게 붙잡고 마음에 두고 간직하고 꿰뚫는 만큼, 가르침의 뜻과 가르침 자체를 깊이 느낀다.”
api ca khvassa aññataraṁ samādhinimittaṁ suggahitaṁ hoti sumanasikataṁ sūpadhāritaṁ suppaṭividdhaṁ paññāya. Yathā yathā, āvuso, bhikkhuno aññataraṁ samādhinimittaṁ suggahitaṁ hoti sumanasikataṁ sūpadhāritaṁ suppaṭividdhaṁ paññāya tathā tathā so tasmiṁ dhamme atthapaṭisaṁvedī ca hoti dhammapaṭisaṁvedī ca.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다섯째 기회는 집중할 때 마음에 두는 대상을 잘 다루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대상을 잘 붙잡고, 마음에 두고, 간직하며, 지혜로 꿰뚫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이 네 동작을 다시 되풀이하며, 그렇게 하는 만큼 가르침의 뜻과 가르침 자체를 깊이 느낀다고 말합니다. 이 대상은 마음을 모을 때 붙잡는 구체적인 표적을 가리킵니다.
묵상
마음을 모으는 데 쓰는 대상을 잘 붙잡고 지혜로 살핀다는 말에서, 붙잡는 일과 살피는 일은 어떻게 다르게 들리나요? 익숙한 대상에 주의를 오래 두어 본 경험이 있다면 무엇을 새로 알게 되었나요?
집중할 때 마음에 둔 대상을 꿰뚫어 가르침의 뜻을 깊이 느낀 뒤, 기쁨이 생기고 가슴을 채우는 기쁨이 이어집니다. 그 기쁨에서 몸이 고요해지고, 편안함을 느끼며, 마음이 한곳에 모입니다. 기쁨에는 두 단계가 있어, 처음 생기는 기쁨과 그로부터 더 풍성해지는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에 이것을 다섯째 속박에서 풀려날 기회라고 합니다.
묵상
집중이 깊어지기 전에 이해·기쁨·몸의 고요가 차례로 나타난 경험이 있나요? 지금은 기쁨과 몸의 이완과 주의의 안정 가운데 가장 미세하게 느껴지는 한 반응에 잠시 머물러 볼 수 있나요?
모든 것이 덧없다는 인식, 덧없는 것에서 괴로움을 보는 인식, 괴로운 것에 변치 않는 자아가 없다는 인식, 버림의 인식, 탐냄이 빛바래는 인식을 밝힙니다.
“속박에서 풀려남을 무르익게 하는 다섯 가지 인식은 그대로 있지 않음을 알아보는 인식, 그대로 있지 않은 것에서 괴로움을 알아보는 인식, 괴로운 것에서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알아보는 인식, 버림을 알아보는 인식, 욕망이 사그라듦을 알아보는 인식이다. 벗들이여, 이것들은 알고 보시며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시고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다섯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다.”
다섯씩 묶은 가르침의 마지막 목록은 속박에서 풀려남을 무르익게 하는 다섯 가지 인식입니다. 모든 것이 변함을 아는 인식, 변하는 것에서 괴로움을 아는 인식, 괴로운 것에서 고정된 나가 없음을 아는 인식이 먼저 나오고, 버림의 인식과 욕망이 사그라듦의 인식이 뒤따릅니다. 앞의 세 가지는 서로 이어지며 하나씩 깊어지고, 버림과 욕망의 사그라듦은 그 뒤에 따로 놓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알고 보시고 흘러드는 것을 다 끊으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묵상
최근 변한 것 하나를 떠올릴 때 괴로움이나 놓고 싶은 마음이 함께 보이나요? 변화를 알아차리는 순간 붙잡으려는 힘이 커지는지 조금 느슨해지는지만 살펴볼 수 있나요?
부처님께서 여섯 가지씩 묶어 설명하신 가르침을 대중이 함께 외워 다투지 않고, 신과 인간 모두의 이익과 행복에 이르게 하자는 후렴 부분입니다.
“벗들이여, 알고 보시며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시고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여섯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 있다. 그것을 모두 함께 외워야 한다. … 신과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Atthi kho, āvus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cha dhammā sammadakkhātā; tattha sabbeheva saṅgāyitabbaṁ …pe…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여섯씩 묶은 가르침을 여는 문장입니다. 알고 보시고 흘러드는 것을 다 끊으셨으며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께서 설명하신 가르침이라고 밝힙니다. 이어 모두 함께 외워야 한다고 권하며, 끝에는 신과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구절이 붙습니다. 중간에 되풀이되는 말은 줄였습니다. 다섯씩 묶은 가르침에서 여섯씩 묶은 가르침으로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묵상
여섯씩 묶은 가르침을 모두 함께 외우라는 이 말에서, 함께 외우는 일은 가르침을 보존하고 나누는 모습과 어떻게 이어질까요? 뒤에 덧붙은 신과 사람의 이익과 행복이라는 말도 함께 읽어 보세요.
여섯씩 묶은 가르침이 무엇인지 묻고, 눈·귀·코·혀·몸·마음을 우리 안에 있는 여섯 감각 영역으로 열거합니다.
“여섯씩 묶은 가르침은 무엇인가?
여섯 안쪽 감각 영역은 눈·귀·코·혀·몸·마음의 영역이다.”
Katame cha?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cakkhāyatanaṁ, sotāyatanaṁ, ghānāyatanaṁ, jivhāyatanaṁ, kāyāyatanaṁ, manāyatana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여섯씩 묶은 가르침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첫 목록이 답합니다. “안쪽”은 몸과 마음에 속한 여섯 감각 바탕을 가리킵니다. 눈·귀·코·혀·몸은 다섯 신체 감각의 바탕이고, 마음은 생각과 심상을 아는 여섯째 바탕입니다. 이 목록은 이어질 바깥쪽 대상·의식·접촉·느낌의 여섯 갈래를 배치하는 기준이 됩니다. 경험을 하나의 덩어리로 여기지 않고 어느 문을 통해 일어나는지 분별하게 합니다.
묵상
눈·귀·코·혀·몸·마음을 차례로 떠올릴 때 지금 가장 또렷한 문은 어디인가요? 한 감각이 드러나는 방식을 잠시 살펴볼 수 있나요?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을 안의 여섯 감각 문에 대응하는 여섯 바깥 대상으로 열거합니다.
“여섯 바깥 감각 영역이 있다.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 영역이다.”
Cha bāhirāni āyatanāni—rūpāyatanaṁ, saddāyatanaṁ, gandhāyatanaṁ, rasāyatanaṁ, phoṭṭhabbāyatanaṁ, dhammāyatana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안쪽 감각 영역에 이어 그와 맞닿는 여섯 바깥 영역이 나옵니다. 눈에는 형상, 귀에는 소리, 코에는 냄새, 혀에는 맛, 몸에는 감촉, 마음에는 생각·기억·심상 같은 마음의 대상이 대응합니다. “영역”은 기관이나 물건만을 뜻하지 않고, 인식이 일어날 수 있는 범주를 가리킵니다. 안과 밖을 일대일로 짝지으면 경험이 오직 내 안이나 밖의 물건 하나로 생기지 않고 둘의 만남을 조건으로 일어남을 살펴보게 합니다.
묵상
지금 앞의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 가운데 하나를 불편함 없이 알아차릴 수 있나요? 감지된 하나를 바꾸지 않고 잠시 볼까요?
여섯 갈래 느낌은 각각의 닿음에서 생깁니다. 눈에서 일어나는 닿음으로 생긴 느낌부터 마음에서 일어나는 닿음으로 생긴 느낌까지 같은 순서입니다. 어떤 느낌이 좋은지 나쁜지는 따로 나누지 않고, 어느 닿음에서 생겼는지만 담았습니다. 앞서 나온 여섯 닿음과 일대일로 대응합니다.
묵상
지금 편안함·불편함·덤덤함 가운데 하나가 느껴진다면, 그 앞에 어떤 접촉이 있었는지 불편함 없이 살펴볼 수 있나요? 알아차린 하나를 바꾸지 않고 볼까요?
“여섯 갈래의 의도는 형상·소리·냄새·맛·몸에 닿는 것·마음에 떠오른 것에 대한 의도다.”
Cha sañcetanākāyā—rūpasañcetanā, saddasañcetanā, gandhasañcetanā, rasasañcetanā, phoṭṭhabbasañcetanā, dhammasañcetan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인식을 여섯 대상으로 나눈 뒤, 이제 그 대상으로 향하는 의도를 같은 순서로 분류합니다. 의도는 대상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고 행위를 이루어 가는 작용입니다. 형상에 대한 의도에서 마음의 대상에 대한 의도까지 모두 포함하면,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이 아니라 생각을 따라 움직이는 마음도 살피게 됩니다.
묵상
방금 보거나 들은 것을 향해 마음이 다가가거나 멀어지는 반응이 있나요? 의도가 생기기 직전 숨·시선·자세 가운데 하나가 달라지는지 살펴볼까요, 없다면 그대로 넘어갈까요?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을 향해 생기는, 원하고 매달리는 마음(딴하)을 여섯 갈래로 열거합니다.
“목마르게 원하는 마음의 여섯 갈래는 형상·소리·냄새·맛·몸에 닿는 것·마음에 떠오른 것에 대한 바람이다.”
Cha taṇhākāyā—rūpataṇhā, saddataṇhā, gandhataṇhā, rasataṇhā, phoṭṭhabbataṇhā, dhammataṇh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여섯 의도 다음에는 같은 대상을 향한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이 나옵니다.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이라는 여섯 목록은 바꾸지 않고, 이번에는 그것을 원하고 붙드는 관계에 초점을 둡니다. 갈망, 곧 원하고 붙드는 마음은 즐거운 대상을 더 원하는 것뿐 아니라, 불편한 경험이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생각을 계속 붙드는 양상도 포함합니다. 경험의 문을 여섯으로 나누어 보면 갈망을 막연한 욕심으로만 여기지 않고 어느 대상에서 붙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묵상
목마르게 원하고 붙드는 마음은 형상에서 마음에 떠오른 것까지 여섯 대상을 향합니다. 앞의 여섯 의도와 대상 목록은 같은데, 대상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둘을 같은 말로 보기는 어려운가요?
여섯 경우는 스승, 가르침, 함께 수행하는 이들의 모임, 훈련, 방심하지 않음,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각 항목마다 존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 응하거나 귀 기울일 마음도 없다는 두 뜻이 반복됩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일까지 수행자가 지켜야 할 태도로 꼽힌 것은,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수행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존중하지 않는 대상으로 스승·가르침·함께 수행하는 이들뿐 아니라 훈련·방심하지 않음·손님맞이도 나옵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자신의 실천이 한 목록에 놓인 까닭을 어떻게 이해하나요?
앞서 본 존중하지 않는 여섯 경우와 정확히 반대입니다. 스승, 가르침, 함께 수행하는 이들의 모임, 훈련, 방심하지 않음,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각각 존중하고 그에 귀 기울입니다. 항목의 순서는 같고 부정이 긍정으로 바뀝니다. 소중히 대하는 마음과 그 말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함께 나타납니다.
묵상
스승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경우와 귀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같은 여섯 대상을 두고 맞서 있습니다. 앞서 본 내용과 견주면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나요? 존중과 그에 응하려는 마음이 함께 적힌 까닭은 무엇일까요?
기쁨이 일어날 만한 대상을 마음으로 살피는 여섯 경우입니다. 눈으로 형상을 보고 그 형상을 살핀다는 첫째가 온전히 나오고, 귀·코·혀·몸은 각 감각과 대상을 든 뒤 생략됩니다. 마지막은 마음으로 떠오른 것을 알고 그 대상을 살핀다고 다시 온전히 말합니다. ‘기쁨을 살핀다’보다 기쁨의 바탕이 되는 대상을 살핀다는 관계를 드러냈습니다. 소리·냄새·맛·닿는 느낌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묵상
여섯 감각 문 가운데 눈과 마음의 사례가 온전히 나오고, 가운데 네 사례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두 끝의 사례에서 기쁨의 바탕은 각각 무엇인가요? 같은 물음이 다른 감각 대상에도 이어진다는 점을 어떻게 읽을 수 있나요?
함께 수행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첫째 가르침입니다. 남들이 볼 때와 보지 않을 때 모두 그렇게 합니다. 그 결과 서로 기억하고 아끼며 존중하고, 함께 어울리고 다투지 않고 화합해 하나가 됩니다. 따뜻한 마음은 숨겨 두지 않고 몸의 움직임으로 드러날 때 사람과 사람을 이어 줍니다.
묵상
함께 수행하는 이들에게 남들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따뜻한 마음으로 몸을 움직인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을 모두 밝힌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몸가짐이 화합과 어떻게 이어지나요?
셋째는 함께 수행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앞의 몸과 말에 이어 마음의 행위가 나오며, 남들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라는 조건을 되풀이합니다. 그 결과 역시 앞서와 같이 서로 기억하고 아끼며 하나가 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마음은 같은 따뜻함을 지닙니다.
묵상
셋째는 함께 수행하는 이를 향해 따뜻한 마음을 품는 일입니다. 몸가짐과 말에 이어 마음이 놓이면서 앞의 두 항목과 어떤 구조를 이루나요? 남들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라는 조건이 왜 다시 나올까요?
흠도 틈도 얼룩도 티도 없이, 자유와 마음이 한곳에 모이는 데로 이끄는 윤리를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갖추는 다섯째 원리입니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는 함께 수행하는 이들과 남들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같은 바른 행실을 지킨다. 그 행실은 깨지거나 틈나지 않고, 얼룩이나 흠이 없으며, 자유롭게 하고, 지혜로운 이들이 칭찬하며, 잘못 붙들리지 않고, 깊은 집중으로 이끈다. 이것도 서로 기억하고 아끼게 하고 … 하나가 되게 한다.”
여섯 가르침 가운데 다섯째는 함께 수행하는 이들과 바른 행실을 같이 지키는 일입니다. 남들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같은 행실을 지니며, 그 행실은 깨지거나 틈나지 않고 얼룩이나 흠이 없다고 합니다. 자유롭게 하고 지혜로운 이들이 칭찬하며 잘못 붙들리지 않고 깊은 집중으로 이끈다는 성질도 이어집니다. 끝에는 공동체가 하나가 된다는 결론이 다시 온전히 나옵니다.
묵상
함께 수행하는 이들과 남들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같은 바른 행실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 행실이 자유롭게 하고 깊은 집중으로 이끈다는 두 표현을 읽으면,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마음의 변화가 어떻게 이어지나요?
고귀하고 풀려남으로 이끌며, 그대로 실천하는 이를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게 하는 견해를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갖추는 여섯째 원리입니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는 함께 수행하는 이들과 남들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같은 바른 견해를 지닌다. 그 견해는 고귀하고 벗어나게 하며, 그대로 실천하는 이를 괴로움이 완전히 끝나는 데 이끈다. 이것도 서로 기억하고 아끼며 존중하게 하고, 함께 어울리고 다투지 않고 화합해 하나가 되게 한다.”
여섯째는 함께 수행하는 이들과 바른 견해를 같이 지니는 일입니다. 그 견해는 고귀하고 벗어나게 하며, 실천하는 이를 괴로움이 완전히 끝나는 데 이끕니다. 남들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같다는 조건이 앞의 행실과 이어집니다. 이 마지막 항목에는 공동체가 서로 기억하고 아끼며 존중하고, 함께 어울리고 다투지 않고 화합해 하나가 된다는 결과가 다시 온전히 나옵니다. 같은 의견을 무조건 맞추는 것보다, 그 견해가 괴로움을 끝내는 쪽으로 이끄는지가 중요합니다.
묵상
함께 지니는 견해가 괴로움의 완전한 끝으로 이끈다는 말에서, 함께한다는 점과 나아가는 방향 중 무엇이 더 눈에 들어오나요? 의견을 나눌 때 그 의견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살펴보나요?
다툼을 일으키는 여섯 가지 뿌리 가운데 첫째로, 성내고 원한을 품은 수행자가 스승과 가르침과 수행자 공동체를 공경하지 않고 훈련을 끝까지 마치지 않는 모습을 밝힙니다.
“논쟁이 생기는 여섯 뿌리가 있다. 벗들이여, 수행자가 화를 잘 내고 원한을 품는다. 그렇게 화를 내고 원한을 품으면 스승, 가르침, 함께 수행하는 이들의 모임을 존중하거나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훈련도 온전히 해내지 못한다.”
Cha vivādamūlāni. Idhāvuso, bhikkhu kodhano hoti upanāhī. Yo so, āvuso, bhikkhu kodhano hoti upanāhī, so sattharipi agāravo viharati appatisso, dhammepi agāravo viharati appatisso, saṅghepi agāravo viharati appatisso, sikkhāyapi na paripūrakārī ho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논쟁이 생기는 여섯 뿌리 중 첫째는 화를 잘 내고 원한을 품는 성향입니다. 그런 수행자는 스승·가르침·함께 수행하는 이들의 모임을 존중하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으며, 훈련을 온전히 해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세 대상에 대한 같은 부정을 원문은 되풀이합니다. 이런 성향은 함께 배우는 바탕을 소홀히 하는 태도로 이어지고, 실제로 모임에 다툼을 일으키는 결과는 이어지는 대목에서 나타납니다.
묵상
화를 잘 내고 원한을 품으면 스승과 가르침, 함께 수행하는 이들을 존중하지 않고 훈련도 끝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개인의 마음 상태가 함께 배우는 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이 연결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두 문장으로 첫 논쟁의 뿌리에 대한 설명을 맺습니다. 하나는 해로운 뿌리를 버린다는 결론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스며들지 않게 한다는 결론입니다. 앞서 본 두 경우, 곧 보일 때 버리려 힘쓰고 보이지 않을 때 예방하는 실천과 맞물립니다. 원문은 “이렇게”라는 말을 두 번 써 각각의 결론을 따로 밝힙니다.
묵상
앞에서는 해로운 뿌리를 버리고, 이어서는 다시 스며들지 않게 한다고 정리해요. 이미 생긴 문제를 다루는 일과 앞으로 생기지 않도록 살피는 일은 어떻게 이어질까요?
첫째인 화와 원한 뒤에 남은 다섯 뿌리가 이어 나옵니다. 남의 장점을 깎아내림과 업신여김, 질투와 인색함, 교활함과 속임, 나쁜 바람과 그릇된 견해, 자기 견해에 매달려 놓지 못함입니다. 각 항목 뒤에는 앞서 본 존중하지 않는 태도와 다툼의 결과, 버림과 예방에 관한 설명이 되풀이되므로 줄였습니다.
묵상
남을 깎아내림, 질투, 속임, 그릇된 견해, 자기 생각을 놓지 못함이 논쟁의 뿌리로 나옵니다. 서로 다른 다섯 모습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끝의 견해 고집이 앞의 모습들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나요?
자기 견해에 집착하고 완고하게 붙들며 놓지 않는 수행자는 스승과 가르침과 수행자 공동체를 공경하지 않으며 훈련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다고 밝힙니다.
“벗들이여, 자기 견해에 매달려 꽉 붙잡고 놓지 못하는 수행자는 스승, 가르침, 함께 수행하는 이들의 모임을 존중하거나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훈련도 온전히 해내지 못한다.”
yo so, āvuso, bhikkhu sandiṭṭhiparāmāsī hoti ādhānaggāhī duppaṭinissaggī, so sattharipi agāravo viharati appatisso, dhammepi agāravo viharati appatisso, saṅghepi agāravo viharati appatisso, sikkhāyapi na paripūrakārī ho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여섯째 뿌리인 자기 견해를 놓지 못함이 어떤 태도로 이어지는지 다시 온전히 설명합니다. 스승·가르침·함께 수행하는 이들의 모임을 존중하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으며, 훈련을 온전히 해내지 못합니다. 자기 견해를 꽉 붙잡아 놓지 못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여기서 늘어놓습니다.
묵상
자기 견해를 굳게 붙드는 일이 스승과 가르침, 함께 수행하는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와 연결돼요. 자기 생각을 지키는 것과 다른 가르침을 들을 여지를 남기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Cha dhātuyo—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u, ākāsadhātu, viññāṇadhātu.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논쟁의 여섯 뿌리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 이번에는 여섯 요소로 주제가 바뀝니다. 땅·물·불·바람의 네 요소가 먼저 나오고, 공간과 의식이 뒤를 잇습니다. 몸과 마음을 포함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이 여섯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이 여섯 요소를 지나면, 마음이 무엇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여섯 가지 길이 이어집니다.
묵상
땅·물·불·바람에 공간과 의식이 더해져 여섯 요소가 돼요. 익숙한 네 가지와 나머지 두 가지를 한 목록에 놓으면, 세계를 이루는 것들을 바라보는 틀이 어떻게 넓어지나요?
여섯 가지 벗어남의 요소를 열며, 자애로 마음을 풀어내는 수행을 충분히 닦았는데도 악의가 여전히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가정된 주장을 전합니다.
“벗어나는 여섯 길이 있다. 벗들이여, 어떤 수행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나는 따뜻한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나는 수행을 거듭 길렀고, 삶의 수레와 바탕으로 삼아 꾸준히 익히고 잘 세웠다. 그런데도 악의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Cha nissaraṇiyā dhātuyo. Idhāvuso, bhikkhu evaṁ vadeyya: ‘mettā hi kho me cetovimutti bhāvitā bahulīkatā yānīkatā vatthukatā anuṭṭhitā paricitā susamāraddhā, atha ca pana me byāpādo cittaṁ pariyādāya tiṭṭhatī’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벗어나는 여섯 길 가운데 첫째는 따뜻한 마음과 악의의 관계를 시험합니다. 수행자가 따뜻한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나는 수행을 충분히 길렀다고 하면서도 악의가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닦고, 자주 닦고, 수레와 바탕으로 삼고, 세우고, 익히고, 잘 시작했다는 여러 표현을 겹쳐 써서 수행이 충분했다는 주장을 강조합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이어지는 대목에서 검토됩니다.
묵상
따뜻한 마음을 충분히 길렀는데도 악의가 마음을 차지한다는 주장을 들으면 무엇이 의문으로 남나요? 따뜻한 마음이 자랄 때 미움과의 관계도 달라진다는 말을 자신의 경험과 조심스럽게 견주어 볼 수 있나요?
자애를 충분히 닦았는데도 악의가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주장에, 그렇게 말하지 말고 부처님의 말씀을 잘못 전하지 말라고 답합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수행자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부처의 말씀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잘못 전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부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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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첫 가정을 제시한 뒤, 그 발언에 대한 반론이 직접 인용으로 시작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와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가 먼저 주장을 부정합니다. 이어 부처님을 잘못 전하지 말라는 요청, 그렇게 전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평가,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근거가 순서대로 나옵니다. 이 반론은 따뜻한 마음으로 풀려남과 악의의 관계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전하지 않도록 바로잡고, 뒤에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밝히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바로잡는 말은 어떻게 들리나요? 누군가의 말을 반박하면서도 그 사람을 존중하려면 무엇을 분명히 하고, 어떤 말투를 살펴야 할까요? 사실을 바로잡는 일과 관계를 지키는 일이 함께 가능할까요?
앞서 부처의 말씀을 잘못 전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여기서 밝혀집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나는 수행을 충분히 길렀다면 악의가 마음을 사로잡고 계속 머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풀려남이 바로 악의에서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다’와 ‘그럴 여지가 없다’라는 말로 강하게 못박습니다. 악의가 마음을 완전히 차지하고 눌러앉는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묵상
따뜻한 마음으로 풀려나는 수행을 충분히 길렀는데도 악의가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따뜻한 마음이 악의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밝힌 까닭을 앞의 부정과 함께 읽으면 무엇이 분명해지나요?
연민으로 마음을 풀어내는 수행을 충분히 닦았는데도 해치려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둘째 가정된 주장을 전합니다.
“또 벗들이여, 어떤 수행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나는 남의 아픔을 함께하는 마음(까루나)으로 속박에서 풀려나는 수행을 거듭 길렀고, 삶의 수레와 바탕으로 삼아 꾸준히 익히고 잘 세웠다. 그런데도 해치려는 마음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
Idha panāvuso, bhikkhu evaṁ vadeyya: ‘karuṇā hi kho me cetovimutti bhāvitā bahulīkatā yānīkatā vatthukatā anuṭṭhitā paricitā susamāraddhā. Atha ca pana me vihesā cittaṁ pariyādāya tiṭṭha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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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둘째 사례는 남의 아픔을 함께하는 마음과 해치려는 마음의 관계입니다. 수행자가 그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나는 수행을 충분히 길렀다고 하면서도 해치려는 마음이 자신을 사로잡았다고 말합니다. 앞 사례의 형식은 같고 따뜻한 마음과 악의 대신 남의 아픔을 함께하는 마음과 해침이 들어갑니다.
묵상
남의 아픔을 함께하는 마음을 충분히 길렀다는 말과 해치려는 마음이 자신을 사로잡는다는 말이 함께 놓입니다. 앞의 따뜻한 마음과 악의의 사례에 이어, 이번에는 어떤 두 마음이 맞서는지 어떻게 읽나요?
연민으로 마음을 풀어내는 수행을 충분히 닦고도 해치려는 마음이 남는 일은 있을 수 없음을 세 겹으로 밝힙니다.
“벗들이여, 그렇게 남의 아픔을 함께하는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나는 수행을 거듭 길러 삶의 수레와 바탕으로 삼아 꾸준히 익히고 잘 세웠는데도 해치려는 마음이 그를 사로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럴 여지가 없다. 그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남이 바로 해침에서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잘못 전하지 말라고 바로잡은 뒤, 세 겹의 논증으로 불가능함을 밝히고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 불만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확정합니다.
“그에게 말해야 한다. ‘수행자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거나 부처의 말씀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잘못 전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부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벗들이여,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나는 수행을 거듭 길러 삶의 수레와 바탕으로 삼아 꾸준히 익히고 잘 세웠는데도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 그를 사로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럴 여지가 없다. 그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남이 바로 만족하지 못함에서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muditāya cetovimuttiyā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atha ca panassa arati cittaṁ pariyādāya ṭha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ṁ hetaṁ, āvuso, aratiyā, yadidaṁ muditā cetovimut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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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 이어서 나옵니다. 그렇게 말하거나 부처의 말씀을 잘못 전하지 말라고 한 뒤, 함께 기뻐하는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나는 수행을 충분히 길렀다면 만족하지 못함이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 마음으로 풀려남이 만족하지 못함에서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닦으면 불만에서 벗어난다고 해요. 다른 이의 좋은 일을 바라보는 시선과 내게 부족한 것을 세는 시선은 어떤 점에서 다를까요?
평정한 마음을 일곱 가지 방식으로 닦았다고 하면서도 욕망이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넷째 주장을 전합니다.
“또 벗들이여, 어떤 수행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나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우뻭카)으로 속박에서 풀려나는 수행을 거듭 길렀고, 삶의 수레와 바탕으로 삼아 꾸준히 익히고 잘 세웠다. 그런데도 욕망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Idha panāvuso, bhikkhu evaṁ vadeyya: ‘upekkhā hi kho me cetovimutti bhāvitā bahulīkatā yānīkatā vatthukatā anuṭṭhitā paricitā susamāraddhā. Atha ca pana me rāgo cittaṁ pariyādāya tiṭṭha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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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넷째 사례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과 욕망의 관계입니다. 수행자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나는 수행을 길렀지만 욕망이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말합니다. 욕망이 잠시 느껴진다는 말보다 마음을 사로잡아 계속 머문다는 표현에 유의해야 뒤에 나오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정확히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마음이 고요하다고 느끼면서도 특정 결과를 꼭 얻고 싶은 욕망이 주의를 끌어간 적이 있나요? 욕망을 억누르거나 평정을 무감각으로 만들지 말고, 원하는 대상을 떠올릴 때 몸이 기우는 한 신호를 살펴볼 수 있을까요? 분명하지 않다면 지금은 그대로 두고 싶은가요?
평정을 닦았지만 욕망이 남는다는 주장을 온전히 바로잡고, 평정한 마음이 욕망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밝힙니다.
“그에게 말해야 한다. ‘수행자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거나 부처의 말씀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잘못 전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부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벗들이여,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나는 수행을 거듭 길러 삶의 수레와 바탕으로 삼아 꾸준히 익히고 잘 세웠는데도 욕망이 그를 사로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럴 여지가 없다. 그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남이 바로 욕망에서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upekkhāya cetovimuttiyā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atha ca panassa rāgo cittaṁ pariyādāya ṭha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ṁ hetaṁ, āvuso, rāgassa, yadidaṁ upekkhā cetovimut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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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주장에는 그렇게 말하거나 부처를 잘못 전하지 말라는 반론이 이어집니다.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풀려나는 수행을 충분히 길렀다면 욕망이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 마음으로 풀려남이 욕망에서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전체를 사로잡는 상태인지가 기준입니다.
묵상
강하게 원하던 일 앞에서 욕망을 따라 흔들리는 마음과 조금 떨어져 보는 마음이 함께 보인 적이 있나요? 결과에 무관심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말고, 관심은 남아 있으면서 매달림이 약해지는 몸의 한 반응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없다면 없다고 두고 지금은 건너뛸까요?
의식이 대상의 모습을 따라갈 가능성을 온전히 부정하고, 특정한 모습에 매이지 않는 마음이 모든 모습에서 벗어남임을 확정합니다.
“그에게 말해야 한다. ‘수행자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거나 부처의 말씀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잘못 전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부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벗들이여, 대상의 특징을 붙잡지 않는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나는 수행을 거듭 길러 삶의 수레와 바탕으로 삼아 꾸준히 익히고 잘 세웠는데도 의식이 특징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럴 여지가 없다. 그런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남이 바로 모든 대상의 특징에서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animittāya cetovimuttiyā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atha ca panassa nimittānusāri viññāṇaṁ bhavi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ṁ hetaṁ, āvuso, sabbanimittānaṁ, yadidaṁ animittā cetovimut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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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주장을 반박하며 부처의 말씀을 잘못 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대상의 특징을 붙잡지 않는 마음으로 풀려나는 수행을 충분히 길렀다면 의식이 특징을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대상의 특징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묵상
모든 대상의 특징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결론은 앞의 주장에 어떤 답이 되나요? 한 가지 특징을 놓는 것과 모든 특징에 매이지 않는 것을 구별하면 이 문장이 어떻게 읽히나요? 두 표현은 어떻게 다른가요?
‘나는 있다’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나는 이것이다’라고도 여기지 않지만, 의심하고 망설이는 화살이 여전히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여섯째 주장을 전합니다.
또 벗들이여, 어떤 수행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내게서 ‘나는 있다’라는 마음이 사라졌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의심하고 망설이는 마음의 화살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
Idha panāvuso, bhikkhu evaṁ vadeyya: ‘asmīti kho me vigataṁ, ayamahamasmīti na samanupassāmi, atha ca pana me vicikicchākathaṅkathāsallaṁ cittaṁ pariyādāya tiṭṭha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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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이자 마지막 사례는 앞의 다섯처럼 어떤 마음을 일곱 방식으로 길렀다는 주장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나는 있다’라는 마음이 사라졌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여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의심하고 망설이는 마음의 화살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의심은 잠깐 스치는 것이 아니라 화살처럼 마음을 사로잡아 머뭅니다.
묵상
‘나는 있다’와 ‘나는 이것이다’라는 생각은 사라졌다고 말하면서도, 의심과 망설임이 마음을 붙든다고 해요. 이 주장에서 서로 맞지 않아 보이는 두 부분은 무엇이며, 다음 답은 어디에 초점을 둘까요?
‘나는 있다’, ‘나는 이것이다’라는 두 자아 규정이 없는 것과 의심의 화살이 함께 있을 수 없음을 밝히고, ‘나는 있다’라는 자만의 뿌리를 뽑는 것을 여섯째 벗어남으로 맺습니다.
그에게 말해야 한다. “수행자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거나 부처의 말씀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잘못 전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부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벗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여기지 않는데도 의심하고 망설이는 마음의 화살이 그를 사로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럴 여지가 없다. ‘나는 있다’라는 자만을 뿌리 뽑는 것이 바로 그 화살에서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asmīti vigate ayamahamasmīti asamanupassato, atha ca panassa vicikicchākathaṅkathāsallaṁ cittaṁ pariyādāya ṭha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ṁ hetaṁ, āvuso, vicikicchākathaṅkathāsallassa, yadidaṁ asmimānasamugghāto’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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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마지막 주장도 부처의 말씀을 잘못 전한다는 반론을 듣습니다. ‘나는 있다’라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의심과 망설임의 화살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나는 있다’라는 자만을 뿌리 뽑는 것이 그 화살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이유를 밝힙니다. 의심이 마음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질문하고 살피는 일 자체를 막는 말은 아닙니다.
묵상
여기서는 ‘나는 있다’라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을 때 의심의 화살이 머물 수 없다고 답해요. 마지막 이유인 자만의 뿌리 뽑음은 이 답을 어떻게 맺나요?
봄, 들음, 얻음, 훈련, 섬김, 기억이라는 여섯 가지 활동에 각각 비할 데 없다는 성격을 붙여 열거합니다.
“비할 데 없는 것 여섯이 있습니다.
비할 데 없는 봄·들음·얻음·훈련·섬김·기억입니다.”
Cha anuttariyāni—dassanānuttariyaṁ, savanānuttariyaṁ, lābhānuttariyaṁ, sikkhānuttariyaṁ, pāricariyānuttariyaṁ, anussatānuttariy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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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여섯 벗어남에 대한 마지막 말이 끝난 뒤, 여섯씩 묶인 간결한 목록들이 이어집니다. 첫 목록은 봄, 들음, 얻음, 훈련, 섬김, 기억이라는 여섯 활동입니다. “비할 데 없음”은 이 여섯 활동 모두에 걸리는 말입니다. 이 목록은 무엇을 보고 듣고 얻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고, 어느 영역에서 비할 데 없는 것을 찾을지 범위만 보여줍니다.
묵상
봄·들음·얻음·훈련·섬김·기억이라는 여섯 말을 천천히 읽을 때 어느 활동에서 마음이 밝아지거나 머뭇거리나요? “비할 데 없음”을 성취 여부로 평가하지 말고, 가장 먼저 반응하는 한 단어와 몸의 느낌을 살펴볼까요? 아무 반응이 없다면 지금은 그대로 지나갈까요?
부처님, 가르침, 수행자 공동체, 윤리, 베풂, 신들을 거듭 기억할 여섯 가지 바탕으로 열거합니다.
“되새길 여섯 대상은 부처, 가르침, 함께 수행하는 이들의 모임, 바른 행실, 베풂, 신들이다.”
Cha anussatiṭṭhānāni—buddhānussati, dhammānussati, saṅghānussati, sīlānussati, cāgānussati, devatānuss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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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되새김의 대상 여섯은 부처, 가르침, 함께 수행하는 이들의 모임, 바른 행실, 베풂, 신들입니다. 앞 목록에서 되새김은 비할 데 없는 활동 가운데 하나였고, 이 목록에서는 그 활동의 대상이 여섯으로 나뉩니다. 사람과 가르침, 공동체뿐 아니라 자신의 행실과 베풂까지 되새김의 대상에 들어갑니다.
묵상
부처·가르침·함께 수행하는 이들·바른 행실·베풂·신들이 되새길 대상으로 나옵니다. 사람과 가르침, 자신의 행실이 한 목록에 놓인 까닭을 어떻게 이해하나요? 여섯 대상 가운데 무엇이 가장 구체적으로 다가오나요?
눈, 귀부터 마음까지 여섯 감각으로 대상을 만나도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평정과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으로 머무는 방식을 밝힙니다.
“한결같이 머무는 여섯 방식이 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눈으로 형상을 보고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알아차리며 분명히 알고 지낸다. 귀로 소리를 듣고 … 마음으로 떠오른 것을 알고도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알아차리며 분명히 알고 지낸다.”
Cha satatavihārā. Idhāvuso, bhikkhu cakkhunā rūpaṁ disvā neva sumano hoti na dummano, upekkhako viharati sato sampajāno. Sotena saddaṁ sutvā …pe… manasā dhammaṁ viññāya neva sumano hoti na dummano, upekkhako viharati sato sampajā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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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감각을 통해 만날 때 한결같이 머무는 방식입니다. 눈으로 형상을 보고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으며,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분명히 압니다. 귀로 소리를 듣는 문장 뒤에는 생략표가 있어 코·혀·몸에도 같은 설명이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에 떠오른 것을 알 때 같은 조건이 다시 온전히 나옵니다. 대상을 만났을 때 한쪽 감정으로 기울지 않고 알아차리는 태도입니다.
묵상
눈으로 본 형상과 귀로 들은 소리, 마음에 떠오른 대상까지 같은 방식의 머묾이 이어져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에 끌려가지 않고 알아차리고 분명히 안다는 것은 어떤 태도일까요? 같은 원칙이 여러 감각을 거쳐 마음의 대상에도 이어져요.
여섯 태어남의 부류 가운데 첫째는 어두운 부류로 태어나 어두운 상태를 일으키는 경우입니다. 출발 조건과 뒤에 일으키는 상태가 모두 어둡다고 두 번 말합니다. 원문은 이 자리에서 어두움의 구체적 사회 신분이나 행동을 따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태어난 부류만으로 한 사람의 앞날이 정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묵상
출생 조건과 그 뒤에 생기는 상태를 모두 “어둡다”고 표현한 첫 경우를 들을 때 어떤 반응이 먼저 드나요? 지금은 조건과 결과라는 두 자리를 구별해 보고 싶은가요, 아니면 건너뛰고 싶은가요?
밝은 부류로 태어난 뒤 어두운 상태를 일으키는 경우와, 밝은 출발에서 괴로움의 불이 완전히 꺼진 상태에 이르는 경우입니다. 어두운 부류도 같은 세 방향이어서 전체 여섯 경우가 완성됩니다. 마지막 상태는 어둡지도 밝지도 않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출발 조건과 나중의 방향이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음을 이 배열이 보여 줍니다.
묵상
밝은 출발도 이후에 어두운 상태가 생기지 않도록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대조에서 무엇이 보이나요? 과거 조건을 자랑하거나 탓하기보다, 지금 생겨나는 방향을 한 번 살필 수 있나요?
그대로 있지 않음부터 소멸까지 진리를 꿰뚫는 데 도움이 되는 여섯 가지 인식을 열거하고, 여섯 항목 단락의 공동 암송을 마무리합니다.
“꿰뚫어 알게 하는 여섯 가지 인식은 그대로 있지 않음을 알아보는 인식, 그대로 있지 않은 것에서 괴로움을 알아보는 인식, 괴로운 것에서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알아보는 인식, 버림을 알아보는 인식, 욕망이 사그라듦을 알아보는 인식, 멈춤을 알아보는 인식이다. 벗들이여, 이것들은 알고 보시며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시고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여섯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다. 모두 함께 외워야 한다. … 신과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Cha nibbedhabhāgiyā saññā—aniccasaññā, anicce dukkhasaññā, dukkhe anattasaññā, pahānasaññā, virāgasaññā, nirodhasaññā. Ime kho, āvus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cha dhammā sammadakkhātā; tattha sabbeheva saṅgāyitabbaṁ …pe…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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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씩 묶은 마지막 목록은 꿰뚫어 알게 하는 알아봄입니다. 그대로 있지 않음, 그대로 있지 않은 것에서의 괴로움, 괴로운 것에서 나라고 할 것이 없음, 버림, 욕망의 사그라듦, 멈춤이라는 여섯 가지입니다. 앞의 세 가지는 바로 앞에서 본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말하고, 뒤의 세 가지는 새로운 이름입니다. 끝에는 부처께서 여섯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셨다는 확인과 함께 외우라는 권유가 이어집니다.
묵상
그대로 있지 않음과 괴로움, 나라고 할 것이 없음에서 버림과 욕망의 사그라짐, 멈춤까지 여섯 알아봄이 이어집니다. 앞의 셋과 뒤의 셋은 무엇을 알아보고 무엇을 놓는다는 점에서 다르게 들리나요? 여섯을 한 묶음으로 둔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섯 가지 인식과 공동 암송의 결론이 끝나자 숫자가 일곱으로 바뀌며 새 단락이 열립니다. 사리뿟따는 이 분류가 알고 보고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께서 바르게 설명하신 것임을 먼저 밝힙니다. 이어 모두가 함께 외워야 한다는 당부와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이라는 목적을 둡니다. 다음 질문부터 일곱 재산을 시작으로 구체적 목록들이 이어집니다.
묵상
새 숫자 단락을 시작할 때마다 함께 외우는 목적을 되새기는 반복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함께 보존한다는 뜻에서 편안하게 느껴지는 한 부분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깨달음의 일곱 요소와 집중을 갖추게 하는 일곱 가지 바탕을 열거하고, 일곱 가지 나쁜 특성을 밝힌 뒤 좋은 특성으로 이어갑니다.
“깨달음의 일곱 요소는 알아차림, 가르침을 살펴봄, 힘씀, 기쁨, 고요함, 마음이 한곳에 모임,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다. 마음이 한곳에 모임을 받치는 일곱 바탕은 바른 견해, 바른 뜻,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 바른 힘씀, 바른 알아차림이다. 일곱 나쁜 특성은 믿음이 없음,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음, 잘못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음, 배움이 적음, 게으름, 알아차림을 잊음, 지혜가 부족함이다. 일곱 좋은 특성은…”
깨달음을 이루는 일곱 요소가 여기서 모두 갖추어집니다. 이어 깊은 집중을 받치는 일곱 바탕은 여덟 갈래 길 가운데 집중에 이르기 전의 일곱 가지입니다. 일곱 가지 모두 ‘바르게’라는 말이 공통으로 붙습니다. 다음은 믿음·부끄러움·결과를 두려워함·배움·힘씀·알아차림·지혜가 없는 일곱 특성입니다. 이어서 그 반대가 되는 좋은 특성 일곱이 나옵니다.
묵상
집중 앞에 바른 견해부터 알아차림까지 일곱 바탕이 놓인 순서는 무엇을 보여 주나요? 집중을 홀로 떼어 보던 생각이 있었다면, 다른 요소들과 함께 놓을 때 무엇이 달리 보이는지만 살펴볼까요?
일곱 가지 좋은 특성을 밝히고, 참된 사람이 갖춘 일곱 특성으로 가르침을 알고, 뜻을 알고, 자신을 알고, 알맞음을 알고, 때를 알고, 모임을 알고, 사람을 아는 것을 열거합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믿음이 있고, 잘못을 부끄러워하며, 잘못의 결과를 두려워하고, 많이 배웠으며, 힘써 수행하고, 알아차림을 세우고, 지혜롭다. 참된 사람의 일곱 특성은 가르침을 앎, 뜻을 앎, 자신을 앎, 알맞은 정도를 앎, 때를 앎, 모임을 앎, 사람을 앎이다. 배움을 마칠 일곱 바탕은…”
idhāvuso, bhikkhu saddho hoti, hirimā hoti, ottappī hoti, bahussuto hoti, āraddhavīriyo hoti, upaṭṭhitassati hoti, paññavā hoti. Satta sappurisadhammā—idhāvuso, bhikkhu dhammaññū ca hoti atthaññū ca attaññū ca mattaññū ca kālaññū ca parisaññū ca puggalaññū ca. Satta niddasavatthūn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앞에서 없다고 한 일곱 특성이 여기서는 있는 것으로 뒤집힙니다. 믿음, 잘못을 부끄러워함, 잘못의 결과를 두려워함, 많이 배움, 힘써 수행함, 알아차림, 지혜입니다. 다음은 참된 사람이 가르침·뜻·자신·알맞은 정도·때·모임·사람을 안다는 일곱 특성입니다. 두 목록은 같은 숫자여도 내용과 역할이 다릅니다.
묵상
가르침과 뜻을 아는 일에 자신·알맞음·때·모임·사람을 아는 일이 함께 놓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 이해하기 쉬운 앎과 아직 낯선 앎 하나씩만 구별해 볼까요?
배움을 마치기 위한 일곱 자질 가운데, 훈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가르침을 깊이 헤아리는 것, 욕구를 다스리는 것, 홀로 머무는 것을 강한 열의로 꾸준히 이어 가는 태도를 밝힙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훈련을 받아들이는 데 큰 열의를 지니고, 앞으로도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가르침을 깊이 살피는 데 큰 열의를 지니고, 앞으로도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바람을 다스리는 데 큰 열의를 지니고, 앞으로도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홀로 물러나 머무는 데 큰 열의를 지니고, 앞으로도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배움을 마칠 일곱 바탕 가운데 앞의 넷입니다. 훈련을 받아들임, 가르침을 깊이 살핌, 바람을 다스림, 홀로 물러나 머묾입니다. 네 가지 모두에서 지금 큰 열의를 지니고 앞으로도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두 조건이 똑같이 나옵니다. 넷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묵상
현재의 강한 열의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사랑을 함께 말하는 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네 대상 가운데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는 것이 있다면 그 반응만 살펴볼까요? 아무것도 끌리지 않으면 그대로 지나가도 괜찮을까요?
일곱 자질의 나머지로, 힘씀을 일으키는 것과 알아차림·분별하는 힘, 그리고 견해를 꿰뚫어 보는 것을 꾸준한 열의로 닦아 가는 모습을 밝히고, 이어서 일곱 가지 인식을 소개합니다.
“힘써 수행하는 데 큰 열의를 지니고, 앞으로도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알아차림을 능숙하게 쓰는 데 큰 열의를 지니고, 앞으로도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견해를 꿰뚫어 아는 데 큰 열의를 지니고, 앞으로도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일곱 가지 알아봄은…”
앞의 넷에 이어 힘써 수행하기, 알아차림을 능숙하게 쓰기, 견해를 꿰뚫어 알기라는 세 바탕이 나옵니다. 각각 현재 큰 열의가 있고 앞으로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같은 구조입니다. 알아차림을 능숙하게 쓴다는 것은 알아차림을 영리하고 능숙하게 다루는 힘을 뜻합니다. 마지막에 ‘일곱 가지 알아봄’이라는 다음 목록의 제목이 시작됩니다.
묵상
힘씀·알아차림과 분별력·견해의 꿰뚫음을 오래 사랑한다는 말에서 어떤 느낌이 먼저 생기나요? 세 표현 가운데 뜻을 더 천천히 알고 싶은 하나가 있나요, 아니면 지금은 모두 지나갈까요?
덧없음부터 소멸에 이르는 일곱 가지 인식과, 믿음부터 지혜에 이르는 일곱 가지 힘을 차례로 열거하고, 이어서 의식이 머무는 일곱 자리를 소개합니다.
“일곱 가지 인식은 그대로 있지 않음, 나라고 할 것이 없음, 아름답지 않음, 해로움, 버림, 욕망의 사그라듦, 멈춤을 알아보는 일이다. 일곱 힘은 믿음, 힘씀,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잘못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마음, 알아차림, 집중, 지혜다. 의식이 자리 잡는 일곱 곳은…”
일곱 가지 인식은 변함, 고정된 나가 없음, 아름답지 않음, 해로움, 버림, 욕망의 사그라듦, 멈춤입니다. 이어 일곱 힘은 믿음, 힘씀, 잘못을 부끄러워함, 잘못의 결과를 두려워함, 알아차림, 집중, 지혜입니다. 두 목록 뒤에는 의식이 자리 잡는 일곱 곳의 제목이 나옵니다.
묵상
일곱 인식과 일곱 힘을 나란히 놓으면 보는 방식과 그것을 받치는 힘은 어떻게 구별되나요? 두 목록에서 서로 이어져 보이는 낱말 한 쌍이 있는지만 살펴볼까요?
몸도 인식도 저마다 다양한 중생들이 머무는 첫째 자리와, 몸은 다양하지만 인식은 하나로 같은 중생들이 머무는 둘째 자리를 서로 대조하여 보여 줍니다.
“벗들이여, 몸도 알아보는 방식도 서로 다른 존재들이 있다. 사람들, 일부 신들, 일부 낮은 곳에 떨어진 존재들이 그러하다. 이것이 의식이 자리 잡는 첫째 곳이다. 몸은 서로 다르지만 알아보는 방식이 한결같은 존재들도 있다. 처음 태어난 브라흐마 무리의 신들이 그러하다. 이것이 둘째 곳이다.”
의식이 자리 잡는 첫 두 곳은 몸과 알아보는 방식이 같거나 다른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몸도 알아보는 방식도 서로 다르고 사람들·일부 신들·일부 낮은 곳에 떨어진 존재들이 예입니다. 둘째는 몸은 다르지만 알아보는 방식이 한결같고, 처음 태어난 브라흐마 무리의 신들이 예입니다.
묵상
몸의 다양성과 인식의 다양성을 서로 다른 축으로 나누는 방식은 어떻게 이해되나요? 같은 몸과 같은 생각을 하나로 여겼던 익숙함이 있다면, 두 기준을 구별해 볼까요?
다섯째는 형상을 알아보는 마음을 완전히 넘고, 부딪힘을 알아보는 마음이 사라지고, 서로 다른 것을 알아보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시작합니다. 이어 ‘공간은 끝이 없다’고 여겨 끝없는 공간의 영역에 이른 존재들을 말합니다. 이곳은 앞의 몸과 알아봄의 네 조합과 달리 형상 없는 영역입니다.
묵상
형상·부딪힘·다양성의 인식을 하나씩 지나 “공간은 무한하다”로 이어지는 순서는 무엇을 보여 주나요? 세 조건과 결론의 관계만 천천히 읽어 볼까요?
공양받을 만한 일곱 부류의 수행자와,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일곱 가지 성향을 열거하고, 첫 항목만 다를 뿐 나머지는 그대로 대응하는 일곱 가지 족쇄를 함께 보여 줍니다.
“베풂을 받을 만한 일곱 사람은 두 방식으로 풀려난 이, 지혜로 풀려난 이, 몸으로 직접 확인한 이, 바른 견해에 이른 이, 믿음으로 풀려난 이, 가르침을 따르는 이, 믿음을 따르는 이다. 마음 밑에 잠재한 일곱 성향은 감각적 욕망, 거부감, 견해, 의심, 자만, 계속 존재하려는 마음, 제대로 알지 못함이다. 묶어 두는 일곱 족쇄는 끌림, 거부감, 견해, 의심, 자만, 계속 존재하려는 마음, 제대로 알지 못함이다.”
베풂을 받을 만한 일곱 사람을 풀려난 방식과 따르는 길에 따라 나열합니다. 이어서 마음 밑에 잠재한 성향 일곱 가지와 묶어 두는 족쇄 일곱 가지를 적습니다. 두 목록은 거부감·견해·의심·자만·계속 존재하려는 마음·제대로 알지 못함을 똑같이 담고 있지만, 첫 항목만 감각적 욕망과 더 넓은 끌림으로 다릅니다.
묵상
잠재 성향과 족쇄가 여섯 항목을 공유하면서 첫 항목만 감각적 욕망과 끌림으로 달라지는 점은 어떻게 보이나요? 두 목록의 공통점과 차이 하나씩만 찾아볼까요?
일곱씩 묶어 설한 모든 가르침이 부처님께서 바르게 설명하신 것임을 확인하고, 함께 외워 다툼 없이 전하며 신과 인간 모두의 이익이 되게 한다는 말로 이 단락을 맺습니다.
“벗들이여, 이것들은 알고 보시며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시고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일곱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다. 모두 함께 외워야 한다. … 신과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Ime kho, āvus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satta dhammā sammadakkhātā; tattha sabbeheva saṅgāyitabbaṁ …pe…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쟁점을 가라앉히는 일곱 해결법까지 마친 뒤, 사리뿟따는 일곱씩 묶은 전체 단락을 결론 냅니다. 모두 알고 보고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께서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라고 다시 확인한 뒤, 모두 함께 외우라고 거듭 말합니다. 생략된 부분은 다투지 않음, 오랜 지속, 많은 사람을 향한 연민이라는 앞선 목적을 이어받으며, 마지막에는 신과 사람의 이익과 행복으로 단락을 닫습니다.
묵상
많은 일곱 목록의 마지막이 다시 공동 암송과 넓은 이익으로 돌아오는 구조는 무엇을 강조하나요? 함께 보존한다는 목적에서 지금 마음에 남는 한 표현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일곱 단락의 결론 직후 숫자가 여덟으로 바뀌며 같은 시작 공식이 다시 놓입니다. 사리뿟따는 여덟 묶음도 부처님께서 알고 보고 완전히 깨달아 바르게 설명하신 것임을 밝힙니다. 이어 공동 암송을 요구하고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목적에 둡니다. 가운데 생략 표시는 이미 여러 차례 온전히 제시된 다투지 않음·오랜 지속·많은 사람을 향한 연민 등의 문장을 이어 받습니다. 이 반복은 숫자가 바뀌어도 가르침의 근거와 공동으로 보존하는 목적은 같음을 확인합니다.
묵상
일곱에서 여덟으로 숫자가 바뀌어도 부처님의 설명과 공동 암송이라는 틀이 그대로 이어지는 점은 어떻게 보이나요? 바뀌는 내용과 유지되는 목적 중 어느 쪽이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여덟 단락의 시작 공식 뒤에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나오고 첫 답은 그릇된 여덟 길입니다. 견해와 의도라는 생각의 방향, 말·행동·생계라는 생활의 방식, 노력·알아차림·집중이라는 수행의 힘이 모두 “그릇된”이라는 수식을 받습니다. 삶과 수행의 여덟 영역이 함께 어긋날 수 있음을 보이는 목록입니다. 마지막 표제는 같은 여덟 자리에 “바른”을 놓는 대조를 엽니다. 바로 다음 대목에서 바른 견해부터 바른 집중까지가 같은 순서로 완결됩니다.
묵상
그릇됨과 바름이 견해부터 집중까지 같은 여덟 자리에 각각 놓이는 대조는 무엇을 보여 주나요? 말이나 행동만이 아니라 견해·노력·알아차림도 방향을 가진다는 점을 살펴볼까요?
사리뿟따는 앞에서 시작한 여덟 갈래의 길을 바른 견해부터 바른 집중까지 빠짐없이 마칩니다. 곧이어 분류 기준을 수행의 요소에서 사람으로 바꾸어, 베풂이 열매를 맺을 만한 여덟 사람을 예고합니다. 이 전환은 길과 사람을 별개로 두지 않습니다. 다음 대목의 네 쌍은 각각 어떤 결실을 이미 실현한 사람과 그 결실을 향해 닦는 사람으로 이루어져, 여덟 갈래의 실천이 성숙해 가는 여러 자리를 보여 줍니다.
묵상
여덟 갈래 가운데 지금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항목과 아직 낯선 항목은 무엇인가요? 어느 하나로 자신을 평가하기보다, 길의 요소들과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을 함께 놓아 보면 실천의 과정이 어떻게 달리 보이나요?
네 가지 결실을 이룬 이와 그 결실을 향해 닦아 가는 이를 각각 짝지어 설명한 뒤, 이어서 게으름을 일으키는 첫 번째 조건을 소개합니다.
“깨달음의 흐름에 든 이와 그 결실에 이르려고 실천하는 이, 한 번만 돌아오는 이와 그 결실에 이르려고 실천하는 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와 그 결실에 이르려고 실천하는 이,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와 그 결실에 이르려고 실천하는 이다. 게으름의 여덟 구실이 있다. 벗들이여, 수행자에게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이렇게 생각한다.”
베풂을 받을 만한 여덟 사람은 네 결실마다 이미 이른 이와 그 결실에 이르려고 실천하는 이의 한 쌍으로 나뉩니다. 흐름에 듦, 한 번 돌아옴, 다시 돌아오지 않음, 흘러드는 것을 다 끊음이라는 네 결실에 각각 둘씩입니다. 다음 문장은 게으름의 여덟 구실을 여는 제목과 첫 상황입니다. 수행자에게 해야 할 일이 생기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묵상
결과를 이룬 모습만 귀하게 여기고 그곳을 향해 닦는 과정을 작게 본 적이 있나요?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는 순간 실제 피로가 오기 전부터 쉬고 싶어진다면, 그 생각과 몸의 상태를 어떻게 구별해 볼 수 있을까요?
해야 할 일을 앞두고 ‘몸이 피곤할 것’이라 미리 헤아려 눕는 첫 번째 게으름의 근거를 밝히고, 이어서 일을 이미 마친 뒤에 생기는 두 번째 상황으로 넘어갑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하지만 일을 하면 몸이 지칠 테니 누워야겠다.’ 그는 누워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르지 못한 데 이르고,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려는 힘을 내지 않는다. 이것이 첫째 게으름의 구실이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가 일을 마치면 이렇게 생각한다.”
‘kammaṁ kho me kātabbaṁ bhavissati, kammaṁ kho pana me karontassa kāyo kilamissati, handāhaṁ nipajjāmī’ti. So nipajjati na vīriyaṁ ārabhati appattassa pattiyā anadhigatassa adhigamāya asacchikatassa sacchikiriyāya. Idaṁ paṭhamaṁ kusītavatthu.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nā kammaṁ kataṁ hoti. Tassa evaṁ ho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첫 구실은 해야 할 일을 앞두고 미리 몸이 지칠 것이라 생각해 눕는 경우입니다. 그 뒤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르지 못한 데 이르고,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려는 힘을 내지 않습니다. 첫째 구실이라는 결론 뒤에는 일을 이미 마친 둘째 상황이 시작됩니다. 이 대목은 필요한 휴식 자체를 모두 게으름으로 보지 않고, 원문이 그린 누움과 힘을 내지 않음의 연결을 말합니다.
묵상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일의 피로를 미리 당겨 느끼며 다른 중요한 일을 미룬 적이 있나요? 몸에 필요한 쉼과 예상이 만든 회피를 당장 단정하지 않고 살핀다면, 둘을 가르는 신호는 무엇으로 나타날까요?
여행을 마친 뒤 몸이 피곤하다며 눕는 네 번째 근거와, 얻어 온 음식이 부족했던 다섯 번째 상황을 이어서 제시합니다.
“이것이 셋째 게으름의 구실이다. 또 벗들이여, 길을 다녀온 수행자는 ‘걸어서 몸이 지쳤으니 누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누워 힘을 내지 않는다. … 이것이 넷째 게으름의 구실이다. 또 수행자가 마을이나 고을에서 음식을 얻으러 다녔지만 거친 음식이든 좋은 음식이든 충분히 얻지 못한다.”
적게 먹어 몸이 약하다는 것을 핑계 삼는 다섯 번째 근거를 마무리하고, 이어서 배불리 먹었다는 것을 핑계 삼는 여섯 번째 근거를 소개합니다.
“그는 ‘마을이나 고을에서 음식을 얻으러 다녔지만 거친 음식이든 좋은 음식이든 충분히 얻지 못했다. 몸이 지치고 일하기 어려우니 누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누워 힘을 내지 않는다. … 이것이 다섯째 게으름의 구실이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가 마을이나 고을에서 음식을 얻으러 다녀 거친 음식이든 좋은 음식이든 충분히 얻으면 이렇게 생각한다.”
다섯째 구실은 음식을 얻으러 다녀도 충분히 얻지 못해 몸이 지치고 일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누운 뒤 힘을 내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어 여섯째는 반대로 음식을 충분히 얻은 경우로 시작합니다. 두 경우 모두 마을이나 고을에서 음식을 얻으러 다니고, 음식이 거칠거나 좋을 수 있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처음에 부족함, 다음에는 넉넉함이 각각 핑계의 바탕이 되지만, 원문은 실제 배고픔이나 포만감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묵상
부족하면 부족해서, 넉넉하면 넉넉해서 시작하지 못한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두 조건 모두 몸에 실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사실과 그 사실에 덧붙인 결론을 구분하면 무엇이 새롭게 보일까요?
배불리 먹은 뒤 몸이 마치 콩을 가득 실은 짐처럼 무겁다고 여기는 여섯 번째 근거를 마무리하고, 몸이 가볍게 아픈 일곱 번째 근거를 소개합니다.
“‘마을이나 고을에서 음식을 얻으러 다녀 거친 음식이든 좋은 음식이든 충분히 얻었다. 몸이 콩을 가득 실은 듯 무겁고 일하기 어려우니 누워야겠다.’ 그는 누워 힘을 내지 않는다. … 이것이 여섯째 게으름의 구실이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에게 가벼운 병이 생기면 이렇게 생각한다.”
일곱째 게으름의 구실은 가벼운 병이 생겨 누울 만하다고 생각한 뒤 눕고 힘을 내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어 여덟째는 병에서 막 회복해 몸이 약하고 일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상황으로 시작합니다. 두 경우 모두 실제 몸 상태가 있지만, 원문은 눕고 수행의 힘을 내지 않는 결과까지 이어서 보여 줍니다.
묵상
몸이 아플 때와 막 나은 뒤에 필요한 쉼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자기 몸의 신호를 떠올린다면, 쉬어야 할 때를 알려 주는 감각과 움직여도 괜찮을 때를 알려 주는 감각이 어떻게 다른가요? 바로 판단하기 어렵다면 그 차이를 모른다는 상태도 그대로 살펴볼 수 있나요?
게으름의 여덟 근거(꾸시따왓투)가 여기서 완결됩니다. 병에서 막 회복한 수행자가 눕고 아직 얻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것, 실현하지 못한 것을 향한 노력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마지막 여덟째입니다. 곧이어 사리뿟따는 정반대로 노력을 일으키는 여덟 근거(아람바왓투)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첫 장면은 앞 목록과 똑같이 ‘해야 할 일이 있는 때’입니다. 같은 조건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묵상
상황이 바뀌어야만 힘을 낼 수 있다고 여긴 적이 있나요? 같은 ‘해야 할 일’을 두고도 미루는 생각과 힘을 내는 생각이 갈린다면, 지금 시도해 볼 만한 작은 방향 전환은 무엇일까요?
앞으로 할 일이 있으면 가르침에 집중하기 어려워질 것을 미리 알아, 그 전에 세 가지 수행 목표를 향해 힘을 내는 첫 번째 노력의 근거를 밝힙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여러 부처의 가르침에 마음을 기울이기 쉽지 않을 테니, 지금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르지 못한 데 이르고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려고 힘을 내야겠다.’ 그는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르지 못한 데 이르고,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려고 힘을 낸다. 이것이 힘을 일으키는 첫째 계기다.”
‘kammaṁ kho me kātabbaṁ bhavissati, kammaṁ kho pana me karontena na sukaraṁ buddhānaṁ sāsanaṁ manasi kātuṁ, handāhaṁ vīriyaṁ ārabhāmi appattassa pattiyā anadhigatassa adhigamāya, asacchikatassa sacchikiriyāyā’ti. So vīriyaṁ ārabhati appattassa pattiyā, anadhigatassa adhigamāya asacchikatassa sacchikiriyāya. Idaṁ paṭhamaṁ ārambhavatt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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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힘을 일으키는 첫 계기는 해야 할 일을 앞둔 때입니다. 일하는 동안 여러 부처의 가르침에 마음을 기울이기 쉽지 않을 것이라 보고, 그 전에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르지 못한 데 이르고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려고 힘을 냅니다. 앞의 게으름 목록에서는 같은 일이 눕는 구실이었습니다.
묵상
곧 바빠질 것을 알면서도 지금의 여유를 그냥 흘려보낸 적이 있나요?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다가올 일정 전에 마음을 돌보거나 실천을 조금 앞당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언제일까요?
둘째 근거는 일을 끝낸 뒤의 시간을 휴식의 자동 명분으로 삼지 않는 경우입니다. 수행자는 일하는 동안 가르침에 충분히 주의를 두지 못했음을 돌아보고, 되찾은 시간을 오히려 노력의 계기로 삼습니다. 이어 셋째 근거는 앞으로의 여행을 다룹니다. 게으름 목록에서는 예상되는 여행의 피로가 눕는 핑계였지만, 여기서는 길 위에서 집중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를 미리 헤아려 노력을 앞당기는 쪽으로 바뀝니다.
묵상
일을 끝낸 뒤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과 꼭 필요한 휴식은 어떻게 다른가요? 쉬어도 괜찮다는 선택을 남겨 두면서, 놓쳤던 주의를 조금이라도 되찾고 싶다면 무엇부터 살펴볼 수 있을까요?
여행하는 동안 가르침에 집중하기 어려울 것을 미리 알아 그 전에 힘을 내는 세 번째 근거를 밝히고, 이어서 여행을 마친 뒤의 네 번째 근거로 넘어갑니다.
“‘길을 떠나야 한다. 걸어가는 동안 여러 부처의 가르침에 마음을 기울이기 쉽지 않을 테니 이제 힘을 내야겠다.’ … 그는 힘을 낸다. … 이것이 셋째 계기다. 또 벗들이여, 길을 다녀온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maggo kho me gantabbo bhavissati, maggaṁ kho pana me gacchantena na sukaraṁ buddhānaṁ sāsanaṁ manasi kātuṁ. Handāhaṁ vīriyaṁ ārabhāmi …pe… so vīriyaṁ ārabhati … idaṁ tatiyaṁ ārambhavatthu.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nā maggo gato hoti. Tassa evaṁ ho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셋째 경우의 수행자는 여행 자체를 피하지 않습니다. 길 위에서는 가르침에 주의를 모으기 어렵다는 점을 미리 알고, 출발 전에 아직 얻지 못한 것들을 향해 힘을 냅니다. 셋째가 마무리된 뒤에는 이미 여행을 마친 넷째 경우가 이어집니다. 앞둔 이동과 지나간 이동이 한 쌍을 이루며, 둘 다 지금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지 스스로 묻게 합니다.
묵상
이동하거나 일정이 바뀌는 날에는 마음을 돌볼 틈이 쉽게 사라지나요? 출발 전 짧은 여유에 가장 알맞은 실천은 무엇일까요?
여행길에서 놓친 주의를 여행을 마친 뒤 다시 회복하려 힘을 내는 네 번째 근거를 밝히고, 이어서 얻어 온 음식이 부족했던 다섯 번째 근거로 넘어갑니다.
“‘길을 다녀왔다. 걷는 동안 여러 부처의 가르침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했으니 이제 힘을 내야겠다.’ … 그는 힘을 낸다. … 이것이 넷째 계기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가 마을이나 고을에서 음식을 얻으러 다녔지만 거친 음식이든 좋은 음식이든 충분히 얻지 못하면 이렇게 생각한다.”
넷째 근거에서는 여행이 끝난 뒤의 시간이 회복된 기회로 그려집니다. 수행자는 길 위에서 주의를 모으지 못했던 사실을 지금 노력을 일으켜야 할 이유로 삼습니다. 이어 다섯째 상황은 음식을 얻으러 다녀도 충분하지 않은 때입니다. 게으름 목록의 같은 조건에서는 몸이 약하다는 이유가 되었지만, 노력 목록에서는 덜 찬 몸을 오히려 가볍고 움직이기 알맞은 상태로 읽게 됩니다.
묵상
길을 다녀온 뒤 몸이 쉬고 싶다고 할 때와 마음이 가르침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할 때가 있나요? 둘 중 하나를 억지로 고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금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어느 쪽 신호가 더 또렷한지 살펴보고, 둘 다 보이지 않으면 잠시 쉬어 볼 수 있나요?
충분히 먹지 못한 몸이 오히려 가볍고 일하기에 알맞다고 여겨 힘을 내는 다섯 번째 노력의 근거를 밝힙니다.
“‘마을이나 고을에서 음식을 얻으러 다녔지만 거친 음식이든 좋은 음식이든 충분히 얻지 못했다. 몸이 가볍고 움직이기 좋으니 이제 힘을 내야겠다.’ … 그는 힘을 낸다. … 이것이 다섯째 계기다. 또 벗들이여, 마을이나 고을에서 음식을 얻으러 다녀 음식을 충분히 얻은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게으름의 다섯째 경우에는 같은 음식 부족이 몸의 피로와 부적합함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노력의 다섯째 경우에는 오히려 덜 먹은 몸의 가벼움과 움직일 수 있는 상태를 봅니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실제로 가능한 면을 찾아내는 대조입니다. 이어 여섯째는 충분히 먹은 때로 바뀌어, 부족과 넉넉함 어느 한쪽만 이상적이라고 고정하지 않고 각각에서 노력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습니다.
묵상
음식을 충분히 얻지 못했을 때 몸이 가볍다고 느낄 수도 있고 힘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자신의 상태를 평가하지 말고, 지금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은 쉬어야 하는지 몸의 신호를 조용히 살펴볼까요? 답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 상태도 그대로 둘 수 있나요?
배불리 먹어 힘이 있는 몸을 노력에 쓰는 여섯 번째 근거를 밝히고, 이어서 몸이 가볍게 아픈 것이 더 심해지기 전에 힘을 내는 일곱 번째 근거를 소개합니다.
“‘마을이나 고을에서 음식을 얻으러 다니다 거친 음식이든 좋은 음식이든 충분히 얻었다. 몸이 튼튼하고 움직이기 좋으니 이제 힘을 내야겠다.’ … 그는 힘을 낸다. … 이것이 여섯째 계기다. 또 벗들이여, 가벼운 병이 생긴 수행자는 ‘이 병이 더 심해질 수도 있으니 이제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한다. …”
여섯째 경우에는 충분히 먹은 뒤의 몸을 힘 있고 일하기에 알맞다고 봅니다. 그 판단은 실제 노력으로 이어져 여섯째 근거를 이룹니다. 곧이어 일곱째에서는 가벼운 병이 더 심해질 가능성을 헤아립니다. 병이 있으니 무리하라는 뜻이 아니라, 앞으로 사정이 어려워질 수 있음을 알아 지금 가능한 범위에서 힘을 내려는 생각입니다.
묵상
충분히 먹고 힘이 있을 때 그 에너지가 어디로 향하나요? 가벼운 증상이 있어 무리하면 안 되는 때라도, 안전한 범위 안에서 미루지 않고 할 수 있는 작은 돌봄이나 실천은 무엇인가요?
가벼운 병이 더해질 가능성을 헤아린 수행자가 실제로 힘을 내면서 일곱째 근거가 끝납니다. 마지막 여덟째 상황은 병에서 막 회복한 직후입니다. 게으름 목록에서는 남은 약함만 보았지만, 여기서는 병이 다시 생길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을 현재의 기회와 함께 봅니다. 아직 얻지 못함, 이루지 못함, 실현하지 못함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낙담의 이유로 삼지 않고, 회복된 시간을 귀하게 여겨 가능한 노력을 먼저 일으키려는 생각입니다.
묵상
회복 뒤 다시 어려워질까 걱정될 때 마음이 멈추나요, 아니면 지금의 가능성을 더 귀하게 보게 되나요? 재발을 미리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지금 할 수 있는 안전하고 작은 선택은 무엇일까요?
병에서 막 회복한 수행자가 세 목표를 향한 노력을 실제로 일으키면서, 같은 여덟 상황을 게으름과 노력으로 대조한 긴 목록이 끝납니다. 외부 조건은 같아도 그것을 대하는 생각과 뒤따르는 행동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다음 항목은 베풂(다나)의 여덟 동기로 넘어갑니다. 겉보기에는 같은 선물이라도 모욕, 두려움, 교환 기대에서부터 마음을 가꾸려는 뜻까지 서로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음을 하나씩 보여 줄 준비입니다.
묵상
같은 상황이 어떤 날에는 미루는 근거가 되고 다른 날에는 힘을 내는 계기가 된 적이 있나요? 그 차이를 만든 생각을 떠올려 본다면, 베푸는 행동에서도 동기를 살피는 일이 어떻게 다가올까요?
모욕을 당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부터 마음을 아름답게 꾸미고 마음의 바탕을 다지려는 것까지, 사람이 물건을 주는 여덟 가지 이유를 열거합니다
“모욕한 뒤에 베풀기도 하고, 두려워서 베풀기도 한다. ‘그가 내게 주었다’, ‘그가 내게 줄 것이다’, ‘베푸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베풀기도 한다. ‘나는 음식을 마련하지만 이들은 그러지 못한다. 마련할 수 있는 내가 마련하지 못하는 이에게 주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베푼다. ‘이렇게 베풀면 좋은 평판이 퍼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베푼다.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고 받쳐 주려고 베푼다.”
Āsajja dānaṁ deti, bhayā dānaṁ deti, ‘adāsi me’ti dānaṁ deti, ‘dassati me’ti dānaṁ deti, ‘sāhu dānan’ti dānaṁ deti, ‘ahaṁ pacāmi, ime na pacanti, nārahāmi pacanto apacantānaṁ dānaṁ na dātun’ti dānaṁ deti, ‘idaṁ me dānaṁ dadato kalyāṇo kittisaddo abbhuggacchatī’ti dānaṁ deti. Cittālaṅkāracittaparikkhāratthaṁ dānaṁ de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베푸는 까닭은 여덟 가지입니다. 모욕한 뒤 줌, 두려워서 줌, 이미 받았기 때문에 줌, 나중에 받을 것이라 기대해 줌, 베풂이 좋다고 생각함, 자신은 음식을 마련하지만 상대는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함, 좋은 평판을 기대함,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고 받쳐 주려 함입니다. 여덟 까닭을 말할 뿐, 각 사람의 실제 동기가 하나라거나 동기 사이에 엄격한 서열이 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묵상
최근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건넨 동기를 이 여덟 가지에 비추면 무엇과 가까운가요? 한 행동에 여러 이유가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음에 베풀 때 마음을 더 맑게 하는 방향은 무엇일까요?
열 가지 물품을 남에게 준 사람이,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첫 번째 경우를 다룹니다
“베풂에 따라 태어나는 여덟 경우가 있다. 벗들이여, 어떤 이는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사마나)나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에게 음식, 마실 것, 옷, 탈것, 꽃목걸이, 향, 몸에 바르는 것, 잠자리, 거처, 등불을 베푼다. 그는 베푼 데서 무언가를 기대한다. 감각적 즐거움 다섯 가지를 누리는 부유한 귀족, 브라흐마나, 집안의 가장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Aṭṭha dānūpapattiyo. Idhāvuso, ekacco dānaṁ deti samaṇassa vā brāhmaṇassa vā annaṁ pānaṁ vatthaṁ yānaṁ mālāgandhavilepanaṁ seyyāvasathapadīpeyyaṁ. So yaṁ deti taṁ paccāsīsati. So passati khattiyamahāsālaṁ vā brāhmaṇamahāsālaṁ vā gahapatimahāsālaṁ vā pañcahi kāmaguṇehi samappitaṁ samaṅgībhūtaṁ paricārayamānaṁ. Tassa evaṁ ho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베풂에 따라 태어나는 여덟 경우가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수행자나 브라흐마나에게 음식·마실 것·옷·탈것·꽃목걸이·향·몸에 바르는 것·잠자리·거처·등불을 베풀지만, 거기서 무언가를 기대합니다. 그 뒤 감각적 즐거움 다섯 가지를 누리는 부유한 귀족, 브라흐마나, 집안의 가장을 봅니다.
묵상
무언가를 베풀 때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과 상대를 돕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었나요? 그 섞임을 잘못이라 몰지 않고 바라본다면, 내가 실제로 기대한 보답과 닮고 싶어 하는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부유한 사람들 가운데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마음에 두는 것을 낮은 목표라 밝히고, 그런 결과가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만 따른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죽은 뒤 부유한 귀족이나 브라흐마나나 집에서 사는 사람들과 함께 태어나면 좋겠다.’ 그는 그 마음을 세우고 굳히고 기른다. 더 높은 데까지 기르지 않고 낮은 데 머문 그 마음은 그곳에 태어나는 데 이른다. 그러나 이는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해당하지, 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에게 해당하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부유한 사람들을 본 이는 죽은 뒤 그들과 함께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을 세우고 굳히고 기르지만 더 높은 데까지 나아가지 않고 낮은 데 머문 마음이 그곳에 태어나는 데 이른다고 합니다. 이 결과는 바르게 사는 이에게 해당하고 바르지 않게 사는 이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제한이 붙습니다. 베풂과 바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묵상
좋은 행동 하나가 삶의 다른 선택들을 대신해 준다고 기대한 적이 있나요? 베풂과 윤리적인 생활이 함께 놓인 이 조건을 보면서, 내가 바라는 결과와 지금 기르고 있는 방향 사이에 어떤 연결이 보이나요?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의 맑은 마음이 소원을 이루게 한다는 것을 밝히고,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신이 다스리는 하늘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두 번째 경우를 엽니다
“벗들이여, 바르게 사는 사람의 마음속 바람은 그 맑음 때문에 이루어진다. 또 어떤 이는 수행자나 브라흐마나에게 음식과 마실 것부터 … 잠자리와 거처와 등불까지 베풀며 무언가를 기대한다. 그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신이 다스리는 하늘(짜뚜마하라지까)의 신들은 오래 살고 아름다우며 행복이 많다’고 듣고, 죽은 뒤 그 신들과 함께 태어나고 싶어 한다.”
두 번째 소원의 결과와 그것을 이루는 윤리적 조건을 밝힌 뒤, 같은 방식으로 물품을 나눈 사람이 다음 신들의 세계를 바라는 경우로 이어갑니다.
“그는 그 마음을 세우고 굳히고 기른다. 더 높은 데까지 기르지 않고 낮은 데 머문 그 마음은 그곳에 태어나는 데 이른다. 그러나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해당하지, 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벗들이여, 바르게 사는 사람의 마음속 바람은 그 맑음 때문에 이루어진다. 또 어떤 이는 수행자나 브라흐마나에게 음식과 마실 것부터 … 잠자리와 거처와 등불까지 베풀며 무언가를 기대한다.”
So taṁ cittaṁ dahati, taṁ cittaṁ adhiṭṭhāti, taṁ cittaṁ bhāveti, tassa taṁ cittaṁ hīne vimuttaṁ uttari abhāvitaṁ tatrūpapattiyā saṁvattati. Tañca kho sīlavato vadāmi no dussīlassa. Ijjhatāvuso, sīlavato cetopaṇidhi visuddhattā. Puna caparaṁ, āvuso, idhekacco dānaṁ deti samaṇassa vā brāhmaṇassa vā annaṁ pānaṁ …pe… seyyāvasathapadīpeyyaṁ. So yaṁ deti taṁ paccāsīsa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그 하늘, 곧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신이 다스리는 하늘에 태어나려는 생각도 정하고 안정시키며 거듭 기를 때 그곳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더 높은 데까지 마음을 기르지 않았다는 평가와 윤리적인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제한이 다시 붙습니다. 거룩한 삶이 소원을 이루는 조건임이 다시 확인됩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도 베푸는 물품의 목록과 보답을 바라는 마음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묵상
바라는 곳이 더 화려해져도 마음을 기르는 방식과 윤리의 조건은 똑같다는 점이 어떻게 들리나요? 목표의 높낮이보다 지금의 생활이 그 바람과 어울리는지를 묻는다면 무엇을 살펴보게 되나요?
여러 하늘의 이름이 차례로 이어집니다. 서른셋 신들, 야마 신들, 기쁨이 가득한 신들, 창조를 즐기는 신들, 남이 만든 것을 다스리는 신들입니다. 마지막 무리에 대해서 오래 살고 아름다우며 행복이 많다는 설명이 온전히 나오고, 그들과 함께 태어나고 싶다는 바람도 분명히 나옵니다.
묵상
더 오래 살고 더 아름답고 더 즐거운 단계가 차례로 높아지는 모습은 무엇을 떠올리게 하나요? 만족의 기준이 계속 위로 옮겨 갈 때, 베풂의 마음도 함께 달라지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감각 세계 마지막 신들의 무리에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윤리적인 삶과 맑은 마음이 바탕이 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는 그 마음을 세우고 굳히고 기른다. 더 높은 데까지 기르지 않고 낮은 데 머문 그 마음은 그곳에 태어나는 데 이른다. 그러나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해당하지, 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벗들이여, 바르게 사는 사람의 마음속 바람은 그 맑음 때문에 이루어진다.”
남이 만든 것을 다스리는 신들의 무리를 향한 생각도 거듭 정착시키면 그 태어남으로 이어집니다.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이지만, 사리뿟따는 여전히 더 높이 기르지 않고 낮은 것에 머문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결과에는 다시 윤리적인 사람과 비윤리적인 사람의 명확한 대조가 붙으며, 윤리적인 사람의 소원은 맑음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결론 냅니다. 주는 행위, 집중된 소원, 윤리적인 삶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여러 세계를 지나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묵상
오랫동안 한 방향을 생각하면 그 방향이 삶의 선택을 이끈다는 것을 어디에서 경험했나요? 원하는 결과만 선명히 그리는 일과 그 바람에 맞는 윤리적 조건을 오늘 갖추는 일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여덟째 태어남에서는 앞에서 줄여 말했던 베풂 물품 열 가지가 다시 온전히 펼쳐집니다. 주는 이는 여전히 자신이 건넨 것에 대한 보답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향하는 곳은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여러 신적 세계를 넘어 브라흐마 무리입니다. 그들이 오래 살고 아름다우며 행복이 많다는 말을 들은 뒤, 사람은 자신의 죽음 이후를 그곳과 연결하려 합니다. 뒤이어 앞의 일곱 경우와 달리 윤리뿐 아니라 욕망에서 벗어남이라는 조건이 새로 더해집니다.
묵상
같은 열 가지를 주어도 마음이 향하는 목표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은 어떻게 들리나요? 되돌려 받기를 바라는 마음과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방향이 함께 있을 때 어떤 긴장이 생기나요?
여덟째 경우의 사람은 브라흐마 무리와 함께 태어나기를 바라며 그 생각을 정하고 안정시키고 기릅니다. 앞선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 마음도 더 높은 데까지 발전하지 않았다면 특정한 태어남에 머문 상태일 뿐입니다. 신적 세계 가운데 높은 자리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완전한 풀려남과 같게 보지 않습니다. 또한 베풂과 소원만으로 결과가 보장되지 않으며 윤리적인 사람에게만 가능하고 비윤리적인 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다는 경계가 먼저 제시됩니다. 이어서 욕망에서 벗어났는지 여부도 조건으로 더해집니다.
묵상
겉으로 높아 보이는 목표를 최종적인 자유와 같은 것으로 여긴 적이 있나요? 바라는 곳의 화려함과 무관하게 윤리적인 삶이 먼저 조건으로 놓인다면, 지금의 선택 가운데 무엇이 그 조건과 맞닿아 있나요?
브라흐마 신들의 무리에 태어나려면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야 함을 밝히고, 이어서 여덟 가지 모임을 열거합니다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해당하지, 욕망이 남은 사람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벗들이여, 바르게 사는 사람의 마음속 바람은 욕망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여덟 모임은 귀족, 브라흐마나, 집에서 사는 사람, 수행자의 모임과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신이 다스리는 하늘의 신들, 서른셋 신들, 마라들, 브라흐마들의 모임이다.”
브라흐마 무리에 태어나는 마지막 경우에는 앞의 바른 행실에 더해 욕망에서 벗어났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욕망이 남은 사람은 제외되고, 마음속 바람이 이루어지는 까닭도 욕망에서 벗어남이라고 밝힙니다. 다음 여덟 모임은 사람들의 네 모임과 신들의 네 모임입니다. 귀족·브라흐마나·집에서 사는 사람·수행자, 그리고 네 신이 다스리는 하늘의 신들·서른셋 신들·마라들·브라흐마들, 이렇게 여덟입니다.
묵상
바람을 강하게 붙드는 일과 욕망에서 벗어난 소원은 어떻게 다를까요? 사람들의 네 모임과 신들의 네 모임을 나란히 놓은 이 구성을 보며, 내가 속한 자리에서 중요한 태도는 무엇이라고 느끼나요?
얻음과 잃음 등 여덟 가지 세상의 조건을 짝지어 들고, 안팎의 형상을 보는 첫 번째 통달의 영역(아비부아야따나)을 설명합니다
“세상에서 겪는 여덟 조건은 얻음과 잃음, 명성과 불명예, 비난과 칭찬, 즐거움과 괴로움이다. 대상을 뛰어넘어 아는 여덟 자리 가운데 첫째는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면서, 밖에서 작고 보기 좋거나 보기 싫은 형상을 보고 ‘그것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기는 경우다.”
Aṭṭha lokadhammā—lābho ca, alābho ca, yaso ca, ayaso ca, nindā ca, pasaṁsā ca, sukhañca, dukkhañca. Aṭṭha abhibhāyatanāni. Ajjhattaṁ rūpasaññī eko bahiddhā rūpāni passati parittāni suvaṇṇadubbaṇṇāni, ‘tāni abhibhuyya jānāmi passāmī’ti evaṁsaññī hoti. Idaṁ paṭhamaṁ abhibhāyatana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세상에서 겪는 여덟 조건은 얻음과 잃음, 명성과 불명예, 비난과 칭찬, 즐거움과 괴로움이라는 네 쌍입니다. 이어 대상을 뛰어넘어 아는 여덟 자리 중 첫째가 시작됩니다. 안에서는 형상을 알아보고, 밖에서는 작고 보기 좋거나 보기 싫은 형상을 보며, 그것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깁니다.
묵상
얻고 잃음 같은 세상의 조건 가운데 최근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 한 쌍은 무엇인가요? 아름답고 추하다는 반응을 알아차리면서도 거기에 끌려가지 않고 ‘알고 본다’는 자리에 머문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자기 안에 형상이 있다고 인식하는 둘째 경우와 그렇지 않은 셋째 경우를, 밖에 있는 형상이 크고 작음에 따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면서, 밖에서 한없이 넓고 보기 좋거나 보기 싫은 형상을 보고 ‘그것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긴다. 이것이 둘째 자리다.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지 않으면서, 밖에서 작고 보기 좋거나 보기 싫은 형상을 보고 ‘그것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긴다. 이것이 셋째 자리다.”
둘째는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면서 밖에서 한없이 넓고 보기 좋거나 보기 싫은 형상을 봅니다. 셋째는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지 않고 밖의 작은 형상을 봅니다. 두 경우 모두 대상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기며 각각 둘째와 셋째라고 결론짓습니다. 앞의 첫째는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고 밖의 작은 형상을 본 경우였습니다. 안의 형상 알아봄 유무와 밖의 크기가 조합을 이룹니다. 이것은 형상 수행을 설명하는 목록입니다.
묵상
대상의 크기나 강도가 커질수록 아름답다거나 추하다는 판단도 더 강해지나요? 안에서 생긴 이미지와 밖에서 마주친 대상을 구분해 본다면, 지금의 반응을 조금 더 분명히 아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요?
자기 안에 형상이 있다는 인식 없이 한없이 넓은 대상을 보는 넷째 통달을 마치고, 푸른 형상을 보는 다섯째 통달을 엽니다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지 않으면서, 밖에서 한없이 넓고 보기 좋거나 보기 싫은 형상을 보고 ‘그것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긴다. 이것이 넷째 자리다. 이어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지 않으면서, 밖에서 푸르고 푸른빛을 띠며 푸르게 보이고 푸른 광채를 내는 형상들을 본다.”
넷째 자리는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지 않고 밖에서 한없이 넓은 형상을 보는 경우입니다. 보기 좋은 것과 보기 싫은 것을 모두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깁니다. 이어 다섯째 자리의 푸른 형상이 시작됩니다. 푸름, 푸른빛, 푸르게 보임, 푸른 광채라는 네 표현이 연이어 나옵니다. 첫 넷은 안의 형상 알아봄 유무와 밖의 크기를 조합했고, 다음 넷은 색깔에 따라 나뉩니다.
묵상
대상을 분명히 본다는 것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판단과 같지 않다는 점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한 가지 푸른 대상을 떠올릴 때 색, 보이는 모습, 빛남을 나누어 살피면 경험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아마꽃, 바라나시에서 짠 천, 그 밖의 형상 각각의 색과 색깔과 모습과 광채를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해 다섯째 통달을 마무리합니다
“아마꽃은 푸르고 푸른빛을 띠며 푸르게 보이고 푸른 광채를 낸다. 양면이 매끄러운 바라나시 천도 푸르고 푸른빛을 띠며 푸르게 보이고 푸른 광채를 낸다. 이처럼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지 않으면서 밖의 푸른 형상들을 본다. 그것들은 푸르고 푸른빛을 띠며 푸르게 보이고 푸른 광채를 낸다. ‘그것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기는 것이 다섯째 자리다.”
다섯째 자리의 푸른 형상은 아마꽃과 양면이 매끄러운 바라나시 천에 비유됩니다. 꽃과 천과 실제로 보는 바깥 형상에 푸름, 푸른빛, 푸르게 보임, 푸른 광채라는 네 성질이 각각 되풀이됩니다. 마지막으로 그 형상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기는 것이 다섯째 자리라고 결론짓습니다.
묵상
아마꽃과 천과 바깥 형상에 푸름·색깔·모습·광채를 각각 되풀이한 리듬은 어떻게 들리나요? 네 표현 가운데 서로 가장 비슷하거나 다르게 느껴지는 둘은 무엇인가요?
다섯째의 푸른 형상이 끝난 뒤, 여섯째 자리는 노란 바깥 형상을 보는 조건부터 밝힙니다. 보는 이는 안에서 형상을 인식하지 않으며, 대상은 밖에 있는 형상들입니다. 그 형상에는 노란 대상이고, 노란 색깔을 지니며, 노란 모습으로 보이고, 노란 광채를 띤다는 네 표현이 차례로 붙습니다. 뒤이어 참파꽃과 바라나시 천이 같은 네 표현으로 묘사되고, 바깥 형상에 대한 이 선언도 다시 온전히 되풀이됩니다.
묵상
밖의 노란 형상을 색·색깔·모습·광채라는 네 말로 펼친 문장에서 어느 차이가 먼저 들리나요? 네 표현의 리듬만 따라가 보고 싶은가요, 아니면 그대로 지나가고 싶은가요?
참파꽃, 바라나시에서 짠 천, 그 밖의 형상마다 노란 색과 색깔과 모습과 광채를 모두 되풀이해 여섯째 통달을 마무리합니다
“참파꽃은 노랗고 노란빛을 띠며 노랗게 보이고 노란 광채를 낸다. 양면이 매끄러운 바라나시 천도 노랗고 노란빛을 띠며 노랗게 보이고 노란 광채를 낸다. 이처럼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지 않으면서 밖의 노란 형상들을 본다. 그것들은 노랗고 노란빛을 띠며 노랗게 보이고 노란 광채를 낸다. ‘그것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기는 것이 여섯째 자리다.”
여섯째는 노란 형상입니다. 참파꽃과 양면이 매끄러운 바라나시 천, 그리고 실제로 보는 바깥 형상마다 노랗고, 노란빛을 띠고, 노랗게 보이고, 노란 광채를 낸다는 네 표현이 반복됩니다. 세 대상의 특징을 모두 옮긴 뒤, 형상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기는 것이 여섯째 자리라고 말합니다. 앞의 푸른 자리와 같은 방식으로 말하며, 색과 꽃만 달라집니다.
묵상
참파꽃과 매끄러운 천과 바깥 형상에 같은 네 표현을 거듭 붙일 때 대상의 차이와 공통점은 어떻게 보이나요? 반복이 주의를 어디에 머물게 하는지만 살펴볼까요?
여섯째의 노란 형상을 통달한 뒤 일곱째는 붉은 형상으로 대상을 바꿉니다. 조건은 이어집니다. 한 사람은 안에서 형상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의 형상들을 봅니다. 그 바깥 형상은 붉은 대상이고, 붉은 색깔을 지니며, 붉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붉은 광채를 띤다고 네 번 구체화됩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반두지와까꽃과 바라나시 천도 같은 네 가지 표현으로 그려집니다.
묵상
붉은 형상을 단지 “붉다”로 끝내지 않고 색깔·모습·광채까지 구별한 까닭은 무엇처럼 들리나요? 네 낱말의 차이만 조용히 비교해 볼까요?
붉은 반두지와까꽃, 바라나시에서 짠 천, 그 밖의 형상 각각의 색과 색깔과 모습과 광채를 되풀이해 일곱째 통달을 마무리합니다
“반두지와까꽃은 붉고 붉은빛을 띠며 붉게 보이고 붉은 광채를 낸다. 양면이 매끄러운 바라나시 천도 붉고 붉은빛을 띠며 붉게 보이고 붉은 광채를 낸다. 이처럼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지 않으면서 밖의 붉은 형상들을 본다. 그것들은 붉고 붉은빛을 띠며 붉게 보이고 붉은 광채를 낸다. ‘그것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기는 것이 일곱째 자리다.”
마지막 여덟째 자리는 흰 바깥 형상을 보는 조건으로 시작합니다. 보는 이는 안에서 형상을 인식하지 않으며, 밖에 나타난 형상들을 봅니다. 그 대상은 희다는 첫 표현에 이어 흰 색깔, 흰 모습, 흰 광채라는 세 표현을 더 받아 네 겹으로 밝혀집니다. 앞선 푸름·노랑·붉음과 같은 틀을 쓰되 색의 이름만 흰색으로 바뀝니다. 다음 대목의 샛별과 바라나시 천도 같은 네 특징을 각각 받고, 이어 바깥 형상의 네 특징이 다시 한번 모두 나타납니다.
묵상
흰 형상을 희다·흰 색깔·흰 모습·흰 광채로 펼쳤을 때 각 말이 같은 대상을 조금씩 다르게 비추나요? 네 표현을 읽을 때 생기는 가까움이나 거리감만 살펴볼까요?
샛별, 바라나시에서 짠 천, 그 밖의 형상마다 흰 색과 색깔과 모습과 광채를 전부 되풀이해 여덟째 통달을 마무리합니다
“샛별은 희고 흰빛을 띠며 희게 보이고 흰 광채를 낸다. 양면이 매끄러운 바라나시 천도 희고 흰빛을 띠며 희게 보이고 흰 광채를 낸다. 이처럼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지 않으면서 밖의 흰 형상들을 본다. 그것들은 희고 흰빛을 띠며 희게 보이고 흰 광채를 낸다. ‘그것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기는 것이 여덟째 자리다.”
여덟째의 흰 형상은 샛별과 양면이 매끄러운 바라나시 천, 바깥 형상에 차례로 적용됩니다. 각 대상이 희고 흰빛을 띠고 희게 보이며 흰 광채를 낸다는 네 표현을 모두 담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형상을 뛰어넘어 알고 본다고 여기며 여덟째 자리라고 결론짓습니다. 이것으로 색에 따른 푸름·노랑·붉음·흰색의 네 자리가 끝납니다.
묵상
샛별과 매끄러운 천과 바깥 형상을 같은 네 흰빛 표현으로 잇는 방식은 무엇을 또렷하게 하나요? 자연물·직물·관찰 대상의 세 자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만 볼까요?
대상을 뛰어넘어 아는 여덟 자리가 끝나고, 속박에서 풀려나는 여덟 방식이 새로 시작됩니다. 첫째는 형상이 있는 몸을 지닌 이가 형상들을 본다는 짧은 문장입니다. 원문은 이 자리에서 색깔이나 크기, 안팎의 형상 구분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여덟 자리와는 다른 새 목록이므로 따로 구분해 읽어야 합니다.
묵상
“형상을 지닌 이는 형상들을 본다”는 짧은 정의에서 보는 이와 보이는 형상은 어떻게 구별되나요? 이 두 요소가 한 문장에 놓인 방식만 천천히 살펴볼까요?
둘째와 셋째 해방을 밝힌 뒤, 형상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넘어서서 끝없이 넓은 허공에 드는 넷째 해방으로 나아갑니다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지 않으면서 밖의 형상들을 본다. 이것이 둘째 방식이다. 오직 아름다움에 마음을 둔다. 이것이 셋째 방식이다. 형상을 알아보는 마음을 완전히 넘고, 부딪힘을 알아보는 마음이 사라지고, 서로 다른 것을 알아보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공간은 끝이 없다’고 여겨 끝없는 공간의 영역에 들어 머문다.”
둘째 방식은 안에서 형상을 알아보지 않으면서 밖의 형상들을 보는 것입니다. 셋째는 오직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이어 넷째 방식에 해당하는 형상 없는 영역의 설명이 시작됩니다. 형상을 알아보는 마음을 완전히 넘고, 부딪힘을 알아보는 마음이 사라지고, 서로 다른 것을 알아보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세 조건 뒤에 끝없는 공간의 영역에 들어 머뭅니다.
묵상
밖의 형상을 보는 일과 아름다움에만 마음을 두는 일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여러 대상의 차이에 쏠렸던 주의가 넓은 공간으로 열리는 모습을 상상할 때, 마음에는 어떤 여백이 생기나요?
앞에서 끝없는 공간의 영역에 들어 머문 일이 넷째 방식이었습니다. 다음은 그 영역을 완전히 넘어 ‘의식은 끝이 없다’고 여겨 끝없는 의식의 영역에 들어 머무는 다섯째 방식입니다. 이어 끝없는 의식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아무것도 없다’고 여겨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들어 머뭅니다.
묵상
공간이 무한하다는 앎과 의식이 무한하다는 앎은 어떻게 다르게 상상되나요? 아무것도 없음으로 넘어가는 순서를 개념으로 서둘러 붙들지 않고, 세 초점의 차이만 천천히 살피면 무엇이 남나요?
여섯째 해방을 확정하고, 인식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영역과 인식과 느낌이 완전히 멎는 상태에 이르러 여덟 가지 해방을 모두 마칩니다
“이것이 여섯째, 속박에서 풀려나는 방식이다.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무언가를 알아본다고도 알아보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영역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일곱째 방식이다. 그 영역도 완전히 넘어 알아봄과 느낌이 멎는 상태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여덟째 방식이다.”
앞에서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들어 머무는 일이 여섯째 방식이었습니다. 그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알아본다고도 알아보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영역에 머무는 것이 일곱째입니다. 그 영역까지 완전히 넘어 알아봄과 느낌이 멎는 상태가 여덟째입니다. 이 자리는 알아봄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묵상
첫 풀려남의 형상에서 여덟째의 알아봄과 느낌이 멎는 상태까지 이어지는 폭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이 순서에서 가장 낯선 경계는 어디인가요?
모든 것을 알고 보시는 부처님께서 바르게 설명하신 여덟 가지씩 묶인 가르침 전체를 사리뿟따 님이 정리하여 마무리합니다
“벗들이여, 이것들이 알고 보시며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시고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여덟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다.”
Ime kho, āvus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aṭṭha dhammā sammadakkhāt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사리뿟따는 여덟 갈래의 길부터 여덟 가지 풀려나는 방식까지 이어진 긴 단락을 부처님의 바른 설명으로 되돌려 맺습니다. 그 사이에는 사람, 게으름과 노력, 베풂의 동기와 태어남, 모임, 세상 조건, 대상을 뛰어넘어 아는 자리와 풀려나는 방식처럼 성격이 다른 목록들이 놓였습니다. 모두 여덟이라는 수로 정리되지만 서로 뒤섞이지 않고, 각 목록이 담은 개수와 순서는 그대로 지켜집니다. 이 배열은 알고 보며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다시 확인합니다.
묵상
여덟 목록들 가운데 생활의 구체적 장면을 다룬 부분과 깊은 명상 상태를 다룬 부분은 어떻게 이어져 보이나요? 하나의 숫자가 서로 다른 내용을 기억하게 하는 그릇이 된다는 점에서 무엇이 눈에 들어오나요?
모든 것을 알고 보시는 부처님께서 바르게 설명하신 아홉 가지씩 묶인 가르침이 있음을 사리뿟따 님이 선언합니다
“벗들이여, 알고 보시며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시고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아홉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 있다.”
Atthi kho, āvus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nava dhammā sammadakkhāt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여덟 가지로 묶은 단락을 마친 사리뿟따는 이제 아홉이라는 새 틀을 엽니다. 이 가르침도 알고 보며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임을 먼저 밝힙니다. 뒤따를 목록은 원한의 아홉 근거와 그것을 없애는 아홉 방법, 존재들의 아홉 거처, 수행 기회를 잃는 아홉 경우, 아홉 단계의 명상과 멎음입니다. 같은 수량 안에서도 해로운 마음의 발생, 그 마음의 해소, 존재 세계, 귀한 기회, 깊어지는 수행이라는 서로 다른 층위를 차례로 다룹니다.
묵상
여덟에서 아홉으로 넘어갈 때 어떤 새로운 흐름이 기대되나요? 원한에서 깊은 명상까지 묶는 아홉이라는 틀을 보며 먼저 살피고 싶은 주제는 무엇인가요?
‘그가 나에게 해로운 일을 했다, 하고 있다, 할 것이다’와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이미 해로운 일을 했다’는 생각을 원한이 생기는 근거로 듭니다
“아홉씩 묶은 가르침은 무엇인가? 원한이 생기는 아홉 까닭이 있다. ‘그가 내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하며 원한을 품고, ‘지금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며 원한을 품고, ‘앞으로 해를 끼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원한을 품는다. ‘그가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하며 원한을 품는다. …”
Katame nava? Nava āghātavatthūni. ‘Anatthaṁ me acarī’ti āghātaṁ bandhati; ‘anatthaṁ me caratī’ti āghātaṁ bandhati; ‘anatthaṁ me carissatī’ti āghātaṁ bandhati; ‘piyassa me manāpassa anatthaṁ acarī’ti āghātaṁ bandhati …pe…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원한이 생기는 아홉 까닭은 누구와 어떤 시간의 일인가를 교차해 나눕니다. 먼저 자신에게 과거에 해를 끼침, 지금 해를 끼침, 앞으로 해를 끼칠 것임을 생각하며 각각 원한을 품습니다. 다음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해를 끼친 과거의 경우가 나오고, 현재와 미래의 경우도 같은 틀로 이어집니다. 원문은 실제로 일어난 일만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원한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묵상
원한이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을 향해 커진 적이 있나요? 자신에게 향한 해침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한 해침은 마음에서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는지 안전한 범위에서 살펴볼 수 있을까요?
내가 아끼는 사람이 지금 해를 입고 있거나 앞으로 입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과거·현재·미래에 이익을 얻었거나 얻는다는 생각까지 더해 원한의 아홉 가지 근거를 모두 갖춥니다
“‘그가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지금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며 원한을 품는다. … ‘앞으로 해를 끼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원한을 품는다. ‘그가 내가 싫어하고 달갑지 않은 사람을 도왔다’고 생각하며 원한을 품는다. … ‘지금 돕는다’고 생각하며 원한을 품는다. … ‘앞으로 도울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원한을 품는다.”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지금이나 앞으로 해를 끼치는 경우가 이어집니다. 다음에는 싫어하고 달갑지 않은 사람을 이미 도왔거나 지금 돕거나 앞으로 도울 경우에도 원한을 품는다고 합니다. 세 관계에 과거·현재·미래가 각각 짝지어져 전체 아홉이 완성됩니다. 직접 자신이 해를 입지 않아도 남의 도움을 보고 원한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묵상
사랑하는 이의 해침과 싫어하는 이의 도움을 나란히 원한의 근거로 든 배열에서 무엇이 보이나요? 두 관계와 세 시간의 짜임만 천천히 살펴볼까요, 원하지 않으면 건너뛸까요?
원한을 없애는 아홉 가지 방법을 새로 열고, 자신에게 이미 일어난 과거의 해침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해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원한을 내려놓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원한을 풀어내는 아홉 방법이 있다. ‘그가 내게 해를 끼쳤지만, 여기서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원한을 푼다. ‘지금 내게 해를 끼치지만, 여기서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원한을 푼다.”
Nava āghātapaṭivinayā. ‘Anatthaṁ me acari, taṁ kutettha labbhā’ti āghātaṁ paṭivineti; ‘anatthaṁ me carati, taṁ kutettha labbhā’ti āghātaṁ paṭivine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아홉 까닭과 같은 장면에서 원한을 풀어내는 아홉 방법이 시작됩니다. 첫 두 문장은 자신에게 과거에 해를 끼쳤거나 지금 해를 끼친 경우입니다. 각각 ‘여기서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원한을 풉니다. 이 말은 그 일에 매달려 원한을 키우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묵상
과거와 현재의 해침을 말하는 두 문장에서 일어난 일을 인정하는 부분과 원한을 내려놓는 부분은 어떻게 이어지나요? 같은 문장 구조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되풀이되는지만 살펴볼까요?
자신에게 닥칠 미래의 해침과 사랑하는 이에게 과거·현재·미래에 닥친 해침을 두고 원한을 없애는 방법을 밝힙니다.
“‘그가 내게 앞으로 해를 끼치겠지만, 여기서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원한을 푼다.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하며 … ‘지금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며 … ‘앞으로 해를 끼치겠지만, 여기서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원한을 푼다.”
먼저 자신에게 앞으로 해를 끼칠 것이라 여기는 셋째 경우를 온전히 말합니다. 이어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과거·현재·미래에 해를 입는 세 경우가 나옵니다.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부분은 줄였습니다. 마지막 미래의 경우에는 ‘여기서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과 원한을 푸는 결론이 다시 온전히 붙습니다. 같은 아홉 장면에서 원한을 품는 대신 풀어내는 목록입니다.
묵상
자신에게 닥칠 미래의 해침과 사랑하는 이에게 닥칠 미래의 해침을 각각 온전히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관계가 달라질 때 같은 해소 구조가 어떻게 들리는지만 살펴볼까요?
싫어하는 사람이 과거·현재·미래에 이익을 얻었다는 생각을 두고도 원한을 없애며, 이어서 존재들이 머무는 아홉 곳을 엽니다.
“‘내가 싫어하고 달갑지 않은 사람을 도왔다’고 생각하며 … ‘지금 돕는다’고 생각하며 … ‘앞으로 돕겠지만, 여기서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원한을 푼다. 존재들이 머무는 아홉 곳이 있다.”
‘appiyassa me amanāpassa atthaṁ acari …pe… atthaṁ carati …pe… atthaṁ carissati, taṁ kutettha labbhā’ti āghātaṁ paṭivineti. Nava sattāvāsā.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싫어하고 달갑지 않은 사람을 누군가 도왔거나 지금 돕거나 앞으로 도울 때의 세 경우입니다. 앞 둘은 같은 말이 되풀이되어 줄였고, 마지막은 ‘여기서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원한을 푼다고 합니다. 이로써 세 관계와 세 시점이 이룬 아홉 방법이 끝납니다. 다음에는 존재들이 머무는 아홉 곳이라는 새 목록의 제목이 시작됩니다.
묵상
싫어하는 이가 도움받는 과거·현재·미래를 끝까지 나누어 말한 배열은 원한의 어떤 면을 드러내나요? 세 시점이 같은 해소 문장으로 모이는 짜임을 살펴볼까요, 불편하면 건너뛸까요?
몸도 다양하고 인식도 다양한 첫째 거처와, 몸은 다양하지만 인식은 하나인 둘째 거처를 대조하여 밝힙니다.
“벗들이여, 몸도 알아보는 방식도 서로 다른 존재들이 있다. 사람들, 일부 신들, 일부 낮은 곳에 떨어진 존재들이 그러하다. 이것이 첫째 거처다. 몸은 서로 다르지만 알아보는 방식이 한결같은 존재들도 있다. 처음 태어난 브라흐마 무리의 신들이 그러하다. 이것이 둘째 거처다.”
존재들이 머무는 첫 두 곳은 앞서 말한 의식이 자리 잡는 곳의 첫 두 가지와 닮았습니다. 첫째는 몸과 알아보는 방식이 모두 서로 다르고, 사람들·일부 신들·일부 낮은 곳에 떨어진 존재들이 예입니다. 둘째는 몸은 다르지만 알아보는 방식은 한결같고, 처음 태어난 브라흐마 무리의 신들이 예입니다.
묵상
겉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거나,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 전혀 다르게 인식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몸과 인식을 두 축으로 나누면 관계를 보는 시선이 어떻게 달라지나요?
다섯째는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예로 알아봄이 없는 존재라 불리는 신들을 듭니다. 앞의 첫 네 거처는 몸과 알아봄의 같고 다름을 조합했지만, 여기서는 알아봄이 아예 없다는 다른 기준이 등장합니다. 이 다섯째 거처도 다른 거처들과 마찬가지로, 존재가 태어나 머무는 하나의 자리로 소개됩니다.
묵상
아무것도 인식하거나 경험하지 않는 상태와 자유롭게 아는 상태를 같은 것으로 여기기 쉬운가요? 인식이 없는 상태를 그 자체로 이상화하지 않고 하나의 존재 조건으로 본다면 어떤 차이가 드러나나요?
아홉 거처 가운데 여섯째부터 형상 없는 영역이 이어집니다. 형상을 알아보는 마음을 완전히 넘고, 부딪힘을 알아보는 마음이 사라지고, 서로 다른 것을 알아보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세 조건이 먼저 나옵니다. 이어 ‘공간은 끝이 없다’고 여겨 끝없는 공간의 영역에 태어납니다. 앞의 여덟 풀려남에서는 그 영역에 들어 머무는 수행을 말했지만, 여기서는 그곳에 태어난 존재들을 말합니다.
묵상
같은 “무한한 공간”이 명상의 상태로 말해질 때와 존재가 태어난 거처로 말해질 때 어떤 차이가 있나요? 경험과 그 경험을 조건으로 한 삶의 자리를 구별하면 이해가 어떻게 선명해지나요?
여덟째 거처는 끝없는 의식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아무것도 없다’고 여겨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태어난 존재들의 자리입니다. 앞의 일곱째 의식의 무한함과 대상이 다릅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경전에서 형상 없는 영역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이곳에도 분명히 여기는 작용이 있어 알아봄이 없는 존재들의 다섯째 거처와는 다릅니다.
묵상
“아무것도 없다”는 표현을 일상의 상실감과 명상적 영역에서 각각 읽으면 어떻게 달라지나요? 같은 말에 익숙한 의미를 덧씌우지 않고 앞 단계와의 관계로 본다면 무엇이 더 분명해지나요?
아홉째 거처는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알아본다고도 알아보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영역에 태어난 존재들의 자리입니다. 형상 없는 네 거처의 마지막입니다. 이어 수행의 삶을 살기 어려운 아홉 때라는 다음 목록의 제목이 시작됩니다.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이라는 말은 앞서와 같이 알아봄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묵상
존재의 아홉 거처를 마친 뒤 곧바로 “기회를 잃는 때”가 이어지는 배열은 무엇을 환기하나요? 지금 가르침을 듣고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조건을 당연하지 않게 본다면 무엇이 귀하게 느껴지나요?
흘러드는 것을 다 끊고 완전히 깨달은 이가 나타나 가르침이 전해져도, 지옥에 태어나 듣지 못하는 첫째 기회 상실을 밝힙니다.
“벗들이여, 세상에 깨달음에 이른 이(따타가따),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시며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분이 나타나고, 그분이 밝힌 가르침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괴로움의 불을 완전히 끄며 깨달음으로 이끌도록 전해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지옥에 태어났다. 이것이 수행의 삶을 살기 어려운 첫째 때다.”
수행의 삶을 살기 어려운 첫째 때는 부처와 가르침이 세상에 있으나 어떤 사람이 지옥에 태어난 경우입니다. 부처는 마음을 흐리는 것을 다 끊고 바르게 완전히 깨달았으며, 그분이 밝힌 가르침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괴로움의 불을 완전히 끄고 깨달음으로 이끕니다. 이런 좋은 조건이 있어도 그 사람에게는 가르침을 만날 자리가 없다는 대조입니다.
묵상
깨달음에 이른 이(따타가따)의 두 자격과 가르침의 네 특징을 먼저 온전히 밝힌 뒤 지옥의 태어남을 대조한 순서는 무엇을 선명하게 하나요? 좋은 조건과 닿을 수 없는 자리의 간격만 살펴볼까요?
다섯째는 오래 사는 신들 가운데 태어난 경우입니다. 여섯째는 남녀 수행자와 집에 사는 남녀 신도의 발길이 닿지 않는 변방에서 태어난 경우입니다. 말과 생각이 통하지 않는, 가르침이 닿기 어려운 먼 지역을 가리킵니다. 앞의 긴 부처와 가르침 문장은 되풀이되는 부분을 줄여 이어집니다.
묵상
편안함과 긴 시간이 오히려 중요한 배움을 미루게 한 적이 있나요? 또한 정보나 스승이 닿지 않는 사람들의 조건을 생각할 때, 내가 가진 접근성을 나누거나 더 잘 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베풂도, 행위의 결과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부모의 은혜도, 저절로 태어나는 존재도, 몸소 알아 가르치는 수행자도 없다고 부정하는 열 가지 그릇된 관점을 밝힙니다.
“‘베풂도, 제사도, 바치는 행위도 소용없다. 선하거나 나쁜 행위에는 열매도 결과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으며,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고 저절로 태어나는 존재도 없다. 바르게 살아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분명히 알고 확인하여 전하는 수행자나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브라흐마나)도 없다’고 여긴다.”
그릇된 견해는 베풂·제사·바치는 행위, 선악의 행위와 그 결과, 이 세상과 저 세상, 어머니와 아버지, 저절로 태어나는 존재, 직접 확인해 전하는 수행자와 브라흐마나를 모두 부정합니다. 한때 널리 알려진 그릇된 생각을 적은 문장으로, 원문은 부정의 대상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적습니다. 이 문장은 그릇된 견해를 그대로 옮긴 인용입니다.
묵상
열 가지 부정 가운데 나머지 생각들을 가장 크게 떠받치는 하나는 무엇처럼 보이나요? 질문하거나 검토할 자유를 지키면서도 모든 가능성을 미리 닫는 관점과 근거를 살피는 태도는 어떻게 다를까요?
그릇된 관점을 지닌 일곱째 기회 상실을 마무리하고,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가리지 못하는 여덟째 기회 상실과 아홉째의 시작을 엽니다.
“이것이 일곱째 때다. 또 부처가 나타나지만 … 중심 지역에 태어난 어떤 사람은 지혜가 부족하고 둔하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잘한 말과 잘못한 말의 뜻을 가려내지 못한다. 이것이 여덟째 때다. 또 벗들이여, 세상에 마음을 흐리는 것을 다 끊고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가 나타나지 않은 때가 있다.”
Ayaṁ sattamo akkhaṇo asamayo brahmacariyavāsāya. Puna caparaṁ …pe… majjhimesu janapadesu paccājāto hoti. So ca hoti duppañño jaḷo eḷamūgo, nappaṭibalo subhāsitadubbhāsitānamatthamaññātuṁ. Ayaṁ aṭṭhamo akkhaṇo asamayo brahmacariyavāsāya. Puna caparaṁ, āvuso, tathāgato ca loke na uppanno hoti arahaṁ sammāsambudd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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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의 그릇된 견해가 끝나고, 여덟째는 중심 지역에 태어났지만 잘한 말과 잘못한 말의 뜻을 가려내기 어려운 사람의 경우입니다. 원문은 지혜가 부족하고 둔하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도 묘사합니다. 이어 아홉째는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때로 시작합니다. 앞의 여덟과 달리 가르침을 전할 스승 자체가 없는 시대라는 조건으로 넘어갑니다.
묵상
좋은 말과 나쁜 말의 뜻을 가리는 능력은 지식의 양과 어떻게 다를까요? 이해가 어려운 사람을 낮춰 보지 않으면서, 서로의 분별을 돕기 위해 설명과 질문을 어떻게 더 접근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지혜롭게 태어나 가르침의 중심지에 있어도, 깨달음에 이른 이도 가르침도 세상에 없다면 수행할 기회를 놓친다는 것을 밝힙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괴로움의 불을 완전히 끄며 깨달음으로 이끄는, 잘 가신 분께서 밝힌 가르침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중심 지역에 태어나 지혜롭고 둔하지 않으며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고, 잘한 말과 잘못한 말의 뜻을 가려낼 수 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을 살기 어려운 아홉째 때다. 점차 깊어지는 아홉 머묾이 있다.”
dhammo ca na desiyati opasamiko parinibbāniko sambodhagāmī sugatappavedito. Ayañca puggalo majjhimesu janapadesu paccājāto hoti, so ca hoti paññavā ajaḷo aneḷamūgo, paṭibalo subhāsitadubbhāsitānamatthamaññātuṁ. Ayaṁ navamo akkhaṇo asamayo brahmacariyavāsāya. Nava anupubbavihār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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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아홉째는 앞의 여덟 경우와 반대입니다. 사람은 중심 지역에 태어나 지혜롭고 잘한 말과 잘못한 말의 뜻을 가려낼 수 있지만, 부처가 나타나지 않아 가르침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개인과 장소의 조건이 좋아도 가르침 자체가 없다는 시대의 한계를 말합니다. 아홉째라는 결론 뒤에는 점차 깊어지는 아홉 머묾의 제목이 시작됩니다.
묵상
능력과 환경이 갖추어져도 안내할 가르침이 없다면 어떤 한계가 생길까요? 지금 만날 수 있는 가르침과 스승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으면서도 귀하게 검토하고 배우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요?
기쁨이 잦아들고 치우치지 않는 마음과 알아차림 속에서 편안하게 머무는 셋째 깊은 집중을 밝힙니다.
“기쁨이 사그라들어 … 셋째 깊은 집중에 들어 머문다.”
Pītiyā ca virāgā …pe… ta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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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셋째 깊은 집중을 말하는 문장은 기쁨이 사그라드는 데서 시작해, 되풀이되는 부분을 줄이고 셋째에 들어 머문다는 말로 끝납니다. 생략된 곳에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과 알아차림, 몸으로 느끼는 편안함 등이 있습니다. 앞 단계의 들뜬 기쁨(삐띠)이 사그라든다는 말은, 이 단계에서 마음이 더 고요해진다는 뜻입니다.
묵상
강한 기쁨이 잦아든 뒤에도 더 고요한 편안함이 남았던 순간이 있었나요? 즐거움의 세기가 줄면 곧 잃었다고 느끼는 마음과, 평정 속 편안함을 알아보는 마음은 어떻게 다를까요?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리고 이전의 기쁨과 슬픔도 사라져,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알아차림이 맑은 넷째 깊은 집중에 머무는 것을 밝힙니다.
“편안함을 버리고 … 넷째 깊은 집중에 들어 머문다.”
Sukhassa ca pahānā …pe…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디가 니까야DN 33 상기띠 숫따 (함께 외우기)
배경
넷째 깊은 집중을 말하는 문장은 ‘편안함을 버리고’라는 시작과 넷째에 들어 머문다는 끝만 남기고, 되풀이되는 부분은 줄였습니다. 괴로움을 버리고 이전의 기쁨과 슬픔이 사라집니다. 여기에는 편안하거나 괴로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알아차림이 맑아진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묵상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를 지루함이나 무감각으로만 해석한 적이 있었나요?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면서도 어느 쪽에 끌려가지 않는 평정이 있다면, 그때의 알아차림은 어떻게 다를까요?
인식과 느낌이 완전히 멎는 아홉째 머묾까지 이르는 과정을 마무리하고, 첫째·둘째 깊은 집중에서 각각 멎는 마음 작용을 밝힙니다.
“무언가를 알아본다고도 알아보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알아봄과 느낌이 멎는 상태에 들어 머문다. 점차 멎는 아홉 일이 있다. 첫째 깊은 집중에 든 이에게 감각적 즐거움을 알아보는 마음이 멎고, 둘째에 든 이에게 마음을 대상에 두고 계속 살피는 작용이 멎는다.”
알아본다고도 알아보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알아봄과 느낌이 멎는 상태에 들어 머뭅니다. 이어 점차 멎는 아홉 일이라는 새 목록이 시작되고, 첫째 깊은 집중에서는 감각적 즐거움을 알아보는 마음이, 둘째에서는 대상을 두고 살피는 두 작용이 멎는다고 합니다.
묵상
수행이 무언가를 계속 더하는 일보다 불필요한 움직임이 차례로 멎는 일로 보인다면 어떤 느낌인가요? 지금 이 순간 마음에서 잠시 잦아들 때 더 선명해지는 한 가지 작용은 무엇인가요?
남은 세 가지 무형의 단계에서 앞선 인식이 차례로 멎어 가고, 마지막에는 인식과 느낌이 함께 완전히 멎는다는 것을 밝힙니다.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든 이에게 끝없는 의식의 영역을 알아보는 마음이 멎는다. 알아본다고도 알아보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영역에 든 이에게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을 알아보는 마음이 멎는다. 알아봄과 느낌이 멎는 상태에 든 이에게는 알아봄과 느낌이 멎는다.”
Ākiñcaññāyatanaṁ samāpannassa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ā niruddhā hoti.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ṁ samāpannassa ākiñcaññāyatanasaññā niruddhā hoti.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nnassa saññā ca vedanā ca niruddhā ho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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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 멎음은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서 끝없는 의식의 영역을 알아보는 마음이 멎고, 그 다음 영역에서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을 알아보는 마음이 멎으며, 마지막에는 알아봄과 느낌 자체가 멎는 것입니다. 앞 단계의 대상을 알아보는 마음이 다음 단계에서 멎는 배열입니다. 알아봄과 느낌이 멎는 상태에서는 둘 다 함께 멎는다고 말합니다.
묵상
각 단계가 바로 앞의 중심 인식을 놓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점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끝에서 인식과 느낌이 함께 멎는다는 문장을 자신의 상태와 비교하지 않고 순서의 결론으로 읽으면 무엇이 남나요?
원한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에서부터 점진적으로 마음이 멎어 가는 과정까지, 아홉 개씩 묶인 항목 전체를 부처님께서 바르게 설명하신 것으로 결론짓습니다.
“벗들이여, 이것들이 알고 보시며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시고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아홉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다.”
Ime kho, āvus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nava dhammā sammadakkhā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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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아홉씩 묶은 가르침의 결론입니다. 원한이 생기는 아홉 까닭과 풀어내는 아홉 방법, 존재들의 아홉 거처, 수행의 삶을 살기 어려운 아홉 때, 점차 깊어지는 아홉 머묾과 아홉 멎음을 묶습니다. 그 모두를 알고 보시고 마음을 흐리는 것을 다 끊으셨으며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께서 설명하셨다고 확인합니다.
묵상
아홉 항목들 가운데 원한처럼 일상에 가까운 목록과 인식의 멎음처럼 미세한 목록을 함께 기억하면 어떤 균형이 생기나요? 지금 가장 다시 읽고 싶은 아홉의 목록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열 개씩 묶인 가르침이 무엇인지 먼저 묻고, 수행자에게 스스로 보호막이 되어 주는 열 가지 특성을 소개할 것을 예고합니다.
“열씩 묶은 가르침은 무엇인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되는 열 가지 특성이 있다.”
Katame dasa? Dasa nāthakaraṇā dhamm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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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열씩 묶은 가르침이 무엇인지 묻고, 첫 목록의 제목을 말합니다. 나타까라나(보호해 주는 바탕을 만든다는 뜻)라는 말 그대로, 스스로를 지킬 힘이 되는 열 특성이라는 제목입니다. 아직 열 가지의 이름은 나오지 않으며, 이어지는 대목에서 바른 행실과 배움, 좋은 벗, 충고를 듣는 태도 등이 차례로 나옵니다.
묵상
보호를 외부 조건보다 삶을 받치는 특성으로 본다면 어떤 느낌인가요? 잠시 전체 목록을 떠올려 보아도 좋아요. 열 가지 가운데 지금 이미 힘이 되는 하나와, 주변의 도움을 받아 조금 더 길러 보고 싶은 하나는 무엇인가요?
계율을 잘 지키고 바르게 행동하며, 아주 작은 잘못에서도 위험을 보고 경계하는 것을 첫째 보호 특성으로 밝힙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바르게 살고, 지켜야 할 규칙으로 자신을 지키며, 바르게 행동하고 알맞은 곳을 다닌다. 작은 잘못에서도 위험을 보고 받아들인 규칙에 따라 배운다. 수행자가 이렇게 바르게 살고 자신을 지키며, 바르게 행동하고 알맞은 곳을 다니며, 작은 잘못을 조심하고 규칙에 따라 배우는 것, 이것이 스스로를 지킬 힘이 되는 첫째 특성이다.”
배움을 이루는 둘째 조건을 맺고, 좋은 벗을 사귀는 셋째와 가르침을 인내로 받아들이는 넷째 보호를 밝힙니다.
“벗들이여, 수행자가 많이 배우고 … 바른 견해로 꿰뚫어 아는 것, 이것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된다. 또 수행자에게 좋은 벗, 좋은 동료, 가까이 지내는 좋은 이가 있다. 그런 이들과 함께하는 것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된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는 충고를 들을 줄 알고, 참을성이 있으며, 가르침을 좋게 받아들인다. 수행자가 충고를 듣고 … 가르침을 좋게 받아들이는 것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된다.”
둘째인 많이 배움의 결론 뒤에 셋째와 넷째 특성이 이어집니다. 셋째는 좋은 벗·동료·가까이 지내는 이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충고를 들을 줄 알고 참을성이 있으며 가르침을 좋게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두 특성 모두,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부분을 줄여 다시 확인하며, 스스로를 지킬 힘이 됩니다.
묵상
좋은 벗이 있어도 충고를 들을 준비가 없으면 무엇이 막히나요? 반대로 조언을 받아들이려 해도 신뢰할 벗이 없다면 어떨까요? 두 보호 조건 가운데 지금 더 필요한 도움은 무엇인가요?
공동체의 크고 작은 일을 능숙하게 맡는 다섯째와, 가르침과 수행에 관한 대화를 즐기는 여섯째 보호를 다룹니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는 함께 수행하는 이들의 크고 작은 일을 능숙하고 게으르지 않게 해내며, 어떻게 해야 할지 살펴 일을 하고 이끌 수 있다. 수행자가 그런 일을 … 이끌 수 있는 것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된다. 또 수행자는 가르침을 좋아하고 대화하기 좋으며, 더 깊은 가르침과 훈련에서 크게 기뻐한다. 수행자가 가르침을 좋아하고 … 크게 기뻐하는 것,”
다섯째는 함께 수행하는 이들의 크고 작은 일을 능숙하고 게으르지 않게 해내며 방법을 살피고 일을 이끌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섯째는 가르침을 좋아하고 대화하기 좋으며 깊은 가르침과 훈련에서 크게 기뻐하는 태도입니다. 앞의 일은 실제 공동체의 일을, 뒤의 일은 배우고 이야기하는 기쁨을 다룹니다.
묵상
함께 지내는 이들의 크고 작은 일을 알아서 돕는 능력과 깊은 대화를 기뻐하는 태도 중 어느 쪽이 더 익숙한가요? 다른 한쪽을 부담 없이 보탠다면 관계가 어떻게 달라질까요?
예전의 말과 행동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아홉째와, 생겨나고 사라지는 이치를 꿰뚫어 괴로움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열째 보호를 다룹니다.
“또 벗들이여, 수행자는 알아차리며, 뛰어난 알아차림과 능숙함으로 오래전에 한 일과 한 말을 기억하고 되새긴다. 수행자가 알아차리고 …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 이것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된다. 또 수행자는 지혜로워서 생겨남과 사라짐을 보고, 고귀하며 꿰뚫어 알고 괴로움을 바르게 끝내는 지혜를 갖춘다. 수행자가 지혜롭고 … 괴로움을 바르게 끝내는 것, 이것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된다.”
아홉째는 뛰어난 알아차림과 능숙함으로 오래전에 한 일과 한 말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일입니다. 열째는 생겨남과 사라짐을 보며 괴로움을 바르게 끝내는 지혜입니다. 두 특성 모두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부분을 줄여 다시 받으며, 스스로를 지킬 힘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열째 지혜는 고귀하고 꿰뚫어 아는 성질을 지닙니다.
묵상
오래된 일을 기억하는 힘이 후회나 집착이 아니라 배움의 보호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기억한 경험을 생겨남과 사라짐의 관점으로 살피면 그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나요?
까시나의 남은 셋은 흰색, 공간, 의식입니다. 흰색과 공간은 생략표로 줄고, 의식에는 위·아래·가로와 나뉘지 않음, 끝없음이 다시 온전히 나옵니다. 다음에는 해로운 행위의 열 길이 이어집니다. 살아 있는 것을 죽임·훔침·잘못된 성행위라는 몸의 셋, 거짓말·사이를 갈라놓는 말·거친 말·쓸데없는 말이라는 말의 넷, 탐냄·악의·그릇된 견해라는 마음의 셋입니다.
묵상
해로운 열 행위를 몸 세 가지, 말 네 가지, 마음 세 가지로 나누면 어느 통로의 영향이 가장 자주 보이나요? 자신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오늘 알아차릴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앞서 나온 해로운 행위 열 길과 짝을 이루는 이로운 행위 열 길입니다. 몸의 셋과 말의 넷은 각각 해로운 일을 삼가는 형태이고, 마음의 셋은 탐내지 않음·악의를 품지 않음·바른 견해입니다. 악의를 품지 않음은 악의가 없다는 뜻이며, 세 가지 몸, 네 가지 말, 세 가지 마음이라는 수는 그대로입니다. 끝에는 고귀한 이들이 머무는 열 자리라는 다음 목록의 제목이 시작됩니다.
묵상
하지 않는 삼감과 마음에 적극적으로 기르는 선의는 어떻게 서로 보완하나요? 열 항목 가운데 행동 하나와 마음 하나를 짝지어 살핀다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모습이 보이나요?
다섯 가지 버림과 여섯 가지 갖춤, 한 가지 지킴과 네 가지 의지, 그리고 견해·탐색·의도·몸·마음·지혜라는 열 가지 특성을 개괄합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다섯 가지를 버리고, 여섯 가지를 갖추고, 한 가지로 마음을 지키고, 네 가지를 헤아려 쓴다. 제각기 붙들던 진실을 물리치고,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일을 끝냈으며, 생각이 흐리지 않고, 몸의 작용이 고요하다. 마음이 잘 풀려났고 지혜로도 잘 풀려났다. 벗들이여, 다섯 가지를 버렸다는 것은 무엇인가?”
고귀한 이들이 머무는 열 자리를 먼저 한꺼번에 소개합니다. 다섯 가지를 버림, 여섯 가지를 갖춤, 한 가지로 마음을 지킴, 네 가지를 헤아려 씀, 제각기 붙들던 진실을 물리침, 찾아 헤매는 일을 끝냄, 흐리지 않은 생각, 고요한 몸의 작용, 잘 풀려난 마음, 잘 풀려난 지혜입니다. 안에 또 다른 수가 들어가지만 큰 목록은 열 가지입니다. 끝에는 첫째인 다섯 가지 버림을 묻습니다.
묵상
열 거처의 전체 지도에서 버림, 갖춤, 지킴, 의지 가운데 어느 움직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세부 내용을 보기 전, 마음의 해방과 지혜의 해방이 따로 놓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감각 욕망을 비롯한 다섯 가지 방해 요소를 버린 뒤, 눈으로 형상을 볼 때 기쁨도 슬픔도 없이 머무는 첫째 요소를 밝힙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감각적 욕망, 악의, 나른함과 졸음, 들뜸과 후회, 의심을 버렸다. 이렇게 다섯 가지를 버렸다. 여섯 가지를 갖추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벗들이여, 눈으로 형상을 보고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으며,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분명히 알고 지낸다.”
첫째의 다섯은 감각적 욕망, 악의, 나른함과 졸음, 들뜸과 후회, 의심입니다. 다섯을 버렸다고 결론지은 뒤, 둘째인 여섯 가지 갖춤을 묻습니다. 첫 경우는 눈으로 형상을 보고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으며,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귀·코·혀·몸·마음의 다섯 감각에서도 같은 태도가 이어집니다.
묵상
다섯 가지를 버렸다는 설명 다음에, 눈으로 형상을 보아도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는 항목이 나와요. 버린 것과 갖춘 것을 나란히 읽으면 수행자의 태도가 어떻게 그려지나요?
귀로 소리를 듣는 문장 뒤에는 생략표가 있고, 마지막 마음으로 떠오른 것을 아는 경우는 다시 온전히 나옵니다. 마음으로 알 때도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알아차리고 분명히 압니다. 이렇게 여섯 가지를 갖추었다고 결론지은 뒤, 한 가지로 마음을 지키는 셋째로 넘어갑니다. 그 하나는 알아차림으로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묵상
여섯 감각 가운데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을 가장 빨리 일으키는 문은 어디인가요? 모든 반응을 막으려 하지 않고 알아차림 하나로 마음을 지킨다면, 먼저 알아볼 수 있는 신호는 무엇인가요?
하나의 지킴을 맺고, 헤아려서 사용하고 견디고 피하고 없애는 네 가지 의지를 밝힌 뒤 견해를 묻습니다.
“벗들이여, 이렇게 한 가지로 마음을 지킨다. 네 가지를 헤아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자는 헤아린 뒤 어떤 것은 사용하고, 어떤 것은 견디고, 어떤 것은 피하고, 어떤 것은 떨쳐 낸다. 이렇게 네 가지를 헤아려 쓴다. 제각기 붙들던 진실을 물리쳤다는 것은 무엇인가?”
알아차림으로 마음을 지키는 일이 셋째라고 결론지은 뒤, 넷째인 네 가지 의지를 묻습니다. 수행자는 헤아린 뒤 어떤 것은 사용하고 어떤 것은 견디고 어떤 것은 피하고 어떤 것은 떨쳐 냅니다. 같은 ‘헤아린 뒤’라는 말이 네 동사 모두에 걸립니다. 끝에는 네 가지 의지의 결론과 제각기 붙들던 진실을 물리쳤다는 다섯째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묵상
지금 마주한 어려움은 사용하고 견디고 피하고 없애는 네 대응 가운데 무엇을 요구하나요? 성급히 하나로 정하지 않고 충분히 헤아린다면, 안전하고 알맞은 선택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여러 수행자가 저마다 고집하는 진실을 밀어내고 내려놓는 일곱 가지 표현으로, 다섯째 거처를 밝힙니다.
“벗들이여, 여러 수행자와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들(브라흐마나)이 저마다 진실이라고 붙들던 것을 수행자는 모두 밀어내고, 떨쳐 내고, 내던지고, 버리고, 놓고, 포기하고, 내려놓았다. 이렇게 제각기 붙들던 진실을 물리쳤다.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일을 끝냈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섯째는 여러 수행자와 브라흐마나가 저마다 진실이라고 붙들던 것을 물리치는 일입니다. 밀어내기, 떨쳐 내기, 내던지기, 버리기, 놓기, 포기하기, 내려놓기라는 일곱 동사가 겹칩니다. 저마다 옳다고 붙들던 주장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이 설명 뒤에는 찾아 헤매는 일을 끝냈다는 여섯째의 질문이 시작됩니다.
묵상
어떤 관점을 사실 그 자체라기보다 내가 붙든 해석이라고 알아차린 적이 있나요? 일곱 가지 놓는 표현 가운데 지금 가장 부드럽게 다가오는 하나는 무엇이며, 왜 그렇게 느껴지나요?
감각적 즐거움과 존재와 수행에 대한 탐색을 내려놓고, 감각적이거나 악의적이거나 남을 해치려는 의도를 버리는 대목입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감각적 즐거움을 찾는 일과 계속 존재하기를 찾는 일을 버리고, 수행의 삶을 찾는 일도 가라앉혔다. 이렇게 찾아 헤매는 일을 끝냈다. 생각이 흐리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자는 감각적 즐거움을 향한 생각, 악의를 품는 생각,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버렸다. 이렇게 생각이 흐리지 않다. 몸의 작용이 고요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섯째는 감각적 즐거움을 찾는 일과 계속 존재하기를 찾는 일을 버리고, 수행의 삶을 찾는 일도 가라앉힌 상태입니다. 앞의 둘은 완전히 버려진 것이고, 수행의 삶을 찾는 일은 가라앉아 잦아든 것입니다. 일곱째는 감각적 즐거움, 악의, 해침을 향한 생각을 버려 생각이 흐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마지막에 여덟째인 몸의 작용이 고요하다는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묵상
무언가를 찾는 일이 필요해서 끝나는 때와 지쳐서 포기하는 때는 어떻게 다를까요? 감각적 의도·악의·해치려는 의도 가운데 하나가 잦아들면 마음의 방향이 어떻게 맑아질 수 있나요?
즐거움과 괴로움을 넘어서 몸의 작용을 고요히 하고, 마음이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뿌리에서 풀려나는 것을 밝힙니다.
“벗들이여, 수행자는 편안함과 괴로움을 버리고 이전의 기쁨과 슬픔도 사라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알아차림이 맑은 넷째 깊은 집중에 들어 머문다. 이렇게 몸의 작용이 고요하다. 마음이 잘 풀려났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자의 마음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풀려났다.”
여덟째는 편안함과 괴로움을 버리고 이전의 기쁨과 슬픔도 사라진 넷째 깊은 집중입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알아차림이 맑아집니다. 이를 몸의 작용이 고요한 상태라고 결론짓습니다. 아홉째는 마음이 탐냄·성냄·어리석음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원문은 마음의 해방을 세 대상에 대해 각각 밝힙니다.
묵상
감정의 파동이 가라앉는 고요와 욕심·성냄·어리석음에서 마음이 풀리는 자유는 어떻게 이어질까요? 자신의 상태를 평가하지 않고, 셋 가운데 잠시 약해질 때 생기는 여백을 알아볼 수 있나요?
성냄과 어리석음도 각각 완전히 없애어 다시 생기지 않음을 알고, 지혜로 해방되었음을 맺는 대목입니다.
“‘내 성냄은 버려졌고, 뿌리째 끊겼으며, 다시 자라지 못할 야자나무 밑동처럼 되었다. 없어져서 앞으로 다시 생기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내 어리석음도 버려졌고, 뿌리째 끊겼으며, 다시 자라지 못할 야자나무 밑동처럼 되었다. 없어져서 앞으로 다시 생기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지혜로 잘 풀려났다. 더 배울 것 없는 이의 열 특성은…”
탐냄에 이어 성냄과 어리석음도 각각 같은 단절로 설명합니다. 버려짐, 뿌리째 끊김, 야자나무 밑동처럼 됨, 없어짐, 앞으로 다시 생기지 않음이 두 대상에 모두 반복됩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지혜로 잘 풀려난 상태라고 결론짓고, 더 배울 것 없는 이의 열 특성이라는 다음 목록의 제목으로 넘어갑니다.
묵상
성냄과 어리석음을 각각 따로 들어 같은 단절을 온전히 되풀이하는 데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세 뿌리를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을 때, 서로 다른 움직임과 결과가 어떻게 더 분명해지나요?
바른 견해부터 바른 앎과 바른 풀려남에 이르기까지, 더 배울 것이 없는 수행자의 열 특성을 열거하며 열씩 묶은 단락을 맺습니다.
“더 배울 것 없는 이의 바른 견해, 바른 뜻,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 바르게 힘씀,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 바른 앎, 바른 풀려남이다. 벗들이여, 이것들이 알고 보시며 완전히 깨달은 이(아라한)이시고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열씩 묶어 바르게 설명하신 가르침이다.”
더 배울 것 없는 이의 열 특성은 바른 견해·뜻·말·행동·생계·힘씀·알아차림·집중·앎·풀려남입니다. 앞의 여덟은 여덟 갈래 길과 같은 자리에 있고, 끝에 앎과 풀려남이 더해집니다. ‘더 배울 것 없음’은 수행을 마친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지막에는 부처님을 알고 보시고 마음을 흐리는 것을 다 끊으셨으며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분이라고 다시 부릅니다.
묵상
여덟 갈래의 길에 바른 앎과 바른 해방이 더해진 순서는 무엇을 보여 주나요? 길을 걷는 요소와 그 길의 결실을 알고 누리는 요소를 구별하면, 수행의 완성이 어떻게 보이나요?
사리뿟따는 모두 함께 외우고 다투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 목적은 수행의 삶이 오래 이어지고 오래 남아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따뜻한 마음으로 신과 사람에게 이익과 도움과 행복을 주는 목적도 함께 밝힙니다. 숫자별 목록을 공동체가 보존해야 하는 이유를 이 결론이 직접 말합니다.
묵상
함께 기억하는 일이 다툼을 낳지 않고 오히려 오래가는 수행과 연민으로 이어지려면 무엇이 중심에 있어야 할까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을 전할 때 상대의 이익과 행복을 어떻게 함께 살필 수 있을까요?
사리뿟따가 하나부터 열까지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말하고 함께 외우자고 권한 뒤, 쉬고 계시던 부처님께서 일어나 직접 말씀하십니다. 사리뿟따의 이름을 부르며 “훌륭하다”를 두 번 되풀이합니다. 다음 문장에서 부처님은 수행자들에게 공동 암송의 설명을 잘 들려준 일을 칭찬하십니다.
묵상
긴 설명을 마친 뒤 존중하는 이에게 이름으로 불리며 두 번 인정받는 장면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누군가의 수고를 칭찬할 때 무엇을 잘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면 듣는 사람에게 어떤 차이가 생길까요?
부처님은 사리뿟따가 수행자들에게 함께 외우는 방식에 관한 설명을 들려준 일을 칭찬하십니다. 뒤이어, 지금까지의 긴 설명은 사리뿟따가 했으며 스승도 이에 동의했다고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수행자들은 만족하여 사리뿟따의 말을 기뻐합니다. 함께 외우고 다투지 말자는 권고로 목록을 맺은 뒤, 이 결말은 청중이 그 말을 받아들였음을 전합니다.
묵상
설명한 사람과 그 내용을 확인한 스승, 듣고 기뻐한 사람들이 함께 있는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배움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들려준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던 때를 떠올릴 수 있나요?